멈칫하며 한 발짝 뒷걸음질 치던 봄이 제자리를 찾은 듯합니다. 내렸던 눈도 모두 녹아 며칠 전의 폭설은 마치 변덕스러운 봄날에 있었던 작은 해프닝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래도 그렇지 3월 중순에 대설주의보라니... 갑작스러운 눈 소식에 놀랐던 것은 비단 인간만은 아니었던 듯 어제 그제 파랗게 질린 냉기가 새벽 등산로에 가득했었습니다. 사람도, 나무도, 동물도, 땅도, 심지어 대기를 떠도는 공기마저 놀랐었나 봅니다.


기온이 오르자 미세먼지가 가득합니다. 아파트 화단에도 산수유꽃이 피었습니다. 지워질 듯 위태로운 노란 산수유꽃은 자신의 존재감을 내세우지 않아 좋습니다. 알아주는 이 하나 없어도 조용히 피었다가 그 끝도 알려주지 않은 채 지워집니다. 누군가의 부지런한 시선이 주어지지 않는 한 우리는 산수유꽃의 종말을 결코 알지 못합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게 요란하지 않은 모습으로 스러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이따금 생각합니다. 죽음이 불러오는 누군가의 슬픔이나 그리움도 없이 그저 조용히, 마치 어제의 일상인 양 가볍게 사라질 수만 있다면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조금 더 겸손해질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한덕수 총리의 탄핵심판 선고가 24일 오전으로 정해진 가운데 내란을 주도했던 윤석열에 대한 선고 기일은 여전히 오리무중, 안갯속입니다. 지난해 말부터 이어져 온 국민들의 내란 피로감은 그렇게 끝도 없이 연장되고 있습니다. 그러는 사이 극우 시위자들의 철없는 행동은 점점 도를 넘고 있습니다. 대학생들에 대한 폭력은 물론 이제는 그 대상을 넓혀 정치인들에게로 향하고 있습니다. 미국이나 프랑스에서 보았던 극렬 시위자의 난동을 우리나라에서도 보게 될 줄이야...


현 정부가 집권한 이래 대한민국의 민주화 지수는 크게 추락했습니다. 물론 어느 한 분야도 좋아진 게 없다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딱 하나 좋아진 게 있다면 국민들 대부분이 대한민국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종교를 하나의 산업으로 인식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대한민국의 종교는 믿음이나 구원의 차원이 아니라 종교 지도자의 배를 불리는 하나의 산업체로서 기능한다는 사실을 국민 대다수가 깨닫게 되었다는 건 현 정부가 이룩한 커다란 성과라고 하겠습니다. 일요일이면 습관처럼 성당에 나가는 나도 주위 사람들로부터 '별 이상한 사람 다 보겠다'는 듯 차가운 시선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주로 어디 가느냐? 물었을 때 교회에 간다고 답하는 경우입니다. 성당이 아닌 교회라고 말하는 순간 나는 그야말로 하느님이 아닌 목사의 부역자로 전락하는 것은 물론 긴급 구제가 필요한 참으로 딱한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인식은 교회는 물론 사찰이나 무당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대한민국에서 종교를 갖는다는 건 지능이 떨어지는 이의 한심한 작태로밖에 인식되지 않는 듯합니다. 아무리 할 게 없기로서니 목사나 무당의 농간에 놀아나느냐는 비아냥을 수도 없이 들어야 합니다.


