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내일처럼 오늘을 맞는다.

새벽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숲은 어둑신했고, 한 발 들여놓기도 꺼려질 정도로 음산하고 괴기스러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밤이 길어진 요즘 새벽 등산길은 언제나 힘이 든다. 어디서 불이라도 난 것인지 소방차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저쪽 끝으로 내달렸다. 늘 잠에 목마른 회사원들의 아침잠을 방해하면서. 등산로는 낙엽으로 가득하다. 나와 같은 등산객을 놀래킬 생각이 영 없었던지 영민한 청설모가 기척을 했다.

 

낮에 점심을 먹고 근처 공원을 잠시 걸었다. 소화도 시킬겸 겸사겸사 나선 길이었다. 공원 한 귀퉁이에서 할머니 한 분이 단감을 팔고 있었다. 잘 익은 담감을 비닐 봉지에 가득씩 담아 산책로를 따라 주욱 늘어놓고는 벤치에 앉은 또 다른 할머니 몇 분과 한가로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곳을 천천히 지나치는데 행색이 초라한 할아버지 대여섯 분이 우루루 몰려와서는 다짜고짜 단감이 얼마냐고 물었다. 한 봉지에 만 원이라는 말에 할아버지 한 분 왈 "하나 사서 안주 삼아 술이나 한잔 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그러자 같이 온 할아버지들이 너도 나도 "하나 사 봐." 하면서 부추겼다. 할 일은 없고, 주머니 사정은 어렵고, 그러면서도 뭔가 재미있는 일을 찾던 그들에게 '술'이라는 말은 듣던 중 반가운 소리가 아닐 수 없었나 보다.

 

노란 은행잎이 우수수 떨어졌다. 낮게 드리운 하늘. 금방이라도 눈이 내릴 것만 같은 우울한 날씨가 가슴을 답답하게 했다. 국정화 교과서를 밀어부치는 정부 여당은 마치 이것이 마치 국민과의 한판 전쟁이라도 벌이는 것인 양 연일 떠벌리고만 있다. "이거 지면 우리나라 망한다." 고 하는 놈이나 서울시 교육청의 친일인명사전 배포 계획에 대해 "서울시교육청은 반대한민국적, 반교육적인 이런 결정을 철회하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놈이나 다 그놈이 그놈이겠지만 이런 미친 놈들이 나라를 다스리고 있으니 대한민국의 꼬라지가 이럴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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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 상 - 비밀 노트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용경식 옮김 / 까치 / 199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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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에 대해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3부작으로 된 이 책은 작가의 경험이 투영되었기 때문이다. 1935년 헝가리에서 태어난 작가는 제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성장하였고, 14세 때 기숙학교에 입학하는 바람에 가족과 떨어져 생활했다. 1956년 헝가리 혁명의 여파를 피해 21세의 나이로 조국을 떠나 스위스에 정착한다. 역사교사인 남편과 갓난아이의 단촐한 가족 구성원이었지만 지독한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그녀는 5년 동안 시계공장에서 일했다. 그러나 결국 그녀는 시계공장도 그만두고 남편과도 헤어진다. 소설을 쓰기 위해 불어를 공부했고, 시와 희곡으로 출발했던 그녀의 작가 생활은 성공적이지 못했다. 1986년 내놓은 '존재의 세가지 거짓말' 중 첫번째 작품인 <비밀노트>로 그녀는 유러피안 프라이즈 불문학 부분(the European prize for French literature)을 수상했고, 책은 30개 이상의 언어로 번역되었다.

 

<존재의 세가지 거짓말(상) - 비밀 노트>는 작가와 그녀의 오빠를 모델로 쓴 소설이며 전쟁 상황에서의 인간성 파괴를 그리고 있다. 대도시의 전쟁을 피해 소도시에 있는 외할머니 댁으로 보내진 쌍둥이 형제를 주인공으로 소설은 전개된다. 할머니 댁에 도착한 순간부터 쌍둥이 중 한 명이 국경을 넘을 때까지 그들이 보고, 듣고, 경험했던 모든 이야기들이 일기 형식으로 기록된다. 그야말로 비밀 노트인 셈이다. 글은 일체의 감정을 배제한 듯한 삭막하고 건조한 문체로 진행된다. 우스운 얘기를 무표정한 얼굴로 말할 때 더 배꼽을 잡게 되는 것처럼 전쟁 속에서 살아 남기 위해 인간성과 도덕이 상실된 인간 군상의 적나라한 모습이 그저 담담하게 그려진다. 순수해야 할 열 살 전후의 아이들에게 비친 생존의 현장은 참혹하다기보다 끔찍하다. 그런 현장을 보고 자란 아이들은 어른들보다 더 잔인한 모습으로 성장한다. 아무런 죄책감도 없이.

