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 자선단체인 영국의 자선지원재단(CAF)은 해마다 '세계기부지수(WGI : World Giving Index)'를 발표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시는지요? 모른다구요? 제 생각이지만 처음으로 들어보셨다는 분도 꽤 있을 것입니다. 이 단체에서 발표하는 기부지수는 한 나라의 국민이 1년간 자선단체에 기부한 금액, 자원봉사단체에서 활동한 시간, 낯선 사람을 도운 횟수 등 3개 항목을 평가해 100점 만점 기준으로 매겨지는데 2015년에는 66점을 받은 미얀마가 1위를 차지했다고 하더군요. 놀라운 것은 전 국민의 92%가 기부에 참여하고 있다네요.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세계 몇 위쯤 될까요? 2013년에는 45위였던 것이 2014년에는 60위, 올해는 조사대상 세계 145개국 중 64위로 점점 추락하고 있는 추세입니다. 게다가 기부지수는 100점 만점에 35점으로 기부에 참여했다는 응답은 34%, 봉사에 참여했다는 응답은 21%, 모르는 사람을 도왔다는 응답은 50%로 나타났다고 합니다. 그래도 대단하다구요? 그러나 제 생각은 조금 다릅니다. GDO 규모로 따져봐도 세계 10위 수준인 대한민국이 남을 돕는 데는 이렇게 인색할 수가 있는가 말입니다.

 

어제 뉴스에서는 관악구의 한 고시원에서 생활하던 20대 여성이 숨진 지 보름 만에 발견되었다고 하더군요. 프리랜서 언어치료사였던 그녀는 월세도 제대로 못 낼 정도로 생활고에 시달렸다는군요. 저는 그 소식을 듣고 정말 가슴이 아팠습니다. 6,70대의 노인이 죽었다고 해도 마음이 아팠을 텐데 이제 겨우 20대의 꽃다운 나이 아닙니까. 게다가 관악구 신림동에서 19살의 서울대생이 세상을 비관하는 유서를 SNS에 남기고 자살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제가 별 관심도 없을 듯한 내용의 글을 이렇게 장황하게 쓰는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과연 대한민국의 인정이 이렇게 각박해지고 기부 금액으로 봐도 세계 최저가 된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요? 세제혜택이나 기부금 사용의 불투명성 등 여러 원인이 있겠지요. 그러나 우리나라 국민이 기부를 꺼리는 가장 큰 원인은 대한민국이 돈 없이 살기에는 전 세계 어떤 나라보다 위험하기 때문은 아닐까요? 돈에 관한한 대한민국은 세계 최고의 위험국가인 셈이지요. 국민 모두가 그렇게 생각하고 있구요. 그것은 복지수준을 나타내는 지표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그런 까닭에 어느 부모라도 돈이 생기면 자식에게 물려줄 생각부터 하지 남을 돕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는 듯합니다.

 

