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체탐구생활
김현진 지음 / 박하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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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의 약점이나 치부를 가리는 것 하나 없이 솔직하게 드러내는 사람을 보면 이유도 없이 괜히 화가 난다. 자신의 이야기를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 숨김 없이 내보이는 작가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한데 정작 그것을 읽는 내가 마치 내 일인 양 화가 나는 것이다. 이건 또 무슨 시츄에이션? 하고 묻겠지만 사실 왜 그런지 정확한 이유를 나도 잘 모르겠다. 다만 자신의 약점을 적당히 가리고 살짝 내비치거나 조금만 힌트를 준다 한들 누가 뭐라고 할 것도 아닌데 굳이 시시콜콜 다 까발려서 자신의 이미지만 깎아먹을 필요는 없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내가 작가와 친밀하다거나 특별한 관계가 있어서 하는 얘기가 아니다. 독자로서 안타까운 마음에 하는 말이다.

 

최근에 알게 된 김현진 작가도 그 중 한 사람이다. <육체 탐구 생활>은 그녀가 쓴 책 중 내가 읽은 두 번째 작품에 불과하지만 지나친 솔직함으로 인해 작가의 문학적 재능이 덜 부각된다거나 작가의 인생관이나 세계관에 대해 색안경을 끼고 바라보는 독자가 있을까 우려하는 마음이 드는 걸 어찌할 수 없었다. 우리 사회에서 솔직함이라는 게 때로는 공격의 대상이 되기도 하거니와 젊은 사람의 치기 어린 반항, 또는 세상을 향한 삐딱한 시선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상처는 어느 누구에게도 하소연하지 못한 채 고스란히 작가 자신이 떠안아야 하는 몫으로 남기 때문이다.

 

"화내야 할 때 화낼 줄 모르고 참아야 할 때 참을 줄 모르는 불균형한 어른이 되면서 내 영혼은 몸에서 달아나는 법에 너무 익숙해져버렸다. 모멸과 슬픔에 맞서 싸우지 않고 천장 어디쯤에서 남처럼 자기 몸을 쳐다보면서, 저기 가서 좋은 일이 없었다면서, 잊고 싶은 기억이 불로 지지듯 들고 일어나 어제 일처럼 쿠킹호일 구기듯 마음을 구겨버리면 술을 찾아 사고를 저지르고 후회한 게 지난 10년이었다." (p.83)

 

이 책에는 그닥 길다고 말할 수도 없는 작가의 지난 삶이 빼곡히 자리잡고 있다. 책은 50대의 이른 나이에 생을 마감한 아버지의 이야기로부터 시작된다. 녹즙 배달을 하던 시기에 갑자기 돌아가신 아버지를 서둘러 화장하고 유골함이 엄마와 함께 대구로 향할 때 자신은 집에 남았다고 한다. 그때 그녀의 엄마는 유골 일부를 청국장통에 남겨두고 가셨는데 작가는 자신이 마련한 예쁜 통에 유골을 옮겨 담고 빈 통을 헹구는데 물 위에 뜨는 유골을 차마 하수구에 버릴 수 없어서 물과 함께 마셨다고 한다. 역시 도발적이다. 작가는 그렇게 자신의 육체를 제공한 아빠의 죽음으로부터 자신의 육체가 걸어온 길을 더듬는다.

 

생활에 지쳐 자학하듯 살았던 이야기며, 사랑으로부터 늘 피하고 도망치기만 했던 지난 날이며, 그 과정에서 만났던 이웃들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길지 않았던 그녀의 삶에 비해 그녀가 들려 주는 이야기는 50년대 피란민의 아주 오래된 이야기처럼 파란만장하기만 하다. 어찌 살았나 싶을 정도로 피폐하다. 30대 아가씨의 삶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그러나 냉정한 말로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그 중의 일부는 작가 스스로 자초한 일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자신의 나약함을 숨기기 위해 없는 발톱을 일부러 드러낸 채 악다구니를 썼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총 4부로 이루어진 이 책에서 작가는 자신의 연애 경험담(2.사랑이라는 '불완전'명사)과 새벽에 녹즙을 돌리며 낮에는 카페 아르바이트를 하던 시절의 이야기(3.파란만장 미스김)와 그녀가 참가했던 농성장과 가슴 아픈 죽음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 있다. 내가 안타깝게 생각했던 것도 바로 그런 점이었다. 우리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누드 모델을 보고 성욕을 느끼거나 섹시하다고 말하지 않는 것처럼 아무리 파란만장한 개인의 삶이라 할지라도 솔직하게 쓴 작가의 글이 그것을 읽는 독자의 입장에서 끔찍하다고 느껴진다면 인정을 받지 못하는 건 자명한 일. 그것은 작가의 재능과는 하등 무관한 일일 터였다.

