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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우리는 계속 읽는다 - F. 스콧 피츠제럴드와 <위대한 개츠비>, 그리고 고전을 읽는 새로운 방법
모린 코리건 지음, 진영인 옮김 / 책세상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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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련한 추억과 함께 다시 읽고 싶은 책이 적어도 한두 권쯤은 있게 마련이다. 예컨대 중학교 시절에 읽었던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나 그 무렵의 학생들에게 회자되던 J.D.샐린저의 <호밀밭의 파수꾼>, 대입시를 준비하는 고등학교 시절에 읽게 되는 한국 단편문학과 그때 읽었던 이상의 <날개>나 김유정의 <봄봄>, <동백꽃> 등은 요즘과 같은 봄의 어느 날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그때의 추억과 함께 다시 읽고 싶은 책의 목록이 될지도 모르겠다. 이제는 고인이 되신 박경리, 박완서 작가의 <김약국의 딸들>이나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와 함께 윤동주 시인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도 잊혀지지 않는다.

 

이렇듯 나는 석양처럼 번지는 그리움으로 인해 예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읽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책에 이끌린다기보다 그리움에 이끌리는 것이다. 그렇다고 아무 책이나 무작정 이끌리는 건 결코 아니다. 읽었던 책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읽으려면 추억만으로는 부족한 어떤 유인이 따로 존재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한 권의 책을 두어 번 다시 읽었던 적은 종종 있었다. 그러나 열 번, 스무 번 반복해서 읽었던 책은 아마 없었지 싶다.

 

"성인이 된 다음 내가 《개츠비》를 자진해 쉰 번도 더 읽고, 대학에 신입생들이 들어올 때마다 《개츠비》를 강의하고, 전국을 돌며 호기심 많은 독자들 앞에서《개츠비》에 대해 열렬하게 이야기하리라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면 나는 깜짝 놀랐을 것이다." (p.12)

 

비평가이자 언론인인 모린 코리건은 자신의 저서 <그래서 우리는 계속 읽는다>의 '들어가는 말'에 이렇게 썼다. 말하자면 그녀는 <위대한 개츠비>의 열렬한 팬이자 애독자인 셈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위대한 개츠비>에 숨겨진 많은 상징들(물, 시간, 타이타닉호, 온도, 색깔 등)과 정교하게 짜여진 작품의 구조, '시와 같은 힘찬 문체' 등을 설명하면서 피츠제럴드의 삶과 소설의 관계를 여러 증거를 통하여 실증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모린 코리건의 이 책은 자신의 경험과 감성을 살린 <위대한 개츠비>에 바치는 저자 자신의 '사랑 고백'인 동시에 피츠제럴드와 관련된 광범위한 취재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학문적 혹은 전기적으로 무언가를 더 보탤 생각은 없다. 이 책은, 무엇보다도 내가 가장 사랑하는 소설로 떠나는 개인적인 여행이다. 나 말고도 많고 많은 사람들이《위대한 개츠비》를 사랑한다. 나와 함께 《개츠비》를 다시 읽고 싶어 하는 사람들, 아직 읽지 않았지만 관심이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나는 이 책을 썼다." (p.25)

 

