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란집
박완서 지음, 이철원 그림 / 열림원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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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도 하지요.  책을 읽다 보면 그 계절과 딱 맞는 그런 책과 만날 수 있다는 게.  혼잡한 거리에서 우연히 친한 친구와 마주치는 그런 경우처럼 말입니다.  한결 부드러워진 바람결과 나날이 도타워지는 봄의 기운이 나를 인도했던 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누구나 다 그렇겠지요.  숨죽였던 계절이 기지개를 켜는 이맘때면 세월의 켯속에 꽁꽁 숨겨져 있던 추억 한토막쯤 풀어내어 한나절 그 추억 속에서 노닐고 싶은 심정.

 

박완서 작가의 유고집 <노란집>은 그런 책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작가와 나는 일면식도 없고 생전에 어떤 인연의 끈으로 엮여진 관계는 아니었을지라도 마치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인 양 스스럼없이 내 속내를 드러낼 수 있을 것만 같습니다.  봄의 기운이 소리가 되어 터져나오기에는 조금 이른 이 계절에 작가가 들려주는 소소한 일상의 추억들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습니다.  긴장과 불안 속에서 한동안 잊고 지냈던 작은 것들의 소중함, 그 이야기들이 얼음장 같던 내 마음을 사르르 녹입니다.  나는 저으기 안심하며 푸근해지는 것입니다. 

 

"설이 지나고 제법 해가 길어진 어느 날 아침이었다.  곧 해가 뜨려나, 파스텔 조의 노을빛을 받은 숲의 나무들이 흡사 꼼지락대는 것처럼 보였다.  겨우내 맨몸으로 삭풍을 견딘 늠름하고도 날카로운 가장귀들이 마치 간지럼을 참듯이 들썩이고 있는 게 암만해도 수상쩍었다.  나는 숲을 좀 더 자세히 보려고 마당 끝까지 걸어갔다.  우리 집 마당 끝은 조그만 시냇물을 사이에 두고 숲과 연결돼 있다.  바람 없는 조용한 새벽이었다."    (p.126)

 

어느 책이건 글에서 작가 자신의 성품이 투명하게 드러나는 경우는 참 드문 경우입니다.  글을 잘 쓰고, 못 쓰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글 속에서 작가의 모습을 또렷이 그릴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나는 박완서 작가의 작품에서(그것이 소설이든 산문이든 간에)는 언제나 살아생전의 작가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작가의 솔직한 성격과 똘망한 기억력 덕분이겠지요.  자신의 삶을 솔직하게 고백할 수 있다는 것, 굳이 감추거나 숨길 필요가 없다는 것만으로도 작가의 삶은 있는 그대로의 소설이자 잘 씌어진 한 권의 산문집일 것입니다.

 

"나는 시골에서 조부모님을 모시고 대가족 속에서 자랄 때부터 거짓말을 못하는 아이로 인식되어왔다.  거짓을 말하거나 남의 것에 손대는 것을 가장 수치스러운 걸로 교육받았고 구태여 그걸 어길 만한 일도 없었기 때문에 저절로 그리 된 것이었을 텐데도, 어른들 사이에서 나는 '쟤는 제 털 빼, 제 구멍에 넣을 애'로 통했다.  엄마도 칭찬의 뜻보다는 융통성 없음에 대한 한탄 비슷하게 그런 말을 했지만 속으로는 그런 나를 믿음직스럽게 여기고 예뻐하신다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p.234)

 

삶의 질곡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 마치 다정한 할머니가 어린 손녀의 포동한 손을 붙잡고 자신의 삶을 차분히 들려주는 듯한 동화 같은 이야기들은 그 자체로 감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감정의 찌꺼기들일랑 흐르는 세월에 훠이훠이 날려보내고 맑고 투명한 이야기들만 고스란히 남아 있는 듯합니다.  나이가 든다는 것은 그런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박경리 작가가 박완서 작가를 아껴하셨던 까닭도 그런 이유겠지요.

