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인대학교 낯가림학과 졸업하기 - 낯가림 심한 개그맨의 우왕좌왕 사회 적응기
와카바야시 마사야스 지음, 전경아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15년 8월
평점 :
절판


(주의 : 아랫글에는 미풍양속을 해칠 수 있는 비속어가 섞여 있으니 아이들의 교육에 저해된다고 판단하시는 분은 읽지 말 것을 권함.)

 

다른 사람의 말을 설렁설렁 듣다가 혼쭐이 났던 적이 몇 번 있다. 사실 말이 났으니 말이지만 학교 수업을 듣는 것도 아닌데 이따금 멍 때리거나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있는 거지 그걸 가지고 꼬치꼬치 따지는 게 더 쪼잔하지 않나, 하는 게 내 생각이고, 그렇게 집중이 안 되면 '내가 지금 집중할 수 없으니 나중에 얘기하자'고 할 것이지 왜 그런 불성실한 태도를 보이느냐, 는 게 아내 생각이다. 흠, 보통 어려운 문제가 아닌 듯싶다. 내 변명을 조금 덧붙이자면 이렇다. 나는 어떤 사람이 말하고 싶어 할 때 듣는 척이라도 하는 게 예의인 것 같아서 아무리 듣기 싫은 말이라 할지라도 꾸역꾸역 들어주는 편이다. 양념 삼아 이따금 멍 때리거나 딴생각을 하기도 하지만 말이다.

 

"요 앞에 함정이 있어"라고 주의를 줘도 "그건 당신이 가는 길이니까 그렇지"라고 귀담아 듣지 않다가 함정에 빠지고 나서야 "아, 그 사람이 말한 대로잖아!" 하고 깨닫는다. 아집이 강한 것이다. 천재라면 아집이 강해도 자신의 스타일을 고수해서 결과를 낸다. 하지만 내 경우는 아집에서 출발해 결국 통념으로 귀결한다. 그리고 전부 내 잘못이야, 라고 반성한다. 그런 일이 내 인생에는 숱하게 많다. (p.168)

 

<사회인대학교 낯가림학과 졸업하기>를 읽다 보면 재미있는 장면이 많이 나온다. '오랜 무명 생활과 강한 자의식으로 세상을 삐딱하게 바라보던' 저자가 어느 날 갑자기 유명한 개그맨이 되어 세상과 만났을 때의 문화적 충격은 남달랐을 것이다. 2009년과 2010년에 방송 출연 횟수 1위를 기록하였고 그 후 저자는 월간 잡지 <다빈치>로부터 칼럼 연재 청탁을 받았다고 한다. 이 책은 저자가 '사회인 2학년'이라는 제목으로 그때 썼던 칼럼을 책으로 엮은 것이다.

 

흔히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한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다르다. 준비가 되지 않은 사람이 그 자리에 오르는 법은 없다. 아니, 어떤 행운으로 인해 그 자리에 오를 수는 있어도 그 자리를 오랫동안 지켜내기는 어렵다. 우리 주변에서도 벼락출세를 한 사람들을 종종 보게 된다. 그러나 미처 준비가 되지 못한 사람은 언제라고 말할 수도 없는 짧은 순간에 대중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지고 만다. 예컨대 도박이나 음주운전, 성추문, 폭력이나 막말 등 그 이유는 제각각이지만 결국 그는 그 자리를 유지할 준비가 되지 않았던 셈이다. 본인도 자신의 능력에는 버거운 그 자리가 심히 부담스러웠을 것이고, 그런 부담이 행동으로 튀어나왔을 뿐이다.

