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락
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동아일보사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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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가볍게 읽고 지나쳤던 책이 어느 날 문득 생각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다시 읽게 되는 책은 예전에 읽었을 때는 미처 알지 못했던 새로운 가치를 툭 하고 던져주게 마련인데 그럴 때 나는 택시에 놓고 내린 물건을 다시 찾은 느낌으로 '흠, 이런 게 있었군.' 여러번 되내면서 책에 빠져들곤 합니다. 최근에 내가 읽었던 J.M.쿳시(Coetzee)의 <추락 Disgrace>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윤모 전 청와대 대변인이 자신의 블로그에 썼던 자전적 에세이를 읽는 순간 '그래, 이런 비슷한 주제를 다룬 소설이 있었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던 것입니다.

 

"아이삭스는 부드럽게 말한다. 말이 한숨처럼 그의 입술을 떠난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추락하셨죠?" 추락했다? 그래, 추락이 있었다. 그건 의심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대단하다? 대단하다는 말이 그에게 맞는 말인가? 그는 자신을 모호하고, 점점 더 모호해져 가는 사람으로 생각한다. 역사의 변방에 속하는 인물. 그는 말한다. "어쩌면 가끔씩 추락하는 것도 우리에게 좋은 일인지 모르지요. 부서지지만 않는다면요."" (p.253)

 

소설의 주인공인 데이비드 루리 교수. 남아공 케이프타운의 한 대학에서 커뮤니케이션 학과 부교수로 있는 그는 50대의 이혼남입니다. 소설의 첫문장인 '그는 이혼까지 한, 쉰둘의, 남자치고는, 자신이 섹스 문제를 잘 해결해왔다고 생각한다.'에는 여러 의미를 함축적으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그는 자기애적 성향이 강한, 다른 사람의 생각이나 의견에는 무관하게 자신의 욕망을 해결해 왔음을 말해줍니다. 게다가 '그는 어렸을 때 여자들에 묻혀 살았다'는 표현은 그가 여자들로부터 떠받듦을 받으며 성장했고 '그의 큰 키와 균형잡힌 골격과 올리브색 피부와 부드러운 머리'로 인해 그는 자신이 원하는 여성은 누구든 손에 넣을 수 있다는 그릇된 사고방식을 갖게 되었던 듯합니다.

 

이 소설의 주된 스토리는 루리 교수가 그의 제자 멜라니와 관계를 갖는 것으로 시작됩니다. 자신의 집으로 멜라니를 끌어 들인 루리는 '12살 어린이처럼 가냘픈 엉덩이'를 갖고 있는 멜라니와 성관계를 갖게 됩니다.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루리 교수는 멜라니와 만남의 횟수를 늘려갑니다. 그러면서 루리 교수는 점차 대담해집니다. 거절 의사를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루리 교수는 학과사무실에서 알아낸 멜라니의 아파트로 예고도 없이 불쑥 찾아가곤 합니다. 곤경에 처한 멜라니는 수강을 취소하기에 이르고 멜라니와의 부적절한 관계는 남자친구의 고발에 의해 학교와 멜라니의 아버지에게도 알려집니다. 학교의 진상조사위원회가 개최되고 사과와 자숙을 권고하는 대학의 요구를 루리 교수는 거절합니다. 그는 결국 파면되어 시골에 사는 자신의 딸 루시의 집을 찾게 됩니다. 어쩌면 우리의 현실에서도 꾸준히 있어 왔던 흔한 이야기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루시가 말한다. "값을 톡톡히 치르셨군요. 어쩌면 그녀는 나중에 뒤돌아보면서 아버지를 너무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을 거예요. 여자들은 놀랍게도 용서를 잘 하거든요." 침묵이 이어진다. 자식인 루시가 그에게 여자들에 대해서 얘기해 주려고 하는 걸까?" (p.105)

 

소설의 공간적 배경이 바뀜으로써 스토리는 이제 루시의 이야기로 빠르게 전환됩니다. 루시는 자신의 농장에서 위탁 받은 개를 돌보며 지냅니다. 흑인 원주민의 세력권에서 결혼도 하지 않은 백인 여성이 혼자 살아간다는 것은 매우 위태로워 보입니다. 루시는 자신과 함께 살았던 여자 친구 헬렌의 방을 아버지에게 내어 줍니다. 그런데 어느 날 총을 든 흑인 삼인조 강도가 루시의 농장에 쳐들어 옵니다. 그들은 루시가 키우던 개를 죽이고, 루리 교수를 폭행하고, 루시를 성폭행한 후 루리 교수의 차를 훔쳐 도주합니다. 분노한 루리 교수는 경찰에 신고하고 복수를 다짐하지만 루시는 자신의 성폭행 사실을 경찰에게 끝내 말하지 않습니다.

