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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엔 돌아오렴 - 240일간의 세월호 유가족 육성기록
416 세월호 참사 기록위원회 작가기록단 엮음 / 창비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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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의 수필 '광야를 달리는 말'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슬픔도 시간 속에서 풍화되는 것이어서, 30년이 지난 무덤가에서는 사별과 부재의 슬픔이 슬프지 않고, 슬픔조차도 시간 속에서 바래지는 또 다른 슬픔이 진실로 슬펐고, 먼 슬픔이 다가와 가까운 슬픔의 자리를 차지했던 것인데, 이 풍화의 슬픔은 본래 그러한 것이어서 울 수 있는 슬픔이 아니다. 우리 남매들이 더 이상 울지 않는 세월에도, 새로 들어온 무덤에서는 사람들이 울었다. 이제는 울지 않는 자들과 새로 울기 시작한 자들 사이에서 봄마다 풀들은 푸르게 빛났다"

 

끔찍했던 '세월호 사건'이 떠오를 때마다 나는 김훈의 문장을 생각하곤 한다. 특히나 '슬픔조차도 시간 속에서 바래지는 또 다를 슬픔이 진실로 슬펐고'하는 대목에서는 나도 모르게 컥컥 목이 메인다. 무시로 찾아드는 슬픔에 이따금 나는 그 문장을 혼잣말로 되내이다가 찔끔 눈물을 보였고, 누가 볼세라 서둘러 눈물을 훔치곤 했었다. 그러나 '슬픔도 시간 속에서 풍화되는 것이어서' 세월호 참사의 슬픈 기억은 아주 오래된 옛일처럼 잊혀져간다. 불과 1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말이다. 나는 세월호 참사 유가족 13명의 육성기록을 담은 책 <금요일엔 돌아오렴>을 읽으며 그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저는 앞으로도 오래 살려구요. 오래 오래 살아서 우리 아들 기억해줘야죠. 시간이 지나면 우리 아들 잊는 사람들도 많아질 거고 벌써 잊은 사람들도 있을 텐데 나는 오래 버텨야 되겠는데...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건우 아빠, 나는 아흔살 백살까지 살 거야. 내가 혼자서라도 끝까지 기억해줘야 할 것 같아"라고 했더니 "아흔살? 너무 많지 않아"라고 해요." (p.42 김건우 학생의 어머니 노선자 씨)

 

내가 어렸을 때, 놀러간 친구네 집의 안방에서 친구들과 법석을 떨며 놀다 보면 아랫목 이불 속에 묻혀 있던 밥주발이 나동그라지곤 했다. 친구는 혹여라도 어머니께 들켜 불벼락이 떨어질세라 흩어진 밥알을 주워담으며 황급히 수습했었다. 보온밥통이 없던 시절의 한겨울. 삼시 세끼 식구들에게 더운밥을 먹이고 싶어 하던 어머니 마음은 아랫목에 깔린 솜이불처럼 따사로웠다. 나는 이 책 <금요일엔 돌아오렴>의 부모 마음이 그런 게 아닐까 생각했다.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게 있다면 그것이 아닐까 하고 말이다.

 

295명이 숨지고 9명이 실종된, 대한민국 역사상 최악의 해난 사고에 대하여 우리는 아는 게 없다. 사고의 원인은 무엇이었는지, 왜 그 많은 사람들이 희생될 수밖에 없었는지, 국민의 재산과 생명을 책임져야 할 대한민국 정부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정부의 무능을 비판할라치면 반드시 뒤따르는 옹호 논리가 있다. 대통령이, 대한민국 정부가 사고를 냈느냐는 질문. 이런 세살배기 어린애와 같은 논리로 국민들의 분노를 잠재우겠다는 발상을 하는 놈들이 국정을 운영하고 있다는 사실에 나는 분노한다. 끝내 가라앉지 않는 분노. 2014년 4월 16일 수요일의 그날, 금요일에 돌아올 아이들을 기다려야 할 부모들은 따순 밥 한그릇 준비하지 못한 채 아이들을 보냈다.

