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닿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품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만져지지 않는 것들과 불러지지 않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건널 수 없는 것들과 모든, 다가오지 않는 것들을 기어이 사랑이라고 부른다." ("바다의 기별" 중에서 -김훈)

 

보이지 않는 사랑과, 보이지 않는 꿈을 품고, 보이지 않는 시간을 걸어, 보이지 않는 미래를 향해 나아갈 제, 실체가 없는 추억이 지번도 없는 어느 곳에 켜켜이 쌓이는 동안, 종국에는 보이지 않는 죽음이 내 그림자와 동행하는 것, 그것이 삶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두 눈으로 세상을 보고, 온 몸으로 뜨겁고 차가운 것을 구별하며, 달고 쓴 것을 느끼고, 고소하고 역겨운 냄새에 전율하고, 크고 작은 소리에 민감했던 나의 실존은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보이지 않는 미움에 보이지 않는 말로 다투고, 보이지 않는 지식과 보이지 않는 부를 탐내며, 보이지 않는 명예와 보이지 않는 권력을 시기하며, 보이지 않는 증오를 키워가는 것, 그것이 삶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내 삶의 팔 할은 관념이었다.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 살았던 팔 할의 삶을 죽어 육신이 스러진 후에 찾을 수 있을까? 그때는 보이는 것을 보고, 느낄 수 있는 것을 느끼고, 매만질 수 있는 실체를 매만지면서, 오롯이 실존으로 살아갈 수 있을까? 살아서 하지 못했던 실존의 삶을. 진정 관념의 안개 속으로 사라진 내 실존을 죽어 관념만 남은 세상에서 다시 찾을 수 있을까.

 

내 시선의 망막 위로 먼 미래의 희망이 기척도 없이 너울대던 날, 내 기억의 깊은 계곡에선 메마른 시간들이 우수수 흩날렸다. 기신기신 살아온 내 삶의 팔 할은 관념이었다.

 

"모든, 닿을 수 없는 것들과 모든, 건널 수 없는 것들과 모든 다가오지 않는 것들과 모든, 참혹한 결핍들을 모조리 사랑이라고 부른다. 기어이 사랑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바다의 기별" 중에서 -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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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세트] 침묵의 거리에서 (전2권) 침묵의 거리에서
오쿠다 히데오 / 민음사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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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유명한 소설가라고 하여도 그가 사는 동안 자신의 작품 모두가 완벽할 것이라고 기대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것이다. 연이어 좋은 작품을 세상에 내놓다가도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듯, 마치 세상 사람들을 비웃기라도 하려는 듯, 독자들의 기대에 한참 못 미치는 엉뚱한 작품을 발표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것이 전적으로 작가 자신의 잘못은 아닐지라도 독자들 중 몇몇은 그 작가에 대한 더이상의 사랑을 유보한 채, 새로 발견했거나 한때 좋아했던 다른 작가에게로 관심을 옮겨가는 것은 분명해 보인다. 조금 얄미워 보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변심한 독자들을 일방적으로 매도할 것도 아니다.

 

오쿠다 히데오에게 있어 소설 <침묵의 거리에서>가 그런 작품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그는 기획 단계에서 자신이 생각했던 스토리 전개와 소재가 현대 사회의 문제점을 정확히 꼬집는 대단한 것이라고 한껏 기대에 부풀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누구나 그렇듯 이런 기대와 바람은 너무나 흔한 것임에도 그 순간에는 미처 알아채지 못한다는 데 문제가 있다.

 

<침묵의 거리에서>의 주제는 명확해 보인다. 작가는 이 작품에서 날로 지능화, 흉포화되고 있는 청소년 범죄의 실상과 그것을 바라보는 각 계층의 서로 다른 시선을 조명함으로써 일본 사회 전체에 경종을 울리고자 했던 듯하다. 사실 청소년 범죄에 대한 문제는 비단 일본에서만 심각한 것도 아니고 우리나라의 실상은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우리나라의 학생들은 그래도...'하고 안심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소설은 일본의 작은 도시 구와바타의 시립 제2중학교에서 시작된다. 학교 교정에서 발견된 한 학생의 주검을 두고 단순 추락사인지, 타인에 의한 살인 사건인지, 아니면 자살인지 추측이 분분한 가운데 경찰의 조사가 시작된다. 죽은 학생은 그 지역에서 포목상을 하는 부유한 집안의 외동 아들이었다. 주검에서는 추락과는 상관없는 다수의 상흔이 발견되었고, 경찰은 사고사의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학생들을 조사한다. 경찰의 조사 과정에서 학생들 간의 집단 따돌림, 폭력, 금품갈취 등 지속적인 범죄가 있었음이 밝혀지고, 폭력에 가담했던 14세 이상의 두 소년은 경찰에 구속되고 14세가 안 된 두 소년은 아동 상담소로 보내진다. 경찰의 조사가 진행되는 동안 경찰과 학교, 피해자 가족과 가해자 가족, 언론과 학생들 등 그 사건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이 각자의 입장에서 그려진다.

