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3일 이후로 권력의 지형도가 서서히 바뀌고 있다는 느낌을 받곤 합니다. 그 대표적이었던 게 아마도 '어버이 연합'의 후원금과 청와대와 국정원의 관제데모 개입 의혹이겠지요. 전 정권서부터 '어버이 연합'에 대한 의혹의 눈길은 꾸준히 있어 왔던 것이기에 딱히 새삼스러울 것도 없지만 후원금의 실체와 일당 2만원을 받고 동원된 탈북자들의 면면을 뉴스에서 확인한다는 건 어쩌면 영원히 공공연한 비밀로 그쳤을 법한 사실이 권력의 향배가 어느 정도 바뀌는 바람에 사실로 굳어져가고 있다는 걸 의미하겠지요.

 

게다가 노무현 대통령 수사를 담당했고 검사장을 역임했던 홍모 변호사의 법조비리 의혹이 세간의 주목을 받는 것도 다 이런 맥락에서 유추할 수 있을 것입니다. 노무현 대통령 수사팀의 일원으로 당시 수사진을 사실상 지휘했던 그는 수사 진행 상황을 수시로 브리핑하는 등 수사의 핵심역할을 했을 뿐만 아니라 직접 돈을 받은 적도 없는 노 전 대통령 한 명의 포괄적 뇌물 혐의를 입증하기 위해 갖은 짓을 다하는 바람에 대통령을 죽음에 이르게 했던 인물입니다. 전직 대통령을 죽음에 이르게 할 정도로 권력의 정점에 있던 그가 도박혐의로 물의를 빚고 있는 일개 기업체의 대표를 변호하면서 검찰의 수사선상에 오른다는 건 권력의 지형이 바뀌지 않았더라면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겠지요.

 

가습기 살균제 수사만 하더라도 그렇습니다.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피해가 재난 상황이라고 할 만큼 막대했음에도 불구하고 검찰이나 정부는 뒷짐만 진 채 나 몰라라 했던 게 사실입니다. 개인과 기업이 알아서 하라는 식이었죠. 5년이나 지난 지금에 이르러서 수사를 진행시키는 건 그나마 다행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만 권력의 지형도가 바뀌지 않았더라면 그마저도 장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권력의 지형도가 바뀌면서 이와 같은 권력형 비리가 하나둘 터져나오는 까닭은 그동안 권력의 힘만으로도 충분히 비밀로 덮을 수 있었던 것이 이제는 쉽지 않다는 걸 의미할 뿐만 아니라 향후 우리가 몰랐던 더 많은 것들이 밝혀질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것은 비단 우리나라에 국한된 것은 아닌 듯 보입니다. 필리핀 대선에서 승리한 두테르테를 보더라도 기존 정치에 실망한 필리핀 국민들의 분노가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습니다. 미국 대통령 후보인 트럼프의 예도 아마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작금의 정치현상은 분노한 시민들의 정치혁명이 전세계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걸 말해줍니다. 그 흐름을 권력의 힘으로 막아내기는 어려워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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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있게 한 모든 것들 - 개정판
베티 스미스 지음, 김옥수 옮김 / 아름드리미디어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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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기를 지나면서 유명하다는 성장소설 한두 권쯤 읽어보지 않은 것도 아닌데 이따금 성장소설을 읽고 싶어질 때가 있다. 사춘기와는 한참이나 멀어진 지금, 성장소설을 읽는다고 그닥 도움이 될 것 같지도 않은데 말이다. 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청소년기는 뭐랄까, 인생에 있어 어떤 특별한 시기라는 생각이 문득 들면서 아련한 향수 같은 게 몰려오는 것이다. 감정의 기복도 심하고 육체와 정신의 부조화가 정점에 달하던 그 시기를 나는 어떻게 헤쳐왔을까 조금쯤 대견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내가 지금 나이에 성장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말하자면 나의 청소년기에 대한 아련한 추억과 함께 그 시기를 큰 사건사고 없이 무사히 지나온 것에 대한 자축의 의미일런지도 모른다.