 

"4월 16일 이후 우리는 모두 세월호 참사가 만들어낸 시간을 살아가게 되었다. 슬픔을 벗어나기가 어렵다. 그래서 슬픔을 잊기 위해 그 시간들로부터 벗어나려는 사람들이 생긴다. 이제 그만이라고 말하며. 그 말들이 비수가 되어 다시 하나의 시간을 슬픔에 가둔다." (p.342)

 

그날 우리 가슴에 달았던 노란 리본에는 기다림이 배어 있었다. 그러나 그 기다림은 물거품처럼 흩어지고 그리움은 국화꽃처럼 시들었다. 우여곡절 끝에 세월호 참사 특별조사위원회가 발족되고 가동을 시작했지만 그날의 진실은 여전히 바닷속 어둠에 갇혀 있다. 누군가를 잊는 것도, 누군가로부터 잊혀지는 것도 저 나름의 권리가 아니겠는가, 생각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자식의 죽음을 제 가슴에조차 묻지 못하는 희생자 부모의 마음을 생각할 때 그날의 진실은 반드시 밝혀내야 한다. 죄인인 양 오그라든 가슴을 끝내 펴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서라도 진실은 반드시 밝혀져야 하는 것이다.

 

"어쩌면 숙명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저 불운한 일이라고, 이제는 큰아이를 잘 보듬어야 할 때라고도 여겼다. 주변에서도 그렇게 말하는 이가 많았다. 하지만 수현이 아버지는 그렇게 넘어갈 수 없었다. 사랑하는 아이가 억울하고 원통하게 죽었는데, 그걸 숙명으로 그냥 받아들여야 한다는 걸 견디기 어려웠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도무지 아버지가 할 일이 아니었다." (p.207 박수현 학생의 아버지 박종대 씨)

 

지난 9일 세월호 특별조사위원회가 출범 후 첫 공식회의를 열었던 날 로마 교황청을 방문한 한국 주교들에게 프란치스코 교황이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세월호 문제는 어떻게 되었나요?"라고. '고통 앞에 중립 없다'는 말을 남기며 세월호의 아픔을 보듬었던 교황. 이 땅에 사는 우리는 먼 이국땅의 교황에게 어떤 대답을 준비해야 하는가. 뜨거운 시간을 홀로 식혀온 찬밥 한 덩이처럼 4월 16일의 아침에 걸려 미래를 향해 단 한 발짝도 내딛지 못하는 우리의 시간. 거짓과 부정의 발걸음은 저 멀리 성큼성큼 거침 없는데 진실의 발걸음은 어찌 그리 더디기만 한 것인지.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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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을 방문한 독일 메르켈 총리의 거침없는 말과 행보를 보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2005년 총리 취임 후 10년 동안 그녀는 전 세계적으로 몇 안 되는 여성 지도자로서 주목받았다기보다 뚝심있고 올곧은 행보를 보여줌으로써 세계 언론의 호평을 받았다. 내 기억으로도 2013년 그녀는 독일 총리로서는 최초로 다하우 나치 강제 수용소를 찾아 고개를 숙였고, 올해 1월에도 아우슈비츠 해방 70주년 연설에서 "나치의 만행은 독일인의 영원한 책임" 이라고 하였다. 그녀는 여성 총리로서가 아니라 그야말로 지도자의 전형으로서 존경과 신뢰를 받고 있는 것이다.

