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이듦에 대한 변명 - 이야기꾼 김희재가 전하는 세월을 대비하는 몸.마음 준비서
김희재 지음 / 리더스북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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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천 냥이면 눈이 구백 냥'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김희재 작가의 <나이 듦에 대한 변명>을 읽은 독자라면 아마도 '몸이 천 냥이면 귀가 구백 냥'이라고 정정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맛깔나는 대사를 잘 옮겨놓았는지요.  우리가 일상에서 듣는 흔한 대화도 귀가 좋지 않으면 이렇게 실감나게 옮길 수는 없다며 감탄하고 또 감탄하였습니다.  대사를 위주로 쓰는 시나리오 작가라서 그럴까요? 

 

사실 이 책은 나이 들면서 겪을 수밖에 없는 신체적, 정신적 변화와 그것을 바라보는 사회의 불편한 시선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그닥 유쾌한 내용은 아닙니다.  그러나 작가의 적절한 대사 발췌와 그 상황에 대한 원인을 설명함으로써 젊은 사람들에게 이해를 구하며 변명 아닌 변명을 하고 있는 셈입니다.  요즘 들어 100세 시대라는 말을 곳곳에서 듣게 되지만 사실 예전보다 오래 산다는 게 축복일까 하는 데에는 여전히 의문입니다.  왜냐하면 노인을 바라보는 곱지 않은 시선은 갈수록 악화될 테니까요.  그런 환경에서는 더이상 살기 싫다며 박차고 나와 노인들만을 위한 나라를 따로 세울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아무튼 그렇습니다.  작가도 그런 의미에서 젊은 사람들에게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았을 테구요.  잘 좀 봐달라고.

 

"누구에게나 절대 공평 사항으로 흘러가는 세월은 사람의 몸에 다양한 흔적을 남깁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나이가 뿌리고 간 흔적은 대체로 힘들고, 아프고, 추접스럽고, 보기에 좋지 않은 것들 뿐입니다.  젊은 자식과 후배들은 나이 든 부모와 선배의 추접함이 개인의 불결함이나 게으름, 혹은 낙후된 취향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저 역시 그런 오해에서 자유롭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p.9)

 

나이가 들수록 따뜻하고 사려깊은 사람으로 변해가는 사람도 있겠습니다만 대체로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고집 세고 독선적인 성향으로 변해가는 듯합니다.  얼마 전 들렀던 처갓집에서 저는 작년과는 많이 변한 장인어른의 모습을 보며 조금 쓸쓸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여든이 넘으신 연세에도 하루가 멀다 하고 인근의 산을 오르셨고, 하루에도 몇 번씩 샤워를 하던 분이셨는데, 이제는 한 손에 TV 리모콘을 꼭 쥔 채 안락의자에 앉아 하릴없이 채널을 돌리거나 그것도 지치는지 가끔 졸다 깨다 하셨습니다.  아내는 그게 못마땅했는지 아들놈에게 '할아버지는 사람을 잃고 대신 TV를 독차지했다'고 말하더군요.

 

작가는 뽀글이 파마, 여자의 화병, 배불뚝이 아저씨, 남자의 눈물, 깜빡거리는 기억력, 고약한 입 냄새 등 나이가 들면서 나타나는 여러 증상들을 유쾌한 필치로 펼쳐보임으로써 공감과 연민의 마음을 이끌어 냅니다.  그러나 저자가 들려주는 이 이야기들이 젊은 사람들에게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의문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이런 일들이 아득히 먼 미래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너희도 금방이다'라고 백 번 반복하여 말한다 할지라도 변할 리 없다는 것을 잘 압니다.  노화의 과정을 찬찬히 지켜보며 자연스럽게 익숙해지던 예전 대가족 문화와 지금은 너무도 많이 변했습니다.

 

"이거 할아버지 방에 좀 갖다 드려."

"싫어, 엄마가 가."

"엄마 지금 바쁘잖아."

"싫어 할아버지 방에서 냄새난단 말이야!"

"냄새는 무슨 냄새가 난다 그래!"

