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해외에 사는 지인들로부터 걸려 온 안부전화를 여러 통 받았습니다. 저는 마치 임종 직전의 환자가 되어 그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다들 속보로 타전된 한반도 소식에 매우 놀란 눈치였습니다. 게다가 남과 북이 수십 발의 포격을 주고 받는 등 군사적 긴장감이 최고조에 이르렀다는 뉴스 보도는 조국을 떠나 타지에서 떠도는 사람들의 불안감을 한껏 자극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아직까지는 생명에 지장이 없으며 생수와 비상식량 등을 넉넉히 준비했으니 염려할 것 없다고 농담 삼아 말했더니 막 화를 내더군요. 지금 그런 농담할 때냐고 말이지요. 사실 이 좁은 땅덩어리에서 제가 지금 할 수 있는 거라곤 그게 다인데 말입니다. 마음이라도 여유있는 척 해야지 그들도 덜 불안하고 저도 터져나오려는 분노를 조금은 억누를 수 있을 테니까요.

 

그런 전화 중에서 단연 압권이었던 건 프랑스에서 걸려 온 후배의 전화였습니다. 현 정권이 들어서던 해에 이 나라에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며 처자식을 데리고 이민을 결행한 후배였습니다. 후배는 저에게 다짜고짜 화를 내며 그때(이민을 가던 때) 내가 뭐라 그랬느냐, 희망이 없으니 선배도 떠나는 게 낫다고 하지 않았느냐며 마치 채권자가 이자도 내지 않는 채무자를 닥달하는 식으로 몰아붙이는 게 아니겠습니까. 저는 그저 망연히 듣고만 있었습니다.

 

이제 북한의 김정은이 제시한 마감 시간이 멀지 않았군요. 이 글을 읽는 분 모두가 무사하시길. 그리고 한반도의 두 지도자에게 저주가 내리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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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지 2015-08-22 16: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계속 신경쓰고 있으면 당연히 불안하지만,
실상을 알고 보면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꼼쥐 2015-08-25 12:41   좋아요 0 | URL
지나고 나니 남과 북에서 쇼를 한 것만 같군요.
자신의 지지도를 높이기 위해, 두 나라의 지도자가 국민을 볼모로 쇼를 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먼 북소리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윤성원 옮김 / 문학사상사 / 2004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어떤 책은 한 달이건 두 달이건 되는 대로 읽어도 될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하고, 또 어떤 책은 밤을 꼬박 새워서라도 단숨에 읽어야만 할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나는 대체로 책에서 받는 이런 느낌을 중시하는 편인지라 때로는 책 한 권을 읽는데 두어 달이 걸리기도 한다. 드문 일이긴 하지만 말이다. 그렇게 오래 걸려 읽었던 책은 내용도 잘 생각나지 않아 결국에는 반드시 다시 읽게 되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게 꼭 시간 낭비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내 수중에 들어온 책도 나름의 운명이 있어서 그렇게 읽힐 운명이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고,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왜?'라는 생각보다는 오히려 '그렇지' 하면서 고개를 주억거리게 된다. 그러나 오랫동안 책을 끌고 이리저리 다니는 바람에 군데군데 헤지고 닳아 중고서점에서 산 낡은 서적으로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김치국물과 같은 이물질이 지저분하게 묻기도 하지만 왠지 모를 친근한 느낌도 덤으로 얻게 된다. 어쩌면 나는 가까워지기 어려운 책과 그런 방식으로 서서히 가까워졌는지도 모르겠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 <먼 북소리>도 그와 같은 책 중의 하나이다. 내가 이 책을 처음으로 읽었던 것은 아주 오래 전의 일이라 기억은 희미하지만 책을 다 읽는 데 아마도 한 달 이상의 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 그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책의 내용이 다시 궁금해졌고, 그때는 불과 며칠만에 후다닥 읽어냈었다. 그 후로도 여러번 책을 꺼내 읽었던 듯하다. 물론 그때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읽었던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이를테면 나는 '로마의 겨울'을 읽거나 '스펫체스 섬'을 들춰보거나, 때로는 '오스트리아 기행' 부분을 정독하기도 했다. 남들이 들으면 웃을 일인지도 모르겠다. '사람 참, 할 일도 되게 없나보다. 여행기를 그렇게 여러번 읽어 뭐에 쓰려고'하며 혀를 끌끌 찰지도 모르고.

