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나 경제적 측면은 차치하고서라도 시간이나 열정을 무한정으로 쏟아부어야 하는 일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자신이 아무리 좋아하는 일이라 할지라도 말이죠. 시쳇말로 덕질도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입니다. 요즘에는 자신이 아이돌 덕후라는 둥 피규어 덕후라는 사실을 방송에서 공공연히 밝히는 사람들도 많지만, '에이, 그까짓 거 나라고 못할 게 없지' 하고 우습게 생각했다가는 큰 코 다치겠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더군요. 돈과 시간이 넘쳐난다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저는 며칠 전부터 임경선 작가가 쓴 <어디까지나 개인적인>이라는 책을 읽고 있는데 이게 사람을 미치고 팔짝 뛰게 만들더군요. 작가도 하루키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예전부터 알고 있었고, 그녀의 홈피에 올려지는 글을 몰래 읽기도 했었지만 그녀가 하루키를 탐닉하는 정도가 이 정도일 줄이야, 나도 모르게 혀를 내둘렀던 것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해 꼼꼼하게 쓴, 지극히 개인적인 애정을 듬뿍 담은 산문'이라고 작가 스스로가 밝히고는 있지만 저는 그녀가 혹시 하루키의 사생팬이 아닐까, 하는 의심의 눈초리를 거둘 수가 없었습니다. 책의 소개글을 읽어보면 제 말이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어디까지나 개인적인』은 임경선이 철저하게 실시한 ‘무라카미 씨 뒷조사’라고도 할 수 있다. 1970년대부터 2015년 현재까지, 책·신문·잡지·방송 등 다양한 매체의 방대한 자료를 샅샅이 살피고 그의 행적을 빈틈없이 기록했다. 일본의 도서관은 물론 무라카미 하루키 자료관 등 그에 대한 자료가 있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들뜬 마음으로 찾아가기도 했다. (최근 그녀는 트위터에 ‘무라카미 하루키 씨의 거처그가 독자와의 소통을 위해 연 홈페이지’에 올라오는 질문과 답을 번역해서 연재하며, 많은 국내 독자에게 환호를 받았다.) 이렇게 촘촘한 1년 반의 집필 기간을 거쳐 탄생한 이 책을 통해 무라카미 하루키의 ‘투덜거림’을 생생하게 들을 수 있고, 임경선의 재치 있는 입담까지 더해져 두 작가를 입체적으로 만날 수 있다.

 

아무리 하루키의 팬이라고 할지라도 이 정도면 하루키 덕후 아닙니까? 그것도 작가가 또 다른 작가를 덕질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하루키 덕후까지는 아니어도 나름 하루키의 팬이라고 밝혀왔던 제 말이 머쓱해지는 순간이었습니다. 무라카미 하루키 때문에 글을 쓰게 되었다는 임경선 작가의 이 책은 정말 꼼꼼하게 기록되었더군요. 하루키 자신이 자서전을 쓴다 해도 이보다 자세하게 쓰기는 어려울 듯하더군요. 아무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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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16-01-22 2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슬쩍 담아 갑니다 ㅎㅎㅎ

꼼쥐 2016-01-25 17:51   좋아요 0 | URL
네, 행복한 한 주 맞이하시길...^^

오거서 2016-01-22 22: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게 말해서, 일종의 전기겠군요

꼼쥐 2016-01-25 17:52   좋아요 0 | URL
네, 전기라고도 할 수 있지만 중간중간에 자신의 이야기도 쓰고 있어서 에세이라고도 할 수 있겠죠.
 
자네 늙어봤나, 나는 젊어봤네 - 이미 어른이 된 우리에게 ‘또 다른 어른’이 필요할 때. 92세 지(知)의 거인이 조언하는 '마흔 이후 인생수업!'
도야마 시게히코 지음, 김정환 옮김 / 책베개 / 2015년 11월
평점 :
절판


별것 아니지만 제목의 절묘함에 탄성이 절로 나왔던 책이다. 도야마 시게히코의 신작 에세이<자네 늙어봤나, 나는 젊어봤네>를 두고 하는 말이다. 책을 다 읽고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가수 서유석의 노래 중에도 이와 비슷한 제목의 노래가 있었다고 한다. 노래의 제목인즉 '너 늙어봤냐 나는 젊어봤단다'라는데 나는 들어본 적 없는 노래였다. 그렇게 제목에 이끌렸던 책이지만 일단 읽기 시작하자 책은 의외로 술술 읽혔다. 92세의 노학자가 들려주는 '인생 이모작'에 대한 조언인데 참고할 만한 것도 많았고 무엇보다도 내용이 신선해서 좋았다.