"방에서도 나고 할아버지한테서도 난단 말이야!  그래서 엄마도 할아버지 노인학교 가시면 매일 창문 열면서 '아우, 냄새야!' 그러잖아!"       (p.190)

 

작가가 들려주는 열아홉 편의 이야기는 중,장년의 나이가 된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얘기인 양 고개를 끄덕일 것입니다.  또 그 속에서 위로를 받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한 편 한 편의 이야기마다 그 상황에 맞는 적절한 대사로 시작하여 그 상황에 이르게 된 까닭을 설명하고 마지막에는 시 한 편으로 마무리를 짓고 있습니다.  이름하여 <세월에 보내는 연가>가 그것이지요.

 

누구나 흐르는 세월을 막을 방법은 없습니다.  그렇다고 세월을 거슬러 젊어질 방법 또한 찾지 못합니다.  그러나 이 당연한 순리를 겪어보지 않은 사람에게 납득시키는 것도, 무작정 이해를 바라는 것도 무리가 있습니다.  쓸쓸하고 서글픈 일이지만 나이 든 사람이 수용하고 견딜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다고 말한다면 너무 잔인한가요?  그러나 제 생각은 그렇습니다.  지금 젊은 사람들도 나이가 들면 자연스레 알게 될 테니까요.  몸으로 겪지 않으면 미처 알 수 없는 것들이 세상에는 너무나 많다는 사실도 말이죠.

 

"마음이 몸의 노화를 받을 수 있을 만큼 속도를 맞춰주고, 몸이 마음의 성숙을 기다려줄 만큼 속도를 조절해주는 것, 그것이 내가 빌려 쓰고, 떠나는 날에 땅에 두고 갈 내 몸과 다투지 않고 사는 방법일 것입니다.  부러지고 무너지며 다투지 않을 수 있는 방법 말입니다."    (p.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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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년 전 딱 이맘때쯤 세상을 등진 사람이 있습니다. 

그때 그분의 나이는 쉰두 살이었습니다.  문득 오늘 그 분 생각이 났습니다.  고3 수험생인 딸과 대학 2학년인 아들,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와 함께여서 세상 부러울 게 없다며 입에 미소를 달고 사셨던 자상한 가장이자 남편이었습니다.  그 분은.  그러나 어느 토요일 오후, 공원을 산책하던 그 분은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그렇게 사랑하던 가족들에게 '잘 있으라' 말 한마디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습니다.  어쩌면 과로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인은 비록 심장마비였지만 말입니다.

 

이따금 보는 TV에서 자식들 웃는 얼굴을 보면 모든 피로가 씻은 듯 사라진다 말하는 어느 가장의 지친 얼굴을 볼 때가 있습니다.  흔히 자식들의 재롱이나 아내의 애교가 '피로 회복제'라고 말하더군요.  물론 직장에서 퇴근하여 편안한 휴식의 시간을 갖는 사람에게는 맞는 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아이들의 웃음을 보며 지친 몸을 이끌고 다시 일터로 향하는 사람에게 그것은 피로 회복제가 아니라 과로 촉진제가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역치(閾値)라는 용어가 있습니다.  생물체가 자극에 대한 반응을 일으키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자극의 세기를 나타내는 값을 뜻하는 말이죠.  이를테면 우리에게 어떤 자극이 주어졌을 때 신경계로 그 정보를 이송하여 반응을 이끌어내게 하는 최소한의 자극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외부의 자극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것은 인간의 생존을 위한 필수조건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신경 회로는 육체와 정신이 소통하는 통로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피로가 쌓이는 상황인데 아이의 웃음을 보며 육체의 피로를 잊거나 무시한다는 것은 어쩌면 육체와 정신의 소통을 끊겠다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나는 언제나 육체에는 육체에 필요한 원칙이 있고, 정신에는 정신에 필요한 원칙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피로를 호소하는 육체를 돌보지 않는다는 것은 육체의 원칙을 무시하는 매우 잘못된 행동입니다.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는 말도 있듯이 육체가 건강하지 못하면 주변 사람에게 짐만 될 뿐입니다.