 

지난 9일 일본 아사히신문 주최 '베를린 일독 센터' 강연회 차 일본을 방문한 메르켈 총리는 전범국가로서 반성과 참회로 일관해도 용서를 받기 어려운 마당에 망언과 그릇된 야심을 드러냄으로써 동북아 국가들로부터 지탄을 받고 있는 아베 총리에게도 '역사를 직시하라'며 일침을 가했다. 이와 같은 메르켈 총리의 행보에 대하여 독일의 한 신문은 "메르켈 총리는 일본 정부를 비판하거나 가르치려 들지 않으면서도 영토와 과거사 문제를 지적할 수 있는 방법을 고심했을 것"이라며 "그는 일본에서 이 문제를 아주 노련하게 해결했다"고 평가했다. 중국과 우리나라의 언론도 호평 일색인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나는 세계인의 존경을 받고 있는 메르켈 총리를 보면서 같은 여성 지도자를 두고 있는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독일 국민을 부러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이면에는 무능한 지도자의 표본으로 비춰지는 여성을 자국의 대통령으로 모시고 있다는 자괴감도 있었다. 세월호 참사에서 그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갈 때도 느긋하기만 하더니 주한 미국대사의 부상 소식을 해외에서 듣고는 귀국과 동시에 병원으로 내달렸으니...

 

김기종의 만행을 정당화하려는 게 아니다. 그는 그야말로 미친 X이다. 어떤 말로도 용서가 되지 않는 범죄를 저지른 자이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그런 범죄는 하루가 멀다 하고 일어나는 일일 뿐이다. 그보다 더한 짓도 서슴없이 저지르는 인면수심의 인간들은 도처에 존재한다. 그때마다 대통령이 달려나가 사과할 것인가. 그럴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는 것이다. 예컨대 미국과 전쟁을 치르고 있는 이슬람국가(IS)의 참수 동영상에 어김없이 등장해 서양인 인질들을 무참히 살해한 장본인이 쿠웨이트계 영국인 2세인 엠와지라고 하여 영국 총리가 미국에 사죄하는 것을 본 적 있는가. 그렇다면 IS에 가담한 한국인 10대 김모 군에 대해서도 우리 정부가 미국에 잘못을 빌어야 옳은가. 자국민의 잘못으로 인해 동맹국인 미국에 엄청난 피해를 입혔으니 말이다.

 

리퍼트 대사의 피습 직후 정치권의 대응은 가관도 그런 가관이 아니었다. 마치 신파를 보고 있는 듯한 모습이라고나 할까. 한 정신병자의 범죄를 두고 '한미 동맹에 대한 공격'으로 확대 해석하는가 하면 종북 세력에 의한 조직적인 '테러'로 보는 듯했다. 미국은 일관되게 테러라는 용어 대신 공격이나 폭력행위라는 표현을 사용했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미국에 대한 과잉충성을 드러내는 듯한 이런 행태는 정치권에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미 대사가 병원에서 치료를 받을 당시 대사의 쾌유를 비는 대한예수교 장로회 합동한성총회 소속 신도들의 부채춤 공연과 공화당 신동욱 총재(박근혜 대통령의 제부)의 ‘석고대죄 단식’ 등은 신파를 넘어 저질 코미디로 비춰진다. 마치 김정은 앞에서 충성맹세를 하는 북한 주민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이에 대하여 우리나라뿐 아니라 외신도 과도하다는 지적을 하는 걸 보면 부끄러워 낯이 뜨거워진다.

 

국가와 국가 간의 외교란 어느 한 쪽의 일방적인 복종을 보여주는 게 아니다. 독립 국가의 지도자라면 당연히 국민들의 자존심도 생각해야 했었다. 국익과 나라의 자존심을 팽개치고 미국이라는 강대국에 과잉 애정공세를 펼치는 사람들은 도대체 어느 나라 국민인지... 이번 사태를 보며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게 그렇게 부끄러울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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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배 끊을 용기 - 정신과 전문의가 찾아낸 기적의 금연 치유력
전지석 지음 / 스토리3.0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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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새해 결심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게 있다면 금연과 운동, 다이어트가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 까닭에 매년 1월이면 이와 관련된 '결심상품'들이 불티나게 팔린다지요. 나는 체중이 갑자기 늘어 고민해 본 적도 없고, 매일 아침 운동을 하는 사람을 부러워한 적도 없습니다. 적어도 그 두 가지 문제에 있어서는 자유로운 셈이지요. 어려서부터 꾸준히 운동을 해왔으니 운동은 이제 습관처럼 굳어져 있고 그 덕분에 몸무게는 항상 일정합니다.

