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 - 이병률 여행산문집
이병률 지음 / 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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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에서 별을 바라본 사람들은 안다.

그 잠깐의 시간에 마치 최면에 걸린 듯 나를 잊을 수 있다는 것을.  광대무변의 하늘에 비하면 나는 아무것도 아니란 것을.  그 하찮음이 결코 싫지 않다는 것을.  일상에선 한없이 커졌던 자존심이 낮게 엎드려 먼지처럼 흩어진다는 것을.  그 겸손함이 결코 불쾌하거나 싫지 않다는 것을.  그리고 작고 가벼워진 몸으로 수십 광년의 별에 닿을 수 있다는 것을.

 

여행도 그런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본 밤하늘에 비하면 지구라는 이 별은 먼지처럼 작은 존재이지만 낯선 곳에서 한나절을 걷다 보면 크게만 보였던 내 자리와 내가 욕심내던 모든 것들이 그렇게 작고 하찮은 것이었나 생각하곤 했다.  한순간에 다가오는 그 선명함은 어느 유명인의 설득으로도 바꿀 수 없었던 내 마음의 벽을 너무나 쉽게 앗아가버렸다.  별을 바라보며 아주 쉽게 내 존재를 잊을 수 있었듯, 여행을 하면서 내 욕심의 크기를 잴 수 있었다.  지구의 어느 곳에 있어도 하루 24시간은 달라지지 않을 텐데 어느 모난 시간이 나의 마음을 찌르고 있었던 것일까? 

 

이병률의 여행 에세이는 이번이 두번째다.  <끌림>에 이어 7년만에 나온 그의 책은 내가 견딘 세월만큼 조금은 편해졌고, 조금은 쉬워졌다.  세월은 그 속에 담겨진 경험만큼 나이들게 한다.  작가의 글은 이제 <끌림>에서 보이던 조금은 현학적이고 멋을 부리던 치기에선 조금쯤 멀어진 것처럼 보였다.  독자들과 이만큼 가까워졌다고 해야 할까?  그러나 쉽고 편한 글일수록 그 속에 담겨지는 의미는 크고 넓어지게 마련이니 참 이상한 일이다.  편한 사람일수록 그의 가슴은 넓고, 쉬운 글일수록 그 의미가 넓어지니 말이다.  어쩌면 '쉽다'는 말 속에는 우리가 그 폭을 가늠할 수 없는 '여백'이 숨겨져 있는지도 모른다.

 

"여행의 많은 순간순간들을 극한 지경으로 몰다보면 그 안에서 선명한 쾌감을 만난다.  막막히 갈 곳도 없고 깊은 밤이 되어 눈 붙일 데가 마땅하지 않아도 그 상황 속에서 서성이다보면 이상할 정도로 강렬한 그 무엇에 대한 애착도 느끼게 된다.  적어도 거지가 아니라 여행자라고 스스로를 토닥이며, 이미 멀리 떠나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세상 그 어떤 순간과도 비교할 수 없는 상태에 깊숙이 빠져 즐기고 있기 때문이다."    (1# '심장이 시켰다'에서)

 

'전편보다 나은 속편이 없다'는 속설은 책에서 만큼은 예외인 경우가 많다.  이병률의 산문집도 그렇다.  상업성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한 작가의 작품에서 세월은 무시할 수가 없는 법이다.  세월의 경과는 그의 글뿐만 아니라 사진에서도 보여진다.  그가 만난 사람들과 집과 거리와 산과 하늘들.  사진의 색은 선명하다.  눈에 확 띌 정도로.  그러나 자극적이지 않고 오히려 친근하다.  작고 소소한 것에 눈길이 가는 것은 세월의 변화가 보여주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한번은 루마니아에서 '쓸쓸히 아름답고, 쓸쓸히 눈부셨던 그 외진 길을 다시 보기 위해 택시를 타고 가야 했던 작가에게 왕복 요금을 다 내기엔 너무 많다는 이유로 편도 요금만 받았던 어느 택시 기사의 이야기를 작가는 이렇게 적고 있다. 