 

"고등학생과 대학생 시절에는 수업을 빼먹고 공원에 앉아 있곤 했다. 그냥 앉아 있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면서, 벤치에.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기란 의외로 어렵구나. 좋아, 더욱 더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아보자! 아니,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다는 걸 생각해버렸잖아! 바보, 생각하지 말자니까!'이런 생각을 하다 보면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p.58)

 

나도 학창시절에는 저자처럼 낯가림이 심한 편이었다. 발표할 사람 손들어 보라는 선생님 말씀에 앞장서서 따라본 적도 없었고, 누군가 등 떠밀어 발표를 시킬까 봐 전전긍긍하기 일쑤였다. 그러다 선생님 명령으로 어쩔 수 없이 연단에 나설 때는 얼굴이 빨개지는 것은 물론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고 어찌나 심장이 두근대던지 혹시 이러다가 내 심장이 몸 밖으로 튀어나가는 건 아닐까, 걱정될 정도였다. 그러나 저자와 내가 하나 다른 게 있다면 나는 어려서부터 눈치가 빨랐다는 것이다. 형제가 여럿인 집에서 자란 탓일 게다. 이 사람한테 까이고, 저 사람한테 욕을 먹다 보면 자연스럽게 눈치만 늘어난다. 그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지금도 알 수 없지만 아무튼 사회에 나가면 꽤나 유용하게 쓰이는 건 확실하다.

 

눈치가 없는 저자는 딱히 취미라고 말할 게 없어서 애먹고, 술자리에서는 재미없는 인간이라고 타박이나 듣고, 너무 솔직하게 감상을 말했다가 지적이나 당하고, 평화롭고 한가한 시간에는 부정적인 생각만 하게 되고 도무지 대책이 없는 인간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사람한테 차이고 저 사람한테 핀잔을 들으면서 저자는 이제 '사회인대학교'의 졸업논문을 쓸 위치에 올랐다. 누구나 다 그렇지 않은가. 이 책을 읽는 독자는 저자의 경험에 실없이 웃다가도 그 일이 마치 내 지난 날의 모습과 닮은 듯하여 짠해지기도 할 것이다.

 

" '나를 바꾸는 책'을 읽은 후에는 내용을 의식하고 있어서 3일 정도는 달라지지만, 일상에 젖어 지내면 곧 원래의 내 모습을 되찾는다. 성격이란 형상기억합금과 같아서 타고난 것은 바뀌지 않는다. 그것을 깨닫게 된 점이 '나를 바꾸는 책'을 읽은 수확이었다." (p.81)

 

사회에 진출하면 저자뿐만 아니라 누구나 달라진 환경에 적응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미리부터 조금씩 준비하거나 선배들로부터 몇 가지 요령을 배운다 한들 어렵기는 마찬가지이다. 그러고 보면 세월만큼 좋은 선생님도 없다. 다만, 어렵고 힘들다 하여 징징거리거나 좌절하지만 않는다면 저자처럼 누구나 사회인대학교의 졸업논문을 쓰는 날이 올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기간을 어떻게 견디느냐의 문제이다. 내 경험으로는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게 많은 도움이 되었다. 그 중 하나만 택하라면 나는 '글쓰기'를 택하고 싶다. 나를 돌아본다는 것, 객관적으로 나를 살피기 위한 방법으로 독서는 부족한 면이 있다. 저자도 그랬을 듯싶다. 블로그에 글을 쓰거나 칼럼을 연재하면서 자신을 차분히 살펴보고 그 요령을 하나하나 터득해갔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세상에 공짜는 없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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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lia 2015-09-10 19:31   좋아요 1 | URL
아무리 읽어봐도 “미풍양속을 해칠 수 있는 비속어”는
섞여 있지 않은 것 같은데요~??? ^^
제가 너무 ‘센스’가 떨어지는 건가요?
이거이거 댓글 달면서 ‘눈치’ 없는 사람으로 들통나는 것 같기도 하고~ 여엉~ㅋ

꼼쥐 2015-09-11 12:09   좋아요 0 | URL
`멍 때리다`나 `까이다`라는 단어는 사실 비속어이죠. 요즘 아이들도 많이 쓰는 단어이긴 하지만 바람직한 단어는 아닌 것 같아요. 물론 `까이다`라는 단어는 표준어로 쓰이는 경우도 있죠. 다른 뜻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ㅎㅎ
쓰고 보니 답변 치고는 제가 너무 진지했던 것 같아요. 다 웃자고 하는 일인데...
 
나는 떠났다 그리고 자유를 배웠다 - 짜릿한 자유를 찾아 떠난 여성 저널리스트의 한 달에 한 도시 살기 프로젝트!
마이케 빈네무트 지음, 배명자 옮김 / 북라이프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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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고은 시인의 시 한 편으로 시작할까 합니다. 누구나 다 아실 만한 시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누구나 다 공감할 만한 시일 테구요. 그런 까닭에 책의 제목으로도 몇 번 인용되었던 듯합니다.

