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 - 제10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0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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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명관의 소설을 '처음'으로 읽었답니다.  꽤나 유명한 소설가인데 말입니다. 그럼에도 나는  '처음'이라는 말에서 오는 기대와 설렘보다는 오히려 밋밋하고 그저 그럴 것이라는 편견이 먼저 들었던 게 사실입니다.  '처음'이라는 말에서 우리는 대개 약간의 두려움을 동반한 짜릿한 설렘을 느끼게 마련인데 말이죠.  '첫눈', '첫사랑', '첫키스' 등 처음으로 시작되는 이런 숱한 말들은 그 흔함과는 별개로 각별하고도 강렬한 것이지요.  그러므로 '처음'이라는 말은 가장 보편적인 언어인 동시에 가장 개별적인 경험이라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이러한 개별성 때문인지 다른 사람에게서 듣는 '첫'경험은 항상 새롭고 나도 모르게 귀를 쫑긋 세워 듣게 됩니다. 어쩌면 '처음'은 가장 진부한 주제인 동시에 언제나 새로운 주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소설을 읽기도 전에 느꼈던 한국 소설에 대한 편견은 한낱 기우에 불과했다고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습니다.  묘하게도 천명관의 소설 <고래>는 그가 쓴 첫 번째 장편소설이라는군요.  소설을 읽으면서 나도 그럴 것이라 짐작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소설은 기존의 한국 소설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기 때문이지요.  뭐랄까, '신선하다'고 하면 식상하고, 이게 과연 소설이라는 장르에 제대로 속하기나 할까 의심부터 드는 그런 소설이었습니다.  파격의 연속이지요.  그는 형식 밖의 형식으로 자신만의 글(또는 소설)을 쓴 셈입니다. 

 

그의 이력이 궁금했던 것도 그런 이유입니다.  국어국문학이나 문예창작과를 전공한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거든요.  내가 어느 시점에서 한국 소설과 멀어진 것도 그런 까닭입니다.  우리나라의 산업화가 진행됨에 따라 대학에 진학하는 사람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었고, 아이러니하게도 전혀 별개의 영역으로만 보였던 창작 분야에서마저 산업화의 영향은 뚜렷이 보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소설이라는 특정 형식은 판에 박은 듯 일정하고 내용만 조금 달라진 수많은 소설들이 쏟아졌던 거지요.  제 눈에는 그게 그거인 듯 보였고, 심지어 일정한 생산 라인에서 자동으로 뽑아져 나온 것처럼 보이기도 했어요.  내가 한국 소설에서 멀어졌던 게 아마 그때부터였던가 봅니다.

 

이따금 궁금하기는 했어요.  그럴 때면 어려서부터 눈에 익은 유명 작가의 작품에만 손이 가더군요.  그마저도 없으면 일본이나 서구 작가의 작품을 읽게 되었구요.  그러다가 최근 유행하는 한국 작가의 작품을 읽게 된 것도 얼마 전의 일이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천명관의 <고래>였습니다.  말하자면 <고래>는 나로 하여금 한국 소설과 재회하게 한 첫 소설인 셈입니다.

 

아, 천명관의 이력이 궁금했었다는 말을 해놓고 그에 대한 설명이 없었군요.  늘 이런 식입니다.  두서가 없지요.  다들 예상하겠지만 그가 이 세상에 <고래>를 내놓기 전 그의 (작가로서의) 이력은 보잘 것 없는 것이었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노가다판을 전전하다가 영화의 세계로 뛰어들었던 것이죠.  그마저도 여의치 않아 글을 쓰기 시작했지만 말입니다.  그가 소설 같지 않은(그래서 더욱 놀라운) 소설 <고래>를 쓸 수 있었던 것도 틀에 박힌 교육을 받지 않았던 덕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소설 <고래>는 긴 겨울 밤 시커먼 남정네들이 행랑에 모여 시답잖은 이야기를 쏟아내고 있을 때, 작가가 투명인간이 되어 그들 몰래 방의 한 귀퉁이에 자리를 잡고 앉아 그들의 이야기를 그대로 옮겨 적은 듯한 인상을 받게 되는 그런 소설입니다.  이를테면 허풍과 현실이 한데 섞여 서로 분간하기조차 어려운, 음담패설과 비속어가 난무하는, 그러면서도 한국 근대사가 교묘히 섞여들어간, 때로는 '가량맞다'와 같은 순 우리말이 불쑥 튀어나오는 그런 소설입니다.  설화나 전설, 신화가 아닐까 의심하는 순간 작가는 불쑥 '독자 여러분!'을 외치며 등장하기도 합니다.  마치 무성영화의 변사처럼 말입니다.  그 말에 놀란 독자는 '아, 맞아.  이건 가상현실이지.'하며 안심하게 되는 것입니다. 