 

"그가 좀 너무했다는 생각도, 나 같은 속물은 어떻게 살아가란 말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미안한 마음에 머뭇머뭇거리느라 얼른 차에서 내리지도 못했다.  아저씨는 나를 내려놓고, 그리고 '너무 많은 그 무언가'를 내려놓고 그렇게 그곳을 떠났다."    (16# '쓸쓸히 왔던 길' 에서)

 

이병률의 글을 읽고 있노라면 허허로움이 목까지 차오른다.  아니, 아무것도 아닌 것이 어떤 것을 채울 수는 없다.  어쩌면 바닥까지 비우졌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뭔가 알 수 없는 것들로 가득하다.   그것이 고독인지, 사랑인지, 슬픔인지, 또는 알 수 없는 삶의 의미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그 무엇으로 비틀거리다 일상의 바쁜 손놀림에서 멈칫하게 된다.

 

"오랫동안 나를 붙들고 있는 건 슬픔의 색깔이다.  슬픔으로 지금까지의 삶을 그나마 지탱해왔다면 이해가 쉬울까.  슬픔의 냄새와 슬픔의 더께가 가득 들어찬 내 마음은 그래서 뚱뚱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 정체가 무엇인가를 따져보면 슬픔이 맞다.  약기운 같은 슬픔.  말갛고 탁한, 흰색에 가까운 액체를 뚝뚝 흘려 모으다가 어느 날 그것들을 치우고 그 자리를 말리는 일이 내가 사는 방식이었다면 당신은 이해가 쉬울까."    (29# '조금만 더 내 옆에 있어달라고'에서)

 

여행을 한다는 것은 '인간'이라는 단어에 어깨동무를 하는 일이다.  새끼손가락을 걸며 이별하는 일이다.  더러는 내가 잘못했던 일을 떠올리며 눈발 날리는 거리에서 바람으로부터 회초리를 맞는 일이다.  그 모든 것의 중심에는 한 치쯤 낮아진 자존심과, 한 뼘쯤 두꺼워진 '낯 두꺼움'이 있다.  친한 친구로부터 걸려온 전화에 '여행 중'이라고, '그래서 널 만날 수 없다고 당당히 대답하고 싶다.  낯선 이국땅에서 '몹시 외롭다'고 말하고 싶다.  그런 외로움으로 너에게 한발짝 더 다가가고 싶다.  이병률의 산문집을 읽으면 꼭 그래야만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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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에서는 등꽃이 꽃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대접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듯하다.  말하자면 이런 것, 만개한 꽃을 보는 사람들의 호들갑스러운 관심과 환호, 꽃과 함께 나누는 연인들의 밀어, 가족 나들이에서 들리는 아이들의 맑은 웃음 소리 내지는 특별하고 낯선 삶의 우울 등과 같은 것 말이다.

 

도시에서는 오히려 인위적이고 작위적인 냄새가 물씬 풍기는 벚꽃길이나 물감을 짙게 풀어 뿌려놓은 듯한 철쭉의 화단, 시도 때도 없이 바뀌는 인도 옆의 화단, 그리고 무슨 박람회니 뭐니 해서 급작스럽게 옮겨 놓은 정체도 알 수 없는 꽃들이 사람들의 짧은 관심을 받고 스러질 뿐이다.

 

등꽃은 포도송이처럼 탐스럽게 핀다.  옅은 보라색의 꽃잎 속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하얀 촛불을 켠 듯한 문양이 신비롭기만 하다.  자연의 색을 그대로 머금고 있는 등꽃은 그들 스스로 드러내지 않기에 짙은 선홍색의 철쭉이나 그보다 더 진한 붉은 빛을 띠는 영산홍의 모습과는 사뭇 다르다.  게다가 그늘이라곤 찾을 수 없는 도시 한복판에 작은 그늘을 만들고자 조성한 등나무의 용도는 도시인들에게 꽃으로서의 효용이나 관심은 숫제 없었던 듯 보인다.