 

혹자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처음에 언급했던 그분처럼 앓지 않고 죽는 것도 가족을 위하는 길이 아니냐고 말입니다.  나의 생각은 다릅니다.  적어도 인간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이별을 준비할 시간을 줘야 한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갑작스러운 죽음은 자신은 편할지 모르지만 남은 사람들에게는 견딜 수 없는 상처가 됩니다.  유산만 많으면 문제 없다구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이들에게는 유산과 상관없는 그들의 인생이 따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많은 유산을 남겨줬다 한들 지키지 못한다면 또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이른 나이에 부모 중 한 명을 잃는다는 것보다 더 큰 아픔이 있을까요?  그것은 분명 아이들에 대한 크나 큰 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쓰다 보니 매우 우울한 얘기가 되어버렸군요.  '피로 회복제'인지 '과로 촉진제'인지 잘 판단할 일입니다.  그게 자신과 가족을 지키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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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둠의 저편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임홍빈 옮김 / 문학사상사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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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의 의식의 세계, 말하자면 생각의 영역인 그곳은 오롯이 그 사람만의 고유 영역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다른 누군가의 영역과 중첩되거나 공유될 만한 그런 공간은 없는 것일까요?  만일 그렇다면 사람은 근본적으로 외로울 수밖에 없는 존재이겠군요.  고성능 카메라를 들이댄다 하더라도 그곳은 결국 '촬영 불가'의 견고한 딱지를 붙인 채 굳게 잠겨있을 테니까요.

 

그러나 나는 오늘 의식의 영역과 현실의 영역, 두 곳 모두를 촬영할 수 있는 카메라를 둘러 메고 이야기를 시작하려 합니다.  예컨대 <어둠의 저편>을 보여주려는 것이죠.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어둠의 저편>을 소재로 말입니다.  핼리캠을 타고 하늘 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거대한 의식의 총합은 현실에서의 거대 도시와 맞닿아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아주 멀리서 바라볼 때, 개개인의 영역은 너무도 희미하고 작은 것이기에 부분으로서의 개인적 영역은 눈에 띄지도, 주목을 받지도 못합니다. 

 

"시간을 가지고, 자기의 세계 같은 것을 조금씩 만들어왔다는 생각은 들어요.  그런 세계에 혼자 있으면, 어느 정도 안도감이 생기거든요.  하지만 그런 세계를 일부러 만들 수밖에 없다는 것 자체가, 나 자신이 상처받기 쉬운 약한 인간이라는 뜻 아닐까요?  그리고 그 세계란 것도 세상의 눈으로 보면, 아주 작고 보잘것없는 세계에 불과하잖아요.  골판지 상자로 만든 집처럼,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어디론가 날아가 버릴 듯한......"     (p.231)

 

이 소설의 주인공인 '마리'의 목소리가 들리는군요.  지금 시각은 오후 11시 56분입니다.  마리는 지금 도시의 어느 골목에 위치한 패밀리 레스토랑 '데니스'에 홀로 앉아 책을 읽고 있습니다.  사건은 '마리'의 언니 '에리'의 동창이며, 한때 언니와 함께 더블 데이트를 하기도 했던 '다카하시'를 만나면서 시작됩니다.  7살에 어머니를 여의고 때마침 아버지는 교도소에 복역하는 바람에 고아 아닌 고아의 경험을 하게 되었던 '다카하시'는 우연히 만난 '마리'가 그저 반갑기만 합니다.  '다카하시'는 지금 트럼본 연습을 하러 가는 중이었습니다.  사실 '다카하시'는 음대생이 아닌 법률을 공부하는 법학도이지만 트럼본의 매력에 빠져 공부는 뒷전이고 악기에 빠져 지내는 중입니다.

 

그 시각 언니 '에리'는 잠에 빠져 있습니다.  사실 '에리'는 생존에 필요한 기본적인 행위만 하면서 두 달째 잠들어 있는 상태입니다.  침대에 누워 세상 모르고 잠들어 있는 '에리'의 방에는 텔레비전이 한 대 있습니다.  텔레비전의 화면에는 '에리'만의 생각의 영역, 그 무의식의 세계가 중계되고 있습니다.  '마리'보다 두 살 위인 언니 '에리'는 어려서부터 빼어난 외모와 약한 체질로 부모님의 사랑과 관심을 독차지하며 자랐습니다.  '에리'는 잡지 모델로 활동하며 TV에도 출연하였죠.