 

"단순한 여파겠지. 침략의 여파겠지. 그는 이렇게 생각한다. 조금 지나면 몸은 저절로 치유가 되고 그 속에 사는 영혼인 나는 다시 옛 자아를 찾겠지. 하지만 그는 그게 진실이 아니라는 걸 안다. 삶에 대한 즐거움이 꺾여버렸다. 시냇물 위에 떠 있는 하나의 나뭇잎처럼, 산들바람에 날리는 한 알의 민들레 씨앗처럼, 그는 종말을 향해 떠내려 가기 시작했다." (p.163)

 

루시의 농장일을 도와주는 나이든 이웃 원주민 페트루스가 집을 지은 기념으로 루시와 루리 교수를 파티에 초대합니다. 루리 교수는 그곳에서 삼인조 강도 중 한 명이었던 나이 어린 흑인을 발견합니다. 분노한 루리 교수는 페트루스에게 격분하여 따지지만 어린 흑인이 자신의 친척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루시가 그곳에서 살기 위해서는 자신의 밑으로 들어와야 한다고 말합니다. 아내가 둘씩이나 있는 그의 세 번째 부인이 되라는 것이었죠. 루리 교수는 자신의 전처이자 루시의 엄마가 있는 네덜란드로 가서 살면 어떻겠느냐고 루시에게 권합니다. 그러나 루시는 자신의 땅을 페트루스에게 지참금으로 주고 그의 밑으로 들어가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의 집과 개를 돌보는 일은 끝까지 지키겠노라고 말합니다. 강간의 피해자였음에도 불구하고 루시는 그것이 마치 그들의 영역에서 살아가기 위한 '세금 징수'와 같은 것이라고 자신의 아버지를 설득합니다.

 

"얘야, 화내지 말아라. 그래, 나는 이것이 유일한 삶이라는 것에는 동의한다. 동물에 관해서 얘기하자면,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동물들에게 친절하게 대하자. 하지만 균형을 잃지는 말자. 우리는 동물과는 다른 차원의 피조물이다. 반드시 더 높다는 것은 아니고, 그저 다르다는 말이다. 따라서 동물들에게 친절하게 대하려면, 죄의식을 느끼거나 보복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단순한 아량에서 그렇게 하자." (p.112)

 

법률적 용어로 말하자면 위계에 의한 성추행의 가해자였던 루리 교수는 자신의 딸 루시에 의해 피해자의 아버지로 전락합니다. 루리 교수는 한동안 돌보지 않아 폐가처럼 변한 케이프타운에 있는 자신의 집을 처분하고 그곳에서 있었던 자신의 삶을 정리합니다. 그리고 자신과 같은 위치에 있었던 멜라니의 아버지를 찾아가 만나기도 하고, 연극 공연을 하는 멜라니를 먼 발치에서 바라보기도 합니다. 루리 교수는 결국 딸 곁으로 되돌아 옵니다. 그리고 자신의 딸이 임신했다는 사실도 알게 됩니다. 루시의 이웃 중에는 동물 병원을 하며 루시를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는 베브 쇼가 있습니다. 베브 쇼는 주로 치료가 불가능한 동물의 안락사를 담당합니다. 루리 교수는 동물 병원에서 나온 죽은 개의 시체를 자신의 차에 실어 화장장으로 옮기는 일을 합니다. 젊은 시절의 루리 교수였다면 베브 쇼는 결코 쳐다보지도 않을 여인이었지만 베브 쇼의 유혹에 적당히 넘어가는 그의 모습은 어쩌면 이 책의 주제와도 같은 대목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그들의 섹스에 대해서, 적어도 자신이 의무를 다하고 있다고 말할 수는 있다. 정열은 없지만 혐오감도 없다. 결국 베브 쇼가 그녀 자신에게 만족할 수 있도록, 그녀가 의도한 것은 모두 성취됐다. 데이비드 루리, 그는 남자가 여자한테 도움을 받듯이, 도움을 받았다. 그리고 그녀의 친구 루시 루리는 어려운 방문으로 도움을 받았다고. 그들이 지치자, 그는 그녀 곁에 누워 이렇게 생각한다. 이 날을 잊지 말자. 이것이 멜라니 아이삭스의 달콤하고 젊은 살 다음에, 다다른 지점이다. 이것이 내가 익숙해져야 하는 것이다. 이것, 아니 이보다 못한 것조차." (p.225)