 

변덕스러운 봄날씨에 구름이 끼고 비라도 흩뿌릴라치면 등꽃은 더욱 초라해 보인다.  찬란한 햇살 속에서도 잘 드러나지 않는데 칙칙한 도시 배경에 가린 등꽃은 오죽할까.  보는 이의 가슴마저 우울하게 한다.  오직 경제적 가치로만 환산되는 자본주의 악령은 도시의 등꽃에도 고스란히 옮겨진 듯 보인다.  사람들이 환호하지 않으니 사람들이 모일 리 없고 사람들이 모여 북적대지 않으니 경제적 가치로는 제로에 가깝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이맘때가 되면 등꽃은 또 어김없이 피고 진다.

 

도시에서는 사람도 소리소문 없이 죽어가는데 하물며 꽃이 피고 지는 것쯤이야 대수일까마는 소리도 없이 피고 지는 등꽃을 보며 오늘은 왠지 쓸쓸한 기분이 드는 것이다.  아주 오래 전에 쓴 낙서를 같이 적어본다.  약간의 쓸쓸함을 더하여.

 

   공원 벤치에서


침묵의 계절 겨울이 순례를 떠나는 날
나는 공원 벤치에 앉아
해묵은 편지를 읽었다

처음과 끝이 맞닿은 어느 곳에서
가볍게 부유하던 너는 
기별도 없이 내게로 왔다

봄은 속삭이는 계절
소리치지 말 것
험한 얼굴로 인상쓰지 말 것
바람의 언어로 시를 쓰고
태양의 빛으로 그림을 그리는
그 오후를 방해하지 말 것
그렇게 숨죽이고 지켜볼 것

옛사랑의 그림자처럼
아련함이 흐르는 한낮

도시 저편에는 회색빛 게으름이 졸고
꽃이 피려는지
아이들 웃음이 맑다

봄은 속삭이는 계절

소리치지 말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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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딱히 정해진 것도 없으면서 은근한 기대와 달콤한 희망에 꽃망울처럼 한껏 들뜨게 되는 달이다.  5월은 게절적으로 봄에 속한다지만 봄과는 구별되는 달이기도 하다.  뭐라 규정할 수 없는, 시간의 흐름에서 홀로 도도한 듯 보이는 5월에 새로 나온 책과 장시간 대화를 나누는 일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슬로 라이프>의 작가 쓰지 신이치, '나무늘보 친구들'이라는 조직을 결성해 NGO 활동에도 열심인 그가 여행 작가 김남희와 1년간 함께 걸으며 서로의 지나온 삶을 이야기 하고 앞으로의 삶의 방향에 대해 그리고 행복의 의미에 대해 그들이 갖고 있는 생각을 책으로 엮었다니 정말 기대가 된다.  언젠가 나는 <슬로 라이프>를 읽고 리뷰를 썼었고, 쓰지 신이치의 생각에 공감했었다.  물론 김남희 여행 작가는 더없이 좋아하는 작가 중 한 사람이다.  특히 그녀가 쓴 <인생 기출 문제집>은 지금도 가끔 꺼내어 읽는다.

 

 

 

 

 

 

세계적인 작가 파울로 코엘료를 모르는 사람은 아마 드물지 싶다.  그의 신작을 기다리던 사람들은 어쩌면 이 5월이 행복할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그의 글에 황중환 작가의 그림이 더해졌다니 공감 100%의 책이 되지 않을까?

 

 

 

 

 

 

 

 

 

 

조금 우울하고 생뚱맞은 선택일 수도 있다.  나도 잘 안다.  그러나 내가 좋아하는 작가 이병주와, 김윤식이 아니더라도 나는 이 책을 주저없이 선택했을 것이다.  아니, 그렇게 해야만 했으리라.  진보와 보수가 극한적으로 대립했던 지난 대선과 보수 여당에 패배한 진보의 좌절, 그리고 개성공단의 폐쇄로 이어지는 남북한의 극한 대립, 어디 하나 마음 둘 데 없는 작금의 나에게 이 책은 작은 위로가 될 것이다.