 

"장군은 정치적으로 위기를 맞고 있었다. 선거가 다가오면서 그는 자신이 다시 선출되리라는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 정적들은 더욱 거세게 그를 압박해왔고 민심은 그를 떠난 지 오래였다. 그는 마지막으로 승부수를 던졌다. 자신이 죽을 때까지 영원히 집권하겠다는 내용을 담은 새로운 법률을 공포한 것이었다. 그것은 독재의 법칙이었다." (p.351)

 

이런 터무니없는 소설이 어떻게 독자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게 된 것일까요?  그것이 비단 작가의 글솜씨나 소설로서의 파격에만 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뻥과 허풍이 난무하는, 현실에서 살짝 비껴간 듯하면서도 결코 현실로부터 멀어지지 않는 그들의 말, 그들의 삶을 제대로 짚어내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도덕과 법의 테두리 속에 존재하는 삶이 난데없는 뻥과 결합했을 때 우리가 받는 느낌은 비현실이 아니라 무한한 자유와 재미로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하나로 합쳐 흐트러짐 없는 서사로 엮어낸 작가의 능력도 대단한 것이지만 그것은 작가의 경험에서 비롯된 그들만의 언어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구요.

 

아무튼 소설 <고래>는 기존의 소설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새로운 것인 것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소설의 태생이 그렇듯 뒷골목의 이야기를 일정한 형식에 담아내기만 하면 된다는 식의 발상은 작가 천명관에게는 통하지 않는 것처럼 보입니다.  남들이 뭐라 하건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자유롭게 써내려간 까닭에 독자는 규칙에서 해방된 듯한 자유를 느끼고 그의 뻔한 허풍에 웃음을 짓게도 됩니다.  그럼에도 아무런 탈 없이 이야기가 꾸려지는 게 신기하지요?  그것은 아마도 누군가 강제로 이끌지 않아도 보이지 않는 규칙에 따라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우리의 삶을 그리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싶습니다.

 

이렇듯 자유로운 소설에 무수히 많은 법칙이 등장한다는 게 놀랍습니다.  작가는 소설 중간중간에 말도 안 되는 법칙들을 갖다붙여 독자로 하여금 이 소설이 다큐가 아닌 예능으로 읽히도록 강제하는 듯합니다.  예컨대 '구라의 법칙', '권태의 법칙', '생식의 법칙', 아랫것들의 법칙', '구호의 법칙', '흥행업의 법칙', '논쟁의 법칙', '고용의 법칙', '사랑의 법칙' 등 법칙이란 법칙이 셀 수도 없이 많이 나옵니다.

 

고향 사람들의 이야기가 나올 즈음에는 청산유수로 쏟아내는 그의 말솜씨에 세 여자가 모두 넋을 잃어 국이 졸아붙는지 밥이 타는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그것은 구라의 법칙이었다. (p.140)

 

사실 이 소설의 줄거리는 별 의미도 없지만 천부적인 입담꾼 천명관의 손에서 펼쳐지는 글의 얼개는 국밥집 노파와 금복, 금복의 딸 춘희로 이어집니다.  읽는 독자에 따라 금복을 주인공으로 또는 그녀의 딸 춘희를 주인공으로 생각할 수도 있겠습니다.  소설 속 무대인 평대를 중심으로 이재에 밝은 금복은 탁월한 수완을 발휘하여 부자가 됩니다.  그야말로 벼락부자가 된 셈이지요.  그것은 순전히 한을 품고 죽은 박색 노파의 재물을 손에 넣었기 때문인데 결국 금복은 그 죽은 노파로 인해 파국을 맞게 됩니다.  산골 출신의 한 소녀가 욕심을 제어하지 못한 채 앞만 보고 내달리는 모습입니다.

         

"그녀가 고래에게 매료된 것은 단지 그 크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언젠가 바닷가에서 물을 뿜는 푸른 고래를 만났을 때 그녀는 죽음을 이긴 영원한 생명의 이미지를 보았던 것이다.  이때부터 두려움 많았던 산골의 한 소녀는 끝없이 거대함에 매료되었으며, 큰 것을 빌려 작은 것을 이기려 했고, 빛나는 것을 통해 누추함을 극복하려 했으며, 광대한 바다에 뛰어듦으로써 답답한 산골마을을 잊고자 했다."    (p.271)

 