 

약자를 이해한다는 것은 자신이 직접 약자의 입장에 처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1983년, 1999년 2회에 걸쳐 맨부커상을 수상했을 뿐만 아니라 2003년 노벨문학상까지 거머쥐었던 J.M.쿳시는 자신의 소설 <추락 Disgrace>에서 모든 갈등에는 접점을 찾을 수 없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상반된 시각이 존재한다는 것을 은유적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윤모 전 청와대 대변인의 칼럼을 읽으면서 이 소설을 다시 읽게 되었습니다만 한 번의 추락을 경험했던 윤모 대변인은 아직도 약자의 입장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더랬습니다. 어쩌면 그는 자신의 나이를 잊고 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든 좋은 말을 다 벗겨내고 보면, 바로 그것을 처벌하려고 위원회가 열렸던 것이다. 그의 삶의 방식에 대한 재판. 부자연스러운 행위에 대해, 늙은 씨, 피곤해진 씨, 생기없는 씨를 뿌린 것에 대해. 자연에 반한 것. 늙은 남자가 젊은 여자를 탐내면, 종족의 미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것이 고발의 밑바닥에 깔린 것이었다. 문학의 반은 그것에 관한 것이다. 종족을 위하여, 나이든 남자들의 무게에서 탈출하려고 몸부림치는 젊은 여자들. 그는 한숨을 쉰다. 감각적인 음악에 묻혀, 나 몰라라, 서로를 껴안고 있는 젊은 사람들. 이곳은 나이든 남자들을 위한 나라가 아니다." (p.286)

 

'나이든 남자들의 무게에서 탈출하려고 몸부림치는 젊은 여자들'의 심리를 윤모 대변인은 과연 몰랐을까요? 한 번의 추락으로도 그는 뭔가 깨닫는 게 없었을지도 모르지만 더 이상 추락할 수 없는 어떤 지점에 이르게 되면 그도 분명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날이 있겠지요. 쿳시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곳은 결코 나이든 남자들을 위하 나라가 아닌 듯합니다. 그도 이 사실을 알았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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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가 내게 묻다 - 당신의 삶에 명화가 건네는 23가지 물음표
최혜진 지음 / 북라이프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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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만큼 바쁘다는 푸념이 누군가에게 때로는 '나도 저렇게 푸념 좀 해봤으면...' 한없이 부러운 말이 될 수도 있고, 그런 사람들을 앞에 두고 말을 하던 당신은 내심으로는 은근히 뻐기거나 으쓱해지는 감정이 들지는 않았나요? 또는 '나도 너처럼 한가해봤으면 좋겠다'고 했던 당신의 말 속에 나는 적어도 너보다는 쓸모가 많은 사람이라는 우월감을 슬몃 찔러 넣었던 적은 없었는지요. 우리는 유능함의 기준이 바쁨을 의미하는 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대놓고 자랑질을 하기가 뭐해서 겸손한 척 자랑을 했던 거라면 그건 정말로 유치하기 짝이 없는 짓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게 드러내지 않고 자신을 자랑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라는 걸 모르지는 않지만 말입니다.

 

최혜진의 <명화가 내게 묻다>를 읽는데 그런 비슷한 내용이 있어서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그런 의뭉스러운 데가 있는 모양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안 그런 척 위장을 하고 유치찬란한 자신의 허세를 감추기 위해 쉬운 상대를 골라 비난하기도 합니다.