한낮 기온이 부쩍 올라 들고 나온 코트가 부담스러운 하루였습니다. 주말을 맞는 사람들의 표정은 제법 밝았고, 헌재 판결이 늦어지면서 생긴 내란의 피로는 그들의 얼굴에 덕지덕지 묻어나는 듯했습니다. 3월도 이제 마지막 한 주를 남겨두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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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와 작품을 분리할 수 있는가?
지젤 사피로 지음, 원은영 옮김 / 이음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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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쓰는 말 중에는 그 의미를 명확히 구분하여 적절한 대상에게 한정하여 사용할 필요가 있는 것들이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적절한 대상을 구별하지 않은 채 모든 대상에 함부로 사용하였을 때, 이제 막 말을 배우기 시작하는 어린 아이나 의미도 모른 채 어떤 말이든 마구 사용하는 청소년기의 아이들에게 우리는 기성인으로서 잘못된 선례를 심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와 같은 말들 중에 대표적인 단어가 '훌륭하다'이다. '훌륭하다'는 말은 '사람의 됨됨이나 행실 또는 능력 등이 썩 좋아서 나무랄 곳이 없다'는 의미를 지닌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의 깊게 보아야 할 것은 '썩 좋다'는 기능적 부분과 더불어 '됨됨이나 행실'을 규정하는 도덕적 의미를 함께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능적으로는 우수하지만 사람의 됨됨이는 시원찮은 이에게 '훌륭하다'는 말을 결코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인지해야 한다. 한 야당 국회의원이 어느 인터뷰에서 말하길, "국민의힘에도 훌륭한 법조인이 많다."고 하는 걸 보고 나는 깜짝 놀란 적이 있다. 그는 적어도 '훌륭한'을 '유능한'으로 대체해야만 했다. 그들이 법을 다루는 기술이 뛰어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인간성이 좋다는 것은 많은 국민들이 동의할 수 없기 때문이다.


'훌륭하다'는 말의 오용 사례가 비단 정치권에서만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언어를 다루는 일을 업으로 하는 문학계에서도 그와 같은 사례는 빈번하게 발생한다. 노벨상 후보에 올랐던 어느 시인이나 표절 의혹이 밝혀지기 전까지 국민 작가로 칭송되던 어느 소설가에게도 '훌륭하다'는 말은 마치 그들에게 수여된 명예 훈장처럼 끝없이 따라붙곤 했다. 그렇다면 우리가 읽는 문학 작품에 대하여 작가의 추한 사생활이나 도덕적 결함을 도외시한 채 오직 작품으로서 객관적인 평가가 내려질 수 있을까? 프랑스의 사회학자인 지젤 사피로는 그의 최근 저서 <작가와 작품을 분리할 수 있는가?>에서 우리가 작가와 작품을 분리하여 생각할 수 있는가의 문제를 진지하게 다루고 있다.


"그렇지만 나는 문화계를 전문으로 하는 사회학자로서, 작가의 도덕성과 작품의 도덕성이 가진 관계를 부정하지 않고, 작품이 어떤 사람들이나 집단의 출신, 성별 또는 성적 기호를 이유로 하는 혐오 선동과 물리적 또는 상징 폭력 선동을 포함하지 않는 한, 문화 생산 장의 고유한 기준에 따라 상대적이고 자율적인 방식으로 작품을 판단할 것을 요구하는 중간 입장을 결론에서 제시할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작품 생산의 조건 및 작가들에 대한 공론을 막아서는 안 된다."  (p.32)


책의 서문에서 밝힌 것처럼 이 책은 사회학적 연구 결과가 아닌 '에세이' 수준의 저서이지만 다양한 이론과 학문적 논의를 바탕으로 작가와 작품의 분리라는 문제를 심도 있게 탐구한다. 물론 저자는 이 문제를 문학, 철학, 영화, 미술 등 광범위한 분야에서 거론하고 있는 까닭에 문화적 지식이나 소양이 일천한 나와 같은 독자에게는 책을 읽고 소화하는 데 힘겨운 측면이 없지 않으나, 논란이 되는 사안마다 저자가 제시하는 접근 방법과 분석 과정을 천천히 따라가다 보면 저자의 의견에 어느 정도 수긍하게 된다. 그러므로 독자는 이론적 토대가 되는 책의 1부를 비교적 꼼꼼하게 훑고 기억하면서 2부의 사례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책에서 다루고 있는 폴란스키, 하이데거, 블랑쇼, 한트케 등에 대한 사전 지식과 함께.