 

 

 

 

 

 

 

 

 

블로그에 글을 올리든, 직업적으로 글을 쓰든 간에 글을 쓰는 모든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정서적으로 안정되어 있다고 나는 믿는다.  누구나 힘든 시절이 있고, 그 시절을 글을 쓰는 일과 함께 견뎌낸 사람들의 경험은 그래서 더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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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 - <파우스트>에서 <당신들의 천국>까지, 철학, 세기의 문학을 읽다
김용규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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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적 담론을 글로 옮길 때에는 언제나 조심스럽다.

글을 이어가다 보면 내 일천한 철학적 지식이 금세 바닥을 드러낼 것만 같아 나도 모르게 불안에 휩싸이기 때문이다.  그나마 내가 이 책의 리뷰를 쓰기로 맘 먹었던 것은 고등학교 시절에 심취했던 '실존주의' 철학이 책 내용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그랬다.  나는 고교 시절 야스퍼스, 하이데거, 키르케고르, 사르트르, 알베르 카뮈, 카프카 등으로 대표되는 실존주의 철학자와 작가의 작품에 열광했었다.  조숙했다고?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 나이 때의 청소년들에게 실존주의 철학은 충분히 매력적이고 위로가 되는 사상임은 분명해 보인다.  청소년에서 성인으로 전환되는 그 시점에 자신도 모르게 찾아드는 삶의 비의와 원인도 알 수 없는 우울을 조용히 위로하고 토닥여 주는 듯한 느낌을 나는 실존주의 철학자들에게서 여러 번 느꼈었다.

 

내가 나도 모르게 리뷰를 쓰고자 하는 무모한(?) 도전을 감행하게 만든 것처럼 이 책의 저자인 김용규의 풍부한 교양과 인문학적 소양 이면에는 철학에 대한 독자들의 흥미를 일시에 불러 모을 것만 같은 마력이 숨어 있다.  어쩌면 한두 번쯤 발을 빼거나 망설였을 법한 독자라 할지라도 일단 책장을 넘기는 순간 빠져들지 않고는 배길 수 없을 것이다.

 

책은 독일의 대문호 괴테의 역작인 <파우스트>로 시작된다.  메피스토펠레스의 유혹에 빠진 파우스트, 파우스트를 사랑하는 그레트헨의 이야기를 통하여 키르케고르의 '실존의 3단계설'을 설명하고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따라가는 것을 포기한 그레트헨의 '최고의 자기부정', '무한한 자기 체념'은 그녀가 이미 종교적 단계에 도달했다는 증거라고 저자는 말한다.  <파우스트 2부>에 대한 설명에서 작가는 괴테의 실존주의 이전의 낭만주의 철학에 기인한 파우스트의 구원을 설명하고 있다.  실러의 '최고의 자기 긍정' 내지 '무한한 자기 실현'은 파우스트가 이상적인 인간에 도달하는 기반이었음을 말해준다.  놀랍지 않은가.  어떤 의미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채 읽었던 <파우스트>가 새로운 인물로 재창조되는 느낌이었다.

 

<파우스트>가 인간의 구원과 내적 성장의 문제를 다루었다면 <데미안>은 인간의 내적 성장에 집중하는 책이다.  잘 아는 것처럼 싱클레어가 만나는 에바 부인은 인간으로서 이룰 수 있는 자기실현의 완성체이며 싱클레어가 깨닫고 경험하는 모든 과정은 자아실현의 과정이라는 것이다.  즉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빛의 세계'와 '어둠의 세계'는 개인의 문제인 동시에 전 인류의 문제이며 모든 삶과 사색의 문제라는 것을 싱클레어를 통하여 잘 보여준다.

