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묻다 두 번째 이야기 - 지성과 감성을 동시에 깨우는 일상의 질문들 문득, 묻다 2
유선경 지음 / 지식너머 / 2015년 10월
평점 :
절판


그림이 그려진 반투명의 기름종이 서너 장을 넘기면 비로소 책이 시작된다. "지성과 감성을 동시에 깨우는 일상의 질문들"이라는 표지글과 "문득, 묻다 두 번째 이야기" 라는 책의 제목, 다시 한 장을 넘기면 '여는 글'과 함께 깨알같은 목차가 이어지고 'Chapter 01 그 사람은 누구일까... 문득, 묻다'로 시작되는 본문. 방송 작가가 쓴 책은 어딘가 모르게 태가 난다. 섬세하다고 할까, 아니면 감성적이라고 할까. 아무튼 왠지 모르게 멋을 부린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렇다고 내용은 없고 겉만 번지르르하다는 부정적인 의미의 말을 하려는 건 결코 아니다. 그런 책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방송작가가 쓴 책을 그닥 선호하는 건 아니지만 우연히 내 손에 들어오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럴 때면 알 수 없는 거부감이 바람처럼 스쳐간다는 걸 나는 안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실컷 놀고 돌아온 아이가 제 딴에는 공부가 하고 싶어 책을 펼쳤는데, "너 공부 안 하니?" 엄마의 짜증 섞인 목소리가 안방으로부터 건너오는 것이다. 그럴 때 아이의 가슴에는 불현듯 없던 오기가 불끈 솟아오르고 방금 전까지 온몸으로 퍼지던 공부에 대한 열의는 눈 녹듯 사라지고 만다. 그와 유사하게 방송작가의 글은 광고의 카피처럼 독자의 느낌을 강제하려는 경향이 있다. 예컨대 슬픈 내용의 글을 독자가 읽고 '슬프다' 느끼면 그만인데 글의 이곳저곳에 슬프게 느낄 만한 단어를 배치한다거나 직접적으로 말해버리면 괜히 한 번 뻗대보는 철부지 아이처럼 슬픈 글도 슬프지 않은 듯 읽게 된다는 것이다. 책을 읽기 전까지 나는 이런 선입견을 머릿속에서 이리저리 굴리며 읽을까 말까 저울질하고 있었다.

 

그러나《문득, 묻다-두 번째 이야기》는 다행히(?) 그런 감상적인 내용의 책은 아니었다. 전편을 읽지 않은 나로서는 책에 대한 일말의 사전 정보도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책은 우리가 일상에서 순간적으로 들었다 사라질 것 같은 여러 궁금증들, 알면 좋고 몰라도 불편할 것 없는 그런 질문들에 대해 답하고 있다. 책에는 'Chapter 01. 그 사람은 누구일까... 문득,묻다'에 38가지의 질문이 그리고 'Chapter 02 매일 하다가... 문득, 묻다'에 38가지의 질문이 수록되어 있다. 예컨대 '화투의 '비광' 속 우산 쓴 사람은 누구일까?' 나 '키스하다가 죽을 수도 있을까?'와 같은 일상에서 부딪히는 갖가지 궁금증들에 대해 저자는 상세히 답하고 있다. 그리고 '다시 묻다' 코너를 통해 질문을 조금 더 확장하기도 한다.

 

"마흔넷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오로지 평화를 향한 열망으로 공군에 자원했다가 세상을 떠난 생텍쥐페리였습니다. 이런 그의 죽음도 안타깝지만, 65년이 지나서야 자신이 생텍쥐페리가 탄 정찰기를 격추시켰다고 고백한 리페르트의 사연도 참 가슴 아픈 일입니다. 어렸을 적부터 좋아했던 작가의 생명을 본인이 전혀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앗아갔으니까요." (p.18) '누가 생텍쥐페리를 격추시켰을까?' 중에서

 

