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과 문장들 - 뜯어 쓰는 아트북
허윤선 지음 / 루비박스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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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시절 '봉천동 산 00번지'의 주소로 기억되는 낡은 단독주택 2층에서 국민학교 친구 2명과 함께 자취를 했던 적이 있었다. 우리가 사는 집까지는 남부순환로의 버스 정류장으로부터 상당히 먼 거리였고 우리는 그 길을 매일 걸을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었다. 당시에 나는 군대를 제대한 후 복학을 준비중에 있었고, 전문대학을 졸업한 후 치과기공소에서 일을 배우는 친구와 과외를 하며 대학을 다니고 있는 다른 친구 한 명이 있었다. 2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을 오르자마자 나타나는 방이 우리가 살던 방이었고 복도를 따라 안쪽으로 들어가면 주인집 할아버지가 혼자 사용하는 큰방과 그 방에 딸린 부엌이 있었다. 우리 방에는 따로 마련된 부엌이 없었으므로 출출하여 라면이라도 끓여 먹을 요량이면 언제나 등산용 버너에 불을 붙여 그 위에 물을 가득 담은 양은냄비를 올려 라면을 끓이곤 했었다. 라면이 노랗게 익을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치과기공소에 다니던 친구는 이따금 낡은 기타 반주에 맞춰 유행가 한 곡조를 구성지게 부르곤 하였다. 그때 우리는 너무나 가난했고, 젊음이라는 낭만의 옷자락으로도 다 감출 수 없었던 가난의 추레함이 언뜻언뜻 남들 눈에 띄곤 했었다.

 

음악과 미술 등 예술 방면에는 영 재능이 없었던 나는 악보도 없이 능숙하게 기타 코드를 옮겨 잡던 친구의 연주 실력에 늘 감탄하곤 했었다. 낮에는 캔제품 대리점에서 배달을 하고 밤에는 과외를 하느라 늘 바빴던 나는 다람쥐 쳇바퀴의 일상에 서서히 지쳐가고 있었고 그때마다 친구가 불러주던 유행가 한 자락은 내게 적잖은 위로가 되었다. 하여 나는 밤이 늦어서야 퇴근하는 친구의 귀가를 목이 빠지게 기다리기 일쑤였고, 가끔 제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할 만큼 만취하여 돌아온 친구에게 노래 한 곡을 청할라치면 그는 차마 싫다고 뿌리치지 못하고 가사마저 뒤죽박죽인 노래를 목소리를 죽여가며 조용조용 들려주곤 하였다.

 

버스를 타면 지척이었던 신림동에 부모님과 여동생이 살고 있었음에도 굳이 집을 뛰쳐 나와 월세와 생활비를 부담하며 그 방에서 같이 살기를 청했을 때 친구들은 누구 하나 내게 그 이유를 묻지 않았다. 그것은 나로 인해 월세 부담이 그만큼 줄어들게 된 것에 대한 경제적 이득 때문은 결코 아니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아버지의 술주정과 폭력은 친구들도 익히 아는 바였고, 그것은 젊은 혈기의 내게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예측할 수 없도록 하는 지뢰와 같은 것이었다. 코딱지만 한 작은 방에 장정 셋이 잠을 잔다는 게 영 마뜩치 않았을 텐데 친구들은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내가 과외비를 받고 술과 안주를 사서 들어갔던 날, 나는 저간의 사정을 겨우 말하며 친구들에게 양해를 구했었다. 그때였었나 보다. 치과기공소에 다니던 친구는 내게 속에 있는 울분이든, 기쁨이든, 슬픔이든, 도대체 어떤 감정이든 누를 수 없을 만치 솟아나면 그때마다 글을 쓰는 게 어떠냐며 노트 한 권을 내밀었었다.

 

나는 도무지 운율에도 맞지 않는 시를, 도대체 시인지 산문인지 형식도 없는 글을 그가 준 노트에 옮겨 적었고, 이따금 친구는 앉은뱅이 책상 위에 올려진 그 노트를 자신이 봐도 되느냐 내게 묻곤 했었다. 특별할 것도 없는 비루한 감정의 찌꺼기들을 친한 친구에게 보이는 게 썩 내키는 일은 아니었지만 내가 노트를 들고 외출하지 않는 한 그것은 결국 언제까지고 나 혼자만의 비밀로 간직될 수는 없을 터, 나는 그래도 좋다 승낙하고 말았다.

