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가 사랑한 수식
오가와 요코 지음, 김난주 옮김 / 이레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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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해발고도 500m 이상의 고지대에 단 한 번이라도 살아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햇살의 질감이 저지대의 그것과 다르다는 사실을.  언제였던가.  내가 저지대의 도시로 처음 나와 살게 되었을 때 척척 감겨오는 햇살의 감촉에 나는 저으기 놀랐었다.  놀라기보다는 오히려 살짝 부담을 느꼈는지도.  나는 왜 그 겨울의 헤살거리던 햇살을 부담스러워만 했던가.  모를 일이다. 익숙함은 언제나 변화에 저항하는 속성이 있다.  사춘기였고 호기심과 저항이 나의 이성을 반반씩 지배하던 시기였다.

 

고지대의 햇살은 공격적이다.  계절에 상관없이 그렇다.  뜨거운 여름이라고 해서 달라지지 않는다.  수천 수만의 햇살이 가닥가닥 풀어져 빛의 화살처럼 내려 꽂힌다.  찰나지간에 모공을 뚫고 들어온 햇살이 온 몸을 헤집어 놓고는 다른 방향으로 유유히 빠져 나갈 것만 같은 느낌.  그러나 저지대의 햇살은 뭉근하게 풀어진 수프처럼 올올이 흩어지는 법이 없다.  그저 저항하는 대상을 은근히 감싸다가 서서히 풀어질 뿐이다.  군불에 달구어진 황토방의 열기처럼 발원을 알 수 없는 열감이 한동안 머물다 흩어지곤 한다.

 

오가와 요코의 소설 <박사가 사랑한 수식>을 읽고 불현듯 들었던 생각이다.  수학을 소재로 이렇게 아름다운 이야기를 풀어낼 수도 있구나 감탄했다.  이질적인 두 대상이 만나 하나로 융합되는 과정은 경이롭다.  내가 두 지역의 햇살을 한 몸으로 살아낸 것처럼.

 

"물질이나 자연현상, 또는 감정에 좌지우지되지 않는 영원한 진실은 보이지 않는 법이야.  수학은 그 모습을 해명하고, 표현할 수 있어.  아무것도 그걸 방해할 수는 없지."  배가 고픈 것을 참아가면서 사무실 바닥을 닦고 루트를 걱정하고 있는 내게는 박사가 말하는 영원하고 옳은 진실이 필요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가 눈에 보이는 세계를 지탱하고 있다는 실감이 필요했다.  넓이도 없이 장엄하게 어둠을 뚫고 한없이 뻗어나가는 한 줄기 진실한 직선.  그 직선이야말로 내게 잠시의 말을 떠올리면서 나는 어둠을 응시했다."    (p.164 ~ p.165)

 

소설의 내용은 최근에 읽었던 조조 모예스의 <미 비포 유>를 떠올리게 한다.  박사는 불의의 교통사고로 인해 기억이 80분을 넘지 못한다.  80분 이전의 기억은 금세 사라지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박사를 미망인이 된 형수가 돌본다.  교통사고 이전에는 천재 수학자였던 박사는 이제 수학 저널에 실린 수학 문제나 풀며 하루하루를 소일하는 신세가 되었다.  형수는 집의 안채에서 박사는 별채에서 개별적인 노년을 견디고 있다.

 

최근 수년간 9명이나 되는 가정부를 갈아치운 박사에게 싱글맘인 쿄코가 10번째 가정부로 등장한다.  다음 날이면 가정부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박사는 자신이 입은 양복 소매에 메모를 붙여 잃었던 기억을 되찾으려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쿄코에게 10살 먹은 아들이 있다는 얘기를 들은 박사는 아이를 집에 홀로 두어서는 안 된다며 학교가 파한 후 자신의 집에 들르도록 당부한다.  박사는 아들이 모든 수를 포용할 수 있는 루트 기호와 닮았다고 '루트'라는 별명을 지어준다.