금복이 지었던 고래를 닮은 영화관은 그 상징성이 남다릅니다.  영화라는 가상현실, 그 덧없음은 우리가 욕심내는 어떤 것도 스크린의 그것처럼 허망한 것임을 말하는 듯합니다.  결국 금복은 영화관과 함께 불에 타 죽게 됩니다.  방화범으로 몰린 벙어리 춘희는 자신에 대한 변명도, 결백에 대한 주장도 할 수 없었습니다.  매섭고 긴 옥살이를 선천적으로 타고난 건장한 육체 하나에 의지하여 간신히 버틸 뿐입니다.  순진하리만치 미련한 춘희, 남에게 해코지를 할 줄 모르는 춘희도 결국에는 비참한 최후를 맞는 것을 보면 이 소설은 우리가 상상하는 어떤 주제로 집약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무모한 열정과 정념, 어리석은 미혹과 무지, 믿기지 않는 행운과 오해, 끔찍한 살인과 유랑, 비천한 욕망과 증오, 기이한 변신과 모순, 숨가쁘게 굴곡졌던 영욕과 성쇠는 스크린이 불에 타 없어지는 순간,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함과 아이러니로 가득 찬, 그 혹은 그녀의 거대한 삶과 함께 비눗방울처럼 삽시간에 사라지고 말았다."    (p.301)

 

천명관의 <고래>는 내가 그동안 줄곧 생각해왔던 한국 소설에 대한 이미지를 단박에 깨트린 작품이었습니다.  나는 어쩌면 천명관이라는 작가로 인해 한국 소설에 대한 기대와 흥미를 한동안 품고 지내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은 마치 첫눈에 대한 막연한 기대처럼 설레는 것일 테지요.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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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대화는 주변에 있는 모든 집들의 창문이 창호지에서 유리로 바뀌던 시점에서 시작해야 할 것 같군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밖에서는 집안의 어느것도 보이지 않던 시대에서 모든 게 훤히 들여다 보여 무엇 하나 감출 수 없는 시대로 급격하게 바뀌던 그 시점 말이지요. 왜 우리는 모든 게 명명백백해지고, 이웃의 모든 사람들이 진실만 말할 것 같은. 진리의 순간이 도래한 것만 같았던 그 시점부터 소통은 끊어지고, 불신은 증가했으며, 자신과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들을 감추지 못해 안달복달하기 시작했던 걸까요? 참으로 알 수 없는 노릇이지요?

 

우리가 그때 저마다의 꿈을 적어 보냈던 희망의 주소지는 잘못되어도 한참이나 잘못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했던 미래에 대한 낙관은( 이를테면 모두가 풍요롭고, 안락한 생활을 영위하며, 노후를 걱정하지 않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오직 사랑과 신뢰의 눈길만 있을 것 같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까요? 초록색 이파리 세 개가 그려진 깃발 아래서 사시사철 주린 배를 움켜 쥐고 땀을 흘려야 했던 부모 세대의 탈진은 신기루에 불과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수능 한파가 몰아쳤던 어제와는 딴판의날씨가 펼쳐지고 있습니다. 어제와 오늘의 날씨가 다른 것처럼 과거에 했던 기대와 오늘의 현실이 이토록 차이가 나는 까닭은 투명한 창유리 속에 너무도 많은 비밀이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네 같은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는, 투명함 속에 숨겨진 거짓과 위선은, 창호지에 어룽지던 검은 실루엣과는 사뭇 다른 것이지요. 이제 우리는 거짓과 진실을 구별하기는커녕 삶과 죽음의 경계마저 무너진 그런 세상에 도착한 듯합니다.

 

당신이 보낸, 그리고 나의 온 마음을 담았던 희망의 메시지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못된 배달부가 당신과 내가 알지 못하는, 평생 가본 적도 없는 어떤 곳으로 배달한 것은 아닌지요. 혹은 '수취인 불명'의 낙인을 찍어 어두운 반송함에 쳐박아 두었는지요. 기다림은 이제 속절없는 체념으로 바뀌어가고 있습니다. 어제 수능시험을 본 아이들, 그보다 한두 살 더 어린 아이들도 미래를 향한 희망의 편지는 더 이상 쓰지 않는다 합니다. 당신과 내가 보냈던 순진한 편지는 이제 갓 태어난 아이들의 눈에서나 찾을 수 있을 듯합니다. 조금 더 세월이 흐르면 탄생과 함께 체념을 배우는 세대가 도래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직 희망의 메시지는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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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9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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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서적도 아닌데 한 자 한 자 신경을 곤두세우고 주의해서 읽어야 할 책들이 있습니다.  마치 삶의 비의를 탐구하는 철학자처럼 말입니다.  고전은 말할 것도 없고 현재 살아 있는 작가의 작품들 중에도 그런 소설은 의외로 많은 것 같습니다.  내게는 예컨대 밀란 쿤데라, 미셸 트루니에, 움베르토 에코, 김훈이나 최명희가 그렇습니다.  그런 류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지금은 대학로에서 연극 연출을 하고 있는 친구의 말이 생각나곤 합니다.  대학 시절 시인으로 등단했던 친구는 그의 시가 너무 어렵다는 나의 불평에 대해, "시인이 어렵게 썼으니 독자도 당연히 어렵게 읽어야 하고, 그에 상응하는 시간 투자를 하는 게 당연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웃기는 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 보면 전부 다는 아닐지라도 그의 말에도 일말의 가치가 있다고 수긍하게 됩니다.

