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 테라스에 펭귄이 산다 - 마젤란펭귄과 철부지 교사의 우연한 동거
톰 미첼 지음, 박여진 옮김 / 21세기북스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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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매일 아침 산에 오르는 나로서는 자연에 대한 애정이 각별할 수밖에 없다. 촌에서 태어나 자연 속에서 성장했던 것도 무작정 자연에 끌리는 한 이유가 될 것이다. 겨울이건 여름이건 일단 산에 오르면 나는 그렇게 마음이 푸근할 수 없다. 나무 위를 무리지어 오르는 청설모와 이따금 만나는 고라니의 가벼운 도약을 보는 것만으로도 더없이 즐겁다.

 

<우리집 테라스에 펭귄이 산다>를 단숨에 읽었던 것도 따지고 보면 자연을 좋아하는 나의 성향 탓이 아닐까 싶다. 호기심 많고 모험심 강한 영국 시골 마을 출신의 청년 톰 미첼은 오직 낯선 곳을 탐험하고, 야생을 보고 싶다는 욕망에 이끌려 남아메리카의 아르헨티나로 향했다. 그가 갔던 1970년대초의 아르헨티나는 정국이 불안하고 인플레이션이 극심했던 시기였지만 그는 돈을 벌겠다는 욕심보다는 먹고 자고 생활하면서 새로운 문화와 자연을 체험하는 게 더 좋다고 그는 말했다. 아르헨티나의 유일한 기숙 학교인 세인트 조지의 선생님으로 자원하였고 그는 그렇게 아르헨티나에서의 삶을 시작했다.

 

"혼자 여행을 하다 보니 이전에 보고 들엇던 모든 것을 다시 생각해보고, 남아메리카에 대해 막연하게 품었던 기대와 현실을 비교해보면, 진정으로 중요한 것과 소중한 것에 대해 깊이 생각해볼 수 있었다. 이 세상에는 경이롭게 아름다운 것들과 이루 말할 수 없이 귀중한 것들이 이토록 많은데 인간은 다른 모든 종에게 그토록 이기적이고 잔인할 수 있을까?" (p.281)

 

작가는 어느 날 우루과이 해안의 휴양도시 푼타델에스테 Punta del ESte의 전망 좋은 아파트에서 휴가를 보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친구 벨라미스가 한겨울에는 사용하지 않는다며 휴가용 아파트를 그에게 기꺼이 내준 것이다. 그렇게 느긋하고 여유로운 휴가를 보낸 작가는 떠나기 전날 서둘러 짐을 꾸리고 청소를 하고 마지막으로 바닷가 산책을 나섰다. 그런데 그곳에서 그는 기름과 타르에 덮여 죽어가는 수많은 펭귄의 사체를 목격한다. 기름유출 사고는 아니었고 환경 관련 규제들이 허술했던 당시의 유조선들은 화물을 내린 후 바닷물에 탱크를 씻기 일쑤였고, 유조선에서 흘려보낸 기름에 의해 많은 펭귄들이 죽어갔던 것이다.

 

그 끔찍한 장면을 보면서 해안을 따라 걷던 작가는 어느 순간 미약한 움직임을 목격하고 걸음을 멈춘다. 죽기 직전의 마지막 고통의 몸부림을 그는 차마 외면할 수 없어서 기름에 덮인 펭귄을 들고 아파트로 향한다. 아파트 욕실에서 펭귄을 씻기던 중 부리에 손가락을 물려 깊은 상처를 입기도 했지만 작가는 기름을 제거한 후 바다로 되돌려 보낼 생각으로 열심히 씻겨주었다. 그러나 다 씻긴 펭귄을 데리고 바닷가에 나갔지만 그 새는 펭귄 무리를 향해 나아가지 않고 다시 작가를 따라왔다고 한다. 휴가를 마친 작가는 어쩔 수 없이 그 펭귄과 함께 우루과이로부터 아르헨티나 부에노스아이레스로의 험난한 여정을 시작했고 우여곡절 끝에 세인트 조지의 기숙사로 복귀했다. 스물세 살의 영국인 청년과 마젤란 펭귄 후안 살바도르(작가가 붙여준 펭귄의 이름)의 동거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사람들은 후안을 현명한 새라고 생각했다. 후안의 외모도 한몫했다. 성직자들이 입는 빳빳이 세운 흰색 칼라 모양의 털에 길고 검은 망토를 입은 그의 모습은 마치 빅토리아 시대의 어느 너그러운 노신사처럼 보였다. 통풍으로 다리가 불편한 그런 노인 말이다. 아니면 목에 십자가 목걸이만 두르면 주교님처럼 보일 수도 있다. 언뜻 보면 말이다." (p.175)