 

다만 흡연이 문제라면 문제였지요. 셋 중에 제일 심각하고 실천하기 어려운 문제를 지니고 있었던 셈입니다. 하지만 금연을 결심해본 적은 많지 않아요. 금연을 권하는 주변 사람들에게는 늘 '담배를 피워도 몸이 견딜 만하니까 피우지 몸이 못 견딜 정도면 끊어도 벌써 끊었을 것'이라고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 놓았고, 나도 지금껏 그렇게 믿고 지냈습니다. 그렇다고 흡연의 심각성을 몰라서 그랬던 건 아닙니다. 설마 흡연자 중에 그걸 모르는 사람이 있을라구요. 아무튼 내가 금연을 시도해본 것은 손으로 꼽을 정도로 그 횟수가 적었다는 사실입니다.

 

"담배를 피우는 것, 담배에 중독되는 것, 그 외에 어떤 중독에 빠져 있다는 것은 어린 시절에 겪은 '치명적인 상실'(부모, 특히 어머니의 공감반응 부족이나 부재)이 있었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담배는 그런 상실을 위로하는 진통제 또는 값싼 보상(요즘에는 가격이 비싸졌지만)이라고 할 수도 있고요. 하지만 담배에 중독되어 있다는 것은 그런 상실의 상태가 지속되고 고착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p.142)

 

몇 해 전이었나 봅니다. 아내가 갖다 준 금연 패치를 붙여보기도 했고, 패치를 붙인 채 담배를 피우면 위험하다는 경고 문구를 읽으면서도 나도 모르게 담배를 피워 물었던 적도 있고, 한번은 금연침을 맞으면 효과가 있다는 말에 시간을 내어 용하다는  한의원을 찾아가기도 했고, 쑥 태우는 냄새가 나는 금연초를 사서 피워보기도 했고, 물을 마시면 도움이 된다는 말을 듣고는 앉은 자리에서 물을 몇 컵씩 들이켜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적고 보니 나도 금연을 위해 안 해본 게 없는 것 같군요.

 

그러나 이와 같은 금연 보조제로 금연에 성공했다는 말을 주변에서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어떤 극단적인 방법으로 금연에 성공한 사람은 본 적이 있습니다. 지인 중에 하루에 2갑 이상의 담배를 피우던 애연가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담배 한 보루를 사더군요. 그 담배를 들고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방문을 걸어 잠그고는 줄담배를 피우기 시작했습니다. 담배 연기가 빠지지 않는 그 방에서 담배 대여섯 갑을 피웠나 봅니다. 다음날 그 분은 동네 치과에 들러 스케일링을 받더군요. 그리고는 담배를 끊었습니다.

 

나는 사실 2015년 1월 1일부터 담배를 끊고 지금껏 금연의 상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제 3개월에 접어드는군요. 그러나 지금도 '담배'라는 말만 들어도 흡연의 욕구가 생겨납니다. 나는 결코 금연에 성공했다고 말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닙니다. 그렇지만 하루에 한 갑, 적어도 반 갑 이상을 지속적으로 피우던 내가 어떻게 60일 이상 금연할 수 있었는지 나로서도 신기할 뿐입니다. 온갖 방법으로도 단 하루를 버티지 못했던 내가 말입니다.

