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덟 단어 - 인생을 대하는 우리의 자세
박웅현 지음 / 북하우스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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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책을 덮고 골똘히 생각했다.  이 책을 관통하는 중심 키워드는 뭘까?  잡힐 듯 잡힐 듯하면서도 마땅한 단어는 종래 떠오르지 않았다.  좋은 책일수록 서로 다른 이야기가 전개되는 듯해도 결국에는 하나의 주제로 집결되며, 하나의 흐름으로 쉽게 정의될 듯하면서도 끝내 잡히지 않는다.  인생을 단 한 마디의 말로 정의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박웅현의 <여덟 단어>는 그런 책이었다.  각기 다른 소재로 이야기를 전개시키는 듯하면서도 하나의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고, 작가 자신의 생각을 아주 손쉽게 이해할 수 있으려니 생각하면서도 끝내 잡을 수 없는...

 

저자는 우리가 살아가면서 생각해 봐야 하는 여덟 개의 키워드로 '자존, 본질, 고전, 견(見), 현재, 권위, 소통, 인생'을 꼽고 있다.  제시한 단어들을 제대로 느낄 수만 있다면 어느 누구나 풍요로운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나도 물론 충분히 공감한다.  그러나 깨닫는 것과 이해하는 것은 상당한 차이가 있다.  삶의 어느 시점에서 불꽃처럼 확연해지는 하나의 깨달음은 수백, 수천의 이해와 지식의 결합에 비길 바가 아니다.  그것은 결국 내 삶에서 얻은 지식과 경험의 총합으로써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저자가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은 우리의 어지러운 시선을 갈무리하여 오롯이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방법을 찾자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주어진 나의 삶을 존중하고, 사물을 대할 때에도 본질을 꿰뚫어 바르게 볼 것이며, 소통에 있어서도 상대방에게 정성을 다하고, 현재의 시간에 최선을 다하고자 하는 노력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현대를 사는 우리는 너무도 많은 것에 현혹되어 자신의 삶을 허비하고 원망과 회한으로 평생을 살기 때문이다.  다른 누구보다도 내가 중요하다는 생각은 얼핏 이기적으로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주체는 오직 자신뿐, 그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다.  결국 나에게 집중한다는 것은 자신의 삶에 대한 배려요, 인생에 대한 지극한 예절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묵묵히 자기를 존중하면서, 클래식을 궁금해 하면서, 본질을 추구하고 권위에 도전하고, 현재를 가치있게 여기고, 깊이 봐가면서, 지헤롭게 소통하면서 각자의 전인미답의 길을 가자.  이건 제가 여러분께 드리고 싶었던 인생을 대하는 자세에 대한 모든 것이었습니다."    (p.237)

 

나는 매일 아침 산을 오른다.  여러 번의 이사로 내가 오르는 산은 그때그때 달라졌지만 산을 오를 때의 마음만큼은 지금도 변함이 없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을 존중하고, 나 또한 살아 있음에 감사하는 마음이다.  지금도 나는 산을 오를 때마다 마음속으로 인사를 한다.  나무들에게, 바람에게, 먼저 간 영혼들에게, 그리고 이 시대를 사는 모든 생명들에게.

 

잘 살아야 한다.  누구나 그래야 한다.  나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이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한숨 소리로 넘쳐난다.  나의 간절한 소망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각자의 마음은 그 각각의 사람들에게 속한 것이건만 자신의 마음을 마음대로 바꿀 수 없다는 것은 또 하나의 비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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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겠지! - 터키편, End of Pacific Series
오소희 지음 / 에이지21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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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지금 아파트 공터에서는 키 작은 꼬마 아이가 얼음 조각을 차며 놀고 있다.  신선한 풍경이다.  아이는 그 짧은 다리로 잘 보이지도 않는 얼음 조각에 온 신경을 집중하여 걷어차고는 간혹 균형을 잃고 풀썩 넘어지면서도 뭐가 그리 좋은지 몇 센티쯤 옮겨간 얼음 조각을 보며 깔깔대며 웃는다.  아이는 마치 얼음 조각을 옮기는 것이 제게 맡겨진 커다란 소임인 양 이내 일어나 또다시 집중한다.  이번에는 아이의 발이 허공을 가른다.  두꺼운 코트때문인지 이번에도 풀썩 주저앉았다.  헛발질이 무안했는지 아이는 울지도 않고 일어난다.  주차되었던 차 한 대가 그곁을 무심히 지나간다.  아이에게서 조심성이라곤 도통 찾아볼 수 없다.  세상은 어찌 되어도 좋다는 투다.  아이에게는 지금 얼음 조각이 세상의 전부다.

