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입하지 않아도 스스로 되어지는 것들이 있다. 예컨대 시간의 소멸이라든가 새벽의 축구중계라든가 하는 것들 말이다. 나름대로 뭔가 해야 할 일이 잇을 것 같은데 단지 생각뿐이고 손가락 하나 까딱할 의욕도 없이 무기력하게 지켜보았는데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 것들. 마치 어둠 속에서 다트를 던지는 것처럼 부질없는 느낌이 내 머릿속을 자유롭게 떠다니는 그런 일들을 지켜보고 잇노라면 하루키의 표현처럼 '문득 들여다본 자신의 손이, 투명하게 보이는 것 같은 착각까지 드'는 것이다.

 

금요일 저녁이 되면 막연히 손을 놓게 된다. '이제부터 월요일 새벽까지는 무작정 쉬어야겠다' 하는 생각이 나도 모르게 드는 것이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지금도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지만, 더욱 격렬하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어느 광고 카피의 문구처럼 시간의 잔상 위에서 마냥 흔들리고만 싶은 것이다. 어차피 그래도 시간은 가고 어떤 모습으로든 월요일은 도래하니까.

 

내일 오후에는 큰누나의 아들(그러니까 내게는 조카 되시겄다)의 결혼식이 있다. 결혼식에 참석하여 오랜만에 만난 친척들과 이야기를 하다 보면 하루가 금세 갈 것이다. 아무리 친척이라지만 정말 오랜만에 만나는 사람들의 변화된 모습을 보면 나도 모르게 화장실로 향하게 된다. 화장실 거울에 내 얼굴을 비춰 보며 시간의 경과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지나온 시간 동안 그 친척분은 뭘 하면서 보냈을까 생각하곤 한다. 부작위에 의한 시간의 소멸과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변화에 대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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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까지나 개인적인 - 내 방식대로 읽고 쓰고 생활한다는 것
임경선 지음 / 마음산책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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君,

세상이 조금 더 잠잠해지면 읽어보게나. 내가 이런 말을 하면 뭐라 덧붙여 설명하기도 전에 군은 단박에 "언제 그런 날이 올까요? 과연 그런 날이 오기나 할까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한가롭게 서평이나 읽을 그런 미래는 제게 없을 것 같군요." 하는 반박의 말과 함께 나에 대한 신뢰(그런 게 있었다면 말일세)마저 반납하겠지. 이해하네. 아니, 그렇게 단정적으로 말할 정도로 군에 대해, 그리고 우리의 미래에 대해 확신할 수는 없을 것 같네. 다만 군의 마음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말일세.

 

君,

세상에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더 다양한 종류의 인간들이 살고 있다는 걸 생각해본 적이 있는지.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면 단지 생각만으로 그쳐서는 안 된다는 게 나의 주관일세. 군도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는 다양한 인간종의 한 명일 테고, 나 또한 다르지 않을 걸세. 그러나 비슷한 류의 군상들과 동질성을 추구할 수 없는 특별한 개인을 나누는 것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네. 이를테면 군과 같은 개별성을 지닌 인간은 쉽게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는 얘기지. 내가 군에게 특별한 애정(오해하지는 말게나. 편애는 아닐세.)을 표하는 것도 다 그런 이유라네. 군에게 임경선의 <어디까지나 개인적인>을 읽고 느꼈던 나의 소감을 말한다는 게 조금은 부끄럽고 나이 든 사람의 입장에서 여간 쑥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으나 군만이 갖고 있는 특별한 색깔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나의 체면이나 위신쯤은 어찌 돼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네.