 

"내가 죽도록 현역작가이고 싶은 것은 삶을 사랑하기 때문이고 노년기 또한 삶의 일부분이기 때문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삶의 가장 긴 동안일 수도 있는 노년기, 다만 늙었다는 이유로 아무 일도 일어날 수 없다고 여긴다면 그건 삶에 대한 모독이다.  아무것도 안 일어나는 삶에서 소설이 나올 수는 없다."    (p.121~p.213)

 

밤이 깊었습니다.  배를 쓸어주던 할머니의 손길처럼 순한 달빛입니다.  어쩌면 나는 오늘 그렇게 순한 잠을 잘 듯합니다.  꿈결에서 새싹의 수런거림을 들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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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12 22: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4-02-14 19: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TV를 자주 보는 것은 아니지만 이따금 아무 목적도 없이 목을 길게 늘인 채 TV 화면에 빠져드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렇다고 어떤 프로건 상관없이 켜진 대로 무작정 보는 것은 아닙니다.  예컨대 뉴스는 잘 보지 않습니다.  세상의 끔찍한 사건이란 사건은 죄다 모아 놓고 말하면서도 무심한 듯 아무런 표정도 없는 아나운서를 볼 때마다 세상 공포영화 중에 그렇게 무서운 공포영화도 없겠다 싶어서입니다.

 

그렇다고 예능 프로를 즐겨 보는 것도 아닙니다.  무엇이 웃긴지, 어느 시점에서 웃어야 하는지 도통 감을 잡을 수가 없어서입니다.  게다가 코맹맹이 소리로 세살배기 애기 흉내를 내는 어느 코미디언의 나이를 우연히 알게 되었을 때 저는 놀람보다는 공포를 느끼곤 합니다.  요즘 젊은이들은 나이 스물이 넘어도 성인으로서의 티가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다 늙어 꼬부랑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어서야 철이 드는 것인지...

 

이렇게 쓰고 보니 제가 마치 죽음을 눈 앞에 둔 노인네가 된 기분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단지 취향이 다를 뿐이죠.  저는 자연 다큐멘터리나 인문학 강의 등을 즐겨 봅니다.  자연 다큐멘터리를 볼 때마다 그 생생한 화면이나 놀라운 촬영 기술에 감탄하곤 합니다.   '세상 좋아졌구나!'하는 감탄이 저절로 터지고 기술의 발달에 새삼 감사하게 되지요.

 

그럼에도 어쩌다 예능 프로를 우연히 보게 되는데 예전과는 확연히 달라졌구나 느끼는 게 있습니다.  그것은 정말 까무룩 잠드는 낮잠처럼 들었던 생각입니다.  젊은이들이 장악한 모든 프로그램에서 출연자의 엣모습과 현재의 모습을 자주 비교하여 보여주는 것에서 저는 '아, 이제 물질문명의 정점에 도달했구나'하고 느꼈던 것입니다.  딱히 재미있지도 않고, 앞뒤의 연계성에서 그닥 필요한 장면도 아니었는데 출연자의 옛모습을 보여주며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것은 왜일까요?  제 생각에 그것은 과거는 무조건 나쁜 것, 과거는 무조건 촌스러운 것이라고 말하는 기업 광고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느꼈습니다.  과거를 부정하고 폄훼함으로써 현재의 수요를 창출하려는 노력은 참으로 힘겨워 보였습니다.

 

그런 장면들을 최근 들어 여기저기서 자주 보게 되었다는 것, 뉴스와 비슷한 아침 프로그램에서도 쉽게 볼 수 있다는 것은 어떤 광고로도 수요를 늘릴 수 없는 기업의 다급함이요, 정부의 아우성처럼 들렸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필요를 느끼지 않을 정도로 물질이 넘쳐나는 시공간에 도달한 것입니다.  경제지표를 봐도 알 수 있습니다.  미국의 ISM 제조업지수를 보아도 쉽게 알 수 있지요.  미국은 그동안 수요를 늘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돈을 시장에 쏟아부었던 것일까요.  그럼에도 수요는 예전처럼 늘어나지 않습니다.