단 한번만 실수를 해도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주변 곳곳에서 보는데, 게다가 가족이 아니면 그 누구도 나를 돌보지 않는데 나부터라도 돈이 생기면 꽁꽁 쟁여둘 생각부터 하지 누구를 돕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근본적으로 국민 누구나 '내가 어렵게 되더라도 국가나 이웃이 나를 돌봐줄 것이다.'라는 생각이 없으면 기부문화는 있을 수 없는 것이지요. 그리고 열심히 노력하면 언제든 잘 살 수 있다는 원칙이 살아있고, 그것을 직접 목격할 수 있는 나라에서는 기부문화가 활성화 될 수도 있겠지요. 국민 의식의 저변에 가장 기본적인 그 두 가지가 없는데 기부인들 가능하겠습니까. 기부금에 대한 세제혜택보다는 노력하면 잘 살 수 있다는 확신, 원칙이 살아있는 나라, 편법과 비리가 발 붙일 수 없는 나라를 만들면 기부는 자연스레 늘어날 것입니다. 금수저, 흙수저 논리는 현재 대한민국의 민낯이며 대한민국의 젊은이들을 절망 속으로 인도하는 가장 큰 아젠다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허구는 노력하면 잘 살 수 있다는 명제. 그게 슬픈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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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9 05:4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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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12-19 15: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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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뫼비우스 그림 / 열린책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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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생하게(vivid) 꿈을 꾸면(dream) 모두 이루어진다(realization)'고 주장함으로써 단숨에 베스트 셀러 목록에 올랐던 책을 기억하는지요? 당시 무명의 시인이자 초등학교 선생이었던 작가는 그 책으로 인해 일약 유명인이 되기도 했었구요. 신드롬과 같았던 당시의 일을 어찌 설명할 수 있을까요. 그때 그 책을 읽었던 대한민국의 수많은 독자들은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금방이라도 정주영이나 이병철과 같은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갑부의 반열에 쉽게 오를 수 있으리라는 환상에 사로잡혔던 것입니다. 단순히 상상만으로 그 모든 게 가능하다고 믿었던 순진한 독자들은 제 주위에도 여럿 있었습니다. 그것은 한 권의 책이라기보다는 다수의 신도를 거느린 신흥종교와 다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열기가 채 사그라들기도 전에 세계 금융위기로 촉발된 가혹한 현실은 화려한 상상의 세계에서 머물던 그들의 꿈을 실의와 낙담 속으로 내동댕이쳐버렸습니다.

 

우리가 신화와 SF소설에 열광하는 이유도 그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잠시나마 엄혹한 현실을 잊고 상상의 세계에 머물 수 있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신화와 SF소설을 읽음으로써 우리가 사는 짧은 시간대를 앞뒤로 길게 연장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SF영화의 고전처럼 받아들여지는 '스타워즈;만 하더라도 과거에는 영화 속 상상의 세계에서만 머물던 일들이 지금에 와서는 많은 것들이 현실로 받아들여지는 것을 보면 우리는 SF소설을 읽음으로써 생명을 유지한 채 결코 닿을 수 없는 미래를 상상 속에서나마 미리 살아보는 행운을 누리는 것이라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소설 <나무>를 읽다 보면 줄곧 그런 상상에 빠지게 됩니다. 2015년 11월의 어느 날이 아닌, 먼 먼 미래의 어느 날, 예컨대 생명이 있는 모든 피조물이 사라진, 로봇이나 기계인간이 지배하는 지구의 일상을 그려본다거나, 타임머신을 타고 원하는 시간과 공간으로 바캉스를 떠나는 나 자신을 그려보는 것입니다.

 

"나 역시 당신 심장과 똑같은 것을 내 가슴속에 감추고 있어. 지구상에 진정으로 살아 있는 유기체가 존재하지 않게 된 것은 이미 오래전의 일이야. 우리는 모두 기계야. 그럼에도 우리 자신이 살아 있다고 생각하지. 그런 환상을 품도록 우리 뇌가 프로그래밍되어 있기 때문이야. 땅콩 자동판매기와 당신 사이에 차이점이 있다면, 그건 당신이 꿈을 꾸고 있다는 것뿐이야. 꿈에서 깨어나야 해." (p.29)

 

뛰어난 이야기꾼으로서의 작가는 현실에서 건져 올린 소재에 기발한 상상력을 더하여 독자가 읽고 저마다의 상상력을 더할 수 있는 18편의 이야기를 이 한 권의 책에 엮어 놓았습니다. 이 책의 표제작인 "가능성의 나무"는 작가의 생각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컴퓨터가 체스를 두면서 다음 수(手)를 모두 내다볼 수 있다면, 컴퓨터에 우리 인간의 모든 지식과 미래에 대한 모든 가정을 입력해서 인간 사회가 나아갈 길을 단기적으로, 중기적으로, 장기적으로 제시하게 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작가의 생각 말입니다.