 

"우리는 모두 더없이 소중한 영혼과 그것을 감싸는 깨지기 쉬운 껍질을 가진 알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저마다 높고 단단한 벽과 마주하고 있다. 바로 '스스템'이라는 벽이다. 내가 소설을 쓰는 단 한 가지 이유는 영혼의 존엄을 부각시키고, 거기에 빛을 비추기 위함이다. 우리 영혼이 시스템에 얽매어 멸시당하지 않도록 늘 빛을 비추고 경종을 울리는 것, 그것이 바로 소설가의 책무다." (p.165)

 

그렇다네. 위의 인용문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인터뷰 내용 중 일부이지. 임경선 작가는 그야말로 하루키의 열성팬이라고 말할 수 있을 걸세. 본인 입으로도 고백하고 있지만 하루키 때문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말할 정도라네. 시쳇말로 '하루키 덕후'가 아닐 수 없지. 그렇다고 이 책이 단순한 팬덤이나 유명 작가의 슈퍼 덕질이라고는 오해하지 말아주게. 슈퍼 덕질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지만 열성팬의 입장에서 한 위대한 작가에게 바치는 헌정서쯤으로 이해했으면 좋겠네.

 

"내가 처음 배운 언어는 일본어였다. 아주 어렸을 때 부모님과 함께 일본에 가서 살았기 때문이다. 나는 유치원과 초등학교 저학년을 요코하마에서 다녔다. '린 게이센'이라는 희한한 이름(임경선을 일본어로 읽으면 이렇게 된다)을 가진, 한국에서 온 계집아이였던 것이다." (p.122)

 

임경선 작가는 유년 시절을 일본에서 보냈다네. 어쩌면 한국어보다 일본어가 더 익숙했을 걸세. 그렇다고 한국 문단에 정식으로 등단한 사람도 아니지. 일본이나 한국이나 글을 쓰는 사람들은 모두 점잖고 유식하며 예의 바르고 배려를 생명처럼 여기는 사람들일 거라는 우리의 생각은 참으로 허망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네. 그녀가 정식 작가로 등단하지 않은 이유가 그래서라는 말은 아니지만 문학계의 종사자들도 종종 동종 업종의 종사자(?)로서 갖는 그들만의 패거리 정신이 문제가 될 때가 있다네. 그런 어두운 면이 독자들에게 낱낱이 밝혀지는 건 아니지만 잘 알다시피 어느 인터뷰에서 무라카미 하루키도 지적했던 바일세. 나는 임경선 작가의 이 책을 읽으면서 기본적으로 사람과 사람을 이해하는 방식이 이것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네. 곁에 있는 사람이 언제나 자신과 똑같아 보인다면 그는 인간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도. 인간은 고독하지 않으면 사랑할 수조차 없음을 새롭게 깨달았다네. 거창하지만 말일세.

 

"독자마다 소설을 통해서 얻는 메시지가 다 다를 겁니다. 그렇지만 저는 기본적으로 모든 인생은 고독한 것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어요. 사람과 사람이 서로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고 그것만은 변하지 않는 사실이라고 확신하지만, 그 고독이라는 채널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타자와 소통할 수 있으니까요. 제가 소설을 쓰는 의미는 어쩌면 거기에 있을지도 몰라요." (p.188)

 

"제가 흥미를 가지고 있는 것은 인간이 자기 안에 끌어안고 사는 일종의 암흑 같은 것이에요. 나는 그것들을 진지하게 관찰해서 이야기라는 형식으로 그대로 리얼하게 쓰고 싶어요. 해석하거나 설명하지 않고." (p.238)

 

君,

우리나라에도 무라카미 하루키에 대한 호불호가 분명히 갈린다는 건 나도 잘 알고 있다네. 그러나 작품의 좋고 나쁨을 떠나 자신의 삶을 누구보다도 열심히 살았던 한 인간으로서의 무라카미 하루키를 사람들이 좋아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나만의 착각은 아닐 듯하네. 자신이 겪은 고통을 통해 인간을 이해하고자 했던 무라카미 하루키를 기억한다면 작가로서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의 그 순수성을 이해하게 될 거라고 나는 강하게 믿게 되었다네.