 

저는 제가 했던 그런 생각을 통해 미래에 대한 불안이나 암울한 경제 전망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물질문명의 종말과 함께 사람 냄새 나는, 사람다운 세상이 오려나 하는 막연한 희망을 품는 것입니다.  내가 쓰지 않는 물건을 가난한 이웃에게 나누어 주고, 푸근한 미소를 덤으로 줄 수 있는 그런 세상 말입니다.  제 꿈이 너무 야무진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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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생이 시골이어서 그런지 나는 집을 고를 때도 인근에 산이 없으면 왠지 불안하고, 그런 곳에서는 아무리 오래 살아도 쉽게 정을 붙이지 못한다.  그런 까닭에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 근처에도 야트막한 산이 있다.  평일 아침에 그 산을 매일 오르다보니 몇 년 되지 않아 나는 그 산의 속살을 훤히 꿰뚫게 되었다.  하여, 요즘처럼 밤이 긴 계절에도 달빛도 한 줄기 없는 캄캄한 길을 손전등도 없이 잘 걷는다.  아마 눈을 감고 걸어도 눈 뜬 초행자 정도는 따라 잡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요즘 오르는 산과 내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고향의 산천과는 산에 사는 식물들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눈으로 뻔히 보면서도 그 이름을 모른다는 게 어찌나 얼띠고 한심하던지.  가끔은 산에서 우연히 만나는 사람에게 묻기도 하고, 이따금 식물도감도 찾아 보면서 이제는 어지간한 것들의 이름은 외우게 되었지만 처음에는 여간 답답한 게 아니었다.  식물이나 사람이나 제가 나고 자란 곳을 떠나 낯선 곳에 자리를 잡아  정착하는 데는 시간도 걸리고, 품도 드는 일이라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산에는 소나무, 아카시아, 은사시나무, 졸참나무, 밤나무, 쥐똥나무, 산벚나무, 찔레나무 등 수종이 비교적 다양한 편이지만 요즘 내 눈에 들어오는 나무는 밤나무와 졸참나무다.  미끈하게 쭉 뻗어 몸피도 야리야리한 은사시나무와는 달리 가지도 많고 몸통에 잔주름도 많은 그 나무들이 내 눈을 잡아 끌었던 것은 단지 겨울이 다 지나도록 칙칙한 작년의 갈잎을 다 떨구지 못하고 있다는 이유 하나였다.  이제는 말라 오그라든 채 가지 끝에 간신히 매달려 있는 나뭇잎들.  때로는 약한 바람에도 어떤 무게감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가벼워진 그 잎들이 그렇게 겨울을 나는 이유가 궁금했다.

 

손을 대면 금방이라도 와삭 부서질 것 같은 마른 갈잎이 매서운 겨울 눈보라를 이기고 봄철 새순이 돋을 무렵이 되어서야 묵은 옷을 벗는 이유는 도대체 뭘까?  줄기를 보호하는 보온의 목적이 있는 것도 아닐 테요, 그렇다고 잡아먹힐까 두려워하여 허세를 부리는 것도 아닐 텐데 말이다.  식물학자들이 들으면 웃겠지만 나는 요즘 그 나무들이 배려심이 많은 까닭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새순이 막 돋아날 무렵, 꽃샘추위로부터 여린 새싹을 지켜주기 위해 겨울 한철을 그렇게 악착같이 매달려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강한 봄바람을 타고 어딘가에 있을 어린 새싹을 찾아 멀리 날아가는 갈잎들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 무한의 사랑과 배려심에 생각이 이르자 나는 밤나무와 졸참나무를 새로운 눈으로 보게 되었다.  게다가 가지에 붙어 엄혹한 겨울을 나기 위해서는 잎의 수분을 모두 날려보내고 최대한 가벼워져야 한다는 사실도 갈잎을 통해 배웠다.

 