 

80분의 기억이 허락되는 한도에서 박사는 루트를 지극정성으로 돌본다.  늘 외롭게만 지냈던 루트는 박사의 무한한 사랑 앞에서 할아버지의 따스한 정을 느낀다.  쿄코는 대인 기피증이 있는 박사를 이끌고 미장원을 방문하기도 하고, 교통사고 이전에 야구에 열광했던 박사를 위해 루트와 함께 야구장을 찾기도 한다.  야구장에 다녀온 후 고열에 시달리는 박사를 혼자 두고 갈 수가 없어 쿄코와 루트는 박사의 집에 머문다.  그러나 그 일로 인하여 쿄코는 해고된다.

 

박사를 통하여 수식의 아름다움과 인생의 의미를 배워나가던 쿄코와 루트는 박사를 몹시 그리워 한다.  교통사고 전에 박사는 형수를 사랑했었다.  그야말로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었다.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던 형수는 자신의 남편이 죽고 미망인이 되었지만 기억과 젊음을 상실한 채 살아야 하는 박사를 차마 버릴 수가 없었던 것이다.       

 

"수학 잡지의 현상문제를 풀어 리포트 용지에 깨끗하게 옮겨 쓰고서 다시 한 번 훑어볼 때면 박사는 자신이 도출해낸 해답에 만족하면서 중얼거렸다.  "아아, 조용하군."  정답을 얻었을 때 박사가 느끼는 것은 환희나 해방이 아니라 조용함이었던 것이다.  있어야 할 것이 있어야 할 장소에 정확하게 자리하여, 덜고 더할 여지 없이 오랜 옛날부터 거기에 한결같이 그렇게 있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렇게 있으리란 확신에 찬 상태.  박사는 그런 상태를 사랑했다."    (p.93)

 

쿄코는 결국 다시 복직된다.  수와 관련된 박사의 사상과 철학을 배우는 생활이 한동안 지속된다.  중학 중퇴의 학력이 전부인 쿄코도 초등학생인 루트도 박사의 설명을 모두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고독한 수인 소수를 사랑하는 박사를 통하여 수식의 아름다움과 인생의 의미를 배운다.

 

"물질이나 자연현상, 또는 감정에 좌지우지되지 않는 영원한 진실은 보이지 않는 법이야.  수학은 그 모습을 해명하고, 표현할 수 있어.  아무것도 그걸 방해할 수는 없지."  배가 고픈 것을 참아가면서 사무실 바닥을 닦고 루트를 걱정하고 있는 내게는 박사가 말하는 영원하고 옳은 진실이 필요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가 눈에 보이는 세계를 지탱하고 있다는 실감이 필요했다.  넓이도 없이 장엄하게 어둠을 뚫고 한없이 뻗어나가는 한 줄기 진실한 직선.  그 직선이야말로 내게 잠시의 말을 떠올리면서 나는 어둠을 응시했다."    (p.164 ~ p.165)

 

여름 한낮의 저층에 깔린 해묵은 기억을 가을 햇살처럼 선명하게 되살리는 일은 쉽지 않다.  박사처럼 기억 상실증에 걸리지 않은 사람도 그렇다.  우리는 어쩌면 저지대의 햇살처럼 사랑의 열감만을 간직한 채 평생을 살아가는지도 모른다.  세세한 기억이 아니라 그때의 느낌만으로 말이다.  박사도 루트도 도타워졌던 사랑의 열감이 삶을 지탱한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느끼지 않았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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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풍경
박범신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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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범신의 소설 <소소한 풍경>은 작위적이다. 세상의 모든 소설이 작가의 의도에서 한 치도 벗어날 수 없는 까닭에 소설은 단순히 허구이고, 작위적이라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만, 손오공이 부처님 손바닥 안에 거하는 순간만큼은 그에게는 그것이 전부이고 전 우주였던 것처럼 소설을 읽는 독자가 작가의 의도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 때 소설은 직접적인 자신의 삶이자 경이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한순간 마치 손오공이 부처님 손바닥을 벗어난 것처럼 독자가 작가의 의도를 훤히 꿰뚫게 되거나 의도된 설정이라고 느끼는 순간 소설은 그저 하나의 텍스트이자 영 시시하고 재미없는 것으로 전락하고 만다.

