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째 아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
도리스 레싱 지음, 정덕애 옮김 / 민음사 / 199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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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이 날 때면 자주 들르는 도서관이 있다.

몇 년째 하루가 멀다 하고 뻔질나게 드나들었더니 도서관에 근무하는 직원들 대부분이 낯이 익어 마주칠 때면 가볍게 인사를 나눌 정도의 사이가 되었다. 나에게 있어 도서관은 일종의 놀이터요, 스트레스 해소처인 셈이다. 엊그제 도서관에 들렀을 때 나는 2층 자료 열람실에서 근무하는 여직원을 로비에서 만났다. 얼마 전에 출산휴가를 다녀온 까닭에 한동안 보지 못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그분은 또 다시 배가 불러 있었다. 혹시 내가 잘못 알고 있었나 싶어 물었더니 그게 벌써 일 년 전의 일이란다. 그리고 출산을 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예정에도 없는 임신이 되는 바람에 또다시 출산휴가를 써야 할 처지라며 멋적게 웃었다.

 

그분과 헤어져 집으로 가는 길에 도리스 레싱의 소설 <다섯째 아이>가 문득 떠올랐다. 도서관을 찾는 사람들 모두에게 친절하고 환한 웃음으로 대하는 그녀는 왠지 모르게 <다섯째 아이>의 등장인물 해리엇과 무척이나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2007년 88세의 늦은 나이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는 도리스 레싱은 그녀의 이력만큼이나 다양한 장르의 책을 출간했지만 우리에게는 그닥 친숙한 작가라고는 생각되어지지 않는다. 번역된 작품도 많지 않지만 우리 정서와 사뭇 다른 작품도 많기 때문이다. 그 중 그녀가 1988년에 선보인 <다섯째 아이>는 1960년대의 영국 런던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당시의 젊은이들과는 다르게 보수적인 성격의 해리엇과 데이비드는 직장 파티에서 우연히 만나 결혼한다. 그들은 런던 외곽의 소도시에서 빅토리아풍의 다락이 딸린 삼층집을 계약한다. 젊은 두 남녀의 수입으로는 벅찬 집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여섯 명쯤 아이를 낳고 친척들로 떠들썩한 집안을 상상하며 행복해 한다.

 

루크, 헬렌, 제인, 폴 등 아이들이 줄줄이 태어나고 매년 부활절과 크리스마스에는 해리엇과 데이비드의 가족들이 모두 모여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데이비드의 부모님은 이혼 후 각자 재혼을 하였지만 데이비드와 해리엇을 위해 금전적인 도움을 아끼지 않았고, 아이들 양육에 힘들어하는 해리엇을 돕기 위해 과부인 그녀의 친정 어머니 도리스는 그들의 집에 머무르면서 아이들을 돌본다. 적어도 다섯째 아이 벤이 태어나기 전까지는 그들이 꿈꾸었던 가정과 행복을 다 얻은 듯했다.

 

다섯째 아이 벤을 임신했을 때부터 해리엇은 아이의 극심한 태동 때문에 힘들어했다. 진정제를 먹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태동이 심했던 아이는 달을 다 채우지 못하고 태어났다. 그러나 미숙아로 태어났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는 남다른 신체발육과 엄청난 식욕, 이질적인 소통 양식 때문에 가족들과 동화되지 못한다. 아이는 가족 모두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고, 그 아이로 인해 가족 구성원들 간에는 금이 가기 시작한다.

 

가족의 화합을 파괴하고 증오와 공포의 대상이 된 벤. 결국 벤은 데이비드 어머니인 몰리의 권유로 요양원에 보내지고 해리엇도 이에 반대하지 못했다. 그러나 해리엇은 벤을 포기할 수 없었고, 비가 오는 어느 날 남편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벤이 있는 요양원을 찾아간다. 구속복을 입고 축 늘어져 있는 벤을 차마 요양원에 그대로 두고 올 수가 없어서 해리엇은 벤을 집으로 다시 데려온다.

