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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루, 내 영혼에 바람이 분다 - 그리움을 안고 떠난 손미나의 페루 이야기
손미나 지음 / 예담 / 2015년 11월
평점 :
절판


불과 몇 년 사이에 여행기를 많이도 읽었다. '여행작가'라는 새로운 직업군에 편입된 사람들이 꾸준히 증가한 탓도 있을 테고, 다람쥐 쳇바퀴 돌 듯 반복되는 일상에 지쳐 뭔가 특별한 걸 원했는지도 모른다. 지금 당장 떠날 수 없는 사람들에게 여행기만큼 달콤한 유혹이 또 있을까. 책의 곳곳에 등장하는 푸른 하늘과 이국적인 건물들, 그리고 넘실대는 파도와 마냥 행복한 듯 보이는 관광객들. 그러나 여행기를 탐독하며 한 켜 두 켜 부러움이 쌓이는 동안 여행기가 주는 위로와 대리만족의 기쁨도 서서히 사그라들었다.

 

최근 몇 달 동안은 여행기를 읽지 않았다. 유행하는 여행기라면 다들 비슷비슷해 보였다. 내용보다는 사진이 더 많은 여행기를 굳이 시간을 내어 읽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작가는 분명 다른 사람인데 마치 한 사람이 장소만 바꾸어 여행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여행기라면 이제 하도 많이 읽어서 신물이 날 지경이었다. 그러나 몇몇 생각나는 여행기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유성용의 '여행생활자'나 후지와라 신야의 책들, 정희재의 '나는 그곳에서 사랑을 배웠다'와 박준의 '온 더 로드', 빌 브라이슨의 '발칙한 유럽산책'과 이병률의 '끌림', 호시노 미치오의 '여행하는 나무'와 류시화의 '하늘 호수로 떠난 여행', 오소희의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겠지', 오다나의 '미치도록 즐거워', 정유정의 '히말라야 환상방황', 그리고 손미나의 '스페인 너는 자유다'.

 

그 외에도 많았다. 여행기라기보다는 외지 생활기라고 해야 옳을 듯한 무라카미 하루키의 '먼 북소리'와 기억나지 않는 그렇고 그런 여행기들. 내게 손미나는 아나운서 손미나보다 여행작가 손미나로 기억되고 있다. 그렇게 된 데에는 그녀의 첫작품이었던 '스페인 너는 자유다'가 매우 인상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어 출간된 '태양의 여행자'를 비롯한 몇몇 책들은 나를 실망시켰다. 말하자면 이 책 <페루, 내 영혼에 바람이 분다>는 내가 읽은 손미나의 두 번째 여행기인 셈이다.

 

"바다처럼 넓게 펼쳐진 녹색 평원에 드러누워 있자니 내가 잔디가 되고 바람이 되고 구름이 된 것만 같았다. 어쩌면 인간이란 애초에 잔디나 바람 같은 존재와 다를 바 없는지도 모를 일이다. 우리는 그저 모든 것을 순리에 맡긴 채 주어진 삶을 살아내면 되는 것이다." (p.154)

 

마추픽추로 우리에게 너무도 잘 알려진 페루, 작가는 능통한 스페인 어 덕분인지 페루 현지인들과 쉽게 동화되어 그들 속으로 녹아든 듯했다. 아마존 열대 밀림과 티티카카 호수, 쿠스코와 바예 사그라도, 나스카 라인과 콜카 캐니언의 콘도르 등 우리에게도 익숙한 페루의 명소를 마치 현지인 안내자처럼 소개한다. 그러나 나의 괸심을 끌었던 것은 그런 명소가 아니었다. 단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지구 반대편의 명소이지만 나는 이미 텔레비전과 다른 매체를 통해 얼마나 많이 보아왔던가. 이제 그런 것들은 나의 호기심을 자극하지 못했다. 그보다는 작가가 만났던 현지인들과 그곳에서의 에피소드, 또는 자연 속에서의 작은 깨달음에 더 눈길이 갔다.