 

예컨대 주인공 'ㄱ'이 '남자1'과 처음 조우할 때 같은 운동화를 신었다거나 비오는 날 같은 색의 구두를 신었다는 설정, '남자1'의 여동생이 사고로 죽었다는 설정과 'ㄱ'의 오빠와 어머니 아버지가 모두 사고로 죽었다는 설정은 공감하기 어려웠다. 게다가 두 여자('ㄱ'과 'ㄷ')와 한 남자('ㄴ')가 같은 집에서 '덩어리'진 채 사는 모습은 그야말로 어색하다.

 

소설은 주인공 'ㄱ'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남자1'이 등장하고 그와 'ㄱ'은 대학에서 만나 사랑하게 되는 사이다. 'ㄱ'의 오빠가 죽고 연이어 어머니 아버지를 잃은 'ㄱ'과 여동생을 잃은 '남자1'은 끝내 결혼했으나 1대1의 폭력적 사랑을 1년만에 종식한다. 여자 'ㄱ'은 부모님이 살던 소소시의 포도밭이 딸린 외딴집으로 귀향한다. 포도밭 옆에는 다세대 주택이 있고 그곳에서 늘 물구나무를 서던 'ㄴ'을 만난다. 광주 민주화 운동 당시 아버지와 형을 잃은 'ㄴ'은 실어증에 걸린 어머니를 요양원에 맡긴 채 떠돈다. 여러 직업을 전전하던 'ㄴ'은 한동안 어느 보컬 그룹의 베이시스트로 지냈으나 자의반 타의반으로 그들로부터 내쳐진다.

 

'ㄱ'과 'ㄴ'이 외딴집에서 동숙을 시작한 지 얼마 후 북한을 탈출하여 한국에 온 'ㄷ'이 등장한다. 북한을 탈출하면서 아버지를 잃고 'ㄷ'과 그녀의 오빠, 어머니는 중국의 어느 조선족의 집에 흘러든다. 어머니와 'ㄷ'은 그집 주인 남자로부터 성적 학대를 당한다. 주인 남자의 부인과 딸이 죽자 'ㄷ'과 어머니가 그 자리를 차지한다. 'ㄷ'은 결국 대한민국의 불법 체류자 신분으로 'ㄱ'을 만난다.

 

눈으로 뒤덮인 소소시의 외딴집에서 'ㄱ'과 'ㄴ' 그리고 'ㄷ'은 '덩어리'인 채 또는 각자인 채 겨울을 난다. 'ㄴ'은 우물을 파고 'ㄷ'은 집 안을 광이 나도록 닦으면서. 봄이 오고 'ㄴ'이 판 우물에서 물이 솟고 그들은 이별을 예감한다. 자신이 판 우물에 빠져 죽은 'ㄴ'과 레미콘으로 우물을 메우는 'ㄷ', 그것을 지켜보는 'ㄱ'. 'ㄷ'은 'ㄱ'을 떠나 티켓다방의 여종업원 신분으로 몸을 숨긴다.

 

소설에서는 이야기의 주체가 섞바뀌고 있다. 'ㄱ'에서 'ㄴ'으로 그리고 'ㄱ'의 선생님으로. 줄리언 반스의 소설《사랑, 그리고》에서 모든 등장 인물들이 각자 자신의 시점에서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윌리엄 포크너의 소설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도 그렇다. 'ㄴ'과 '남자1'은 화자로 등장하지 않는다. 소설에서는 많은 소제목들이 하나의 상징처럼 등장하기도 한다. 손, 성장, 화석, 모딜리아니, 바르도, 고원지대, 본, 아바타, 묘비명, 아크로칸트사우르스, 베르글라... 밀란 쿤데라의 소설 《정체성》을 떠올리게 한다. 각각의 소제목에 붙은 이야기들이 아무런 연관성이 없이 흘러 가는 듯하다가 전체로서 통일성을 갖추는 모습이다. 그것은 마치 색색의 천조가들이 하나로 이어져 멋진 작품으로 재탄생하는 퀼트를 보는 듯한 효과가 있다. 잘 썼을 때는 그렇다는 얘기다.