 

"자신이 속한 사회가 신봉하고 지지하는 가치관으로 판단해 볼 때 그녀는 벤을 그 장소에서 데려오는 것 외에는 다른 대안이 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그렇게 했기 때문에, 살해당하는 것으로부터 그 애를 구했기 때문에 그녀는 자기 가족을 파괴했다. 그녀의 인생에 해를 끼쳤다……. 데이비드의 인생…… 루크와 헬렌과 제인, 그리고 폴의 인생에도. 특히 폴의 경우가 가장 나빴다."    (p.158)

 

벤이 다시 집으로 돌아오자 다른 가족들은 벤을 피해 달아난다. 루크와 헬렌은 기숙사가 딸린 학교로 진학하고, 제인은 외할머니인 도로시에게, 그리고 남편 데이비드는 일 때문에 귀가가 늦거나 종종 집을 비웠다. 어려서부터 충분한 사랑과 돌봄을 받지 못했던 폴은 점점 더 신경질적으로 변하고 급기야 정신과 치료를 받기에 이른다. 벤이 학교에 입학하고 상급학교에 진학하면서 벤은 불량배들과 어울리기 시작한다. 이제 행복한 가정을 꿈꾸며 그들이 장만했던 대저택은 벤이 데려온 패거리들의 아지트로 변한다. 데이비드와 해리엇은 저택을 팔고 작은 집으로 이사할 결심을 한다. 패거리들과 어울리며 갖가지 범죄를 저지르는 벤을 보며 해리엇의 기대는 절망으로 바뀐다. 그러나 벤의 장래에 대한 걱정보다는 오히려 패거리들과 함께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기를 바라는 처지가 되었다.

 

"그 갱단은 여전히 도둑질로 먹고 살 것이고 언젠가는 잡힐 것이다. 벤도 잡힐 것이다. 경찰에 잡히면 그는 분노를 제어할 수 없어서 싸우고 고함치고 발길질하고 괴성을 지를 것이다. 그들은 어쩔 수 없이 그를 약으로 마취시킬 것이며 머지않아 죽어가던 그를 그녀가 발견했을 때 모습처럼 수의를 입고 창백하게 축 늘어진 거대한 굼뱅이 같은 상태가 될 것이다."    (p.178)

 

행복했던 한 가정에 태어난 이질적인 존재 벤. 그것은 어쩌면 현대인의 마음 속에서 자라는 막연한 불안과 공포의 집약체이자 가상의 존재일지도 모른다. 어느 날 가족의 품으로 뚝 떨어진 괴물과도 같은 이질적인 존재로부터 자신들의 행복을 지켜낼 수만 있다면 그가 어떻게 돼도 좋다는 식의 이기심, 그들과 다른 한 아이의 탄생만으로도 영원할 것 같았던 가족의 결속력이 한순간에 무너져버리는 가족 공동체의 허술함, 모성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사회적 인식과 차별의 딜레마. 그것은 어쩌면 갈수록 험악해지는 사회 환경과 그에 반하여 나날이 허약해지는 가족 공동체의 결속력에 대한 도리스 레싱의 경고가 아닐까 싶다.

 

나도 옛날 생각이 난다. 아내가 임신을 하고 출산이 가까워질수록 '혹시 우리 아이가 기형은 아닐까? 출산 과정에서 잘못되는 건 아닐까?' 등등 끊이지 않는 의심과 공포가 엄습했었다. 다행히 아이는 건강했고 지금까지 잘 자라고 있는 까닭에 장애가 있는 아이를 키운다는 것, 그들 가족이 겪는 고통에 대해 별 생각없이 지냈었다. 도서관 여직원과의 만남에서 시작된 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에 대한 생각. 한참 전에 읽은 책이지만 리뷰를 통하여 내 생각을 한번쯤 정리하고 지나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묘하게도 나는 형제자매 중 다섯째 아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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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5-04-08 21:58   좋아요 0 | URL
모성애는 위대하지만, 아이를 데려온게 올바른 판단인건지.... 개인주의 가족에 대한 경고이겠지요.
그저 건강하게 태어난것 만으로도 행복했을때가 있었죠^^