책을 읽다 보면 '아아, 이런 일도 있을 수 있구나!' 감탄하기도 하고, '아, 이건 그동안 내가 잘못 알고 있었던 내용이네.' 하고 바로잡게도 된다. 그러나 입사시험의 상식 시험문제로 나올 것도 아니고, 이런 걸 모른다고 누구한테 '그것도 모르느냐?' 퉁박을 맞을 일도 아닌데 굳이 읽을 필요가 있을까 묻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모임이 잦은 연말연시에 아무런 대화도 없이 스마트폰만 들여다 보는 침묵의 모임을 갖느니 차라리 이 책 속의 한 꼭지 에피소드를 들려줌으로써 '와하하' 한바탕 웃을 수 있다면, 그리고 모임에 나온 다른 사람으로부터 '그런 건 어디서 알았느냐' 관심을 끌 수만 있다면 이 책은 얼마나 유용한가. 책값을 하고도 남지 않겠는가.

 

"게다가 코르티솔 수치가 조금만 올라가도 밤새 말똥말똥해질 수 있다고 하지요. 20대 때는 아무리 스트레스를 받아도 뱃살이나 불면이 따라붙지 않았는데 중년에는 별다른 스트레스가 없는데도 불면과 뱃살이 느는 이유, 이런 생물학적 근거가 있었습니다. 게다가 불면은 앞서 말했듯 상대의 감정을 정확히 이해하는 능력을 저하시켜서 더 부정적으로 느끼게 만들고 갈등을 악화시킬 수 있다고 하니 문득, '늙으면 노여움이 많아진다'는 말 역시 영 근거가 없는 말로 들리지 않습니다." (p.332) '나이가 들면 왜 잠이 없어질까?' 중에서

 

아침부터 내리던 비는 오후가 되어서도 그치지 않고 내렸다. 만나는 사람마다 날씨 아니면 술 얘기다. '이러다 우울증에 걸리겠다'는 둥 '일주일 내내 술을 먹었더니 속에서 신물이 넘어온다'는 둥 그렇고 그런 얘기들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날씨 탓인지 나도 모르게 우울해지는 건 있지만 요즘 나를 괴롭히는 건 술이나 날씨가 아니라 밤에 문득 잠에서 깨는 일이 잦아졌다는 것이다. 한밤중에 그렇게 깨고나면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밀려오곤 한다. '내일 일을 하려면 조금이라도 더 자야지' 생각하면서도 마음뿐이지 한동안 잠을 이루지 못하고 뒤척이게 된다. 나도 나이가 들었다는 반증일지도 모른다. 책에서 말하기를 나이가 들면 코르티솔 수치가 조금 높아져 밤새 말똥말똥해진다는 것이다. 한 시간이 아쉬운 취준생이나 고등학교 학생들에게는 부러운 말처럼 들릴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나이가 들면 궁금한 것도 적어진다는데 그런 속설은 나에게 맞지 않는지 나는 여전히 궁금한 게 많다. 문득 저자에게 묻고 싶어진다. 왜 그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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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가리키는 나뭇잎 화살표를 따라 이십여 분쯤 올라가면 내가 매일 아침 몸을 푸는 체육공원이 나온다. 말하자면 나는 매일 아침 바람을 등지고 산을 오르는 셈인데, 그럴 때마다 바람은 마치 가기 싫어 하며 뻗대는 아이의 등을 강제로 떠밀며 재촉하는 어른인 양 여겨진다. 나는 앞발을 딛고 뻗대는 세살배기 아이인 양 여겨지고 말이다. 기온이 영하로 곤두박질 친 날은 바람이 더러 싫을 때도 있지만 슬슬 꾀가 나는 겨울철에는 바람이 등을 밀어줄 때가 더 좋다. 심심하지도 않고, 힘도 덜 드는 것처럼 느껴지고...