 

"중학생이 되자 같은 학생들 사이에도 어렴풋이 계층이 나눠지기 시작했다. 인기가 많은 아이, 없는 아이, 인정받는 아이, 무시당하는 아이, 모두 자신의 위치에 무관심할 수 없어졌다. 어떤 그룹에 속하느냐에 따라서도 학교생활이 180도 달라진다." (1권, p.302~p.303)

 

가해자로 지목된 4명의 학생과 침묵하는 주변인들. 가해자 학생들 부모의 직업은 다양하다. 그 중에는 싱글맘도 있고, 평범한 직장인도 있고, 할아버지가 현 의원인 지방 유지도 있었다. 가해자의 부모들은 자신의 자식을 보호하기 위해 백방으로 손을 쓴다. 학교에서는 피해자와 가해자의 중간에서 어찌할 줄 모르고 갈팡질팡한다. 반면 사건 사고를 다루는 언론은 정보를 캐기 위해 노력하면서도 아직은 어린 학생들에 대한 취재는 삼가자고 결의하기도 한다. 경찰에서의 수사가 종결되고 사건이 검찰로 이송되면서 가해자로 지목되었던 학생들이 풀려나게 된다.

 

처음에는 자신에게 불똥이 튈까 바짝 긴장했던 학생들도 수사가 장기화 되자 조금씩 느슨해지기 시작하고 그에 따라 이전에는 알지 못했던 새로운 사실들이 속속 드러난다. 단순히 테니스부에 속했던 피해자와 가해자의 관계뿐만 아니라 피해자 주변의 문제 학생들과 선후배 간의 문제, 모든 것을 돈으로 해결하려 했던 피해자 집안의 가정 교육 문제, 권력을 이용하여 자신들의 자녀를 지키려 하는 가해자측의 입장 등 '나만 아니면 된다'는 식의 각종 부조리가 하나의 사건을 통하여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가해자로 지목되었던 학생들이 오히려 체구가 작고 사회성이 부족했던 피해자를 지켜주려 노력했었다는 사실과 그럼에도 문제 학생들의 폭력과 협박에 시달리면서 어디에도 소속될 수 없었던 피해 학생의 현실이 극명하게 그려진다. 그리고 요즘 학생들의 세계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어른들의 일방적인 시각도 드러난다.

 

"아이들은 누구나 그런 잔혹성을 가지고 있지만 커 가면서 서서히 사라지는 게 아닐까. 중학생은 아직 그 성질이 남아 있고. 학교 폭력, 집단 괴롭힘이 가장 심한 연령도 중학생이야. 고등학생이 되면 강도를 조절할 줄도 알고 동정심도 생기지." (2권, p.306~p.307)

 

좁은 지역사회에서 한 사건으로 어느 날 갑자기 가해자와 피해자로 양분되는 갈등의 모습을 작가는 안타깝게 지켜보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살아 있는 자들의 삶은 계속되는 까닭에 갈라진 틈을 메우고 새로운 관계를 정립해야 할 필요성 또한 작가는 주장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아직은 미성숙한 아이들 사이에서 언제든 벌어질 수 있는 안타까운 사건을 두고 어찌 됐든 결말을 써야 하는 작가의 고민도 깊었으리라.

 

"하시모토는 그렇게 말하며 깨달았다. 중학생들은 일의 심각성을 모른다. 때문에 단순한 영웅주의에 도취되어 주변의 오해를 불러일으킨다. 아이들은 생명의 존엄성도, 인생의 의의도, 사람의 마음도, 자신의 마음조차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2권, p.287)

 