그 꽃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보지 못 한

그 꽃

 

저는 고은 시인의 시를 좋아하기도 하려니와 어떤 시는 하루에도 몇 번씩 주문처럼 외기도 합니다. 종교 경전도 아닌데 굳이 그럴 것까지야 있느냐구요? 그런데 이상하지요? 단순히 시 한 구절 외웠을 뿐인데 저는 이상하게도 두근대던 마음이 금세 진정되고 차분해지는 걸 보면 시인은 단순히 시만 쓴 게 아니라 시 속에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 마약이라도 한 덩어리 집어 넣은 것만 같습니다. 시인은 그렇게 독자들의 영혼에 평생 벗어날 수 없는 견고한 울타리를 친 셈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것도 일종의 중독이라면 중독인지도 모르겠구요.

 

암튼 제가 이 시를 인용한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마이케 빈네무트의 신간 <나는 떠났다 그리고 자유를 배웠다>를 읽다가 나도 모르게 고은 시인의 시를 떠올렸기 때문입니다. 한국에서도 삼 개월여 살았던 적이 있다는데 저는 사실 작가에 대해 아는 게 없습니다. 프리랜서 기자이자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다는 작가는 어느 날 독일의 유명 퀴즈 쇼 '누가 백만장자가 될 것인가?'에 도전하여 50만 유로의 상금을 거머쥐게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돈으로 환전하면 약 6억 7천만 원쯤 되는군요. 큰 돈이죠. 그녀는 한 달에 한 도시씩 총 열두 도시를 여행하겠다고 답했던 인터뷰를 실천에 옮기기로 작정합니다. 그녀는 그녀 자신에게 꿈같은 여행을 허락한 셈입니다.

 

"여행의 묘미는 우연이 아닐까 싶어. 아니, 우연이라는 말로는 부족해. 뭐랄까, 세계가 말을 거는 느낌? 세계가 윙크를 보내고 나만 해독할 수 있는 암호로 쪽지를 보내는 그런 기분. 이제 겨우 두 달 째인데 벌써 믿기지 않을 만큼 많은 우연과 일치를 경험했어. 이 기분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나도 모르겠다. 이 기분을 꼭 묘사해야 한다면 아쉬우나마 '세계의 품에 안긴 기분'이라고 말할 수 잇을 거야. 먼 타향에서 아주 작지만 고향을 느끼게 해주는 친밀함, 익숙한 패턴, 관련성을 찾는 것, 그것이 바로 여행이란 생각이 들어." (p.66)

 

눈치채셨나요? 그렇습니다. 작가는 그녀가 여행한 각각의 도시에서 편지를 보냅니다. 그녀의 지인들에게 말이지요. 여행의 느낌은 그때 그때마다 다른 것이기에 여행지에서 보낸 그녀의 편지는 가장 솔직한 여행담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므로 이 책은 작가가 아는 열두 사람에게 열두 도시에서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편지의 수신자는 오랜 친구들, 새로 사귄 친구들, 전 남자 친구, 부모님 등입니다. 2011년 1월 1일에 도착한 호주 시드니를 시작으로 1년 동안의 장대한 그녀만의 프로젝트가 실행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어쩐다? 그때 처음으로 제가 여행하고 있다는 걸 실감했죠. 정말 멀리 떠나왔구나 싶었어요. 제가 어디에 있는지 저도 모르고 다른 사람도 몰라요. 저는 어느 자연 속에 있는 한 인간이었고 저 외엔 아무것도 없었죠. 이것이 명확해졌을 때, 전 행복에 도취되었어요. 아무리 설명해도 두 분은 이해하기 힘들 테지만요. 그것은 완전한 자유와 가벼움이었어요. 겁도 나지 않았고 패닉도 없었고 오로지 존재의 기쁨만이 가득했죠." (p.104)

 

시드니, 부에노스아이레스, 뭄바이, 상하이, 런던, 바르셀로나, 텔아비브, 아디스아바바, 아바나 등 마음속에 떠오르는 도시들을 주저 없이 포스트잇에 적은 후 그녀는 한 가지 원칙을 정합니다. 매월 1일 새로운 도시에 도착해 마지막 날에 다음 도시로 떠나는 것. 그녀는 그러나 그녀는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지 이틀만에 영원히 그곳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녀가 게획했던 여행이 그렇게 끝날 수도 있었지요. 결국 그녀는 자신의 원칙에 따라 그곳을 떠나게 되지만 말입니다.