 

"하지만 이 일은 '새가 알을 깨고 나오듯', '뱀이 허물을 벗고 성장하듯' 몇 번이고 주어진 자기를 부수고 죽을 것 같은 절망과 고통을 견디어야 하는 일이기도 합니다.  싱클레어도 그러한 절망과 고통을 통해 비로소 자기실현을 완성해냈던 거지요.  헤세는 그렇다고 이러한 성장과 자기실현을 두려워하거나 포기해서는 안 된다고 우리에게 당부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위로도 합니다.  "신이 우리에게 절망을 보내는 것은 우리를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새로운 생명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이다.""    (p.70-p.71)

 

저자는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를 통하여 관계의 중요성과 '관계를 맺는 법' 또는 '사랑하는 법'을 설명한다.  무엇보다도 인상깊었던 것은 셰익스피어의 <오셀로>를 통하여 사랑과 질투를 철학적으로 관찰하는 대목이었다.  여기에는 권지예의 단편 소설 <꽃게 무덤>이 함께 등장한다.  나는 저자의 작품 선택에 무릎을 치며 공감했다.  <오셀로>가 자신이 이미 소유한 대상에 대한 불안심리와 그에 기인한 질투였다면 <꽃게 무덤>은 가질 수 없는 영혼을 소유하고자 하는 집착 또는 쓸쓸함에서 비롯된 질투였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질투란 오셀로가 가졌던 진화심리학적 질투든, <꽃게 무덤>에 나타난 존재론적 질투든 분명 일종의 신경증 증상입니다.  일종의 심리적 질환이라는 말이지요.  프롬의 관점에서는, 질투는 사랑의 다른 얼굴이 아니라 소유욕의 다른 얼굴일 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제 이 글의 서두에서 던졌던 질문, 곧 '질투 없는 사랑이 있을까,사랑 없는 질투가 있을까?'에 대해 답을 할 수 있게 되었지요.  질투 없는 사랑이 진정 사랑이라고!  그리고 질투에는 아예 사랑이 없는 거라고!"    (p.114)

 

저자는 이제 카프카의 <변신>에서 가족의 의미를 발견한다.  이 부분에서는 황석영의 <삼포 가는 길>과 영화 <집으로>가 함께 등장한다.  사르트르의 <구토>를 읽었던 사람이라면 공감하겠지만 저자도 이 책에서 '삶의 무의미성'과 일상의 갑작스러운 낯섦, 또는 '아찔한 의식의 순간'을 말한다.  일상에 대한 연장선으로 선택한 작품이겠지만 사뮈엘 베게트의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우리는 <구토>에서 마저 듣지 못한 일상의 권태를 듣게 된다.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에서 비롯된 삶의 부조리와 무의미성, 또는 이에 저항하는 인간의 '반항' 또는 '무의미에의 의미 주기'가 인간 개개인의 문제였다면 이제 그범위를 넓혀 이상사회 또는 유토피아의 문제로 넘어간다.  최인훈의 <광장>을 통하여 이념의 대립이나 갈등이 해결된 이상사회의 모색을, 이청준의 <당신들의 천국>을 통하여 약간의 가능성을 철학적으로 살펴보고 잇다.

 

저자는 이 책의 말미에 이르러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와 조지 오웰의 <1984년>을 거론한다.  페터 슬로터다이크의 ‘인간 사육’ 논쟁과 더불어 이상사회의 목적만을 강조하는 것, 그로 인한 전체주의화와 인간성 말살과 폭력 및 억압의 문제, 그리고 유전공학의 발달과 생물학적 결정론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마지막에 등장하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마지막이라는 약간의 아쉬움과 철학적 양념으로서 거론된 듯하다.  

 

원작의 적절한 인용과 저자의 감칠맛 나는 설명은 철학에 대한 기존 통념을 한순간에 바꿔 놓았다.  철학도 읽는 사람의 기본지식과 인문학적 소양에 따라 재미와 가독력에 크나 큰 차이가 있을 수 있음을 깨닫게 된다.  철학을 이해할 것이냐 아니면 그저 바라볼 것이냐 하는 문제는 이 책을 읽었느냐 그렇지 못하냐의 기준에 의해 나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는 것은 나만의 과장일까? 