 

"까마득한 옛날, 고등학교 그만두면 모두 장선우 감독의 <나쁜 영화>에 나오는 것처럼 가출하고 담배 피고 신나 불고 그런 애들이 된다고 다들 생각할 무렵 교장과 싸우고 싸우다 고등학교를 때려치운 것부터 시작해서 왜 그렇게 사느냐 하고 잔소리 들을 일이 서른 먹을 때까지 참 많고도 많았다. 삐딱한 글도 많이 썼고, 팔리지도 않는 삐딱한 책들도 많이 썼고, 부르는 데가 있으면 가서 삐뚤어진 이야기를 잔뜩 해댔다. 물론 이건 피곤한 짓이다. 나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관심병이라 한다면 그 또한 맞는 이야기다." (p.277~p.278)

 

어린 시절의 고통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과도하면 과도할수록 가난이나 삶의 고통으로부터 탈출할 방법을 궁리하기보다 고통에 견디는 법을 먼저 익힌다는 걸 나는 잘 알고 있다. 왜 그렇게 사느냐고 하지만 고통이 더 이상 고통으로 느껴지지 않을 만큼 익숙해졌다는 걸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잘 모른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너무나 뻔한 생각을 했더랬다. 작가의 지난 삶이 순탄하지만은 않았구나, 하는 그런 시답잖은 생각 말이다. 작가가 리영희 선생님의 병문안을 갔던 이야기를 이 책의 끝에 실었던 것도 다 이유가 있을 터였다. 어쩌면 작가는 자신의 육체 탐구를 마치고 영혼의 탐구를 새로이 시작했는지도... 아무튼 그녀의 앞날에 건투를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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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의 공약(公約)이 '빌' 공(空)자 공약(空約)이 되는 걸 한두 번 보아온 것도 아니지만 오늘 또 그런 모습을 보니 입맛이 자못 쓰다. 알다시피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니 통일 대박론이니 하는 것은 2013년 대통령 취임 직후부터 내걸었던 현 정부의 통일 정책이자 공약이었다. 그러나 불과 3년이 지난 이 시점에서 아무런 가시적인 성과도 없이, 또는 그런 정책이 있기나 했었나 하는 생각이 들게 하면서 돌연 막을 내렸다. 정부가 갑자기 대북 강경론으로 선회한 명목상의 이유는 북한의 핵실험이나 로켓 발사가 되겠지만 그보다는 총선을 겨냥한 세결집의 목적이 더 클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국민들이 의아하게 생각하는 것은 국가의 존립보다 정권 유지가 더 우선인가? 하는 문제이다. 그것은 남과 북이 비슷해 보인다. 예컨대 북한은 김정은 정권의 권력을 유지하고 공고히 하기 위한 차원에서 여타의 외부적인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핵실험과 로켓발사를 감행하였다면 박근혜 정부는 '국가신용등급'이나 'CDS 프리미엄'의 불이익을 감수하면서까지 개성공단의 중단을 비롯한 대북 강경책을 꺼내들었다는 것이다. 세계경제나 대한민국의 경제가 상승 국면일 때라면 그나마 충격이 덜했을 테지만 국가 경제의 존립 근간이 흔들리는 이 시점에서 그와 같은 무모한 짓을 했다는 것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처사인 듯 보인다.

 

더구나 중국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한반도 사드 배치 문제를 들고 나온 것은 정부의 뻘짓 중에서도 최악이 아닐까 싶다. 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인 사드는 북한의 중,단거리 미사일의 방어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음에도 정부는 북한의 로켓 발사를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미국과의 한반도 사드 배치 협상을 시작하겠다고 발표했다. 이것이 현실화된다면 중국과의 외교적 마찰뿐만 아니라 중국의 경제 보복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통일 대박론이 아니라 '강경 쪽박론'이 될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얘기다.