 

"나에게 가장 울림이 컸던 그의 '고통론'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비관적 현실주의자이다. 그에게 인생은 '어차피 지는 게임'이다. 하루키 소설의 주인공들은 늘 뭔가 자신이 잃어버린 소중한 것을 되찾기 위해 방황한다. 그 과정에서 그들은 여러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기도 하고 시간을 허비하고 가능성을 잃어버린다. 그야말로 불확실하고 불안한 보통의 삶을 반영한다." (p.242)

 

혹독했던 추위가 한풀 꺾여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군이 말했었지. 밖에서 하는 일이니 요즘 군의 노고가 이만저만 한 게 아닐 거라고 쉽게 집작할 수 있었다네. 나라고 왜 모르겠는가. 아르바이트라면 나도 할 말이 꽤나 많은 사람일세. 그것은 차치하고서라도 내가 군에게 부탁하고 싶은 것은 단 한 가지라네. 고통 속에서도 자신을 잃지 않는 길은 비록 유치해 보이기는 하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인물이나 좋아하는 일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것이라고 나는 굳건히 믿고 있기에 군도 그리 하기를 바랄 뿐이네. 슈퍼 덕질이라고 해도 좋으니 제발 그렇게 하게.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군이 좋아하는 일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어떤 성과가 있을 거라고 믿네. 지금 내가 군에게 슈퍼 덕질을 가르치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말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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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까지 축구 중계를 보다가 까무룩 잠이 들었나 봅니다. 휴대폰 알람 소리가 마치 덩치 큰 곰이 내 몸을 우악스럽게 흔들어 깨우는 것 같았죠. 이제 막 단잠에 든 아이의 달콤한 꿈을 방해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눈도 제대로 뜰 수 없는 비몽사몽의 의식으로도 아침마다 입고 나가던 운동복의 소매는 잘도 꿰어지더군요. 현관을 나서자 차가운 새벽 공기가 모자란 잠을 훅 하고 날려버렸습니다.

 

달빛이 밝았습니다. 음력 보름에서 3일이 지났더군요. 눈석임물이 얼어 빙판을 이룬 곳이 더러 있었습니다. 미끄러지지 않으려고 종종걸음을 쳐야만 했습니다. 못 보던 사람들이 많은 걸 보니 날씨가 어지간히 풀려 사람들로 하여금 새삼스레 운동을 결심하게 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도 그렇지 이 새벽에 산을 오르려면 웬만한 결심으로는 아마 힘들었을 것입니다. 박수라도 쳐주고 싶은 심정이었죠. 그렇게 산을 오르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제 풀에 지쳐 그만두는 사람도 많지만 말입니다.

 

우리는 종종 '피곤'이라는 이름 앞에 자신의 귀중한 하루를 상납하곤 하지만 자신의 의지로 분연히 저항하는 하루는 또 얼마나 대견한 것인지요. 2016년의 1월은 어느 해보다 빨리 지나가는 듯합니다. 한동안 길게 이어졌던 맹추위 탓도 있었겠지만 극과 극을 오가는 롤러코스트의 날씨가 사람을 영 정신 못 차리게 했나 봅니다.

 

한낮의 나른함이 무차별적인 공격을 해대는 오후. 기온은 조금 더 올라 포근해졌고 읽고 있던 책의 낱글자들이 가물가물 흩어집니다. 그나저나 국정 역사교과서는 편찬기준이나 집필진의 발표도 없이 이미 집필에 들어간 모양입니다. 대한민국은 제 나라의 역사에 대해 얼마나 자신이 없는 것인지요. 하다 못해 정부의 사이트에 게시글을 올리더라도 실명을 쓰는 마당에 한 나라의 역사를 새로이 쓰면서도 익명으로 하다니... 정부가 앞장서서 우리나라의 역사를 민망해 하는 까닭에 대한민국의 모양새는 점점 옹색해지고 있습니다. 뉴스를 읽고 있으려니 몰려오던 잠이 모두 달아난 느낌입니다. 졸음을 쫓는 데는 뭐니뭐니 해도 정부의 망나니짓을 보고 화를 내는 일보다 더 효과적인 것도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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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민(愚民)ngs01 2016-01-27 1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새벽까지 우리나라 축구 응원해습니다. 마지막 남은 한일전도 꼭 승리하기를..😁

꼼쥐 2016-01-28 13:15   좋아요 0 | URL
일단 리우올림픽 출전권은 땄으니 설사 한일전에서 진다고 하더라도 괜찮을 것 같아요. 이기면 더없이 좋겠지만.
 
