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집에서 나올 때 어찌나 미끄럽던지...

그동안 내렸던 눈이 채 녹지도 않았는데 그 위로 비가 내려 얼어 붙자 인도의 보도블럭은 한순간에 온통 빙판으로 변해버렸다.  사람들은 다들 엉금엉금 조심스레 걷는데도 미끄러지는 사람들이 여기 저기서 보였다.

 

김소연의 <마음사전>을 읽다가 맘에 드는 구절이 있어 옮겨 적는다.

 

감격이란, 세상 모든 것들은 저만치에 있고, 오직 자기 자신과 대상과의 관계에만 몰입할 때에 더 강하게 찾아오는 감정이다.  스포츠는 신기록과 우승이라는 대상이 눈앞에 있으며, 종교는 신이라는 궁극적인 존재가 머리맡에 있다.  그토록 가깝지만 손에 쉽게 닿지 않는다는 것에 우리는 이토록 감격스러워한다.  이처럼 대상과 나 이외의 것들은 안중에 없는 상태가 바로 청춘이다.  언제나 젊고 패기만만하며 자신이 젊다는 것에 한하여는 믿음이 굳건하고, 젊은 혈기와 젊음의 순수함은 매순간을 신기록을 세우듯 살아간다.  또한 매순간을 신의 뜨거운 입김 아래에서 살아간다.  그러니 감격스러울 일도 많고 눈물을 흘릴 일도 많다.  늘 무언가를 궁리하고 노력하여 그 결실을 거두고 싶은 사람이라면, 나이가 어찌 됐든 청춘으로 살고 있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을 관전하는 일로도 감동을 만끽할 수 있다.  우리는 알게 모르게 우리의 깜냥에 대한 마지노선을 정해놓고 그 안에서만 바둥댄다.  겸손한 사람은 자신의 마지노선을 더 낮게 정해놓고 물이 아래로 흐르듯 한없이 아래를 돌보며 헌신하며 살아가고, 진취적인 사람은 자신의 마지노선을 더 높게 설정해놓고 그것을 뛰어넘어 더 높은 곳의 열매를 딴다.  마지노선을 한없이 낮추거나 한없이 높이는 사람을 관전하는 일은, 내가 어느 쪽으로도 나의 마지노선을 옮기지 못하는 째째함과 근근함에 환기를 준다.  그 환기가 크면 클수록 감동적이며 눈물겹다.  한데 우리는 일상의 자잘한 감동을 알아채고 손에 꼭 쥘 줄 안다.  그럴 때의 따뜻함도 눈물겹다.  그때만큼은 우리도 대상에 몰입했고 생 앞에서 겸허했다.     <김소연의  『마음사전』중에서> 

 

밖에는 여전히 겨울비가 내리고 마음마저 비에 젖는다.

http://youtu.be/ttfH_5R9Tlw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댓글저장
 

동장군의 기세가 연일 매섭다.

혼자 사는 집에서 난방 온도 올리기도 미안하여 가급적 자제하고는 있지만 요즘처럼 쌀쌀한 날씨에 동동거리며 돌아다니다 보면  뜨끈한 바닥에 누워 어깨가 노곤노곤해질 때까지 늘어지게 자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온도조절기 최하단의 '외출'을 고수하고 있다.  마음 같아서는 이마저도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혹여라도 보일러가 얼어 터질까 염려되어 차마 보일러를 완전히 끄지는 못하고 있다.