"폴란스키처럼 작가가 권위를 남용할 때, 또는 인종차별적이거나 성차별적인 이데올로기를 전파하기 위해 자신의 명성을 이용할 때(다시 한번 분명히 하지만 한트케의 사례는 이에 해당하지 않는다) 그를 용인하고 심지어 상까지 주어야 하는지는 아직 남아 있는 문제다. 심사 위원들이 최고 권한을 가지고 있다. 그들이 양심에 비추어 행동해야 한다. (공모를 내포하는) 모든 책임하에."  (p.201)


지젤 사피로의 저서 <작가와 작품을 분리할 수 있는가?>가 우리에게 관심을 끄는 이유는 제국주의 일본에 의한 식민지 과정을 겪었던 우리 민족의 아픈 역사 때문이기도 하고 해방 이후 공산주의와 민주주의의 이념적 대립 양상으로 발발한 한국전쟁의 비극을 여전히 극복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했던 여러 작가들, 이를테면 이광수, 채만식, 서정주 등과 같은 친일 부역 작가들의 작품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하는 문제와 백석이나 홍명희와 같은 월북 작가들의 작품에 대해 국가적 이데올로기를 배제한 채 수용하여야 하는가 하는 문제 그리고 최근에는 박민규, 신경숙 등의 작품에서 불거진 표절 문제와 그들이 쓴 이후의 작품에 대해서, 성추행 의혹 폭로 이후 작품 활동을 이어간 고은 시인과 같은 문제 등 작가와 작품을 어떻게 바라보고 이해하여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우리에게도 결코 명쾌하지 않다.


"창작 작업은 작가의 의도로 환원될 수 없기에 작가는 당대의 사회적 표상들을 전하게 되는데, 비평가들은 작품이 어떻게 이러한 표상들을 재생산하거나 전복하는지 질문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회화와 영화에도 적용된다. 하지만 표상은 작품을 포섭하기에 충분치 않다. 형식은 전혀 중립적이지 않다."  (p.221)


도덕적으로 완벽한 사람만이 문학적으로 충만한 작품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작가와 작품은 일정 부분 분리하여 수용하는 게 맞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책을 읽는 독자 역시 이념적 성향이나 도덕적 관념에 의해 지배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 역시 박민규 작가의 팬 중 한 사람으로서 그가 썼던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과 <낮잠>이라는 작품이 각각 인터넷 게시판 글과 일본 만화를 표절했다는 사실을 작가 스스로 인정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여전히 작가의 재능을 안타까워하며 차기 작품을 기다리고 있는 입장이다. 작가와 작품을 완벽히 분리하는 게 여전히 쉽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개인의 기호와 취향이 결합되었을 때는 이 문제는 더더욱 어려워진다. 그럼에도 나는 박민규를 일러 훌륭한 작가라고는 말할 수 없다. 표절은 도덕적으로 옳지 않지만 그의 재능은 빛나는 까닭에 나는 지금도 그가 유능한 작가라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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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한 이야기에는 언제나 곁다리처럼 소문이 따라붙게 마련이다. 흔하다는 건 대중의 관심으로부터 서서히 멀어지고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단순한 사실의 나열에 그쳤던 이야기가 산골 무지렁이조차 다 아는 흔해빠진 이야기로 변하는 순간, 어디선가 대중의 관심을 끌기 위한 새로운 모의와 작당이 시작된다. 조미료처럼 약간의 거짓이 가미되고 밋밋하던 이야기는 기승전결의 형식을 갖춘 새로운 이야기로 재탄생한다. 그리고 대중의 관심이 사그라들 때마다 이와 같은 과정은 끝없이 반복된다. 산처럼 부풀려진 이야기는 이제 99%의 거짓과 그 출발조차 파악할 수 없는 1%의 사실로 구성된다. 가난하던 흥부가 제비의 도움을 받아 벼락부자가 되었다는 건 이제 대중이 확신하는 어이없는 사실이 되고 만다. 어떤 이야기가 수 차례, 혹은 수십 차례 부풀려지는 동안 과거의 이야기꾼도 현재의 이야기꾼(극우 유튜버)도 돈과 명예를 얻게 된다. 그리고 거짓에 거짓을 보태던 그들 역시 자신이 했던 과거의 거짓을 마치 사실인 양 믿게 된다. 시나브로 자신이 허언증 환자가 되었음을 인지하지 못하는 이야기꾼과 자신들이 듣고 잇는 이야기가 어느 허언증 환자에게서 비롯되었음을 알지 못하는 다수의 대중. 광화문 태극기 집회에 모인 사람들을 자주 지나치면서 어느 좀비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렸던 건 이러한 연유에서 비롯되었는지도 모른다. 누군가를 비난하고픈 사람들에게 '부정선거'라는 테마는 조선시대의 가난한 민중들을 유혹했던 '벼락부자'의 꿈만큼이나 솔깃한 주제였는지도 모른다.