 

"하지만 에리는 그렇게 할 수가 없었어.  어렸을 때부터 주어진 역할을 잘 소화하고, 주위 사람들을 만족시키는 것이, 그녀가 해야 할 일처럼 돼버렸으니까.  마리의 말을 빌리면, 어엿한 백설공주가 되려고 애써 노력해 왔던 거지.  확실히 남들이 잘한다 하고 떠받들어 주었다고 해도, 그건 때로는 견디기 힘들었을 거야.  인생의 가장 중요한 시기에, 자기라는 개성을 확립해 나갈 수가 없었을 테니까."    (p.179)

 

'다카하시'의 말입니다.  '에리'에 대한 '다카하시'의 분석인 셈이죠.  때로는 가까이 있는 가족보다 멀리 있는 타인이 그 사람을 더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데니스'에서 책을 읽던 '마리'는 러브호텔 '알파빌'의 매니저인 '카오루'를 만나게 됩니다.  '다카하시'는 이미 지하 연습실로 떠난 뒤였죠.  '알파빌'에서는 그날 밤 중국인 매춘부를 폭행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중국어를 할 줄 아는 사람을 찾던 중 '알파빌'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던 '다카하시'가 '카오루'에게  '마리'를 소개한 것입니다.

 

'에리'는 여전히 잠에 빠져있습니다.  미동도 없이 말입니다.  어느 순간 '에리'는 침대와 함께 텔레비전 화면 속으로 이동합니다.  그곳은 어떤 풍경도 없는 폐쇄된 공간입니다.  '에리'는 그 공간에서 잠이 깹니다.  그러나 이곳, 즉 현실의 영역으로 넘어올 수는 없습니다.  화면 속에서는 들리지 않는 외침만 보일 뿐이죠.

 

'마리'는 중국인 매춘부를 무사히 보냈습니다.  '알파빌'에는 '카오루'와 같이 일하는 '고오로기'가 있습니다.  귀뚜라미라는 뜻의 그녀 이름은 본명이 아닙니다.    회사원이었던 '고오로기'는 어떤 사건으로 인하여 쫓기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러브호텔이라는 익명의 공간을 전전하며 몸을 숨기고 있는 상태죠.  '마리'에게 고마움을 느낀 '카오루'는 스카이락'에서 음료를 대접합니다.  중국인 매춘부를 때리고 옷과 소지품을 탈취한 범인은 평범한 회사원인 사리가와입니다.  그는 텅 빈 사무실에서 야간근무를 하고 있습니다.

 

시간은 계속 흐르고 있습니다.  언니 '에리'는 다시 현실 속의 자신의 방으로 이동한 상태입니다.  '다카하시'는 잠깐의 휴식 시간에 '마리'가 있는 '스카이락'으로 찾아옵니다.  그들은 공원으로 이동하여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눕니다.  그리고 헤어집니다.  '마리'는 다시 '알파빌'로 자리를 옮겨 '고오로기'와 대화를 합니다.  '고오로기'로부터 들었던 인상깊은 말이 있군요.

 

"인간이란 결국 기억을 연료로 해서 살아가는 게 아닌가 싶어.  그 기억이 현실적으로 중요한가 아닌가 하는 것은, 생명을 유지하는 데 아무런 상관이 없지.  단지 연료일 뿐이야.  신문의 광고 전단지나, 철학책이나, 에로틱한 잡지 화보나, 만 엔짜리 지폐 다발이나, 불에 태울 때면 똑같은 종이조각일 뿐이지.  불이 '오, 이건 칸트로군'이라든가, '이건 요미우리신문의 석간이군'이라든가, 또는 '아, 이 여자 젖통 하나 멋있네'라든가, 그런 생각을 하면서 타고 있는 건 아니잖아."    (235)

 

연습을 마친 '다카하시'는 '마리'를 배웅하기 위해 함께 역으로 향합니다.  이제 어둠은 서서히 끝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데이트 요청을 하는 '다카하시'에게 '마리'는 다음 주에 중국으로 가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다카하시'는 '마리'에게 긴 편지를 쓰겠노라고, 그리고 느긋하게 기다리겠노라고 말합니다.  집에 돌아온 '마리'는 언니 '에리'의 방으로 들어갑니다.  '에리'는 여전히 잠들어 있습니다.  고장난 엘리베이터에서 자신을 꼭 안아주고 위로해주던 어린 시절의 언니 '에리'는 '마리'의 의식에서도 이미 멀어진 상태라는 걸 자각합니다.  '마리'는 언니의 침대에 같이 누워 눈물로 호소합니다. '제발, 돌아오라'고.  오전 6시 52분입니다.