 

그래도 아침에 운동을 하고 돌아올 때면 등으로 촉촉히 배는 땀이 위안이라면 위안이다.  기상청의 한파 경보를 코웃음으로 날려 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며칠 전부터는 찬물에 샤워를 하는 느낌이 조금 으스스하다.  예전부터 어지간한 추위가 아니고서는 샤워할 때 언제나 찬물을 고집했으니 습관될 만도 한데 나도 나이를 먹는지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요즘은 여기 저기서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곧 있을 대통령 선거 얘기가 빠지지 않는다.  다른 지역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내가 사는 곳에서는 그 판세가 정확히 반 반으로 갈리는 듯하여 양쪽 얘기를 듣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를 정도로 재밌다.  서로 핏대를 세우며 떠드는 폼세가 마치 자신이 대통령 후보라도 되는 양 진지하기 그지없다.  때로는 도가 지나쳐 금세라도 멱살잡이를 할 것처럼 기세등등해지는 경우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마저도 나와 같은 구경꾼의 입장에서는 재밌는 볼거리가 되곤 한다.  예로부터 불구경과 쌈구경이 제일 재미있다고 하지 않던가.

 

나는 주로 말없이 듣는 입장이지만 가끔 누가 옳으냐고 물을라치면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니다.  황희 정승처럼 둘 다 옳다고 할 수도 없고.  아무튼 우리나라 국민들의 정치 관심도는 다른 어느 나라보다 높다는 것이 입증되는 셈이다.  그런데 하나 이상한 것이 있다.  그것은 여당 지지자들의 구성이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왠고 하니 지극히 부자이거나 고위 공직에 있는 분들이야 보수 여당을 지지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겠으나 사흘에 피죽 한 그릇도 못 먹을 듯 보이는 극빈층의 사람들이 여당을 지지하는 것은 의외다.  상식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는다.  내 주변 사람들만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여당을 열렬히 지지하는 극빈층의 사람들을 심심치 않게 보게 된다.  천양지차의 경제적 격차를 보이는 사람들이 한통속으로 여당을 지지하는 모습은 아무리 생각해도 어울리지 않는 모양새다.  그리고 그들이 상대방을 설득하는 모습은 이것은 숫제 설득이 아니라 공격적이고 과격하다.  생각해 보라.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을 내 편으로 끌어들이려면 논리적이면서도 부드러운 말로 설득해도 어려운 일인데 그렇게 과격해서야 어디...

 

더 재미있는 것은 그들이 사용하는 용어이다.  야당을 지지하는 진보측 지지자들이 조선 시대의 수구파를 빗대어 '수구 꼴통'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그럴 듯한데 여당 지지자들은 하나 같이 상대방을 '빨갱이'라고 부른다.  이게 가당키나 한가?  

 

예전에 내가 알고 지내던 한 사람이 있었다.  특별한 직업 없이 주식투자만 하며 소일하던 분이었는데 어느날 내게 자신의 속옷을 까뒤집어 보여 주며 자신은 늘 빨간 속옷만 입는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분이 내게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서 멍하니 쳐다보고만 있었는데 그분의 설명인 즉, 자신은 주식 시황판의 빨간색을 염두에 두고 그렇게 하는 것이라 했다.  주가가 오르면 빨간색으로 표시되는 것이야 다들 알고 있지 않은가.  그분은 주가가 오르기만을 염원하며 속옷까지 빨간색을 고집하는 것이었다.  그후 우리는 그분을 '빨갱이'리고 부르곤 했다.

 

보수 여당을 지지하는 분들은 진보 야당을 지지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주식투자를 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지는 않은지...  그렇다면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다.  내가 아는 주변의 야당 지지자들 중 빨간 속옷을 입고 다니며 주가가 오르기를 기원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보지 못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댓글저장
 
행복인 줄도 모르고 놓쳐버린 것들 - 지금 당장 행복해지는 100가지 방법
에이미 스펜서 지음, 박상은 옮김 / 예담 / 2012년 12월
평점 :
절판


어느새 2012년의 말미에 와 있다.