 

후안의 소문은 학교 전체로 삽시간에 퍼져나갔고 300명이 넘는 학생들과 교직원들, 심지어 경비원이나 청소를 담당하는 아줌마들에게도 후안은 특별한 존재가 되었다. 작가의 테라스에 거처를 정한 후안은 자신을 찾아온 사람들의 고민을 들어주고 눈을 마주치고 격렬하게 반겨준다. 인간과 동물이라는 관계를 떠나 사람들은 차츰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후안을 대하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후안이 좋아하는 청어를 사다 날르고 테라스 청소를 하고 같이 산책을 하는 등 후안은 세인트 조지의 명실상부한 마스코트가 되었다. 그렇게 사람들과 격이 없이 소통하면서 우정을 키워나갔다.

 

"후안은 펭귄이 아닌 사람을 대상으로 사회생활을 했다. 불현듯 후안이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들은 후안이 보내는 신호를 일일이 받아주고 대응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과연 나는 사람 한 명도 없이 오직 펭귄들하고만 얼마나 살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지금 세인트 조지에 있는 후안 살바도가 그렇게 살고 있을 테니까" (p.247)

 

작가는 후안을 펭귄 무리에 되돌려 보내기 위해 발데스 반도를 둘러보는 둥 노력을 하지만 그것이 결국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후안의 입장에서도 행복한 것만은 아니라고 판단하기에 이른다. 좋든 싫든 그는 후안을 끝까지 돌보겠다고 결심한다. 방학이면 그는 후안을 세탁실의 사라 아줌마에게 맡기거나 교사 루크에게 맡기고 한동안 여행을 하기도 하면서 잘 지낸다. 그러나 루크에게 맡겼던 어느 여름날 갑자기 후안이 죽었고 루크에 의해 안장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작가는 아르헨티나에서의 특별했던 추억을 안은 채 영국으로 귀국했고, 후안과의 잊지 못할 경험을 책으로 냈다. 이 책에서 작가는 후안이 마치 자신의 친구인 양 코믹하게 쓰고 있다. 노인이 된 작가는 다시 아르헨티나에 돌아와 후안과 지냈던 추억의 장소를 더듬기도 한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몇 년 전에 읽었던 <아름다운 지구인 플래닛 워커>를 떠올렸다. 샌프란시스코 만의 기름 유출 사고를 목격하한 후 화석 연료를 사용하는 자동차 시승을 거부하였고, 미국 전역을 걸으면서 17년 동안 말을 하지 않았던 존 프란시스. 이런 책들을 읽으면 인간의 편의를 위한다는 명목으로 우리는 자연에 대해 너무나 잔인하지 않은가 반성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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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갈 능주 생중달(死諸葛 能走 生中達)'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시는 분도 있겠습니다만 삼국지에서 전해지는 말이지요. 죽은 제갈량이 살아 있는 사마의를 쫓아냈다는 뜻으로 촉인들 사이에 회자되던 말인 듯합니다. 출사표를 바치는 것으로 시작된 제갈량의 북방원정은 읍참마속(泣斬馬謖)의 비극을 겪은 후에 결국 오장원에서 제갈량이 죽음으로써 끝이 나게 됩니다만 제갈량은 이미 자신의 죽음을 예견한 듯 자신이 죽기 전에 사마의를 몰아낼 계책을 세웠던 것입니다. 사마의는 제갈량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촉군을 향해 진격했으나, 촉군 진영에서는 제갈량이 살아서 군대를 통솔하고 있었다지요. 혼비백산한 사마의는 꽁지가 빠져라 퇴각하였고 그 바람에 촉군은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실제로 그것은 제갈량이 아니라 제갈량을 본뜬 목상이었습니다. 후에 사마의는 "나는 그의 삶도 헤아리지 못하고 그의 죽음도 헤아리지 못하는구나!" 하고 한탄했다고 합니다.