 

모 기업의 직원으로 중국에 파견되어 있는 친구는 예전에 그런 말을 했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은 중국이 사회주의 국가라는 사실을 간과하는 것이라고. 비록 중국이 개혁 개방을 내세우고 시장경제를 표방하고는 있지만 중국은 엄연히 중국식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이며 정치적으로는 공산주의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중국 정치권의 방향이나 의도에 따라 경제 정책도 일사분란하게 변할 수 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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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민(愚民)ngs01 2016-02-17 0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동안 변하지 않는 투표성향인 것 같습니다.
6.25를 직접 겪으신 세대와 않은 세대.
조금만 건드리면 응집력이 대단하지요
혹시나 이번에는 싶지만
결국에는 기득권세력의 의도대로 되겠지요.
권력이 국민을 우롱하는 기만행위는 이제 사라져야 되는데 안타까운 일입니다.

꼼쥐 2016-02-17 11:52   좋아요 0 | URL
여당이 나라를 팔아먹어도 찍어줄 사람들이 쌔고 쌨지요. 이건 뭐 숫제 판단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오기로 투표를 하는 것 같아요. `나는 한 놈만 팬다`는 식의 조폭 근성인 듯 말이죠.
 
어떤 삶을 살든, 여자가 절대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들
박금선 지음 / 갤리온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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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더 자라 여섯 살이 되면 아이들은 하루에 400번 넘게 웃는다. 그런데 대부분 나이가 들면서 웃음을 잃어버리나 보다. 인간의 삶을 80년으로 볼 때 잠자는 데 26년, 일하는 데 21년, 밥 먹는 데 6년, 사람 기다리는 데 6년을 쓰지만, 웃는 데는 고작 22시간 정도를 보낸다고 한다." (p.155)

 

누가 내게 오늘 얼마나 웃었나요? 묻는다면 할 말이 없을 듯합니다. 크게 소리 내어 웃었던 기억을 떠올려 보려고 해도 도통 기억나는 게 없으니 말이죠. 불황의 늪에 빠진 대한민국의 우울한 현실을 생각할 때 저는 지극히 보편적인 대한민국의 국민 중 한 사람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는 요즘 걸어 가기에는 조금 멀다 싶은 거리일지라도 포기하지 않고 웬만한 거리는 일부러라도 걸으려 애쓰고 있습니다. 나이가 들면 어차피 내 두 발로 걷고 싶어도 걷지 못할 날이 분명히 올 텐데 지금부터 미리 연습할 필요는 없겠다 싶어서지요. 그렇게 걷다 보면 거리의 분위기가 예전과 많이 달라졌다는 걸 느끼곤 합니다. 어둡고 침울해졌다고나 할까요. 아무튼 활기가 없어졌다는 게 제 소견입니다.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활기가 넘치는 시대에 살지 못하는 것도 운명인 것을. 맘에 안 든다고 다시 태어날 수는 없는 일이잖아요. 그렇다면 이 우울의 시대를 어떻게 사는 게 바람직할까 생각하게 됩니다. 만약 저와 같은 생각을 하셨던 분이라면 방송 작가 박금선이 쓴 에세이 <어떤 삶을 살든, 여자가 절대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들>을 읽어보는 게 어떨까 싶습니다. 이 책을 읽는 독자라면 활기 없는 시대를 불평 없이 살아가기 위한 약간의 팁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잠깐의 체험은 경험 삼아 해 볼 만하니 견딜 수 있다. 그리고 그 체험이 이어지고 반복되면 묵직한 경험이 될 것이다. 경험 속에서 지혜가 싹트고, 깊은 맛이 우러나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그러니 인생의 크고 작은 시련과 마주할 때마다 이렇게 마음먹어 보자. 나는 지금 체험 관광 하러 왔다. 호기심을 가지고 많은 것을 배우고 느끼자." (p.283)

 