 

그때 내가 읽었던 성장소설 중에는 지금도 이따금 생각나는 것들이 있다.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 <데미안>과 더불어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이나 미하엘 옌데의 <모모>, 프랑수아즈 사강의 <슬픔이여 안녕> 등 나의 기억 속에서 지워지지 않는 소설의 목록들은 청소년기라는 특별했던 시기와 맞물려 그닥 특별할 것 없는 내 인생의 앨범에 고이 간직되어 있다. 청소년기의 평범했던 나의 독서 취향과는 다르게 올해 중학생이 된 아들은 주로 신화와 관련된 판타지 소설을 쓰는 릭 라이어던(Rick Riordan)의 시리즈나 추리소설을 읽는다. 얼마 전에도 스튜어트 깁스(Stuart Gibbs)의 <Space Case>를 사주었더니 며칠 사이에 다 읽어치웠다. 아들이 커서 지금의 내 나이가 되면 아들은 어쩌면 판타지나 추리소설이 그리워질런지도 모르겠다.

 

베티 스미스의 <나를 있게 한 모든 것들>을 읽었다. 말하지 않아도 짐작하겠지만 이 책 또한 성장소설이다. 1차세계대전을 전후로 한 1900년대 초를 시간적 배경으로 뉴욕의 브루클린을 그리고 있다. 오스트리아 이민 2세대인 케이티와 아일랜드 이민 2세대인 조니는 어린 나이에 결혼하여 아이를 낳는다. 케이티가 이 책의 주인공인 '프랜시'를 낳는 동안 철없는 아빠 조니는 그들이 맡아 일하던 학교의 청소도 하지 않은 채 밤새 술을 마시고 귀가한다. 열여덟 살의 젊은 엄마 케이티 놀란은 자신의 출산을 돕기 위해 달려온 친정 엄마 메리 로멜리에게 묻는다. 이 아이가 자신들과 다른 인생을 살게 하려면 그녀가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무엇을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 그 물음에 대한 답변으로 메리는 이렇게 말한다.

 

"비밀은 읽고 쓰는 데 있어. 너는 읽을 수 있어. 좋은 책을 구해서 매일 이 아이에게 한 쪽씩 읽어주어라. 아이가 스스로 읽을 수 있을 때까지 매일 읽어줘야 해. 그래서 아이가 읽는 법을 배우면 날마다 스스로 읽게 만들어라. 내가 알기에는 이 방법이 가장 좋은 방법이야." (p.78)

 

메리는 또한 아이들은 최소한 여섯 살이 될 때까지 산타클로스가 있다고 믿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건 저 아이에게 상상력이라는 놀라운 힘을 길러줘야 하기 때문이야. 저 아이는 눈으로 볼 수 없는 은밀한 세계를 가지고 있어야 해. 그러면 이 세상이 살기 어려울 정도로 추악해도 저 아이는 상상의 세계 속에서 살아갈 수 있을 거야. 나 또한 지금 이 나이가 될 때까지 성자들의 놀라운 삶과 위대한 기적을 회상하며 살아가고 있단다. 그래서 나는 나에게 주어진 그 이상의 세계를 살아갈 수 있어." (p.79)

 

프랜시가 태어난 다음해에 동생 닐리가 태어나고 케이트는 그들이 세들어 사는 연립주택 청소일을, 조니는 파티장의 노래하는 웨이터를 하며 근근이 살아간다. 어려운 형편 속에서도 케이티는 아이들에게 매일 성경과 셰익스피어를 읽도록 하고 돈이 생길 때마다 조금씩이라도 저금통에 돈을 모으도록 했다. 프랜시와 닐리가 집 근처의 학교에 입학하였지만 그 학교를 맘에 들어 하지 않던 프랜시는 집에서 먼 학교로 전학을 한다. 생활력이 강했던 케이티와는 달리 조니는 팁으로 받은 돈을 모두 술로 탕진한다.