 

책에는 단편으로서의 면모를 갖춘, 제법 긴 이야기도 있지만 단편소설이라고 말하기도 민망한 서너 쪽 길이의 아주 짧은 이야기도 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읽는 독자들 중 혹자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게 무슨 소설이야. 이런 거라면 나도 쓸 수 있겠다.'라고 말입니다. 10 이상의 수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어떤 사회에서 더 많은 수를 알고 싶어 하는 한 인간의 지적 욕구와 그의 삶을 다루고 있는 '수의 신비'를 읽을 때는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작가의 글에 대해 혹평하기보다는 '그는 자신의 생각을 모두 이야기 식으로 구성할 뿐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나의 명제를 한 편의 이야기로 바꿀 수 있는 그의 능력이 놀라울 뿐이라고 말입니다.

 

"그는 화살을 맞고 쓰러지면서 마지막으로 이런 생각을 했다. <인간의 정신을 고양시키기 위한 싸움에서는 천장을 높이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바닥이 무너져 내리지 않게 하는 것도 그에 못지 않게 중요하다.>" (p.166)

 

눈치채셨겠지요? 작가는 단순히 이야기로서의 소설을 쓰려고 했던 것은 아닙니다. 독자들이 읽고 상상력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어떤 실마리를 제공한다거나, 작가의 생각이나 철학을 이야기 속에 교묘히 숨겨놓으려 했다는 것입니다. 또는 이 책에 나오는 단편소설이 나중에 작가가 쓴 장편소설로 재탄생하기도 합니다. 제가 특히 감탄하며 읽었던 이야기는 '완전한 은둔자'였습니다. 유명한 의사였던 주인공은 어느 날 자신의 뇌에 딸려 있는 여러 기관들을 절제해달라고 동료 의사들에게 부탁하여 진짜 뇌라고 할 만한 것만 남겨 놓습니다. 그 뇌는 영양액으로 가득찬 표본병 속에 담겨 일정한 온도로 보존되는데 육체와 연결되어 일반인과 같은 삶을 살았던 아내와 자식들은 수명을 다하여 죽게 되지만 뇌만 남은 주인공은 몇 대에 걸쳐 생명을 유지합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탐구하기 위해 자신의 내면으로 떠났던 한 남자의 깊디깊은 사유는' 아이들의 장난에 의해 개의 먹이가 되는 신세로 끝이 납니다.

 

" 죽음을 맞기 직전에 귀스타브는 깊은 내면세계의 밑바닥에 닿았다. 하지만 명상을 끝내면서 그가 발견한 것은 하나의 심연뿐이었다. 그 심연을 보고 그는 아찔한 기분을 느꼈다. 그러자 문득 죽음이야말로 진정으로 흥미진진한 마지막 모험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평온하게 죽음을 받아들였다. 개는 식사를 끝내고 가볍게 트림을 하였다. 그리하여 귀스타브 루블레의 사유 중에서 아직 남아 있던 것들이 모두 저녁 공기 속으로 흩어져 버렸다." (p.185~p.186)

 

미국의 유명한 SF소설 작가이며 사이언톨로지(Scientology)교의 창시자인 엘 론 허바드(L. Ron Hubbard)는 한 강연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인간이 5초 이후의 미래만 정확히 예측할 수 있다 하더라도 인간의 삶은 달라질 것'이라고 말입니다. 면접이나 미팅에서 상대방을 판단하는 시간, 손에 들려진 전단 광고를 읽을까 말까 결정하는 시간 등 5초의 위력은 실로 대단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이 5초 후의 미래를 100% 정확하게 예측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겠지요. '과학기술을 통해 인간의 정신 확장 및 인류 문제 해결을 이룰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이언톨로지 교가 톰 크루즈를 비롯한 유명 연예인에게 매력적으로 보였던 이유도 그런 게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허바드의 주장과는 달리 인간은 미래의 예측에 있어서는 그야말로 젬병이기 때문입니다. SF소설이 매력적인 이유도 미래를 볼 수 없는 인간 능력의 한계를 가능의 영역으로 이끌기 때문일 것입니다. 현실이 아닌 판타지의 세계는 언제나 매력적입니다. 그것이 꿈이든 미래든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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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따금 푸슬푸슬 눈이 내렸다. 숫제 무게가 나가지 않는 듯한 가벼운 눈이었다. 길 건너편의 중학교 운동장에는 하늘색 운동복 차림의 아이들이 칼바람을 아랑곳하지 않고 축구나 농구에 열을 올리고 있었다. 유리창을 통하여 바라보는 소리도 들리지 않는 그들의 몸짓은 너울거리는 불꽃처럼 환하고 푸르렀다. 그것은 차라리 몸짓이라기보다 뜨거운 열기였다.