 

'ㄴ'의 죽음은 알베르 카뮈의 소설 <이방인>에서 따가운 햇살에 살의를 느끼는 '뫼르소'의 충동과 닮아 있다.

 

"기쁘고 슬프고 화나고 죽고 싶고 미치고 싶은 그 모든 감정 말이에요. 희로애락(喜怒愛樂)과 애오욕(愛惡慾)이 요지경처럼 뒤섞인 채 다가와 우리들 마음을 천 갈래로 흩어놓는 것이 봄이잖아요. 그래서 나는 지금 이렇게 생각해요. 모든 건 그날의 햇빛과 천 갈래 봄빛 때문에 비롯됐었다고." (p.221)

 

이 책의 제목인 '소소한 풍경'에 대해 말할 시간이 되었다. 작가는 주인공 각자에게 처음부터 이름을 붙이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의 풍경으로 존재해야 하고 작가의 의도도 그랬으리라 짐작한다. 그러나 '풍경'은 바라보는 주체와 오브제 사이의 일정한 거리를 전제로 한다. 여기서의 거리는 물리적 거리가 아닌 마음의 간격을 의미한다. 주체의 관심이 객체에 밀착되는 순간 '풍경'은 '사유'로 전환되게 마련이다. 작가 박범신은 그들을 온전하게 '풍경'으로 그려내지 못했다. 하여 '소소한 풍경'은 오히려 '소소한 사유'로 읽힌다.

 

또 짚고 넘어갈 일이 있다. 소설에서 소제목이 갖는 효과에 관한 문제이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 <정체성>에서 작가는 각각의 소제목에 딸린 글들이 다른 소제목의 글들과 긴밀한 연관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독자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교묘히 숨기고 있다. 독자는 그로 인하여 각각의 글들을 개별적으로 인식하게 되고 막간의 휴식과 호흡을 유지하게 된다. 그러나 <소소한 풍경>에서 화자 'ㄱ'의 호흡은 너무 가쁘다. 그리고 각각의 글들이 독립성을 유지하지도 못하는 까닭에 독자는 소제목으로 구분된 글들을 단지 단락의 구분쯤으로 인식하게 된다.

 

작가 박범신은 아마도 그동안 자신이 유지해오던 소설의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시도를 감행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무라카미 하루키의 최근작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크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에서도 그랬듯 묘사보다는 사유가 지배하는 소설은 독자의 공감을 얻지 못한다. 나이가 들수록 작가는 상상력의 부족을 철학적 사유로 대체하려는 경향이 있다. 분명한 것은 묘사 속에 철학적 사유를 담을 수는 있어도 철학적 사유 속에 묘사를 담는 일은 어색하다. 장롱 속에 집을 담으려는 꼴이다.

 

창작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새로운 시도와 모험에 직면하게 된다. 물론 그것이 올바른 자세이고 독자에 대한 에의라고 본다. 그러나 철저한 사전 준비와 분석이 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은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다. 경력이 화려한 노작가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이 소설에서 불필요한 한자어의 남용도 눈에 거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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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의 저편 무대에는 물수제비를 뜨는 어린 시절의 내가 등장하곤 한다. 바람 한 점 없는 무더운 여름 한낮이었다. 아마 그랬을 것이다. 종일 물장구를 치던 아이들이 오소소 소름이 돋은 몸으로, 강의 이쪽 모래밭에 나란히 앉아 햇볕을 쪼이고 있다, 누군가의 느닷없는 제의가 있었고, 아이들은 저마다 강변에 흩어진 조약돌을 고르고 있다. 동글동글 마모된 얄팍한 돌을 찾아 이곳저곳을 훑는 그 짧았던 시간에도 몸의 물기는 금세 사라진다. 따가웠던 햇살.

 

금방이라도 닳아 헤질 듯한 누런 팬티 차림의 한 아이가 자세를 잡는다. 마른 체격에도 굵고 실팍한 등근육이 시선에 들어온다. 몸을 비스듬히 눕혀 수면과 한껏 가까워지도록 자세를 취하는 게 요령이라면 요령이었다. 오후의 잔양(殘陽)은 뜨겁기만 하다. 달궈진 돌을 피해 조심조심 강가로 모이는 아이들. 어서 던지라고 성화다.