사실 나는 저자인 모린 코리건에 대한 인상이 썩 좋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몇 년 전 신경숙의 소설 <엄마를 부탁해>가 영어로 번역되어 미국에서 출간되었을 때 어느 라디오 방송에서 그녀가 했던 혹평을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한국인들에게 문학적인 장르가 있다면, 그건 교묘하게 눈물을 짜내는 언니(sister) 취향의 멜로드라마"라고 말하면서 "<엄마를 부탁해>는 확실히 그 중에서도 집권 여왕격"이라고 꼬집었다. 그녀의 비평이 개인적인 것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나는 그녀가 했던 말이 타국의 문화에 대한 지적 기반이 없는 지극히 국수주의적인 언사였다고, 문화적 기반이라야 불과 200년이 조금 넘는 문화 열등국의 한 언론인이 밝힌 열등의식의 분출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그렇지만 나는 F.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마저 폄하할 생각은 없다. 나는 적어도 <위대한 개츠비>를 두 번 이상 읽었고, 나 나름의 리뷰도 써본 적이 있지만 여전히 내가 이해하지 못하는 어떤 부분이 작품 속에 존재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웠지만, 도덕적으로는 혼탁했던 1920년대 미국의 '재즈 시대'를 대표하는 작가로서 피츠제럴드는 단연 돋보이는 작가였다고 생각한다. 내가 <위대한 개츠비>에 대하여 모린 코리건처럼 '미국의 계급을 다룬 가장 위대한 작품인 동시에 냉혹한 현실을 서정적 언어로 전달한 고전"이라는 찬사를 보내지는 못할지언정 피츠제럴드가 그 시대의 미국을 가장 설득력 있게 묘사한 작가라는 데는 나로서도 이견이 없다.

 

"나는 이 책 전체에 걸쳐 다음의 문장을 인용해왔지만, 한 번 더 전부 다 인용할 가치가 있다. 개츠비는 녹색의 불빛을 믿었다. 해가 갈수록 우리 앞에서 멀어지는, 절정의 순간과 같은 미래를 믿었던 것이다. 그때는 그것이 우리한테서 달아났다. 하지만 무슨 상관인가 - 내일은 우리가 더 빨리 달리고, 더 길게 팔을 뻗으면 된다············ 그러다 보면 어느 맑은 아침에 ----/그래서 우리는 계속 나아간다, 흐름을 거스르는 보트들처럼, 끊임없이 과거로 떠밀리면서도. 이 말들은 절대 늙지 않는다." (p.375)

 

우리나라에도 모린 코리건과 같은 문학가가 여러 명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평생을 괴테 문학의 연구에 몰두했던 전영애 교수나 무라카미 하루키의 문학세계에 푹 빠져 사는 임경선 작가 등은 내가 아는 그런 부류의 사람들이다. 어떤 순간이 "수많은 순간들의 퇴적 속에 깊이 묻혀 있다"고 했던 장 그르니에의 말처럼 한 권의 책을 반복해서 읽음으로써 우리는 자신의 삶에 동일한 경험을 반복해서 퇴적시킴으로써 더 단단하고 반듯한 삶의 체계를 형성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때 우리가 읽은 책은 한 권의 소설로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삶을 주관하는 하나의 텍스트, 삶의 은유로 존재하게 된다.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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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처럼 미세먼지로 목이 칼칼하고 멀쩡하던 눈마저 따끔거리는 날이 연일 이어지다 보면 과거 2,30년 전으로 되돌아가 산 위의 맑은 공기 한 바가지 퍼마시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진다. 계절은 봄꽃이 만발하여 우리를 유혹하고 차지도 덥지도 않은 기온은 산책하기에 더없이 좋은데 문이란 문은 꽉꽉 쳐닫고 빗물 자국으로 꾀죄죄한 유리창을 통하여 바깥 풍경을 보고 있자니 한심한 생각이 절로 드는 것이다.

 

자연을 생각하지 않는 발전은 결국 인간을 죽이고 만다. 전국의 공기 좋다는 곳을 아무리 다녀봐도 예전만 못하다. 남들은 날 보고 '기분 때문이겠지' 말하지만 완전히 기분 탓이라고는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발전이고, 누구를 위한 자연파괴인지 묻고 싶은 심정이다. 인간이 제 아무리 발버둥을 친다 한들 자연을 이길 수는 없는 법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발전만이 능사인 줄 안다.