 

"행복한 삶은 각자 정의하기 나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이제 없어요. 이혼이나 해고의 형태로 인생 설계가 갑자기 무너져요. 두 분 세대에는 이것이 재앙에 가까운 특이한 사례였겠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아무도 그렇게 여기지 않아요. 오히려 평범한 일이고, 이동성과 유연성이 미덕으로 통해요. 이런 시대에서 살려면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야 해요. 그건 거의 생존의 조건이나 마찬가지예요. 모든 것이 흔들릴 땐 스스로 든든한 기둥이 되어야 하니까요. 여행은 이런 존재적 물음에 답하는 데 큰 도움이 돼요. 밖으로 내딛는 발걸음 하나하나가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지, 어떤 가능성들이 있는지, 삶의 다른 가능성이 남아 있는지를 알려줘요." (p.115)

 

우리가 작가처럼 훌쩍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그런 게 아닐까 싶습니다. 자신이 비운 1년이라는 시간 동안 자신의 삶은 자신도 알 수 없는 어떤 곳으로 거처를 옮기는 게 아닐까 하는 걱정, 자신이 여행에서 다시 돌아왔을 때 떠나버린 자신의 삶 때문에 절망하지나 않을까 하는 고민으로 인하여 우리는 삶에서 받는 스트레스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모른 채 꾸역꾸역 살아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작가는 그녀가 사는 함부르크로 다시 돌아왔을 때 그녀의 책들이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고 적고 있습니다. "삶이 너를 기다려주었어. 이제 네게 멈췄던 그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면 돼."

 

제가 이 글을 쓰면서 고은 시인의 시를 인용했던 까닭을 밝힐 때가 온 것 같군요. 작가도 어느 여행지에선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습니다. '어떤 것의 가치를 제대로 알아보려면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다고 말입니다. 태어나서 50년 이상을 살아온 작가의 눈에도 어쩌면 그 전에는 보지 못했던 것들이 하나 둘 눈에 띄는 게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인생 자체가 하나의 산을 넘는 것이라면 이제 작가는 그 산을 내려오고 있는 것이겠지요. 올라갈 때 보지 못했던 그 꽃을 작가는 내려올 때 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은 24절기 중 열다섯 번째 절기인 백로라는군요. 풀이나 물체에 이슬이 맺히는 데서 유래했다지요? 그래서인지 아침운동을 나갔던 새벽 시간에 약한 바람도 불고 날씨는 제법 서늘했습니다. 가을 하늘이 유난히 싱그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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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실업이 심각한 사회 문제로 부각된 것은 한참이나 지난 일입니다만 풀릴 기미가 조금도 없는 걸 보면 저절로 한숨이 나오게 됩니다. 조금씩 나아지는 기미가 보이기는커녕 갈수록 악화되는 경제 여건도 그렇고 대책이랍시고 내놓는 정부의 정책도 그닥 도움이 될 만한 것은 없는 듯 보입니다. 제가 생각해도 답답한 노릇입니다. 저도 그럴진대 장성한 자녀를 둔 부모라면 그 심정이 오죽하겠습니까.

 

요즘 젊은이들의 취업 경쟁은 그야말로 전쟁에 가깝습니다. 취업 준비생이나 신입사원들의 얘기를 들어보면 어찌 사나 싶은 게 측은한 마음이 절로 들게 됩니다. 게다가 취준생들이 그동안 힘들여 쌓았던 스펙들도 하루 아침에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리는 회사들이 늘어나는 바람에 젊은이들의 고민은 더 깊어진 듯합니다. '脫스펙'을 선언하는 대부분의 회사들은 신입사원 채용에 있어 스펙보다 더 무시무시한 것을 꺼내들었다지요.