 

"할머니의 집은 소도시의 외딴 마을에서도 5분쯤 더 걸어들어 간 곳에 있다. 그 다음에는 흙먼지만 이는 길이 이어지다가 그나마 울타리로 막혀 있다. 더 이상은 갈 수 없는 곳으로, 거기에는 군인이 보초를 서고 있다. 그는 기관총과 쌍안경을 가지고 있으며, 비가 올 때는 초소에 들어가 있다. 우리는 나무들로 가려져 있는 그 울타리 너머에, 비밀 군사기지가 있고, 그 기지 뒤에는 국경선과 다른 나라가 있다는 것을 안다." (p.5)

 

할아버지와 사별하고 혼자가 된 할머니는 마을에서 '마녀'로 불린다. 할아버지를 독살했다는 소문과 억척스러운 생존 본능 때문이다. 할머니는 닭과 염소 등 동물들을 돌보고 농사를 지으며 돈이 되는 것이면 무엇이든 시장에 내다 팔든가 지하창고에 숨긴다. 남는 방 하나를 외국군 장교에게 세를 주었으므로 쌍둥이는 부엌에서 생활한다. 할머니 방과 장교가 머무는 방은 늘 잠겨 있다. 조금씩 적응이 된 아이들은 만능 열쇠를 만들고, 폭력에 길들여지기위해 서로에게 매질을 가하는가 하면 어떤 욕설이나 모욕적인 말에도 감정이 흔들리지 않기 위해 서로에게 욕을 하며, 성경을 보며 읽고 쓰는 공부를 하고, 돈을 벌기 위해 악기와 마술까지 배운다. 전쟁은 아이들로 하여금 독종을 지나 괴물로 다시 태어나게 한다.

 

할머니집 인근에는 언청이 딸과 아주머니가 산다. 토끼주둥이로 불리는 언청이 딸은 시내에서 구걸을 하거나 이따금 신부님에게 자신의 아랫도리를 보여주고 돈을 받는다. 쌍둥이는 물을 긷기 위해 샘으로 갔던 토끼주둥이를 괴롭히는 불량배들로부터 그녀를 구해주기도 하고, 신부님을 협박하여 돈을 뜯어내기도 하고, 도둑질도 서슴지 않는다. 외국군 장교로부터 외국어를 배우기도 하고 귀머거리나 벙어리인 양 행동하기도 한다. 살기 위해서라면 그들이 못할 짓은 아무것도 없다.

 

"전능하신 하느님, 이 아이들에게 축복을 내려주소서. 그들이 무슨 죄를 지었든지, 용서하여주십시오. 이 추악한 세상에서 길 잃은 어린 양들입니다. 이 타락한 시대의 제물이 된 이 어린 것들은 스스로 저지른 짓이 어떤 것인지조차 모르고 있사옵니다. 바라옵건대, 이 더럽혀진 어린 영혼을 구해주시고 당신의 무한한 자비와 축복 속에서 정화시켜주시옵소서. 아멘." (p.168)

 

전쟁이 끝나고 쌍둥이의 엄마가 아빠가 아닌 다른 남자와 함께 갓난아이 하나를 안고 나타난다. 쌍둥이는 같이 가자는 엄마의 제안을 거절한다. 그렇게 실랑이를 하는 사이, 갑자기 날아온 폭발물에 의해 엄마와 아기가 맞아 죽는다. 남자는 이내 떠난다. 얼마 후 종군기자로 참전했던 아버지가 쌍둥이를 찾아 온다. 아버지는 할머니에게 자신의 아내가 어디 있는지 추궁한다. 죽어서 집 앞에 묻었다는 말도 믿지 않는다. 결국 묻었던 자리를 파내자 뼈만 남은 엄마와 아기가 나온다. 아이들은 그 뼈를 자신의 다락방에 걸어둔다. 뇌출혈로 한번 쓰러졌던 할머니는 자신이 모은 재산을 쌍둥이에게 물려주고 죽는다. 사상범으로 의심받는 아버지는 해외도피를 결심하고 국경을 넘으려 한다.