 

"흉내 내는 버릇을 방지하려면 평소에 세상의 상식에서 한발 거리를 두어야 한다. 그렇다고 '반(反)상식'을 소리 높여 외칠 필요는 없다. 의식적으로 상식과 조금 거리를 두기만 해도 독자적인 사고를 하는 습관이 들게 될 것이다. 독자적인 사고는 인생의 갈림길이라고 생각되는 상황에서도 필요하다. 자기 나름대로 머리를 쥐어짠 끝에 결론을 내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걷기 시작한다. 옳은 방향을 향하고 있는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확실치 않을 때도 있다. 그러나 어떤 결과가 나오든 받아들일 수 있다." (p.120)

 

이모작 인생을 직접 살아왔다고 말하는 저자는 이 책에서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진솔하게 쓰고 있다. 그러므로 구순의 노학자에게서 나온 풍부한 경험은 이모작 인생을 준비하는 독자들에게 다양하고 폭넓은 조언을 제공한다. '인생 이모작'을 준비하는 적정 연령대와 자금 준비 방법, 왜 '인생 이모작'을 준비해야 하는지, 마음가짐은 어떠해야 하는지, 건강은 어떻게 유지하는지, 새로운 인간관계를 맺는 방법이나 인생 후반기의 독서법, 죽음에 대한 저자 자신의 생각 등 저자는 인생의 선배로서 자신이 들려줄 수 있는 여러 주제에 대해 짤막하면서도 핵심적인 내용을 기술하고 있다.

 

"내 나이 올해로 아흔둘. '노후'라는 말을 의식한 뒤로 상당한 세월이 흘렀다. 노후는 우리의 생각보다 길다. 이 기나긴 노후를 찬란하게 만들기 위해, 나는 노후를 의식하기 조금 전부터 먼저 나 자신의 발로 걷자고 생각했다. 이모작 인생은 여기에서 시작된다." (p.21)

 

자신도 언젠가는 꼬부랑 할머니, 할아버지가 된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실제로 그 사실을 의식하며 살기는 매우 어렵다. 물론 매시간 의식하며 살아서도 안 되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인생 후반기의 삶에 대한 대다수 사람들의 인식은 '불안'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러한 불안은 막연한 추측이나 보험회사의 협박성 발언 등과 같은 잘못된 지식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사람들의 불안심리 때문인지 시중에는 노후를 준비하는 방법에 대해 쓴 많은 책들이 나와 있고, 지금도 여전히 출간되고 있다. 그러나 자신의 불안심리를 잠재우기 위해 읽었던 책들로 인해 오히려 더 큰 불안을 떠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금과 보험에 의지하지 않고 내조나 효도도 기대하지 않는다는 저자는 생존에 필요한 모든 것들을 스스로 익힐 것을 주문한다. 그것이 요리든, 취미든, 건강이든 말이다. 또한 인간관계에도 유통 기한이 있다는 것과 노년의 독서법은 젊은 시절의 그것과 달라져야 한다고도 말한다.

 

"'오해를 각오'하고 말하면, 쓸데없는 독서는 하지 않는 것이 좋다. 독서가 자신의 지성을 높여주거나 사고를 깊게 해주리라고 믿는 사람이 많지만, 단순히 지식을 꾸역꾸역 쑤셔 넣을 뿐인 경우가 종종 있다. 불필요한 지식은 오히려 두뇌 활동을 방해한다. 자신의 머리로 생각하지 않고 책에서 답을 구하게 되면 큰일이다. 다른 사람이 생각한 결과물을 모방할 경우도 있다. 그렇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자기도 모르게 사고를 흉내 내는 경우도 있는 것이다." (p.134)

 

저자가 추천하는 중년 이후의 독서는 '자신을 뒤흔드는 지적 경험을 제공했던 책을 다시 음미하라는 것', '그것을 충분히 음미하며 읽는 미독(味讀)과 독자 사고를 반복하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책을 읽다가 때때로 공상에 잠기는 '베타 읽기'를 취하라는 것이다.