 

그렇게 혼자 놀고 있는 아이의 모습을 넋이 나간 듯 지켜보았다.  나이에 비례하여 열정이 식는 것은 참으로 서글픈 일이다.  어처구니없게도 우리는 열정만 식어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도 잃어간다.  나는 한동안 이름도 모르는 동네 꼬마를 지켜보며 오소희 작가의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겠지!>를 읽었다.  세 돌 된 아들과 함께 터키를 여행하고자 했던 작가의 결단은 무엇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몰라도 그 여행을 실행에 옮기기까지 많은 생각들이 오갔으리라.

 

"아이가 걸음마를 시작한 뒤로 나는 아이에게도 혼자 걷기의 중요성을 인식시키고자 무척 노력했다.  어떤 엄마들에게는 가베나 오르다 같은 것이 중요한 교육적 선택이 되는 시기에, 나는 아이를 부단히 데리고 다니며 걷게 했다.  열이 오를 때에도 졸음이 쏟아질 때에도 아이는 더 걸을 수 있을 때까지 제 힘으로 걸었다."    (p.126)

 

여행에 무슨 기술이 필요할까마는 여행의 동반자를 선택하는 일은 내가 원했던 여행의 성패를 결정짓는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때에 따라서는 여행의 동반자가 짐보다 더한 천덕꾸러기가 될 수도 있고, 더없이 믿음직한 친구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행 경험이 전무한 여행초보자라고 할지라도 이제 막 걸음마를 배운 꼬마를 여행의 동반자로 삼지는 않을 것이다.  아이의 시각과 보조에 맞출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아이는 오히려 말없는 짐짝만도 못한 훼방꾼에 지나지 않는다고 여길 사람이 대부분일 이지 않을까?  그러나 작가는 용감(?)하게도 세 살배기 아들을 데리고 터키행을 감행했다.

 

"처음에 나는 아이를 이곳에 데려온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 나는 아이가 오래전부터 이곳에 올 예정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나라는 사람에게 가방을 들게 하고, 자신의 힘으로 이곳까지 왔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아이의 첫 걸음마, 첫 번째 열감기, 처음 내지른 일성, 이 모든 것들은 매일매일 또 다른 '오늘'을 위해 성실히 축조된 밑계단이었다.  그렇기에 아이는 내가 끌고 가는 지점까지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열린 마음이 닿는 곳까지 가는 것이다.  이 아이의 인생은 오롯이 이 아이의 것이다.  내가 주관할 수 있는 것은 가방을 들어주는 정도의 일일 것이다."    (p.170)

 

그렇게 엄마와 함께 여행을 하던 중빈이는 올해 중학생이 될 것이다.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제3세계 국가를 중심으로 무려 25개국에 발도장을 찍었다고 한다.  아장아장 걷다가도 땅 위를 기어가는 개미의 행렬에 자신의 온 시선이 빼앗기곤 하던 아이는 이제 자란 키만큼이나 더 높은 곳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엄마인 오소희 작가는 어쩌면 지금보다 더 어렸던 시절의 중빈이를 그리워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해 보면 여행이란 아이의 시선으로 즐기지 않으면 고통과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여행자가 아이의 보조에 맞출 자신만 있다면 아이는 여행에 있어 최상의 파트너가 아닐 수 없다.  초원의 나무 한 그루를 보면서, 밤하늘의 별을 보면서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나눌 만한 어른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행이란, 내가 있던 자리를 떠나 내가 있던 자리를 보는 일이다.  나는 터키 여행을 통해 아이의 자리와 나의 자리를 보았다.  샴쌍둥이처럼 붙어 지내던 시기를 마감하고, 둘 사이의 적정한 간격을 보았다.  그러고 나니,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이 더 잘 보였다.  할 수 있는 것 가운데 하고 싶은 것만이 분명해졌다.  나는 더 떠돌기로 했다.  그것이 내가 하고 싶은 것이었다."    (p.301)