 

밀란 쿤데라의 초기 작품인 <농담>은 독자들에게 여러 명제를 제시하는 작품입니다.  젊은 시절에 가볍게 던졌던 농담이나 치기어린 행동으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운명의 구렁텅이로 빠지게 되었을 때, 그 책임은 전적으로 자신에게 지워지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의 말과 행동을 오해했던 다른 사람들에게 있는 것인지, 게다가 그것이 부당하다면 과연 우리는 바로잡을 수 있는 것인지, 세월이 한참 지난 뒤 자신을 오해했던 사람들에게 복수하는 것은 가능한 일인지, 그도 여의치 않다면 자신의 분노는 어찌해야 하는지, 비록 자신의 인생이 의도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흐를지라도 역사가 저지른 농담이나 신의 계시쯤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옳은지, 부당함에 대한 우리의 분노를 스스로 억제한 채 신의 계시쯤으로 여기는 행동이 혹시 비겁함이나 소심함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지...  그 모든 명제에 대해 우리가 아는 진실은 이렇다 딱 부러지게 답할 수는 없을 듯합니다.

 

"미루어진 복수는 환상으로, 자신만의 종교로, 신화로 바뀌어버리고 만다. 그 신화는 날이 갈수록 신화의 원인이 되었던 주요 인물로부터 점점 더 분리되어 버린다. 그 인물들은 사실상(자동 보도는 멈추지 않고 계속 앞으로 움직인다) 더 이상 예전의 그들이 아닌데, 복수의 신화 속에서는 조금도 변하지 않은 채 그대로 남아 있게 되는 것이다." (p.396)

 

소설의 무대는 940년대 후반 체코의 공산혁명직후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모든 것이 혁명적 이데올로기를 띄며 강요되어지던 시기에 주인공 루드빅은 그 모든 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진 않았습니다.  그저 시대적 상황에 흡수되어 그 시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젊은이였을 뿐. 그러던 어느 날 연애하고 싶은 여자 마르게타는 공산당 여름캠프에만 열을 올리고 그런 그녀를 놀려줘야겠다고 생각했던 루드빅은 농담처럼 쓴 연서 한 통을 보냅니다.  그러나 그 한 통의 편지로 인해 루드빅은 덜컥 재판에 회부되고 반역자로 지목되어 순식간에 인생의 항로가 뒤바뀌게 됩니다. 사랑의 이름으로 행했던 일들이 그를 배신하고 스스로가 잔인한 농담의 대상이 되어 버린 웃지 못 할 상황. 결국 루드빅은 당에서 제명되고 다니던 대학에서도 추방되고 맙니다.

 

"삶은, 아직 미완인 그들을, 그들이 다 만들어진 사람으로 행동하길 요구하는 완성된 세상 속에 턱 세워놓는다. 그러니 그들은 허겁지겁 이런저런 형식과 모델들, 당시 유행하는 것, 자신들에게 맞는 것, 마음에 드는 것, 등을 자기 것으로 삼는다 - 그리고 연기를 한다." (p.125)

 

그리고 15년후, 루드빅은 자유로워졌고 15년 전 자신의 농담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그녀와 그들에게 복수를 꿈꾸지지만 그가 계획했던 복수는 계속해서 희극적으로 어긋나게 되고, 결국 그는 자신의 인생을 통하여 우리의 삶 자체가 농담이며 그 농담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게 됩니다. 과거는 과거일 뿐 현재와 공존할 수 없다는 것과 우리가 현재라고 믿는 오늘도 곧 미래의 과거 일뿐이라는 필연적인 사실. 그 사실을 깨닫는데 루드빅은 15년이나 걸렸던 셈입니다.

 

"나는 그에게 책임이란 자유 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답했다. 자신은 공산주의자로서 행동하기에 충분히 자유롭다고 느낀다고. 자신이 공산주의자임을 증명해 보여야 하며, 그렇게 할 것이라고. 이 말을 하며 그는 턱을 덜덜 떨고 있었다. 오늘, 수많은 세월이 흐른 뒤, 이 순간을 떠올리면서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잘 알 것 같다. 알렉세이는 그때 겨우 스무 살 청년, 어린아이였음을, 그의 운명은 마치 아주 작은 몸 위에 걸쳐진 거인의 옷처럼 바람에 펄럭이고 있었음을." (p.149)

 

루드빅은 자신을 당에서 제명하고 곤경에 빠트렸던 파벨 제마넥에게 복수하기 위해 파벨의 부인인 헬레나를 유혹합니다.  그러나 헬레나는 이미 파벨과 별거중인 상태였고, 루드빅의 행동이 그의 진심이라고 철석같이 믿습니다.  루드빅은 자신의 고향인 모라비아에서 파벨과 헬레나를 함께 만나게 되는데 젊고 예쁜 여자를 대동한 파벨은 선심 쓰듯 헬레나를 양보합니다.  과거에 했던 자신의 잘못을 그것으로 용서받으려는 듯 말입니다.