돈만 준다면 인당수의 제물이 되는 것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설화 속 어느 여인과 돈만 준다면 어떠한 거짓과 선동도 마다하지 않겠다는 현대의 극우 유튜버는 무척이나 닮아 있다. 그 이야기를 퍼 나르는 구독자들의 행태도 조선 후기 대중을 사로잡았던 설화나 민담이 퍼져가는 과정과 흡사하다. 어쩌면 흥부 이야기를 들었던 조선시대의 가난한 민초들 역시 그것이 사실인 양 오인하여 처마 밑의 제비집에서 애꿎은 제비를 땅으로 내동댕이친 후 부러진 제비다리를 살뜰히 고쳐주었을지도 모른다. 근거도 없는 어느 유튜버의 확신에 찬 부정선거 의혹을 들었던 한 인간이 까닭도 없이 계엄령을 선포했던 것처럼 말이다.


이와 같은 좀비화 과정은 지능의 높고 낮음의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많은 횟수의 반복이 진행되었느냐에 따라 그 성패가 갈린다. 광화문 광장에 모인 그 많은 사람들의 지능이 하나같이 다 수준 이하에 머문다고 믿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다만 돈과 명예를 추종하는 어느 유튜버의 이야기를 마치 설화나 민담을 듣는 것처럼 수없이 반복하여 들었을 뿐이다.


나는 지금 레프 톨스토이의 단편선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소담출판사)>를 읽고 있다. 이 책을 반복하여 읽고 나면 나도 어쩌면 사람은 본디 탐욕과 이기심이 아닌 사랑과 선의에 따라 살게 된다는 사실을 믿고 확신하게 될지도 모른다. 어쩌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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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하고 와일드한 백일몽 - 개정판 무라카미 하루키 에세이 걸작선 (개정판)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김난주 옮김, 안자이 미즈마루 그림 / 문학동네 / 202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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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며칠 텔레비전이나 인터넷에 떠도는 어떤 동영상도 보지 않은 채 오롯이 책에 묻혀 지냈다. 그러나 눈으로 읽었던 글자는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 이해도 되지 않는 책을 읽는다는 건 어둠 속에 놓인 낯선 물체를 매만지는 일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산다는 건 이따금 해결할 수 없는 삶의 부조리를 맥없이 목도하는 일이지만 그래도 무작정 살고자 했던 의지는 그와 같은 부조리와 조우할 때마다 한풀 꺾이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내란 수괴 혐의를 받고 어렵게 구속되었던 대통령이 까닭도 없이 석방되고, '나는 계몽되었습니다'라는 고백과 함께 17~18세기의 계몽주의 시대로의 회귀를 갈망하는 몇몇 정신이상자의 망언을 듣고 있는다는 건 고문과 진배없었다.



전에도 몇 번 밝힌 바 있지만 마땅히 읽을 책이 없거나 싱숭생숭 책이 손에 잡히지 않을 때에는 나는 언제나 무라카미 하루키의 책을 펼쳐 들곤 한다. 그럴 때 하루키의 소설보다는 그의 에세이가 더 적합할지도 모른다. 작가의 감정은 독자의 감정이라는 기치 아래 '감정 동일시의 원칙'을 추구하는 우리나라 에세이와는 다르게 작가가 지나쳐 온 특정 시기의 문화, 예술, 사회 등을 마치 스케치하듯 덤덤하게 글로 옮기는 일본 작가의 에세이는 요 며칠 집중력이 떨어질 대로 떨어진 나와 같은 독자에게는 더없이 좋은 먹잇감이 아닐 수 없었다. 책을 읽는 나 역시 '아하, 그 시절엔 그런 일이 있었던 게로군.' 하고 덤덤하게 넘길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기운도 없는 내가 굳이 감정 소모를 할 필요도 없이.