 

"젊은 아가씨, 우리의 땀이 곧 우리의 삶이에요. 인생은 그런 거지요. 어디에서 살든 부자든 가난한 자든 똑같아요. 중요한 건 가슴에, 그리고 우리의 영혼에 있죠. 난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해요. 당신도 부디 행복하세요."(p.92)

 

위의 인용문은 푸에르토 말도나도에서 만난 작은 식당의 여주인이 작가에게 들려준 말이었다. 우연처럼 다시 만난 택시 기사 그레고리의 따뜻한 환대와 스페인 유학 시절에 만나 우정을 나누었던 친구 이야와의 만남 그리고 마추픽추 동행. 페루를 떠나기 전날 이야 가족의 초대. 여행은 이처럼 뜻하지 않은 작은 우연의 결합으로 인해 더 풍성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미나씨, 살다 보면 아주 우연히 소중한 인연들을 만날 때가 있죠. 그것이 아무리 찰나라 해도 인생을 두고 영혼을 행복하게 해줄 만남들이 있어요. 그런 친구에게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니 너무 부담 갖지 마요." (p.273)

 

잠시 동안 사귄 외국인 친구 그레고리가 작가의 돌아가신 아버지의 영혼을 달래기 위해 의식을 치러주고 작가에게 건넨 말이다. 그에 더하여 그레고리는 작가를 위해 음식을 장만하여 자신의 집에 초대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그야말로 깜짝 파티인 셈이었다. 가난하지만 손님을 극진하게 대접하고 우정을 나누고 서로 사랑할 줄 아는 그들에게 작가는 깊은 감동을 받았던 듯하다. 우리가 시시각각 여행을 꿈꾸는 이유는 바로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여행은 인생의 대로에서 길을 잃은 사람들을 단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인생의 샛길로 이끈다는 것이다. 그곳에서 우리는 우연처럼 작은 행복을 발견하기도 한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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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하고 싶은 얘기는 꽁꽁 숨겨둔 채 실컷 변죽만 울리다가 그냥 돌아섰던 기억, 혹시 있으신지. 다 기억나지는 않지만 제게도 그런 경험 한두 번쯤은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물론 사춘기 시절의 수줍은 고백담일 수도 있고 전혀 다른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요. 요즘 젊은이들 중에는 할 말 못하고 애면글면 속만 끓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은 듯하지만 말입니다.

 

청소년기에 저는 누구나 어른이 되면 자신이 하고 싶은 얘기를 언제 어느 때나 장소를 가리지 않고 할 수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게 민주주의라고 교과서에서 배웠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그런 자유는 청소년기에 더 많이 주어진다는 사실을 어른이 되고서야 알았습니다. 참 순진하다구요?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만 그 시절에는 저보다 더 순진한 사람들이 어디를 가나 넘쳐나던 시절이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어른들에게 있어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할 수 있는 자유는 지극히 제한되어 있다는 사실을 저는 어른이 되고도 한참 지나서야 알았습니다.

 

그러나 현실에서 말로 다 하지 못하는 답답함은 오래 가지 않았습니다. 제가 하고 싶었던 말들이 책에서는 속 시원할 정도로 잘 정리되어 있더군요. 어렸을 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었던 책이 어른이 된 후에도 많은 위안이 되리라고 전혀 생각지 못했었는데 제게는 그야말로 신세계나 다름없었습니다. 논리는 없고 오직 이념만 존재하는 대한민국의 현실에서 책에 빠져들 수 있는 자유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다행인지요. 이따금 '제국의 위안부'와 같은 한줌 값어치도 없는 책들이 출간되기도 하지만 그거야 얼마든지 무시하고 지나칠 수 있겠지요.

 

무슨 말만 하면 종북이니, 좌빨이니, 수구꼴통이니 하는 이념적 단어들이 모든 논리를 빨아들이는 블랙홀과 같은 역할을 하는 대한민국에서 자신의 생각을 대변하는 책을 얼마든지 읽을 수 있다는 것은 그나마 다행이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저는 가끔 대한민국에서는 말할 수 있는 자유보다 쓸 수 있는 자유가 더 폭 넓게 보장되는구나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오늘도 읽을 수 있는 자유를 만끽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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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6-01-14 1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그런 면도 확실히 있네요.^^
그런데 책에도 아직 그 경계는 있는듯해요.
나쁜책 좋은책 ..하며..표현에 대한 고르기 랄까..
언어 등급이 있는것 같다고 느끼는 적도 있어요.
약간 더 나가면 외설처럼 빼버리고, 확 나가지
못하는 애매한 선 위에 문학이 있는건 아닌가...
할 적이 있거든요.ㅎㅎㅎ