 

이맘때의 어른들은 저마다 한두 가지씩의 우울과 고민을 잿빛 이불처럼 덮어 쓰고 저물어가는 한 해의 쓸쓸한 뒷모습을 배웅한다. 1월이 오기 전의 풍경은 왠지 무겁고 어둡다. 예년에 비해 경기가 안 좋다거나 슬픈 일이 유독 많았던 한 해여서 그런 것만도 아니다. 그것은 차라리 오래된 관습이라고 해야 옳으리라. 그러므로 어른들에게 있어 12월은 설사 축하해야 할 가볍고 밝은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시종 어두운 표정으로 짐짓 우울을 가장하는 어두운 달이 되곤 한다. 매년 12월이면 깔깔대고 웃는다거나 팔랑팔랑 가벼운 발걸음은 왠지 어색하게만 보인다.

 

주변의 사람들 표정만 보더라도 그렇게 우울할 수가 없다. 마치 내일이면 세상의 종말이 닥치기라도 하는 것처럼 세상의 모든 걱정과 근심을 경쟁을 하듯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12월의 그들에게 희망은 존재하지 않는 듯 보인다. 오직 슬픔과 우울을 나에게 다오 하는 표정으로 작은 걱정과 근심조차 놓치지 않겠다는 결기마저 엿보인다. 1월이면 언제 그랬냐는 듯 다 사라질 감정이지만 말이다.

 

낮게 가라앉은 하늘과 12월의 우울이 두터운 이불인 양 무거운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디. 이럴 때 축하할 일은 가급적 만들지 않는 게 좋다. 축하는커녕 괜히 분위기도 모르는 눈치 없는 사람으로 몰리거나 지금이 그럴 때냐? 하는 식으로 세간의 빈축을 사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바보짓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바보처럼 살아야 할 때가 있다. 12월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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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크린 시간도 내 삶이니까 - 다시 일어서려는 그대에게
김난도 지음 / 오우아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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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혹을 넘긴 사람이라면 누구나 '내가 이런 사람이오' 자신있게 내세울 만한 분야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에 괜히 주눅이 들고 어깨가 움츠러들었던 적이 한 번쯤은 있었으리라 본다. 대학을 졸업하고, 헐레벌떡 취직을 하고, 그러다 또 어물쩡 결혼을 하고, 미처 준비도 하지 못한 채 엄마, 아빠가 되고, 육아서 한 권 읽지 않았는데 학부형이 되었으니 살아온 날들에 대해 괜히 멋쩍고 면이 서지 않는 것이다. 그나마 위안 아닌 위안이라면 남들도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지 못한 나와 같은 범인(凡人)들에게 나는 이렇게 위로하고 싶다. 그쯤 살았으면 좋든 싫든 '관계의 달인' 정도는 된 게 아니냐고 말이다.

 

