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천염천 - 거센 비 내리고, 뜨거운 해 뜨고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서영 옮김 / 명상 / 200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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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사람의 시신을 한번이라도 만져본 사람은 안다. 맨손에 전해져오는 그 느낌은 차라리 천길 낭떠러지를 밟은 듯한 삶의 허방, 그 아득함이라고 해야 옳을 듯하다. 생명을 잃은 모든 주검이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삶의 온기가 빠져나간 시신에서 우리는 섬뜩하다거나 두렵다기보다 오히려 욕심의 중력에서 벗어난 듯한,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아득함을 먼저 느끼게 된다. 성(聖)과 속(俗)의 갈림이라는 것도 결국 그 아득한 허무를 두려움 없이 바라볼 수 있느냐의 문제로 귀결된다고 하면 나의 지나친 억측일까?

 

무라카미 하루키의 그리스, 터키 여행기 <우천 염천>을 읽었다. 여행을 좋아하는 작가 치고는 그의 여행기는 많지 않다. 너무나도 유명한 <먼 북소리>를 제외하면 생각나는 것이라고는 <우천 염천>, <위스키 성지 여행>, <하루키 여행법>이 고작이다. 그 중에서 <하루키의 여행법>은 제목만 그렇지 여행기라고 할 수조차 없다. 그러나 몇 안 되는 여행기에 실린 그의 글은 다른 작가의 그것과 확연히 구별된다. 여행기라기보다 차리리 '디아스포라적 생활기' 또는 '낯선 나라에서 살아보기'라고 부르는 게 옳을지도 모르겠다. 짧은 일정으로 많은 명소 방문하기를 실천하는 우리네 여행과는 달리 그는 한 나라에서 몇 년을 살아본다거나 적어도 그 나라 전체를 차를 타고 돌아보는 식으로 여행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 <우천 염천>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문체라고는 믿기지 않는, 어찌 보면 가장 보편적이고 평이한 여행기라고 해도 크게 틀리지 않을 듯싶다. 사실 소설에서든 수필에서든 작가의 묘사는 어느 누가 읽어도 '아, 하루키의 글이군.' 금세 눈치챌 수 있을 정도로 세밀하면서도 탁월하다. 그러나 이 책에서는 하루키다운 모습을 전혀 발견할 수 없다. 하루키의 광팬이라고 자부하는 나의 눈에도 '이건 아니지.'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으니 말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작가는 그리스정교의 성지인 아토스 섬의 여러 수도원을 방문하는 길에 만난 대책 없는 장대비(雨天)와 터키의 마을을 돌아다닐 때의 불볕더위(炎天)로 인해 어지간히 힘들었던 모양인데 이 책이 여행지에 대한 정보와 간략한 스케치에 그쳤던 탓도 아마도 그런 이유가 아니었을까 작가를 대신하여 변명 아닌 변명을 해본다.

 

"우리는 이곳에서 흠뻑 젖어버린 여행용 신발을 벗고 양말과 바지를 새로운 것으로 바꿔 입은 뒤 점심식사 대신 크래커와 치즈를 먹었다. 우리는 거의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먹었다. 그리고 침대에 눕자 당연하다는 듯이 깊은 잠에 빠졌다. 너무나 편안한 잠이었다. 비를 맞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인간은 이렇게 나약해지는구나 하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다. 좀더 심한 비를 3일 정도 맞는다면 종교에 귀화해버릴지도 모른다. 수도원의 침대는 우리에게 그만큼 고마운 존재였다." (p.54)

 

1988년 서울 올림픽이 있었던 해에 하루키는 그리스의 성지인 아토스 반도와 터키를 여행하였다고 한다. 책에서 아토스에 관한 애기를 읽은 후 꼭 한 번 가보고 싶었다는 아토스 반도. 그곳에는 현재 20개의 수도원이 존재하고, 약 2천여 명의 수도승들이 엄격한 수행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들은 수도원이 처음으로 세워진 비잔틴 시대와 다름없이 소박한 자급자족의 생활을 이어가고 있는 셈이다. 신에게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 밤낮으로 기도를 드리는 수도승과 그 열악한 환경 속에서 자족하며 사는 고양이의 모습에서 작가는 '확신에 가득찬 진짜 세상'을 보았던 듯하다.