 

꼭 자연만 망가지는 건 아니다. 인간의 심성도 따라서 망가진다. 욕심이 자꾸자꾸 커지는 탓이다. 법무부에 근무하는 한 고위직 공무원은 넥슨 주식 80만주를 팔아 구설에 오르고 있다. 비상장 주식을 80만주나 대량으로 매입하는 경우는 매우 드문 일이다. 그것도 회사와 업무 연관성이 없는 개인이 말이다. 그럼에도 그 사람은 해명을 하지 않고 있다. "민중들은 개 돼지입니다. 뭐하러 개 돼지들한테 신경을 쓰시고 그러십니까? 적당히 짖어대다가 알아서 조용해질 겁니다."(영화 '내부자들' 중에서)라고 누군가 조언했을지도 모르지만 자신의 양심 또한 썩어간다는 걸 그는 모를 것이다.

 

봄햇살이 저리도 따사로운데 문이란 문은 모두 닫은 채 실내에만 머무르자니 속이 터진다. 어렸을 적 이맘때면 들로 산으로 해가 떨어지는 줄도 모르고 쏘다녔을 텐데 말이다. 정말이지 그 시절의 공기를 어디서 구할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다. 솔직한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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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30 12: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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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3-30 16: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새벽 2시에 생각나는 사람
김정한 지음 / 미래북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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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 통화를 할 때마다 '한번 보자'는 말을 입에 달고 살면서도 늘 길이 엇갈려 만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 일부러 시간을 내어 찾아갈 참엔 그는 공교롭게도 어디 외출을 했거나 예전에는 단 한 번도 없었던 사고로 병원에 입원을 하는 등 그야말로 불운이 붙어다닌다는 인상을 받게 되는 경우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아, 이 사람과는 이제 죽을 때까지 몇 번 만나지 못하겠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일종의 미신처럼 말이다. 실제로 과거에 아무리 친했던 사람일지라도 죽기 전까지 몇 번이나 만날 수 있을까, 생각하면 괜히 쓸쓸해지곤 한다.

 

시인 김정한의 신작 에세이 <새벽 2시에 생각나는 사람>을 읽으며 문득 쓸쓸해졌다. 만나고 싶었던 사람을 만나지 못한 채 돌아설 때처럼. 시인의 삶과 사랑에 대한 오랜 고민을 시가 아닌 산문으로 털어놓은 이번 작품에서 나는 왠지 모를 쓸쓸함과 더불어 시인이 겪고 감내해야 했던 고통의 옹이를 억지로 만져본 듯한 느낌을 받았다. 누군가 곁에서 아무것도 아닌 일로 쿡 찌르기만 해도 어린애처럼 금세 '왕'하고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았다. 어쩌면 나는 그렁그렁 눈물이 괸 눈으로 책을 읽어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먹먹해진 가슴으로.

 

"풍화된 시간을 돌아서 갈 즈음에는 동행할 누군가가 있으면 좋겠어요./ 실망과 절망을 되풀이 하다 낡아버린 생각들이/ 서로 부딪치다 대숲에서 울어도/ 그리움이 파내려간 미로를 더듬어 인연의 출구에 도착하겠지만/ 누군가 나보다 먼저 도착했으면 좋겠어요./ 힘겨운 순례의 길이 멈추지 않도록 단 한 사람이 동행했으면 좋겟어요./ 그 사람이 당신이었으면 좋겠어요." (p.102)

 

며칠 전 친한 친구 한 명이 나를 만나기 위해 평일 오전에 차를 몰아 서울에서 내가 있는 이곳까지 내려온 적이 있었다. 깜짝 놀란 나는 그의 손을 반갑게 잡았지만 우리는 이렇다 저렇다 별 이야기도 없이 그저 점심을 같이 먹었고, 늘 테이크 아웃을 하던 커피숍에서 익숙치도 않은 에스프레소를 주문하였고, 관상용인 듯 그저 쳐다보기만 할 뿐 마시지는 않았고, 약속이나 한 듯 일어섰고, 주차장까지 배웅을 나가겠다는 나를 친구는 굳이 등 떠밀어 돌려세웠고, 친구는 그렇게 말도 없이 가버렸다. 그리고 그 날 다 늦은 시각에 걸려온 친구의 전화, "잘 올라왔어. 얼굴 보니까 좋더라." 하는 싱거운 말에 나는 그저 기분이 좋았었다.