원하지도 않았는데 세월은 참 빠르게 흐른다.  매년 이맘때쯤이면 지난 일 년을 회상하며 후회와 아쉬움만 가득 안고 새해를 맞이하곤 한다.  요즘은 '송년회'라는 말로 대신하고 있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망년회'라는 말이 더 흔했다.  매년 12월이면 으레 사회에서 알고 지내는 이러저러한 관계의 사람들(친지나 고향 선후배, 직장 또는 모임의 사람들 등)과 크고 작은 행사를 하기 마련이고, 그럴 때면 빠짐없이 술판이 벌어지고 이런 이야기 저런 이야기를 다하다 보면 술로 한 해를 떠나보내기라도 하려는 듯 인사불성이 되도록 2차, 3차까지 먹고 마실 경우도 있었다.

 

술을 전혀 못 마시는 나로서는 이 기간만큼은 따로 떼어 달력에서 지우고 싶을 만큼 괴로운 시기이기도 하다.  극구 사양하는데도 막무가내로 술잔을 들이 대는가 하면, 술에 걸신이 들린 사람들처럼 목구멍으로 들이 붓던 사람들도 그렇게 한참 지나고 나면 혀가 살짝 꼬인 발음으로 노래방!을 외친다.  하지만 그때는 이미 다들 과식으로 배가 불편하고 술도 도를 지나쳐 정신마저 혼미해지는 상태이다.  담소고 대화고 귀찮아 진다.  어서 빨리 자리에서 일어났으면 하는 간절함만 남아 있게 되는 것이다.

 

부푼 꿈을 안고 시작했던 한 해도 그야말로 '망령회'로 어물쩍 보내게 되는 꼴이다.

그리고 연초에 그렇게도 간절히 원했던 '행복'은 한모금의 담배 연기와 함께 찬 공기 속으로 흩어지고 만다.  영국의 철학자이자 수학자였던 버트란트 러셀은 이렇게 말했다.

행복의 원리는 간단하다.  불만에 자기가 속지 않으면 된다.  어떤 불만으로 해서 자기를 학대하지만 않는다면 인생은 즐거운 것이다. 라고.

 

아쉬운 마음에 이 책을 읽었다.  한 해가 가는 아쉬움, '살아내기' 보다는 '살아가자'고 다짐했던 연초의 다짐이 허망하게 끝나는 듯한 아쉬움, 하루하루를 나름 열심히 산 듯한데 손가락 사이로 찬바람만 느껴지는 것에 대한 아쉬움, 그리고...  <행복인 줄도 모르고 놓쳐버린 것들>은 우리의 이런 불만과 아쉬움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도록 하는 데 도움을 준다.  사실 따지고 보면 우리가 사는 모습은 더 거기서 거기가 아닌가.  인터넷으로 만나는 사람들의 모습을 굳이 부러워할 필요는 없는 셈이다.  미국의 저널리스트이자 인간관계 전문가인 에이미 스펜서가 쓴 이 책은 딱히 특별할 것도 없는 우리네 일상을 따뜻한 시선으로 기록하고 있다. 

 

"온라인 상의 삶은 가장 좋은 장면들로만 편집한 영화 예고편과도 같다.  그러므로 온라인 상으로 보는 친구들의 멋진 생활에 비해 당신의 삶이 초라하게 느껴진다면 온라인 상의 삶이 진짜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하라.  포토샵으로 보정한 잔디밭의 원래 색깔을 상상해보라.  그리고 페이스북에 올린 프로필에 맞춰 살려고 스스로를 들볶지 마라."   (P.119)

 

이 책을 다 읽은 사람이라면 다음과 같은 칸트의 명언이 떠오를지 모르겠다.

행복의 원칙은 첫째 어떤 일을 할 것, 둘째 어떤 사람을 사랑할 것, 셋째 언떤 일에 희망을 가질 것이다.

눈을 뜨고 바라보면 2013년의 희망이 한발 앞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에세이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매년 12월이면 마음은 마냥 분주하고 그에 따라주지 못하는 몸은 언제나 걸리적거린다.