김난도 교수의 신작 에세이<웅크린 시간도 내 삶이니까>에 대한 리뷰를 쓰려는 당초의 계획에서 조금 벗어난 말이지만 나는 이따금 '관계의 본질'에 대해 생각하곤 한다. 내게는 달리 내세울 만한 분야가 없어서일 수도 있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맺기에 신물이 난 탓일 수도 있겠다. 그렇다고 내가 정치인이나 연예인처럼 억지 웃음으로 사람을 살 정도의 넘치는 인맥을 형성하고 있다는 얘기는 아니다. 다만 내 나이에 모자르지 않게 사람들을 만났고, 그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고 있고 그 관계망 속에서 관계의 본질이 무엇인지 이따금 생각한다는 걸 말하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내가 생각하는 좋은 관계란 기본에 충실한 관계라고 생각한다. 예컨대 부모는 아이의 보호자이자 인생 멘토로서의 역할, 친구는 즐겁게 어울릴 수 있는 상대로서의 역할, 부부는 종족 보존의 역할 등 관계에 있어서의 기본적 역할에 충실하면 관계는 절대 나빠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가 생각할 때 관계 악화의 가장 큰 요소는 '상대방을 미안하게 만드는 것'인 듯하다. 부모가 과도한 관심이나 애정을 쏟음으로써 아이가 미안함을 갖게 되는 것, 친구에게 경제적 편의나 이익을 주선함으로써 그로 하여금 나에게 미안한 마음을 들게 하는 것 등은 관계 악화의 주범이라는 말이다. 어떤 관계라 할지라도 둘 중 어느 한 사람이 미안함을 느낀다면 그 관계는 더 이상 지탱하기 어려워진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끝없이 미안함을 주입하려 한다. 그것이 곧 상대방에 대한 권력임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미안함을 느끼는 '을'과 미안함을 느끼도록 하는 '갑'의 관계는 언제나 그 한계를 지니게 마련이다. 누군가가 안 돼 보여서 자선을 베풀었다고 할지라도 관계 유지가 우선이라고 생각되어지면 자신이 베푼 자선은 잊어야 한다. 상대방도 잊게 만들 수만 있다면 더더욱 좋겠지만 적어도 미안함을 느끼는 상대방에게 대가를 요구하는 듯한 태도를 취해서는 절대 안 될 일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조금의 틈이라도 있으면 그 틈새로 미안함을 주사하려 한다.

 

삶이 힘들다는 것은 인간 관계가 어렵다는 것과 진배없다. 내가 리뷰를 쓰기에 앞서 인간 관계에 대해 길게 늘어놓은 이유도 작가가 이 책에서 절망에 빠진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관계의 차원에서 절망이란 세상 모든 사람에게 미안함을 느끼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대가를 지불해야 할 대상이 너무 많아 제 능력의 범위를 크게 벗어난 것이다. 그들 중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 , 기본에 충실한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었더라면 그는 적어도 최악의 결심을 하지는 않는다. 만약 누군가 자살을 했다면 그에 대한 책임은 모두가 져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책에서 작가는 '1부 그럼에도, 눈부신 날들', '2부 좋은 방황, 비로소 내가 되는 시간', '3부 간절한 것들은 다 일어선다'를 통하여 누구나 절망에 빠질 수 있고, 그 절망을 안고 방황할 수 있으며, 가슴에 새긴 간절함을 통하여 다시 일어설 수 있음을 말하고 있다.

 

"물론 지금 나를 괴롭히는 바로 그 걱정도 마지막 서랍에 담는다. 그다음엔 동시에 두 서랍이 열리지 않도록 최대한 노력하는 것이다. 일할 때는 일거리 서랍만 열고, 집안일을 생각할 때는 가족 서랍만 연다. 어느 순간에도 그 '고통의 서랍'이 동시에 열리지 않도록 집중하는 것이다. 잘 안 되지만, 자꾸 연습하고 노력하면, 완벽하게는 아니더라도 어느 정도는 고통의 서랍을 임시로 닫아둘 수 있게 된다. 이도저도 안 될 때 쓰는 최후의 방법은 '웅크리는' 것이다. 강력한 천적을 만나 보호색 아래서 잔뜩 웅크린 벌레처럼 마음을 줄이고 줄이고 또 줄인다." (p.49 ~ p.50)

 

그러나 이런 말도 들리지 않을 때가 있다. '너는 살 만하니까 그런 말이라도 할 수 있지' 하고 비웃을 때가 있는 것이다. 나와 관계를 맺었던 모든 사람들이 적으로 여겨지는데 전혀 모르는 낯선 사람의 말이 위로로 들릴 리 없다. 나는 우리 사회의 가장 큰 문제가 거기에 있다고 본다. 부모는 부모라고, 선생님은 선생님이라고, 형은 형이라고, 누나는 또 누나라고 주장하면서도 그 사람과의 기본적인 역할 관계는 등한시 한 채 미안함만 주입하려고 열을 올린다는 점이다. 그리고 '미안함'에 기반한 그런 압박과 강요를 '너를 위해서'라는 그럴 듯한 말로 포장하곤 한다.