 

이번에도 나는 처음에 그랬던 것처럼 한 달 이상의 시간 동안 아주 천천히 책을 읽었다. 특별히 그렇게 해야만 하는 어떤 이유가 존재했던 건 아니다. 어쩌다 보니 그만큼의 시간이 걸렸을 뿐이다. 하루키도 어쩌면 1986년 가을부터 1989년 가을까지, 3년 이라는 긴 시간 동안 작정하고 로마와 그리스 등을 여행한 건 아니었지 싶다. 이 책이 다른 여행기와 확연하게 다른 점도 그런 것이다. 여행의 기간도 기간이려니와 작가는 자신이 여행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 게 아니라 그저 장소만 옮겨 간 채로 익숙한 생활을 유지하려 노력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때의 생활을 일기를 쓰듯 기록한 책이 <먼 북소리>이다. 말하자면 작가는 흔하디 흔한 여행자가 아닌 '생활여행자'였던 셈이다. 작가의 본업인 글을 쓰면서.

 

"아침이 찾아오기 전의 이 짧은 시각에 나는 이처럼 죽음의 기운이 고조됨을 느낀다. 죽음의 기운이 먼 파도 소리처럼 내 몸을 떨게 하는 것이다. 장편소설을 쓰고 있으면 종종 이런 일이 생긴다. 나는 소설을 쓰는 행위를 통해서 조금씩 생의 깊숙한 곳을 향해 내려간다. 작은 사다리를 타고 나는 한 걸음 또 한 걸음 내려간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생의 중심으로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나는 분명하게 느끼게 된다. 그 바로 앞의 어둠 속에서 죽음도 또한 동시에 심하게 고조되고 있다는 것을." (p.221)

 

작가는 이 시기에 가끔 번역을 하고, 장편 소설 <노르웨이의 숲>과 <댄스 댄스 댄스>를 썼다. 지금은 상상할 수 없는 먼 과거가 되어버렸지만 삼십대 후반의 작가는 타국의 낯선 곳에 터를 잡고 이방인의 삶을 살았던 셈이다. 그이 아내와 함께 말이다.

 

"여성은 화를 내고 싶은 일이 있어서 화를 내는 것이 아니라 화내고 싶으니까 화를 내는 것이다. 그래서 화내고 싶을 때 제대로 화를 내게 하지 않으면, 나중에 더 골치 아픈 일이 생기게 된다." (p.79)

 

<상실의 시대>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노르웨이의 숲>은 하루키에게 큰 전환점을 맞게 한 소설이었다. 그가 작가로 전업한 이후 경제적 어려움을 크게 겪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이 작품을 계기로 그는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음은 물론 베스트 셀러 작가로서 탄탄한 입지를 굳히게 된다. 그러나 그것이 꼭 성공이라고 말할 수 없는 측면도 있다. 인터뷰를 기피하고 대중에게 노출되는 것을 지극히 꺼리는 작가의 성향으로 볼 때, 작가로서 유명세를 탄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매우 이상한 일이지만 소설이 10만 부 팔리고 잇을 때는 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호감을 받으며 지지를 얻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상실의 시대>가 백 몇 십만 부나 팔리고 나자, 나는 굉장히 고독했다. 그리고 내가 많은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고 있는 것처럼 느꼈다. 왜 그랬을까? 표면적으로는 모든 일이 잘되어 가는 것처럼 보였지만 실제로는 그때가 내게는 정신적으로 가장 힘든 시기였다." (p.357)

 

내가 이 책을 다시 읽어야겠다, 생각했던 건 그리스의 디폴트 위기가 부각된 시점이었다. 하루키는 자신의 책 <먼 북소리>에서 이탈리아의 국민과는 달리 조르바를 닮은 그리스인들은 대체로 진지한 면이 있다고 썼었던 게 문득 생각났기 때문이다. 가벼운 여행기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책을 즐겨 읽는 이유는 아마 그런 게 아닐까 싶다. 책의 절반 이상을 화려한 사진으로 도배를 하거나, 현지 가이드처럼 유명 관광지 위주로 설명을 한다거나, 내일이면 지구가 멸망하기라도 할 것처럼 애수에 젖어 의미도 통하지 않는 말들을 늘어놓는 대다수 여행기와는 확연히 다르기 때문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처럼 가벼운 일상들이 책의 전체를 관통하고 있다. 그러다 언뜻언뜻 여행자만이 감지할 수 있는 특별한 시선이 나타나곤 한다.