이 소설에서는 오쿠다 히데오의 전매특허라고 할 수 있는 유머와 재치가 보이지 않는다. 한시도 책을 손에서 놓을 수 없도록 만드는 흡입력도 찾기 어려웠다. (당연하겠지만) 다분히 추리소설의 성격을 띠는 이 소설은 만만찮은 작품의 분량 탓인지 긴장감이나 빠른 사건 전개의 모습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느슨하고 헐렁한 느낌마저 들었다. 다만 작품의 주제만 전면에 강하게 드러나는 것 같았다. 독자를 계도하려 하거나 어떤 다른 의도가 깔린 소설은 실패하게 마련이다. 주제가 작품을 지배하기 때문이다. 선명성은 돋보일지 모르지만 독자의 호응은 기대하기 어렵다. 소설은 현실의 반영이 아니라 현실의 재구성이다. 작가는 일반인의 생각과 행동을 면밀히 관찰하고 소설 속에서 생동감 있게 그려내야 하지만 독자들에게 소설을 읽는 재미를 함께 느낄 수 있도록 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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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귀나무를 아시는지? 그렇다면 자귀나무가 콩과에 속한다는 사실도 알고 있으신지? 콩과에 속하는 식물은 콩, 팥, 녹두나 싸리류와 같은 키가 작은 식물만 있는 게 아니냐구요? 그럴 리가요. 여기서 그런 무식한 소리를 해서는 앙~돼요. 아, 키가 작은 식물 하니까 생각나는 게 있습니다. 토끼풀도 콩과에 속합니다. 알고 보면 콩과에 속하는 나무 종류는 꽤나 다양합니다.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아까시나무나 등나무, 조금쯤 생소할 수도 있는 주엽나무, 박태기나무, 회화나무, 자귀나무 등이 있습니다.

 

이렇게 쓰고 보니 제가 꽤나 유식해 보이죠? 아니라구요? 그러지 말고 인정할 건 인정하세요. 콩과의 특징은 여러 가지가 있으나 두드러지는 특징은 두 가지라고 합니다. 씨앗이 콩깍지 안에 속한다는 것과 공기 중의 질소를 식물이 이용할 수 있는 상태로 바꾸어 토양을 비옥하게 만든다는 것이 그것이죠. 전문적인 용어로 이것을 '질소 고정'이라고 합니다. 흠, 이쯤 하니 유식해 보인다구요?

 

엉뚱한 얘기를 하다가 정작 쓰려던 말을 깜박하고 그냥 지나칠 뻔했습니다. 이런 정신머리 하고는... 암튼 요즘은 이런 증상이 시도때도 없이 일어나곤 합니다. 나이 탓으로 돌리기엔 조금 이른 듯하지만 뭐 어떨라구요. 그냥 나이 탓으로 해두죠. 오늘 쓰려고 했던 것은 뭔고 하니 콩과에 속하는 낙엽관목 자귀나무(mimosa tree )입니다. 부부 금슬을 상징하는 합환목(合歡木), 합혼수(合婚樹), 야합수(夜合樹)라고도 하며, 소가 자귀나무 잎을 무척 좋아해서 소쌀밥나무라고 불리기도 하지요.

 

제가 가끔 들르는 도서관의 한 귀퉁이에는 자귀나무 한 그루가 자라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매일 아침 오르는 산의 정상 부근에도 어린 자귀나무 한 그루가 있지요. 자귀나무는 꽃이 유난히 인상적입니다. 분홍색 색실을 풀어 공작의 날개처럼 만들어 놓은 듯합니다. 막 피어난 꽃이 청명한 하늘과 어우러질라치면 나뭇가지 위에서 불꽃놀이를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요. 여러 갈래의 꽃술은 아랫부분은 투명하게 희고 끝으로 갈수록 분홍빛이 짙어집니다.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누군가 정성들여 만든 코사지 장식을 나무 곳곳에 붙여놓은 게 아닐까 하는 착각이 절로 들기도 합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자귀나무의 잎은 해가 지고 나면 펼쳐진 잎이 서로 마주보며 접힙니다. 마치 잎에 감광 센서라도 달아놓은 듯 보고 있으면 신비하기 이를 데 없답니다. 게다가 떨어진 꽃을 만져보면 그 부드러운 감촉이 어찌나 좋던지 어느 짐승의 털이 이보다 더 보드라울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저는 이따금 떨어진 꽃을 모두 모아 붓을 만들면 어떨까 하는 엉뚱한 발상을 떠올리기도 하지요.

 

오늘 아침 산행길에서도 이제 막 피어나는 자귀나무의 꽃을 여러 송이 보았습니다. 자연은 때로 그 신비를 통하여 인간을 기쁘게 합니다. 그럼에도 아무런 대가를 요구하지 않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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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지만 엊그제 아침 산행길에서 잠자리 한 마리를 보았다.  어찌나 반갑던지.  올해 들어 처음 만나는 잠자리였다.  혹자는 '매년 만나는 잠자리인데 뭘 그렇게 호들갑을 떨 것 까지야...'하며 끌끌 혀를 찰지도 모르겠지만, 이제는 지겨울 법도 한 시간의 순환이란 게 나는 언제나 반갑고 경이롭다.  나는 매달 그와 같은 마음으로 신간 서적을 둘러보곤 한다.  우리의 삶은 셀 수도 없는 무한 반복으로 이루어진다.  그것이 지겹다면 다른 무엇에서 행복을 찾을까? 