 

"케이티 역시 이런 특성을 가지고 있었고 조니 또한 몽상가처럼 세상을 살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자기 아이들에게 이런 특성을 물려주지 않으려 했다. 물론 이들에겐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풍요로운 상상력으로 가난에 찌든 고통스런 삶을 너무 쉽게 견디어낸다는 게 바로 그것이었다. 케이티는 만일 자신들에게 이런 특징이 없었다면 사물을 있는 그대로 아주 처절하게 바라보고 좀더 낫게 살았을 거라고 생각했다." (p.143)

 

술주정뱅이로 낙인이 찍힌 조니는 조합에서도 쫓겨나고 아무도 그에게 일거리를 주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조니는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는다. 프랜시가 아직 중학교도 졸업하지 못했던 어느 해 크리스마스에 아빠 조니는 그렇게 세상을 떴고, 중학교를 졸업하자마자 프랜시는 취직을 하고 닐리는 고등학교에 진학한다. 상상력이 풍부했던 프랜시는 학교에서 작문은 언제나 A를 받았는데 아빠가 돌아가신 후 그녀는 아빠의 이야기를 쓰기 시작한다. 작문을 가르치던 가드너 선생은 그녀가 쓴 글이 형편없다고 말한다. 글에 안 좋은 내용이 들어 있다는 이유였다. 그리고 선생님은 언젠가 자신이 얘기한 것에 대해 프랜시가 고마워하게 될 거라고 말한다.

 

"어른들은 그런 말 좀 안 하면 안 되는 것인가? 벌써 프랜시의 어깨에는 미래에 감사해야 될 짐이 잔뜩 얹혀져 있었다. 꽃다운 젊은 시절을 이 사람 저 사람 쫓아다니며 당신이 옳았으니 감사하다는 말을 하느라고 다 보내야 할 판이었다. 그렇게 젊은 시절을 보내고 싶은 생각은 손톱만큼도 없었다." (p.248)

 

신문사에서 잡일을 하기로 하고 취직했던 프랜시는 그곳에서 리더(Reader)로서의 탁월한 능력을 발휘한다. 그녀는 그곳에서 몇 년 동안 여러 지역의 신문만 읽으면서 보낸다. 그러다 문득 대학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대학의 썸머 스쿨을 수강한다. 그곳에서 프랜시는 벤을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벤은 목적의식이 뚜렷하고 할 일이 너무나 많은 사람이었다. 신문사를 사직하고 오퍼레이터로 재취직을 한 어느 날 미국의 1차대전 참전 소식이 전해진다. 미국의 젊은이들이 전쟁터로 보내질 때 프랜시는 리 하사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그에게는 약혼녀가 있었고 프랜시는 실연을 경험한다.

 

"사람들은 항상 행복이란 게 저 멀리 있는 것이라고 생각해. 어떤 복잡하고 얻기 힘든 걸로. 하지만 얼마나 작은 일들이 행복을 만들어주는 걸까. 비가 내릴 때 피할 수 있는 곳, 우울할 때 아주 뜨겁고 진한 커피 한 잔, 남자라면 위안을 주는 담배 한 개피, 외로울 때 읽을 책 한 권,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것, 그런 것들이 행복을 만들어주는 거야." (p.318)

 