나의 아름다운 정원
심윤경 지음 / 한겨레출판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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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이 갈수록 뒷전으로 뒷전으로 계속해서 밀려나는 게 있다. 그리움이다.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아쉬움의 흔적들, 유년시절의 추억과 얼굴이 붉어질 만큼 어이없었던 실수들, 순박하거나 촌스러웠을 얼굴들... 그 모든 것들이 뒤죽박죽의 이미지로 가슴에 와락 달려들 때가 있다. 수백 번도 더 떠올렸을 그런 것들이 '그리움'의 목록으로 가슴을 빼곡하게 메우는 날이면 '다 무슨 소용이람' 하면서 애써 외면하게 되는 것도 사실이다. 나는 오래된 습관처럼 그렇게 소용'있는' 것들과 소용'없는' 것들로 애써 편을 나누고 소용'없는' 편에 떠올랐던 그리움의 뭉텅이들을 하나 남김없이 지워버리곤 한다.

 

"어느덧 박 선생님의 목소리는 정원을 떠난 듯하였다. 또다시 홀로 남았는가 하여 목줄기가 먹먹해오려 했으나 고개를 내저어 두려움을 떨쳐버렸다. 더 이상 그분의 소중한 기억을 눈물로 소진하지 않으리. 그리움아 그리움아, 나에게 힘을 다오. 박 선생님에 대한 그리움은 하나의 생명체가 되어 내 안에서 꿈틀꿈틀 태동을 시작하고 있었다. 거대하게 부풀어오른 그리움은 순식간에 내 안을 가득 메우고도 자라기를 멈추지 않아 좁은 내 몸뚱이 안에서 사납게 뒤채며 나갈 곳을 찾더니, 마침내 나의 땀구멍 하나하나마다 황금빛 깃털이 되어 쏟아져나왔다." (p.303)

 

심윤경의 소설 <나의 아름다운 정원>은 애써 밀쳐두었던 유년의 기억들을 하나하나 되살아나게 한다. 의식의 저편에 있던 기억들이 하나 둘 되살아날 때마다 오소소 소름이 돋고 급기야는 눈물 한 방울 찔끔 흐를 것처럼 감정이 고조된다. 아름다운 소설을 읽고 나면 가슴에는 왜 아릿한 슬픔이 남는 걸까? 결말이 비극적이어서 그런 것만은 아니다. 마음의 한편을 슴벅슴벅 도려내는 듯한 아픔이 찌르르 전신을 휘감아 돌고 나면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아련한 그리움만 가슴에 남는다.

 

소설은 인왕산 자락의 달동네를 무대로 1977년부터 1981년 사이에 있었던 한 가족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얼핏 주인공인 한동구의 유년 시절을 다룬 성장소설인 듯 읽히지만 내가 생각하기에 작가는 한동구라는 소년의 눈을 통해 대한민국의 성장기를 다루고 싶었다고 여겨진다. 말하자면 이 소설은 한동구가 아닌 대한민국의 성장소설인 셈이다.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초반의 대한민국은 문화적, 정치적으로 격변의 시기였고 시대의 아픔은 고스란히 그 시대를 살았던 대한민국 국민의 몫이었다.

 

소설은 동구의 어머니가 동생 영주를 출산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3대 독자인 동구의 아버지와 동구가 태어난 후 6년이나 아이가 없었던 탓에 동구의 할머니는 누구보다도 태어날 아기가 아들이기를 기원했다. 그러나 할머니의 바램과는 달리 딸이 태어났고 고부간의 갈등은 점점 격화된다. 음식 솜씨가 좋고 씩싹했던 동구의 어머니는 늦둥이 영주의 돌을 맞아 동네 사람들에게 떡을 나누어줄 요량으로 떡쌀을 넉넉히 준비하지만 이를 본 동구의 할머니는 불같이 화를 낸다. 동구의 아버지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어머니의 편을 들게 되고 그로 인해 부부 사이도 멀어진다.

