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칙을 세워 놓은 것도 아닌데 누군가는 항상 먼저 전화를 걸고, 또 누군가는 어떤 죄책감도 없이 줄곧 오는 전화만 받게 된다. 마치 태어나기 훨씬 이전부터 그리 되도록 정해진 것처럼. 우리가 정한 적 없는 알 수 없는 원칙들은 우리 주변에 의외로 많은 것 같다. 주야장천 전화만 거는 사람도 어느 한순간 뻗대볼 만도 한데 얼마 못 가서 제 풀에 지쳐 언제 그랬냐는 듯 또 전화를 걸고 만다. 운명처럼 질긴 게 또 있을까.

 

나는 어느 쪽인가 하면 후자에 가깝다. 갖은 교태를 부려 살갑게 전화를 걸라는 것도 아닌데 나는 이상하게도 어떤 특별한 용건이 있지 않는 한 전화를 하거나 문자를 보낼 생각을 하지 못한다. 매번 타박 아닌 타박을 들으면서도 말이다. 그렇다고 하여 한동안 연락하지 못했던 누군가가 궁금하다거나 그립다고 느껴지지도 않는다. 그런 것을 두고 혹자는 내게 무심하다고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단 한 번도 내가 무심한 성격의 사람이라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다. 이건 자기변명이 아니다. 그저 나로 인해 다른 사람의 삶에 변화를 주는 것 자체가 싫을 뿐이다.

 

어제는 '간통죄(adultery)'가 위헌이라는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있었다. 성적 자기결정권과 사생활의 비밀자유를 침해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위헌이라는 것이다. 이로써 1953년에 제정되었던 이 법은 62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되었다. 나는 예전에 어느 외국인과 '간통죄'에 대해 의견을 나눈 적이 있다. 선진국에서는 이미 오래 전에 폐기된 법이기에 그 외국인이 보기에도 한국이 참 보수적인 국가구나 생각했던 모양이다. 그나저나 간통죄가 폐기되었다고 콘돔 제조사의 주가가 상한가를 치는 이유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뭔 연관성이 있는지.

 

오늘은 김기춘 비서실장의 후임으로 이병기 전 국정원장이 임명되었다. 답이 없는 정부다. 세상에 이런 나라도 있구나 싶다. 그게 대한민국이라는 게 어이없지만. 이따금 하늘을 보지 않는다면 그 화를 어찌 다 삭일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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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메리 앤 섀퍼.애니 배로스 지음, 신선해 옮김 / 이덴슬리벨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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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누군가의 편지글을 읽는 것만으로도 나는 금세 닿을 수 없는 어떤 그리움에 후루룩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아요. 다들 그렇지 않나요? 그래서인지 편지 형식의 문학 작품을 많이도 읽었던 듯합니다. 기억나는 것만으로도 고흐의 <반고흐, 영혼의 편지>, 헬렌 한프의 <채링크로스 84번지>, 안토니오 그람시의 <감옥에서 보낸 편지>,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루시드 폴과 마종기 시인의 <아주 사적인, 긴 만남>, 서경식과 타와다 요오꼬의 <경계에서 춤추다>, 이중섭의 <이중섭의 편지와 그림들> 등 아련한 추억과 함께 떠오르는 책의 제목들이 그저 미소짓게 합니다. 아름다운 책들입니다.

 

우리가 서간체 문학에 감동하는 이유는 아마도 다양한 인간의 속성 중에서 사랑과 신뢰의 감정을 두드러지게 드러내기 때문일 것입니다. 진실되고 투명한 시선으로 서로를 바라보는 까닭에 다른 사악한 감정들이 감히 개입할 수조차 없는, 적어도 편지를 쓰거나 읽는 시간만큼은 그러한 감정들의 존재마저 부정할 수 있는 기회가 우리에게 찾아오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편지가 갖는 순수한 고백성은 때로 글을 읽는 모든 이들의 마음을 적시고, 순박했던 어린 시절로 되돌아가게도 합니다.