 

여행기는 쓰는 사람에 따라 그 경계가 뚜렷하다.  사진과 경로를 곁들여 단순히 여행지의 소개에 그치는 것이 있는가 하면, 여행지에서 느꼈던 감정과 작은 깨달음을 위주로 쓰는 것이 그것이다.  나는 물론 후자를 즐겨 읽는다.  그렇다고 여행기를 그닥 즐기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생각해 보면 나는 아들 녀석과 단 둘이 여행을 떠나본 적이 없다.  그렇다고 일상에서 아들의 눈높이에 맞춰 세상을 이해하려고 한 적도 없다.  나는 언제나 바빴고, 나는 언제나 피곤했다.  '언젠가'하고 게획했던 일들이 이제는 '다시는'이라는 메아리로서 존재할 뿐이다.  아들에게 참으로 미안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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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를 맞는 기분은 언제나 약간의 흥분과 기대가 뒤섞이게 마련이지요.  그런 까닭에 저는 새해에는 주로 에세이를 읽곤 합니다.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는 데에는 에세이만 한 게 없다는 생각에서이지요.  그러나 연초에 출간되는 책은 얼마나 많은지요.  책을 고르는 일부터가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자칫하다간 책욕심만 키우고 맙니다.  올해도 다르지 않군요.

 

 

 

대한민국의 현대문학사에서 최인호 작가만큼 영욕의 세월을 살았던 분도 드물지 싶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재학 시절에 등단하면서부터 시작된 작품 활동은 2013년 암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참으로 지난한 세월이었겠지요.  무수히 많은 작품이 영화화되고 인기와 명성을 한 몸에 받았으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세인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기도 했습니다.  그가 떠나기 전 나는 <최인호의 인연>을 읽었습니다.  한 작가의 유고집을 읽는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입니다.  더구나 새해에 말이지요.  그러나 우리 곁을 떠난 노작가의 삶을 더듬는 것은 살아있는 자의 또 다른 의무가 아닐까요?

 

 

 

 

 

 

소설가의 산문집을 읽는 것은 나의 또 다른 즐거움입니다.  신경숙 작가의 <아름다운 그늘>을 읽었을 때도 그랬고, 공지영 작가의 <빗방울처럼 나는 혼자였다>를 읽을 때도 그랬습니다.  소설가의 산문집은 작가의 민낯과 같습니다.  나는 지금도 소설가의 산문집은 그냥 지나치지 못합니다.  왜인지는 모르겠습니다.

 

 

 

 

 

 

 

 

 

 

딱히 여행기를 즐겨 읽는 것은 아니지만 이따금 눈에 띄는 여행기가 있습니다.  여행지에서나 있을 법한, 자신의 속내를 가감없이 드러내는 그런 책은 쉽사리 눈을 떼지 못하겠습니다.  치장에 익숙한 수많은 사람들과의 만남에 지친 까닭이겠지요.  사람과 사람의 만남에 목마른 까닭이기도 합니다.

 

 

 

 

 

 

 

 

햇살이 쏟아지는 오후에 까무룩 잠이 들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될 수만 있다면 그렇게 자는 듯 죽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사는 게 뭔지 하는 유행가 가사의 한 소절쯤으로 삶의 가치가 낮아질 대로 낮아진 요즘 진정으로 나를 알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삶이 무엇인지 정답은 없다고 할지라도 그 비밀의 문을 살짝이라도 엿볼 수만 있다면 내게 남은 날들을 힘차게 살 수 있을 듯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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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4-01-06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직 설레는 일은 많다. 하성란 에세이도 궁금합니다. 소설가의 에세이는 내공이 느껴져요~~~

꼼쥐 2014-01-08 13:20   좋아요 0 | URL
그렇죠? 그런데 소설가는 소설에 집중하고 독자들로 하여금 애타게 만들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하루키처럼 너무 많은 에세이집을 출간하면 무덤덤해지거든요. 신경숙 작가처럼 너무 적어서도 곤란하지만 말이죠.
 

하늘은 적당히 우울합니다.

사람들은 또 적당히 분주하고

밖은 또 적당히 소란스럽습니다.