 

3학년이 될 때까지 한글을 읽지 못했던 동구와는 달리 영주는 제 스스로 한글을 깨쳣는가 하면 할머니에게도 스스럼없이 대하는 바람에 가족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한다. 반면 동구는 점점 천덕꾸러기 신세로 전락하게 되는데 어느 날 동구의 담임이었던 박영은 선생님을 통하여 동구가 난독증을 앓고 있음을 가족 모두가 알게 된다. 마땅히 기댈 데가 없었던 어머니는 선생님께 동구를 부탁하였고 그 바람에 동구는 하루에 한 시간씩 선생님과 나머지 공부를 하게 된다. 얼굴도 예쁘고 마음씨도 고왔던 선생님을 독차지할 수 있다는 게 무엇보다 기뻤던 동구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가족간의 불화와 자신의 속내를 선생님께 털어놓는다. 마냥 행복했던 동구의 3학년이 그렇게 흘러간다.

 

동구는 이제 한글을 제대로 쓰지는 못하지만 어눌하게 읽을 수는 있게 되었고, 담임 선생님의 편지를 가족들에게 읽어줌으로써 자신이 나아지고 있음을 알린다. 그러나 4학년이 되자 박영은 선생님은 6학년 담임을 맡게 되었고, 동구의 담임은 학생들에게는 도통 관심이 없고 이상한 짓만 일삼는다. 게다가 동구를 더욱 난처하게 만들었던 것은 자신의 담임이 박영은 선생님을 마음에 두는 바람에 자신을 앞세워 박영은 선생님을 만나러 간다는 사실이었다. 자신의 학업 상담을 핑계로 말이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던 어느 날 동구는 같은 동네의 주리 삼촌에게 자신의 고민을 말하게 된다. 고시 공부를 하는 주리 삼촌은 동네에서 덩치가 크고 똑똑하기로 소문이 난 사람이었다. 주리 삼촌은 동구의 담임을 만나 다시는 그런 짓을 못하도록 다짐을 받음으로써 동구의 고민을 해결하였을 뿐만 아니라 박영은 선생님과도 인사를 하게 된다.

 

세상이 어수선하던 1980년의 어느 날 박영은 선생님과 주리 삼촌, 삼촌의 후배이자 박 선생님의 선배인 이태석이 만나는 자리에 동구도 합석하게 된다. 장난으로 건넨 술잔을 받아 마신 동구는 마음 속으로만 품고 있었던 사랑 고백을 하게 되고 박 선생님은 동구가 클 때까지 절대로 결혼하지 않겠노라 동구를 안심시킨다.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할머니 손에 자란 박 선생님은 생일을 맞아 할머니가 계신 광주에 다녀오겠다며 그들에게 작별을 고한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박영은 선생님이 어쩌면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얘기를 주리 삼촌으로부터 듣게 된 동구는 강하게 부인한다. 그러던 어느 날 동구의 할머니가 같은 동네에 사는 모실 할머니와 여행을 떠나고 어머니와 아버지는 심하게 다투신다. 영주를 데리고 마당으로 나온 동구는 자신의 목에 무등을 태워 동생으로 하여금 그해 처음 열린 감을 만져보도록 하려다가 그대로 넘어지는 바람에 동생 영주가 죽게 된다. 갑작스럽게 닥친 불행은 동구 가족의 해묵은 갈등을 최고조로 끌어올린다. 동구 어머니는 '자식 잡아 먹은 년'이라는 할머니의 욕설을 견디지 못하여 정신병원에 입원을 하고 기운을 잃은 할머니도 드러 눕는다. 보다 못한 동구는 할머니의 고향 괴산에 내려가 자신과 함께 같이 살자며 할머니를 위로한다.