 

"부끄럽지만 고백한다. 그 시절 나는 일을 많이 해내는 데 자부심을 느꼈다. 다른 직원보다 업무량이 많은 것, 업무 시간이 긴 것, 남들이라면 손을 내저으며 이 시간 내에 도저히 할 수 없다고 난색을 표할 일을 맡아서 초인적으로 처리해낼 때 자부심을 느꼈다. 회사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능력 있는 인재라는 소리를 듣는 것이 좋았다. 시간을 쥐어짜듯 살면서도 커리어우먼의 삶은 다 그렇겠거니 했다." (p.151)

 

에드바르 뭉크의 그림 앞에서 작가는 현대인의 불안과 우울을 발견하기도 하고 그들과 다를 바 없는 자신의 모습을 반성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사진이 아닌 그림에 탐닉하는 이유는 바로 그런 점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화가는 피사체의 겉모습이 아닌 그 사람의 인생이나 감정을 화폭에 담으려 노력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그림을 감상하는 우리는 규정되지 않은 많은 이야기들을 그림에서 찾아내고 제 나름의 방법으로 해석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한다고 한들 누가 뭐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렘브란트의 역할극 자화상을 보고 있으면 자아라는 것도 조금씩 발견하고 개척해나가는 신대륙 같단 생각이 든다. 그리고 자기 발견의 가장 좋은 방법은 낯설고 새로운 상황과 처지에 스스로를 던져놓고 그 반응을 살펴보는 것이란 생각도. 빈곤에 처했을 때의 나, 승승장구하며 성취감을 누릴 때의 나, 을의 자리에 있을 때의 나, 갑의 자리에 있을 때의 나 ……. 그 많은 내가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다른지 예민하게 포착하는 것이 결국 자아 성찰 아닐까." (p.70)

 

잡지사 제이콘텐트리 m&b에서 10년간 피처에디터로 일했다는 작가는 그림을 잘 그린다는 소리는 태어나서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쓰고 있습니다. 그림을 좋아하여 기자 생활 10년 차가 되던 해에 유럽으로 날아갔고 어느덧 미술관 여행 10년 차가 되었다는 그녀는 미술관에서 그녀가 얻고 싶은 것이 '교양'이 아니라 '관계'이고, 하고 싶은 것은 '감상'이 아니라 '대화'라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 책에는 난해한 미술사나 현학적인 미술용어가 거의 등장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녀가 그림에서 발견한 '나'라든가, '일'이라든가, '관계'라든가, '마음'이라든가 하는 것들이 빼곡히 적혀 있습니다.

 

나는 비록 그림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일자 무식꾼이기는 하지만 그림을 감상하거나 그림을 그리며 소일하는 것마저 싫어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즐기는 편이지요. 흐트러짐 없는 선을 긋기 위해 온 신경을 집중하는 시간이 더없이 좋습니다. 그리고 많은 이야기가 담긴 한 장의 그림에 오롯이 빠져들 수 있는 시간을 즐깁니다. 친구들에게도 '그림은 언어가 없는 한 편의 '시'이거나 삶의 '은유''라고 종종 말하곤 합니다. 그림 속에서 우리는 피사체 너머의 어떤 세계를 발견하기 때문이지요. 작가가 좋아한다는 덴마크 화가 빌헬름 하메르쇠만 해도 그렇습니다. 그림 속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일상의 별것 아닌 일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림을 보는 우리는 그 이상의 것을 그림에서 발견하곤 하지요. 최혜진 작가처럼 말입니다.

 

"일상 공간을 고요하게 가로지르는 햇빛, 그로부터 퍼지는 신비로운 기운, 정적에 잠긴 인물, 이런 몽환적인 표현 덕분에 분명 닳고 닳은 일상임에도 뭔가 낯설고 특별한 느낌이 느껴진다. 눈에 보이는 일 이면에 숭고한 의미가 있을 것만 같은 인상을 받는다." (p.343~p.344)

 