 

"꼭 당신을 만나야겠다고 노력한 적은 없어요./ 그러나 어느 날 당신이 내 앞에 서 있었어요./ 당신을 사랑하겠노라 죽어라 애쓴 적도 없어요./ 어느 날부터인가 난, 당신을 사랑하게 되었어요./ 일부러 당신의 마음을 사로잡으려 한 적 없어요./ 그저 난 당신에게, 당신은 나에게 서서히 물들기 시작했으니까요." (p.316)

 

관계는 의도하지 않는 어떤 순간에 맺어지고, 인연은 또 보이지 않는 어떤 시간에 깊어지는가 보다. 얼굴만 잠깐 보고 돌아서도 기분이 좋아지는 사람, 그런 인연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한참을 생각했다. 웅숭깊은 시인의 말에 상념이 깊어지는 하루였다. 언제였는지 누군가 내게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모든 게 흐릿하고 뭘 해야 될지 모르겠다고. 나는 그때 이렇게 말해주었다. 그렇다면 잘 살고 있는 거라고. 미래가 확고하고 모든 게 선명하다면 그 사람은 사람이 아닌 로봇이거나 인생을 두 번 사는 뱀파이어가 아니겠느냐고.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슬픈 말은 '후회한다'는 말인 것 같아요./ 후회는 실수, 실패의 주인이기도 하니까요./ 그 의미를 알면서도 '후회한다'는 행동을 하게 되니까요./ 아마도 완벽하지 못해서 그렇겠죠?" (p.194)

 

괜히 우울하고 어깨가 움츠려드는 이유는 '세상에 오직 나 한 사람만 …… 하지 않을까?' 하는 우려의 마음 때문이다. 나 또한 다르지 않다며 조용히 손 잡아 줄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다면, 내 얘기에 귀 기울여 줄 사람이 곁에 있다면 세상의 공기는 지금보다 한결 따뜻해질 것이다. 세상의 그대에게 가장 훌륭한 위로는 그대를 향한 조용한 미소라는 걸 누군가 알아줬으면 좋겠다. 어쭙잖은 충고가 난무하는 요즘, 들꽃처럼 순박한 미소와 어깨에 얹히는 가벼운 손길이 세상을 향한 따뜻한 위로임을 시인은 이 책에서 말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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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오늘 잊혀졌던 추위가 되살아난 듯 꽤나 쌀쌀했다. 그야말로 '서'하고도 '프라이즈'한 날씨였다. 길게 이어졌던 포근한 날씨 때문에 더 쌀쌀하게 느껴졌는지도 모른다. 변덕스러운 봄날씨에 사람들은 조금쯤 겁을 집어먹은 듯 고개를 떨구고 잔뜩 웅크린 채 걷고 있었다. 봄바람에 쫓기는 듯 파랗게 질린 모습이었다.

 

바람이 불고 쌀쌀해진 날씨로 인해 좋아진 게 하나 있다면 아마도 청명한 하늘이 아닐까 싶다. 미세먼지로 연일 뿌옇던 하늘은 마치 가을 하늘처럼 선명하다. 그 아래, 갑작스러운 추위에도 불구하고 봉긋봉긋 피어오른 꽃망울이 여기저기 눈에 띈다. 꽃망울이 한껏 부푼 목련이 금방이라도 탁 터질 것만 같다. 마치 심판의 출발 신호를 기다리며 대기선에 서있는 육상선수의 심장처럼 말이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목련은 하늘의 푸른빛을 배경으로 바라볼 때가 가장 예쁘다. 그러자면 사람의 눈높이에서 핀 목련보다는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는 높은 곳의 목련이어야 한다. 비취색의 하늘과 순백의 목련이 빚어내는 조화는 봄의 절정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목련이 피는 짧은 순간의 봄은 사람을 때로 미치게 한다. 올해도 아마 그럴 것이다.