꼼쥐 2016-01-15 14:46   좋아요 1 | URL
그렇죠. 아무래도 유교적 전통이 오랫동안 지켜져 온 우리나라에서 서구나 일본처럼 적나라하게 쓴다는 건 아직 익숙하지 않은 측면이 있는 것 같아요. 그런 면에서 답답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사회 현상을 이해하는 데는 책이 좋은 것 같아요. 누구를 붙잡고 대화하다가 괜한 소리로 한발짝도 더 나가지 못하는 것보다는.

[그장소] 2016-01-15 21:04   좋아요 0 | URL
맞아요..거침없는 표현이나 그 아슬한 경계를 문학이 대변해주기도 하죠.저도 그래서 책이 도피의 혹은 우회의 수단이라고 늘 생각하는 1인 입니다.^^

우민(愚民)ngs01 2016-01-14 18: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표현의 자유는 당연히 존중되어야 하지요
그래도 가끔은 출판계에도 기득권 세력이 그들만의 홍보와
텃새 나아가 끼리끼리 표절도 묵인해 주는 나쁜 관습은 없어져야 하지 않을 까요?

꼼쥐 2016-01-15 14:48   좋아요 1 | URL
작년에 있었던 신경숙 작가의 표절 문제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죠. 어디 그분 한 사람뿐이었겠습니까. 다만 그분이 유명한 죄로 시범케이스가 되었겠죠. 출판계도 의외로 좁아서 한다리 건너면 다 아는 사람들이니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넘어간 경우가 많았겠죠. 당연히 고쳐져야 할 일이지만.

초딩 2016-01-15 14: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콜로세움의 던져주는 빵을 게글스럽게 먹느니, 담장아래에서 참을 인자 세번 쓰며 책을 읽는게 좋은 것 같습니다. 그러다 백년에 한 번 비슷한 사람을 만나면 더 없이 좋을 것 같구요. 딱히 바라진 않지만 :-)

꼼쥐 2016-01-15 14:50   좋아요 2 | URL
정말 멋진 비유입니다.^^
작금의 세태를 정확하게 짚어주는...
 
뜨겁게 안녕 - 도시의 힘없는 영혼들에 대한 뜨거운 공감과 위로!
김현진 지음 / 다산책방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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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한이 지나고부터 '확실히 겨울은 겨울이구나.' 하는 생각을 매일 아침 하게 된다. 빌딩과 빌딩 사이로 부는 차갑고 매운 바람이 내 몸에 훅 끼칠 때마다 귀와 코끝에 알싸한 자극이 전해졌다. 차 없이 걸어서 다니는 것의 장점은 건강도 건강이지만 이처럼 계절의 감각을 놓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칼바람이 부는 겨울 추위를 몸으로 직접 느껴보지도 않은 채 단지 차창 밖의 풍경만 보고 계절을 가늠할 수는 없는 법이다. 그것은 마치 감정을 철저히 배제한 채 책을 읽는 것과 하등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낮이 되어서도 날씨는 풀리지 않았다. 미농지처럼 얇은 햇살이 사람들의 발길을 밖으로 한껏 유인하는 듯 보였지만 인적이 끊긴 거리에는 냉냉한 한기만 흐르고 있었다. 다만 바람이 아침보다 조금 잦아들었을 뿐이었다. 어제는 추위 때문이었는지 모처럼 들른 도서관에서 김현진의 <뜨겁게 안녕>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제목이 조금 촌스럽거나 야하다는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결국 대출을 결심했던 건 역시 '뜨겁게'의 위력이었다. '또 다시 말해주오 사랑하고 있다고'로 시작되는 노래가 생각나기도 했고 말이다.

