도시의 밤하늘에도 한 무리의 고마운 달빛이 쏟아집니다.

보름이 가까웠나 봅니다.

까마득한 기억의 과거가 또랑또랑 내 눈을 응시하는 듯하여 살짝 부끄러워집니다.

'잘 사느냐? 제대로 살고 있느냐?'

과거의 나는 그렇게 묻고 있습니다.

 

달빛 속에서의 이 우연한 만남.

그렇습니다.

시간의 길 위에서 돌부리에 걸린 듯한 이 우연이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를 대면하게 합니다.

 

떨어지는 별똥별을 향해

추수가 끝난 논바닥을 발이 젖는 줄도 모르고 달려가던,

얼기설기 엮은 수수깡 울 안에 앉아

비껴가는 겨울 칼바람에 외려 안온함을 느끼던,

저수지가 큰 외눈 천천히 닫아거는 그 저물녘에

조금 더 오래 머물러야 했음을

서둘러 어른이 된 오늘에야 알았습니다.

 

아이의 눈은 오직 아이였을 때에만

아이의 귀는 오직 아이였을 때에만

아이의 심장은 오직 아이였을 때에만

그 순결의 밤을 지킬 수 있음을

어른이 된 오늘에야 알았습니다.

 

보름이 가까웠는지

무료한 달빛이 어제의 고요를 깨우고 있습니다.

 

  한 민족과 한 국가가 성숙하기까지는 숱한 시련과 반성, 그리고 성찰(省察)의 교훈이

  퇴적(堆積)되어야 한다. - A.J. 토인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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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 - 위화, 열 개의 단어로 중국을 말하다
위화 지음, 김태성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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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좋아하는 사람치고 작가 '위화'를 모르는 사람은 드물지 싶다.  <허삼관 매혈기>를 비롯하여 <형제>, <무더운 여름>, <인생> 등 많은 작품이 있는데 나는 그 중 <인생>을 감명깊게 읽었다.  물론 <허삼관 매혈기>도 좋았다.  그의 작품을 읽고 있노라면 두보의 시가 떠오르기도 한다.  문체가 시적이라는 얘기는 아니다.  그의 짧고 명료한 문체에서 유유자적하는 도인의 시선처럼 어느 것에도 집착하지 않고 세상을 관조적으로 바라보려는 작가의 인생관을 엿볼 수 있다.  세상에 소설가는 무수히 많다.  그러나 독자의 마음 언저리에 닿을 수 있는 작가는 많지 않다.  위화의 작품이 인기있는 이유는 삶에 대한 그의 태도가 독자의 마음을 움직이기 때문인 듯싶다.

 

2009년 미국 퍼모나 대학에서 있었던 중국에 대한 강연을 준비하며 썼다는 위화의 신작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를 읽었다.  중국 사회에 대한 문제의식과 비판정신을 '인민', '영수'. '독서', '글쓰기', '루쉰' 등 저자가 가려 뽑은 10개의 단어에 담아 문화 대혁명 이후 급격하게 변하고 있는 중국의 모습을 파헤치고 있다.  그것은 어쩌면 작가가 지적하는 바와 같이 국가로서의 중국이 변화하는 만큼 그 안에 사는 민중의 삶도 변하고 있음을 암시하는 것일 수도 있다.  작가의 말을 인용하여 한 마디로 표현하자면 "이 책에서 나는 중국의 고통을 쓰는 동시에 나 자신의 고통을 함께 썼다."가 될 것이다.

 

"타인의 고통이 나의 고통이 되었을 때, 나는 잔정으로 인생이 무엇인지, 글쓰기가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나는 이 세상에 고통만큼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 쉽게 소통하도록 해주는 것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고통이 소통을 향해 나아가는 길은 사람들의 마음속 아주 깊은 곳에서 뻗어 나오기 때문이다."   (P.353)

 

돌이켜 보면 나는 중국의 문화 혁명기에 버금가는 산업화의 시기에 자란 탓에 작가의 이야기가 남의 얘기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말로만 듣던 5.18 만주화 운동, 외국 기자가 몰래 촬영한 그때의 실상을 영상으로 접했을 때 나는 충격과 함께 그 잔인함에 경악했었다.  교정에는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자보가 연일 나붙고, 학생회관 벽면을 장식하던 걸개그림과 교문을 사이에 두고 치열하게 오가던 화염병과 최루탄, 피 흘리며 끌려가는 학생들, 학사주점의 어두침침한 조명 아래서 구슬프게 들려오던 민중가요, 국가 권력의 강압에 마냥 무기력하기만 했던 학생들의 한숨 소리와 막걸리잔 부딪는 소리...