작가는 MBC 라디오의 간판 프로그램인 [여성시대]를 22년간 이끌어 오고 있는 베테랑 방송 작가라고 합니다. 작가는 200만 통에 이르는 여자들의 편지 가운데에서 일, 사랑, 결혼, 육아 문제로 고민하는 후배들에게 꼭 전하고 싶은 인생의 교훈 50가지를 추려 내어 이 책에 쓰고 있습니다. 자신 또한 워킹맘으로 30년을 살아오면서 많은 것을 깨달았고 그 시절의 자신처럼 살고 있을 많은 후배들에게 진실한 조언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저는 요즘 번잡한 일상을 그저 무심히 지켜볼 때가 있습니다. '내가 왜 이 짓을 하고 있나' 하는 자괴감에 빠질 때도 더러 있고요. 생각해 보면 그게 바로 삶을 이루는 처음이자 끝인지도 모를 텐데 우리가 바라는 삶의 형태는 어쩌면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 어떤 것, 아무도 갖지 못한 어떤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 환상으로 삶의 기준을 삼는다면 모든 게 불만 투성이이겠지요. 얼마 전 고인이 되신 신영복 선생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사람을 크게 지혜로운 사람과 어리석은 사람, 두 부류로 나누기도 하는데, 지혜로운 사람은 세상에 자신을 맞추는 사람입니다. 반면에 어리석은 사람은 자신을 세상에 맞추기보다 세상을 자기에게 맞출 수 없을까 고민합니다. 역사적으로 보면 세상이 그나마 변화한 것은 지혜로운 사람이 아니라 이렇게 어리석은 사람 때문이지요. 그래서 공부는 어리석게 해야 합니다. 당장의 이익을 쫓지 말고요."

 

작가가 살아온 모습도 남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합니다. 작가의 조언이 가슴에 와 닿는 이유도 그래서일 것이라고 짐작합니다. 한 사람의 아내로, 엄마로, 직장인으로 일인 다역을 하며 살자면 어느 한 곳에 진득하니 앉아 쉴 수 있는 처지는 아니었겠지요. 종종거리며 뛰어다니다 보면 실수도 많았을 테구요. 더러는 그 실수로 인해 눈물 흘렸던 날도 많았을 것입니다. 어쩌면 이 책은 작가가 눈물과 실수로 써내려 간 삶의 이력서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책에는 '그때 나는 왜 그리도 우울했던 걸까?', '밥벌이, 그 고단하지만 고귀한 일에 대하여','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산다는 것은 그렇게 서로가 조금씩 어긋나는 것', '당신의 남자는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속이 깊다', '살면서 미루지 말아야 할 것은 그리운 사람에게 전화하는 일', '시댁 일은 공적으로 처리하라' 등 소제목에서도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삶의 지침들이 빼곡합니다.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한 여자의 남편으로 살면서 나도 모르게 저질렀을 많은 실수와 아내에게 주었을 상처들을 생각했습니다. 삶의 이력서와 삶의 반성문은 동전의 양면처럼 그렇게 닮아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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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테라
박민규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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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소설은 우리가 사는 메이저한 세상에서 메이저한 방법으로 읽어서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굳이 말하자면 아귀가 맞지 않는 맷돌처럼 한없이 겉돌기만 하다가 종국에는 '아몰랑' 내팽개치게 된다는 말이다. 그럴 땐 곰팡내 나는 마이너한 공간으로 내려가서 마이너한 방법으로 책을 읽어야만 한다. 눈의 초점을 의도적으로 흐리게 하지 않으면 '매직 아이'에 나타나는 입체 사진이나 그림 속에 숨겨진 특정 글씨가 3D로 나타나는 경이적인 현상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박민규의 단편 소설집 <카스테라>도 어쩌면 그렇게 읽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의식의 한 쪽 눈을 한 자리에 고정시킨 채 다른 쪽 눈을 몽롱한 꿈의 세계에 반쯤 걸쳐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치 '매직 아이'를 볼 때처럼 말이다. 그렇게 읽지 않으면 현실과 꿈의 층위가 한 화면에서 3D로 나타나지 않는다. 물론 아무리 애를 써도 2D로 밖에 볼 수 없는, 조금 덜 떨어진(말하자면 그렇다는 것이다) 사람이 있게 마련이지만. 내가 이렇게 말했다고 하여 작가에게 '적녹안경'을 요구한다거나 소설의 리콜을 요구하는 등의 덜떨어진 짓을 하는 사람은 물론 없겠지만 말이다.