 

작가는 이 한 권의 소설을 통하여 그 시대의 상황과 아픔을 모두 설명하고 있다. 가난과 가치관의 혼란, 정치적 불안정으로 인한 현실의 고통을 피해 달아나고 싶어 했던 도시 소시민의 삶을 소년 동구의 눈을 통해 고스란히 보여줌으로써 이따금 동구가 찾던 '아름다운 정원'은 현실 밖의 세상, 삶의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운 그런 곳임을 암시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자신이 소중히 하고 끔찍이 위했던 것을 잃음으로써 새로운 것을 얻게 되는지도 모른다. 남아선호의 가치관이 그렇고, 애국심과 반공을 기치로 삼았던 군부독재가 그렇다. 데모는 무작정 나쁜 것이라고 믿었던 동구처럼 그 시절의 나도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다는 건 내가 믿었던 어떤 것을 손에서 놓는 일이다. 그렇게 아끼던 영주를 떠나보내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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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아, 너는 인생을 이렇게 살아라 - 펄 벅이 들려주는 사랑과 인생의 지혜
펄 벅 지음, 이재은.하지연 옮김 / 책비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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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은이들 사이에서 지금도 그런 말이 유행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대학을 다닐 때만 하더라도 '백치미'라는 말은 여자의 매력을 도드라지게 하는 특별한 단어처럼 쓰였던 것 같다. '걔는 백치미가 있어'라든가 '백치미가 있는 애가 좋아'라고 하는 말은 남자들 세계에서 자신의 여성관을 드러내는 흔한 표현이었다. 그때의 '백치미'는 단순히 머리가 나쁘고 맹해 보임을 의미하는 건 아니었다. 어쩌면 머리는 나쁘지만 얼굴은 예쁘다는 속뜻을 에둘러 표현한 말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말이 공공연히 쓰였던 데는 여자 연예인의 공(?)이 컸다고 하겠다. 얼굴이나 몸매는 흠잡을 데 없이 곱고 예쁘지만 어쩌다 출연한 퀴즈 프로에서 상상도 할 수 없는 대답을 내놓는다거나 누가 봐도 출연한 여자 연예인을 속이려는 티가 역력한 상황에서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다는 듯 화들짝 놀라는 모습은 남자들로 하여금 '그래, 나도 저런 심부감을 구해야겠군' 하고 생각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남자들이 백치미가 있는 여성에 대한 막연한 로망을 품게 된 것은 단순히 귀엽다거나 남자들의 보호본능을 일깨운다거나 같이 있을 때 편안함을 느낀다거나 하는 이유인 줄로만 알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닌 듯하다. 예컨대 그 이면에는 남자들의 폭력성이 숨어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드는 것이다. 즉, 아내의 얼굴이나 몸매가 예쁘니 부부동반 모임에 나가서도 목에 힘이 들어갈 테고, 사회 물정이라곤 아무것도 모르니 남편인 자신의 말만 믿고 따를 게 아닌가. 게다가 전적으로 자신이 잘못한 일도 미주알고주알 따지지도 않고 그냥 넘어갈 거라는 믿음이 강하게 드는 것이다. 이를테면 자신의 성적 욕망을 충족시켜 주는 것은 물론 자신이 시키는 건 뭐든지 고분고분 따르는 여자를 자신의 신부감으로 선택하겠다는 의미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말하자면 얼굴만 예쁜 노비를 구하겠다는 것과 진배없었다.

 

"남자로 태어나지 않고 여자로 태어났다는 것은 백인이나 흑인, 황인종으로 태어나는 것과 같이 개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벌어지는 일이다. 그런데도 여성이라는 이유로 행하는 차별은 인종차별만큼이나 잔혹하고 불공평하다. 인류의 절반에 달하는 여성들이 평생을 불평등과 편견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점에서 나는 최대의 약자가 여성임을 환기시키고 싶다." (p.146)

 

펄 벅이 쓴 <딸아, 너는 인생을 이렇게 살아라>를 읽으면서 나는 순간순간 멈춰야만 했다. 시린 하늘이 햇살마저 매섭게 밀어내는 혹한의 추위를 온몸으로 느껴야만 했다. 시대가 변한다 해도, 세월이 흐른다 해도 결코 변하지 않는 남자들의 의식 수준이 아프게 느껴졌다. 나도 그 보통의 수컷 무리 중 한 명일 뿐이었음을 새삼 깨달았다. 저자는 이 책에서 여성 스스로가 여성의 잠재된 위대한 가능성과 책임을 인식하는 바탕 위에서 미혼의 여성이 현명하게 사랑하고 행복한 가정을 이룩하기 위해 필요한 나름의 지혜를 조목조목 설파하고 있다.