 

그리 오래 전 일도 아닌데 사람들의 기억은 세월보다 빨리 잊혀진다.  이런 현상은 급격한 경제성장을 이룩한 중국과 우리나라에서 어쩌면 필연적일지도 모른다.  더불어 그 시대를 살아온 사람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잃고 시대의 격랑에서 잃어버린 소중한 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우리가 지켜야 할 것, 세월이 변해도 영원히 변하지 않는 것, 우리는 그것을 잃어가고 있다.  작가는 그것에 대한 안타까운 심정을 아프게 쓰고 있는 것이다.

 

책을 덮고 조용히 생각에 잠겼을 때 문득 떠오르는 시가 있다.  이화인 시인의 시 한 수.  위화 작가의 <사람의 목소리는 빛보다 멀리 간다>를 읽은 독자라면 나즉나즉 읊어보면 좋을 듯하다.

 

길 위에서 길을 잃다/ 이화인

 

가끔은, 아주 가끔씩은

혼자 울고 싶을 때가 있다

 

남겨진 한 뼘의 간격조차 좁히지 못하고

스쳐 지나쳐야만 했던 사람들

시선 속에서 머무르지 못하고

한발 비켜서야만 했던 일들

문득 작은 파문으로 밀려와

흔들릴 때마다, 가끔은

아주 가끔씩은

혼자 울고 싶을 때가 있다

 

산그늘이 어둠보다

한걸음 먼저 찾아드는 산방에서

혼자 살아갈 수 없음을 잘 알면서도

먼지와 땟국에 물들지 않고 산다는 것이

더 어렵다는 것을 문득 깨달았을 때

 

가끔은, 아주 가끔씩은

혼자 울고 싶을 때가 있다

 

내게 주어진 길을 가면서도

진정, 이 길이

내가 가야할 길인지 내게 되묻곤 한다

가끔은, 아주 가끔씩은

길을 가면서도 길 위에서 길을 잃고

길 위에서 길을 찾아 헤매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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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대의 여성 피의자와 초임 검사의 스캔들이 연일 언론에 회자되고 있다.

검사의 비리가 어제 오늘의 얘기는 아니지만 그것은 세간 사람들의 입방아에만 오르내릴 뿐 정식으로 사건화된 적도 없었고 그로 인해 처벌을 받거나 책임을 지고 물러나는 사람도  없었다.  적어도 내가 알기로는 그랬다.  그런데 이 무소불위의 권력도 점차 시들어가는지 최근에는 여기 저기서 검사의 비리 문제가 불거져 나오고 있고 비등한 여론 탓인지 검사가 구속되는가 하면 직위에서 자진하여 물러나는 사람도 있었다.  세상은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다.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사건의 진위여부가 궁금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문제라면 나는 관심조차 없다.  검찰청에 근무하는 수사검사의 인권의식이 얼마나 높아졌는지는 모르겠으나 8,90년대의 검사들은 그야말로 안하무인이었다.  피의자가 일단 검사실에 호출되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강압적이고 공포스런 분위기에서 조사를 받아야만 했었다.  언제였는지 정확한 날짜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나는 절도 혐의로 끌려온 어느 노인이 새파란 검사로부터 벽 보고 꿇어앉으라는 명령을 듣고도 분노하기는커녕 파랗게 질려 검사의 명령에 고분고분 따르는 모습을 내 눈으로 직접 목격하기도 했었다.  결국 인권의 향상은 제도의 문제에 앞서 사람의 의식이 각성되어야 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나는 검찰개혁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우리나라와 같은 경쟁적 교육구조에서 성장한 사람들은 제도가 조금 바뀐다고 하여 배려나 관용, 정의와 사랑 같은 정신적 사고가 깊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서론이 길었다.  그럼에도 내가 이 글을 쓴 이유는 뉴스에서 보도되었듯이 30대의 초임 검사가 10살 이상 연상인 40대의 여성 피의자를 상대로 부적절한 관계를 가졌다는 사실이다.  얼핏 생각하면 뭐 하나 부족할 것 없어 보이는 검사가 그것도 젊은 여성이 아닌 40대의 피의자를 상대로 관계를 맺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맘만 먹으면 젊고 매력적인 여자와 정상적(그가 유부남이라면 어떤 경우에도 정상적이지 않겠지만)인 관계를 가질 수 있을 텐데 검사로서의 첫발을 내디딘 시점에서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하필이면 왜 그 여인을 탐했을까? 하는 다분히 속물적인 호기심이 강하게 일었다.  그 검사나 여성 피의자를 비하하거나 인신공격할 의도는 전혀 없다.  다만 이것은 내 개인적인 궁금증일 뿐이다. 