 

장마가 시작되던 어느 여름날이었나 보다. 친구는 내가 쓴 시에 리듬과 곡조를 붙여 자신의 낡은 기타 반주에 맞춰 흥얼거리고 있었다. 때로는 뭐가 잘못되었는지 골똘히 생각에 잠기기도 하고, 어떨 때는 낙서하듯 끄적거리기도 하면서 한동안 시간을 보내더니 내게 들어보라며 자신이 만든 노래를 들려주었다. 아, 그때의 느낌이란... 친구가 부르는 노래는 시를 쓸 때 나의 감정과는 판이하게 다른, 내 시를 읽고 느꼈던 친구의 감정이 그대로 밴 것이었지만 그런 경험을 단 한 번도 겪어보지 않은 나로서는 뭐라 말할 수 없는 진한 감동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허윤선 작가의 <그림과 문장들>을 읽으며 나도 모르게 그 시절의 일들이 파노라마처럼 떠올랐다. 장르가 다른 두 분야의 예술 작품이 만나 하나의 작품으로 재탄생 되었을 때의 벅찬 감동은 그 시절에 내가 느꼈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어떤 그림을 볼 때면 책이 떠올랐다. 그림보다 더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 책들, 인생의 비밀을 속삭여주던 말들. 가장 외로운 순간 기댈 수 있었던 행간들. 이 책은 그림 앞에서 떠올린 문장이다. 나는 다만 그림의 말을 들었고, 책으로 답했을 뿐이다. 내가 사랑한 모든 책들이, 대신 답을 해주었다. 100점의 그림과 100점의 문장들. 크리스마스 아침을 맞은 아이들의 흥겨운 모습에선 트루먼 카포티의 단편이 떠올랐고, 붉게, 아주 붉게 타오르는 꽃 그림에서는 마르그리트 뒤라스의 고백이, 수줍은 연인들의 모습 뒤에는 몇 번이나 의미를 고민했던 보토 슈트라우스의 문장이 들렸다." (p.4 ~ p.5)

 

이 책을 읽는 다른 사람들도 그렇지 않을까 싶다. 학창시절의 시화전에서 보았던 친구의 시와 그림, 교과서에 실린 어느 시인의 시에 곡조를 붙여 불렀던 노래, 산에서 구한 나뭇등걸에 인두로 새긴 한 구절의 경구, 그 어느 것 하나 감동으로 되살아나지 않았을까. 예술은 결국 당신의 삶 속으로 인도하는 하나의 문이다. 그것이 과거로 향하든 미래로 향하든 시간을 자유로이 왕래하는 그 길은 예술을 통하지 않고는 가능하지 않을 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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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은 어떤지 몰라도 남자들만의 모임에서는 간혹 "얼굴만 예쁜 여자와 성격만 좋은 여자 중 고르라면 너는 누구를 고를 것 같니?" 하는 질문을 받을 때가 있다. 수컷들의 모임이란 종종 본능 이외의 일에는 무관심해지곤 하는 법이다. 그렇다고 사람이 그렇게 이분법적으로 나뉠 리 만무하지만 남자들이 아니라면 그런 극단적인 흑백 논리의 질문을 하지도 않을뿐더러 선호하지도 않을 것이다. 남자들의 단순성은 동성의 입장에서 보면 순수함이지만 여자들은 간혹 '변태'라고 비난하기도 한다. 단순한 것과 변태는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지 잘 모르겠지만.

 

이렇게 단순한 질문이 등장하는 이유는 모르긴몰라도 가뜩이나 복잡한 세상에서 친한 사람들끼리의 모임에서나마 마음 편하고 단순해지고 싶어 하는 남자들의 솔직한 속내가 드러나기 때문은 아닐까 추측하게 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결혼한 남자들의 대부분이 성격 좋은 여자를 선호한다는 사실이다. 반면에 혼전이나 돌싱이 된 남자들은 여전히 얼굴이 예쁜 여자를 선호하고 말이다. 돌싱은 결혼 생활을 겪어보았으니 성격 좋은 여자를 선호할 만도 한데 그렇지 않은 걸 보면 남자들은 대개 좋지 않았던 기억들을 쉽게 잊는 듯하다. 그것도 아마 단순해서 그렇겠지만.