오늘 아침에는 등에 와닿는 바람의 기운을 느끼지도 못할 정도의 약한 바람이 불었다. 나무에 붙은 메마른 나뭇잎이 그저 서걱거리며 흔들리는 모습에서 '아, 바람이 부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 뿐이었다. 이따금 내 발자국 소리에 놀란 산꿩이 푸드덕 날아올랐고, 나도 덩달아 놀라 하늘을 보면 손톱 모양의 그믐달이 둥실 솟아 있었다. 걸음은 다시 새벽의 어둠과 고요 속으로 향한다.

시의 예산이 부족한 건지, 아니면 우선순위에서 한참이나 밀린 탓인지 오래된 운동기구는 새로 교체하기보다는 숫제 톱으로 잘라버렸다. 밑동이 심하게 흔들리던 철봉과 평행봉은 베어진 채 스산한 모습으로 누워 있다. 내가 운동을 하는 새벽 시간에 마주치는 사람은 고작 두서너 명. 겨울에는 다들 게으름을 피우는 건지, 운동을 아예 접은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 사람도 없는 어둠 속에서 홀로 운동을 하고 있는 나를 볼 때면 '무슨 부귀영화를 보겠다고 이토록 열성인지...'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나 자신이 극성스럽게만 여겨지는 것이다. 어차피 때가 되면 죽을 몸, 남들처럼 좀 더 편안히 있다가 가도 될 텐데... 하는 생각이 나도 모르게 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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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5-12-09 17: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헛 ㅡ참 ...아예 철거한 것도 아니고 ..잘라서 간다고요?
민원이라도 ...극성이 아닌 스스로 돌봄이죠.
그게 멋지고요..
잘 ㅡ건강하게 죽는 법 ㅡ^^

꼼쥐 2015-12-10 18:20   좋아요 1 | URL
철봉과 평행봉은 나무 밑동이 썩어서 위험했었는데 교체할 생각은 없는지 그냥 잘라놓기만 했더라구요.
새벽 어둠 속에서 혼자 운동을 하고 있노라면 문득 `이게 뭐하는 짓인가?`하는 생각이 들 때가 종종 있어요. 나도 모르게.

[그장소] 2015-12-10 20:00   좋아요 0 | URL
뭐 ㅡ타인을 위해 하는것이 아니고 스스로를 위해 하는건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드셨담 ㅡ체크를 좀 해보세요 ㅡ어째서 메너리즘에 빠지는가..고?!
자기 만족도가 높아야한다고 보거든요.저는..
누가 봐주는 게 아니기 때문에...
꼼쥐님은 그 건강하고 맑은 정신으로 스스로를 잘
컨트롤하는 노후를 원하세요..제가 보기에는..
그래서 존경스럽고..멋지다고 여겨요.
잘사는건 잘 죽는것과 같다는 걸 얼마나 알까요..
그걸 하고 계신거죠..^^
그냥 그렇단 생각입니다.

아 ㅡ철봉과 평행봉이 철근아닌 나무 ㅡ자연 썩기를...흠..그래도 누가 걸려 넘어지기라도 함
어쩌려고..심을때 박아둔 콘크리트 파내는게
아까운모양이죠...그 예산 들이기가..ㅎㅎㅎ

꼼쥐 2015-12-13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운명이란 건 제가 어찌할 수 없는 거라는 걸 잘 알기에 운동을 하여 건강을 지킨다 한들 불의의 사고로 죽지 말라는 법이 없을 텐데... 하는 생각이 이따금 드는 것이지요. 그러다 보니 다 부질없어 보이기도 하구요. 학창시절부터 매일 아침 해온 운동인데 이제는 지겨운 생각도 들고 그렇습니다.