 

손을 떠난 돌은 어쩌면 수면 위에서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한 채 물보라를 튀기며 곤두박질 쳤거나, 과한 힘으로 던진 까닭에 단 몇 걸음만에 저쪽 강기슭으로 튀어 올랐거나, 물 위를 사뿐사뿐 밟으며 저쪽 강기슭에 가까워지던 돌멩이가 나른한 곡선을 그리며 종종걸음으로 회귀하였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중력을 거스르며 통통 튀어오르던 물수제빗돌의 발걸음을 기억한다. 어쩌면 수면 위로 반짝이던 여름 햇살의 눈부심을 기억하는지도 모르겠다.

 

까맣게 탄 어깨 위로 드문드문 마름버짐처럼 허옇게 일어나던 화상 자국들. 건너편 숲에서는 뻐꾸기가 한나절 울었을게다. 저녁 어스름이 지고 산그늘이 깊은 음영으로 강물을 잠식할 때면 저 멀리서 들려오던 소리. "아무개야, 밥 먹어라!"

 

이따금 나는 수면 위를 가볍게 걷던 조약돌의 흔적을 아스라히 좇곤 한다. 사는 게 조약돌처럼 가벼웠던 시절이었다. 수면 위로 튀어오르던 조약돌의 발걸음을 합창을 하듯 입맞추어 하나, 둘, 셋, 넷...세던 친구들. 세월의 저편에서 만나는 그 시절의 추억. 친구들 모두 삶의 무게를 딛고 세월의 강을 가뿐히 건너가길 나는 오후의 햇살을 받으며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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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쪽으로 튀어! 2 오늘의 일본문학 4
오쿠다 히데오 지음, 양윤옥 옮김 / 은행나무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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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쿠다 히데오의 <공중그네>를 읽고 나는 그의 매력에 푹 빠져버렸다.  이런 경험은 참으로 오랜만인 듯싶다.  일본 소설이라면 약간의 편견과 거부감이 있던 나로서는 더더구나.  한 권으로 끝내기에는 뭔가 아쉬운 마음이 들어 동네 도서관에서 그의 작품을 주욱 훑어보았다.  서가에는 꽤 많은 책들이 꽂혀 있었다.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그는 우리나라에서도 인지도가 높은 작가인 듯싶었다.  그 중에서 내가 고른 책은 <남쪽으로 튀어>.  사전 정보도 없이 제목만으로 책을 고르는 게 마뜩치는 않았지만 나의 감을 믿어보기로 했다.

 

도서관 입구의 카운터에서 대출증과 함께 책을 내밀었더니 사서 아가씨 왈, "이 책 영화로도 나왔어요.  한 번 꼭 보세요.  재미있어요." 한다.  예감은 다른 누군가의 지지에 의해 너무도 쉽게 확신으로 변한다.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이 생각나기도 하고, 아리엘 도르프만의 회고록 <남을 향하며 북을 바라보다>가 떠오르기도 했다.  방향을 나타내는 어떤 말이 책의 제목으로 붙여질 때 나는 왠지 아련한 향수를 느끼게 된다.

 

<남쪽으로 튀어>는 11살 소년 우에하라 지로를 주인공으로 한 성장소설인 동시에 그의 아버지 우에하라 이치로가 완전한 자유를 찾아 파이파티로마(우리나라로 치면 이어도쯤 될까? 아무튼 지도에도 없는 비밀의 섬)로 향하는 과정을 그린 모험소설이기도 하다.  지로의 아버지는 한때 혁공동(아시아 혁명 공산주의자 동맹)의 전설적인 행동대장으로 활동하였으나 목표보다는 개인의 이권에 골몰하는 인간의 이중적인 모습에 회의를 느껴 탈퇴하고 지금은 프리라이터를 자처하는 백수로 지낸다.  어딘가에 얽매이기를 싫어하는 지로의 아버지는 국민연금 납부를 독촉하는 구청 담당자에게 국민임을 관두겠다고 말하는가 하면 지로의 수학여행비가 너무 비싸다며 학교 선생님에게 항의하기도 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아주 작고 작아. 이 사회는 새로운 역사도 만들지 않고 사람을 구원해주지도 않아. 정의도 아니고 기준도 아니야. 사회란 건 싸우지 않는 사람들을 위안해줄 뿐이야." (2권 p.287)