 

하루키 데뷔 25주년 기념작인 <어둠의 저편>은 그동안 선보였던 작품과는 다소 이질적인 면을 갖고 있습니다.  가족의 문제를 깊이 파고든 점도 그렇고, 카메라의 영상이 바뀌는 것과 같은 화면 전환도 그렇습니다.  작가는 그 속에서 인간 의식의 단절과 개개인의 고독을 무미건조한 문체로 냉철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다카하시'와 '마리'의 만남을 통하여 개별적 인간의 의식의 공유에 대한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사랑하는 누군가에게 길고 긴 편지를 써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어둠이 다 끝나기 전에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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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는 사람들을 기꺼운 마음으로 바라볼 때가 있습니다.

세상에 갓 태어난 아기의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말입니다.  그렇게 한참을 바라보고 있어도 지루하다거나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을 만큼 즐거운 경험입니다.  그들은 마치 주제가 없는 영화의 한 장면처럼 제 시야에 갑자기 나타났다가 소리도 없이 금세 사라져갑니다.  뭐 하는 사람들일까?  사는 게 행복하다고 느낄까?  지금 어디로 가는 길일까?  부모님은 모두 살아계시겠지?  나와 연관도 없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별의별 의문과 추측 속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도 사는 재미 중의 하나인 것 같습니다.

 

무덥게 느껴지는 하루였습니다.

지면으로부터 층층이 쌓여가는 열기의 층화를 온 몸으로 감지할 수 있을 것만 같은, 나른한 졸음이 오후의 햇살 속에 길게 깔릴 것만 같은 그런 날이었죠.  무언가 분명한 목적을 갖고 분주히 오가는 사람들을 이쪽 그늘 속에서 한동안 바라보았습니다.  구경꾼을 의식하지 못하는 듯, 어쩌면 신경도 쓰지 않겠다는 듯, 사람들은 목적하는 곳을 향하여 끝없이 오가더군요.  그들과 나 사이에는 마치 투명한 창유리로 가로막힌 듯한 무위의 공간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자신의 구명보트에 몸을 누인 채 시간의 하류를 향해 떠내려 가고 있습니다.  의식의 덩어리들이 제각각 흩어졌다가 때로는 커다란 단위로 뭉쳐지기도 하고, 또 다시 분화되는 과정을 몇 번인가 반복하면 결국에는 작은 알갱이들로, 혹은 그보다 작은 먼지로 흩어지는 게 인생이 아닐까 싶습니다.  날씨 탓인지 축축 늘어지는 게 육체뿐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괜한 잡소리를 늘어놓는 걸 보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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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나 박람강기 프로젝트 3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안현주 옮김 / 북스피어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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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살을 받아 반짝이는 감나무의 잎사귀로부터 진한 생명력을 느꼈다고 하면 이상할까요?  아무튼 나는 그렇게 느꼈습니다.  설마 죄가 되는 건 아니겠지요?  나는 지금 바흐의 '영국조곡'을 들으며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경쾌한 피아노 선율이 마치 봄 햇살에 겨워 온 몸을 부르르 떠는 은사시나무 잎새의 떨림 같습니다.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조용한 하루.  아, 잊고 있었습니다.  오늘은 (다들 그렇게 부르는)'불금'입니다.

 