 

"당신들은 그리스는 관광자원이 풍부하니까 관광에 중점을 두어 나라를 발전시키면 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국가를 그런 식으로 만들면 매우 위험합니다. 국가재정이 흔들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보다 생산을 중심으로 하는 안정된 국가를 만들고 싶습니다." (p.395)

 

하루가 멀다 하고 봇물처럼 쏟아지는 여행 에세이 중에서 진품을 찾아내기란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다. 성능 좋은 디지털카메라 하나 들고 한 두어 달 여행하면서 블로그에 간간이 올렸던 글로 사람들의 시선을 웬만큼 끌었다 싶으면 귀국하자마자 책으로 출간하는 작금의 현실이 원망스럽다. 전업 작가들의 입지가 무색해지는 대목이다.

 

하루키 에세이의 대부분이 그렇지만 그의 글을 읽는 독자는 자신의 삶으로부터 일정한 거리를 유지할 수 있게 된다. 삶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던 자신의 위치를 문득 깨닫게 된다고나 할까. 아무튼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책을 읽는 짧은 순간만큼이라도 움켜쥐었던 삶을 잠시 내려 놓고 두 손을 가벼이 놀리다 보면 나도 모르게 '사는 게 뭐 별건가' 하는 생각이 절로 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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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돼지 2015-08-21 21:43   좋아요 0 | URL
저도 이 책 두세 번 읽은 거 같은데요
꼼쥐님 리뷰를 보니 다시 또 한 번 읽어보고 싶군요^^

꼼쥐 2015-08-22 14:44   좋아요 0 | URL
가끔 읽어보면 맘에 드는 문구가 점점 늘어나게 됩니다. 때로는 그 문구들이 바뀌기도 하구요. 참, 재밌는 책입니다. 생각할 꺼리도 많구요.
 

'적당함'이라는 말 속에는 '3할의 게으름'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아시는지요? 저는 '최선을 다하자.'는 말을 무척이나 싫어하는데요, 그 속에는 비정한 욕심이 숨어 있기 때문입니다. 목표달성을 위해서는 사람의 건강이나 안녕이 그닥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의미. 그런 말 속에는 타인에 대한 배려가 끼어들 수 없습니다. 오직 목표만이 중요할 뿐이죠.

 

어제 JTBC 뉴스에서 보도한 어느 노동자의 억울한 죽음을 보고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습니다. '어쩌면 저럴 수가 있나' 손이 벌벌 떨려왔습니다. 시간에 쫓기어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물건을 적재한 채 지게차를 운전할 수밖에 없었고, 그 지게차에 사람이 치여 피를 흘리고 있는데 출동한 119 구급차를 돌려 보내다니요? 아무리 돈이 좋다지만 인간의 탈을 쓰고 어떻게 그런 짓을 천연덕스럽게 할 수 있었을까요? 그 사람은 그렇게 방치되다가 결국 목숨을 잃었다지요?

 

참으로 어이없는 세상입니다. 경쟁만 부추기는 우리 사회의 잘못된 관행은 도대체 얼마나 많은 목숨을 허무하게 버려야 고쳐질런지요. 자라나는 아이들에게도 다르지 않습니다. 최선을 다하라구요? 그러다 죽습니다. 사람의 몸은 적어도 3할의 힘을 남겨 놓아야 합니다. 그래야 탈이 없습니다. 온 몸의 힘을 다 소모하면 외부의 작은 공격에도 버텨낼 재간이 없습니다. 잔병치레가 떠날 날이 없는 아이를 볼라치면 그 부모의 얼굴부터 보게 됩니다. '적당히 해라'라는 말 속에는 '3할의 게으름'이 있습니다. 그것은 타인을 향한 배려, 인간에 대한 사랑의 표현일 뿐 우리가 지양해야 할 '게으름'이 결코 아님을 이번 기회를 통하여 모든 사람들이 알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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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킹 플라이트 - 전쟁고아에서 스타발레리나로 날아오르다!
미켈라 드프린스.일레인 드프린스 지음, 장미란 옮김 / 김영사on / 2015년 7월
평점 :
절판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은 불행이 내 의지와는 상관없는 곳으로 무참히 끌고 갈 때가 있다. 나는 그런 일들이 생각날 때마다 그게 아무리 어쩔 수 없는 불가항력의 일이었다고 할지라도 한번쯤은 '가기 싫어!', 버팅겨 볼 수는 없었을까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혹은 가슴에 얼굴을 묻고 한번쯤 같이 울어줄 사람 한 명쯤 곁에 있었으면 어땠을까 싶기도 하고 말이다. 그랬더라면 내 불행의 속도는 일 킬로미터쯤 더 느려지지 않았으려나. 그것이 비록 앵도라진 운명에 하릴없이 돌팔매질을 하는 것일지언정 마음 속 응어리가 영영 풀리지 않는 그런 시기가 있게 마련이다. 우리네 인생은 의외로 긴 것이어서 그런 시기는 누구에게나 온다.