내가 제시한 문제의 해답은 당사자만이 대답할 수 있겠지만 내가 추측하기로는 그 여성이 상당히 매력적이었거나, 해당 검사가 성도착증적 병리 현상을 갖고 있거나, 그도 아니면 지금껏 내려온 관행을 초임 검사가 굳게 믿었거나일 것이다.  모르긴 몰라도 그 검사는 자신의 행위가 세간에 알려질 수 있다는 가능성조차 믿지 않았을 것이다.  감히(?) 대한민국 검사에게 그깟(?) 일로 책임을 묻는 경우는 지금까지 없었으니까.

 

어제는 올해 수능을 본 아이들 중 두 명의 남학생이 내 숙소를 방문했었다.  10시도 넘은 늦은 시각이었다.  수능이 끝나자마자 아르바이트를 시작해서 첫월급을 받았다고 했다.  내 숙소에서 공부하는 후배들도 생각났고, 1년 동안 자신들의 공부를 도와준 나도 생각났다는 거였다.(짜식들, 기특하기는)  손에는 먹을 게 잔뜩 들려 있었다.

 

어제 그 애들이 내게 한 질문은 '사회 생활을 하면서 만나는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을 믿어야 하는가?  그리고 그 기준은 무엇인가?'하는 것이었다.  나는 위에 적은 검사의 스캔들을 접하고 내가 느꼈던 속물적 궁금증을 들먹이며 그들에게 말했다.  자신의 단점이나 과오를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믿을 만한 사람이라고.

 

나는 이번 대선에 그런 사람에게 투표할 생각이다.  지난 정권의 잘못을 과감히 파헤치고 죄가 있다면 엄격하게 책임을 지도록 하는 그런 사람을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 뽑고 싶은 것이다.  해방 이후 수많은 대통령을 우리 손으로 뽑았지만 이제껏 그런 사람은 없었다.  혹시 모를 자신의 죄과도 들추어질까봐 지난 정권의 과오는 언제나 슬쩍 덮어주고 지나갔었다.  그것을 '화해와 용서'라는 포장으로 감싼 채.

 

우리는 그런 과거 때문에 우리 사회의 지도층에 있는 사람들의 공로조차 불신하게 되었다.  이러한 불신 풍조는 사회 전반에 팽배하다.  허물을 감춘 채 공로만 말하는 사회.  주변에서 그런 사람을 만난다면 그들을 진심으로 믿을 수 있을까?  '공은 공이고 과는 과다.'라는 명제를 진심으로 믿게 하려면 자신의 잘못을 솔직하게 고백하는 것이 먼저다.

 

알랭 드 보통은 자신의 저서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에서 이렇게 말했다.

"만사가 우리에게 얼마나 유리하게 돌아가는지를 자랑할 때, 우리는 정작 다른 사람에 대해서는 둔감하게 된다.  우정이라는 것은 우리가 두려워하는 일이나 후회하는 일에 대해서조차도 감히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때에만 비로소 자라날 기회를 얻는다.  그 외의 다른 이야기는 단지 쇼맨십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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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톤엔젤
마가렛 로렌스 지음, 강수은 옮김 / 도서출판 삼화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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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요즘 언론에서는 곧 있을 대통령 선거 보도로 떠들썩하다.

후보들의 일정에서부터 그들의 말, 표정 등 세밀한 것에 이르기까지 각 언론사의 취재진들은 이런 것도 기삿거리가 되나, 싶은 것들도 앞다퉈 보도하곤 한다.  덕분에 정작 알고 싶은 기사는 항상 뒷전으로 밀린다.  투표의 주인공이 될 국민들은 다들 시큰둥한 눈치인데 기자와 정치꾼들, 그 옆에서 기생하는 온갖 시정잡배들만 한껏 들뜬 분위기다.  12월 대통령 선거일까지는 오직 그들만의 축제요, 그들만의 전쟁이 이어질 것이다.  내가 소중히 여기는 아름다운 이야기, 모든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만한 작은 이야기들은 눈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다.