 

안 그런 남자들도 많다고 반론을 펼치거나 남자들을 싸잡아 도매금으로 넘기는 건 옳지 않다고 말하실 분이 많을 줄로 안다. 그러나 약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오십보백보일 뿐이다. 공식적인 자리에서의 남자와 사적인 자리에서의 남자는 분명 다르기 때문에 뭉뚱그려 말하는 것이 옳지 않다고 말하겠지만 나는 지금 사적인 자리에서의 남자를 말하고 있다. 남자는 대체로 공적인 자리와 사적인 자리에서 확연히 달라지기 때문에 어쩌면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공적인 자리에서의 남성과 사적인 자리에서의 수컷이라고 보는 편이 옳지 않을까 싶다. '남자의 단순함은 아메바보다 한 수 위다'라는 말처럼. 문득 생각난 것을 두서도 없이 썼다. 그냥 웃자고 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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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2016-01-03 13: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음 저도 얼굴만 잘 생긴 남자를 만나보고 싶어요. 현빈 같은? ㅎ
꼼쥐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꼼쥐 2016-01-04 10:23   좋아요 1 | URL
세실 님 반갑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만나다 보면 이제는 다 그렇고 그런 사람들로 보이곤 하더군요. 남들과 다를 것 없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그장소] 2016-01-03 17: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웃자고 하셔서 웃었습니다~^^

꼼쥐 2016-01-04 10:23   좋아요 1 | URL
ㅎㅎ

서니데이 2016-01-04 19: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꼼쥐님, 친구신청 받아주셔서 감사해요.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꼼쥐 2016-01-04 20:03   좋아요 1 | URL
제가 무지해서 그런 기능이 있는 줄도 모르고 있었어요. 죄송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2016-01-04 19: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꼼쥐 2016-01-04 20:04   좋아요 1 | URL
제가 오히려 고맙죠. 사실 그런 게 잇는 줄도 모르고...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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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가 되면 나는 가급적 이동을 삼간 채 꼼짝 않고 집에 틀어박혀 있거나 어쩌다 외출을 하더라도 가까운 산을 가볍게 오르거나 집 근처의 마트에서 장을 보는 정도의 지극히 제한적인 활동만 한다. 마치 동면을 하듯 이렇게 움직이지 않는 이유는 단지 귀찮아서일 뿐인데, 이 시기에 어쩌다 뉴스를 보게 되면 내가 마치 상당히 비정상적인 사람처럼 느껴지는 경우가 있다. 바닷가까지 차를 몰고 가자면 대여섯 시간은 족히 걸리는 그 험난하고 무대책의 고속도로를 향해 사람들은 끊임 없이 쏟아져 나오기 때문이다. 어떤 불편도 감수하겠다는 듯 용감하게 길을 나서는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면 혹시 나는 어린왕자가 사는 B612 소행성에서 태어난 외계인이 아닐까 의심하게 된다는 말이다. 나는 오늘도 뒹굴뒹굴 시간만 보내다가 볼 만한 책을 뒤적이고 있다. 뒤적뒤적~~

 

 

내가 황경신 작가를 좋아하게 된 계기는 '모두에게 해피엔딩' 을 읽은 후였다. 그때 나는 세상을 바라보는 작가의 따뜻한 시선도, 글이 이루어지는 신선한 문체도, 작품의 소재도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다고 생각했다. 작가의 전작 읽기를 시도한 적은 없지만 기회가 될 때마다 그럭저럭 읽다 보니 거지반 읽은 듯하다. 작가의 신작이 왠지 반갑다.

 

 

 

 

 

 

 

 

작가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아마도 '내가 사랑한 유럽 Top10'을 통해서였겠지만 나는 그 책이 그닥 뛰어난 작품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책이 형편없다는 게 아니라 작가의 역량에 비해 작품이 떨어진다고 할까, 아니면 대중을 타깃으로 쓴 상업적 성격이 짙다고 할까 아무튼 나는 그런 느낌을 받았다. 오히려 나는 그녀가 쓴 '마음의 서재'나 '헤세로 가는 길'이 더 좋았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 생텍쥐페리를 소재로 쓴 정여울 작가의 에세이인지라 은근 기대가 된다.