 

다만 내가 개인적으로 아쉽게 느꼈던 점은 이러한 철학적 설명이나 분석이 유익한 것은 사실이지만, 오직 자신의 감성에만 의지하여 체계적 분석을 방치한 채 '무작정 읽기'에 길들여진 대부분의 독자들이 문학 작품을 일정한 분석 틀을 동원하여 딱딱하게 읽어야 할 것만 같은 부담감에 짓눌리거나 이전의 감성과 순수성이 철학과 논리에 의해 훼손되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를 아니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 권의 소설을 읽으며 영문도 없이 눈물을 찔끔거리거나 맘에 드는 시 한 편을 읽으며 먼 기억의 회상에 잠길 수 았는 순수성을 말이다. 그것이 나만의 기우라면 다행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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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집 - 책들이 탄생한 매혹의 공간
프란체스카 프레몰리 드룰레 지음, 이세진 옮김, 에리카 레너드 사진 / 윌북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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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마다 집을 고르는 기준은 따로 있는 듯하다.

집이 위치한 장소에서도 어떤 이는 사람들로 북적대는 시장 근처를, 또 어떤 이는 사람들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고즈넉한 시골을, 그런가 하면 집의 구조나 형태에 있어서 어떤 이는 현대적이고 세련된 집을, 또 어떤 이는 목가적이고 자연친화적인 집을 좋아한다.  사람들의 취향이 저마다 다르고 자라온 환경도 다르니 집에 대한 취향도 제각각일 수 밖에 없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겠지만 나는 가끔 '집에도 다 인연이 있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물론 사람에 따라 집이란 단순히 먹고 잠자기 위한 어떤 공간, 비바람으로부터 안전하게 피할 수 있는 그런 공간으로만 생각할 수도 있다.  게다가 바쁜 현대인에게 있어 집이란 그저 그런 곳이며, 운이 좋으면 돈으로 한몫 쥘 수 있는 그런 대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문학적 상상력과 영감을 필요로 하는 작가에게 있어 '집'의 의미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각별할 것이다.  흉물스러운 콘크리트 구조물로서의 집이 아닌, 문학적 열정이 살아 숨 쉬고 생동감 넘치는 글이 씌어지는 작가 내면의 외딴 곳, 친밀감과 더불어 자청한 고독이, 기시감(deja vu)과 낯섦이라는 상반된 감정들이 조심스런 균형을 이루는 곳으로서의 집 말이다.  예컨대 그것은 젊고 매혹적인 여성에게 느낄 수 있는 성욕과 성스러움의 상반된 감정, 한 발 더 가까이 다가서고 싶으면서도 그저 멀리서 바라보고만 싶은 성스러운 느낌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집은 오브제로서의 사물인 동시에 작가의 생각과 함께 변화하고 나이들어가는 생명체로서의 대상일 터였다.

 

"그들은 그곳에서 살고, 창조하고, 고통받았다.  스스로 택한 고독과 글을 써야만 한다는 긴박감이 언제나 그곳에 도사리고 있었고 그들은 그것들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두었다.  그들은 글쓰기의 열정으로 집을 채웠고, 바로 그만큼 집을 사랑했다."    (p.7 '서문')

 

이 책의 저자인 프란체스카 프레몰리 드룰레는 프랑스 출신의 저널리스트이자 작가이다.  저자는 19세기 후반부터 현재까지를 아우르는 시기에 발자취를 남긴 20인의 작가들과 그들의 집을 취재한다.  저자가 이 시기의 작가를 택한 까닭은 이 시기가 현대문학의 태동기이자 건축과 라이프스타일이 급속도로 변화한 시기이기 때문이었다.  비록 한 시대를 풍미했던 위대한 작가들은 지금은 모두 죽고 없지만 집에 깃든 작가들의 영감과 풍광에 섞인 이야기들은 독자들에게도 호기심과 함께 여행의 재미를 느끼게 한다.

 

저자의 여정은 헤르만 헤세의 카사 카무치에서 시작된다.  스위스의 루가노 호수를 에워싼 언덕에 자리한 몬토뇰라 마을의 장엄하면서도 괴상하게 보이는 바로크식 사냥 성채가 바로 카사 카무치다.  <클라인과 바그너>, <클링소어의 마지막 여름>, <싯다르타>,<황야의 늑대>, <나르치스와 골드문트>가 나온 산실이기도 하다.