몸과 마음이 제각각이라는 사실을 선명하게 인식할 수 있는 시기는 일 년 중 이때가 유일하지 싶다.  그런 까닭에 책상 앞에 차분히 앉아 책에 몰입하기는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오늘 이것을 끝내야 하는데...', '아, 이번주까지는 그 일을 마무리 지어야 하는데...'하고 생각하다 보면 펼쳐 놓은 책의 같은 페이지를 다람쥐 쳇바퀴 돌듯 반복하여 읽는 나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책을 놓지 못한다.

 

후지와라 신야를 처음 알게 된 것은 그의 작품<동양기행1,2>를 읽으면서부터였다.  일본을 대표하는 유명 사진작가이자 여행가이며 에세이스트인 후지와라 신야, 그때만 해도 나에게는 무척이나 낯설고 생소한 이름이었다.  사진작가의 여행기는 주로 글보다 사진에 먼저 시선을 빼앗기곤 하지만 후지와라 신야의 글은 달랐다.  나는 그의 글에 깊이 빠져 사진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그의 팬이 되었다.  <인도 방랑>, <티베트 방랑>, <인생의 낮잠>, <메멘토 모리>, <황천의 개> 등 그의 작품은 장르를 가리지 않고 읽었다.  그의 신작이 반가운 이유는 내가 그의 팬이기 때문이다.

 

 

 

 

 

시인이 쓴 에세이는 언제나 애틋한 감정을 불러 일으킨다.  시집이 팔리지 않는 현실에 또는 책이 팔리지 않는 세태에 글쟁이로 살고자 하는 치열한 몸부림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나로 말하자면 시인이 쓴 에세이를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시인이 시인으로 남고자 하는 마음이야 왜 없으랴.  나는 그래서 시인의 에세이를 즐겨 읽으며 그 현실에 늘 가슴 아파한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하면 으레 <월든>을 떠올리곤 한다.  자연과 더불어, 어느 길가에 피어난 작은 꽃처럼 살다 간 그의 삶을 생각할 때 숙연함을 넘어 막연한 동경을 품게 된다.  현실의 일상에서 가당치도 않은 일이지만 하늘의 별처럼 닿을 수 없는 꿈을 꾸게 된다.  그의 초창기 작품이라는데 깊이 있는 철학적 사유가 눈에 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댓글저장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
알랭 드 보통 지음, 박중서 옮김 / 청미래 / 2011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알랭 드 보통의 책을 읽고 있노라면 책의 처음부터 끝까지 어느 한 구절 밑줄을 긋지 않고 넘어갈 수 있는 부분이 없다.  어쩌면 이렇게 글을 잘 쓸 수 있는지...  생각할수록 부럽기 그지없다.  나는 그가 쓴 대부분의 책들을 읽어왔지만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는 읽지 않았었다.  부족한 사탕을 두고두고 아껴 먹으려고 몰래 감추어 둔 것은 아니다.  제목만 보고 내용을 지레 짐작한 것이 실수라면 실수였다.  우리가 흔히 접할 수 있는 종교 비판서쯤으로 생각하고 있었으니 구미가 당기지 않은 것은 당연했다.

 