 

길고 긴 불행의 터널을 벗어나 오랫동안 가슴에 품었던 꿈을 마침내 이룬 사람들을 종종 보거나 듣게 된다. 마치 한 편의 드라마와 같은 그들의 이야기는 뭇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고 짜릿한 감동을 전해주기도 하지만 다른 무엇보다도 가치가 있는 이유는 그들의 이야기가 같은 꿈을 꾸고 있는 사람들의 용기를 한껏 북돋운다는 데 있다. 그들의 이야기는 좌절하거나 포기하지 말라는 무언의 격려가 되기도 하고, 까마득히 높은 곳에 위치하여 불가능하게만 보였던 꿈의 높이를 10미터쯤 낮추어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꿈을 꾸는 사람들에게 가능성은 그들이 사는 이유이기 때문이다.

 

미켈라 드프린스의 인생 역정을 담은 <테이킹 플라이트> 또한 그런 책이다. 아프리카의 작은 나라 시에라리온 출신의 그녀가 사랑하는 부모를 잃고 미국의 한 가정에 입양되어 자신의 꿈을 이루기까지의 전 과정을 담은 이 책은 생각만으로도 가슴 한켠이 아려오는 책이다. 지울 수 없는 아픈 기억을 안고 사는 사람이 어디 한둘일까마는 시에라리온의 내전에서 살아 남은 사람들의 체험담에는 뭔가 특별한 아픔이 있다. 이스마엘 베아가 쓴 <집으로 가는 길>도 그랬다. 그 한 마디 한 마디의 말이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이스마엘 베아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었다. "요즈음 나는 세 개의 세계에서 산다. 나의 꿈, 새로운 삶과 경험, 그리고 그 삶이 과거로부터 불러오는 기억들."

 

"시에라리온을 탈출하면서 수백 구의 시체를 보았다. 데빌들은 날이 넓적하고 긴 칼 마체테를 휘두르고 다녔지만 정작 죽은 이들을 보면 심지어 어린아이들조차 머리에 총을 맞은 상태였다. 시신들은 공포에 질려 눈과 입을 벌린 채 땅바닥에 널부러져 있었다. 썩은 내가 나는 정도와 시체 위를 기어다니는 벌레들을 보면, 죽은 지 얼마나 되었는지 알 수 있었다." (p.74)

 

반군들에게 부모를 잃고 큰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강제로 고아원에 보내진 흑인 소녀는 어느 잡지책에 실린 발레리나의 사진에 홀딱 반하여 언젠가 자신도 토슈즈를 신고 무대 위를 날아오르는 꿈을 꾼다. 그러나 백반증으로 온 몸이 얼룩덜룩한 흑인 소녀를 좋아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고아를 입양하고 싶어 했던 미국의 양부모들조차도. 고아원 식구들과 함께 시에라리온을 간신히 탈출하여 기니에서 다시 가나로 간다. 가나에는 미국의 양부모들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나에서 그녀는 고아원에서 가장 친하게 지냈던 친구 미아와 함께 같은 집으로 입양된다. 기적과 같은 일이었다. 양부모와 함께 미국에 도착할 때까지의 그 기나긴 여정은 아이들에게는 고되고 힘들었다. 그러나 그 고된 여정이 미아와 미켈라를 친자매로 만들어준 계기가 되었다.

 

내전으로 고아가 된 마빈틴 방구라(지금은 미켈라 드프린스)의 삶이 미국에서 무사히 뿌리를 내림으로써 모든 게 술술 풀려나갔던 것은 아니었다. 양부모의 아들이었던 테디 오빠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그로 인한 깊은 슬픔, 그 슬픔을 잊기 위한 이사, 발레의 세계에 존재하는 뿌리 깊은 인종 차별 등 그녀가 헤쳐나가야 할 고난은 많았었다. 네살배기 전쟁 고아가 미국이라는 낯선 나라에 정착하여 그 모든 역경을 극복하고 세계적인 발레리나로 성장할 수 있었던 데에는 가족의 사랑이 무엇보다 큰 역할을 했다.