 

"- 가세요, 아빠. 다음 번 순찰은 20분 후에 있어요.

아빠는 팔 아래 판자 두 개를 끼고 앞으로 나아가서 판자 하나를 바리케이드에 기대놓고 기어올라간다. 우리는 큰 나무 뒤에 배를 깔고 엎드려서 손으로 귀를 막고 입을 벌린다. 폭발음이 들린다. 우리는 미리 준비했던 다른 판자 두 개와 보석이 든 마대를 들고 철조망까지 달린다. 아빠는 두번째 철조망 직전에 쓰러져 있다. 그렇다, 국경을 넘어가는 방법이 있기는 하다. 누군가를 앞서 가게 하는 것이다. 마대를 쥐고, 앞서간 발자국을 따라간 다음, 아빠의 축 늘어진 몸뚱이를 밟고, 우리 가운데 하나만 국경을 넘어갔다. 남은 하나는 할머니 집으로 돌아왔다." (p.219)

 

자신의 아버지를 이용하여 쌍둥이 중 한 명이 국경을 넘는 것으로 소설은 끝난다. 그들에게 죄의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군인 여러 명에게 강간을 당하고 죽은 토끼주둥이를 보았을 때도, 신부님을 돌보며 자신들의 옷을 세탁해주고 목욕도 시켜주던 여자가 죽었을 때도 쌍둥이는 그저 덤덤할 뿐이다. 감정을 철저하게 배제한 이 소설은 전쟁의 광기를 적나라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더 섬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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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행으로부터 쉽게 밀려나는 것은 몸이 아니라 관념이다. 세월을 거스를 수 없는 우리의 몸은 '늙음'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결국 보이지도 않는 화물칸에 짐짝처럼 실리게 되겠지만, 그보다 훨씬 앞선 시기에 당신의 켸켸묵은 생각이나 고루한 사고가 젊은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한 번 습득된 도덕 관념이나 사고 체계는 이러한 비난이나 따돌림에도 불구하고 좀체 바뀌지 않는다.

 

이런 이유로 많은 사람들은 생각보다 이른 나이에 '꼰대' 취급을 받는다. 그것이 지금 유행하는 젊은 사람들의 사고 체계로부터 멀리 벗어났음을 알려주는 하나의 지표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사람들은 자신의 생각을 바꾸지 않는다. 어쩌면 하도 단단하여 바꿀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는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이제는 도저히 젊은 사람들과 어울릴 수 없겠구나 판단되는 시점에 이르면 자신이 마치 어떤 유혹이나 협박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던 살만 루시디와 같은 인물인 양 착각하거나 자신만이 이 나라와 민족을 위하는 애국주의자 혹은 유일한 보수주의자인 양 거들먹거리곤 한다. 그런 모습은 천박하다기보다는 짠하고 안쓰럽다. 그들은 자신의 추락한 자존심을 붙들어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그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오늘 김제동의 1인 시위를 비난하는 윤 모 만화가를 보면서 문득 들었던 생각이다. 나이도 그리 많지 않은데 참 불쌍하지 않은가. 예전에 했던 이 사람의 행적을 보면 가관도 아니다. 노출이 심한 슬립 원피스를 입은 소녀들이 엎드려 과거시험을 보면서 화선지에는 '지지지...'라는 글이 적혀 있고 '숙녀시대 새해맞이 단체로 떡치는 사진'이라고 했다나 뭐라나. 그는 성적인 표현만이 젊은 사람들과의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유일한 통로인 양 믿었을 게다. 내 판단에 역사교과서 국정화로 인해 대한민국은 얻은 게 하나도 없고 경제, 문화, 교육 등 모든 면에서 손실만 있었고 앞으로의 손실은 가늠하기조차 어려울 것이다. 득을 본 사람은 (윤 모 만화가를 포함한)우둔한 국민들을 이용해 정권을 유지할 수 있는 정치인들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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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1-05 18: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11-06 15: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슬픈 외국어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진욱 옮김 / 문학사상사 / 199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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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없던 욕구도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게 중독이라면 '활자중독'뿐 아니라 '작가중독'도 존재하는 게 아닐까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이 물론 애연가의 흡연욕구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마냥 무시할 만한 것도 아니어서 (중독이 된)그 작가의 글을 읽지 않고 일정 시간이 흐르면 어느 순간 '이제는 정말 XX 작가의 책을 읽어야 할 시점이 온 것 같군.'하는 생각이 나도 모르게 드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욕구를 무시한 채 좀 더 오래 버티게 되면 제 아무리 재미있다는 책을 읽어도 그저 시큰둥할 뿐 별다른 감흥이 없고, 몸속의 열의란 열의는 모두 사라진 듯한 느낌에 빠지게 됩니다. 그렇다고 손을 떤다거나 조급해하면서 쉽게 짜증을 내는 식의 금단현상이 나타나는 건 아니지만 무시하고 모른 척하기에는 뭔가 께름칙한 구석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문득 '이제 더 이상 못 배기겠는 걸.' 하는 생각이 들라치면 작가가 한참 전에 쓴 낡고 오래된 책이라도 빌려 읽어야지 그렇지 않았다가는 정말 금단현상이 생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아직 그 단계까지 가 본 일이 없어서 진짜 그렇게 되는지 알 수 없지만 말입니다. 독자의 이런 심정을 알고 있는 작가라면 적어도 글을 쓰기 싫어 농땡이를 부리거나 책의 출간 시기를 저울질하며 차일피일 미루는 짓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독자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쉼 없이 작업하는 히가시노 게이고와 같은 작가도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작가들도 많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출간 시기를 알 수 없어 이제나저제나 애태우다가 포기하고 이제 막 다른 작가의 작품으로 기우는 독자들이 하나 둘 늘어날 즈음 기다리던 작품이 비로소 나오기도 하지만 말입니다.