 

"우리 삶의 모든 중대한 순간들은 단 한번뿐,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이렇게 다시 돌아오지 못함을 완전히 알고 있어야만 인간은 인간일 수 있다.  속임수를 써서는 안 된다.  그런 것을 전혀 모르는 척해서도 안 된다.  현대인은 속임수를 쓴다.  그들은 다시 돌아오지 못할 중대한 순간들을 모두 교묘히 피해가려 하고, 그렇게 해서 아무것도 지불하지 않은 채 탄생의 순간에서부터 죽음까지 가려 한다."    (p.213)

 

루드빅이 당에서 제명되고 곧바로 군에 입대하여 탄광에서 일을 하고 있을 때 그가 사랑했던 여인이 있었습니다.  오스트라바의 공장에서 일하던 루치에라는 여인이었죠.  자유가 허락되지 않았던 생활 속에서 루치에는 루드빅의 희망이자 꿈이었습니다.  결국 루드빅은 루치에로부터 루드빅의 어떠한 요구도 수락하겠다는 허락을 받았지만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루치에는 그와의 관계를 완강히 거부합니다.  결국 루치에는 루드빅의 이루지 못한 꿈으로 남게 된 셈입니다.  그런 루치에를 그는 고향 모라비아에서 우연히 맞닥뜨립니다.  그리고 과거에 루드빅이 도움을 주었던 코스트카로부터 루치에의 과거를 듣게 됩니다.  루드빅 자신을 거부했던 루치에가 코스트카에게 그녀의 몸을 허락했다는 것도.  그리고 열여섯 살의 나이에 같은 또래의 남자들로부터 유린되었다는 것도.

 

"우리는 유린된 세계에서 살아왔다.  그리고 이 세계를 불쌍히 여길 수 없었던 까닭으로 우리는 거기에 등을 돌렸고, 그리하여 이 세계의 불행과 우리 자신의 불행을 다같이 악화시키고 말았다."    (p.426)

 

그렇습니다.  우리 모두는 유린된 세계에서 살아왔고, 살고 있고, 앞으로도 그 세계에서 살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한 사람의 운명은 자신의 의사와 일치하는 방향으로만 흐르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때 어느 누구에게 우리의 분노를 드러내야 할까요? 역사의 농담에?  신의 계시에?  작가가 말했듯 유린된 세상에 등을 돌린 사람은 자신이 사는 세계와 자신을 다같이 불행하게 할 뿐입니다.  그들도 나처럼 유린된 세상에 살고 있음을 불쌍히 여겨야겠지요.  과거의 부당함은, 그때 내게 해를 끼쳤던 사람은 복수의 대상이 아닌, 다만 가엾게 여겨야 할 또 다른 자아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저 역사의 파도에 휩싸일 날만 기다리면서.

 

"슬픔, 우울의 공감보다 사람을 더 빨리 가깝게 만들어주는 것은 없다(그 가까움이 거짓인 경우가 많다고 하더라도).  말없이 고요하게 서로 감정을 공유하는 이런 분위기는 그 어떤 두려움이나 방어도 잠들게 하며, 섬세한 영혼도 속된 자도 모두감지할 수 있는 것으로서, 사람을 가까워지게 만드는 방식 중 가장 쉬운 것이면서 반면에 가장 드문 것이기도 하다."    (p.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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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다 - 김영하의 인사이트 아웃사이트 김영하 산문 삼부작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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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 전 대학 시절 같은 동아리 멤버였던 한 친구의 결혼 후 집들이에 초대를 받아 간 적이 있다.  당시 나는 군복무를 무사히 마치고 막 제대하여 복학을 준비하던 시기였고, 다른 친구들은 이미 다니던 학교를 졸업하고 취직을 했거나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던 때였다.  사실 우리 동아리는 동아리라고 말하기도 쑥스러운 작은 모임에 불과했었지만 대학 시절 우리는 일주일이 멀다 하고 시도 때도 없이 만나곤 했었다.  여자 셋에 남자 하나인 우리 모임은 비록 인원은 단출했지만 다니는 학교가 다 달랐기에 약속 시간을 잡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모임의 청일점이었던 내가 궂은일을 도맡다시피 했던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까닭에 우리의 모임 장소는 언제나 내가 다니던 학교 근처의 어느 카페로 정해졌었고, 그렇게 자주 만나면서도 만날 때마다 한참이나 서로의 안부를 물었었고, 시답지 않은 농담에도 배꼽이 빠지도록 웃곤 했다.  우리는 그렇게 형제자매인 양 몰려다녔고 이따금 그것도 시큰둥해지면 응암동의 단독주택에 살던 한 친구의 집으로 불쑥 쳐들어가곤 했었다.  서울에서 건축 설계 사무소를 하던 그 친구의 아버지는 외동딸인 그녀를 무척이나 아끼셨던 까닭에 우리 멤버들도 언제나 환영을 받았었다.