 

직무 경험과 관련한 에세이를 요구하는 회사가 늘어났는가 하면 현대자동차의 입사 희망자는 지원 이유와 역량 소개 2000∼3000자, 인생의 가치관과 구체적 입사동기를 각 1000자씩 써야 하며, 공기업인 한국지역난방공사는 상반기 인턴공모에서 26개 항목 8200자 분량을 요구했다는데 이 정도면 단편소설의 절반 분량을 요구하는 수준입니다. 자소서 난이도가 높은 은행의 경우는 우리의 상상을 뛰어넘습니다. 오죽하면 은행 이름과 신춘문예를 결합해 ‘신한문예’ ‘우리문예’ 식으로 호칭되겠습니까. 인사담당자들도 취준생들이 제출한 방대한 분량의 자소서를 면밀히 검토하여 엄정한 점수를 매기려면 이제부터라도 문학적 소양을 길러 작가로 등단해야 하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자소서 비중이 늘어난 것은 지원자의 직무수행 능력을 파악하는 동시에 허수를 솎아내기 위해서라고 하는데, “당신이 생각하는 ‘나’와 타인이 생각하는 ‘나’에 대해 비교해 기술하시오”라든지 “당사 브랜드 중 한 가지를 선택해 인지도를 제고시킬 참신한 아이디어와 그 실현방안을 제시하시오”처럼 추상적이거나 전문적인 항목을 만났을 때 취준생들의 심정은 과연 어땠을까요. 취업 조건에서 글쓰기 역량이 차지하는 비중은 갈수록 늘어날 것이며 그러한 추세는 유행처럼 번질 것입니다. 디지털 기기에 익숙할 뿐 아날로그에 취약한 요즘 젊은이들에게 그런 현상은 형벌과 다름없어 보입니다.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는 젊은이들에게 너무 가혹한 것을 요구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스갯소리겠지만 노조를 비판한 새누리당 대표의 말에가수 이승환 씨는 “친일파 청산해서 재산 환수하고 사자방(4대강사업, 자원외교, 방산사업)에 엄한 돈 쓰지 않았으면 소득 5만 불 됐을 것”이라고 글을 남겼다지요. 하나의 현실에 대해 그들이 갖는 생각과 처방은 너무도 다양한 듯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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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한 흥분 - 98일간의 기록 마이 리틀 트래블 스토리
유지혜 지음 / 북노마드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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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품절


'여행지에 와서도 똑같이 할 거면 그냥 집에 있을 것이지 뭐하러 왔어?' 타박을 하는 이가 있다. 그러나 그건 몰라서 하는 얘기다. 내게 있어서 가장 좋은 여행이란 여행지에서도 집에 있을 때와 별반 달라진 것 없이 편안히 지내다가 아무일 없었던 듯 생업에 복귀하는 것이다. 장소와 시간이 바뀐 낯선 곳에서 반복되는 일상을 조금의 흐트러짐 없이 즐겁게 할 수만 있다면 그것이 바로 최상의 여행이라는 얘기다. 말하자면 그렇다는 거다. 예컨대 아침에 일어나 세수를 하고, 밥을 먹고, 신문을 보거나 현지어로 방영되어 잘 알아 들을 수 없는 TV를 잠시 보는 등 여행을 왔다는 강박에 사로잡히지 않고 느긋하게 지내고자 하는 노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말이다.

 

내가 이런 생각을 갖게 된 데는 여행에서 얻은 나만의 경험 탓이기도 하지만 여행 후에 겪게 되는 후유증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그럴 필요가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새로운 곳에 도착했다는 생각에 무리한 일정을 소화하다 보면 여행 후에 남게 되는 것이라고는 정리하기조차 힘든 과도한 사진들과 극심한 피로뿐이다. 그것은 차라리 며칠 간의 여행이 아닌 며칠 간의 유배를 다녀온 듯한 느낌이 들게 한다. 중요한 것은 내가 여행지에서 어떤 것을 보았느냐가 아니라 그 여행지에서 내가 느꼈던 여유와 만족감이다.