 

제게도 그런 작가가 몇 명 있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도 그 중 한 명입니다. 한동안 다른 작가의 작품에 빠져 지내다가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면 문득 그리워지는 것이죠. '아직 신간이 나오려면 멀었으니 아쉽지만 예전에 읽었던 책이라도 한 권 다시 읽어야겠군.' 하는 생각에 이르게 되면 퇴근 후 발걸음은 항상 도서관으로 향하게 됩니다. 비록 작가로서 하루키는 상당히 성실한 편에 속하고 독자들의 심정을 나몰라라 하는 작가도 아니지만 근래에 들어 그의 작품은 상당히 부정기적으로 출간되고 있습니다.

 

제가 엊그제 읽었던 책은 <슬픈 외국어>입니다. 신간이 보이지 않을 때 제가 취하는 선택 기준은 전적으로 감에 의존하게 되는데 항상 그렇다는 것은 아니고 대체로 그렇다는 것입니다. 제가 제목만 보고 이 책을 고른 걸 보면 엊그제 도서관에 갔을 때의 제 느낌은 '약간 슬펐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조금 더 슬펐더라면 저는 어쩌면 <노르웨이의 숲>을 들고 나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그 정도까지 슬퍼지지 않았던 게 천만다행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왜냐하면 <노르웨이의 숲>을 다시 읽는다면 그 우울하고 탁한 기분이 적어도 한 달쯤은 계속되지 않을까 싶기 때문입니다.

 

"나는사물을 머리로 생각하는 사람이다. 나는 몸을 움직여서 생각하고, 몸을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것도 배울 수 없고, 아무것도 쓸 수 없는 사람이다. 내가 되도록 많은 나라의 말을 배워, 되도록 많은 나라에서 살거나 여행하며 작품을 쓰는 까닭은, 보다 참된, 그리고 보다 인간적인 글을 쓰고 싶기 때문이다." (p.201)

 

사실 이 책은 제목만 제외하면 '슬픔'과는 전혀 상관도 없는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프린스턴 대학의 초청을 받아 미국에 체류하면서 그가 받았던 미국 체험의 느낌과 자신의 지난 삶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18편의 에세이가 이 책의 구성입니다. 제가 생각할 때 이 책이 그가 쓴 다른 에세이들과 확연히 구별된다고 느끼는 점은 하루키 특유의 유머가 아주 없다고는 할 수 없지만 상당히 절제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작가는 '자신의 자전적인 체험을 통한 삶과 세계관, 그리고 국제 관계와 문학 등에 관한 에세이'를 비교적 진지하게 쓰고 있습니다.