 

그녀의 집은 복잡한 서울 시내에 위치한 집이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규모가 크고 웅장했었다.  잔디가 깔린 넓은 마당과 잘 가꾸어진 정원, 식구 세 명이 살기에는 턱없이 넓었던 3층 건물, 그리고 우리가 방문할 때마다 끝없이 내오던 음식과 과일.  그럼에도 그때는 누구 하나 열등감을 느끼거나 부러워하는 기색을 보이지 않았었다.  같은 대학생이라는 약하디 약한 동질감이 크게 작용했던 듯하다.

 

내가 갑작스레 군입대를 하면서 깨질 줄 알았던 모임은 단지 모임의 장소만 바뀌어 계속 이어졌다.  내가 서울과 가까운 곳에서 군생활을 했던 것도 모임이 이어진 원인 중 하나였을 것이다.  그녀들은 서울에서 전철을 타고 다시 버스를 갈아 타야 했던 불편을 감수하면서 매주 토요일마다 면회를 오곤 했었다.  내무반의 막내사절부터 줄기차게 면회를 오는 그녀들이 싫지는 않았지만 그로 인해 혹시 고참들로부터 미움을 받지는 않을까 염려가 되기도 했었다.  그러나 내무반의 고참들은 오히려 나를 통하여 여자 친구를 한 명쯤 소개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더 컸었던 듯했다.

 

내가 제대를 하고 복학을 준비하던 시기에 그녀들은 졸업을 했다.  둘은 취직을 했고 응암동에 살던 그녀는 내가 다니던 대학의 도서관에 나와 책을 읽거나 산책을 하거나 이따금 영화를 보거나 전공이 국문과였으니만큼 적당히 글을 쓰면서 지냈다.  한마디로 무위도식의 삶을 굳건히 살았던 셈이다.  그러던 중 취직을 했던 한 명이 결혼을 했고 서울 외곽의 신시가지에 터를 잡고 우리를 초대했던 것이다.  33평의 깨끗한 아파트와 모든 게 새것인 신혼살림.  비록 전세라고는 했지만 사회 초년생인 그녀에게는 과분한 것이엇는지도 몰랐고, 그래서였는지 그녀는 신혼집과 자신의 남편을, 행복에 취한 자신을 한껏 자랑하고 싶어했다.

 

나는 지금도 그 신혼집 집들이에서 응암동 그녀가 했던 말을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이곳저곳 한참을 둘러보던 그녀는 소파에 풀썩 몸을 내던지며 새댁이던 다른 그녀에게 물었다.  "이거 몇 평이야?" 묻자 새댁이었던 그녀는 "응, 삼십삼 평.  그래도 꽤 넓어 보이지?" 웃으며 되물었다.  그런데 응암동 그녀의 대답은 우리 모두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했다.  응암동 그녀의 대답은 "그래?  답답하겠다." 였다.  우리를 초대했던 신혼부부는 물론 나와 같이 갔던 또 다른 그녀마저 일순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 자리에서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던 사람은 오직 응암동 그녀뿐이었다.

 

그때 응암동 그녀는 신혼이었던 그녀를 놀려주려는 의도도, 일찍 결혼한 그녀를 시샘해서 나온 말도 아니었음을 나는 그녀의 표정에서 읽을 수 있었다.  우리와 만나기 전에는 지하철을 단 한 번도 타본 적이 없었다고 했던 응암동 그녀의 고백이 거짓이 아니었음을 나는 그때 알았다.  우리가 자주 몰려다니던 그때 인기리에 방영되던 '전원일기'에 대해 우리 중 누군가가 물은 적도 있었다.  그때도 그녀는 '그거 그냥 설정 아니야?"하고 되물었었다.  그녀는 다만 자신 밖의 세상을 전혀 알지 못했을 뿐이었다.

 

내가 김영하의 산문집 <보다>를 읽으면서 문득 응암동 그녀를 떠올렸던 것은 작가도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구나, 느꼈기 때문이다.  "진짜 부자는 소유하지 않는다"는 소제목의 글에서 작가는 이렇게 쓰고 있다.