 

나는 편지글 자체로서의 수필뿐만 아니라 편지 형식의 소설도 좋아하는 편입니다. 진 웹스터의 <키다리 아저씨>나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 감수성 예민한 청소년기를 통과하는 상징과 같은 서간체 소설이라면 메리 앤 섀퍼의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은 봄날의 산책길에 우연히 만난 제비꽃처럼 귀엽고 앙증맞은 소설입니다.

 

채널제도의 건지 섬을 배경으로 씌어진 이 소설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에 점령되어 5년의 세월을 견뎌야 했던 건지 섬 사람들의 이야기를 편지글 형식으로 실감나게 그리고 있습니다. 여느 전쟁소설처럼 당시의 상황을 참담하거나 비극적으로 그리지 않고, 섬마을이라는 작은 공동체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소박하고 진실된 사람들의 이야기를 사실적이면서도 유머러스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소설이 독자들의 사랑과 강한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는 이유는 낯선 섬 이름과 파이 이름을 내세운 특이한 제목, 제2차 세계대전의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씌어졌다는 점, 찰스 램, 제인 오스틴, 앤 브론테, 찰스 디킨스, 오스카 와일드 등 당대의 유명 작가와 그들의 작품이 이야깃거리로 등장한다는 점, 편지글 하나하나가 마치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묘사되어 독자들로 하여금 지적 호기심과 상상력을 자극한다는 것으로 요약될 수 있겠습니다.

 

소설 속 주인공인 줄리엣은 영국의 인기 작가이자 칼럼니스트입니다. 그녀는 어느 날 건지 섬에 사는 한 남자로부터 편지를 받게 됩니다. ‘건지 아일랜드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이라는 독특한 이름의 문학회 회원이었던 그를 통하여 줄리엣은 다른 회원들과도 편지를 주고받게 되었고, 종전 이후 다음 작품의 주제를 정하지 못하고 있던 그녀는 편지가 지속되는 동안 건지 섬주민들의 삶과 문학회에 대해 강한 호기심을 느끼게 됩니다.

 

소설에는 그녀가 남자친구와 주고받았던 편지와 전보, 그녀의 절친한 친구인 소피와 소피의 오빠이자 줄리엣의 책을 출간한 스티븐스&스타크 출판사의 발행인 시드니와 주고받는 편지, 또 건지 섬 사람들 10여 명과 주고받는 168통의 편지가 등장합니다. 편지로만 이루어진 이 소설에서 독자들은 당시 사람들의 사랑과 우정, 생명의 위협 속에서 꽃피운 인간애, 나치 감시 하에서 삶의 의지가 되었던 문학회와 책을 통해 변화되어 가는 그들의 인간정신에 깊이 감동하게 됩니다. 특히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문학회를 만든 엘리자베스가 전쟁 중에 한 아이를 낳고 수용소에서 생을 마감했던 이야기와 어린 나이에 부모를 잃은엘리자베스의 딸을 지극 정성으로 돌보는 주인공의 이야기에서 먹먹한 슬픔을 느낍니다.

 

이 책은 한 노년의 작가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수십 년에 걸쳐 만든 소설입니다. 이 책의 저자인 섀퍼는 1976년에 방문했던 영국해협 채널제도의 건지 섬을 배경으로 책을 쓰겠다고 이야기했고, 수년에 걸친 조사기간을 거쳐 2000년경 집필 작업에 돌입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녀는<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의 집필을 끝내자마자 암 진단을 받았고, 마지막 정리 작업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조카이자 동화작가인 애니 배로스에게 마무리 작업을 도와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2008년 2월, 책이 출간되는 것도 보지 못하고 73세의 나이에 복부암으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남자친구를 버리고 떠났던 소설 속의 주인공 줄리엣은 결국 건지섬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찾게 됩니다. 영국에 있던 줄리엣에게 건지 섬에서 처음으로 편지를 보냈던 도시 애덤스는 결국 그녀의 신랑이 된다는 해피 엔딩의 결말입니다. 자극적이지 않고 잔잔한 글이 고픈 날에는 이 소설이 어떨까 싶습니다. <건지 감자껍질파이 북클럽>.  최악의 겨울 황사가 물러간 오늘, 봄볕처럼 따사로운 오후에 나는 연애편지를 읽듯 이 소설을 읽었습니다. 