 

 

 

 

 

 

 

방송작가 김경희의 부탄 여행기를 고른 이유는 나도 솔직히 잘 모르겠다. 제목에서 딱 멈춰섰을 수도 있고, '김경희'라는 이름에 시선이 갔을 수도 있고, 둘 다일 수도 있다. 이맘때면 움직이는 걸 극도로 싫어하는 나의 성향에 대한 반발심리일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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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중 곡예사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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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모든 부조리를 이해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린다. 그것은 어쩌면 '이해'라기보다 체념에 가까운 굴복이라고 하는 게 옳겠지만, 아무튼 세상에 산재하는 여러 부조리를 이해한다는 건 자신이 속한 사회에서, 혹은 온 지구상에서 파편화 된 개인으로서의 자신은 매우 보잘것없고 미미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과 같다. 거대한 벽으로서 존재하는 부조리, 개인의 힘만으로 바로잡는다는 것은 엄두도 낼 수 없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을 때의 무기력, 그래도 정의로운 신은 존재하는가? 하는 의문, 우리가 그럼에도의 삶보다는 그러므로의 순응적 삶을 선택하는것도 어쩌면 자연스러운 귀결일지 모른다. 도덕적 의식과 실재하는 삶의 괴리가 크면 클수록 미약한 존재로서의 우리는 영웅의 출현이나 신의 강림을 간절히 바라게 된다.

 

폴 오스터의 <공중 곡예사>는 독자들에게 얼핏 황당한 이야기로 비칠 수 있지만 작가는 주인공 월트의 삶을 통해 아홉 살 소년이 어떻게 부조리한 삶을 헤쳐가고 있는지 상세히 그려냄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인간의 나약함과 부조리한 삶에 대해 생각하도록 한다.

 

1924년, 세인트 루이스의 한 거리에서 예후디 사부는 거리의 부랑아였던 월터 클레어본 로울리를 제자로 선택한다. 예후디 사부는 거리를 전전하며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고 있었던 아홉 살의 월트에게 열세 번째 생일을 맞는 날까지 하늘을 나는 법을 가르쳐 주겠다는 약속을 하고, 당시에 월트의 보호자였던 슬림 외삼촌에게서 월트를 빼내 캔자스의 어느 농가로 그를 데려간다. 그곳에는 사부가 돌보고 있던 이솝과 수 아주머니가 있었다. 이솝은 똑똑하지만 몸이 불구인 흑인 소년이었고, 수 아주머니는 두 번째 결혼한 남편으로부터 참혹한 폭력에 시달리다 사부에게 극적으로 구출된 마음씨 착한 인디언 여인이었다.

 

월트는 그곳에서 하늘을 날기 위한 33단계의 혹독한 훈련을 받게 되는데, 그것이 아홉 살의 소년이 견디기에는 힘에 겨운 것도 사실이었지만 근본적으로 예후디 사부를 비롯한 이솝과 수 아주머니를 믿지 못하였기 때문에 월트는 몇 번이나 탈출을 시도한다.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의 탈출은 쉽지 않았고 그때마다 번번이 예후디 사부에게 붙잡히곤 했다. 또 다시 탈출을 시도하던 월트가 눈보라에 갇혀 죽을 고비를 겪게 되는데 살기 위해 무작정 들어갔던 곳이 위더스푼 아주머니의 집이었고 그녀는 예후디 사부의 연인이었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 월트의 후원자이자 조력자 역할을 한다.

 

여러 사람의 돌봄과 극진한 간호 덕분에 다시 살아난 월트는 비로소 마음의 문을 열고 그들에게 다가간다. 이솝이 예일 대학의 장학생으로 입학 허가를 받았을 무렵 월트는 드디어 하늘을 날게 되고 모든 것이 잘 풀려나간다 싶었던 그 때 생각지도 못한 불행이 그들에게 닥친다. 마을의 3K 단원이 그들의 집에 불을 질러 이솝과 수 아주머니를 살해한 것이다. 위더스푼 아주머니의 집에 머물면서 한동안 슬픔에 잠겼던 그들은 하늘을 나는 묘기를 갈고 닦아 전국 순회 공연에 나선다.