 

"여행에서는 뭐가 그리 피곤한지 꼭 낮잠이 필요하다. 특히 파리의 햇살은 나를 달콤한 무기력함 속으로 몇 번이고 빠뜨렸다. 꾸벅꾸벅 졸다 머리를 박고 마는 닭처럼 말이다. 미술관, 오디오를 듣는 섹션에서 헤드폰을 끼고 예술 영상을 클릭해보다가 잠이 들어 한 시간을 꼬박 졸았다. 서점에서 그토록 열을 내어 책을 보다가 정작 돈을 내고 올라온 전시관에서는 졸음만이 나를 반긴다. 침을 흘리며 졸고 있던 내 모습이 너무 웃겨서 혼자 킥킥대다가 끼니 걱정을 시작한다. 가끔은 유명한 작품보다 이런 게으름이 더 오래 기억에 남는다." (p.135)

 

유지혜의 여행기 <조용한 흥분>을 읽는 나의 손길은 유난히 가벼웠다. 이십대 초반의 젊은 아가씨의 생기발랄함이 내 손에 더해졌는지도 모른다. 스물세 살의 나이에 떠난 98일간의 유럽 여행기인 이 책은 한 달간의 첫번째 유럽 여행(1부 ‘첫 여행’)과 이후 다시 유럽으로 떠나 두 달여 동안 돈을 벌며 생활했던 두번째 유럽 생활(2부 ‘다시 여행’)을 담고 있다. 작가의 소개글에서 보면 2만여 팔로워를 보유한 인스타그램의 스타라는데 나는 정작 그녀를 알지 못한다.

 

나는 종종 이제 막 자신의 삶을 기획하거나 원하는 방향을 향해 방금 첫발을 뗀 사람들의 글을 읽을 필요가 있겠구나 생각하곤 한다. 요즘 들어 짧았던 내 청춘의 날들이 잘 기억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가 갑자기 뭉텅이로 나이를 먹게 되었다거나 어느 영화에서처럼 벼락이라도 맞은 후 남들이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갑자기 늙어버려서 그렇다는 게 아니다. 다만 어떤 향수어린 느낌 때문인지 아니면 더이상 그때의 일을 기억 속에서 재현하고 싶지 않은 탓인지 몇몇 특별한 사건을 제외하면 잘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삶에 몹시도 서툴렀고, 그럼에도 두려움 없이 나아갈 수 있었던 그 시절의 기분을 다시 한 번 느껴보고 싶다는 욕심은 어쩌면 내 또래의 사람들에게는 아주 흔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비록 책을 통하거나 이따금 있는 젊은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서 듣게되는 간접 경험에 불과하지만 말이다. 아무튼 책을 읽는 동안만큼이라도 그때의 기분을 오롯이 느껴보고 싶은 마음 간절하다.

 

여행기로 따진다면 이 책은 전혀 새로울 게 없다. 작가의 이력도 세상의 이목을 끌 만큼 특이한 게 없고 말이다. 게다가 해외여행이 보편화된 요즘, 스물세 살 여자애의 철없는 유럽 여행기는 얼마나 흔해빠진 일인가. 그러나 이 책은 조금 달랐다. 첫 여행에서 돌아온 지 멀마 지나지 않아 작가는 런던에서 생활하고 있는 지인의 전화 한 통을 받는다. 그리고 별다른 고민도 없이 런던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엄마에게 단 한 푼도 받지 않기로 스스로 약속하고, 내 힌으로 돈을 벌고 버텼다. 그렇게 두 달하고 한 주를 살았다. 호화로운 여행은 아니었지만 그곳에서 돈을 벌고 생활을 만들어가는 나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p.347)

 

책을 펼치면 목차와 그녀를 소개하는 몇 장의 사진에 이어 소설가 김연수의 말이 등장한다.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다면, 상처도 없겠지만 성장도 없다. 하지만 뭔가 하게 되면 나는 어떤 식으로든 성장한다. 심지어 시도했으나 무엇도 제대로 해내지 못했을 때조차도 성장한다.(김연수, 『소설가의 일』)” 휴대전화 메모장과 작은 몰스킨 수첩에 스스럼없이 써내려간 글들이 한 권의 책으로 엮일 수 있던 힘은 바로 그곳에 있는게 아닌가 싶다. 이 책은 스물셋 여자애의 철없는 여행기가 아니라 여행을 통한 그녀의 성장기이기 때문이다.