 

"이불을 펴고 나는 자리에 누웠다. 두 개의 창문 틈으로 시린 우풍이 새어들어왔다. 세기의 마지막 밤은 - 그런 식으로 우리의 세계를 냉장하고 있었다. 오늘밤만은 이 세계의 부패도 잠깐 그 진행을 멈추겠지, 라고 나는 생각했다." (p.32)

 

이 책은 표제작인 '카스테라'를 비롯하여 10편의 단편을 한 권에 엮은 단편 소설집이다. '카스테라'는 대학교 근처에서 자취를 시작한 내가 소음이 심한 냉장고를 구입하여 2년여를 같이 지내는 동안 온갖 황당무계한 생각에 빠져들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냉장고의 전생이 훌리건이었을 거라는 발상에서부터 코끼리를 냉장고에 넣는 방법에 이르기까지 나의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나는, 그러니까 책을 읽는 동안 전두엽에서 이탈한 나의 뇌세포가 변연계를 지나 해마로 숨어들었다가, 십삼 년 전 범죄를 저지른 어느 살인자가 여전히 잡히지 않고 은신하는,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어두운 동굴의 가장 깊은 곳에서 작가와 어렵사리 접선한 느낌이 들었다. '귀신 씨나락이라도 까먹는 듯한 음악이 울려퍼지는' 너구리 게임의 폐인과 친구가 된 <고마워, 과연 너구리야>를 읽고, 흔들리는 삶을 붙잡고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는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를 읽고, '이 세계가 너무, 그렇고 그렇다'는 생각으로 살아가는 사람의 지구 탈출기 <몰라 몰라, 개복치라니>를 다 읽을 즈음이면 그래, 점심을 먹어야지. 밥을 먹으러 가기 전에 딱 하나만 더, 일흔세 곳의 직장에서 퇴짜를 맞고 유원지 오리배를 관리하며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한 취준생의 이야기<아, 하세요 펠리컨>을 읽는 바람에 늦은 점심을 먹게 되었다.

 

"전문대라는 단어 역시, 늘 어딘가에서 32킬로미터 떨어진 느낌이었다. 퐁당퐁당 퐁당. 그래서 그곳의 가족들이, 혹은 커플들이 한 마리의 오리를 타고 앉은 광경을 지켜보노라면 묘한 연민의 정이 생겨나기도 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뭐랄까, 저렴한 인생들 사이에 흐르는 심야전기와 같은 것이었다." (p.130)

 

변비로 고생을 하는 한 남자의 일상을 다룬 <야쿠르트 아줌마>, 대학시절 학생 운동을 함께 했던 선배의 몰락을 지켜보는 한 직장인의 삶을 그린<코리언 스텐더즈>, 어린 시절에 구독하던 잡지 '소년 중앙'에서 보았던 대왕오징어의 추억이 '괴수대백과사전'으로, '주간경향'으로, '사상계'로 옮겨오면서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을 그린 <대왕오징어의 기습>, 미국 유학 시절 헤드락을 당한 경험과 자신이 행한 헤드락의 추억을 잊지 못하는 이야기의<헤드락>, 대학 시절 학교 근처의 고시원에서 이년 육 개월을 살았던 어느 샐러리맨의 추억을 다룬 <갑을고시원 체류기>를 읽었다.

 

"인간은 결국 혼자라는 사실과, 이 세상은 혼자만 사는 게 아니란 사실을 - 동시에,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모순 같은 말이지만 지금도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즉, 어쩌면 인간은 - 혼자서 세상을 사는 게 아니기 때문에, 혼자인 게 아닐까." (p.286~p.287)

 