 

"담배는 아무도 내 아픔을 알지 못할 때 나를 달래주었습니다. 담배는 내가 걱정, 근심에 휩싸여 뒤척일 때마다 마음을 가라앉혀주고 잠들 수 있게 도와주었습니다. 때로는 천생연분처럼 느껴졌고, 때로는 건강을 해친다는 세상의 말에 미워하기도 했습니다."    (p.181)

 

담배값 인상이 예고되었던 지난해 말, 나도 남들처럼 여분의 담배를 사들이기 시작했었지요.  사재기까지는 아닐지라도 한 갑 살 걸 두 갑 사는 식으로 여분의 담배를 비축했던 셈입니다. 다른 흡연자들과 하나도 다를 게 없었지요. 2015년이 되고 기념으로 2,3일만 끊어보자 생각했습니다. 독하게 참으면 그 정도는 가능할 것 같았거든요. 이삼 일이 지나면 다시 피울 수 있다는 생각에 조금 느긋해지더군요. 정말 성공했고, 나조차도 놀랄 수밖에 없었습니다. 애초의 생각으로는 다시 담배를 피워도 되었지만 그동안의 노력이 헛수고가 된다는 게 조금 아까웠어요. 얼마나 참을 수 있는지 두고 보기로 했죠. 그랬던 게 지금까지 온 것입니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담배 생각이 간절할 때가 언제냐는 질문과 어떤 부작용(?)이 있느냐는 질문을 자주 받습니다. 하루 중 담배 생각이 나지 않을 때가 더 적다고 말하는 게 옳을 듯합니다.  시시각각 담배 생각이 간절하지요. 이 책 <담배 끊을 용기>를 읽는 동안에도 내내 담배 생각에 시달려야 했으니까요. 금연의 부작용(?)은 밤에 잠자다가 한두 번쯤 잠에서 깨거나 처음부터 잠들지 못하여 서성거릴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담배를 피우던 때에는 없었던 일이죠. 잠들기 전에 담배 한 개비 피우면 노곤해져서 쉽게 잠들 수 있었고, 일단 잠이 들면 아침까지 깨지 않고 잤었는데 말입니다.

 

신체적 변화도 물론 있었습니다. 우선 눈에 띄는 변화는 혀에 끼던 백태가 사라졌고, 노랗던 소변 색깔이 투명해졌고 거품도 사라졌다는 것입니다. 게다가 후각 기능도 좋아졌는지 옆에 담배 피우는 사람이 있으면 냄새로도 구분할 수 있겠더군요. 아침마다 산에 오를 때 웬만해서는 호흡이 가쁘지 않은 것도 나아진 점입니다. 금연 초기에는 짜증이 심했었는데 지금은 조금 덜해진 듯합니다.

 

이 책 <담배 끊을 용기>는 정신과 전문의인 저자가 자신의 금연 경험을 토대로 쓴 책입니다. 20년 넘게 흡연자로 살아왔다는 저자의 경험담은 흡연자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자는 이 책에서 금연을 위한 심리적인 치료 과정을 주로 다루고 있습니다. 금연을 위해 정신적 안정과 자각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금연으로 가는 구체적 과정을 생략했던 것이 조금 아쉬웠습니다.

 

내가 지금까지 읽어보았던 책 중에는 흡연을 비롯한 여타의 중독을 치료하기 위한 책들이 더러 있었습니다. 그 중 이소무라 다케시의 <이중세뇌>와 찰스 두히그의 <습관의 힘>보다 더 좋은 책은 만나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2015년에는 나를 포함해 금연을 결심한 모든 분들이 성공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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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alph 2015-03-12 09:55   좋아요 0 | URL
유명한 금연 법으로 Allen Carr Method 가 있는데, 결국 흡연이라는 것이 위안이 되기 보다는 담배를 끊음으로써 생기는 금단증상을 없애기 위해서 담배를 지속적으로 피울 뿐으로, 실제로는 담배 자체가 어떤 위안도 주지 못한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결국 담배가 만든 괴로움을 담배를 다시 피움으로써 정상으로 돌아가는 것일뿐.. 실제로 담배 자체가 제공하는 위안은 원래는 없다는 것이지요. 이방법으로 여러 유명인인 끊었다는 군요..

꼼쥐 2015-03-15 16:28   좋아요 0 | URL
이 책에서도 그런 내용을 잠시 언급하고 있더라구요. 그런데 문제는 흡연자들이 어떤 이성적 판단으로 금연을 실행할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머릿속에서는 끊는 게 옳다는 생각을 백 번도 더 하지만 정작 몸은 정 반대로 행동하지요. 나도 모르게 담배를 피우는 게 문제이지요.
 