 

"나는 처음에 쓴 것처럼 종교적인 관심이라고는 거의 없는 인간이고 그렇게 쉽사리 뭔가에 감동을 하지 않는, 굳이 말하자면 회의적인 인간이라 할 수 있지만 그래도 아토스의 길에서 만난 야생동물처럼 지저분한 수도승으로부터 "마음을 바꿔서 정교로 개종을 한 뒤에 오시게."라는 말을 들었을 때의 상황을 이상하게도 너무나 생생하게 기억한다. 아마 그것은 종교 운운하기보다 인간이 사는 방법에 대한 믿음의 문제라고 생각한다. 믿음이라는 점에서는 전세계를 뒤져봐도 아토스처럼 농밀한 확신에 가득찬 땅은 아마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들에세 그것은 의심할 구석이 없는 확신에 가득 찬 진짜 세상 그 자체인 것이다. 캅소카리비아의 그 고양이에게 곰팡이가 핀 빵은 세상에서 제일 현실적인 것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그렇다면 어느 쪽이 정말 현실 세계인가?" (p.109)

 

터키여행은 4륜구동차를 타고 흑해 연안을 따라 일주를 하게 되는데 이를 위해 하루키는 운전면허를 땄다고 한다. 초보운전 표지를 달고 시작된 21일간의 터키 여행은 작가에게 그닥 우호적이지 않았던 듯 보인다. 길을 물으면 아무말 없이 차에 올라타 찾는 곳까지 안내하고는 다시 오던 길을 되짚어 돌아가곤 하던 터키 사람들의 과잉 친절, 어울리지 않는 장소에 풀어놓은 것만 같은 앳된 얼굴의 순진한 군인들과 지나친 검문 검색, 말보로 담배 한 개비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시골 남자들의 순진함과 담배 사랑, 이란 국경 힛카리 마을에서의 위험천만했던 경험, 24번 국도의 목숨을 건 운전 등은 '반 고양이'를 직접 보고 싶어 햇던 작가의 기대도 무색하게 했다.

 

"하지만 그때 이후로 나는 터키라는 나라에 대해 강한 흥미를 갖게 되었다. 어째서인지는 나로서도 잘 알 수가 없다. 나를 끌어당긴 것은 그곳 공기의 질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곳 공기는 그 어느 곳과도 다른 뭔가 특수한 것을 포함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피부에 와닿는 감촉도 냄새도 색깔도 그 모든 것들이 내가 이제까지 맡아왔던 그 어떤 공기와도 달랐다. 그것은 불가사의한 공기였다. 나는 그때 여행의 본질이란 공기를 마시는 일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다. 기억은 분명 사라진다. 그림엽서는 색이 바랠 것이다. 하지만 공기는 남는다. 적어도 어떤 종류의 공기는 남는다." (p.142)

 

터키 여행은 작가에게 힘들었던 경험인 듯하다. 처음 방문했을 때 맡았던 '공기의 질' 같은 것에 이끌려 7년만에 다시 방문했던 터키에서 작가는 에게 해 근처의 잘 알려진 관광지를 피하여 오지로만 돌았는데 작가는 어쩌면 터키 국민의 내밀한 속사정을 들여다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까닭에 여정은 힘들었을 테고. 작가는 길이 끊긴 비포장 도로를 달리기도 했고, 이방인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는 국경 근처의 마을을 통과하기도 했고, 석유 운송 트럭이 질주하는 편도 1차선의 24번 국도를 달리기도 했다. 작가의 이야기에서 독자는 속세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경험하게 된다. 살아간다는 것은 최소한의 온기를 지닌다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우리는 뼛속까지 파고드는 추위의 우천(雨天) 아닌 열기로 숨을 헐떡이게 만드는 염천(炎天)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다. 치열하게 다툴지라도. 성(聖)과 속(俗)은 에게해를 건너는 것만큼이나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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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nine 2015-05-13 14:16   좋아요 0 | URL
책표지의 우천염천 글자가 멋있네요.
그리스와 터키는 역사적으로 사이가 별로 좋지 않은걸로 알고 있는데 하루키가 여행하는 동안 날씨도 우천과 염천으로 대조적이었나보네요. 여행기 제목이라고 짐작도 못했는데 꼼쥐님 리뷰 읽어보고 알았습니다. 사실 이 리뷰의 첫문장에 눈길이 가서 읽기 시작했어요. 중환자실에서 며칠째 의식과 무의식을 오가시는 아버지 생각으로 머리속이 꽉 차있는 때라서요. 오래전 유럽의 몇나라 여행을 다녀오셔서는 터키가 제일 좋았다고 하셨었어요.