 

"우리에게는 죽은 사람들을 기억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건 기본적인 법칙이야. 만일 우리가 그들을 기억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자신을 인간이라고 부를 수 없게 될 거다." (p.155)

 

공연은 순조로웠고 그에 따라 월트는 점점 더 유명해지고 바빠졌다. 공연의 횟수가 늘어남에 따라 부도 함께 따라오는 것은 당연했다. 그러던 어느 날 슬림 외삼촌이 그들을 찾아 온다. 외삼촌은 예후디 사부에게 공연 수익금의 일정액을 요구하였고, 예후디 사부는 단호하게 거절한다. 외숙모를 잃고 경제적 사정이 좋지 않았던 슬림 외삼촌은 예후디 사부의 냉대에 분개하였고 갖은 욕설과 함께 복수를 다짐한다. 그리고 외삼촌의 교활함과 포기하지 않는 근성을 잘 알고 있었던 월트는 불안에 시달린다.

 

"그 나머지 시간에 나를 계속 따라다니던 온갖 불안감을 생각한다면, 공연은 일종의 정신적 휴식, 내 마음을 괴롭히는 두려움으로부터의 진정제가 되어 주었다. 나는 전에 없이 일에 몰두하면서 그것이 내게 주는 자유와 보호를 만끽했다. 그러는 동안 내 정신에 어떤 변화가 일어났고, 나는 있는 그대로의 나, 하루에 한 시간씩 원더보이 월트로 바뀌는 아이 월터 롤리가 아니라 공중에 떠 있을 때를 제외하고는 존재하지 않는 아이인 철두철미한 원더보이 월트로 바뀌어 갔다. 땅은 일종의 환상, 음모와 망령들이 깔린 위험 지대였을 뿐 아니라, 거기에서 일어나는 일 또한 모두 거짓이었다." (p.195~p.196)

 

월트의 예상대로 다시 나타난 슬림 외삼촌에게 그는 납치 감금을 당하기도 하지만, 이에 굴하지 않고 월트의 공연은 매번 성공을 거둔다. 그러나 위기는 다른 곳에 있었다. 사춘기가 된 월트는 성에 눈을 뜨기 시작했고 거기에 집착하면서 심한 두통과 현기증에 시달리게 되자 더 이상 하늘을 날 수 없게 된다. 그러자 사부는 월트에게 '공중 곡예사(Vertigo)'라는 별명을 붙여 준다. (Vertigo에는 현기증이라는 뜻도 있다.)

 

그러나 불행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슬림과 그의 패거리들에게 습격을 받은 사부는 심한 총상을 입고 자살을 하고, 월트는 외삼촌을 죽이고 암흑가로 스며든다. 조직에서 그는 승승장구하여 클럽을 운영하기도 하지만 결국 모든 것을 잃고 군에 입대한다. 제대를 하고 여러 직업을 전전하던 그는 제빵 회사에 취직하여 그곳에서 일하던 몰리와 결혼한다. 그것이 어쩌면 하늘을 나는 원더보이 월트가 온전히 땅에 발을 딛고 사는 법을 익히는 첫번째 단계였는지도 모른다. 월트는 그렇게 몰리와 23년을 살았고 암으로 그녀를 잃었다. 원더보이 월트의 노년은 결국 위더스푼 부인으로 이어지는데...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나는 단 두 번의 쓸 만한 결정을 내렸는데, 그 첫번째는 아홉 살이었을 때 예후디 사부를 따라 기차에 올라 탄 것이고, 두 번째는 몰리 피츠시먼즈와 결혼을 한 것이었다. 몰리는 나를 다시 완전한 인간으로 되돌려 주었다. 내가 뉴어크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 어떤 처지였는지를 생각한다면 그것은 절대로 하찮은 일이 아니었다." (p.380~p.381)

 