 

"작년에 아버지와 동년배인 존경하는 장인어른을 떠나 보내기도 했고, 나 자신이 병원에서 짧은 기간이나마 질병과 죽음을 다시 생각하게 된 탓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제일 중요한 점은 어느덧 내가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을 때의 나이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질풍노도 시기에 이르러 당시의 나 못지않게 방황하고 힘들어하는 아들을 보니 더 그런지도 모르겠다. 이제야 희미한 기억 속의 아버지가 선명하게 이해된다. 어쩌면 우리는 아버지에게 진심으로 공감할 때 진짜 어른이 되는지도 모른다." (p.263)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다. 그동안 과도하게 푸근했었다고 말하는 게 맞을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바깥 기온이 낮아지면 낮아질수록 마음도 덩달아 추워지는 걸 느낀다. 살 만하다는 사람보다 죽겠다는 사람이 더 많은 걸 보면 우리가 느끼는 세상은 일 년 내내 영하의 날씨에서 맴돌았는지도 모른다. 그런 세상에서 나도 어쩌면 '나만 위로해 줘' 바랬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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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을 배우다
전영애 지음, 황규백 그림 / 청림출판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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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들여다 보면 들끓는 내 마음이 보인다. 나처럼 요동치며 들끓는 사람들이, 아니 마음들이 모여 펄떡이는 세상이 되고 파도 치는 세월을 만들었으리라. 얼마 전 프랑스 파리에서 있었던 끔찍한 테러 현장을 뉴스로 보면서 들었던 생각이다. 누구를 탓하겠는가. 세상에 대한 분노는 다 나로부터 비롯되는 것을... 프랑스는 그에 대한 보복으로 또 무차별 공습을 진행중에 있다고 한다. 그것이 언젠가 또 다른 보복으로, 크나큰 분노로 되돌아 올 텐데도 말이다. 지금 당장 속 시원하면 그만인 것이다. 그 폭격으로 죽은 사람들은 뉴스에도 나오지 않고, 누구의 애도도 받지 못함을 안다. 다만 분노의 파도를 조금 더 펄떡이게 할 뿐이라는 것도.

 

전영애 교수가 쓴 <인생을 배우다>를 읽었다. 어제, 오늘 겨울답지 않은 포근한 날씨가 이어졌다. 이런 날 한 권의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건 운이 좋은 경우다. 다들 밖으로 밖으로만 나돌아 마음이 싱숭생숭, 들쑥날쑥 춤을 추는데 글자인들 온전히 눈에 들어올 리 없다. 나는 책을 다 읽을 동안 과일을 두어 쪽 먹었고, 무심히 켜진 TV 채널을 돌려 보았고, 그러면서도 여전히 다음에 읽을 페이지를 확인했다. 좋은 책은 독자를 붙잡아 두는 강한 힘이 있는 법이다. 좋은 벗을 두고 헤어지기가 몹시 서운한 것처럼.

 

"그녀는 마지막 문턱 앞에서 어찌 그리 아름다웠을까. 아름다운 글라디올러스 밭을 내게 보여주려고 힘을 다해 걸었다. 꽃을 지고 가는 내 모습을 사진까지 찍어 보내주었다. 무엇일까, 마지막 문턱 앞에서 사람에게 그런 초인적인 배려의 마음과 아름다움을 부여한 힘은? 주저 없이 고통 곁으로 달려갔던 것, 그냥 잠시 그 곁에 머물러 있었던 것. 그러니까 내가 한 번쯤 잘한 일도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한다고 한 사람이 떠난 빈 자리가 채워질 리는 없지만, 인생의 쓸쓸함이 아주 조금은 달래지는 것 같다." (p.74)

 