꼼쥐 2015-05-14 15:58   좋아요 0 | URL
아토스 반도의 높은 산지에 있는 그리스 정교회 수도원을 방문했었고 그 길로 터키로 이동하여 차를 타고 터키 일주를 했었나 봅니다. 이 책에서 하루키는 관광객들이 잘 가지 않는 곳만 골라서 간 듯합니다. 에게해 주변의 잘 알려진 관광지는 터키 냄새가 나지 않는다구요. 아버님 때문에 상심이 크시겠어요. 부디 쾌차하시길...
 

바람이 잦아든 등산로는 한적했다. 물기 머금은 등산로에는 아카시아 꽃잎이 눈처럼 깔리고 군데군데 참나무 잔가지가 떨어진 걸로 보아 간밤의 비바람이 약하지 않았음을 짐작케 했다. 멀리 멧비둘기 울음 소리가 들렸다. 선잠을 깬 아기가 엄마를 찾아 보채는 것처럼 빗발은 그쳤다가 이따금 생각난 듯이 다시 내리곤 했다.

 

비에 젖은 소나무 둥치를 가만가만 만져보았다. 매일 아침 같은 길, 같은 나무를 스치면서도 그날 그날의 날씨에 따라 사람의 마음은 어쩌면 이렇게 달라지는지... 능선에 올랐을 때 아가씨 한 명을 볼 수 있었다. 다이어트를 결심한 것인지 며칠 전부터 아침마다 만나는 얼굴이다. 단발머리에 볼살이 통통한 애띤 얼굴, 검은 운동복 안에 감춰진 복스러운 몸매의 아가씨는 저만치 앞서가다가 무슨 급한 일이라도 생각난 듯 되돌아 내려오고 있었다. 우산도 가져오지 않았는지 내리는 비를 그대로 맞으면서 말이다. 비 때문인지, 사람이 없는 산길이 무서웠던 것인지 아가씨는 그렇게 멀어져 갔다.

 

아카시아 꽃이 떨어진 등산로는 그야말로 꽃길이다. 뉘라서 이같은 환대를 받아 볼 것인가. 먹구름이 점차 옅어지고 있었다. 아카시아의 달콤한 향기가 유난히 짙었던 오늘 아침, 콧노래가 절로 나왔다. 행복은 토닥토닥 내리는 빗방울처럼 그렇게 가벼운 것인지도 모른다. 삶에서 한발짝만 비껴 서도 이토록 웃을 일이 많아지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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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몽영, 삶을 풍요롭게 가꿔라 - 임어당이 극찬한 역대 최고의 잠언집
장조 지음, 신동준 옮김 / 인간사랑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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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잠언집에는 저마다의 장점과 유익이 있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막상 잠언집을 집어 들면 왠지 꺼림칙한 마음이 먼저 들곤 합니다. 나만 그런가요? 첫장을 넘기면서부터 '이걸 언제 다 읽나?' 한숨부터 내쉬게 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내가 잠언집에서 받는 느낌은 아마 지키지도 못할 규칙이 빼곡히 적힌 어떤 규정집을 받아들었을 때의 부담감인 듯합니다. 그러니 처음부터 거부감이 들 수밖에요.

 

그렇다고 모든 잠언집을 내치기만 했던 것도 아닙니다. 예컨대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 유대인의 <탈무드>,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고독의 즐거움>, 톨스토이 잠언집 <마음에 힘을 주는 사람을 가졌는가>는 비교적 거부감 없이 읽었던 듯합니다. '비교적' 말입니다. 그런데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는 잠언집이라기보다 시집처럼 읽혔습니다. 지금도 나는 <예언자>가 잠언집이 맞나 의심하곤 하지요. 아무튼 나는 장조의 <유몽영>을 들고 한참을 망설였던 게 사실입니다.