 

"그때도 철이 덜 들어 감동하기만 하고 서른이 넘은 지금에야 뭔가를 얻기 위해서는 소중한 것을 반드시 희생해야 한다는 것을 아주 조금 알 것도 같지만, 어쨌거나 술집 아줌마들이야말로 나를 인간으로 만들어준 선생님들이었다. 이모는 그중에서도 큰스승이었다. 입술을 깨물고 무심하게 그냥 참는 것, 몸이 놀고 자빠지려고 하면 후들겨 패는 것, 자꾸 편하려고 하는 걸로는 아무것도 얻을 수 없다는 걸 아는 것, 좋은 결과를 내려면 어떨 때는 필사적으로 참아야 한다는 것, 그렇게 어차피 세상은 참고 참고 또 참는 과정의 연속이라는 것, 왕십리가 결국 내게 가르친 것은 입 다물고 버티는 연습이었다." (p.106 ~ p.107)

 

이야기는 책의 제목에서 연상되는 분위기와는 영 딴판으로 흐르고 있었다. 내가 오늘 자비를 베풀 생각이라곤 눈곱만치도 없는 하늘을 향해 약간의 온기를 구차하게 빌었던 것처럼 말이다. 말하자면 이 책은 꽃띠 여자의 순애보도 아니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인간들의 '남녀상열지사'는 더더욱 아니다. 강압적이기만 한 고등학교를 박차고 나와 줄곧 글을 쓰고 있다는 작가의 서울 생존기라고나 할까 아니면 이사기라고 할까? 아무튼 돈 없고 빽 없는 그녀가 서울이라는 거대도시에서 살아남기 위해 이곳저곳을 전전했던 기억들을 그녀 나름의 방식으로 정리하여 기록한 웃픈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상도동에서 남창동으로, 홍대입구에서 왕십리로, 다시 옥수동으로 그녀는 서울의 외곽, 변두리, 달동네로 지칭되는 곳으로 차츰 밀려났다. 나도 겪어본 일이지만 서울에서의 이사는 본인의 의사와 크게 상관이 없다. 뼈가 빠지게 일을 해도 집값 상승의 속도를 추월하지 못기 때문이다. 소득과 집세의 속도 차이는 오십 씨씨 스쿠터와 람보르기니의 속도에 비견될 정도만큼이나 큰 것이고 세월이 갈수록 그 격차는 더 크게 벌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라는 걸 서울에 살아본 사람이라면 다 아는 일이다. 특별시민의 지위를 끝까지 포기하지 못한 채 밀리고 밀리다가 결국에는 어쩔 수 없이 경기도민의 신분을 취득하게 되는 과정은 흔하디흔한 이력서이다.

 

"옥수동에서 마지막으로 살았던 집에는 방이 세 개에 광활한 다락이 두 개나 있었다. 그뿐 아니라 손바닥만 한 마당도 딸려 있었다. 그런데도 강남에서 월세 얻기도 어려운 돈으로 전세를 얻을 수 있었다. 물론 서울에서 그렇게 살 수 있는 세월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이다. 나는 아마 곧 서울에서 밀려날 것이다. 더욱 서울 외곽으로 돌다가 경기도로, 거기서 더 간 지방 어딘가로 떨려날 것이고 그렇기에 더 애틋하게 남아 있는 우리 집, 옷장만 한 화장실이 두 개나 있던 희한한 우리 집, 그리운 우리 집." (p.146)

 

작가는 이제 겨우 삼십대 초반이라고 했다. 젊디젊은 나이의 작가가 애 서넛은 족히 딸렸음직 한 아줌마 포스를 폴폴 풍기는 건 왠지 짠하고 안쓰럽다. 더 늦은 나이에 경험해도 될 일을 너무 이른 나이에 많은 걸 압축해서 겪은 사람들을 보면 나도 모르게 가슴이 답답해진다. 그렇게 되고 싶어서 된 사람이 있을까마는 '세상이 왜 이렇게 불공평하고 사는 건 또 왜 이렇게 지랄같냐' 하늘을 향해 삿대질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다.