 

요즘 여당이나 야당이나 4월에 있을 총선에 대비하여 공천 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만 그로 인하여 정국이 시끄러운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참으로 웃기는 것은 살아 있는 권력보다는 죽은 사람이 더 무서운 것인지 연일 '친노 패권'이니 '노무현 세력'이니 '노빠'라느니 7년 전에 서거하신 노무현 대통령을 들먹이고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삼국지에서의 조조도 죽은 관우의 환영에 시달리다가 결국 죽음을 맞았다지요. '친박 패권 청산'이라는 구호는 들어본 적도 없으니 살아 있는 권력은 아무것도 아닌 모양입니다. 새누리당이든 야당을 표방하는 국민의당이든 돌아가신 노무현 대통령의 환영에 시달리는 걸 보면 그들의 최후도 멀지 않은 듯합니다.

 

과연 그들은 무엇이 두려운 것일까요? 무덤 속에서 권력을 행사할 리도 만무한데 말입니다. 뉴스에서 연일 떠드는 바람에 한동안 잊고 지냈던 국민들도 돌아가신 대통령을 다시 그리워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깜박 잊었던 그 모습을 선명하게 떠올리기도 하고 말입니다. 야권의 분열로 인하여 여권이 어부지리의 승리를 점치는 분들이 많습니다만 권력의 향배야 어찌 되든 고인이 되신 대통령을 그리워하는 많은 국민들이 있는 한 살아 있는 권력은 영원히 고인의 환영 속에서 두려움에 떨어야 할 것입니다. 꽃이 피는 4월이 오면 우리는 20대 국회의원을 새로이 뽑고 허깨비 같은 그들을 국회의원이라 칭하겠지만 5월의 기억은 꿈결인 양 아련한 그리움으로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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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11 19: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03-12 17: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14일 - 엄마와 보내는 마지막 시간
리사 고이치 지음, 김미란 옮김 / 가나출판사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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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가족 구성원 중 어느 한 사람과 영원히 이별한다는 것은 남은 사람들의 가슴 한편에 허공을 만드는 일일 것입니다. 다른 어떤 것으로도 채울 수 없는 대체불가의 빈 공간, 그 허공으로 인해 가슴에는 이따금 스산한 바람이 불고 따뜻한 봄날이나 한여름 무더위에도 오소소 한기를 느끼게도 됩니다. 세월이 약이라지만 세월보다 더 질긴 게 사랑이고 그리움인 듯합니다.

 

미국의 전직 코미디언이자 방송인이었던 리사 고이치의<엄마와 보내는 마지막 시간 14일>을 읽는 내내 재작년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났습니다. 특별히 정이 깊었다거나 각별했던 부자지간도 아니었건만 가족이라는 보이지 않는 끈이 문득문득 당신을 생각나게 합니다. 더구나 온 가족이 모이는 설과 같은 명절에는 그 감정이 격해지게 마련이지요. 아직도 저는 그날의 기억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슬비가 추적추적 내렸던 8월의 어느 날, 당신은 구급차에 실려 보라매 병원 응급실로 향했었지요. 에어콘 바람이 얼마나 차던지 얇은 병원 이불 한 장만 겨우 덮은 채 병상에 누운 당신은 밤새 떨었습니다. 보다 못한 누나가 두툼한 이불 한 채를 집에서 가져오기 전까지는 말이지요.

 

그렇게 뜬 눈으로 밤을 새운 다음날 아침, 주치의 면담 시간이 어찌나 길고 막막하던지요. 가망이 없다는 말보다 더 가혹한 것은 퇴원을 할 수 없다는 말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당신은 가족 누구도 원치 않았던 노인 요양병원으로 보내졌습니다. 그것이 마지막임을 당신도 직감했겠지요. 이번 설에도 가족들은 고해성사를 하듯 그때의 일을 되짚었습니다. 어쩔 수 없는 죄책감과 함께 말이지요.