꼼쥐 2015-04-10 18:47   좋아요 0 | URL
저도 아들이 건강하게 태어난 것만으로도 무한 감사를 느꼈었는데 자라면서 다른 욕심이 하나둘 늘어나는 바람에 오히려 그때의 느낌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지고 말았죠. 장애를 안고 태어난 아이를 키우는 부모의 심정을 조금쯤 이해할 것 같았어요.

낭만가롱 2015-04-08 23:19   좋아요 0 | URL
저한테 최고의 책들 중 하나예요^^ 지나가다 반가워서요 ㅋ

꼼쥐 2015-04-10 18:48   좋아요 0 | URL
아~~그러시군요.
도리스 레싱의 작품은 문장 자체는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지만 그 내용은 시사하는 바가 크더라구요.
 

숲을 막 벗어나는 지점에는 벚나무 한 그루가 우뚝하다. 수년째 방치된 공터에 밭을 일구어 마을 노인들은 해마다 배추나 열무 등의 푸성귀를 심었다. 마치 주인이 없는 땅인 듯 누구도 신경을 쓰지 않는 듯했다. 숲으로 이어지는 그 공터의 한 귀퉁이에 제법 우람한 벚나무 한 그루가 떡하니 자리를 잡고 서 있는 것이다. 몇 년 전 이곳에 숙소를 정하고 아침마다 공터를 지나 저 산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오르내렸으니 이제는 주변 풍경에 제법 낯이 익을 법도 한데 나는 매년 이맘때쯤이면 화들짝 놀라곤 한다.

 

묏등의 잔디가 푸릇푸릇 변하고 청설모 수선스레 내달리는 이 즈음에 내가 놀라는 이유는 딱 하나, 겨우내 있는 듯 없는 듯 지워져 있던 벚나무가 홀연히 제 모습을 드러내며 나 여기 있노라 시위라도 하려는 듯 내 시야에 가득 들어오는 것이다. 백색 조명이라도 밝힌 양 주변을 환하게 밝히는 벚나무에게 나는 '장하다' 칭찬 한마디 건네고 싶은 기분이 들곤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매일 마주하는 풍경인데 산을 오를 때는 눈에 띄지도 않던 벚나무가 산을 벗어날 즈음에만 환하게 빛나는 까닭에 나는 매일매일이 첫날인 양 놀라고 또 놀란다.

 

어제 아침에도 나는 빗속에서 환히 빛나는 벚나무를 보며 화들짝 놀랐었다. 수백, 수천의 백색 꼬마전구를 일시에 켠 듯한 벚나무의 찬란한 위용! 어슴푸레 밝아 오는 여명에도 줄기는 보이지 않고 허공에 꽃만 무성한 듯한 비현실적안 대비! 나는 요즘 심장이 오그라드는 '놀람'으로 아침을 맞이하고 그렇게 또 하루를 시작한다. 매일 보면서도 매일이 새롭고 나 또한 새삼 놀라는 걸 보면 나는 벚꽃을 보고 감상하는 게 아니라 벚꽂을 그저 읽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하곤 한다.

 