 

나는 이따금 공공장소에서의 낯뜨거운 장면을 종종 목격하곤 한다. 성적 자유를 누가 말릴 수 있으랴. 그러나 원치 않는 임신과 출산을 경험하는 미혼모들이 나날이 늘어나는 이 마당에, 자신이 낳은 아기를 쓰레기 버리 듯 유기하는 이 시대에 남녀 성평등이라는 명목은 과연 합당한 부르짖음인지... 백여 년 전 서양의 무분별한 성 의식에 대해 따끔한 질책을 보냈던 펄 벅 여사이고 보면 이 책은 현재 우리나라의 젊은이들에게 보내는 올바른 지침서일지도 모른다.

 

"더불어 젊은이들에게 앞으로 태어날 아기에 대한 존경심을 가르쳐야 한다. 아기에게 새 삶을 주어 세상 밖으로 내보냄으로써 인생에서 가장 중대한 책임을 경험하게 되었으니 말이다. 이유를 막론하고 사랑에는 책임이 따른다. 사랑의 결실인 아기는 부모가 더더욱 잘 보살필 의무가 있다. 아기 스스로 선택해서 태어난 것이 아니잖은가. 사랑하는 두 사람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무책임한 부모가 아기를 버렸어도 사회가 그 아기를 받아준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p.208)

 

생후 5개월 만에 중국으로 건너가 15세까지 그곳에서 성장하다가 미국으로 귀국했던 펄 벅은 이 책에서 동양과 서양을 비교하기도 하고, 때로는 자신의 경험이나 사례를 들어 설명하면서 젊은 여성이 겪을 수 있는 이런저런 고민에 대해 조언을 아끼지 않는다. 그리고 여성이 여성으로서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의 떳떳한 권리를 보장받기 위해서는 경제적 책임을 무조건 남편에게 지우고 결혼을 여자 인생의 보험쯤으로 생각하는 여성의 의식이 바뀌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행복이란 인간이 가지고 태어난 능력과 모든 정력을 기울여 자기 사명을 다했다고 생각할 때 비로소 그 사람에게 주어진다. 남성들은 이 엄연한 사실을 대충 얼버무리고 지나가서는 안 된다. 따라서 모든 남성은 자신의 아내가 어떤 부류에 속해 있는지 스스로 물어볼 필요가 있다. 아마도 대부분은 아내가 가정에 있기를 바라며 그것이 여성의 본분이라고 대답할 확률이 높다. 나는 이 사실을 가지고 논쟁할 생각은 없다. 어쨌든 그것은 분명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 사실을 솔직히 인정하라는 것이다. 미국의 남녀 관계는 구습에 매여 있으며, 대개 여성은 남성이 하기 싫어하는 일을 하는 보조적인 입장에 있을 뿐이라는 사실 말이다. 이를 허심탄회하게 인정하지 않은 채 여성들에게 사회 진출에 대한 꿈을 불어넣는 교육을 한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p.328)

 

지금도 백치미를 배우자 선택의 기준으로 꼽는 젊은이가 있다면 나는 그 사람을 믿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다. 가정의 경제를 남편이 모두 책임져야 한다고 믿는 여자도 바람직하지 않겠지만 혹여라도 사회 물정을 모르는 맹한 남자를 순수하다고 믿는 여자가 있다면 그 또한 정상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결혼을 약속한 남자의 입에서 백치미 운운하는 소리가 나온다면 심각하게 고려할 문제라고 본다. 그 이면에 숨겨진 심각한 폭력성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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