보통은 나무기둥의 밑동이 썩지 않도록 쇠로 만들어진 캡을 씌우던데 그것을 안 씌운 기둥을 땅에 박아 놓아서 이제는 다 썩어버린 것이죠. 그것을 보고 저는 문득 다른 생각이 들었어요. 캡을 씌운 기둥은 가격은 높지만 오래 갈 테니 업자들 먹고 살으라고 일부러 담당 공무원이 그렇게 한 게 아닐까 하고 말이죠. 아니면 뇌물을 먹고 그렇게 하는 걸 눈감아 줬거나.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
배수아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3년 3월
평점 :
품절


익숙함에서 멀어질수록 소설은 극과 극의 평가가 뒤따를 수밖에 없다. 그것은 아주 좋았다거나 최악이라는 지극히 단순한 말로 집약된다. 천명관의 소설 <고래>가 그랬고, 김영하의 소설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가 그랬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그들이 낯섦에 대한 부정적인 편견을 이겨내고 대한민국의 중견작가로 성장했다는 점일 것이다. 소설가 배수아는 이들과 비교하여 상당히 다른 길을 걷고 있다. 세상에 내보인 그녀의 첫소설이 비록 낯설고 파격적인 것이었지만. 그러나 그녀는 지금 유행하는 소설의 형태가 어떻든 간에 오직 자신만의 색깔을 고집하며 소설을 쓰고 있는 몇 안 되는 작가 중 한 명으로 남아 있다. 고집스럽게도 말이다. 파격적인 소설로 떠들썩하게 등장했던 대다수 작가들이 어느 순간 자신의 색깔을 잃고 그들과 동화되었던 점을 감안할 때 그녀는 분명 특이한 작가라고 말할 수 있다.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은 우리가 알고 있는 소설의 일반적인 형식이나 구성에서 상당히 떨어져 있는 작품이다. 그것은 어쩌면 낯섦에 대한 이질감이 아니라 동일성에 대한 놀람으로 읽힌다. 예컨대 거울을 자주 보지 않던 사람이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화들짝 놀라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가 읽는 소설은 대개 현실을 어느 정도 미화하고, 가지런히 정돈하고, 적당히 가지치기를 하여 실제 우리가 사는 모습에서 상당히 순화되어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이 소설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찌질한 모습 그대로, 한숨이 터져 나올 것 같은 그 느낌 그대로를 기록한다. 그것은 불편함이다. 객관화한 '나'를 대하는 건 얼마나 불편한 일인가.

 

"돈경숙의 말이 틀리지는 않았다. 그녀의 젖가슴이 낡아서 너덜너덜 해어진 면 속옷 아래 비좁게 들어앉은 것이 보였다. 축 처진 아랫배의 살덩어리와 거기에 반해서 무서울 정도로 단단하고 탄력있어 보이는 불그스름한 허벅지가 속치마 아래로 언뜻언뜻했다. 그녀의 종아리는 그 몸매에 어울리지 않게 짧고 가느다래서 우스꽝스러운 불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p.8)

 

그렇게 시작된 소설은 줄곧 가난과 빈곤, 탐욕과 일탈의 그렇고 그런 모습을 비춘다. 어둠과 불안이 잠식된 존재의 구차하지만 질긴 삶을 묘사하기 위해 작가는 이 책에서 ‘빈곤’을 주제로 한 무려 17개의 길고 짧은 에피소드를 연작소설의 형태로 이어붙이고 있다. 그것은 마치 크기와 색깔, 또는 질감이 다른 종이와 헝겁, 상표 등을 종이에 붙여 화면을 구성하는 미술의 한 기법처럼 비중이 다른 이야기들이 한 권의 책에 묶여 가난에 대한 콜라쥬를 형성하는 듯하다. 사건의 전개와 등장인물간 관계에 있어 이렇다할 연관성이 없이 독립되어 보이지만, 부암동 허름한 골목길의 스키야키 식당 주변에 모여 살고 있는 인물들이 가난에 찌든 채 비루한 삶을 이어가고 있는 모습을 다양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 속엔 유식한 밥버러지(마), 허울 좋은 지식인(백두연, 음명애, 우균, 김요환), 돈을 절대가치로 삼는 가엾은 영혼(돈경숙, 표현정), 의식 없이 매일매일을 소비하는 아이들(세원, 털 모델)이 있다.