주인공 프랜시의 성장과정을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 책은 우리나라의 6,70년대 모습을 떠올리게 한다. 끼니를 굶을 정도로 어려웠던 경제 사정이나 미혼모에 대해 차가운 시선으로 대했던 경직된 윤리관이나 그럼에도 동네의 인심이 살아 있었던 풍경은 6,70년대의 우리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침부터 추적추적 봄비가 내렸던 오늘, 생각에 잠긴 사람들 표정이 흐린 하늘만큼이나 어둡다. 그러나 나는 데이트를 나가는 프랜시의 들뜬 기분으로 또 한 권의 성장소설을 읽었고 찬란했던 5월의 꿈에 잠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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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집의 나르시시스트 - 집, 사무실, 침실, 우리 주변에 숨어 있는 괴물 이해하기
제프리 클루거 지음, 구계원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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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학교를 다니던 때만 하더라도 정말이지 나는 무척이나 겁 많고 소심한 아이였다. 그런 까닭이었는지 나는 혹시나 있을지도 모를 발표에 늘 노심초사 하였고, 다른 과목에 비해 발표의 기회나 가능성이 높은 음악이나 체육 시간을 지독히도 싫어했었다. 1학년 때 큰 병을 앓았던 탓에 나는 다른 아이들보다 체격도 왜소했고, 체력도 그들에 비해 한참이나 떨어졌을 뿐만 아니라 지금처럼 자신이 하고 싶은 운동을 마음껏 하도록 허락하는 요즘의 체육시간과는 달리 그 당시의 체육시간은 뜀틀이나 철봉 등을 선생님의 지시하에 한 명 한 명씩 열을 맞춰 이루어졌으므로 내 순서가 다가오면 나는 그야말로 공포에 질리곤 했다. 못한다고 누가 놀리는 것도 아닌데 가슴은 미리부터 두망망이질을 쳤고 얼굴은 빨갛다 못해 목덜미까지 물들곤 했다. 음악시간도 예외는 아니었다. 선생님이 혹시 나를 지목하여 노래를 불러보라고 시키지나 않으실까, 한 시간 내내 가슴을 졸였었다. 다른 시간도 정도만 조금 약했을 뿐 두렵기는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용의검사는 어찌나 자주 하던지, 학교 가는 일이 내게는 공포의 연속이었다.

 

좋은 일로든 나쁜 일로든 교단에 불려나가는 것 자체에 대해 심한 공포감을 갖고 있던 나는 중학생이 되고 나서 그런 공포로부터 조금쯤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중학교 입학 반편성 고사에서 1등을 하는 바람에 입학식장에서 나는 신입생 대표 자격으로 앞에 나가 선서를 낭독하게 되었고 본의 아니게 학교의 유명인사가 되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 갑작스러운 변화를 나는 어지간히 즐겼던 것 같다. 내게 쏟아지는 선생님들의 관심도, 약간의 부러움이 담긴 친구들의 시선도 딱히 싫지 않았다. 처음으로 느껴보는 우쭐한 기분에 취하여 학교생활을 조금쯤 즐기게도 되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학교에서 공부를 잘한다는 건 하나의 특권을 손에 쥐는 것과 같았다.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줄곧 상위권의 성적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어찌 보면 어린 나이에 맛보았던 우쭐한 기분이 그 계기가 되었지 않나 싶다.

 

그러나 그것이 내 인생에 있어 항상 좋은 쪽으로만 작용했던 것은 아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나는 점점 지독한 나르시시스트로 변해가고 있었다는 사실을 나이가 한참이나 든 뒤에야 알게 되었다. 예컨대 나는 '내가 하는 일은 뭐든지 된다.'는 생각을 은연중에 하게 되었고 내 인생에 있어 실패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고 굳게 믿었었다. 그 바람에 나는 누가 봐도 실패로 끝날 수밖에 없었던 일도 자존심 때문에 끝끝내 인정하지 않았고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그것은 곧 많은 비용과 시간의 낭비로 이어졌다. 말하자면 나는 나르시시스트를 벗어나기 위한 혹독한 대가를 치른 셈이었다. 제프리 클루거가 쓴 <옆집의 나르시시스트>를 읽는 내내 나의 지난 삶을 생각했던 것도 다 이유가 있었다.

 

"어른들의 간섭을 받지 않는 놀이 문화가 사라진 것은 현대에 나르시시스트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두 가지 중요한 이유 중 한 가지 측면일 뿐이다. 나머지 이유 한 가지는 자부심 고양 운동이다. 이 움직임은 좋은 의도로 시작했지만 걷잡을 수 없는 상태로 번져버린 일의 좋은 사례다." (p.90)

 

'타임'지의 수석편집자이자 작가인 제프리 클루거는 이 책에서 나르시시스트가 만연하는 현대의 세계를 진단하고 그에 걸맞는 다양한 사례를 들고 있다. 미국 공화당 경선 주자인 도널드 트럼프에서부터 인기 가수 마일리 사이러스와 레이디 가가 등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사람들의 자기애적 성향을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설명하고 있다. 저자는 이를 '거대한 질병'(자기애성 성격장애)으로 진단하고 나르시시스트를 '괴물'이라고 지칭했다.