 

돌아가신 할머니를 생각하며 <스톤엔젤>을 읽었다.  캐나다가 사랑하는 여성 작가 마가렛 로렌스의 대표작이라고 한다.  나는 사실 어려서 읽은 <빨간 머리 앤>을 빼면 캐나다 출신 작가의 작품은 읽은 적이 없다.  그럼에도 책은 술술 읽혔다.  무엇보다 자극적이거나 가볍지 않아서 좋았다.  지독히 자극적인 소재와 스토리 전개, 감상적인 문체가 주류를 이루는 요즘의 소설은 디지털 시대를 살아온 젊은 세대에게는 평범하거나 익숙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날로그 시대의 어린 시절을 보냈던 기성세대에게는 목에 걸린 가시처럼 불편하다.

 

소설이 그 시대의 반영물이라고 할지라도 '영혼의 정화'를 목표로 삼지 않는다면 그것은 천편일률적으로 찍어 낸 공산품에 지나지 않는다.   

이 책의 주인공인 헤이거는 아흔 살이 넘은 노인이다.  그러나 우리가 보편적으로 기대하는 푸근하고 넉넉한 인상의 할머니는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의 모습이다.  지극히 편협하고, 독선적이며, 고집이 센 노인이다.  아들 마빈과 며느리 도리스의 보살핌을 받으며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그녀는 과거를 향해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든다.  인생의 황혼기에 이르면 누구나 그러하듯이.

 

"이제 나는 걷잡을 수 없이 추억에 빠진다.  자주 이러지는 않는다.  아니, 어쨌든 그렇게 자주 하지는 않는다.  어떤 이들은 노인이 과거에서 산다고 말하지만, 허튼소리지.  요즘 나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하루하루를 진귀하게 여기고 있다.  마치 처음으로 민들레를 볼 때 잡초 같은 면을 잊어버리고 그저 꽃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감탄하듯, 오늘 하루를 꽃병에 꽂고 감상할 수 있을 것 같다."   (P.10)

 

내가 기억하는 할머니도 그랬다.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고 모진 고생을 하며 2남 1녀의 자식을 키우셨던 할머니는 결코 당신이 힘들어 하던 과거를 말하지 않았다.  차멀미가 심하여 버스를 타지 못하던 할머니는 여든이 가까운 연세에도 신대방동에서 용산을 오직 자신의 두 발로 걸어다녔다.  경제적으로 무능했던 당신의 아들을 보며 자신의 탓인 양 가슴을 치셨다.  할머니는 잘못을 보상이라도 하려는 듯 만류에도 불구하고 고집스레 마늘을 까셨다.  그렇게 푼푼이 모은 돈으로 장성한 손주들에게 용돈을 쥐어주셨고 매년 거르지 않고 다니셨던 어느 사찰의 부처님께 손주들의 미래를 축원하셨다.  딱 삼 일만 앓고 죽게 해달라는 당신의 염원과 함께.  그 기도가 하늘에 닿았는지 할머니는 단 하루도 앓지 않고 돌아가셨다.

 

헤이거의 유년시절은 불행했다.  자신을 낳다가 죽은 어머니, 자수성가한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던 두 오빠, 자신에게 쏟는 아버지의 기대.  어머니의 묘지 앞에 세워진 '천사상(stone angel)'을 보며 자란 헤이거는 아버지가 세워 놓은 그 천사상처럼 자신도 아버지의 체면과 위신을 세우기 위한 도구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꼭두각시로 사는 삶에서 벗어나고자 그녀가 선택했던 결혼.  남편 브램은 거칠고 무례한 사람이었다.  더구나 한 번 결혼하였다가 사별한 남자였다.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선택한 결혼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헤이거의 아버지는 죽는 날까지 그녀를 용서하지 않았다.

 

"아버지의 유언장은 벽돌집의 내용물을 어떻게 처분하라고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았다.  어쩌면 아버지는 이 이상 나와 화해하려고 노력할 수 없으셨던 건지도 모른다.  하지만 돈과 부동산에 대한 구체적 지시사항은 있었다.  그 중 일부는 아버지가 우아한 영원의 궁궐에서 지상을 내려다보셨다가 자기 무덤이 노란 구륜앵초에 뒤덮인 걸 보고 모욕감에 젖지 않아도 되도록 가족 묘지를 돌보는 영구 관리비가 되었다.  남은 돈은 모두 시에 환원되었다."   (P.82)  

 