 

 

 

내가 윤대녕 작가를 좋아하게 된 것은 아마도 그의 소설 <대설주의보>를 읽은 직후가 아닐까 싶다.  감각적이면서도 서정적인 문체.  삶의 이면을 꿰뚫는 듯한 날카로운 통찰.  나와 작가의 교감은 절정에 이른 듯했다.  그럼에도 나는 그의 산문집을 읽어보지 못했다.  인연이란 때로 어긋난 길을 걸을 때가 있다.

 

 

 

 

 

 

 

 

언제부턴가 학교와 학생들을 주제로 다룬 책들을 그냥 넘기기 어려워졌다.  세월호 참사의 영향도 한몫하지 않았나 싶지만 나의 이력은 그보다 훨씬 오래되었다.  청춘 이전의 아이들, 이제 막 제 인생의 가능성을 타진하는 아이들의 눈빛을 보면 인생이란 바로 그런 것이구나 생각하게 된다.

 

 

 

 

 

 

 

 

자신의 직업에 최선을 다하는 사람들을 볼 때마다 감탄하게 된다.  그런 열정이 마치 타고난 재능이기라도 한 것처럼 그들은 거침이 없다.  기본적으로 인간에 대한 따뜻한 애정이 없다면 그런 열정은 솟아나지 않는다.  나는 가끔 지금 내가 하는 일에 지치거나 약간의 회의감이 느껴질 때 이런 책을 읽곤 한다.  그럴 때마다 나의 어리광을 질책하게 된다.

 

 

 

 

 

 

 

"독서의 기쁨을 아는 자는 재난에 맞설 방편을 얻는 것이다."라는 에머슨의 말은 생각할수록 의미심장하다.  우리나라에서는 어쩌면 헨리 데이비드 소로에 의하여 에머슨이 알려진 측면이 없진 않지만 사실 그는 19세기를 대표했던 미국의 사상가로서 그의 글을 한번쯤 읽어본 사람이라면 단박에 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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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온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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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체가 확인되지 않은 공포는 호기심을 부풀리는 습성이 있다. 예컨대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지도 않았던 어린 시절에 마을 인근의 한 기업에서 매주 지역주민을 위한 영화상영이 있었다. 마을 아이들은 왕복 한 시간도 넘는 길을 걸어 영화를 보러 가곤 했다. 저녁 어스름이 질 무렵 시작된 영화는 늘 캄캄한 밤이 되어서야 끝이 나곤 했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 아이들은 어린 아이들을 가운데에 두고 대열의 앞쪽과 뒤쪽에는 그 중 가장 나이가 많은 아이를 세웠다. 그렇게 줄나래비를 서서 걷는 산길은 유난히 무서웠다. 절대 뒤를 돌아보지 말자 했던 결심은 끝내 지켜지지 않았다. 그러면 그럴수록 호기심만 점점 부풀어 올랐고 어느 순간 펑 하고 터져버릴 것 같은 호기심에 뒤를 돌아보면 묵묵히 걷는 형들과 캄캄한 어둠만이 내 발끝을 좇고 있었다. 공포는 더욱 커져만 갔고 비례하여 호기심도 커져만 갔다. 마음 한켠에서는 공포와 호기심이 셀 수도 없이 다투었고 끝내 이기는 쪽은 언제나 호기심이었다.

 

역사적 진실에 대한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은 인간의 잔인성에 있다. 잔인성의 강도가 더하면 더할수록 공포심도 증가하지만 결국, 가슴 속에서는 외면했던 시선을 돌리게 할 호기심도 시나브로 함께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나는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비록 역사적 진실 앞에서 치를 떨지라도 그 실체를 확인하지 않고서는 편하게 잠들 수조차 없다. 공포와 두려움에 몸서리를 치면서도 영화를 보기 위해 마을 형들의 뒤꽁무니를 번번이 따라 나섰던 내 어린 시절의 모습처럼.

 

작가 한강의 <소년이 온다>는 그런 작품이 아니었을까 싶다. 마주 대하기 싫은 어둠 저편의 공포를, 실체를 확인하고자 하는 내면의 호기심이 끝내 삼켜버린 듯한 결과물. <소년이 온다>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라기 보다는 오히려 다큐멘터리에 가깝다. 나는 이 소설이 갖는 구체적이고도 사실적인 그날의 실체와 인간의 잔인성에 대해 책을 읽기도 전에 이미 주변 사람들의 입을 통해 들었었다. 그러나 외면하고자 했던 처음의 결심은 나의 호기심에 끝내 굴복하고 말았다.