 

"결혼을 이렇게 서두르는 게 꼴사나운가요? 내가 기다리기 싫어서 그래요. 지금 당장 시작하고 싶어요. 지금껏 살아오면서 나는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이 무사히 약혼하면 그걸로 이야기가 끝인 줄 알았어요. 결국 제인 오스틴이 만족한다면 누가 봐도 만족스러운 일일 테니 말이죠. 하지만 아니었어요. 이야기는 거기서부터 시작이에요. 앞으로 하루하루 새로운 줄거리가 되는 거고요. 어쩌면 내가 쓸 다음 책은 환상적인 신혼부부가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에 대해 알게 되는 것들에 관한 내용이 될지도 몰라요." (p.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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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연휴 전날의 무겁고 더딘 시간의 흐름처럼 하늘은 온 종일 어둡고 칙칙한 구름에 가려 시간의 경과를 도통 가늠할 수 없는 하루였어요.  나는 그 거무튀튀한 어둠을 응시하며 냉기가 도는 푸른 빛의 형광등 조명 아래서 긴 하루를 견뎌냈구요.  인터넷에서는 실시간으로 전국의 교통상황을 내보내고 있었지요.  도무지 움직이지 않는 귀성차량의 행렬 속에서 앞 차량의 번호판을 나도 모르게 외우는 것은 얼마나 가치 없고 불행한 일인지요.  나는 그 행렬 속에 끼이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하루의 우울을 조금쯤 털어낼 수 있었답니다.

 

낮의 어둠은 농도에 있어 밤의 어둠에 뒤진다 할지라도 어깨에서 느껴지는 무게는 밤의 그것에 비할 바가 아니라는 생각이 문득 들더군요.  어깨를 짓누르는 어둠의 무게를 고스란히 떠받치며 한동안 어깨를 웅크렸던 탓인지 등허리가 뻣뻣하게 굳어오는 느낌이었어요.  정말이지 이런 날은 뭘 해도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법이지요.

 

그렇다고 설 명절을 애타게 기다리는 건 아니랍니다.  그럴 나이는 한참이나 지났죠.  명절을 애타게 기다리는 건 어쩌면 학창시절에나 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이후로는 쭈욱 약간의 중압감과 의무로 명절을 맞이했었던 듯합니다.  세월이 흐를수록 우리의 명절은 차츰, 과거의 낭만은 조금씩 퇴색하고 일 년 중 연휴가 있는 시즌쯤으로 변질되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농도 짙은 어둠이 가볍게 내려앉았습니다.  명절 연휴는 벌써 시작되었군요.  호시노 미치오의 <여행하는 나무>를 읽고 있습니다.  가벼운 어둠 속에서 무거운 문장을 읽으려니 내 몸이 지구 중심을 향해 깊이 가라앉는 느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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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나는 이유 - 가슴 뛰는 여행을 위한 아홉 단어
밥장 글.그림.사진 / 앨리스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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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에 대하여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더없이 멋진 말로 정의하였지만 나는 그 중 "여행은 삶에서 출발하여 죽음을 향해 간다."는 루이 페르디낭 쎌린느의 말이 기억에 남습니다. 그의 저서 <밤 끝으로의 여행> 도입부에 나온 말입니다. 여행은 삶의 저편에 속한다는 말로 끝을 맺고 있는 쎌린느의 정의는 나로 하여금 여행에 대한 많은 상상을 불러일으키게도 하였지만 때로는 현실과 아주 멀어지는 게 아닐까 하는 막연한 불안감을 불러온 것도 사실입니다. 누구나 현실에 붙잡힌 채 살다 보면 여행은 한낱 상상 속의 그 무엇이 되곤 합니다. '삶의 온도가 빙점 이하로 내려갔을 때, 그렇게 동양으로의 여행이 시작되었다.'고 밝혔던 후지와라 신야의 고백에 비추어 보면 나에게는 아직 삶의 온기가 조금쯤 남아 있는 모양입니다.