속죄
미나토 카나에 지음, 김미령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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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수행을 하는 성직자들이 가슴에서 마음 하나를 꺼내어 요리 굴리고 조리 굴리며 한나절 노는 것처럼 소설가들의 눈에도 우리가 볼 수 없는 어떤 세상이 펼쳐 보여지는 게 아닐까 생각할 때가 있다. 가령 시간과 공간으로 한정된 어느 곳에는 누군가의 선택을 기다리는 여러 이야기가 구름처럼 둥둥 떠다니는데, 어느 소설가가 그중 하나를 골라 잡아 요리조리 살펴보고는 제 맘에 쏙 드는 놈으로 눈먼 독자들에게 선심쓰듯 툭 던져주는 게 아닐까 하고 말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런 기발한 생각들을 소설로 옮겨 쓸 수 있을까. 그것은 아름다운 문장을 신들린 듯 써내려갈 수 있는 얕은 재주와는 사뭇 다르다. 지금껏 그 누구도 생각해내지 못했던 이야기를 한 편의 소설로 읽고 있을 때, 나는 그 소설가가 어느 성인처럼 위대해 보이곤 한다.

 

소설가 미나토 가나에를 알게 된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우연한 기회로 읽게 된 그녀의 작품 <고백>. 추리소설을 그닥 좋아하지 않던 나는 별 기대도 없이 책을 읽었었다. 그러나 내가 소설 속으로 정신없이 빨려들어가는 데는 그렇게 오래 걸리지 않았다. 소설의 여운이 어찌나 강했던지 다 읽은 후에도 진한 아쉬움이 남았고 기회가 되면 작가의 다른 소설도 읽어봐야지, 생각했었다. 그랬던 게 어제 같은데 나는 한동안 다른 작가들의 작품에 한눈을 팔게 되었고 미나토 가나에는 까맣게 잊고 지냈었다.

 

내가 오늘 읽은 미나토 가나에의 <속죄>는 이언 매큐언의 소설 <속죄>와는 판이하게 다른 작품이다. 독자의 시각에 따라 각자 다른 주제를 이끌어낼 수 있겠지만 큰 테두리에서는 몇 가지로 압축될 수 있을 것이다. 하나의 살인사건이 목격자들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주는가 하는 문제와 폐쇄적인 농촌 집단에서 도시 출신 이방인의 소외, 미성숙한 아이들의 또래집단에서 소통의 부재로 인한 오해와 그 결과 등으로 이 소설의 주제를 요약할 수 있겠지만, 이 소설을 관통하는 핵심은 조용한 농촌 마을에서 벌어진 살인사건과 그들이 받는 트라우마 정도가 아닐까 싶다.

 

소설은 도시에서 전학온 초등학교 여학생의 죽음으로 시작된다. 작가는 <고백>에서도 그랬지만 먼저 살인이라는 충격적인 결과를 보여주고 그럴 수밖에 없었던 여러 원인들을 작중 인물들의 서술을 통해 조금씩 조금씩 밝혀나가는 방식을 취한다. 다분히 연역적이다. 인물들의 기억이나 증언은 동일한 질문에 대해서도 서로 다르다. 각자의 증언을 다 들어보기 전까지 우리는 누구의 말이 옳고 그른지 판단할 수 없다. 우리의 상상이 서서히 압축되어가는 살인의 실체를 향해 점차 다가감에 따라 등줄기가 서늘해진다.