 

"한없는 그런 거리와 자연의 끝없는 연속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사람이 산다는 건 대체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하는 생각에 문득 빠지게 된다. 그런 무력감은 미국에서만 맛볼 수 있는 종류의 감정이다. 유럽에서도 맛볼 수 없고, 일본에서도 맛볼 수 없는, 절대적인 아메리칸 오리지널이다." (p.192)

 

전업으로 글을 쓰는 작가라면 누구나 자신의 감정이나 사생활을 솔직하게 내보여야만 하는 어떤 순간에 직면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지면으로든 인터뷰를 통한 방송으로든 방법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말입니다. 작가는 이 책에서 자신의 생각이나 관점, 과거의 모습 등 어쩌면 밝히고 싶지 않을 수도 있는 이야기들을 아주 솔직하게 쓰고 있습니다.

 

"작가가 되어서 가장 기뻤던 건 이제는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싶은 만큼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물론 전업 작가가 되면 어느 정도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내키지 않는 일도 해야만 하는 경우도 있지만, 그건 오히려 생활 쪽을 조정하면 해결될 일이다. 이만큼 내게 잘 맞는 생활도 없기 때문이다. 처음 몇 년 간은 여러 가지로 시행 착오를 겪었지만, 그러는 사이에 점점 익숙해져서 내 나름대로의 작가 생활 시스템을 구축했다. 그 시스템의 근본 사상은 아까도 얘기했듯이 "하고 싶은 일만 자신의 페이스를 지키며 한다"는 한마디로 설명이 다된다." (p.235~p.236)

 

작가는 <슬픈 외국어>라는 책의 제목이 '절실한 울림을 갖고 다가온다'고 쓰고 있습니다. 막연히 무엇인가 쓰고 싶었던 작가는 카페를 운영하던 7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몸을 통하여 생각하는 경험을 했고 야구장에서 문득 소설을 쓰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어 소설가가 되었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미래는 어느 것 하나 확실한 게 없습니다. 그것이 누군가에게는 요행일 수도 있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참을 수 없는 불행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오늘 불행했다고 하여 내일 또 불행하리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우리에게 매일매일은 모두가 기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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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모퉁이에서 만난 사람
양귀자 지음 / 살림 / 200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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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살면서 외부에 믿을 만한 방패막이 하나 두르지 못한다는 것은 참 서글픈 일이다. 그것은 곧 외부의 숱한 유혹이나 불의의 것들, 예컨대 한 사람의 인생을 파멸로 이끌고도 남을 만한 수많은 것들로부터 자신을 지켜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렸을 때는 부모님이나 선생님의 조언과 보살핌이 그런 역할을 할 테지만 나이가 들어 부모의 품을 떠날 때쯤 되면 세상살이의 간단없는 괴로움을 방패막이 하나 없이 오직 자신의 몸뚱아리 하나로 막아야 할 뿐 달리 도리가 없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때로는 자신이 극복했던 시련이 단단한 굳은살이 되어 어지간한 고통쯤은 고통으로도 느껴지지 않게 하지만 세상 일이란 게 늘 새로운 것이고 보면 인간은 고통 앞에 내던져진 참으로 서글픈 존재인 것이다.

 

"물론 많이는 섭섭하고 더욱 많이는 그이의 떠남이 안타까웠지만 그러나 삶이란 어차피 늘 새로운 길을 찾아 떠나는 일의 되풀이가 아니던가. 나는 허퉁함과 또 그이의 새로운 길찾기에 대한 격려가 범벅이 된 목소리로 물었다. 그이의 미용실이 여전히 '행복'이란 이름으로 남을 수 있는가를." (p.234~p.235)

 

매년 이맘때쯤이면 왠지 모르게 사람의 한살이에 대해 종종 생각하게 된다. 경험으로 익숙해진 것들에 대한 고집스런 애착과 낯설고 서먹한 것에 대한 야멸찬 거부가 수박을 쪼개듯 둘로 나뉘어지는 것이다. 세상의 경험이란 게 줄을 서서 기다리다 순서가 되면 받아 쥐는 번호표가 아니어서 언제 어느 때 내게 일어날지 가늠할 수 없는 법, 희비에 대한 대비는 언제나 한발 늦게 마련이고 그 간발의 차이가 제 운명을 가를 수도 있음을 수없이 보고 또 느껴도 삶은 한 치의 익숙함도 허락하지 않는다.