 

"여행이 허락한 튼튼한 마음으로 새해의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다. 이전의 삶이 틀린 것도, 지금의 삶이 옳은 것도 아니다. 나답게 살아가는 것, 조금씩 나다운 면모를 찾아가는 것, 잘못 들어선 길에서도 발자국을 꾸준히 찍는 것뿐이다. 나는 나를 숨쉬게 하는 순간을 찾아 집중하고 있다." (p.349)

 

프란세스크 미랄레스의 소설 <일요일의 카페>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이세상 최고의 장소는 바로 이곳입니다." 카페 간판에 네온사인으로 빛나던 문구이다. 여주인공 이리스는 이 문구에 끌려 카페를 찾게 된다. 책이라는 것도, 사람이라는 것도, 또는 어떤 장소라는 것도 나를 이끌었던 어떤 특별한 힘이 있게 마련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지금 이 순간의 내가 있는 이 자리는 왕의 권좌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리고 내 삶은 또 얼마나 소중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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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가는 대로 산다는 것 - 구겐하임 문학상 작가 앤 라모트의 행복론
앤 라모트 지음, 이은주 옮김 / 청림출판 / 2008년 11월
평점 :
절판


오늘처럼 바람이 불고 날씨가 궂어 야외활동은 도무지 엄두를 내기 어려운 날에는 뭔가 신나는 일이 없을까 혹은 이유도 없이 속이 출출하고 허하여 뭔가 맛있는 음식이 없을까 찾게 된다. 방금 밥을 먹고 돌아섰거나 더위에 지쳐 움직일 의욕도 없으면서 말이다. 더위는 마치 무겁고 거추장스러운 족쇄처럼 내 몸에 착 달라붙어 떨어질 줄 모르고 나는 이미 오래 전에 항복을 선언한 것으로도 모자라 '네가 하자는 대로 다 할게.' 충성서약까지 하기에 이른다. 이런 날씨에 사람들은 대개 마약이나 술에 취한 것처럼 날씨에 취하여 도통 정신을 차릴 수 없는 것이다. 지금이 몇 시인지, 나는 뭐가 먹고 싶은 것인지, 구체적으로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싶은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

 

이런 현상은 비단 오늘처럼 날씨가 궂은 날에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인생 전체의 비교적 긴 여정에서도 사춘기의 몇 년 동안, 혹은 젊은 날의 몇 년, 아니면 쉰을 넘긴 장년의 몇 년을 마치 술이나 마약에 취한 듯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흘려 보내는 경우가 있다. 그것에 대한 모든 책임을 그 당사자에게 떠넘기고 비난이나 멸시를 달게 받도록 강요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생각이 이따금 든다. 어쩔 수 없는 환경이, 또는 피할 수 없는 사회제도가 한 개인을 극한으로 몰아갔는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변명 같지만 내가 날씨에 취하여 멀쩡한 하루를 무의미하게 흘려 보낸 것처럼 말이다.

 

앤 라모트의 <마음 가는 대로 산다는 것>을 읽어본 사람들이라면 내가 말하고자 하는 정확한 의미를 조금쯤 이해할지도 모르겠다. 비록 나는 지금 두서도 없이 횡설수설 하고 있지만 말이다. 앤 라모트의 자서전과도 같은 이 책은 작가의 불운했던 과거를 가감없이 기록하고 있다. 그녀가 그렇게 성장할 수밖에 없었던 데는 부모의 영향이 컸다. 산을 좋아하고 조류에 조예가 깊었으며 박식하고 잘생긴 작가였던 그녀의 아버지는 아이들에게 더없이 자상했던 반면 지나칠 정도로 개방적이었다. 같이 마약을 하거나 포도주를 마시는 것도 다반사였고, 딸에 대한 친구들의 지나친 놀림도 그냥 받아 넘겼다. 단 종교에 관한 한은 무지하고 세련되지 못한 자들이나 신앙을 갖는 거라는 오만함을 보였다. 엄마는 피아노 솜씨가 뛰어났고 빈민촌 아이들을 위한 독서반을 운영하는 등 활동적이고 지적인 사람이었다. 다만 부부관계를 원만히 하기 위해 남편을 붙잡느라, 변호사가 되려고 법대 진학에 애쓰느라 자식들을 제대로 돌볼 틈이 없었다. 그렇게 달랐음에도 부부는 성적이 우수했던 앤이 B+가 하나라도 적힌 성적표를 내보이면 낙제라도 한듯 바라보는 것으로 딸을 기죽이는 공통점을 보였다.