벚꽃을 읽는 재미로 산을 오르고 한번 읽은 벚꽃을 다음날이면 까맣게 잊고 새삼 놀라는 나는 이 봄 루터의 말을 떠올려 본다. "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기도이고 명상이고 시련이다." 봄이면 누구나 꽃의 종교에 경배하고 기도하며 삶의 시련을 견뎌내는가 보다. 벚꽃을 읽는 계절, '초조해하는 것은 죄'라고 카프카는 말했는데 나는 짧은 이 계절을 초조하게 지켜보고 있다. 아니, 읽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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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 오를라치면 그 풍경이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음을 실감하게 되는 요즘입니다. 어쩌면 내가 느끼지 못하는 매시간, 매분, 매초마다 순간순간 변하고 잇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싸리나무와 찔레나무가 엊그제 좁쌀만 한 새순을 틔웠는가 싶었는데 어느새 대궁을 가릴 정도의 초록 물결이 감싸고 있고, 지난 월요일부터 꽃을 피우기 시작한 진달래는 꽃이 벌어 만개한 모습입니다. 도무지 멈춤이 없는 봄날입니다. 출판계도 이제 기지개를 켜려는지 풍성한 신간 서적이 눈을 즐겁게 합니다. 굳이 장르를 가를 필요는 없을지 모르겠으나 봄과 가장 잘 어울리는 책은 어쩌면 에세이가 아닐까 싶습니다.

 

 

 

작가 '김영하' 하면 이제 모르는 사람이 거의 없는 유명인사이자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중견 작가가 되었지만 그가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를 들고 나와 자신의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그는 기존의 대한민국 문단에서 슬쩍 비껴나간 반항아쯤으로 보였습니다. 최근에 나는 그의 에세이 <보다>를 읽으면서 원숙해진 작가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이제 와 하는 말이지만 주변의 지인들에게 나는 어쩌면 '김영하, 괜찮은 작가지.'라고 슬쩍 운을 뗄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사랑한 유럽 TOP 10>으로 유명해진 정여울 작가가 유명세 때문인지 신인 작가로 오해하는 분들이 더러 있더군요. 저는 사실 정여울 작가의 문학과 지식에 대한 깊은 내공(?) 때문에 좋아하게 되었지만 그녀를 알게 된 것은 그리 오래지 않았던 듯싶습니다. <마음의 서재>를 먼저 읽었는지 <그때 알았더라면 좋았을 것들>을 먼저 읽었는지 확실치는 않지만 말입니다. 아무튼 정여울 작가는(신인 작가가 아닌)오래 지나도 지겹지 않을 친한 친구 같은 작가입니다.

 

 

 

 

 

 

여행 서적 중에는 의외로 깊은 사색이 돋보이는 괜찮은 에세이집이 많다는 걸 아시는지. 여행자가 갖는 특수성 때문인지 지극히 감성적인, 별반 가치도 없는 순간순간의 주관적 느낌을 피력한 책이 대부분이지만 그래도 열정을 갖고 뒤져보면 꽤 쓸 만한 책이 더러 있습니다. 물론 잘만 찾는다면 말입니다. 잘한 선택이란 무엇보다 사람을 글의 중심에 놓은 책을 고르는 것입니다.

 

 

 

 

 

 

 

 

 

내가 늘 곁에 두고 이따금 꺼내 읽는 책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그 중에는 생텍쥐페리가 쓴 <어린 왕자>가 있습니다. 나는 이 책을 읽을 때마다 마치 무한한 우주와 깊은 영혼의 세계로 여행을 떠나는 듯한 착각에 빠지곤 합니다. 작가가 만들어 놓은 동화의 세계를 무작정 거니는 듯한 느낌도 들구요. 그렇지만 단 한 번도 지겨운 느낌이 들었던 적은 없습니다. 생텍쥐페리는 그런 작가죠. 가볍게 말하는 듯하지만 생각할수록 음미할 만한, 쉽게 말하는 듯하지만 상대방을 깊이 배려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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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 며칠 초여름처럼 따뜻했던 날씨가 언제 그랬냐는 듯 어제 오늘 아침 기온이 뚝 떨어졌지요. 그럼에도 아침에 산을 찾는 사람의 숫자는 나날이 늘어나는 것 같더군요. 어제 아침에 산을 올랐을 때는 운동기구가 있는 능선에서 다른 날처럼 운동을 하면서도 기분이 영 언짢았답니다. 물론 휴일에도 많은 사람들이 다녀갔겠지요. 저는 일요일에는 산에 오르지 않았습니다. 운동기구 주변에는 음료수 용기를 비롯하여 화장지 등 버려진 쓰레기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었습니다.