 

"여자들이 직장 생활 2~3년차 정도가 되면 루이비통 스피디백 하나씩은 산다고 한다. 남자들은 차를 사는 것 같다. 그 백이 뭐 꼭 그렇게 예쁘다든가 그래서가 아니라 뭐 하나 할부로 질러놔야 직장 다닐 맛도 나고 직장에 억지로 좀 매어두는 고삐 같은 의미도 있고 뭐 그래서 그런 게 아닌가 싶은데, 내 경우는 술 마시다가 잃어버릴 염려가 있는 고가품은 절대로 사지 않기도 하거니와 그럴 여유도 없었다." (p.225)

 

지난 연말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송년 모임이 있었다. 술도 못 마시는 까닭에 대부분 1차만 참석하고 몰래 빠져나오곤 했지만 이따금 피치 못할 사정으로 끝까지 남아야 할 경우에는 뒷처리가 오롯이 내 몫으로 남았다. 술이 떡이 되도록 취한 사람을 부축하여 택시를 잡아 보내거나 대리기사를 불러 잘 부탁한다는 인사를 몇 번이나 해야 하는 일은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는다. 그보다 더한 것은 토하는 사람의 등을 두들겨주거나 제 몸조차 가누지 못하는 사람의 옷 여기저기에 묻은 토사물을 대충이라도 닦아내는 일일 것이다. 이래저래 연말연시는 힘들다. 용맹정진을 하는 스님의 마음이 아니고서는 버텨내지 못한다. 이렇게 몇 십 년 수도를 하면 성불할지도 모른다. 작가도 이 시각 그렇게 참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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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체국
찰스 부코스키 지음, 박현주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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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스 부코스키의 작품을 읽으면 왠지 사는 게 조금 가벼워지곤 한다. 그가 쓴 글들이 처음부터 욕심이나 집착이 없어서일 수도 있고, 세상의 부조리와 삶의 허무를 소설 속의 한 문장 한 문장에 밀어넣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쨌거나 그의 시선은 조금 삐딱하게 기운 채 세상을 경멸하거나 비웃는다. 소설의 탄생이 애초에 그렇다는 걸 말해주기라도 하려는 듯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개 도덕이나 규칙의 굴레에서 벗어난 노골적이면서도 직설적인 말과 행동을 보여준다.

 

"그럭저럭 괜찮은 여자, 같이 자기 좋은 여자였지만 그런 여자들이 다 그렇듯이 서너 밤 자고 나자 재미도 시들해져 다시 가진 않았다. 하지만 이런 생각을 떨칠 수는 없었다. 세상에, 집배원들은 편지를 넣고 다니면서 여자들하고 같이 눕기도 하는구나. 이거 나한테 딱 맞는 일인데. 오, 이거야, 이거. 이거라고." (p.12)

 

찰스 부코스키의 소설 <우체국>에 나오는 '헨리 치나스키'는 크리스마스 즈음 '거기 가면 개나 소나 다 써준다'는 얘기를 듣고 임시 집배원으로 일하던 중 한 여자와 밤을 보낸 후 정식 집배원이 되기로 결심한다. '편지를 넣고 다니면서 여자들하고 같이 눕기도 하는' 집배원이라는 직업이 천직처럼 여겨졌던 것이다. 그러나 보결 집배원으로 시작된 그의 일과는 만만치 않았고, 여자랑 같이 누울 수 있는 기회를 은근히 기대했었지만 그런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았다. 게다가 현장 주임이었던 존 스톤의 눈 밖에 난 까닭에 그의 순로는 항상 가장 힘들고 어려운 곳을 배정받았다.

 

3년간의 힘든 보결 집배원 생활을 마친 그는 마침내 '정규 집배원'이 되었으나 늘 술과 도박 여자에 빠져 살던 그는 여전히 현장 주임의 감시 대상 일순위였다. 어느 날 규정 위반으로 여러 장의 경고장을 받아든 그는 결국 3년 반만에 사직서를 제출한다. 백수가 된 헨리는 경마를 하며 소일한다. 같이 동거하던 여자 베티가 타자수로 취직하면서 그와 헤어지고 그는 텍사스 출신의 젊은 여자 조이스를 만나 결혼했다. 그러나 다시 빈털털이가 된 그는 조이스와 함께 텍사스로 향하지만 조이스의 부모와 조부모는 그가 혹시 그들의 재산을 탐내어 조이스와 결혼하지 않았는가 의심한다. 조이스의 권유에 따라 그는 결국 우편 사무원으로 다시 취직하지만 그들은 결국 이혼한다.