 

개벽을 하듯

새해는 또 어김 없이 찾아왔건만

잘 벼려진 대패로 민 듯 도드라진 그 무엇도 없이

일상은 그저 평온합니다.

 

어느 해 여름이었나 봅니다.

나는 아스팔트 열기가 이글대는 고속도로를 몇 시간째

달리고 있었습니다.  흐물흐물 피어나는 열기의 아지랑이 속으로

내 차는 그렇게 단조로운 직진을 계속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느 순간 '액셀러레이트를 밟으면 이대로 죽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고, 그것은 참으로 뜬금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날 이후, '사람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처음'이 갖는 신선한 느낌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더랬습니다.  익숙함이 주는 편안한 느낌은 그리 길지 않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았습니다.  우리의 일상이 '다람쥐 쳇바퀴'처럼 느껴질 때, 그 익숙함의 영속하는 재생은

어쩌면 삶의 위험 신호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잠시 멈춤'이 필요한 순간은 바로 그때가 아닐까

싶습니다.

 

'모든 인간은 그가 노력하는 한 방황하리라'는 말은 괴테가 한 말입니다.

삶을 지속하기 위한 방편은 그 어떤 것에도 인간의 노력이 필요하지만

우리가 우선 해야 할 일은 아마도 '익숙함'에 가려진 '처음'을 발견고자 하는 노력일 듯 싶습니다.

그것을 찾기 위해 끝없이 방황해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새해가 밝았고 벌써 사흘이나 지났습니다.

조금 더 지나면 나는 습관처럼 하루하루를 헤아리고 익숙함 속에서 영혼없는 날들을

살아갈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직도 내게 '처음'이 남아있기에,

처음이라는 신선하고 설레는 것들이 남아있기에 나는 여전히 내일을 기다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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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해가 가고 또 새해가 오는 이맘때쯤이면 연례행사처럼 빼놓지 않고 하는 것이 있습니다.

토정비결이나 신년운세를 보는 것이지요.  대개는 재미삼아 하는 일종의 놀이쯤으로 여기지만 그렇지 않은 분들도 있는 모양입니다.  저는 요즘 신년운세를 보지 않습니다.  믿지 못해서이거나 궁금하지 않아서 그런 것은 아닙니다.  그저 귀찮아졌을 뿐이죠.

 

제가 어렸을 때는 점집이 참 많았던 듯합니다.  붉은 바탕에 만자 (卍字) 표시가 있는 집은 한결같이 점을 보는 집이었죠.  지금도 더러 보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예전처럼 그렇게 자주 보이지는 않더군요.  점도 이제는 다양화되고 첨단화되어 인터넷이나 스마트폰 앱으로 이동해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요즘에는 점집을 찾기도 어려워졌습니다.

 

제가 돈을 내고 점을 보았던 것은 아마도 아내와 결혼하기 한두 해 전쯤 아내와 함께 점집을 찾았던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듯합니다.  어렸을 때는 어머니가 어느 점집에 들러 가족들 사주며 운세를 모두 보고 와서는 저희 형제들에게 들려주었던 적은 한두 번 있었던 듯합니다.  요즘에도 제 주변에는 심심풀이로 점을 보러 다니는 사람들을 가끔 만나곤 합니다.

 

문명이 발달할수록 점은 우리 주변에서 멀어지는 것이 아니라 점점 더 많아지는 게 사실인 듯합니다.  못 믿으시겠다구요?  그 이름만 달라졌을 뿐이지 인간의 길흉을 예측하는 점이나 무슨무슨 예보 또는 예측은 사실 같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만 그 적중률에 있어서는 차이가 나지만 말이죠.  예컨대 일기예보만 하더라도 단기예보는 잘 맞는 편이지만 장기예보는 적중률이 현저히 떨어집니다.  주가예측이나 경기예측도 비슷하지요.  이런 것들은 오히려 우리가 보는 점보다도 못한 적중률인 게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점은 미신으로 치부하며 터부시하는 반면 경기예측이나 주가예측을 두고 미신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개중에는 신기한 예보도 있더군요.  요즘은 미세먼지도 예보를 하고 내년 4월부터는 서울시에서 모기예보제를 시행한다니 점의 종류는 나날이 늘어날 것만 같아요.  예보를 하는 것도 그 주체에 따라 성향이 조금씩 차이가 나는 듯 보입니다.  가령 장기 기상예보는 늘 최악의 상황을 말하고, 주가예측은 항상 최상의 상황을 가정하지요.  올해만 하더라도 올 겨울은 눈도 많고 혹독한 추위를 예보했었는데 지금까지는 그렇지도 않은 듯 보이니 적중률은?  글쎄요.  제가 보기에는 형편없어 보이네요.  주가예측도 올초에는 상당히 높게 예상했는데 강보합 정도였으니 예측은 빗나가도 한참이나 빗나간 것입니다.