폴 오스터의 이 소설은 1920년대 미국인의 성공과 좌절을 원더보이 월트의 삶을 통해 그려내고 있다. 하늘을 나는 것과 같은 다소 황당하고 어이없는 이야기는 우리가 그토록 바라는 성공의 이미지였을 테고, 월트가 성공했던 그 짧은 순간 역시 성공의 덧없음을 말하고 있을 터였다. 월트는 결국 지면에 발을 딛고 평범한 사람으로 살아가는 법을 익히기 위해 그가 어렸을 때 예후디 사부로부터 받았던 혹독한 훈련보다 몇 배나 더 길고 처절한 삶을 경험해야만 했다. 예후디 사부는 죽으면서 그에게 말했었다. '좋았던 시절들을 기억하라'고. 세월의 위대함은 개별적인 인간의 삶을 결국에는 보편적인 어떤 것으로 만든다는 점이다. 우리는 그렇게 특별하지 않은 모습으로 늙어갈 뿐이다. 결국 우리는 절망을 통해 하늘을 나는 법을 익히고 하늘을 날았던 기억으로 자신에게 다시 찾아온 절망의 순간을 견딜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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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 - 중 - 타인의 증거
아고타 크리스토프 지음, 용경식 옮김 / 까치 / 199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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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의 기분이라는 게 언제든 뜯었다 붙일 수 있는 싸구려 벽지처럼 마음을 먹는다고 쉽게 달라지는 건 아니지만 평소에 하지 않던 싱거운 농담 몇 마디를 던지고 나면 그럭저럭 나아질 때가 있습니다. 되지도 않는 농담 몇 마디에 우울했던 기분이 갑자기 좋아지는 것 같지는 않고 조금 가벼워진다고나 할까, 아무튼 우울하거나 심각했던 일들이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버거워만 보이던 세상 일들이 '까짓것' 하면서 한껏 허세를 부리게도 되죠. 한일 위안부 협상 발표가 있었던 엊그제, 기분도 꿀꿀해서 괜한 농담을 몇 마디 던졌더니 만나는 사람들마다 '무슨 좋은 일 있느냐'며 되묻더군요. 평소 위트와 농담에는 재능이 없는 사람이란 걸 잘 아는지라 '더 이상의 썰렁개그는 참아주세요' 하는 의사표시였는지도 모르지만 말입니다.

 

아고타 크리스토프의 소설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을 읽다 보면 작가의 모국인 헝가리도 '지랄 같은 역사를 가진 나라구나'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다고 이 소설의 주인공인 클라우스가 헝가리의 역사가 부끄러워 국경을 넘었던 것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아무튼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상) - 비밀 노트>의 마지막 부분에서 쌍둥이 중 한 명인 클라우스는 국경을 넘어 떠나고 다른 한 명의 쌍둥이인 루카스는 할머니 집에 홀로 남게 됩니다. 소설의 구성을 복잡하게 하기 위해서는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중) - 타인의 증거>에서 클라우스와 루카스의 삶을 교차하며 보여주는 것도 그럴 듯해 보입니다만, 작가는 전적으로 할머니 집에 남은 루카스를 위주로 소설을 전개합니다. 마지막 부분에서 클라우스가 등장하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아무튼 클라우스는 떠났고 루카스는 남았습니다. 혼자가 된 루카스는 자신의 삶을 추스르고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노력합니다. 가축을 돌보고, 농사일을 하며, 늙어 거동조차 어려운 신부님의 끼니를 챙기고 소일거리 삼아 같이 체스를 두기도 합니다. 그러던 중 근친으로 기형아를 낳은 야스민을 만나게 됩니다. 루카스보다 두 살 위인 야스민은 자신의 아이 마티아스를 버릴 생각이었죠. 루카스는 자신의 집에서 그들과 함께 살게 됩니다. 루카스는 신체적으로는 불구이지만 똑똑하고 총명한 마티아스를 유난히 예뻐합니다. 혁명의 여파로 웬만한 책은 모두 사라져버린 까닭에 루카스는 도서관을 찾게 되고, 그곳에서 클라라를 만납니다. 루카스는 엄마뻘인 클라라에게 마음을 빼앗기고, 매일 밤 마을의 끝에 있는 그녀의 집을 찾아갑니다.

 

클라라의 남편 토마스는 혁명의 와중에 누명을 쓰고 처형되었습니다. 남편과 사별한 클라라는 아무도 찾지 않는 도서관을 지키며 하루하루를 살고 있었지요. 온통 클라라에게 마음을 뺏긴 루카스를 뒤로 하고 야스민은 도시로 떠납니다. 그녀의 아이인 마티아스는 오롯이 루카스의 책임으로 남겨집니다. 루카스는 마을의 외곽에 있던 할머니의 집을 처분하여 빅토르 씨의 서점을 인수합니다. 순전히 마티아스를 위해 내린 결정이었습니다. 마티아스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어떻게든 아이들과 어울려보려 했지만 극심한 따돌림과 폭력으로 결국 학교를 포기하게 됩니다. 루카스는 홀로 남겨진 마티아스를 위해 또래의 아이들에게 서점을 개방합니다. 책일 읽고 그림도 그릴 수 잇는 공간으로 만든 것이지요. 그곳에 아그네스와 사무엘이 방문합니다. 아그네스의 남동생인 사무엘은 마티아스와 비슷한 나이였습니다.