 

SNS가 일상화된 현대인들에게 비록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자기애성 성격장애는 일반적인 증상이 아닐까 싶다. 페이스북에 올린 자신의 사진에 누군가 '좋아요'를 눌러 주기를 은근히 기대하게 되고, 자신이 참가한 모임에서 모든 참가자들로부터 주목을 받는 주인공이 되고 싶기도 하고, 사람들이 자신이 하는 말에 열심히 귀 기울여 들어주고 다 듣고 난 후에는 존경과 감사를 담은 말 한마디를 건네기를 은근히 기대할 것이다. 나르시시스트는 인정과 관심, 보상에 대한 욕구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나르시시즘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나는 현장은 연애의 세계가 아닐 수 없다. 연애의 세계에서 사람들은 주로 매력적이고 외향적이며, 자신감이 넘치는 나르시시스트에게 강한 호감을 느끼게 마련이지만, 그렇다고 그 관계마저 서로를 아껴주는 방향으로 발전하지는 않는다.

 

직장에서도 일은 하지 않으면서 성과만 가로채는 나르시시스트의 전형이 있게 마련이다. 그러나 나르시시스트라고 하여 모두 사이코패스와 같은 극단적인 나르시시스트로 발전하는 것도 아니요, 나르시시스트는 모두 사회에 부정적인 존재라고 말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스티브 잡스나 빌 게이츠와 같은 독창적 나르시시스트, 모한다스 간디나 마틴 루터 킹 같은 영웅적 나르시시스트의 예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르시시스트는 대부분 외로운 결말을 맞게 되는 공통점이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것 참 우습고도 슬픈 일이다. 그러나 나르시시스트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미래가 그런 모습일 거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심지어 그가 아직도 충분히 반짝이고, 시선을 끌어모으고, 어떤 집단에서든 가장 인기 있는 이성으로 대접받고 있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그런 상상조차 하지 않는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슬픈 결말의 씨앗은 그때부터 이미 뿌려져 있다. 나르시시스트의 희생자들은 많은 어려움과 고통을 겪고 나서야 결국 그 점을 깨닫게 된다. 그러나 정작 나르시시스트 본인들은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p.187)

 

저자는 이 책의 후기에서 이렇게 조언한다. 나르시시즘을 '지나치게 탐닉하면 후회감이 밀려오고 몸이 쑤시는데다 '적당히 자제했으면 좋았을 텐데'라는 마음이 들게 마련이라고 말이다. 우리는 또래집단의 놀이문화에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할 수도 있음을 배우고, 다른 사람의 칭찬이나 관심이 적으면 적을수록 자신이 실패할 수도 있다는 걸 수용하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 현실을 과감히 인정할 수 있게도 된다. 그러나 최근 놀이문화의 실종과 칭찬의 남발로 인하여 나르시시스트는 꾸준히 늘어나는 추세이다.

 

저자가 이 책에서 구체적으로 언급한 바는 없지만 나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에서 자살자가 늘어나는 것도 나르시시스트의 증가와 연관이 있는 게 아닐까 하고 말이다. 예컨대 사람은 누구나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고 또 주기도 하는 게 당연한데 자기애적 성향이 강한 사람일수록 타인의 도움을 극도로 꺼리는 경향이 있고, 그것이 자존심 때문이었든 아니든 처참한 결말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지만 말이다. 나 또한 올해 중학생이 된 아들에게 칭찬은 늘 조심스럽기만 하다. 나르시시스즘에 빠져들기는 쉽지만 벗어나는 데에는 혹독한 대가가 따르기 때문이다. 인간은 누구나 실패할 수 있다는 것을 나르시시스트는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자신은 어제나 예외라고 생각할 뿐이다. 그와 같은 선민의식으로 인하여 '인생의 대부분이 실패를 통한 깨달음으로 이루어진다'는 진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다 지난 후에 아무리 절절히 후회한다고 한들 지나간 시간을 되돌려 놓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명심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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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불던 비바람 때문인지 오늘의 아침 공기는 유난히 맑았다. 여느 날처럼 산을 오르는데 등산로에 흩어진 잔가지와 나뭇잎들이 마치 태풍이 지나간 흔적처럼 어지러웠다. 간혹 아까시 나무의 채 벙글지도 않은 하얀 꽃망울이 줄기에 조롱조롱 매달린 채 떨어져 있었다. 개화가 멀지 않았는지 바람에 실려 오는 진한 꽃내음이 코끝을 자극했다. 떡갈나무 넓은 잎사귀에 잎맥을 따라 손금처럼 퍼져 있던 송화가루 노란 무늬도 어제의 비에 씻겨 말끔했다.