 

얼마 전 어느 인터넷 기사에서 본 바로는 2015년 가구당 한 달 평균 책값으로 1만 6천원을 썼다고 한다. 신간 단행본의 평균 정가가 1만 7천원이 넘는 것을 감안할 때 2인 이상 가구가 한 달에 한 권도 사지 않앗음을 의미한다. 경기가 좋고 나쁨을 떠나서 너무 심하지 않은가 싶다. 나야 책을 팔아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이 아니니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지만 나라의 장래를 생각할 때 위기감이 드는 게 사실이다. 책을 읽지 않는 민족에게 밝은 미래를 기대하는 건 어렵기 때문이다. 올해 중학교에 입학한 아들은 요즘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온 [개미]를 읽느라 정신이 없다. 엊저녁 전화를 했을 때 4권을 읽고 있다고 했다. 아내도 읽지 않은 [개미]를 아들이 읽고 있다.

 

누가 뭐래도 봄이다. 벚꽃 만개한 거리의 벤치에 앉아 좋아하는 시 한 수 읊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春興 -정몽주

春雨細不滴하니(봄비가 가늘어 방울도 듣지 않더니)
夜中微有聲이라(밤중에 희미한 소리가 나는 듯했네.)
雪盡南溪漲하니(눈 녹아 남쪽 개울에 물이 불었거니,)
草芽多少生인고(풀싹은 이미 얼마나 돋았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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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알아요, 당신?

아무도 없는 집에 덩그러니 혼자 남았을 때 TV를 켜는 것보다 라디오를 트는 게 아무래도 기분 전환이 된다는 것 말이에요. 낮게 깔리는 DJ의 목소리가 마냥 넓어만 보인던 빈 공간에 울타리를 치고 나와 침묵 사이의 비밀스러운 공간을 헤집고 들어와 별 의미도 없는 싱거운 얘기를 조곤조곤 들려주는가 하면 대중가요의 경쾌한 곡조가 주변의 우울을 띵가띵가 날려보내기 때문입니다. 하루 종일 어깨를 짓눌러 도통 소파에서 일어날 기운조차 없게 만드는 TV와는 사뭇 다르지 않나요? 요즘과 같은 스마트한 시대에 자신이 좋아하는 음악을 실컷 들으면 될 것을 굳이 라디오를 트는 이유가 뭐냐고 당신은 묻는군요. 이따금 그런 날이 있지요. 온종일 같은 노래만 반복해서 듣고 싶은 그런 날 말이에요. 괜히 쓸쓸해지거나 창밖의 빗소리가 조금 전까지도 없던 우울을 좁은 틈새로 쫄쫄 흐르게 하는 날, 김광석의 노래를 '무한반복'으로 들었던 적이 저도 있답니다. 몸은 천근만근 무겁고 목까지 차오른 우울이 나를 질식시킬 듯한 오후, 침묵 속으로 속속들이 배어든 우울을 정말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팔랑팔랑 가벼워지기 위해서는 라디오만 한 게 없습니다.

 

당신 , 그거 알아요?

산길을 오래 걷다 보면 인간의 아주 작은 흔적조차 눈에 걸린다는 것을요. 오늘 아침의 일이었답니다. 날씨가 풀리면서 산을 찾는 사람들이 부쩍 늘어난 탓인지 등산로 주변에 버려진 쓰레기가 종종 눈에 띄더군요. 오가는 길에 눈여겨 보면서도 주을까 말까 며칠을 고민했습니다. 그저 고민만 하면서 며칠을 보낸 셈이지요. 그러나 오늘은 도저히 그냥 지나칠 수 없겠더군요. 양파즙 파우치며, 홍삼 캔디 포장지며, 플라스틱 커피 용기며, 500ml 생수병이며, 먹고 버린 소주병이며, 검은 비닐 봉지며, 심지어 강아지 용변 처리를 하고 버린 화장지까지 그 종류도 다양했습니다. 쓰레기만 한아름 주워 들고 내려온 오늘, 다른 어느 날보다 개운했던 아침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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