 

세월이 좋아져서 요즘은 맘만 먹으면 언제든 떠날 수 있는 게 해외여행이라지만 실상 떠나고 싶다고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기껏해야 차를 몰고 휑하니 떠난 주말여행이나 그도 여의치 않으면 여행 서적을 읽으며 싱숭생숭한 마음을 달래는 게 고작인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여행은 때로 잊혀진 꿈이자 로망이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일러스트레이터이자 작가인 밥장의 <떠나는 이유>를 읽었습니다. 황금같은 주말에 말입니다. 내가 글을 쓴다면 아마도 '떠나지 못하는 이유'쯤 되지 않을까 싶은, 서글픈 기류가 듬성듬성 떠다니는 주말 오후에 작가와 함께 낯선 곳으로의 여행을 떠나봅니다. 마음 한켠에는 '언젠가는 나도...' 하는 옅은 희망을 품고서 말입니다.

 

밥장의 여행기는 처음인 듯합니다. 어쩌면 그의 책은 처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작가 소개를 보면 이런 저런 책을 여러권 집필한 인기 작가인 모양인데 왜 나만 몰랐던 것일까요. 작가는 꽤나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이더군요.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평범한 회사원으로 생활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그림에 빠져 아티스트로 밥벌이를 하고 있다네요. 여행 마니아로도 유명한 저자는 이 책에서 그가 뽑은 여행의 아홉 가지 키워드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습니다. 그 아홉 가지 키워드는 '행운, 공항 + 비행, 자연, 사람, 음식, 방송, 나눔, 기록'입니다.

 

"뉴요커의 입맛을 사로잡은 타바론 차는 티 소믈리에가 여러 가지 차를 섞어 그 손님만의 향을 만들어주는 차라고 합니다. 저도 '장소'라는 재료를 섞어서 저만의 여행을 만들어보았습니다. 이 책은 장소에 관한 이야기라기보다 밥장만의 블랜딩으로 만들어낸 여행의 맛과 향에 가깝습니다." (p.21)

 

열거한 키워드만 보더라도 이 책의 내용을 대강 어림할 수 있겠지요? 그 중 방송과 나눔은 조금 의외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저도 그랬습니다. 작가는 이미 EBS <세계문화기행>을 비롯한 몇몇 여행 프로그램과 다큐멘터리에 출연한 경험이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아마도 방송 큐레이터로서의 욕심보다는 타고난 여행 DNA의 촉수가 여행을 도와줄 여러 분야의 냄새를 맡고 그곳으로 뻗어가도록 부추겼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초록우산 어린이재단과 함께 남수단에 다녀온 적이 있다는 저자는 그곳에서의 경험이 꽤나 강렬했던 모양입니다. 지금은 내전이 일어나 갈 수도 없는 그곳을 다시 가보고 싶어 하는 작가의 마음이 '나눔' 편에 잘 드러납니다.

 

"중세의 수도사 테오필루스는 예술가의 재능이 질투라는 지갑과 이기심이라는 창고에 갇히지 않도록 해야 하고, 예술가 역시 자신의 재능을 기꺼운 마음으로 예술을 찾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라고 하였습니다. 예술이 먹고사는 데 꼭 필요하지 않는데도 지금까지 살아남은 이유는 많은 예술가들이 자신은 가난하더라도 예술을 많은 이들과 나누었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머니는 제가 재능나눔으로 벽화를 그리러 가거나 그림을 그릴 때면 조용히 지켜보다 한마디 툭 던집니다. 그 말을 들으면 다시 힘이 솟아납니다.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다더라."" (p.289)

 