"죽은 자를 칭송하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젊은 나이에 죽은 자라면 더욱 그렇다. 죽은 자는 배신하지 않고, 반격도 하지 않는다. 나이도 먹지 않고, 머리도 벗어지지 않으며, 배도 나오지 않는다. 그들은 다만 조용하고도 완전하게 죽어 있을 뿐이다. 가령 그대가 그들의 죽음에 싫증이 나 잊어버린다 한들 별문제 될 것은 없다. 그냥 잊어버리면 그만이다. 그것으로 끝이다. 잊혔다고 해서 그들이 그대의 집을 찾아와 문을 두드리는 일은 없다. 그들은 그저 암흑 속에서 침묵을 지킬 뿐이다. 그렇다, 죽은 자를 칭송하는 것은 너무도 손쉬운 일이다."  (p.55)


우리나라에서는 2012년 7월에 초판이 발행된 하루키의 얇은 에세이 <쿨하고 와일드한 백일몽>은 이처럼 시니컬하고 별 시답지 않은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다. 말하자면 요즘처럼 날씨 변덕이 심한 환절기의 오후에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인근의 작은 공원에 옹기종기 모인 노인 몇몇의  열띤 시국 토론을 책에다 담아 놓은 것과 비슷하다.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작가로서의 명성이나 지명도가 없었더라면 책으로서의 생명력은 진즉에 사라졌을 법한 책이지만, 그 어떤 일에도 집중할 수 없고, 어떤 일에도 의욕이 생기지 않았던 요 며칠의 나에게는 '그래도 뭔가 하고 있구나' 하는 위로를 던져주기에는 충분했던 책이었다.


"나는 파티라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 초대받아도 가지 않는 게 보통인데, 만약 쌍둥이 자매를 에스코트할 수 있다면 생활 패턴을 적극적으로 바꿀 의향이 있다. 딱히 미인이 아니라도 좋다. 미인이 아니라도 별 상관없다. 아주 평범한 여자 쌍둥이로 족합니다. 꼬드기고 싶다거나, 같이 자고 싶다거나, 그런 건 아닙니다. 나는 그저 쌍둥이 자매와 파티에 가고 싶을 뿐이다. 왠지 아주 특별한 경험이지 않을까 하는 기분이 들 뿐이다."  (p.62)


작가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조하거나 작가가 느낀 감정에 나의 감정을 완전히 일치시켜야만 온전히 책을 읽은 듯한 느낌이 드는 사람이라면 "시간이 남아도는 것도 아닌데 굳이 이런 책을 왜 읽는 거야?" 하는 질문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등을 꼿꼿이 세우고 앉아 이따금 고개를 끄덕이며 진지한 표정으로 책장을 넘기는 것이 독서인의 유일한 자세는 아닐 터, 우리는 이따금 풀어지듯 침대에 누워 때로는 낄낄대기도 하고, 꾸벅꾸벅 졸기도 하면서 시간의 추이를 이따금 가늠하는 것도 독서의 한 형태가 아닐까.


"이 역시 자랑이 아니지만, 나는 한때 상당히 가난했었다. 막 결혼했을 무렵이다. 우리는 가구 하나 없는 방에서 소리 죽여 살았다. 스토브조차 없어서, 겨울밤에는 고양이를 껴안고 추위를 견뎌냈다. 고양이도 추우니까 사람에게 꼭 달라붙어 있었다. 거의 공생에 가까운 상황이다. 길을 걷다가 목이 말라도 찻집에 들어갈 수 없었다. 여행도 가지 않고 옷도 사지 않았다. 오직 일만 했다. 그렇다고 불행하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p.192)