 

지로의 가족은 작은 찻집을 운영하며 생계를 책임지는 어머니와 백수인 아버지, 누나 요코, 그리고 여동생 모모코로 구성되어 있다.  부잣집에서 자란 지로의 어머니는 대학 시절 운동권에 가담했다가 누나 요코를 임신한 채 상대방 남자를 칼로 찌르고 구속된다.  그때 요코를 키우고 돌봐준 사람이 지로의 아버지였다.  두 사람은 결혼을 했고 지로와 모모코를 낳았지만 지로의 외가와는 일절 왕래가 없었다.

 

어느 날 지로는 중학생 불량배인 가쓰로부터 협박을 받게 되고 그들과 다투는 과정에서 자신의 어머니에 대한 비밀을 가쓰로부터 듣게 된다.  외할머니와 우연히 마주친 후 지로와 모모코는 외갓집을 방문하게 되고 자신들과 다른 상류층의 생활을 부러워한다.  그러던 중 아버지의 운동권 후배가 지로네 집에 은신함으로써 지로는 원치 않았던 사건에 휘말린다.  아버지의 운동권 후배가 조직 내 다른 분파의 대장을 살해한 것이다.  경찰의 조사로 어수선하고 공안과 기자들의 출입이 잦아지자 집주인은 지로네 가족에게 집을 비워줄 것을 요구한다.

 

누나 요코를 제외한 지로네 가족 네 명은 오키나와의 이리오모테라는 남쪽 섬으로 이사를 한다.  아버지는 개발 예정지의 폐가를 수리하여 그곳에 정착한다.  수도도 전기도 없는 그곳에서 아버지는 밭을 일구고 바다에 나가 고기를 잡는 등 원시적인 삶에 열성적으로 매달린다.  지로에게는 도쿄에서 단 한번도 보지 못했던 아버지의 낯선 모습이었다.  지로와 모모코는 전교생이 다섯 명뿐인 그곳 초등학교에 전학한다.  도쿄에 남았던 요코 누나가 돌아옴으로써 가족은 다시 평화를 되찾는다.  그러나 평화롭던 생활도 잠시 개발업자들의 철거가 시작되고 격렬히 저항하던 아버지와 캐나다 청년 베니는 구속된다.

 

"경잘과 기업에 창끝을 들이댄 사람을 통쾌하다며 재미있어 하면서도, 그것을 막상 내 일처럼 생각해줄 사람은 없다.  텔레비전을 지켜본 어른들은 단 한 번도 싸운 일이 없고 앞으로도 싸울 마음이 없는 사람들이다.  대항하고 투쟁하는 사람을 안전한 장소에서 구경하고 그럴싸한 얼굴로 논평할 뿐이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냉소를 던지리라.  그것이 바로 아버지를 제외한 대다수의 어른들이었다."    (2권 p.267)

 

그러나 베니의 도움으로 듣적으로 탈출에 성공한 아버지는 어머니와 함께 전설의 섬 파이파티로마로 향한다.  이 소설의 마지막은 파이파티로마 섬에 내려오는 전설적 영웅 ‘아카하치’ 신화로 끝난다. 아카하치는 섬이 본토로부터 독립되어 자유롭게 살기를 희망하고 이상적인 나라를 건설하였으나 결국 이웃 왕조의 침략에 의해 처형되는 인물이다. 지로는 이 신화를 통해 비로소 아버지가 꿈꾸던 이상을 이해하게 된다.