각 챕터의 끝에 수록한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음악’에는 작가가 각각의 여행지에서 들었던 음악을 소개하고 있는데 언급한 음악을 들어볼 수 있도록 QR코드를 수록해 놓은 것도 이채롭습니다. ' 어떻게 일상과 떨어져있으며, 또한 일상과 어떻게 연결이 되어 있는지를 복합적으로 풀어나가는 것이 여행이다.'라고 했던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이 생각납니다. 어느 날 갑자기 삶의 온도가 임계점 이하로 내려가거나 미지의 세상으로부터 '먼 북소리'를 듣게 된다면 자신도 모르게 배낭을 꾸려 홀연 그 낯선 세상으로 뛰어들지도 모르겠습니다. 여행은 그런 게 아닐까 싶습니다.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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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랑한 소설들 - 빨간책방에서 함께 읽고 나눈 이야기
이동진.김중혁 지음 / 예담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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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쉰들러리스트'의 엔딩 크레딧은 "한 사람의 생명을 구하는 것은 우주를 구하는 것"이라는 탈무드의 금언과 함께 시작된다. 거장 스티븐 스필버그의 영화 '쉰들러리스트'의 엔딩 크레딧을 본 후 나는 길어야 3분을 넘지 않는 엔딩 크레딧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다. 영화의 주제가나 테마음악과 함께 영화 제작을 위해 수고하거나 도움을 준 사람들을 소개하는 엔딩 스크롤(scroll)을 보면서 영화의 마지막을 차분하게 음미하거나 영화의 감동을 되새김질하는 그 잠깐 동안의 여유는 영화를 더욱 풍요롭게 하는 필수도구인 셈이다. 그것은 마치 영화를 제작한 감독이 관객에게 전하는 영혼의 편지처럼 읽힌다.

 

그러나 아직은 어둠 속에서 차분하고 조용히 흘러가야 할 그 시간이 현실에서는 전혀 그렇지가 않다. 엔딩 스크롤이 뜨자마자 퇴장을 다그치는 듯 실내가 밝아지고 조금이라도 빨리 그곳을 벗어나려는 관객들로 소란스러워진다. 나는 영화의 감동이 채 가슴을 적시기도 전에 조급한 마음으로 자리를 떠야 한다. 그런 경험들은 유쾌하다거나 기쁜 일과는 거리가 멀 뿐만 아니라 영화의 감동마저 경감시킨다.

 

소설을 읽고 리뷰를 쓰거나 독서 토론에 참석하는 것도 그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엔딩 크레딧을 보며 영화의 감동을 되새기듯 각자의 관점에서 소설을 해석하고, 인상 깊었던 문장을 다시 읽어주고, 궁금하거나 이해가 되지 않았던 부분에 대해 묻고 답하는 시간은 소설을 읽는 시간만큼이나 즐겁지 않을까 생각되었던 것이다. 학창시절 이후 독서 클럽이나 주말 독서 모임에 나가본 경험이 전무한 나로서는 이동진 작가와 김중혁 작가 두 사람의 대화가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다.

 

"공감해요. 결국 우리는 어떤 방식으로든 누군가에 상처를 주고 누군가를 괴롭게 만들고 심지어 죽음에 이르는 오해를 할 수도 있지만, 그런데도 우리는 게속 누군가의 마음을 상상해보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노력을 하지 않으면 이런 오해도 아예 생기지 않을 수도 있지만 이런 오해야말로 우리가 결국 겪어야 하고 이겨내야 하는 일이 아닌가 싶기도 하구요." (p.69~p.70)

 

이 책 <우리가 사랑한 소설들>은 [이동진의 빨간책방]에서 메인 테마 도서로 다루었던 80여 권의 책 중 청취자들에게 가장 큰 호응을 얻었던 외국 소설 7편을 엄선하여 방송 내용을 다시 글로 옮겨 정리하고 보충한 책이다. 나는 사실 팟캐스트 [이동진의 빨간책방]을 들어본 적도 없고, 어떤 도서를 테마 주제로 선정했는지도 모르지만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소설 7권은 익히 읽어본 책이었던지라 때로는 무릎을 치며, 때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을 수 있었다.