 

산을 오르는 사람들의 발걸음이 가벼워 보였다. 이렇게 아름다운 날 설령 이런저런 고민이 있더라도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지 싶은 게 옮기는 걸음마다 괜한 자신감만 는다. 사는 게 뭐 별건가 싶기도 하고 말이다. 운동을 마치고 산을 내려오는데 등산로 입구의 계단에서 할머니 한 분을 만났다. 일흔 살 안팎으로 보이는 할머니는 자전거 짐받이에 소소한 농기구를 묶어 싣고는 계단 끝머리에 앉아 담배를 피우고 계셨다. 등산로 초입의 산자락을 일구어 농사를 짓는 분인 듯했다. 넓은 챙이 둥그렇게 달린 모자 아래로 보이는 할머니의 얼굴은 세월의 흔적처럼 깊은 주름이 져 있었고, 담배 연기를 한모금 들여 마실 때마다 볼우물이 깊게 패였다. 동이 트기 전의 선선한 아침에 농사일을 끝내기 위해 할머니는 새벽부터 서둘렀을 것이다.

 

기온은 빠르게 오르는데 낮에도 바람은 잦아들지 않았다. 어제와는 다르게 부는 바람이 싫지 않았다. 바람이 한 차례 몰려올 때마다 답답했던 마음이 훌훌 날아가버릴 것만 같았다. 갑작스러운 임시공휴일 지정으로 4일간의 제법 긴 연휴가 생겼다. 아이들은 어떨지 몰라도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이 낀 이번 연휴는 어른들에게는 상당한 부담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오롯이 쉰다는 야무진 꿈은 애초에 버려야 할 듯하다. 그렇게 분주히 움직이다 보면 연휴가 끝난 후에는 후유증으로 몸살을 앓을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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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 현실 너머 편 (반양장) - 철학, 과학, 예술, 종교, 신비 편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 2
채사장 지음 / 한빛비즈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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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세간의 주목을 받는 책이 있기에 나도 대화에 동참하는 기분으로 슬쩍 한 번 읽어 보았다. 저자가 '채사장'이란다. 이름에서부터 사기꾼(?) 냄새가 폴폴 나는 게 영 미덥지 않았지만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책을 사서 읽는 데에는 나름의 어떤 이유가 있을 게 아닌가, 싶어 꾹 참고 읽어보기로 했다. 책의 제목은《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이란다. 참으로 절묘하지 않은가. 사기꾼 냄새 폴폴 나는 저자의 이름과는 달리 책의 제목은 제법 진실된 느낌을 주니 말이다. '넓고 깊은 지식'이나 '좁고 깊은 지식'도 아닌 '넓고 얕은 지식'이란다. 모름지기 지식이란 깊이가 있어야 하는 법인데...

 

이 책의 전편, 그러니까 1권에 해당하는 현실 세계 편(역사, 경제, 정치, 사회, 윤리 편)은 내용이 어땠는지 모르지만(난 엉뚱하게도 2권부터 읽었다) 이 책, 2권에 해당하는 현실 너머 편(철학, 과학, 예술, 종교, 신비 편)은 뭐랄까, 요점 정리가 잘 된 국민 윤리 과목의 족보 같은 느낌을 받았다. 족보가 뭐냐고? 흠, 세대 차이가 나는군. '족보'란 말이지, 과거서부터 쭈욱 전해 내려오던 주요 기출문제나 시험에 나올 법한 문제에 대한 모범 답안을 정리하여 놓은 것으로서 수험생들이 공유하는 요약본 정도라고나 할까, 아무튼 그런 거란다.