 

나도 예전에 가깝게 지내던 스님으로부터 책을 그만 읽는 게 어떠냐는 권유를 들었던 적이 한 번 있다. 생각도 하지 못했던 뜻밖의 말이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나는 책을 많이 읽는 축에 속하지도 않았고,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생활에 방해가 될 정도로 맹목적인 독서를 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그렇게 말하는 스님이 내심 섭섭하고 수긍하기도 힘들었었다. 그러나 지나고 나서 곰곰 생각해보니 스님의 말이 일견 일리가 있었구나 생각하게 된다. 힘들고 어려운 때일수록 무엇보다도 자신의 판단이 중요해지기 때문이다. 92세의 노학자도 그런 것을 염려하는 듯했다.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나간다면 넉넉잡아 두어 시간이면 다 읽을 책이지만 되내고 곱씹어 생각할수록 그 맛이 진해지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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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날과 마찬가지로 아침운동을 나서는데 어찌나 춥던지요. 어제 아침은 얼마나 춥고 바람이 거세던지 결국 산에 오르는 건 포기하고 아파트 인근의 체육공원에서 가볍게 몸을 푸는 걸로 만족해야만 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나는 집을 나서기 전부터 '오늘은 기필코 산을 오르고야 말겠다.' 굳은 결심을 하엿던 것입니다. 사납게 불던 바람은 잦아들었지만 볼에 닿는 찬 기운이 에이듯 매서웠습니다.

 

발길을 움직일 때마다 뽀드득 소리가 조용한 숲에 울려 퍼졌습니다.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이따금 계곡을 거슬러 오르는 바람이 능선에 쌓인 눈을 등산로 옆 나뭇가지에 하얗게 흩뿌려 놓았습니다. 어렸을 적 누나가 떠준 빵모자와 벙어리 장갑을 끼고 바람 매서운 길을 30여 분 걸어 학교에 가던 생각이 나더군요. 털실로 짠 모자와 장갑은 바람이 불 때마다 바깥 추위를 고스란히 느껴야만 했었지요. 손과 발 귀가 꽁꽁 언 채로 학교에 도착하면 벌써 등교한 친구들이 아직 불도 붙지 않은 난로 주변에 옹기종기 모여 있곤 했었습니다. 서로의 체온을 조금씩 나눠주면서 말이지요.

 

오늘 만났던 사람들마다 '많이 춥지요?' 하고 인사를 합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네 인사말이 참으로 다양합니다. 판에 박은 듯이 '안녕하십니까?' 나  '안녕하세요?' 또는 서양식의 '좋은 아침입니다.'가 보편화 되었지만 과거에는 '진지 드셨습니까?'와 같은 실제적인 물음이 인사를 대신했던 것 같습니다. 어찌 보면 진심이 담기지 않은 요즘의 빈 인사말보다 진심이 가득 담긴 과거의 투박한 인사말이 더 정감이 가는 것도 그런 이유인 듯합니다.

 

오늘 뉴스를 보다 보니 대통령이 노동5법 등의 입법을 촉구하는 재계의 서명운동에 동참했다는 소식이 있더군요. 대통령이라는 자리가 그렇게 한가한 직책이라는 걸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얼마나 할 일이 없고 무료했으면 자신들의 이익을 위하여 대기업과 재벌단체가 하고 있는 서명운동에 동참을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보좌관들은 대통령을 위해서 하다 못해 뜨게질 거리라도 사다 드려야 하는 게 아닌가 싶더군요. 비서실 직원들은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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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6-01-20 2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날씨에도 운동을 ...으...머..멋...지십니다.
힘을 빼고 걸을시길..하긴 운동하면 열이발생하니
덜 춥긴...하죠. 그래도 마주오는 바람의 차가움은.
매서운데.ㅡ옷 잘 챙겨입고 다니시길 바랍니다.^^

꼼쥐 2016-01-21 13:02   좋아요 1 | URL
오늘은 부딪히는 바람이 한결 부드럽더군요. 올해는 소한이 대한 집에 와서 얼어 죽게 생겼습니다. 다음주에는 조금 풀리겠지요. 그러면 겨울도 다 가겠지만 말입니다.