 

자신의 남편을 죽인 사람들에게 복수하겠다는 일념으로 클라라마저 떠나고 아그네스에게 관심이 있었던 루카스는 그녀와 사무엘을 집으로 초청합니다. 온통 사무엘에게 관심을 두는 듯한 루카스의 태도에 마티아스는 질투를 느끼고 끝내 자살합니다. 어쩌면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였을지도 모를 마티아스가 그렇게 허무하게 죽자 루카스는 실의에 빠져 지냅니다. 할머니의 묘 근처에 마티아스를 묻고 매일 그곳을 찾던 루카스는 결국 그것도 귀찮아 마티아스의 유골을 캐내어 집으로 가져옵니다. 그의 집에는 루카스의 엄마와 이복 동생, 마티아스의 유골이 걸리게 되었고, 루카스는 페테르 씨에게 서점과 자신이 쓴 비밀 노트를 맡깁니다.

 

"젊은 날에 신을 섬기도록 해라, 불행한 날이 닥치기 전에, 그리고 네 입에서 '나는 살고 싶지 않다'라는 말이 나오기 전에." (p.97)

 

루카스가 사라진 마을에 국경을 넘었던 클라우스가 나타납니다. 소설은 이제 결말을 향해 치닫는 듯한 느낌입니다. 제목에서 말하는 것처럼 '존재의 세 가지 거짓말'이 그 모습을 드러내려 하는 것이지요. 페테르 씨는 클라우스에게 루카스가 쓴 비밀 노트 다섯 권과 서점을 넘깁니다. 그러나 그 나라의 호적에 등재되지 않았던 클라우스는 세 번에 걸쳐 체류 연장을 하게 되고 결국에는 본국 송환을 요청받습니다. 소설은 'D대사관에 보내기 위해 K시 당국이 작성한 조서'를 끝에 배치함으로써 의미심장한 결말을 예고합니다. 과연 루카스는 실제로 살았던 인물인지, 클라우스는 정말 쌍둥이였는지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잊어버리게. 인생은 그런 거야. 모든 게 시간이 지나면 지워지게 마련이지. 기억도 흐릿해지고, 고통은 줄어들고. 나는 사람들이 어떤 새나 꽃을 기억하듯이 내 아내를 기억하고 있지. 그녀는 인생의 기적이었어. 그녀가 사는 세상은 모든 게 가볍고, 쉽고, 아름다웠지." (p.149)

 

한 개인에게 지난 일이란 거짓말처럼 아득한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추억이나 기억도 확실하다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 한 나라의 역사를 두고 누구는 왜곡되었다, 그렇지 않다 말하는 것도 어찌 보면 참으로 한심한 노릇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 자신의 짧은 인생도 다 기억하지 못하는데 유구한 역사의 흐름을 어찌 다 기록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역사의 흐름에서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되는 것도 있게 마련이지요. 예컨대 일본 제국주의 시절에 있었던 위안부와 같은 인권 유린의 흔적들 말입니다. 그것이 돈을 통한 협상으로, 국가의 이익을 위한 한 단계로 치부되고 덮어질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있다면 큰 착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자기 인생에서 그런 큰 실수를 할 수 있어. 우리가 그걸 깨달았을 때는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결과가 생긴 뒤지." (p.214)

 

인권이 강화되고 잘못된 과거에 대해서는 통렬한 반성을 요구하는 추세에 역행하여 전 세계의 조롱거리가 된 한일 간의 위안부 협상은 그렇게 막을 내렸습니다만 국론 분열과 반쪽짜리 대한민국은 오늘을 기점으로 다시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협상을 서둘렀던 그들의 변명이 몇 가지 거짓말로 구성되었던 것인지 후세의 역사는 낱낱이 밝혀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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