 

"부자를 정말 부자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은 가난에 대한 무지다.  예를 들어 TV 드라마 <시크릿 가든>의 재벌집 아들 김주원(현빈)은 가난한 스턴트우먼 길라임(하지원)에게 친절한 얼굴로 이렇게 묻는다.  "이봐, 길라임씨.  혹시 가난한 사람들은 뭐 사고 싶은 게 있거나 하면 오랫동안 저축도 하고 마음도 졸이고, 뭐 그러는 거야?"    (p.25)

 

그런가 하면 자신의 중학교 시절 체험에서,

 

"어느 날 우리 둘은 학교 바로 앞에 있는 우리집에 가서 놀기로 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던 그가 가지런히 놓인 슬리퍼를 보고 이렇게 말했던 것을  나는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이렇게 작은 집에도 슬리퍼가 필요해?"  그의 말에는 그 어떤 공격성이나 비아냥의 기운도 없었다.  그의 의문은 순수한 호기심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이런 천진함이야말로 그가 가난을 거의 경험하지 않고 살아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p.28)

 

산문집 <보다>에서 작가는 자신의 체험, 보았던 영화, 읽었던 책 등에서 작가 자신이 느꼈던 점과 생각나는 것들을 기록하고 있다.  총 4부로 이루어진 이 책에서 작가는 여러 이야기들을 말하고 있지만 나는 그 많은 이야기들을 다 기억하지 못한다.  산문집을 읽는 대부분의 독자가 나와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떤 글은 나와 생각이 달라서, 어떤 글은 재미가 없어서, 어떤 글은 너무나 현학적이어서...  그렇게 읽다 보면 책을 다 읽은 후에도 머릿속에 남는 것은 별로 없다.  다만 그 느낌만 전해질 뿐.

 

응암동 그녀는 대학을 졸업하고 몇 년을 빈둥대다가, 또는 이따금 나를 귀찮게 하다가 불쑥 결혼을 했고, 얼마 안 가 이혼을 했고, 한동안 나에게 밤마다 슬픈 전화를 하다가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 어떤 이유로 연락이 끊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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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4-11-11 10:36   좋아요 0 | URL
호호호 꼼쥐님의 스토리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3녀 1남도 모임이 되는군요^^

시크릿가든의 김주원 대사 들으며 참 서글펐는데....
그래도 현빈은 여전히 좋아요^^

꼼쥐 2014-11-14 10:13   좋아요 0 | URL
어떤 모임에서든 모임의 성패는 인적구성의 성비가 아니라 구성원들 간의 소통이 얼마만큼 잘 되느냐에 달린 것 같아요. 어찌 보면 조금 특이한 구성이었지만 유대관계는 상당히 좋았던 것 같아요.

시크릿가든, 저도 자주 보던 드라마였었죠. 저는 현빈보다는 하지원이 맘에 들어서. ㅎㅎ

[그장소] 2014-12-22 08:23   좋아요 0 | URL
확실히 글쓰시는게 단정하게 뭔가 자주 해왔던 익숙함이 느껴져 편안해요.
역시 혼자만 보기위한 글을 쓰는건 좋진 못한것 같아요.꼼쥐님 글을 보니 제가
얼마나 대화라는 것을 잊었나를 알겠어요..슬퍼요..

그치만 글은 재미있었고 좋아요..^^ 덕분에 잘 배우고 갑니다.자주뵙겠습니다.

꼼쥐 2014-12-27 12:38   좋아요 0 | URL
답글이 늦었네요. 죄송합니다.
다른 블로거의 글을 읽고 소통할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일도 없겠지요.
칭찬해주셔서 고맙습니다. ^^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
박민규 지음 / 한겨레출판 / 2003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읽으면서 웃음을 참는다는 것은 집 앞 건너편의 신설교회가 주민의 화합을 도모코져 주일 예배 시간에 맞춰 돼지머리를 놓고 고사를 지낸다고 뻥을 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나는 최근에 컴백한 MC몽의 '내일 더 힘들 거야 그러니 지금부터 마음 단단히 먹어'라는 경고를 무시한 채 책을 읽다가 그만 병원에 삼 일쯤 입원할 뻔했다. 병명은 '웃음 방어기제의 과도한 사용으로 인한 급발성 호흡곤란 및 복통'.

 

병원에 가는 걸 무엇보다도 싫어하는 나는 참았던 웃음을 시원하게 터트렸고, 내 웃음 소리에 놀란 옆집의 불임 부부는 한밤중의 난데없는 소음에 놀라 잠에서 깨는 바람에 임신을 하게 되었다며 좋아했고, 어쩌면 일흔을 넘긴 윗집의 노부부도 조만간 늦둥이 소식을 전해오지 않을까 하는 의심이 들 무렵에 이르러서야 책을 다 읽을 수 있었다. 그것은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었다. 하마터면 나는 '나의 웃음을 이웃에게 알리지 말라!'고 외칠 뻔했으니까 말이다.