 

스툴에 앉아 우편물을 분류하는 일을 하면서 그는 현장 주임의 감시하에 정해진 시간 내에 분류를 마쳐야 하는 표준화 된 노동생산성의 노예가 된다. 이 때의 미국은 빈틈없는 작업방식의 구축과 기계적 반복작업의 실행을 바탕으로 노동생산성을 극대화하는 '포드주의'가 지배하던 시기였다. 비인간적인 작업환경 속에서 서서히 죽어가는 주변 사람들. 그러나 헨리는 이러한 체제에 견디지 못하고 반항한다. 그가 반항하는 방식은 주로 섹스와 술이었다.

 

"우체국 업무는 하룻밤 열두 시간 근무에다가, 현장 주임을 더하고, 우편 사무원들을 더하고, 살덩이들 틈에서 제대로 숨도 쉴 수 없는 분위기를 더하고도, 거기에 <비영리> 식당에서 만든 쉰 음식까지 참아야 하는 일이었다." (p.126~p.127)

 

헨리가 마지막에 만난 여자는 페이였다.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언제나 검은 옷을 입고 다니는' 반전 운동을 하는 페이는 전남편에게서 받는 생활비 수표로 근근이 살아가는 여자였다. 페이는 이따금 워크숍에 참석하고 글을 쓰기도 했다. 페이가 임신을 하고 딸을 낳았다. 그럼에도 헨리는 기계의 부속품처럼 반복되는 고된 일로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다. 페이는 결국 딸을 데리고 집을 나간다.

 

"지나간 11년이 머리를 뚫고 지났다. 이 일이 사람을 갉아 먹는 것을 봐왔다. 사람들은 흐늘흐늘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도지 우체국에 지미 포츠라는 직원이 있었다. 내가 처음 왔을 때 지미는 흰 티셔츠를 입은 건장한 사내였다. 이제 그때 그 사람은 사라졌다. 그는 바닥에 가능한 한 가까이 붙어 앉아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발로 버티고 있었다. 너무 피곤해서 이발도 못 했고 3년 동안 똑같은 바지를 입었다. 일주일에 두 번 셔츠를 갈아입었고, 아주 천천히 걸었다. 우체국이 그를 살해한 것이다. 그는 쉰다섯 살이었다. 퇴직까지는 7년이 남아 있었다." (p.219~p.220)

 

헨리는 결국 사표를 내고 다시 고주망태로 변한다. 그는 술에 취해 쓰러졌다가 다시 깨어 자신이 살아 있음을 확인한다. 그리고 자신이 소설을 쓸 것 같다고 생각하였고, 소설을 썼다.

 

"2층이었다. 문을 열었더니 사람들이 있었다. 우정 사업 본부 직원들. 한 여자는 불쌍하게도 팔이 하나밖에 없었다. 거기 영원히 있겠지. 나처럼 늙은 주정뱅이가 되는 거나 다름없다. 뭐, 다른 동료들이 말하듯이 어디에서라도 일은 해야 하니까. 그래서 사람들은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였다. 그게 노예의 지혜였다." (p.232)

 

찰스 부코스키의 책이 대개 그렇듯 <우체국> 역시 그의 경험에 바탕을 둔 자전적인 소설이다. 이 책의 주인공인 헨리 치나스키는 반복되는 일상과 부속품으로 전락한 자신의 모습에 끝없이 절망한다. 절망의 나락에 빠진 자신을 건져내기 위해 그는 술을 마시고, 섹스를 한다. 그리고 마침내 소설을 씀으로써 자신을 구제한다. 자신을 돌보는 마지막 방법으로 소설 쓰기를 선택한 것은 찰스 부코스키답다.그는 언젠가 이렇게 말했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멋있게 들리는 건 내가 도박하듯 글을 쓰기 때문이다. 너무 신중한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들은 연구하고, 가르치고, 그리곤 망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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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자비한 사람이 성공한다는 말은 맞는 말일 것이다. 영국의 모 방송사에서는 그와 관련된 기사를 내보냈나 보다. 뭐 딱히 새로울 것도 없는 사실을 대단한 발견이라도 되는 양 호들갑을 떠는 모습은 조금 딱하기도 하고 이따금 귀엽게 느껴질 때도 있긴 하지만 말이다. 회사나 모임, 정당 등 여러 사람이 모인 어떤 조직에 몸을 담아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무자비한 사람이 대우를 받는 경우가 왕왕 있다. 그닥 새로울 것도 없지만.