최근에 읽은 어느 책에선가(요즘은 책을 읽어도 리뷰를 잘 쓰지 않는 탓에 어떤 책이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무신론자를 위한 종교>의 인용글을 우연히 읽게 되었는데, 나는 비로소 내가 그동안 책의 내용을 오해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이 책은 종교 비판서가 아닐 뿐더러 오히려 종교는 인류가 오랜 세월을 거쳐 세밀하게 구축한 지적 창조물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런 측면에서 이 책은 종교 찬양서라고 해야 옳다.  다만 종교인들이 가질 수 있는 자신의 종교에 대한 무비판적 신봉이나 타종교에 대한 일방적 비판과는 차원이 다른 이야기이다.  저자는 무신론자의 입장에서 종교의 역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의 비존재를 증명하려는 시도는 무신론자에게는 일종의 오락이 될 수도 있다.  냉정한 종교 비판자들은 신자들의 아둔함을 가차 없이 속속들이 이 세상에 드러내는 일에서 상당한 기쁨을 발견하며, 자신의 적이야말로 철저한 바보이거나 광인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보여주었다는 생각이 들어야만 비로소 공격을 멈춘다.  이런 과제가 나름의 만족감을 주는 것은 사실이지만, 진정한 이슈는 하느님이 존재하느냐 않느냐 여부가 아니라, 만약 하느님이 분명히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린 사람이라면 이런 논의를 어디로 끌고 가느냐 하는 것이다.  우리가 한편으로는 계속해서 철저한 무신론자로 남아 있으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종교가 유용하고, 흥미롭고, 위안이 된다는 사실을 때때로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이 책의 전제이다.  또한 종교의 관념과 실천 가운데 일부를 세속적인 영역으로 가져올 수 있는 가능성 역시 분명히 흥미롭다는 것이다."   (P.12) 

 

이 책은 1. 교리가 없는 지혜, 2. 공동체, 3. 친절, 4.교육, 5. 자애, 6.비관주의, 7. 관점, 8. 미술, 9. 건축, 10.제도의 순서로 엮어져 있다.  소제목만 훑어보아도 우리의 일상생활 전반을 아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종교는 알게 모르게 인간의 행위 전체에 관여하고 법이나 제도가 무관심하거나 방치한 일부 영역에 있어서도 적극적으로 개입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무신론자라는 이유만으로 기존 종교가 제시해 온 여러 가지 인류 문제의 해결책마저 무시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저자 알랭 드 보통은 초창기 종교의 초자연적인 맥락을 종교가 갖는 여러 유용성과 분리하여 우리가 흡수하여야 할(또는 흡수하기를 바라는) 실용적 측면을 제시하고 있다.

 

종교에 대한 저자의 통찰은 가끔 반대론자의 반박을 불러 일으킬 만한 부분이 없지는 않지만 그의 폭 넓은 지식과 사고의 깊이를 생각할 때, 과연 그럴 만한 사람이 몇이나 될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  이 책의 내용 중 흥미롭지 않은 부분을 거의 찾을 수 없었지만 그 전부를 소개할 수는 없고, 비관주의적 세계관 일부를 적는다. 

 

"비관주의적 세계관이라고 해서 삶에서 즐거움을 앗아가는 것은 결코 아니다.  비관주의자들의 경우, 그렇지 않은 사람에 비해서 훨씬 더 뛰어난 판단 능력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결코 어떤 좋은 결과가 나오리라고 기대하는 법이 없으므로, 가끔 어두운 지평선 너머로 모습을 드러내는 사소한 성공에도 깜짝 놀라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서 현대의 세속적 낙관주의자들, 곧 자격에 대한 감각이 잘 발달한 낙관주의자들은 지상 낙원의 건설에 바쁜 나머지, 일상생활에서 볼 수 있는 신비스러운 현상들을 대부분 제대로 즐기지 못한다."    (P.203)

 

부모님 모두 세속적인 유대인이셨기에 자신도 철저하게 무신론적인 가정에서 자라게 되었다는 저자의 주장을 선뜻 수용하기도 어렵고, 종교학자도 아닌 그가 여타 종교의 교리나 수행법을 연구했을 리도 만무하기에 저자의 논거는 다분히 기독교적인 측면으로 편중되고 일반론으로 흐르기도 하지만 우리가 종교에서 얻을 수 있는 실용적인 면을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도 이 책을 읽은 효과는 충분하리라고 본다.  스위스 태생의 프랑스에서 기사 작위를 받은 영국인 알랭 드 보통, 그의 특이한 이력만큼이나  독특하고 기발한 발상이 그의 저서에서 언제까지고 빛을 발할 수 있기를 독자의 한 사람으로서 기원해 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