대한민국은 지금 '쿨하고 와일드한 백일몽'을 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어느 날 문득 꿈에서 깨고 나면 그제야 비로소 '아, 그때는 정말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은 암흑의 시간이었지.' 하고 서로의 어깨를 가볍게 치며 저마다의 기억을 털어놓겠지만, 국가의 모든 시스템이 무너진 지금 이 시간을 견디는 건 그 누구에게도 녹록지 않은 일. 멧돼지를 닮은 한 인간이 저지른 2년 반의 분탕질이 대한민국의 미래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말았다. 지금도 우리는 끝나지 않은 '내란의 밤'을 하얗게 지새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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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현실에서 누리고 체감할 수 있는 배타적 권리는 바로 이런 것이로구나, 생각하게 했던 하루였다. 오후에 약속이 있었던 나는 차를 운전하여 약속 장소로 향하고 있었는데, 아랫배가 살살 아프고 뭔가 신호가 오는 느낌이 들어 가까운 관공서(그게 하필 도서관이었다)로 방향을 틀었다. 어렵지 않게 화장실을 찾아 들어간 것까지는 좋았는데 아뿔싸! 이게 웬일? 한 칸짜리 화장실 앞엔 이미 줄을 서서 대기하는 사람이 있는 게 아닌가. 지하 1층 지상 3층의 건물이었기에 나는 서둘러 다른 층으로 가 보았지만 모든 게 허사였다. 다른 층도 사정은 다르지 않았다. 괜히 계단만 오르락내리락하는 바람에 대기 순번만 밀렸고 나의 인내력은 바닥을 향하고 있었다. 생각 같아서는 바닥에 신문지를 펴고서라도 볼 일을 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화장실 안에 있는 사람은 그것이 누구에게도 침해받지 않는 자신의 배타적 권리라는 걸 기다리는 사람에게 공표라도 하려는 듯 몇 차례 노크를 해도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인내력의 한계를 느낀 나는 결국 비어 있는 장애인 화장실로 뛰어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렇게 밝아진 표정으로 도서관을 벗어날 수 있었다.


이와 같은 배타적 권리는 과거 휴대폰이 없던 시절에 공중전화 부스에서도 심심치 않게 목격되곤 했었다. 뒤에서 애타게 자기 순번을 기다리는 많은 사람들의 시선에도 불구하고 공중전화박스를 선점한 사람이 한 손에는 동전을 잔뜩 거머쥔 채 느긋하게 통화를 할라치면 저것이 바로 배타적 권리구나, 하고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 모습을 보고 화를 참지 못하는 사람도 더러 있어서, "아, 통화 좀 짧게 합시다." 하면서 전화를 빨리 끊을 것을 종용하거나 험악한 분위기를 풍겨 빨리 나오라고 은근히 협박하는 경우도 드물게 있었지만 말이다.


이런 것과는 다르게 아파트와 같은 공동주택의 화장실이나 베란다에서 공공연히 담배를 피우는 것이 마치 자신의 배타적 권리인 양 생각하는 사람이 더러 있다. 밖에 나가려면 외투를 걸쳐야 하는 겨울철이나 너무 더워서 잠시도 밖에 나가 있을 수 없는 여름철에 그런 현상은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담배를 끊은 지 만 11년이 되는 나로서도 아래층에서 올라오는 담배연기는 참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그런 까닭에 나도 몇 번이나 관리사무실에 민원을 넣었었다. 생각해 보면 그것은 배타적 권리가 아니라 타인에 대한 예의나 배려의 문제이다.


자유나 평등과 같은 추상적인 개념의 권리가 아닌 현실에서 체감하고 누릴 수 있는 배타적 권리는 사실 많지 않다. 그것마저도 완전한 배타적 권리가 아닌 타인에 대한 배려가 동반되어야 하는 소극적 권리인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말이다. 공동체의 구성원이 반드시 지켜야 할 법적 테두리를 벗어나 '국민 저항권'이라는 해괴한 주장을 들고 나와 제 멋대로 행동하고 난동을 피우는 사람이 늘어나는 바람에 '자유'라는 말의 가치는 이제 그 어디에서도 찾기 어렵게 되었다. 난동이나 부리고 깽판을 치는 이들이 함부로 입에 올릴 수 있는 단어가 결코 아닌데 말이다.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는 제 할 일은 뒷전이고 밤낮 술이나 처먹는 이가 시도 때도 없이 '자유'를 외치는 바람에 21세기 대한민국에서 '자유'의 가치는 멧돼지의 똥보다 못한 것으로 인식하게 되었다. 비극의 시작은 거기서부터 시작되지 않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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