<나는 어떻게 글을 쓰게 되었나>를 두 번 읽었습니다.  머리가 나쁜 탓이죠.  꼼꼼히 읽는다고 했는데도 뭔가 떠오르는 게 없어 훌훌 넘기며 다시 읽었습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두 번째는 필요한 부분만 읽고 지나쳤으니 한 번 반쯤 읽은 셈입니다.  작가 레이먼드 챈들러(1888~1959)의 편지들을 엮은 서간집입니다.  아마 모르시는 분들이 더 많겠지요.  무라카미 하루키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작품의 이곳저곳에서 레이먼드 챈들러라는 이름을 여러 번 접하셨을 줄 압니다.  나 역시 그랬습니다.  정작 레이먼드 챈들러의 작품은 단 한 편도 읽지 않았으면서도 어느 순간 친숙한 이름이 되더군요.  하루키는 심지어 한 인터뷰에서 "내가 지향하는 이상적인 소설은 챈들러와 도스토옙스키를 한 권에 담는 것"이라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잘 모르는(어쩌면 전혀 모른다고 할 수 있는) 작가 레이먼드 챈들러에 대한 나의 첫 느낌은 매우 솔직한 사람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어느 누구나 자신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요.  그것은 때로 오해를 불러올 소지가 다분하니까요.  솔직하다는 건 결국 모든 오해를 감수하겠다는 자신감의 발로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책은 챈들러가 그의 독자, 여러 작가, 편집자, 기자, 감독 등 여러 사람에게 보낸 편지 중 68편을 골라 엮었습니다.  거침없는 비판과 독설, 그만의 위트와 유머, 30년을 해로한 아내의 죽음에 맞선 사랑 등 서간집이 보여줄 수 있는 모든 매력을 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간 많은 동정과 위로와 편지들을 받았지만 당신의 편지는, 게속되고 있는 상대적으로 쓸모없는 삶을 위로하기보다 잃어버린 아름다움을 말한다는 점에서 특별했습니다.  그녀는 당신이 말한 모든 것이며 그 이상이었습니다.  그녀는 삼십 년 동안 내 심장박동이었지요.  정말로 아내에게 보여줄 만한 가치가 있거나, 아내에게 헌정할 수 있는 작품을 쓰지 못했던 것이 나의 가장 큰 후회이자 이제는 해 봤자 소용없는 후회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런 책을 쓰려고 했죠.  생각은 했지만, 쓰지는 않았어요.  어쩌면 쓸 수 없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p.216~p.217)

 

책의 구성은 챈들러의 작품론을 모아 놓은 1장과 다양한 작가들에 대해 논하는 2장, 할리우드 시절을 담은 3장, 그의 작품에서 탐정 캐릭터로 유명한 필립 말로에 대해 말하는 4장, 그의 아내와 고양이 등 일상을 담은 5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나는 1장의 작품론 부분을 읽으면서 챈들러 자신이 많이 힘들었겠구나 생각했습니다.  자신만의 스타일, 자신만의 고집을 꺾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얻은 지혜란, 글쓰기 기술에 너무 집착하는 것은 빈약한 재능이나 재능이 전혀 없음을 드러내는 확실한 표시일 뿐이라는 믿음과 상통하니까요."     (p.37)

 

"나는 돈이나 어떤 특권 때문에 글을 쓰는 게 아닙니다.  다만 사랑 때문에, 어떤 세계에 대한 이상한 미련 때문에 글을 쓰는 거죠.  사람들이 치밀하게 생각하고 거의 사라진 문화의 언어로 말을 하는 그런 세계 말입니다.  나는 그런 세계가 좋습니다."    (p.194)

 

책을 읽다가 문득 들었던 생각은 '챈들러의 생각은 어쩌면 그만의 스타일로 남을지도 모르겠구나'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에게 평범함이란 너무도 익숙하고 벗어나기 힘든 유혹이어서 만일 누군가가 그동안 나는 생각할 수도 없었던 어떤 것을 말할 때, 그 사람은 그저 나보다 우월하다는 한마디로 결론을 내리고 말지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을까, 어떻게 하면 그 사람의 방식을 배울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은 전혀 없이 말입니다.  그는 언제나 우리가 속한 영역의 밖에 홀로 존재할 뿐입니다.  우리에게 어떠한 영향도 주지 못하는 채.

 

"오랜 시간 준비해야 하는 전문직 두세 종을 제외하면, 이 시대에 한 남자가 어느 정도 타락하지 않고, 성공이란 언제 어디서나 부정한 돈벌이이게 마련이라는 냉혹하고 명백한 사실을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삶에서 적절한 풍족함을 누릴 방법이 전혀 없다는 씁쓸한 현실 때문이죠."    (p.171)

 

사실 이 책은 추리소설 작가를 꿈꾸는 어느 작가 지망생이 읽어야 할 책은 아닙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부와 명성을 누렸지만 자유에 대한 갈망으로 그곳으로부터 끝없이 탈출하고자 했던 유명 추리소설 작가의 삶의 기록이자, 자신만의 생각과 삶의 방식으로 세상을 살아가고자 했던 자유인의 기록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까닭에 챈들러 스타일은 작가 챈들러의 글쓰기 방식이 아니라 우리와는 조금 다른, 그만의 독특한 삶의 방식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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