 

"필라델피아에 가까워질 무렵 나는 발레리나가 되기 위해 내가 어떤 희생을 감내하는지 생각했다. 어린아이였을 때는 발레가 너무 좋아서 발레수업에 빠지지 않으려고 생일파티 초대도 거절했다. 수영도 포기하고 공립학교도 포기했다. 그리고 지금은 가족과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을 포기하고 있었다." (p.228)

 

그녀를 주인공으로 삼아 촬영한 다큐멘터리 영화 <퍼스트 포지션>이 2011년에 개봉된 후 그녀는 이제 유명인이 되었다고 했다. 방송 출연과 인터뷰 요청, 표지모델 섭외 등 유명세를 치르는 동안 그녀는 많은 것을 배웠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이 탈출했던 아프리카를 두려움 속에 다시 방문한다. 비록 그녀의 모국이 아닌 남아공이었고, 초청 발레리나의 자격이었지만 말이다.

 

"삶은 발레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님을 잊지 말라는 뜻인지 두 가지 아주 특별한 초청이 들어왔다. 전쟁의 고통을 겪은 어린이들을 위한 대변인으로서 유엔 자원봉사자로 초청 받았고, 운 좋게도 링컨센터 코흐 극장에서 열리는 2013년 세계 여성회의에 초대받았다. 한 인터뷰를 촬영했는데, 거기서 전쟁 때문에 고통받은 어린이로서의 경험담을 이야기했다." (p.268)

 

그녀의 양부모님은 그녀와 자매들을 왜 입양했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우리는 축복을 받았고, 축복과 함께 책임이 온 것뿐'이라고. 맞는 말이다. 우리네 인생에는 언제나 축복이 오면 책임도 함께 따르는 법이다. 간혹 그 책임을 까맣게 잊어버리는 사람도 있지만 당당하게 책임을 떠안는 사람도 우리 주변에는 많다. 이 책 <테이킹 플라이트>도 그렇게 나온 책이다. 고통과 위험 속에서 희망 하나로 살았던 자신의 경험을 이제는 그들에게 전해줄 때가 된 것이다. 그 희망으로 다른 누군가가 역경을 극복하고 그 경험은 다시 살아 있는 희망으로 또 다른 누군가에게 전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끊이지 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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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이따금 '머리 샤워'를 한다. '머리 샤워'가 뭐냐고? 이걸 어쩐다. 가르쳐주고 싶은 생각이 없다. 부끄러워서 말이다. 언젠가 나는 블로그에 올린 포스팅에 '책잠'이라는 말을 쓴 적이 있다. 책을 읽다가 나도 모르게 까무룩 잠이 드는 걸 길게 쓰고 싶지 않아서 '책잠'이라고 짧게 명명했던 것인데 그때는 여러 사람들로부터 예쁜 말이라고 칭찬 아닌 칭찬을 들었었다. 그런데 이 말은 왠지 그게 뭐냐고 타박을 들을 것만 같다.

 

'머리 샤워'라니... 머리감기도 아니고. 그렇다. 머리감기는 분명 아니다. 학창시절의 나는 문학서적보다는 철학책에 반쯤 미쳐있었지만 요즘은 그와 정반대로 되어 이따금 철학이나 사상서가 그리울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분위기 쇄신 차원에서 마음에 드는 철학서를 읽곤 하는데 그럴라치면 왠지 모르게 머리가 맑아지고 뜨거운 여름철에 찬물을 들이켠 것처럼 뒤죽박죽이던 머릿속이 깨끗하게 정리되는 듯한 느낌을 받곤 한다. 나는 아직까지 이것을 명명할 만한 적당한 말을 찾지 못한 상태이고 어쩔 수 없이 '머리 샤워'라는 말로 대체하여 쓰고 있는 것이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대체로 그러하듯 쓸데없는 일에 목숨을 거는 경우가 있다. 나야 열혈독서가의 발치에도 이르지 못하는 수준이지만 못된 것만 먼저 배운 까닭인지 이따금 엉뚱한 일에 시간을 쓰곤 한다. 하등의 직업 연관성도 없으면서 마땅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아 괜한 시간을 소비한다거나 책을 읽다가도 이 문장은 이렇게 고쳤으면 어땠을까, 한참을 궁리하기도 한다. 병명도 없는 병을 앓고 있는 셈이다. 그것도 중증으로. 갑작스러운 임시 공휴일 지정으로 마음만 바쁜 오후가 그렇게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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