[그장소] 2016-01-21 17:14   좋아요 0 | URL
오...재미있는 표현입니다..소한이 대한 집에 와...얼어죽다..ㅎㅎㅎ
겨울 걸음은 느리고 뒤끝도 깁니다..도마뱀 꼬리마냥...잘린 걸 두고 몸통만 가서..남은녀석이 휭허니 있다 지독을 부리는게
겨울 끝이곤 합니다. 끝났나 싶음 아직. .갔나
싶음 저기..그런 식이죠..오죽함 이른 녀석이 빼꼼 고개빼고 지가 어딜 껴야하나 들여다 본다고 봄 , 아직 있나..가긴 갔나..들여다 봄..해서 봄이잖아요.^^

우민(愚民)ngs01 2016-01-21 02: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급격한 체온 변화는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꼼쥐님 말씀에 공감합니다. 할 일 없으면
역사책이나 보시든지 말입니다. 정치란 분배고
나눔이다. 문제는 어느 계층의 세금을 거둬 어느 계층에 나눠줘야 하는가이다. 역사를 보면
백성을 짜내어 탐관오리 배를 불린 것과 지금의 서민 등골 뽑아 재벌들과 고위직 배 불리는 것과 무엇이 다른지 말입니다.

꼼쥐 2016-01-21 13:05   좋아요 1 | URL
제가 생각하기에 역사책을 비롯한 인문학 서적과는 담을 쌓은 것 같아요. 물론 독서 자체도 싫어하는 것 같지만. 차라리 그 큰 공간에서 할 일 없으면 아프리카 신생아를 위해 털모자라도 뜨는 게 어떨지 생각했습니다.

우민(愚民)ngs01 2016-01-21 13: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맞습니다. 털모자 좋은생각이시네요!
 
[우물에서 하늘 보기]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우물에서 하늘 보기 - 황현산의 시 이야기
황현산 지음 / 삼인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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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들은 속절없이 시를 썼다. 아들딸을 잃고 시를 썼고, 때로는 불행한 부모들을 대신해서도 시를 썼다. 그 절망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비애의 극한이 잊힐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p.93)

 

자신의 유익을 탈탈 털어 세상의 무익을 만드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면 그들은 여전히 바보믜 무리에 속하는 천덕꾸러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의 무익이 합쳐져 세상의 빛이 되고 따사로운 온정이 된다는 걸 저는 알고 있습니다. 황현산의 시 이야기 <우물에서 하늘보기>에서도 작가는 줄곧 시 이야기를 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시에 대한 독자들의 관심은 오히려 오늘 내린 한파 주의보보다도 더 익숙하고 오래된 차가움일런지 모르겠습니다. 아주 오래 전에 저는 '시 안 읽는 사회'라는 제목의 포스팅을 블로그에 올린 적이 있습니다. 일부만 옮겨 보면 이렇습니다.

 

참으로 서글픈 일이다.

 나는 시인도 아니고, 문학을 전공한 사람도 아닌, 순수 독자의 입장에서 시가 우리 곁에서 사라지는 것을 슬퍼하는 것이다. 시인의 속내를 낱낱이 알지 못하더라도, 시가 전하는 그 울림만으로 설레이던 시대가 있었다. 맘에 쏙 드는 시구를 연애편지에 인용하며, 제가 쓴 것인 양 얼굴을 붉히던 그리움이 있었다. 술동무를 옆에 두고, 노래 삼아 시를 읊조리던 젊음이 있었다. 우리는 시를 잃고, 사랑을 잃고, 그 속에 숨겨진 설레임, 그리움, 그리고 젊음의 낭만을 서서히 잃어가고 있다.

 

시를 모르고 어찌 문학을 논하랴.

시를 모른 채 어찌 사랑을 노래할 것이며, 순수의 아름다움을 어찌 볼 수 있으랴.

시를 제쳐 두고 주옥같은 언어의 향연을 어찌 즐길 수 있으랴.

시는 문학의 태동이자, 끊이지 않는 북소리이다.

시는 언어가 아닌 몸짓이며, 아픔을 위로하는 따뜻한 손길이다.

시는 논리를 따라 흐르는 나의 의식이 아닌, 무의식에 흐르는 작은 흔들림이다.