 

"죄는 부모자식 됨에서 근원 되는 것이죠. 남자가 여자의 자궁을 피할 수 없음과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도 욕망의 혐의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습니다. 세속의 사람들이 이상을 구현할 수 없는 이유도 그런 욕망 아닙니까." (p.61)

 

작가는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을 소설 속에 등장하는 성도의 입을 빌려 말하고 있다. ‘빈곤에 대한 보고서’를 위해 다양한 인간군상을 취재하는 성도는 가난에 대해 구체적이고 직접적이며 솔직하게 말함으로써 소설 속에서 마치 한 편의 논문을 쓰는 것처럼 그려진다. 그것은 비록 작가 자신이 독자들에게 간절히 전하고 싶은 의도된 대목이었다고 할지라도 절정을 향해 치달아야 할 소설의 끝부분에 메마르고 탁한, 이야기라기 보다는 선명한 주장이 드러나는 산문 성격의 글을 배치함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갑자기 의욕저하를 일으키도록 한다.

 

"곧 가난의 성격은 더도 덜도 아닌 굶주림의 성격입니다. 설사 끼니를 거를 정도가 아니라 해도 역시 가난은 굶주림인 것입니다. 나에게는 긍정적 의미의 가난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난은 단순한 불편과 수치를 넘어선 어떤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을 정서적으로 지배합니다. 인간과 그 아들과 그 아들을. 그러므로 굶주린 가난의 기억밖에 가지고 잇지 않은 사람들은, 부유하던 시절의 일을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입에 빵을 처넣어주어도 역시 게걸스러워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테니까요...... 그렇습니다. 나, 나는 지금 너무나 괴롭기 때문에 도저히 글을 계속해서 쓸 수 없습니다." (p.199 ~ p.200)

 

우리가 아는 빈곤은 타인과 비교됨으로써 상대적인 것이 되기도 하지만 또한, 한번 그 늪에 빠지게 되면 탈출이 거의 불가능하다는 점에서 절대적인 것이 되기도 한다. 이 소설에서 말하고자 하는 가난은 물질적 결핍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결핍'과 그것에 뒷덜미를 잡힌 채 살고 있는 인간군상들의 체념은 차라리 자신에 대한 방임에 가깝다. 우리 사회에서 그것은 자신의 의지로 극복되어질 수 없는, 제 몸뚱아리를 가난의 벽에 스스로 내던질 수밖에 없는 비극적 현실임을 말하고 있다. <일요일 스키야키 식당>은 일요일 한낮에 느긋이 읽을 만한 책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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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5-12-09 07:16   좋아요 0 | URL
잘 읽고 갑니다 ㅡ

꼼쥐 2015-12-09 15:11   좋아요 1 | URL
그장소 님 반갑습니다. ^^
즐거운 하루 보내세요~~

[그장소] 2015-12-09 16:50   좋아요 0 | URL
이상하게 저는 배수아 작가는 안 읽혀요..몇 작품 없어요..읽어야지 하면서 ㅡ이제 순위에서 밀리는 거죠.나중에 후회할까 살짝 두려워요.

꼼쥐 2015-12-10 18:21   좋아요 1 | URL
배수아 작가의 글이 대부분 확 당기는 책은 아닌 것 같아요. 그러다 보니 순위에서 늘 밀리게 마련이구요.

[그장소] 2015-12-10 20:03   좋아요 0 | URL
음ㅡ그런데 ..열심인 독자도 있잖아요..
분명 어딘가 뭔가 반짝이는 면이 있어서 일건데..
그게 뭔지 모를까..(알고)싶기도 하고..막 그래요.^^

꼼쥐 2015-12-13 12:07   좋아요 1 | URL
배수아 작가에게는 약간의 고집스러움이랄까, 아니면 독선이랄까 주관 같은 게 있지요. 그런 걸 싫어하는 사람도 분명 있을 테구요.