 

'임어당이 극찬한 역대 최고의 잠언집'이라는 표지 문구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한때는 임어당을 다른 누구보다 좋아하여 <임어당 전집>을 읽느라 밤을 새우기도 했으면서 말입니다. 내가 이 책을 읽자, 최종적으로 결심했던 이유는 다른 데 있었습니다. '유몽일영'의 제1칙이면서 이 책의 첫머리이기도 한 다음의 문구 때문이었습니다.

 

"경서經書를 읽기에는 겨울이 좋다. 정신을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서史書를 읽기에는 여름이 좋다. 날이 길기 때문이다. 제자서諸子書를 읽기에는 가을이 좋다. 운치가 남다르기 때문이다. 문집文集을 읽기에는 봄이 좋다. 기운이 화창하기 때문이다." (p.35)

 

그렇다고 이 책이 문집이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문집과는 거리가 있는 게 사실이죠. 제목에서도 느껴지는 것처럼 이 책은 꿈길에서 유유자적하는 듯한 느림의 미학을 추구하는 삶의 지침서입니다. 문집처럼 유유자적하며 읽기에는 조금 무리가 있습니다. '그윽한 꿈의 그림자'(幽夢影)로 풀이되는 책의 제목에 대하여 어쩌면 바쁜 현대인들은 한가한 소리쯤으로 치부할지도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몸이 바쁠수록 마음의 곳간은 차츰 비어간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여, 독서와 문학, 자연과 예술, 꽃과 여인, 인생과 처세를 다루고 있는 이 책을 한 줄 한 줄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지나온 날들을 뒤돌아보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림자처럼 묵묵히 뒤따르던 나의 과거와 진솔하게 대면할 수 있는 기회는 자주 오지 않는 까닭에 어떡하든 자리를 마련하려는 목적으로 이 책을 읽게 되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정한 자는 살고 죽는 생사生死를 이유로 마음을 바꾸지 않고, 애주가는 춥고 더운 한서寒暑를 이유로 주량을 바꾸지 않고, 독서가는 바쁘고 한가한 망한忙閒을 이유로 독서를 중단하지 않는다." (p.278)

 

자연과 예술, 처세와 관련된 다른 많은 문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내 눈에 띄는 문구는 대개 독서와 관련된 문장뿐입니다. 봄에는 기운이 화창하여 문집을 읽기 좋은 계절이라는데 꽃에 뺏긴 시선은 좀체 책으로 되돌아오지 않습니다. 이것도 게으른 자의 변명이라면 변명이겠지만 말입니다. 하루가 한 시간처럼 빠르게 흐르는 요즘 정좌하여 조용히 몸을 추슬러야 함을 절실히 느낍니다.

 

"고기반찬이 없는 소식素食을 하면 기운이 탁하지 않고, 홀로 자는 독숙獨宿을 하면 정신이 탁하지 않다. 묵묵히 앉아 묵좌默坐를 하면 마음이 탁하지 않고, 선현과 대화하는 독서讀書를 하면 입이 탁해지지 않는다." (p.418~p.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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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무지 내게 일어나리라고 상상조차 하지 못하던 일이 어느 날 갑자기 현실로 나타날 때가 있다. 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내 앞에 떡 하니 펼쳐진, 주워 담을 수도 없는 현실로 말이다. 처음에는 누구나 그 느닷없음에 얼떨떨하고 어리둥절하게 마련이지만 꿈이 아닌 엄연한 현실임을 감안하면 도대체 이런 일이 하필이면 나에게 일어났을까 궁금해진다.

 

지난 어린이날에는 아내와 아들과 함께 주중 휴일을 조촐하게 보내고 다음날 아침 성남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버스를 탔었다. 전날 조금 피곤했었던지 버스가 출발하자 마자 잠이 들었다. 얼마나 잤는지 버스가 갑자기 멈추는 바람에 잠에서 깨었다. 벌써 도착했을 리는 만무하고, 차량 증가로 도로가 꽉 막혀 있나 싶어 밖을 내다보니 그것도 아니었다. 오직 내가 탔던 차만 2차선에 멈추어 선 채 꼼짝도 하지 않고 있었다.