 

"나는 잠깐 그대로 자리에 주저앉아 상황을 파악하며 장례식장 직원들이 와서 엄마를 데려가 우리도 못 알아보게 만들어놓기 전에 엄마 얼굴을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바라보았다. 그리고 앤지와 함께 방으로 돌아와 나지막이 흐느끼다 잠이 들었다. 생각했던 것처럼 나는 거리로 뛰쳐나가 대성통곡하며 달리지 않았다. 엄마 몸 위로 쓰러져 억지로 떼어낼 때까지 달라붙어 있지도 않았다. 엄마의 손을 놓지 않겠다고 떼를 쓰거나 엄마를 살려달라고 간청하지도 않앗다. 전혀." (p.262)

 

2011년 12월 작가는 부모님과 함께 긴 주말을 보내기 위해 고향을 찾았다가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맞게 됩니다.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던 엄마가 더 이상 치료를 받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입니다. 신장투석을 받지 않고 엄마가 버틸 수 있는 시간은 길어야 14일. 엄마는 자신의 죽음을 스스로 결정한 셈입니다. 14살 위의 오빠는 적극적으로 반대했지만 작가는 엄마의 뜻을 존중하기로 작정했습니다. 회사에 휴가를 내고, 집에서 엄마를 돌보기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춥니다. 10살 위의 언니가 합류하여 작가와 교대로 엄마를 간호하게 됩니다. 가족들은 엄마의 평화로운 죽음을 위해 서류정리며 유품정리를 대행하고, 지인들과의 마지막 인사, 장례식 준비 등 이 세상과 결별하기 위한 모든 절차를 밟아나갑니다.

 

"나는 엄마의 결심을 백 번이고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 결심을 실토했을 때 엄마에게 평온함이 엿보였다. 어떤 기운 같은 것이 엄마 주변을 에워싸고 있었다. 자주 빛의 기운. 치유의 빛. 실로 오랜만에 엄마가 진정으로 행복해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우리는 손에서 뭔가를 놓았을 때 비로소 평화를 찾는 법이다. 그렇게 밀리 고이치 여사도 드디어 평화를 찾았다." (p.36)

 

퇴원할 당시 작가의 엄마는 몸무게 30Kg에 백내장과 심한 척추측만증, 신장 기능 이상으로 제대로 볼 수도, 걸을 수도, 앉을 수도 없는 상태였다고 합니다. 게다가 모든 사람이 지켜보는 거실에서 딸들에게 자신의 용변마저 처리하도록 할 수밖에 없는 처지는 참으로 참담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작가와 그의 가족들은 차분하게 대응한 듯 보였습니다.

 

"어머니가 제게 보내준 사랑과 지속적인 격려, 무한한 신뢰가 없엇다면 전 아마 아무것도 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 위" 어딘가에 있을 어머니, 이 종이 위에 적힌 모든 단어를 안내해주고, 또 평생동안 이끌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사랑이라는 표현으로는 부족할 정도로 당신을 사랑합니다. 우리의 천국 소풍에서 다시 만나기로 해요." (p.275 '감사의 글'중에서)

 

저에게도, 당신에게도, 우리 모두에게 남겨진 시간은 그 누구도 알 수 없겠지요. '죽음만큼 확실한 것도 없는데 사람들은 겨우살이는 준비하면서도 죽음은 준비하지 않는다'고 톨스토이가 말했던가요. 산 자에게는 죽음보다도 겨우살이가 또는 하루의 먹거리가 더 다급한 것이겠지요. 우리는 그렇게 평생을 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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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기 박물관
윤대녕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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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와 오늘의 날씨가 어쩜 이렇게나 다른지. 어제 꺼내 입은 봄옷이 무색해지는 하루였다. 온종일 나는 맹맹한 느낌의 코를 시원하게 뚫어야 하는 사명이라도 부여받은 듯 일정한 간격으로 킁킁대거나 집의 거실 옷걸이에 무심히 걸려 있을 패딩점퍼를 생각했다. 인공지능 알파고가 프로 9단의 이세돌을 이겼다는 소식과 여당의 어느 의원이 같은 당의 대표를 무참히 깠다는 소식이 막힌 코를 더 맹맹해게 하면서 맹맹한 하루는 부분일식처럼 저물고 있었다. 내 몸이 어제의 온기를 기억하는 까닭에 오늘의 날씨가 더 춥게 느껴졌는지도 몰랐다. 몸이 기억하는 과거는 언제나 직선적이다.