 

시를 읽지 않는 사회! 그 각박한 현실을 사는 우리는 무엇에서 위로받을 것이며, 아름다움으로 향하는 그 통로를 무엇에 의지하여 찾을 것인지... 시를 쓰지 못하는 문학가는 한낱 글쟁이에 불과하며, 그 글을 읽는 우리는 영혼을 잃은 로봇에 불과하다. 사랑은,설레임은, 그리움은,낭만은 언어가 아닌 시에 숨겨진 떨림이기 때문이다.

 

2014년 한 해 동안 '황현산의 우물에서 하늘보기'라는 제목으로 <한국일보>에 연재햇던 27개 꼭지의 '시화(詩話)는 이육사의 시 '광야'를 비롯하여 김종삼의 시 '북치는 소년', 김수영의 '꽃잎', 백석의 '사슴' 등을 통하여 '시가 꼬투리를 만들어준 이야기들이 우리 사회의 크고 작은 사안들과 만나' 독자의 가슴에 시적인 어떤 것을 아로새기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작가의 시 이야기는 단순히 시의 해석에 그치지 않고 시의 해석을 둘러싼 논쟁으로 이어지는가 하면 한수산 필화 사건에 연루되어 모진 고문을 당한 끝에 숨결처럼 시를 토해내다 시러진 박정만 시인, 가난과 질병으로 삶을 마감한 진이정 시인, 자본주의적 욕망의 피안을 보여주었던 최승자 시인 등 시인의 삶을 함께 더듬고 있습니다.

 

"시 쓰기는 끊임없이 희망하는 방식의 글쓰기다. 다른 말로 하자면, 시가 말하려는 희망은 달성되기 위한 희망이 아니라 희망 그 자체로 남기 위한 희망이다. 희망이 거기 있으니 희망하는 대상이 또한 어딘가에 있다고 믿는 희망이다. 꽃을 희망한다는 것은 꽃을 거기 피게 한 어떤 아름다운 명령에 대한 희망이며, 맑은 물을 희망한다는 것은 물을 그렇게 맑게 한 어떤 순결한 명령에 대한 희망이다. 시를 읽고 쓰는 일은 희망을 단단히 간직하는 일이다." (p.262)

 

대한민국의 2016년 1월은 한파 주의보, 채무 주의보로 꽁꽁 얼어 붙었지만 사람들 가슴에는 온통 행복 주의보가 내려지기를 간절히 희망하게 됩니다. 시의 어느 한 구절이 단초가 되어 사그라들었던 희망의 불꽃을 다시 살려내기를 간절히 기도하게 됩니다. 어쩌면 2016년 1월은 시의 부활, 희망의 부활을 알리는 시발점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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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사랑 아니면 여행이겠지 - 당신과 문장 사이를 여행할 때
최갑수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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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연말이면 수척해진 내 희망의 뺨을 몇 번이나 어루만지며 자책과 함게 긴 한숨을 내뱉게 됩니다. 그것은 이를테면 외롭기 이를 데 없는 나만의 송년회인 셈입니다. 아무도 초대하지 않은 빈 방에는 졸음에 겨운 형광등 불빛과, 반성의 글 한 줄쯤 기대하며 지루한 시간을 견디고 있는 노트와, 엄지와 검지 사이에서 몇 시간째 뱅글뱅글 맴을 도는 연필과, 문틈을 비집고 고개를 내미는 오래된 추억들이 흐르는 시간만 숨죽인 채 지켜보고 있습니다. 창밖에는 이따금 겨울의 침묵 속으로 고독을 섞는 바람이 드세게 붑니다.

 

그렇게 밤을 지새고 나면 내 삶을 시간이 훑고 지나가는 것인지, 아니면 내가 시간을 천천히 밟으며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 도무지 헷갈리기만 합니다. 우리네 삶으로부터 피안처럼 멀기만 한 이상적인 삶, '본질적으로 이룰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는 깨끗하게 단념했기 때문에 삶을 즐기게 되었다'는 버트런드 러셀의 용기는 어디서 나온 것일까요?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매번 자신의 욕심 때문에 그 구질구질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떠밀려 갑니다.

 

"나는 지금 삶을 즐기고 있다."