[그장소] 2015-12-13 16:43   좋아요 0 | URL
작가들에겐 자기만의 고집이나 신념은 있죠.
모두 같은 모범적인 사례만 고집하면 그건 이번 교과 국정화와 (응?)별 다를 게 없을지도 모른단
생각을 해봐요..소수일지몰라도 자기 소릴 계속 내는 것 그것 역시 중요하다고 ...봅니다..마니아층이 생기 는..거죠!^^
 
에세이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매주 금요일이면 항상 '이번 주말에 뭔가 대단한 일이 일어날 것 같은데...'하는 막연한 기대 또는 환상 속에서 하루를 보내게 된다. 아무런 주말 계획도 세우지 않은 내게 그런 특별한 일이 생길 리 만무하지만 판타지 소설을 너무 많이 읽은 부작용인지 아니면 선천적으로 오컬트 성향을 타고 태어난 까닭인지 지금껏 나는 지난 주와 크게 다르지 않은 평범한 주말을 수없이 보내왔으면서도 금요일이면 번번이 그런 생각에 빠져들곤 한다. 병이라면 병이다. 그것도 치료약이 없는 불치의 병이 아닐 수 없다. 오늘도 괜한 환상에 빠져들까봐 '에라, 12월에 읽을 에세이나 골라보자' 작정을 하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김영하의 산문 삼부작 '보다 - 말하다 - 읽다' 중 단 한 권이라도 읽었던 사람이라면 작가 김영하를 새로 발견하는 계기가 되었을 줄 안다. 나도 그 중 한 사람이다. '보다'와 '말하다'를 읽으면서 '김영하가 원래 이런 사람이었나?'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독자와 작가의 관계에서 발견된(또는 상상된) 예전의 김영하는 결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것은 차라리 한 사람에 대한 새로운 발견이었다. 삼부작의 마지막인 '읽다'라고 읽지 않을 이유가 없다.

 

 

 

 

 

 

 

작가 로맹 가리만큼 후세의 작가와 독자들에게 영감을 주는 작가도 드물지 않을까 싶다. 전투기 조종사, 성공한 소설가, 영화감독 등 다양한 직업을 가졌었기 때문에 하는 얘기가 아니다. 그의 파란만장한 삶은 한 인간이 그의 삶에서 겪을 수 있는 다양한 경험과 그것을 통해 얻어진 다양한 사유를 자신의 작품 속에서 생생하게 드러내기 때문이다. 나 또한 그의 소설 '자기 앞의 생'을 읽고 얼마나 많은 생각을 하였던지...

 

 

 

 

 

 

 

 

아나운서 손미나가 아닌 작가 손미나로 인식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스페인, 너는 자유다'를 읽었을 때였다. 드문드문 드러나는 어색한 문장, 작가는 그 책에서 아마추어 작가의 티를 완전히 떨쳐내지는 못했지만 그녀가 보여준 솔직함은 작가로서의 자질을 믿어 의심치 않도록 했다. 유명인의 타이틀을 지녔던 사람으로서 솔직함은 가장 큰 걸림돌이 아닐 수 없는데 말이다. 비록 그녀가 쓴 소설 '누가 미모자를 그렸나'는 기대에 못 미치는 작품이었지만 소설가가 아닌 에세이스트로서 그녀의 자질을 믿기에 이 책에 기대를 걸어 본다.

 

 

 

 

 