 

이야기는 이언 매큐언의 소설 <속죄>에서 시작하여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줄리언 반스의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 얀 마텔의 <파이 이야기>,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로 이어지다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로 끝맺는다. 나는 이 중에서 얀 마텔의 <파이 이야기>를 뺀 나머지 6권의 책에 대해 리뷰를 썼었다. 사실 <파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나는 엄청나게 지루함을 느꼈던 터라 어떤 내용이었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소설 초반에 파이가 카톨릭 신부를 찾아가 계속 질문을 던지잖아요. 신은 왜 그랬고 신의 아들은 왜 그랬는지 의문을 갖지만 신부는 '사랑 때문'이라고 대답하구요. 저는 사랑과 믿음이 같은 이야기라고 생각해요. 일단 사랑하게 되면 믿게 되는 거죠. 저 역시 종교는 믿어야 이해하게 된다고 봐요." (p.230)

 

이 책에 선정된 7편의 소설이 각각의 작가가 쓴 대표작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동진 작가와 김중혁 작가도 마찬가지로 자신이 좋아하는 소설은 따로 있음을 말하기도 한다. 예컨대 이언 매큐언의 소설 <속죄>는 명작이고 작가의 역량이 종합적으로 잘 표현된 작품이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체실비치에서>나 <암스테르담>을 더 좋아한다. 그런가 하면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 중에서 이동진 작가는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나 <해변의 카프카>를 김중혁 작가는 <땅속 그녀의 작은 개>나 <국경의 남쪽, 태양의 서쪽>을 선호한다고 밝히고 있다.

 

이야기를 진행하는 두 명의 작가는 직업이 직업이니만큼 때로는 일반 독자가 생각하지 못하는 전문적인 분야로 안내하여 책을 읽는 독자를 곤혹스럽게 할 때도 있지만, 책의 저자와 소설의 주제에 대하여 깊이 있는 대화를 이어가는가 하면 '내가 뽑은 문장'을 통하여 독자들에게 소개하고 싶은 소설 속 최고의 문장을 소개하고 있다. 대담집이라는 게 대체로 산만하거나 주제에서 이탈하는 경우가 많은데 체계적으로 기술된 듯한 인상을 받았다. 이 책에 소개된 대부분의 작가에게 나는 대체로 우호적인 입장이지만 그 중 무라카미 하루키와 밀란 쿤데라는 광팬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런 까닭인지 하루키 작품의 평에 있어서 '평행우주'론은 격하게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평행우주에 관한 생각을 지금 막 떠올린 것은 아니구요, 이 책을 읽다가 느껴진 것이에요. 무라카미 하루키는 평행우주에 대한 신뢰가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루키는 시간에 관한 문제를 쓰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그때 없어진 것들이 사라진 것이 아니고 다른 차원에 가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또 놀라운 것은 무라카미 하루키는 장을 구분할 때 평행우주에 대한 생각을 적용하는 것 같아요. 화자를 계속 엇갈리게 넣는다든지 하면서요. <1Q94>가 전형적으로 그렇고 <태엽 감는 새>도 일부분 그렇고 <해변의 카프카>도 그랬거든요." (p.311)

 

나는 지금껏 한 명의 작가에 의해 씌어진 독서 일기나 비평, 혹은 책을 소개하는 글을 주로 읽어 왔다. 같은 책을 읽고 서로의 생각을 말로써 표현한다는 것은 어느 블로거의 리뷰에 댓글을 다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입체적이면서 신선하다. 게다가 자신도 이미 다 읽었던 책이라면 그들 옆에 한 자리를 꿰차고 앉아 대화에 끼어들고 싶은 충동이 절로 든다. 독서 토론은 그야말로 영화의 엔딩 크레딧을 보면서 감동을 되새기는 일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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