 

이어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가 머물렀던 '프티트 플레장스(Petite Plaisance : 작은 기쁨)'와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키웨스트 저택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비타 색빌웨스트의 '시싱허스트'와 알베르토 모라비아의 '두 집 살림'이, 하트포드에 위치한 마크 트웨인의 집이 소개된다.  마크 트웨인은 작가로서는 성공했지만 무모한 투자로 결국 하트포드 저택을 잃고 유럽으로 떠났다.  그는 몇 년 후 하트포드를 방문하고 그 회한을 이렇게 썼다고 한다.

 

"그 집은 우리를 볼 줄 아는 눈과 마음과 혼이 있었다.  그 집에는 합의,  요청, 깊은 공감이 있었다.  그 집은 우리의 일부였고 우리는 집의 신뢰를 얻어 은총과 축복의 평화 속에 살았다."    (p.128)  

 

버지니아 울프는 그녀의 집 '몽크스 하우스'를 샀던 순간에 대해 "내 평생을 통틀어 그토록 강렬한 감정에 사로잡혔던 5분은 달리 떠오르지 않는다."고 그녀의 일기에 기록했다고 한다.  또한 <나무를 심은 사람>으로 우리에게 익숙한 장 지오노는 그의 고향 프로방스를 너무나 사랑하여 마노스크 언덕에 터를 닦고 콩타두르 공동체를 만들었으며 언젠가 그곳에서 친구들과 판(Pan)의 신화를 되살리고 싶었다고 한다.

 

저자의 여정은 덴마크의 여류작가 카렌 브릭센, 이탈리아의 카를로 도시,영국 웨일스의 딜런 토머스,프랑스의 시인이며 다재다능한 작가였던 장 콕토로 이어진다.  장 콕토가 살았던 밀리 라 포레 자택은 지금도 변하지 않은 채 유보된 시대의 마술 같은 느낌을 풍기고 있다고 한다.  장 콕토의 영화에 출연하여 하루 아침에 유명해진 장 마레는 장 콕토를 이렇게 회고한다.

 

"글쓰기든 그림이든 낙서든, 그는 항상 자기 밖의 힘이 내리는 명령에 휘둘리듯 일했습니다.  하루는 기차에서 갑자기 나에게 종이를 좀 달라고 하더군요.  그런데 나한테는 주소 적는 수첩밖에 없었고 그나마도 몇 쪽뿐이었지요.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고 물었더니 '글이 잔뜩 떠올랐어.  당장 이 글을 쏟아내지 않으면 나중에는 쓸 수 없을 거야'라는 대답이 돌아왔어요."    (p.257)

 

어쩌면 작가들에게 집은, 자신을 둘러싼 모든 환경은 영감과 무한한 상상력의 세계를 고요히 간직했다가 작가의 손과 입을 통해 일시에 풀어내는 그런 곳인지도 모른다.  저자의 여정은 장 콕토를 지나 영국의 위대한 작가이자 여행가인 로렌스 더럴, 생의 대부분을 옥스퍼드에서 살았던 미국 작가 윌리엄 포크너, 이탈리아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가브리엘레 단눈치오, 노르웨이의 소설가 크누트 함순, 아일랜드의 대표 시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프랑스 소설가 피에르 로티를 거쳐 이탈리아의 작가 주세페 토마시 디 람페두사의 집에서 끝난다.

 

작가에게 집은 <걸작의 공간>을 쓴 J.D. 매클라치가 밝혔듯 동시대를 사는 예술가들과 교류하는 소통의 공간이자 자신의 내면 세계로 끝없이 침잠하는 은둔의 공간이기도 하다.  자신의 삶에 있어 반쯤의 세월이 담기는 곳, 집은 과연 나에게 어떤 의미일까.  <작가의 집>을 읽는 내내 그 물음이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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