제목이 촌스러워(?) 대접을 받지 못하는 책이 더러 있다. 이 책도 그런 책 중 하나가 아닐까 싶기도 하고, 소박하다거나 촌스럽다기보다는 너무나 거창해서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하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러나 좋은 책은 결국 알음알음으로 널리 알려지게 마련이다. 괴테 연구의 세계적인 권위자이면서 서울대 독문학과 교수이기도 한 작가는 독일과 한국을 오가며 만난 소중한 사람들과의 인연, 카프카, 니체 등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들의 이야기, 가족과 아이들의 일화를 아주 담담하게 써 내려가고 있다.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은 왠지 그의 삶에서 향기가 나는 것만 같다. 그것은 비단 사람에게만 국한되는 건 아니다. 자신에게 온 선물, 자신이 사서 간직했던 어떤 것, 부모에게서 받은 유품 등 남들에게는 하등 가치 없어 보이는 물건들에 얽힌 수많은 사연들을 귀중히 여기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는 아무리 사소한 일상이라도,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인연이라도 귀를 쫑긋 세우고 귀담아 들어야 할 것처럼 한눈을 팔기 어렵다. 이따금 가슴 뭉클한 사연에 눈물 한 방울 찔끔 흘려야만 할 것 같다. 나도 모르게.

 

"남들이 사는 물건 사고, 또는 남들 따라 사고 싶어 안달만 낼 뿐, 참으로 많은 물건들을 내버리는 시대 - 저렇게 함부로 내다버리는 물건들처럼 사람마저도 가치 없어지는 것이 아닐까, 내버려지는 것이 아닐까 나는 두렵다. 청승맞게도 자꾸, 황량한 땅에서 살아갈 아이들의 메마른 마음을 생각하게 된다." (p.63)

 

나태주 시인은 '풀꽃'에서 그렇게 노래하지 않았나. '자세히 보아야/예쁘다// 오래 보아야/사랑스럽다// 너도 그렇다' 독문학자로 40년간 치열하게 연구하며 학생들을 가르쳐온 작가가 서울대에서 가르치는 '독일 명작의 이해'는 거장들의 작품을 읽고 감상문을 쓴 후, 여러 사람이 토론하고, 학기말에는 책 한 권을 만들어 제출해야 하는 부담이 큰 수업이지만 매번 수강 정원을 초과하는 인기 강의라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괴테 연구에 온 열정을 바쳐온 작가의 삶에 감동하지 않을 학생들이 과연 있을까. 대문호 괴테를 오래 보고, 자세히 보아 온 작가의 두 눈에 예쁘고 사랑스럽지 않은 학생들이 과연 있을까.

 

"젊은 날, 늘 눈앞이 캄캄했다. 세상이 온통 어둠이었다. 무엇을 향한 것인지 알 수 없는 기다림으로 괴로웠다. 그저 괴로웠을 뿐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았다. 언제 내가 저 아득한 어둠을 헤쳐갈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이제야 이 소박한 꽃 앞에서 이런 생각이 든다. 젊은 날 그렇듯 세상이 캄캄했던 것은 내가 그 어둠을 헤쳐서 갈 곳이, 가야 할 곳이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그만큼 힘껏 살아온 것 아닐까." (P.284)

 

허형만 시인은 '겨울 들판을 거닐며'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 겨울 들판을 거닐며 / 겨울 들판이나 사람이나 / 가까이 다가서지도 않으면서 /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을 거라고 / 아무것도 키울 수 없을 거라고 / 함부로 말하지 않기로 했다’ 나의 어설픈 예측이, 쓸모없는 지레짐작이, 내가 가야할 길을 몇 번이나 잘못 들게 하거나, 그로 인하여 쭈뼛거리며 오래도록 서성이며 주저하게 만들었던 그 모든 시간들이 모여 결국에는 이르러야 할 하나의 지향점에 이르게 한다는 사실을 젊은 날에는 알지 못한다. 세상살이에 영 어설펐다는 작가의 고백이 젊은 사람들에게는 인생의 모범답안처럼 읽히는 건 왜일까? 얼마 전 프랑스에서 무고하게 죽은 많은 사람들을 애도하며, 그리고 그 보복 공격으로 이유도 모른 채 죽어갈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나는 짧은 조사(弔辭 )를 한 줄 남긴다.

 

죽음

 

나 또한 뜨거워서

피해버렸네

 

내가 앉았던 그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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