 

그런데 기관에 따라 왜 이런 예측을 하고 사람들은 왜 어떤 예측은 기억하고 어떤 예측은 기억조차 하지 못할까요?  제 생각은 이렇습니다.  기상청 장기예보가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여 말할 경우 이 예보가 맞을 경우 잘 맞는다고 할 테고 맞지 않았을 경우는 날씨가 좋았을 테니 그런 예보가 있었는지조차 기억하지 못할 듯합니다.  그러나 주가예측은 주가가 상승하든 하락하든 손해를 보는 사람과 이익을 보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니 기왕이면 낙관적으로 예측하는 것 같아요.  그렇지만 예측을 믿었다가 손해를 본 사람들은 원망과 함께 오래도록 기억하겠죠.

 

아무튼 예보든 점이든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동일합니다.  비록 그 기법이 과학적이냐 비과학적이냐의 차이는 있겠지만 말이죠.  미래는 신의 영역이 아니겠습니까?  문명이 발달할수록 불확실성은 증가하고 그에 따라 우리 인간은 점이든 예보든 그 무엇엔가 더욱 의존하게 되겠지요.  그러나 과학이 발달해도 100% 정확한 예보는 존재하지 않을 듯 싶군요.  점이든 또는 예보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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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en 2013-12-31 16: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꼼쥐 님의 글을 읽으니 문득 어떤 책 속의 한 구절이 떠오릅니다. 그 책의 원제목이 'AGAINST THE GODS'였던 만큼 흥미로운 내용들이 많았는데 아마도 가장 인상에 남았던 구절이 다음 내용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 * *

확률은, 확률에 의해 행동하는 것이「합리적」이라는 판단이 나올 때만 중요성을 가질 수 있다. 그리고 확률에 대한 의존은 확률을 어느 정도 고려해서「행동해야 한다」는 판단이 설 때만 정당화될 수 있다.확률이 우리에게「인생의 지표」가 되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다. 존 로크(Tohn Locke)가 말했듯이, 신은「우리의 관심사 대부분에」단지 미광(微光)만을 부여하셨다. 내가 여기에 부연해 덧붙인다면,「신은 우리에게 확률이라는 미광만을 부여 하셨다」라고 하겠다. 이는 가정하건대, 신이 우리를 놓고 즐거워하셨던「평범(Mediocrity)」과「수습기간(Probationership)」의 상태에 걸맞은 표현일 것이다.


꼼쥐 2014-01-04 11:39   좋아요 0 | URL
멋진 표현이네요.
신은 정말이지 우리 인간에게 확률이라는 미광만을 부여한 것 같아요. 우리는 그 미광을 붙잡고 떼를 쓰고 있구요. ㅎㅎ

세실 2014-01-01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도서관에도 다가올 인사를 앞두고 유난히 말이 많은 사람이 있습니다. 누군 어디가고, 누군 어디가고..마치 인사파트에 있는 사람처럼요. 늘 엇나가지만 말의 양은 줄어들지 않네요. 별명이 오뻥입니다. 살아가는 방법이 참 다양하죠? ㅎㅎ

꼼쥐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건강한 한해 되시길 빕니다.
새해엔 더 자주 뵈어요~~~~

꼼쥐 2014-01-04 11:41   좋아요 0 | URL
어느 조직에서나 그런 사람은 한둘 있게 마련이지요.
아마도 천성적으로 그렇게 되나 봅니다. 눈치를 주고 주의를 줘도 잘 고쳐지지 않는 걸 보면 말이죠.

세실님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좋은 글 많이 올려주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