 

작업복 차림의 한 남자에 의해 학교 풀장의 탈의실에서 에미리가 살해된다. 같이 놀던 네 명의 아이들이 그 현장을 목격하였고, 각자의 임무에 따라 흩어졌다. 여린 성격에다 체구도 작아서 자신은 또래보다 어리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사에는 살해된 에미리를 지키게 되었고, 야무지고 똑똑하다는 주변의 기대를 받고 자란 까닭에 자신도 늘 그렇게 처신해야 한다는 중압감에 시달렸던 마키는 선생님께 알리러 갔고, 곰 같다는 놀림을 받으며 외모 콤플렉스를 갖고 있는 아키코는 에미리의 엄마에게 달려갔고, 지병이 있는 언니 그늘에서 부모의 사랑과 관심을 갈구하는 유카는 경찰서를 향해 달렸다.

 

네 명의 아이들은 모두 범인을 목격하였지만 그 누구도 범인의 얼굴을 떠올리지 못했다. 사건은 미궁에 빠지고 범인은 잡히지 않았다. 외동딸을 잃은 에미리의 엄마는 사건 해결에 어떠한 도움도 주지 못했던 에미리의 친구들과 이웃들에게 원망의 마음을 품었고, 에미리가 죽고 3년이 지나 마을을 떠나기 전에 마지막으로 아이들을 부른다. 그 자리에서 에미리의 엄마는 아이들을 향해 험한 말을 내뱉는다. 범인을 잡거나 속죄를 하며 살라고.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복수하겠다고.

 

친했던 아이들은 이제 그 사건으로 인해 소원한 관계가 된다. 그렇게 15년이 흘렀다. 결혼을 하고 남편을 따라 해외로 나갔던 사에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을 살해하고 혼자 귀국한다. 선생님이 된 마키는 어느 날 풀장에 칼을 들고 난입한 한 남자로부터 아이들을 지키려다가 본의 아니게 그 남자를 물에 빠트려 죽음에 이르게 한다. 에미리가 살해된 것이 자신의 잘못인 양 느끼며 고등학교도 진학하지 않은 채 외톨이로 지내던 아키코는 딸이 있는 싱글맘과 결혼한 오빠가 어린 양딸을 추행하는 것을 보고 오빠를 살해하고 만다. 부모의 사랑에 사랑에 굶주려 있던 유카는 사랑을 독차지하며 자랐던 언니가 경찰과 결혼하자 에미리의 사건을 신고하러 갔을 때 자신을 따뜻하게 대해주었던 경찰관을 떠올렸고 결국 유카는 형부의 아이를 임신한다.

 

사건을 목격하였던 네 아이의 삶은 너무도 비극적으로 펼쳐졌던 것이다. 남편을 살해하고 귀국했던 사에는 자신이 살인을 저지를 수밖에 없었던 경위를 상세히 적은 편지를 에미리의 엄마에게 보내고 또 다른 불행을 예감한 에미리의 엄마는 에미리의 다른 친구들에게 편지를 복사하여 보낸다. 그러나 불행은 사에에게서 그치지 않고 그 네 명의 친구들에게 들불처럼 번진다. 시골 마을로 이사하여 하나밖에 없는 딸을 잃었음에도 어떤 위로의 말도 듣지 못했던 어머니의 증오가 현실에서 다른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는 듯한 두려움에 에미리의 엄마는 경악한다. 그리고 자신의 딸이 죽게 된 배경에는 젊은 시절에 저질렀던 자신의 잘못이 있었음을 알게 된다. 시골마을로 이사갔던 한 가족의 비극이 각자의 오해 속에서 또 다른 비극을 낳은 셈이다.

 

"내 안의 아픔과 어려움을 혼자서 감내하며 키워나갈 게 아니라, 용기를 내어 나 이렇게 아프다고 누군가에게 먼저 말해보는 것, 그래서 타인과 같이 나누고 공유하는 것이 하나의 치유책이 되지 않을까." (p.303, '역자 후기' 중에서)

 

대학을 갓 졸업했을 무렵 지방의 소도시에서 잠깐 살았던 경험이 있다. 그 때 나는 지역민의 알 수 없는 집단적 거부감에 무척이나 놀랐었다. 내게 있는 도시에서의 습관을 버리지 않는 한 그들과 동화되기는 어렵겠다는 걸 어렴풋이 느꼈다. 시골 태생인 나도 그럴진대 온전한 도시내기는 오죽이나 힘들까.