 

기사 아저씨는 어디론가 열심히 통화를 하느라 승객들에게는 일언반구 설명이 없었다. 출발한 지 30분이 지나고 있었다. 아무리 버스라지만 고속도로 2차선에 멈추어 선 채 있어도 되나 싶었다. 혹시 사고라도 나는 게 아닌가 어쩔 수 없이 생기는 불안을 떨치지 못했다. 어느 여자 승객은 기사에게 큰소리로 항의를 했다. 그러자 기사 아저씨는 마지못해 상황을 설명했다. 버스가 고장으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라고 말이다. 곧 예비차량이 올 것이니 그 차로 옮겨 타면 될 것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문제는 승객의 안전이었다. 버스가 2차선에서 20분 이상 멈춰 서 있었는데 어떤 조치도 취해지지 않는 상황이었다. 버스 안에서 안전벨트를 맨 채 대기하는 상태였지만 그 누구도 자신의 안전을 담보할 수 없었다.

 

여기저기 전화를 걸던 기사는 가까스로 버스의 시동을 거는 데 성공했고 꿀렁거리는 차를 몰고 몇 백 미터를 주행하여 갓길에 정차했다. 그 불안한 주행이 시작되고 차가 꿀렁꿀렁 흔들릴 때마다 여기저기서 "아저씨!" 하는 짜증과 불안이 섞인 항의가 터져 나왔다. 차가 멈춘 지 30분 이상이 지날 즈음 같은 회사의 차량이 한 대 도착했다. 차 안에는 여러 명의 승객이 타고 있었다. 우리는 여기저기 빈 자리를 찾아 앉아야만 했다. 그렇게 사고가 일단락 되고 차는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했다. 나를 포함하여 고속도로 2차선에서 멈춘 버스에 탔던 승객들은 그제야 놀란 가슴을 누르고 안도할 수 있었다.

 

우리는 간혹 남의 얘기인 줄로만 알고 있었던 일이 내 앞에서 벌어질 때 일순 현실을 현실로 인식하지 못한 채 멍한 느낌에 휩싸이곤 한다. 현실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그 짧은 순간이 영원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말이다. 어린이날 아들은 학교에서 받아왔노라며 과학의 날 기념 미래창조과학부 장관이 주는 상장과 부상을 보여주었다. 부상이라야 나로호를 본뜬 USB가 전부였지만 말이다. 그러나 정작 상을 받은 아들도 어떤 이유로 상을 받았는지 모르겠단다. 무심해도 너무 무심하다. 초등학생인 사내녀석들은 다 그런 건지. 아무튼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게 우리네 인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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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언니를 보라 - 세상에 불응한 여자들의 역사
박신영 지음 / 한빛비즈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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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사실 역사서나 역사소설을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90년대 역사소설이 유행했던 시절에는 나도 시류에 이끌려 주구장창 역사소설만 읽었었다. 귀가 얇은 탓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역사소설의 인기가 바닥을 치는 까닭에 나도 덩달아 역사서를 멀리하게 되었다. 오래 전의 일이지만 역사서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재미있게 읽었던 적이 있었다. 사마천의 <사기열전>과 일본의 대만계 역사 소설가 진순신이 쓴 <십팔사략>을 읽었을 때였다. 특히 <십팔사략>은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겨주었다. 은나라의 주왕과 달기로부터 시작되는 <십팔사략>은 인간군상의 탐욕과 애욕, 배신, 권모술수, 지략, 처세 등 인간의 속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까닭에 수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인간의 본성은 달라진 게 없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했다.