 

"산자락에 낙엽이 한숨처럼 흥건하고, 아침에 일어나 창을 열면 드센 바람에 소스라쳐 놀라고, 저녁의 퇴근길에 만나는 군밤장수의 주홍 연탄불들, 그리고 문득 겨울이 온다. 머뭇거릴 새도 없이 그렇게 겨울이 오고 한 해가 간다. 예정되어 있는 시간들과 이 어김없는 과정, 그럼에도 연말은 느닷없이 닥치는 보고처럼 늘 착잡하다." (p.238)

 

양귀자의 인물소설 [길모퉁이에서 만난 사람]은 언제 읽어도 그 재미에 흠뻑 빠져들게 된다. 도무지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내가 철부지 어린애도 아니고, 사람도 겪어 볼 만큼 겪어보았다 생각하지만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말할 수 없이 다정하게 느껴지면서도 과거의 내 경험에서는 결코 찾을 수 없을 듯한 새로운 사람들로 채워져 있다. 사실 이 소설은 일반적인 소설 형식과는 매우 다른 형식으로 구성되어 마치 어느 작가의 산문집처럼 읽힌다. 인물 간의 갈등에 의해 사건이 전개되는 법이 없고 다양한 인물에 대한 서술자의 섬세한 관찰과 묘사, 그들에 대한 서술자의 생각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기 때문이다.

 

이 책이 처음 나왔던 90년대의 어느 해에 나는 이 책을 처음 읽었고, 그 후 매년 11월을 전후한 어느 시점에 나는 이 책을 습관처럼 들춰보게 되었다. 마치 피할 수 없는 의무인 양. 원미동을 떠나 서울에 정착했던 작가가 서울의 어느 골목 길모퉁이에서 만났던 사람들, 그들의 '드러난 모습과 숨겨진 정신'을 짧은 이야기 속에 담고 있는 이 책은 순간순간 달아나고 싶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망에서 나를 온전히 머무르게 하는 버팀목 역할을 해 왔던 것이다.

 

"여기 덜 위축당하고, 덜 세뇌당한 사람들 몇이 있다. 그래서 미리미리 우울해 하는 방법은 배우지 않아도 좋았던 사람들. 아찔한 파격이나 파격한 탈선은 전혀 없이, 그럼에도 자신의 삶을 자신의 방식대로 꾸려나가는 사람들, 나는 그들의 이름을 호명한다. 김선배, 김밥아주머니, 야채아저씨, 김대호 씨, 박영국 씨, 김박사......" (p.31)

 

작가 양귀자의 문체는 부드러우면서도 이따금 폭풍이 치듯 몰아칠 때가 있다. 정신이 번쩍 나는 순간이다. 가만히 넋을 놓고 있다가 얼결에 뺨이라도 한 대 얻어맞은 듯 자세를 고쳐잡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칼에 베일 듯한 날카로움이나 위압적인 서슬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만이 빛난다.

 

"왼쪽과 오른쪽에 그와 그녀를 두고 가운데에 내가 있다. 세월은 흐르고 그는, 또는 그녀는 세월의 그물에 걸려 은빛 지느러미를 퍼덕인다. 나는 그것을 본다. 그 은빛의 슬픔과 우수와, 그리고 삶의 그림자를 본다. 그림자를 거느리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의 표류하는 시간을 본다. 잡아지지 않는 무엇, 만져지지 않는 무엇, 거머쥘 수 없는 무엇들. 그렇게 한 해가 가고 새해가 온다. 그렇게 한때의 시간은 가고 때묻지 않은 새 시간이 온다. 우리는 다시 물위로 기어오르며, 잠수에서 벗어나며, 낯선 세상에 작은, 몹시도 작은 그림자를 조심스레 떨구어 본다." (p.249)

 

우리는 얼마큼의 시간을 말없이 흘려보내야만 제 앞의 삶을 두려움 없이 대할 수 있는 것인가. '잊혀지지 않는 밥 세끼의 무서움'을 끌어 안고 오늘 하루를 사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 작가는 그들의 기진한 노고를 위로하고 있다. 내게 가을은 작가 양귀자로 인해 매년 따뜻한 위로의 계절이 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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