 

부분일식이 있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날씨는 맑고 쾌청했다. 날씨 때문이었는지 문득 떠오르는 책이 있었다. 오늘 같이 으스스 추워진 날, 윤대녕의 소설집<대설주의보>를 읽으면 금방이라도 봄에서 다시 겨울로 회귀할 것만 같았다. 나는 이상하게도 '윤대녕' 하면 이 책이 가장 먼저 떠오르곤 한다. 그가 쓴 다른 책들도 많건만 도통 생각나지 않는 것이다. 윤대녕이 떠오른 차에 근처의 도서관에 들러 그의 소설집<도자기 박물관>을 빌렸다.

 

이 책에 실린 일곱 편의 단편은 하나같이 과거의 시간에 저당잡힌 사람들이 등장한다. 작가는 그들의 다양한 모습을 단편소설로 쓰고 있다. 그들에게 있어 과거 일정 시점의 기억은 자신의 삶 전체를 통제하는 족쇄처럼 작용한다. 돌부리에 채이듯 인생 구비구비마다 만나는 풍파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운명을 그들은 거부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은 적극적인 긍정이 아니라 어찌할 수 없이 떠안게 되는 순응의 과정일 뿐이었다.

 

"나는 내 삶에 있어서 내가 존재하지 않았던 시기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나도 미처 모르는 사이에 세계에서 멀어져 어딘가에 격리돼 있던 시간들을. 언제 어디서 나는 잃어버렸던 세계와 다시 만날 수 있을 지…… 그만 까마득한 심정이 되어 나는 뜻 모를 소리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p.220)

 

자신의 운명을 인정하고 순순히 따를 수 있는 경지에 이르자면 참을 수 없는 고통의 반복이 따르게 마련이다. 그것은 세월의 조탁과정일 수도 있겠다. <도자기 박물관>의 소설 속 인물들은 과거의 어느 시점에 이미 스러진 사랑을 끝내 잊지 못하고 괴로워한다. 편지글 형식의 단편 '비가 오고 꽃이 피고 눈이 내립니다'의 주인공은 대학 동아리에서 만나 우연히 하룻밤을 보내게 되었던 선배에게 20여년 만에 편지를 보낸다. 그것은 단순히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집착이나 갈망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사랑의 불꽃을 되살리겠다는 욕망보다는 그 시간에 대한 확인 정도로 그친다.

 

"어쩐지 너무 많은 얘기를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만 네, 나는 지금 고통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고통은 언어화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찌 그 화염 같은 속내를 고작 말로써 드러낼 수 있겠습니까? 다만 그것을 통해서 누군가를 이해하는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p.27)

 

소설을 읽는 독자들은 과거에 묶여 옴짝달싹 못하는 소설 속 인물들이 일견 답답하고 어리석다고 느낄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는 누구나 그런 과정을 통해 타인을 이해하게 된다. '반달'의 주인공은 입대하기 직전 한동안 반목하며 지내던 어머니와 우연한 이별여행을 하게 된다. 제대를 하고 다시 혼자가 된 주인공은 섬이 고향이었던 같은 과 동기를 찾아나선다. 동기는 휴학을 하고 새우잡이 어선을 타고 있었다. 그를 따라 새우잡이 어선을 타게 된 주인공은 선상에서 동성 간의 사랑을 나눈다. 갑작스러운 일이었고 그 후 주인공도, 동기도, 어머니도 각자의 삶을 살아간다. 서로 만나지 못한 채.

 

"삶의 길을 잃고 헤매던 젊은 날이 있었다. 그 시절을 돌아보면 덧없는 꿈이니 고독한 환상이니 화염 같은 고통이니 하는 말들이 두서없이 떠오른다. 하지만 그렇게 길을 잃었었기 때문에 어쩌면 사랑이 가능했고 가까스로 삶의 길을 찾을 수 있었던 게 아니었을까. 내가 알던 주위의 사람들이 모두 그러했듯이 말이다." (p.78)

 

반면 표제작인 '도자기 박물관'은 어려운 환경에서 만나 결혼을 한 두 남녀의 이야기가 그려진다. 어떻게든 살아보려는 아내와는 달리 도자기에 미친 사내는 아내를 돌보지 않고 도자기만 찾아 헤맨다. 결국 아내는 죽고 혼자 남은 사내는 지난 시절을 후회한다. 그리고 병중에 있는 아버지의 묫자리를 둘러보기 위해 시골로 내려간 두 형제의 대화로 구성된 '구제역들'의 주인공은 10년 전 헤어진 여성과의 추억을 불러내어 형제간의 반목을 이어나간다. 형이 사랑했던 여인을 동생이 사랑하게 됨으로써 끝내 두 사람과 이별하게 된 여인은 사랑으로 인해 형제의 관계마저 소원하게 만드는 촉매로 작용한다.