헤이거는 두 아들을 두었다.  마빈과 존. 둘째 아들 존은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르고 자랐던 친구 로즈의 딸과 결혼하려 했다.  이들의 결혼을 반대했던 헤이거와 그 두 사람의 죽음.  헤이거는 몸도 마음도 자신의 의지대로 움직일 수 없는 나이에 이르러 그들을 그리워 한다.  자신의 마음과 다르게 늘 엇나가기만 했던 그녀의 인생.  환갑이 넘은 아들 내외가 자신을 돌보는 것이 힘들어 요양원에 들어가게 된 헤이거는 그제서야 그 모든 것이 또한 자신에게 주어진 진정한 삶의 모습이었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우리가 바라는 삶의 모습은 궁극적으로 신이 바라는 것과는 판이하게 다른 것임을 느낄 때가 있다.  그러나 편린처럼 흩어진 삶의 조각들이 하나하나 제자리를 찾고 우리가 죽는 순간에 보게되는 완성된 삶의 모습에서 바라볼 때 어느 순간에 가졌던 자신의 마음이나 행동이 그럴 수밖에 없었음을 인정하게 된다.  그때 우리는 비로소 자신의 삶에 대한 원망이나 분노에서 벗어나 객관적인 당위성과 진정성을 획득할 수 있으며 그것에 깊이 감사하게 된다.  

 

"나는 누워서 내가 지난 90년 동안 했던 진정으로 자유로운 행동을 떠올려보려고 애쓴다.  그렇게 여겨질 수 있는 일이라고는 최근의 두 가지 일밖에는 떠오르지 않는다.  하나는 농담이었다.  하지만 이는 다른 여느 승리와 마찬가지로 치열한 전투 끝에 쟁취한 전리품이 하찮아 웃을 일이 된 것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거짓말이었다.  그렇지만 거짓말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  이 말은 적어도, 드디어 일종의 사랑이라 할만한 마음으로 한 말이었으니까."   (P.377)

 

나는 지금도 꿈결처럼 나의 할머니를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기도한다.

삶이 이어지는 어느 한 순간에 주관적인 선악의 판단으로 내 자신이 요동치지 않게 하소서.  오직 내 마지막 순간에 기꺼운 마음으로 감사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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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고 싶은 책의 목록을 빼곡히 적다 보면 내가 참 바쁜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왜냐하면 마음 속에는 그 많은 책들을 품고, 그저 동경하며, 이제나 저제나 하며 그날(올지 안 올지 알 수 없는)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기 때문이지요.  독서는 우선순위의 맨 아랫줄을 차지하는 까닭에 오늘도 나는 그 목록만을 만지작거리며 한참을 서성입니다.  어느덧 습관으로 굳어버린 빛 바랜 목록들이 늦가을의 바람에 풀풀 날릴 때면 잊혀진 연인을 기다리듯 '무작정 기다리는' 대상이 나인지, 책인지, 책의 목록인지, 또는 그 모든 것인지 알 수 없는 지경에 빠지곤 합니다.

 

연약한 가을이 아파트 공사현장의 황폐한 벌판에서 살얼음을 걷듯 조심스럽습니다.

천변의 무성한 억새 위론 가을 햇살이 폭포수처럼 쏟아집니다.   나는 그 길을 오래도록 걸으며 새책의 첫장을 넘겼을 때의 먼 기억을 떠올립니다.  햇사과의 상큼한 육즙이 가슴을 다 적실 듯하던 그 가을의 어느 날이었겠지요.  어쩌면 지금처럼 가을의 끝자락, 또는 겨울의 처음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람이 숨어 드는 억새풀밭에 누워 한나절 책을 읽고, 햇살에 겨워 스르르 눈이 감겼었지요.  서걱이는 바람이 자장가처럼 길게 흐르고 그때의 하늘은 눈부시게 푸르렀습니다.

 

그리움이 밀려옵니다.

나를 찾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릴 듯하고, 천진했던 나를 하마면 잡을 듯 가깝습니다.

문득 파스칼 키냐르의 <은밀한 생>의 한 구절이 생각납니다.

 

"책의 지면이 신성한 영토인 까닭은, 그 위를 흐르는 공기가 그것을 읽게 만들고, 일상적인 방의 구태의연한 색깔을 단번에 영원히 바래게 하기 때문이다.  책의 지면은 셀 수 없는 시간이고, 그 시간의 흐름 자체는 붙잡을 수 없어서 한꺼번에 천년, 백년, 나이, 날짜, 시간을 저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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