 

심리학자들은 무자비한 사람을 마키아벨리즘, 나르시시즘, 사이코패스 성향 등 세 가지로 분석한다고 한다. 무자비한 사람들은 이 세 가지 특성을 모두 가지고 있을 수도 있고 한 가지만 보이는 경우도 있겠지만 나는 오늘 마키아벨리즘 성향의 원칙주의자에 대해 말하려고 한다. 말은 참 근사해 보이고 조직 내에서도 원칙주의자를 신봉하거나 자신도 그와 같이 되려고 동경해 마지 않는 사람들도 많은 걸로 알고 있다. 하긴 원칙주의자로 불렸던 여당의 당대표를 대통령으로 뽑는 바람에 대한민국이 지금 요 모양 요 꼬락서니가 되었으니 내 결론이 어떤 것일지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으리라고 본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추앙하거나 동경해 마지 않는 '원칙주의자'에 대해 나는 왜 그토록 싫어하게 되었을까. 적어도 '원칙주의자'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속성을 조금이라도 이해한다면 사람들은 원칙주의자를 결코 좋아하지 않을 거라고 나는 장담한다. 혹자는 내게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우리 사회의 구성원들은 여전히'원칙주의자'를 좋아하고  그들은 어디서든 인기가 있다고 말이다. 어느 패널이 토론에서도 말했지만 대통령이 나라를 팔아먹어도 35%의 국민들은 지지할 거라고 하지 않던가. 맞는 말이다. 그것은 다 무지에서 비롯된다고 볼 수 있다. 그 이유를 두 가지만 말해보면 이렇다.

 

첫째, 원칙주의자가 신앙처럼 믿고 따르는 원칙이라는 게 과연 사회적으로 합의된 것인지, 아니면 소수의 사람들만 동의한 것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누구에게도 동의를 구하지 않고 혼자만 옳다고 믿는 것인지 따져 묻고 싶다. 소위 '원칙주의자'로 불리는 사람들과 시간을 내어 대화를 해보면 그들이 믿는 원칙 중 상당 부분이 사회적으로 결코 동의될 수 없는 독선적인 원칙이 많다는 점을 알게 된다. 예컨대 원칙주의자가 믿는 것은 단지 그가 믿는 원칙일 뿐 그 원칙이 정당한 것인가는 묻지 않는다는 점이다. 만약 원칙의 정당성을 따지는 사람이라면 그는 결코 원칙주의자가 되지 못한다.

 

둘째, 원칙주의자는 평화주의자가 될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대통령도 평화를 자주 언급해서 하는 말이다. 그 둘은 결코 공존할 수 없다고 장담한다. 원칙주의자는 대개 서열이 존재하는 상황에서는(특히 원칙주의자가 조직내 서열의 상위를 차지했을 때) 평화를 유지하는 듯 보이지만 그것은 단순히 힘에 의한 복종일 뿐 진실한 평화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나는 원칙주의자를 잠재된 대결주의자로 인식한다. 심하게 말하면 호전주의자인 셈이다. 예컨대 원칙주의자의 조직내 서열이 낮아지거나 동등해지기만 해도 그는 당장에 자신이 숨겨놓은 발톱을 드러낼 게 뻔하다. 개인과 개인 사이의 평화는 원칙에 의해서가 아니라 관용과 배려에 의해서만 유지되기 때문이다.

 