박민규 작가의 소설을 읽다 보면 나도 모르게 큭큭 웃음이 터져나오기도 하고, 찡한 감정의 자신도 알 수 없는 묘한 느낌이 울컥 눈물샘을 자극하기도 한다. 지구는 둥그니까 자꾸 읽어나가면 저렴한 인생을 사는 전세계 인간 군상들을 모두 만나볼 것도 같고, 그들 사이로 흐르는 심야전기가 찌리릿 느껴질 것도 같다. 찌릿 찌릿 찌리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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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닥 새로운 일도 아니지만 만나는 사람들마다 경제가 어려워도 너무 어렵다며 죽는 소리를 한다. IMF 금융위기 때도 지금보다는 나았다는 게 일반적인 시각이다. 위축 국면에 접어든 세계 경제의 불황 탓도 있을 것이다. 전세계적으로 어떤 유행처럼 번진 신자유주의 경제정책은 근 십여 년만에 부익부 빈익빈 현상을 극도로 심화시켰고, 대다수 저소득층의 소비여력을 바닥까지 떨어트렸기 때문이다. 문제는 소비인데 어떤 수단으로도 소비는 회복되지 않는다. 저금리를 지나 마이너스 금리로도 소비는 살아나지 않는 모양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아무리 금리를 낮춘들 소득 하위계층의 소비여력이 증가하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백약이 무효인 셈이다.

 

이런 와중에 정부와 여당은 개성공단의 폐쇄를 감행함으로써 가뜩이나 어려운 한국 경제에 카운터 펀치를 날린 꼴이 되었다. 물론 심리적으로 속이 시원할 수는 있을 것이다. 미국의 환심을 조금 살 수도 있을 테고 말이다. 그러나 아무리 애를 써도 일본과 같이 주한 미군의 방위비를 우리가 부담하지 않는 한 일본과 같은 적극적인 환대는 받기 어려울 것이다. 현 정부는 정치를 무슨 이즘(ism)이나 속풀이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대화와 타협은 사라진 지 오래다. 노동계와 각을 세우는 이유도 그런 데서 찾을 수 있다.

 

우스갯소리이지만 이번 사태를 불러온 원인이 꽤 오랫동안 해외여행을 나가지 못한 대통령의 스트레스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비서실에서 어떤 건수를 만들어서라도 대통령을 해외로 내보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못한 불똥이 개성공단으로 튀었다는 것인데 아무튼 대한민국 경제는 암울한 국면을 면키 어렵게 된 건 사실이다. 국민들은 간혹 개성공단 입주기업의 사장들을 걱정하는데 그럴 필요는 없어 보인다. 이 참에 정부의 보상을 받아 챙기고 골치 아픈 사업을 정리하면 그만이다. 문제는 직원들과 그 가족의 생계인데 그것까지 정부가 나서서 챙겨줄 리는 만무하다. 지금이라도 대통령의 외유를 주선하면 한국 경제는 조금 나아지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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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이소오 2016-02-12 12: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각하는 편집증이 있습니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총에 맞아 죽은 한국인은 찾기 힘들잖아요?
전문가와의 상담이 필요하죠. 상담 결과에 따라 신속한 격리 조치가 이뤄지면 좋겠네요.

꼼쥐 2016-02-14 14:01   좋아요 1 | URL
그럴 수만 잇으면 그랬으면 좋겠어요. 대한민국의 발전을 위해서 말이죠. 이게 뭡니까,도대체...

우민(愚民)ngs01 2016-02-13 02: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정부는 태생부터 민생보다는 재벌친화적이죠 대기업들 법인세 감면으로 사내유보금만 늘게 하고
증세 안한다고 하고는 담배세등 간접세 올려서 서민들 등처먹는 양아치 수준 참고로 저는 담배를 안핍니다. 국민건강 생각하는 척 하지말고 민생을 챙기는 잔여임기가
되기를 빌어봅니다.

꼼쥐 2016-02-14 14:04   좋아요 1 | URL
저는 담배세 올렸던 지난해 1월부터 담배를 끊었습니다. 그러니까 담배를 끊은 지 만 1년 하고도 한 달 반이 지난 셈이죠. 현 정부를 위해서 세금을 더 내고 싶은 생각은 눈곱만치도 없었기 때문에 담배도 끊을 수 있었죠. 그 점에 대해서는 감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우민(愚民)ngs01 2016-02-14 14: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잘 하셨네요! 😊 지금이라도 이 정부가 뉘우치고 서민을 위한 집권 마무리를 했으면 합니다. 물론 안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