 

사설이 길었다. 각설하고,박신영 님의 <이 언니를 보라>는 열네 명의 역사 속 여자들을 저자만의 독특한 시각으로 파헤쳐 현대적 관점으로 재해석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신라의 미실, 프랑스의 마리 앙투아네트, 거상 김만덕, 헬렌 켈러 등 우리가 익히 들어보았거나 잘 알 만한 여성들의 삶에 대해 에피소드 형식의 단편적 분석을 시도한 것이 아니라 각각의 인물들마다 여러 문헌들을 비교 분석하여 그 속에 작가의 시선을 담았다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미실, 그녀의 삶에서 불편함을 느끼는 이유는 이런 말초적인 성관계 에피소드보다 다른 곳에 있다고 난 생각한다. 도덕적인 면이 비난받아 마땅하다면 미실의 상대 남자들도 같은 정도의 비난을 받아야 한다. 즉 제수씨이자 처조카를 후궁으로 삼은 진흥왕도, 친누나와 성관계를 가진 미생도 다 같이 비난받아야 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대개 권력자 남성의 성생활은 비난받지 않는다. 남성과 여성의 성생활을 바라보는 시각이 달라서다." (p.21)

 

어떤가? 위에 인용한 글을 읽고 불편함을 느꼈다면 당신은 분명 남성, 그것도 까칠한 성격의 남성일 확률이 높다. 그러나 나는 불편함을 전혀(?) 느끼지 않았다. 그렇다면 혹시 내 성격이 무던하거나 남성의 권리 주장에는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는 한심한 놈쯤으로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나는 사실 그와는 정반대의 성격에 가깝고 사회적 이슈에도 민감한 편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어찌 그럴 수가... 생각하시겠지. 그것도 다 역사서를 읽었던 덕분이라고 말한다면... 아무튼 내가 이제껏 역사서를 통해 배웠던 진리는 단 하나, 인간 세상에서 영원한 평화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저자의 주장이나 판단이 구구절절 다 옳다는 말인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은 내가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닌 듯하다. 왜냐하면 나는 역사학자도 아니요, 역사 속의 여러 시대를 내 눈으로 직접 본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과거의 사실을 현대의 가치관과 제반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이 과연 옳은가? 하는 문제에는 의구심이 있다. 예컨대 <작은 아씨들>을 쓴 루이자 메이 올컷이 결혼도 하지 않은 채 가족의 생계를 혼자 책임지는 실질적 가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로부터 평생 지적만 당하며 살았던 것은 현대인의 관점에서는 천 번 만 번 부당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시대의 관점에서 루이자 본인은 평생 행복하다고 생각했을지 어찌 알겠는가.

 

역사는 단순한 사실의 기술에 그치지 않는다. 사실을 기록한다 할지라도 기술하는 사람에 의해 가감과 수정 보완이 늘 존재하게 마련이다. 그 시절을 완벽히 재현하지 않는 한 역사에 대한 객관성은 결코 담보되지 못한다는 말이다. 결국 역사란 역사를 기술하는 사람에 의해 각색되고 편집된, 심하게 말하자면 한 개인이 바라본 지난 과거에 대한 감상문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역사에 대한 선악적 가치판단은 있을 수 없다. 그것은 단순히 현재의 환경에서 현대인의 가치관에 입각한 하나의 생각일 뿐이지 그 당시 사람들의 의견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가 역사적 사실을 반면교사로 삼기에 앞서 현상을 바라보는 바른 생각, 즉 가치관의 정립이 필요한 까닭도 거기에 있다. 사상이나 정신은 언제나 환경이나 육체를 지배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어려운 환경에서도 행복하다 느낄 수 있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편하고 자유로운 환경에서도 불행하다 느낄 수 있는 사람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모든 인간이 '다름'을 추구하고 저마다의 개성으로 빛날 때 인간 세상은 평화와 안정을 찾는다. 그러나 인간의 속성은 끝없이 '같음'을 추구하는 한편 '같음'에 대해서는 언제나 불편함을 느끼는 듯하다. 예컨대 자신이 입은 옷과 똑같은 옷을 입은 사람을 거리에서 만나면 불편하고, 자신과 같은 성격의 사람을 결코 좋게 여기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이 책에서 작가는 '다름'에 대한 현대적 견해를 독자들에게 어필하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어느 시대건 시대적 본류에 속하지 않았던 몇몇 인물들은 여러 시대에 걸쳐 주목을 받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그 사람에 대한 평가는 시대에 따라, 평가자에 따라 제각각이었다. 인생이란 어차피 '다름'을 인정하고 배워가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작가의 견해가 나와 다르기에 나는 이 책을 끝까지 읽을 수 있었다. '다름'을 인정하면 모든 게 편하고 모든 게 아름다운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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