 

소설은 5.18 당시 중학교 3학년이던 소년 동호의 이야기로 시작된다. 동호는 누나와 함께 문간채에 세들어 살던 친구 정대의 죽음을 목격한 것을 계기로 도청 상무관에서 시신들을 관리하는 일을 돕게 된다. 동호는 결국 진압군에 의해 도청에서 살해된다. 다음으로 이어지는 정대의 이야기는 죽어 혼령이 된 사자(死者)의 말이다. 군인들이 트럭에 실어 날랐던 시신은 탑처럼 쌓이고 정대의 혼령은 갈 곳을 잃고 헤맨다.

 

"가장 먼저 탑을 이뤘던 몸들이 가장 먼저 썩어, 빈 데 없이 흰 구더기가 들끓었어. 내 얼굴이 거뭇거뭇 썩어가 이목구비가 문드러지는 걸, 윤곽선이 무너져 누구도 더이상 알아볼 수 없게 되어가는 걸 나는 묵묵히 지켜봤어." (p.59)

 

당시 동호와 함께 상무관에서 활동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더욱 끔찍하다. 참혹한 현장에서 살아 남은 자들의 죽음보다 더 지독한 삶의 모습들을 작가는 너무도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나는 몇 번이나 책을 덮어야 했다. 가뭇없이 사라져 가는 역사의 진실들을 30년도 더 지난 이 시점에서 겨우 바라보는 나 자신의 비겁과 발포를 명령했던 살인자에 대한 끓어오르는 분노가 나의 시야를 흐리게 했다. 

 

수피아여고 3학년 시절에 동호와 함께 상무관에 있었던 김은숙, 봉제공장에서 노조활동을 하다 쫓겨난 후 광주의 어느 양장점에서 일을 하다 상무관에 합류한 임선주, 당시 대학생이었던 김진수, 그리고 막내 아들을 잃고 힘겨운 삶을 이어가고 있는 동호의 어머니... 김은숙은 대학을 포기하고 한 출판사에서 편집자로 일한다. 자신이 담당하던 원고의 검열을 받는 과정에서 서대문 경찰서로 끌려가 뺨을 맞는 은숙, 5.18 직후 경찰에 연행되어 갖은 고문을 당했던 선주.

 

"삼십 센티 나무 자가 자궁 끝까지 후벼들어왔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소총 개머리판이 자궁 입구를 찢고 짓이겼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하혈이 멈추지 않아 쇼크를 일으킨 당신을 그들이 통합병원에 데려가 수혈받게 했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이년 동안 그 하혈이 계속되었다고, 혈전이 나팔관을 막아 영구히 아이를 가질 수 없게 되었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타인과, 특히 남자와 접촉하는 일을 견딜 수 없게 됐다고 증언할 수 있는가?" (p.166 ~ p.167)

 

도청에 진입했던 진압군에 의해 연행되었던 김진수도 갖은 고문을 받고 출소한 후 결국 자살하였다. 인간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잔인한 행동들을 세밀하게 기록했던 작가 역시 공정성을 잃고 이따금 호흡이 가빠졌다는 것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작가는 이 작품을 씀으로써 살아 남은 자의 비겁을 용서 받았을까? 인간에 대한 신뢰를 송두리째 잃은 것은 아닐까?

 

나는 지금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 있다. 내란수괴와 반란수괴로 재판을 받았던 전두환을 유엔 전범재판소에 세우지 않았던 까닭을. 전쟁 범죄자보다 더 잔인했던 그를 국내법으로 잠시 재판정에 세우고 형식적인 형을 선고하고 쉽게 풀어줬던 이유를 말이다. 한때 고문 기술자로 불렸던 이근안은 "고문은 애국이고, 신문은 하나의 예술이다."라고 말했다. 이런 미친 놈들과 우리는 같은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이다.

 

"당신들을 잃은 뒤, 우리들의 시간은 저녁이 되었습니다.

우리들의 집과 거리가 저녁이 되었습니다.

더이상 어두워지지도, 다시 밝아지지도 않는 저녁 속에서 우리들은 밥을 먹고, 걸음을 걷고 잠을 잡니다." (p.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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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희돌이 2014-08-11 15:35   좋아요 0 | URL
축하드려요~ 이달의 당선작^^

꼼쥐 2014-08-12 18:28   좋아요 0 | URL
고맙습니다,남희돌이 님 ^^

조금 부끄럽네요. 잘 쓰지도 못한 글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