 

"이상하게도 그 단어를 듣는 순간 웃음이 터져 나왔다. 압력밥솥의 추를 흔들며 새어 나온 김 같은 것이, 뜨겁게, 입술을 빠져나왔다." (p.180)

 

그런가 하면 나는 다음날 닞에 걸려온 전화를 받으면서 키득대고 웃는 바람에 '안으로 자주독립의 자세를 확립하고, 밖으로 인류공영에 이바지할' 사람의 집중력을 흐트러트림으로써 대한민국의 노동 생상성을 0.001%쯤 감소시켰으며, '뭐가 그리 우습느냐?'는 짜증 섞인 질문에 아무것도 아니다, 고 얼버무렸으며, 나라의 융성이 나의 발전의 근본임을 막 깨닫는 중이라고 덧붙여 말해야만 했다. 게다가 나는 거의 하루 종일 실성한 사람처럼 웃어대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고, 과연 이와 같은 나의 노력이 대한민국의 건보재정에 얼마나 기여했을까 생각하며 산술적이고도 논리적인 방식으로 계산하기 위하여 옆에 놓인 계산기를 어찌나 눌러댔던지 손가락에 물집이 잡힐 정도였다.

 

급기야 나는 '너 요즘 아무도 몰래 엑스터시를 하는 거 아니냐'는 엉뚱하고도 해괴모닉한 질문을 받는 지경에까지 이르렀고, '수능특강 윤리와 사상'에서도 찾을 수 없는 마약 중독자로 내몰릴 뻔했다. 가을 하늘 공활한데 어디 할 짓이 없어서 신종 마약에 취하겠는가.

 

"지구의 모든 것들을 대표해 - 삼미는 최후까지 자신의 질량을 보존해주었고, 경기가 끝날 때까지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경기가 종료된 후 삼미의 선수 전원이 그라운드로 올라왔다. 고별의 안내 방송과 함께 슈퍼스타즈가 연고지의 팬들을 향한 마지막 인사를 올렸고, 떡 떡 떡, 미운 자식 떡 하나 더 주는 심정으로 팬들은 뜨끈뜨끈한 박수와 환호를 그들에게 던져주었다. 82년 2월 5일 창단에서 85년 6월 21일의 마지막 경기까지 - 3년 6개월이라는 짧은 세월 동안 통산 120승 4무 211패의 전적을 기록하고. 흐르는 별 삼미 슈퍼스타즈가 역사의 저편으로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p.117)

 

중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삼미 슈퍼스타즈의 팬믈럽 회원이었던 작중 화자와 친구는 짧았던 삼미 슈퍼스타즈의 운명처럼 그보다 더 짧은 사춘기를 보냈고, 찝찔한 눈물을 흘리며 각오를 다졌고. 과연 일류대에 합격했다. '빨간 옷에 청바지 입고 산에 갈 생각'을 하지 않은 덕분이었다. 아마추어의 실력으로 프로의 세계에서 살아남으려 했던 삼미 슈퍼스타즈, 고군분투했던 팀의 선수들과 함께 했던 작중 화자는 그들로부터 많은 것을 느끼고 깨달았다.

 

"인생은 결국, 결코 잘하리라는 보장도 없이 - 거듭 버틸 수 있는 데까지 버티다가 몇 가지의 간단한 항목으로 요약되고 정리되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p.199)

 

다카하시 겐이치로의 <사요나라, 갱들이여> 이후 이렇게 실컷 웃어본 적도 없는 듯하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은 웃음 속에서 진한 감동을 느끼는 블랙코미디와도 같은 책이다. 무방비로 똥침을 맞았을 때의 화끈한 충격처럼 우리는 누구나 운명이라는 다부진 엉덩이에 깊숙한 똥침을 날릴 날이 반드시 온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사요나라, 갱들이여>에 자주 등장하는 대사처럼 '다 그렇게 가는 거지.' 우리의 삶은 결코 짧지 않은 시간. '소소한 하루가 넉넉했던 날/ 그러던 어느 날 세상이 뒤집혔죠 다들 꼭 잡아요 /잠깐 사이에 사라지죠'(서태지의 '소격동'에서)

 

지나온 삶의 궤적이 타원 방정식의 두 초점처럼 분명하지 않은 어떤 중심을 향해 이끌려지고, 생명을 다한 시간들이 늦가을의 살비늘처럼 우수수 떨어지는 순간이 오면 또 다른 생명의 세포들이 그 자리를 다시 꿰차는 것처럼 사라진 삼미 슈퍼스타즈의 팬클럽 회원은 지금도 어디선가 회원 가입서에 사인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팔십 년대의 소년은 이제 취직을 하고, 결혼을 하고, IMF의 긴 터널 속에서 이혼을 하고, 프로의 세계가 된 돈벌이에 힘겨워했고, 급기야 실직을 했고, 여러 번 직장을 옮겼고, 아내와 재결합을 했다. <치기 힘든 공은 치지 않고, 잡기 힘든 공은 잡지 않는다>를 견지했던 삼미 슈퍼스타즈의 팬클럽 회원들은 그렇게 나이를 먹고, 각자의 위치에서 '잡기 힘든 공은 잡지 않으며' 산다. 살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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