 

과히 보기 좋은 풍경은 아니었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주워서 내려가고 싶었지만 그 많은 쓰레기를 손에 들고 내려올 수가 없겠더군요. 그래서 오늘 아침에는 비닐 봉지 한 장을 챙겨서 올라갔습니다. 쓰레기를 담기 위함이었죠. 근처에서 주운 나뭇가지 두 개를 젓가락처럼 사용하여 쓰레기들을 봉지에 담았습니다. 그 바람에 오늘 운동 시간은 평상시보다 많이 늦어졌었죠. 아파트 쓰레기 수거함에서 분리수거까지 마치고 나니 더 늦어졌구요. 그래도 마음은 가벼웠습니다.

 

어쩌면 제게는 그 꼴을 그냥 보아 넘기지 못하는 결벽증이 있을 수도 있겠고, 남들보다 오지랖이 넓은 것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우리는 언제부턴가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는 안중에도 없게 되지나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등산로가 아닌 샛길 여기저기로 다녀서 산을 훼손하는가 하면 자신이 가져온 쓰레기도 아무런 거리낌없이 내팽겨치고, 때로는 고성방가를 하는 사람도 있고, 함부로 나무를 꺾는 사람도 보이더군요. 이런 모든 행동을 '자유'라고 주장하고 싶겠지요? 혹시 그런 말을 내뱉음으로써 자신의 밑천까지 내보이려는 건 아닌지...

 

많은 사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무상급식을 갑자기 폐지하고 도피성 외유를 떠났던 어느 도지사는 부인을 동반한 채 한인 사업가와 골프를 치다가 들켰다지요?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이라는 식으로 그분도 과거에는 골프치는 공무원들을 부단히도 씹었더군요. 그러나 이제 와서 자신의 행동은 어떻게 변명하려는지...그럴 돈이 있으면 아꼈다가 학생들 급식비에나 썼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에는 인간 말종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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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좀 많습니다]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책이 좀 많습니다 - 책 좋아하는 당신과 함께 읽는 서재 이야기
윤성근 지음 / 이매진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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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라는 말이 들어간 제목의 책은 그냥 넘어가지 못한다. 심한 경우에는 '(書)'자만 보여도, 어떨 때는 '독(讀)'자만 보여도 게걸스럽게 달려들곤 한다. 이것도 병이라면 병이다. 게다가 치료법도 없으니 평생 달고 살아야 할 불치병이 아닐 수 없다. 내 주변에서 담배를 끊지 못하는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하는 말은 역설적이게도 '담배가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는 것이었다. 제 스스로 끊을 수 있는 의지가 없으니 그런 환경이라도 만들어진다면 좋겠다는 뜻일 게다. 나야 이제 담배는 끊었으니 그 말은 할 수 없고 '책이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고 외쳐야 할까 모르겠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집으로 끌어들인 책을 미처 다 읽지도 못하고 책장에 꽂는 경우가 다반사, 나중에는 읽지 않은 책만 모아도 수십 권에 이를 때가 있다. '구입한 책을 다 읽기 전까지는 다시는 책을 사지 않겠다' 결심하지만 그것도 잠시, 어느 책에서 읽었던 권장도서나 누군가의 권유가 있을라치면 좀전에 했던 굳은 결심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지금 당장 그 책을 사야 한다는 생각만 남는다. 팔랑귀도 그런 팔랑귀가 없다. 본디 책이란 게 물건이 없어 못 사는 경우가 드문 법인데 시간을 다투어 사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을 받는 이유가 뭔지 당최 알 길이 없다.