모 방송국에서 방영하는 '응답하라 1988'은 사람들의 입소문을 타고 빠르게 퍼져나가고 있는 모양이다. TV 드라마를 그닥 선호하지 않는 나로서는 먼 나라 얘기처럼 들리지만 말이다. 그래도 이따금 그 시절이 아련히 떠오를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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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현 잡문
안도현 지음 / 이야기가있는집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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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대선에서 박근혜 후보를 지지했던 문학인들은 의외로 많았던 걸로 안다. 그것이 사적인 이익이나 영달을 위해서였든, 자신의 평소 소신에 기인한 거였든 그들은 적극적으로 자신의 뜻을 내보였던 것이다. 그들 중에는 이문열과 같은 대표적인 보수 논객도 있었지만 김지하와 같은 의외의 인물도 있었다. 민주화의 상징처럼 추앙받던 그가 얼토당토 않게 박근혜 후보를 지지한다고 했을 때, 사람들은 다들 의아해 했었다. 그가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속마음이야 본인만 알겠지만 그와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나조차도 뜬금없다는 생각이 아니 들 수 없었다. 지금이야 물론 이문열이나 김지하나 공히 뒷방 늙은이 신세가 되었지만 말이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그들을 비난한다고 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비록 그들의 생각이 나와는 맞지 않는다고 해도 말이다.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옹호하거나 두둔할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다. 그러나 자신이 이 시대의 문학인이라고 자부하는 자라면 누구나 시대의 부름에 자기 목소리를 내야 마땅하다고 나는 믿기에 좌든 우든, 보수든 진보든 자신의 소신을 대중에게 떳떳이 밝히고 지지든 비난이든 감수해야 하는 게 맞다고 본다. 할 말을 삼킨 채 눈치만 보는 것은 문학인의 자세가 아니라고 본다.

 

안도현 시인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지난 대선 당시 문재인 후보 캠프에서 일했다는 이유로 허위사실 공표 및 후보자 비방 혐의로 재판까지 받았던 것이다. 그 후 시인은 시를 쓰지 않겠다며 절필 선언을 하기에 이르렀고... 이 책은 그렇게 시인이 시를쓰지 않고 지내던 시기에 트위테에 올린 짧은 글들을 모아 책으로 엮은 것이다. 말하자면 세상을 향한 시인의 넋두리인 셈이다. 시인의 감성이란 게 어디 안 쓰고 묵혀둔다고 녹이 스는 것도 아니요, 타고난 재능이란 게 때가 되면 멀리 달아나는 것도 아닌지라 시인의 글은 어느새 시가 되고 시인의 그 짧은 글에 독자들은 공감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나'에 의해서가 아니라 나를 읽는 '너'에 의해서 결국 완성된다." (p.26)

 

우리는 이따금 가질 수 없는 것들을 욕심내고, 소중히 간직해야 할 것들을 쉽게 버리는 탓에 세상은 언제나 낙엽처럼 불만만 쌓여가고, 누군가 소망하는 어떤 것을 거들먹거리며 하찮은 것인 양 비하하는 습성 탓에 세상은 온통 잘난 놈들만 득시글거리는 듯 보이게 마련이다. 그렇다고 달리 무엇을 할 것인가. 시인은 시를 쓰고, 영화인은 영화를 만들고, 삶을 짓는 모든 사람들이 또 그렇게 삶을 지을 밖에.

 

"낙엽을 보며 배우는 것 한 가지. 일생 동안 나는 어떻게 물들어가야 하는 것. 떠날 때 보면 안다." (p.17)

 

시인의 심정을 대변하듯 시인의 글에는 '울음', '시', '햇빛', '비', '꽃' 등 일정한 단어들이 끝도 없이 반복된다. 시를 쓰지 않는, 또는 쓰지 못하는 시기에 울음조차 터뜨릴 수 없는 답답한 심정은 문득 시로 향하고, 꽃으로 향하고, 더없이 맑은 햇빛으로 향할 터이지만 그 심정 달랠 길 없어 비처럼 울음 우는 것이라는 걸 나는 알겠다. 박재삼 시인의 시집에는 그리움처럼 '누이'와 '바다'가 반복되는 것처럼...

 

"이 못난 세상을 울음으로 들이받지 않으면 여름을 건너갈 수 없어 매미는 운다." (p.98)

 

시인은 마음이 심란하여 시를 쓰고, 독자는 또 마음이 심란하여 시를 읽는다. 지상낙원이면 시인들 무슨 소용이며, 시인인들 무슨 필요가 있으랴. 세상이 하도 억울하고 어수선하여 마음결에 고운 빗질할 시가 그립고 나 대신 욕이라도 한 바가지 퍼부어줄 시인이 필요한 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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