 

건강검진을 받는 과정에서 우연히 만난 두 남자의 이야기를 쓴 '검역'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느라 지쳐버린 중년 남자의 이야기이다. 어찌 보면 이 소설집에서 예외적인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문어와 만날 때까지'는 아내의 계부와의 관계뿐만 아니라 자신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숨기고 있는 아내로 인해 부부관계마저 소원해졌던 주인공 '나'가 삼척 바닷가에 사는 대학 동창의 전화를 받고 동해로 달려가는 이야기이다. 삶은 문어를 안주로 동창과 긴 술자리를 이어가면서 '나'는 정체를 알 수 없었던 문자 메시지를 생각하고 결국 '육 년 전 약속'의 정체와 상대를 기억해낸다. 마지막으로 치명적인 질병을 핑계로 사랑하는 여인 '숙'으로부터 도망쳤던 '통영-홍콩 간'의 주인공 '백'은 그녀와 함께 했던 통영과 홍콩을 마치 순례를 하듯 더듬으며 지난 과거와의 화해를 도모한다. 완강하게 저항하던 숙은 결국 여정의 끝자락에 이르러 백을 용서한다.

 

윤대녕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나는 이따금 그런 생각이 들곤 한다. '세월에 순화되거나 소화되지 못한 이야기들이 결국 소설이 되는구나.' 하는 생각 말이다. 그러므로 소설은 비극일 수밖에 없을 거라는 생각도. '우리의 삶이 행복하려면 고통의 순간들도 세월 속에 잘 소화시켜야 하는구나' 하는 것도. 세월에 소화되지 않은 가슴 속 응어리들이 결국 소설이 되고 너와 나의 전설이 되는 삶은 결코 행복한 삶이 아니라는 걸 윤대녕의 소설은 말하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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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전에 허리 인대를 다쳐 한동안 치료를 받았던 적이 있다. 그런데 이게 겉으로 보기에는 다 나은 것 같지만 피곤하거나 컨디션이 안 좋을 때면 여지없이 재발한다는 데 문제가 있다. 때로는 아주 심하게 아플 때도 있고, 조금 뻐근하다가 이내 좋아질 때도 있다.

 

어제는 좀 과하게 피곤했었던지 오늘 아침부터 허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의자에 앉았다가 일어설라치면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파와서 제대로 걸을 수가 없었다. 허리에 손을 얹고 엉거주춤 걷는 폼이 영락없는 노인의 모습이었다. 어쩔 수 없이 한의원을 찾았다. 찜질에 전기치료에 부황에 침까지 맞고서야 치료가 끝났다. 내일 또 오란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속담에서 소를 잃고도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도 얼마나 많은지. '내가 소를 잃었구나. 다시는 소를 잃지 않도록 단속을 보다 철저히 해야겠는걸' 하는 마음이 들었다면 비록 소를 잃었다고 할지라도 그나마 다행인 셈이다.

 

국가도 다르지 않다. 현 정부와 지난 정부의 실정으로 인해 국민들이 각성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도 오히려 감사할 일이라 말하지 않을 수 없으니 말이다. 예컨대 지난 정부의 사대강 공사로 인해 해마다 구경하는 녹차라떼나, 큰빗이끼벌레의 창궐을 보면서 자연의 소중함을 깨닫는 것이나 현 정부의 역사 교과서 국정화 작업으로 인해 역사 바로 알기의 중요성을 깨닫는 일, 북한과의 강대강 대결로 인해 깨닫게 되는 평화의 소중함 등은 비록 소 잃고 외양간은 고치지 못했지만 소를 잃었다는 사실만큼은 국민들이 똑똑히 알게 되지 않았나 싶다.

 

그동안 기레기 언론으로 인해 우리가 소를 잃었다는 사실조차 까맣게 몰랐던 적이 어디 한두 번인가. 정부의 실정이 잦아지면서 소를 잃었구나, 국민들이 확실히 깨닫는 건 좋은데 이렇게 계속 소만 잃으면 소는 누가 키울지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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