 

"지로, 이 세상에는 끝까지 저항해야 비로소 서서히 변화하는 것들이 있어.  노예제도나 공민권운동 같은 게 그렇지.  평등은 어느 선량한 권력자가 어느 날 아침에 거져 내준 것이 아니야.  민중이 한 발 한 발 나아가며 어렵사리 쟁취해낸 것이지.  누군가가 나서서 싸우지 않는 한, 사회는 변하지 않아."    (2권 p.245)

 

이 소설은 겉보기로는 초등학교 6학년인 우에하라 지로의 성장 과정을 다룬 소설일 수 있다.  그러나 조금 더 파고들면 주인공인 지로의 시선에 비친 각종 부조리와 이해할 수 없는 어른들의 욕심, 그 속에서 완전한 자유를 꿈꾸는 아버지의 이상이 겹쳐지고 있다.  우리는 사는 내내 편안함을 대가로 어떤 대상이나 제도와 끝없이 타협하게 된다.  자유는 자신의 불편과 타인으로부터의 차별을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의지이자 불가능에 도전하고자 하는 용기일지도 모른다.  편리를 대가로 나의 자유는 얼마나 깎여나가고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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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에 있었던 알제리와 우리나라의 월드컵 예선 경기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말이 많더군요. 그것은 주로 어느 일간지나 방송에서 들었던 전문가의 분석에 자신의 의견을 조금 덧칠한 것에 불과하지만 이야기를 하는 당사자들은 모두 과하다 싶을 정도의 감정을 분출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벌개진 얼굴로 침을 튀겨 가며 누군가를 비난하는 모습은 과히 보기 좋은 장면은 아니었습니다.

 

나는 월드컵 대표선수들에게 그닥 기대도 하지 않았고 경기 결과에 큰 관심도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우리나라 선수들이 지기를 바란 것은 물론 아니었죠. 다만 어떤 선수가 참가했는지도 모를 뿐만 아니라 경기도 보지 않았으니 이렇다 저렇다 논평할 꺼리가 없었을 뿐입니다.

 

세계 무대에서 우리나라 스포츠의 위상이 지금처럼 높아진 것도 따지고 보면 그리 오래된 것도 아닙니다. 올림픽에서 태극기를 달고 첫 금메달을 딴 것도 1976년의 일이었으니 말입니다. 그럼에도 언제부턴가 우리는 승리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기 시작한 듯합니다. 당연히 이길 것이라 예상했던 경기에서 졌을 때의 낭패감이나 모멸감은 곧바로 누군가에 대한 분노로 이어지게 마련이지요. 더구나 알제리전과 같은 졸전을 본 후에는 그런 마음이 더욱 강하게 들었겠지요.

 

나는 우리나라 국민들이 이제는 조금 더 현명해져야 할 때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축구와 같은 국가 대항전에서의 승리나 올림픽의 금메달 획득이 무에 그리 중요한지 냉정하게 생각할 수는 없을까요? 승리했을 때의 기쁨은 잠깐입니다. 국민 전체의 행복을 증가시키는 것도 아니지요. 기껏해야 조금의 위로, 잠시 잠깐의 기쁨을 위해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부어야 하는지 저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엘리트 스포츠에 그 많은 돈을 쏟아부음으로써 자살률 1위, 고아 수출국 2위, 교통 사고 사망율 OECD 1위 등 온갖 불편한 진실들을 외면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자신이 좋아하는 스포츠 대회에 출전하고 싶은 사람은 자비로 출전하게 함으로써 지든 이기든 그 사람의 열정을 존중하고 열렬한 박수를 보내주는 게 국민 정서나 국가 경제를 위해 훨씬 더 값진 일이 아닐까 싶습니다.

 

엘리트 교육에 매몰된 대한민국의 정서는 약자와 패자에 대한 비난 일색으로 변질되었습니다. 반면 승자는 모든 권력과 존경을 독식하게 되었지요. 그런 까닭에 우리나라의 정치인들은 국민 모두를 계몽해야 할 대상으로 밖에는 생각하지 않는 듯합니다. 자신들은 모두 승자이고 마땅히 존경과 대우를 받아야 하는 사람쯤으로 인식하기 때문입니다. 약자와 패자가 모두 행복할 수 있는 세상, 누구의 도움에 기대지 않고 자신의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 있는 그런 세상은 지금과 같은 환경에서는 정녕 꿈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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