 

"나는 내가 조금만 더 잘할 수 있다면 간절히 원하는 것들이 꼭 이루어질 것 같았다. 가족간의 결속감, 푸근한 마음의 평화, 우리집에는 별 문제가 없으며 아빠는 우리를 떠나지 않을 것이고 언젠가 나는 누군가에게 사랑받을 거란 믿음...... 마약이 도움을 주었다. 내가 괜찮은 인간이며 삶이 견딜 만하다는 기분, 그런 느낌을 갖게 해주는 데 마약 만한 것이 없었다." (p.26)

 

정서적 배고픔을 채우려는 끊임없는 시도에도 불구하고 사랑과 안정의 욕구를 가정에서 채우지 못한 어린 소녀가 바깥으로 나돌기 시작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사내아이들에게 벗은 몸을 보여주고 야구 카드를 얻어내거나, 테니스 시합 전 날 친구와 술을 진탕 마시거나, 남자애들과의 성적인 만남을 갖거나, 나무 그늘에 앉아 마약을 하거나, 약물중독과 폭식, 유부남과의 연애, 임신과 낙태….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자기 이야기를 써내려간 이 책을 읽고 있노라면 어느 한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흐른다. 누군가로부터의 사랑을 간절히 원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랑을 받고 싶어 발버둥을 쳤던 작가의 처절한 몸짓이 머릿속에 생생히 그려지기 때문이다. 부모님의 이혼과 아버지의 죽음, 그리고 가장 친했던 친구 패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한 충격은 작가 자신을 삶의 밑바닥으로 내몰았던 듯하다.

 

"패미의 유골함을 받아들 무렵에는 나에게는 샘이 잇었다. 따라서 삶의 불가해성과 혼돈을 좀 더 잘 견뎌낼 수 있었다. 그것이 아이들이 우리에게 주는 선물들 가운데 하나다. 아이를 낳고 나면 세상이 훨씬 덜 정연하고 덜 이성적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p.107)

 

아들 샘이 태어나면서 작가는 자신의 삶에서 구원을 받은 셈이었지만 이렇듯 우리는 가족으로 인해 삶의 구렁텅이로 떨어질 수도, 그 밑바닥에서 땅을 박차고 올라올 수도 있는 것이다. 운명이라고 치부하며 쿨하게 넘기기에는 너무 가혹하다는 생각이 든다.

 

"정말이지, 가족이란 용서의 훈련장이다. 어느 시점에 이르면 식구들의 온갖 괴상한 언행과 고집을 눈감아주게 된다. 그러고나면 식구들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도 관대해지는 법을 배울 수 있다. 결국에는 자기 자신한테도. 그것은 트랜스미션이 자주 고장나는 헌 차의 운전법을 익히는 것과 같다. 그 차의 기어 변환 요령을 마스터하면, 다른 어떤 차도 몰 수 있는 것이다." (p226)

 

삶에 대해서, 행복에 대해서, 또는 슬픔과 용서에 대해서, 신과 기도에 대해서, 자신의 경험을 통해 배웠던 작은 깨달음들을 작가는 이제 유쾌하게 말한다. 아무도 지켜보지 않는 보트하우스에서 술과 약물에 취해 죽음 일보 직전까지 이르곤 했던 앤 라모트는 이제 없다. 오늘처럼 바람이 불고 날씨가 궂은 날에는 정말이지 하루가 어떻게 흘렀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앤 라모트의 삶에서 어느 한 시절이 그랬던 것처럼.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기구한 삶을 살아서 작가가 될 수 잇었던 것인지, 작가가 될 운명이었기 때문에 기구한 삶을 살게 된 것인지, 하는 생각 말이다. 창밖을 스치는 바람은 거친 숨을 토하는 듯 사납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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