난롯가에서 버트런드 러셀을 읽다가 이 문장에 밑줄을 긋는다. 온화하지만 이기적인, 다정하지만 냉정한, 따스하지만 논리적인 이 노신사의 책을 읽고 잇노라면 마치 그의 마른, 하지만 부드러움이 전해지는 손바닥이 어깨 위에 놓인 것만 같다. 가끔은 어깨 위의 손을 밀치며 '행복이라는 게 정말 있기나 한가요?' 하고 물어보고 싶기도 하지만. (p.114)

 

눈에 보이는 현실을 현실로서 차갑게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은 매우 드문 것 같습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우리가 사는 지구상에는 갖가지 핑계를 대며 '다음에는 기필코'를 외치는 과대망상의 환자들로 넘쳐난다고 해야 맞겠지요.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도전하는 사람이 있었기에 인류는 진보를 거듭했다고 주장한다면 저는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러나 수십억의 사람 중에 단 몇 사람이 이룬 성과를 코앞에 들이대며 '그러니 너도 할 수 있다'고 말하는  희망고문은 과연 정당한가?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나는 회의론자도 아니고 패배의식에 물든 퇴폐주의자는 더더욱 아닙니다. 그보다는 현실을 현실로서 깨끗이 인정하고 단념하지 못하는 대다수의 용기 없는 사람 중 한 명일 뿐입니다.

 

지난 연말에 나는 최갑수의 여행에세이 <우리는 사랑 아니면 여행이겠지>를 읽었습니다. 그의 푸석거리고 윤기 없는 허무의 감정이 실린 한 문장 한 문장마다 까슬까슬한 돌기가 되어 내 가슴께를 꾹꾹 누르며 지나갑니다. 어쩌면 저는 태고적 허무를 제 몸 속 어딘가에 감추어 둔 채 태어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기에 쓸쓸함을 담은 그의 글 하나하나가 제 몸 속에 들어와 요동을 치는 것이겠지요. 작가는 이 책에서 자신이 생각하는 삶과 사랑과 여행에 관하여 쓰고 있습니다. 낯설거나 익숙한 곳으로의 여행을 꿈꾸며, 작가가 읽었던 책들, 자주 들었던 음악, 그리고 그의 심장에 인장을 찍듯 꾹꾹 각인된 문장에 그의 생각을 사진과 함게 덧붙였습니다.

 

이를테면 "이 세상 살아 있는 생물들은 모두 온 힘을 다해 살고 있는 것이다." (후지와라 신야 '인생의 낮잠'중에서), "저기 밖에는 다른 삶이 있어. 내 말을 믿어."(레이먼드 카버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 하는 것'중에서), "아무리 늙었다 해도 행복은 여전히 필요한 것이니까."(에밀 아자르 '자기 앞의 생'중에서)처럼 여행지에서 또는 그 어느 곳에서건 작가로 하여금 한동안 사색에 젖게 했던 문장들, 그리고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삶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들과 작은 깨달음이 선별하여 실은 사진과 함께 새로운 느낌으로 되살아납니다.

 

"세월이 간다. 하루에 하루씩 꼬박꼬박 가고 있다. 후지와라 신야 영감을 읽다 눈에 띄는 한 구절. "이 세상 살아 잇는 생물들은 모두 온 힘을 다해 살고 있는 것이다." 온 힘을 다한 적이 있었던가. 일에도 사랑에도 여행에도 그런 적이 있었던가. 시월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p.190)

 

한 사람의 글은 그 사람이 겪은 경험의 산물이자 귀결이라고 하는데 나는 이따금 글도 생각도, 또는 말도 한 장소에서 우연히 얻게 되는 지역 특산물이 아닐까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다만 그 시각에, 그 장소에 내가 있었다는 이유로 내게 전달되었고 제 입과 손을 통하여 또 누군가에게 전달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한풀 용기가 꺾이고 괜한 일로도 주눅이 드는 요즘입니다. 작가의 글은 얼핏 삶의 허무를 강조하는 듯 보이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한 해의 말미에 느끼는 삶의 허무를 인생의 무상함으로 치유한다고나 할까요? '이열치열'이라는 말처럼 '이허치허'도 가능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실수나 자질구레한 사건, 다툼 따위를 '에이, 이런 것쯤이 뭐라고' 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길 수 잇었던 것은 아마도 피라미드 앞에서 배운 '허무의 감각' 때문일 수도 있으리라. '죽어서 저렇게 커다란 삼각형도 하나 못 만드는 인생, 대충 넘겨가며 사랑하며 살자' 하고 생각할 수도 잇는 것이 인간이니까." (p.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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