 

지금껏 세상의 모든 시험이란 시험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이 설마 있을까마는 친구들과 시험공부를 같이 해보면 그 전에는 잘 알지 못했던 친구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예컨대 시험 범위에 해당하는 교과서 내용을 전혀 외우지도 않은 채 문제부터 푸는 학생, 문제부터 풀지는 않지만 문제지 앞면에 압축하여 요약된 교과 내용(대개는 한두 쪽 분량)만 외운 후 문제를 푸는 학생, 참고서나 교과서를 서너 번 읽고 문제를 푸는 학생, 문제는 풀지 않더라도 교과 내용을 토씨 하나 빼먹지 않고 달달 외우는 학생, 달달 외우는 걸로도 부족해 문제란 문제는 모두 풀어보는 학생 등 그 사람의 성격에 따라 공부 방법도 제각각인 것이다.

 

나는 암기과목의 시험공부에 있어서는 그야말로 토씨 하나 빠트리지 않고 달달 외워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다. 오죽하면 고등학교 국정 역사 교과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달달 외운 후 학력고사를 보러 갔을까. 그런 성격 탓인지 남들이 판단할 때는 시험에 절대 나오지 않을 듯한 내용도 기를 쓰고 외워야만 안심이 되곤 했다. 그렇다면 나는 남들이 잘 때 자지 않고 시험공부에 매달렸을까? 그렇지 않다. 내 주관은 명확했다. 학교 공부는 학교에서 끝내고 온다, 는 것이었다. 요는 수업시간에 얼마나 집중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었다. 노트 필기를 끝내고 선생님이 필기 내용을 설명할 때 대부분의 학생들은 졸거나, 장난치거나, 멍 때리지만 나는 선생님의 말을 토씨까지 다 연습장에 받아 적었다. 나중에 읽어보려고 한 게 아니라 집중력을 떨어트리지 않게 하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다. 다른 사람의 말을 중요한 것만 요약하기는 쉽지만 말 자체를 모두 받아 적는 건 속기사가 아닌 한 쉽지 않은 법이다.

 

시험 공부를 늘 이런 식으로 했으니 책인들 건성건성 읽힐 리 만무하다. 아무리 재미없는 책일지라도 일단 손에 잡으면 처음부터 끝까지 꼼꼼하게 읽는다. 예외란 있을 수 없다. 내가 생각해도 성격 참 더럽다. 만일 내가 아니라 옆의 친구가 그랬더라면 "재수없다."고 한마디 했을 성 싶다. 학창시절부터 굳어진 독서 습관이나 공부 습관 탓인지 나는 이 책의 재미를 전혀 느끼지 못했다. 마치 윤리 문제집의 단원별 요약본을 읽는 느낌이었다.

 

"우리는 신비에 대해 다뤘다. 신비한 것은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여기서 말할 수 없다는 것은 사람들 간에 공통된 체험이 불가능한 까닭에 학문적 탐구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것을 뜻한다. 공통된 체험이 불가능하지만 너무나 명확하고 나에게는 확실하게 인식되는 것, 그것이 신비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죽음과 삶이 풀리지 않는 심오함의 중심이 된다." (p.367)

 

일부분일지라도 이 책의 내용을 일언반구도 없이 책의 내용과는 하등 연관도 없는 듯한 나 자신의 경험만 줄줄이 써내려간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요점정리 한 것을 다시 요점정리를 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중학교 2학년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서양철학에 몰두했던 나로서는 이 책이 영 탐탁지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형이상학적인 내용일수록 앞뒤 맥락과 역사적 관점에서 이해하지 않으면 자칫 오해의 소지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했다.

 

내일부터 연휴가 시작되는 탓인지 일주일이 무척이나 짧아진 듯하다. 내가 대학을 다닐 때만 하더라도 삶과 죽음의 문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주제의 대화는 일상적인 것이었는데 지금은 이런 대화가 지적 대화에 속하나 보다. 격세지감이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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