 

"그러나 에미리가 이사 오고 나서 할아버지의 말씀을 처음으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예쁘고, 스타일 좋고, 영리하고, 운동 잘하고, 손재주까지 좋은 부자. 확실히 불평등하더군요. 에미리와 나 자신을 비교하다 보면 비참해질 뿐이었죠. 하지만 처음부터 갖고 태어난 것이 아예 다르다고 생각을 바꾸면 아무렇지도 않은 게 되죠. 에미리는 에미리. 나는 나. 다른 아이들은 에미리를 어떻게 생각했는지 모르지만, 난 처음부터 에미리를 다른 세계 사람으로서 좋아했어요." (p.133)

 

딸을 잃은 엄마의 증오에 찬 한마디 말은 결국 네 소녀의 운명을 수렁으로 이끌고 말았다. 어쩌면 작가는 이 책에서 불교의 연기설에 바탕을 두고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저질렀던 업이 딸에게, 그 딸의 죽음에서 비롯된 증오의 감정이 네 명의 소녀에게, 결국은 그 소녀들의 원망이 자신에게 되돌아오는 구조는 약간의 억지스러움이 있지만 어쩐지 으스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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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사가 예보된 휴일 오후.

3월을 시작하는 첫날 치고는 고약한 날씨이다.  툭 터진 너른 찻길을 달리듯 휴일의 낮시간은 금세 지나가고 만다. 시간을 붙잡고 싶은 게으른 몸짓과 빛의 속도로 내달리는 시간의 경과는 사뭇 어설픈 조화.  나는 비껴가는 휴일의 풍경 속에서 오지 않은 월요일을 생각하며 세상의 끝과 같은 깊은 한숨을 토한다.

 

 

법정 스님이 가신 지 벌써 5년.  딱 이맘때였다.  나는 한동안 스님의 추천도서를 읽었고, 오래 묵혀 곰팡내 나는 <무소유>를 거푸 반복하여 읽었다.  그리움은 때로 눅진한 허기로 이어지는 법이다.

 

최인호 작가는 어느 날 그의 소설보다 수필이 더 좋아졌던 작가이다.  작가의 수필집 <산중일기>와 <인연>이 손에 익어 책장 넘기는 소리 무거워졌을 때 작가도 우리 곁을 떠났다.

 

두 분의 대담집이라는데 내 꿈 속에서 살아 돌아온 듯 반갑다.

 

 

 

 

 

 

자주는 아니지만 프랑스 소설이 읽고 싶어질 때가 있다. 잠 못 이루는 늦은 밤이나, 봄비 추적추적 내리는 어느 봄날의 오후나, 속절없이 파고드는 옛기억에 눈물 한방울 또르르 흐르는 퇴근길 모퉁이에서 탁한 안개처럼 모호한 결말의 프랑스 소설 한권이 몹시 읽고 싶어진다.  이재룡의 비평에세이 <소설, 때때로 맑음 1>은 프랑스 소설의 안내서이다. 프랑스 소설에 대해 아는 게 없는 나와 같은 사람을 위한.

 

 

 

 

 

 

 

 

들어본 적 없는 또는 읽어본 적 없는, 내게는 낯선 어느 작가의 책을 바라볼 때 드는 느낌은 두 가지이다.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한 번 읽어봐?'매만지거나 '그래도 아는 작가의 작품을...' 돌아서거나. 나는 김은경 작가를 알지 못한다. 그래도 내 시선이 지나치지 않고 이 책에 잠시 머물렀던 까닭은 다가오는 봄과 잘 어울릴 듯한 예감 때문이다.

 

 

 

 

 

 

길었던 설 명절과 1년 중 가장 짧은 달이어서인지 2월에 출간된 에세이는 몇 권 되지 않는다. 아쉽지만 이 세 권을 고르는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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