요즘 나는 아침에 산을 오를 때마다 내 손이 닿을 수 있는 등산로 주변의 밤나무와 졸참나무에 가만히 손을 얹고 그 사랑과 배려를 생각하곤 한다.  식물도 그럴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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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 - 최인호 유고집
최인호 지음 / 여백(여백미디어)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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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운 날이었습니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다들 춥다는 말을 먼저 하더군요.  입춘이라는데 이렇게 추울 수가 있냐구 말이죠.  마치 누군가에게 떼를 쓰는 듯한 말투였습니다.  저는 어린 시절을 강원도 두메 산골에서 보냈던 터라 어지간한 추위쯤이야 그럭저럭 잘 견딘다고 자신하지만 혹시 모르겠습니다.  그때보다 더한 추위가 있을 수도 있으니 저의 생각도 한낱 인간의 오만함에 불과한 것일지도요.  언제였는지 기억도 가뭇하지만 아마 초등학교 몇 학년 때였나 봅니다.  어찌나 추웠던지 학교가 파하고 집으로 가는 길이 그렇게 멀어 보일 수가 없었습니다.  매년 겨울이면 손과 발에 동상을 달고 살았었고, 손등이 터서 쩍쩍 갈라지곤 했었지만 그러려니 하며 지냈었는데 그날은 추워도 너무 추웠던 날이었습니다.  집에 도착하여 아랫목에 깔린 이불 속으로 꽁꽁 언 손과 발을 넣었을 때 어찌나 아리고 아프던지 엉엉 소리 내어 울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의 기억은 지금도 잘 잊혀지지가 않습니다.

 

요즘은 저도 이따금 죽음에 대하여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혹독한 시련 속에서도 무작정 사는 것이 행복한 것인지, 아니면 이른 나이여도 편안한 죽음을 맞는 것이 더 행복한지 지금으로서는 가늠을 하기 어렵지만 제게도 언젠가는 피할 수 없는 죽음이 찾아올 것이라는 엄정한 미래에 대해 생각해보곤 합니다.  오늘 저는 최인호 작가의 유고집 <눈물>을 읽었습니다.  죽음 앞에서는 아무리 가까운 사람도 그 고통을 같이 할 수 없겠지요.  그 절대 고독의 순간에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대할 것인지, 허망한 인간 삶을 손에서 놓고나면 나는 그 무엇에 의지한 채 이 세상을 하직할 것인지, 하는 이런저런 생각들로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작가의 <산중일기>를 읽고 리뷰를 썼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작가는 이미 우리 곁을 떠났고 남아 있는 우리들은 그의 유고집을 읽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이렇듯 삶과 죽음의 경계는 명확한 것이겠지요.  2008년에 침샘암 진단을 받고 투병하면서도 작가로서의 열정을 불태웠던 고 최인호 작가는 생을 다하는 순간까지 희망을 잃지 않았지만 인간이 갖는 숙명적인 나약함 앞에서 절규하는 것 같았습니다.

 

“오늘 자세히 탁상을 들여다보니 최근에 흘린 두 방울의 눈물 자국이 마치 애기 발자국처럼 나란히 찍혀 있었습니다. 이상한 것은 가장자리가 별처럼 빛이 난다는 겁니다.  부끄러운 마음에 알코올 솜을 가져다 눈물 자국을 닦았습니다. 눈물로 탁상의 옻칠을 지울 만큼 저의 기도가 절실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탐스러운 포도송이 모양으로 흘러내린 탁상 겉면의 눈물 자국도 제게는 너무나 과분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알코올 솜으로 닦으면 영영 눈물 자국이 없어질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뜻밖에도 알코올이 증발해 버리자 이내 눈물 자국이 다시 그대로 제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p.13)

 

그렇습니다.  작가는 1987년 6월에 세례성사를 받았고 2013년 9월에 세상을 마치기까지 그는 오직 하느님을 의지하여  살았던 듯합니다.  '최인호 베드로'로서 말입니다.  5년여의 투병기간을 작가는 '고통의 축제'라고 했습니다.  고통 속에서 작가는 그 축제를 온전히 즐겼다고 저는 감히 말하지 못하겠습니다.  그러기에는 인간이 너무도 미약하고, 너무도 쉽게 절망하기 때문입니다.  죽음을 마주한 한 인간으로서의 작가는 그가 끝까지 믿고 의지했던 하느님에게 고해성사를 하듯 말합니다.  죽음에 대한 자신의 두려움과 먼저 세상을 떠난 작가들의 하느님에 대한 믿음의 증거들을 말이죠.

 

끝없이 이어지는 신앙고백에 읽는 독자에 따라 혹 불편하다 느끼실 분도 있을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꼭 그렇게만 볼 것도 아닌 것이 우리 모두는 언젠가 작가처럼 죽음을 맞는 순간이 반드시 올 것이고, 그때 우리들도 남겨진 사람들에게 하고픈 말이 분명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자신이 믿는 신앙이든, 자신의 신념이든, 혹은 자신의 삶에 대한 후회나 자책일지라도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은 없다고 봅니다.  살아 있는 자는 그렇게 대물림하듯 배우는 것이겠지요.  예컨대 이런 구절에서 저는 작가의 말에 깊이 공감했습니다.