 

나는 오늘도 책과 관련된 책을 읽고 말았다. 제목은 <책이 좀 많습니다>. 책이 좋아서 다니던 직장도 때려치우고 헌책방 주인이 되었다는 저자의 얘기를 읽으며 혀를 '끌끌' 찼다. '뭐 묻은 돼지가 뭐 묻은 돼지 나무라는' 격이 아닐 수 없다. 책을 반쯤 읽은 후에야 비로소 나는 전에도 이 책의 저자인 윤성근 작가의 책을 읽었던 적이 있음을 기억해냈다. 책의 제목은 <헌책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 그 책의 제목에도 보란 듯이 '책'이라는 단어가 박혀 있었다. 헌책방을 운영하는 사람이니 책을 좋아하고, 책에 대한 안목이 남다른 사람일 터, 이 책 <책이 좀 많습니다>에도 저자가 만났던 애서가들이 여럿 등장한다.

 

"헌책방에서 일을 하면서 평범한 사람들 중에 얼마나 많은 애서가들이 있는지 조금 짐작할 수 있게 됐다. 유명인들 못지않은 거대한 서재를 가진 사람부터 책 없이는 못 사는 자타 공인 '책 바보'까지. 수의사, 번역가, 대학생, 회사원, 교사, 백수 등. 그렇지만 이런 사람들은 결코 다른 사람들보다 위에 있거나 책 많이 읽은 것 가지고 허세를 부리지 않는다. 말 그대로 자기가 있는 곳에서 묵묵히 일하는 평범한 생활인이다." (p.8 '프롤로그' 중에서)

 

집에 물이 새면 살림은 제쳐두고 젖은 책을 다림질한다는 고등학교 국어 교사 허섭 씨를 비롯하여 공장 한켠에 컨테이너 서재를 두고 있는 프리랜서 윤성일 씨, 장르 소설을 좋아하는 번역가 이경아 씨, 사회학이라는 주제를 깊이 있게 탐색하려는 대학생 김바름 씨 등 우리 주변의 애서가 23인의 이야기를 이 책에 담고 있다. 애서가이자 장서가인 다치바나 다카시처럼 무지막지하게 책을 읽는 사람만 골라 인터뷰를 한 것은 아니다. 자신의 길을 가면서도 책을 손에서 놓지 못하는 사람들, 책에 빠져드는 그들의 이야기는 단순히 직업적 이해득실에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었다.

 

"문학은 유용하다기보다 무용한 것이죠.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사실일 거예요. 이를테면 '책 읽기'는 먹고 사는 문제에 관련된 다른 일이 생기면 우선순위에서 쉽게 밀려나죠. 그렇지만 바로 이 점을 인정할 필요가 있어요. 문학은 무용하다, 하지만 뭔가 있어 보인다는 점을요. 출발점은 분명히 허세와 허영이에요. 정작 세계 문학을 쓴 위대한 작가들도 허세와 허영이 없었다면 작품을 쓰지 못했을 거예요. 그렇지만 쓰는 과정에서 뭔가 다른 가치를 창조했죠. 우리도 읽는 과정에서 뭔가 다른 걸 얻게 되고요. 아니, 뭔가를 '얻는다'는 표현보다는 우리 존재 자체가 '변한다'는 표현이 더 맞겠죠." (p.329)

 

저자는 이 책의 에필로그에서 인터뷰이의 근황을 소개하고 있다. 인터뷰를 진행할 당시와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산다는 건 매번 달라지는 어떤 것을 수용하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다르고, 일 년 전의 나와 일 년 후의 나는 분명 다를 것이다. 나는 이따금 과거에 읽었던 어떤 책을 꺼내어 물끄러미 바라볼 때가 있다. '그때는 이 재미없는 책에 어쩌면 그렇게 홀딱 빠질 수 있었을까' 궁금해지곤 한다. 사람도, 책도 변하는 건 마찬가지다. 내가 어떤 책에 관심이 있다는 것은 '살아 있음'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시시각각 변하는 그 모든 것을 우리는 '삶'이라 부른다. 내가 책을 좋아하는 이유는 아직도 내 삶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책을 끊었습니다' 선언하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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