'원칙주의자'의 냉정함, 또는 무자비함, 사이코패스적 성향은 서열에 의한 복종이 유지될 때는 결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원칙주의자들은 대개 자신을 아끼는 나르시시즘 성향도 강한데 달리 말하면 그들은지독한 이기주의자라는 점이다. 그들의 이러한 성향은 서열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과 결부되어 자신을 서열의 맨꼭대기에 위치하게 하도록 한다. 베른대학의 대니얼 스퍼크 교수는 사회적 성공이 아닌 실제 삶에서는 관대하고 정직한 사람들이 더 행복하고 더 건강한 경향이 있다고 말하지만 원칙주의자들에게 그것은 허황된 말로 들릴 것이다. 나 또한 조직이나 사회에서 원칙이 지켜지지 않는 혼란한 상태를 원하는 것도 아니요, 원칙이나 규칙을 준수하는 사람을 일방적으로 미워하는 건 더더욱 아니다. 원칙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과 무자비함, 그것을 미워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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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6-01-11 17: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것이 사회를 지켜나가는게 아니라 원칙과 함께하면서 변칙이 가끔 기적을 만들어 내는걸 무수히 봐왔는데도 곧잘 잊곤 하죠.원칙이 대세니 ㅡ그게 승리한 걸로 보일지 몰라도 ㅡ대게 변화는 변칙에서 오곤 하죠.
구원같은 사람을 만나는 경우도 늘 같은 노선이 아닌
일탈같은 상황에서 만나지고 말예요. 제 말은 다분히
환상적 측면을 가져가지만 앞으로 미래는 보통 ㅡ의 미래가 아닌 돌연변이가 세상을 바꿀것이란 말에 저는 일견 동의하는 쪽입니다.
순풍에 돗단듯 ㅡ이 아니라 역풍에서 활로가 나올 수 있는 것 처럼 ㅡ

꼼쥐 2016-01-12 12:24   좋아요 1 | URL
국가든 기업이든 발전의 초창기에는 어느 정도의 원칙과 원칙준수의 필요성이 전재합니다. 그것은 저도 인정하는 바이고 누구나 수긍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장소 님의 말씀처럼 작금의 대한민국 경제 규모나 발전단계에서는 원칙보다는 어느 정도의 변칙이나 일탈이 필요하겠지요. 자유를 경험한 세대에게 복종을 강요하는 행태는 영 맞지 않는 것 같습니다.

[그장소] 2016-01-12 13:30   좋아요 0 | URL
그래서 다들 유신이니 민주화니 ..못 놓고 머릴 그쪽으로 두면서도 회의에 회한에 젖는게 아닌가 해요.스스로 뭔가 한다는 자각 ㅡ개개인이 ㅡ

마립간 2016-01-12 07:5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원칙주의자이나 플라톤(-노자)주의자로서 말씀드리면,

제 의견은 세상의 모든 일이 원칙으로 이뤄졌다거나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적절하게 원칙을 깨거나 디오게네스(-양주)주의적인 면 최선-최적일 수 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경험한 세상-사회는 원칙을 지켜서 최선에 이르지 못하는 경우보다는 원칙을 깼기 때문에 최선에 이르지 못하는 경우가 더 많다고 생각합니다.

원칙에는 사회적 합의, 평화주의를 원칙으로 포함시킬 수 있다고 봅니다. 그 선택은 개인의 가치관이겠지만요. (강간살인자, 전쟁 도발 정치인에 대한 비대결주의의 입장에는 어떤 것이 가능할까요?)

(꼼쥐 님께서 제 서재를 자주 방문하셨다는 전제 하에 제가 사용하는 용어로 설명하자면, 저는 플라톤-노자주의 선호자이지만, 강플라톤-노자주의자는 아닙니다.)

꼼쥐 2016-01-12 12:30   좋아요 1 | URL
때로는 강요된 원칙이 의외의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는 사실을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다만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일정한 위치에 잇는 공인, 타인에게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이 세운 원칙을 수정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지요. 그것을 마치 패배나 굴종으로 오인하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은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회가 발전하고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리더의 위치에 오른 사람들이 오히려 몸을 낮추고 그들의 의견을 따라갈 필요가 있는 것이죠. 백수가 자기 혼자서 어떤 원칙으로 살아가든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오히려 원칙을 준수하는 삶이 더 나을 수도...

마립간 2016-01-12 12:33   좋아요 1 | URL
꼼쥐 님의 글의 의도나 진심을 의심하지는 않습니다. 제가 지적질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어쩌면 언어의 한계일 수도 있겠지요. 사회를 보는 저의 의견입니다.

꼼쥐 2016-01-13 15:58   좋아요 0 | URL
저는 자신의 의견을 누구나 마음놓고 개진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마립간 님처럼 예의에 벗어나지 않는 정중하고 논리적인 말이라면 얼마든지 환영하고요. 예컨대 다짜고짜 욕설이나 상스러운 말을 하면서 논리도 없는 말을 댓글에 다는 경우에는 저도 대꾸할 여력도 없어서 삭제하곤 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