 

"결국 인간의 용서는 행위가 아니라 인간이 하느님으로부터 이미 용서받은 존재이자 사랑받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는 발견입니다.  하느님으로부터 똑같이 비를 맞고 똑같이 햇빛을 받는 용서받은 존재임을 인식하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들 인간이 할 수 있는 용서의 시작인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하느님 앞에 있어서는 이미 용서받은 자들인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용서는 '내가 너를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이미 용서받은 너'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내가 너를 용서한다면 베드로처럼 일곱 번도 용서할 수 없겠지만 그 형제가 이미 하느님으로부터 용서받은 존재임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수만 번이라도 너를 용서할 수 있을 것입니다."    (p.210)

 

참으로 재주가 많은 작가였습니다.  살아서의 작가는 누군가로부터 질시와 원망을 듣기도 했을 터이고, 인간으로서의 잘못도 많았을 줄로 압니다.  그러나 그의 죽음과 함께 그 모든 것들도 서서히 잊혀지겠지요.  다만 그의 작품은 우리가 죽은 뒤에도 우리의 후손들에게 읽히고 또 읽혀질 것입니다.  어쩌면 작가는 그가 부여받은 재능을 다 펼치고 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으로 그가 할 일은 다 한 것이 아닐까요?

 

입춘이라는데 봄은 여전히 멀리 있다고 느끼셨나요?  바람이 휩쓸고 간 하늘은 더없이 푸르렀습니다.  이렇게 추운 날에도 구름 한 점 없었던 것은 얼마나 큰 축복인지요.  그렇게 생각하시면 봄은 우리 곁으로 성큼 다가올 듯합니다.  먼저 세상을 떠난 사람들의 보살핌으로 오늘 우리는 각자의 삶을 또 그렇게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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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를 더할수록 명절을 보내는 것이 더욱 힘겹습니다.

마치 내게 남겨진 에너지를 각혈을 하듯 어딘가에 모두 게워내고 돌아온 느낌입니다.  오가는 도로에, 사람들과의 대화에, 만나는 사람들의 얼굴에 새겨진 고단함에, 그리고...

무엇보다 견딜 수 없는 것은 감동이 없는 만남이 아닐까 싶습니다.  감동까지는 아니어도 적어도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시간들은 나로 하여금 잠시도 견딜 수 없게 합니다.

 

삶이란 3차원의 실재(實在)에 심각(心覺)을 더하는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보고, 듣고, 느끼는 현실에 마음을 더하는 일, 삶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듯싶습니다.  마음이 느껴지지 않는 현실은 삶에서 죽은 시간이자, 지워진 시간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흔하디 흔했던 감동이 썰물처럼 스러지고 있음을 시시각각 느낍니다.  어쩌면 나는 지워진 시간 속에서 그림자로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철수의 <나뭇잎 편지>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살아 보면, 인생은 외롭게 혼자인 게 제 모습인 듯합니다.

제 그림자건 제 내면이건 제가 저를 길동무 삼아 살아가는 게 인생이지요.

어른이 된다는 건 그렇게 혼자 걷는 데 익숙해지고 태연해지는 것이기도 하고요."

 

저는 아직 어른이 되려면 멀었나 봅니다.

내가 바로잡을 수 없는 다른 사람의 말과 행동에 하시로 휘둘립니다.  내 말과 행동에 나 아닌 다른 사람들이 나처럼 또 그렇게 상처를 받고 많이 외로웠겠지요?  제 몸보다 마음이 먼저 늙는다는 건 참으로 서글픈 노릇입니다.  아내의 처진 어깨가 내 눈에 아프게 박힙니다.  이런저런 풍경들 앞에 그저 담담할 수 있는 날은 언제일까요?

 

가족들과 헤어져 빈 숙소로 돌아온 오늘, 차 한 잔을 앞에 놓고 진한 고요를 우려내고 있습니다.

비 그친 하늘에는 안개가 자욱하고, 먼 산이 우련하여 마음마저 흩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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