그림을 감상한다는 것은 시를 읽을 때와 마찬가지로 일상의 발견이자, 자신의 삶에 새로운 의미를 더하는 일일 것입니다. 예술을 이해한다는 건 그런 것이겠지요. 반복되는 일상을 전혀 지루하지 않게, 어쩔 수 없는 권태를 새로움으로 치장하여 매일매일을 처음인 양 살도록 돕는 일 말입니다. 그것이 내 눈에는 참으로 숭고하게만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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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05 19:1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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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07 16:44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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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방황은 언제나 왜? 라는 물음에서 비롯된다. 말하자면 그것은 방황의 시발점이자 샘과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한때 내 행위의 결과를 언제나 낙관적으로 바라보았고, 그 시기의 나는 왜? 라는 질문은 하지 않았다. 이유를 묻는다는 건 결과를 부정적으로 바라본다거나 중도에서 포기하겠다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의미로 여겨졌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요즘 왜? 라는 질문을 자주 한다. 젊은 시절에 내가 외면했던 왜? 라는 질문과는 성격이 다소 다른, 삶의 효율성보다는 행위의 정당성을 묻는 질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요즘 이유를 묻는다는 건 행위 전반의 정당성을 요구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완벽하게 정당한 것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을까마는 지금 내가 하는 행위의 필요성을 대충 얼버무려 설명할 수 있을지언정 그것만으로 행위의 정당성이 담보되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나는 이따금 되새기곤 한다. 적당히 게으름을 피우더라도 내 삶에 하등 비겁하지 않다면 그것으로 인해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고 매번 다짐하는 것이다.

 

중학교 1학년인 아들이 오후 내내 어영부영 시간만 보내고 있었다. 수학 학원의 보충수업을 다녀온 후로는 계속 그랬던 듯하다. 당장 내일 모레가 기말고사인데... 보다 못한 아내가 내게 하소연을 했다.아내의 한숨 소리에 문득 내 어린 시절이 생각났던 건 어떤 이유에서였을까? 햇살이 하얗게 부서지는 한낮에 빨랫줄 가득 걸린 햇살보다 더 하얗게 빛나는 광목 이불 홑청 사이를 가르며 깔깔거리고 뛰놀던 그 시절. 시험에서 100점을 맞았던 기억보다는 이불 홑청 사이에서 맡아지던 쌉싸름한 햇살 내음이 더 오래 기억되는 걸 보면 그만한 나이에는 어영부영의 시간이 더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하늘을 향해 곧추 세운 바지랑대와 날아갈 듯 펄럭이던 이불 홑청의 조화로운 풍경을 어찌 잊을 수 있으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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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하지 않습니다 - 연꽃 빌라 이야기 스토리 살롱 Story Salon 2
무레 요코 지음, 김영주 옮김 / 레드박스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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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르는 시간을 그저 물끄러미 바라볼 때가 있다. '멍 때리기' 대회에 출전할 것도 아니면서 말이다. 생각해보면 자신의 시간을 어떻게 쓰건 그건 전적으로 그 사람의 자유 의지에 달렸다고 보아야겠지만 잠깐이라도 그저 멍하니 앉아 보낸 후에는 언제나 대상도 없는 누군가에게 괜스레 미안해지곤 한다. 나도 모르게 드는 그런 강박은 마치 씹다 버린 껌딱지처럼 쉽게 떨어지지 않는다. 어쩌면 어려서부터 들었던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말이 어른이 된 후에도 여전히 내 주변을 유령처럼 떠돌며 나를 감시하고 있기 때문일런지도 모른다.

 

어제는 밤에 잠이 오지 않아 새벽이 다 되도록 양을 세어야 했다. 양 한 마리, 양 두 마리, 양 세 마리... 그러다 어디까지 세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으면 처음부터 다시 세는 일을 몇 번인가 반복했지만 도통 잠이 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피곤하지 않은 것도 아니었다. 몸은 천근만근 무겁기만 하고 그토록 무겁던 눈꺼풀은 오늘따라 팔랑팔랑 날아갈 듯 가볍기만 했다. 그렇게 뒤척이며 시간을 보내다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것은 자정이 훨씬 지난 시각이었다. 낮에 읽던 책을 집어 들었다. 끝내 나는 무레 요코의 소설 <일하지 않습니다>를 다 읽은 후에야 간신히 잠이 들었다.

 

"교코는 이 연꽃 빌라에서 살고부터 자신은 만년(晩年)에 들어갔다고 생각했다. 일반적으로는 아직 한참 더 일을 해야 할 나이이지만, 이제까지와 같은 생활은 하고 싶지 않았다. 절대로 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처음에는 일을 하지 않고 저금을 헐어서 생활하는 것에 양심의 가책이 느껴져 왠지 찜찜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도 들지 않고 무직 생활에 흠뻑 빠져 있다. 무직이긴 해도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으면 하고 지진 피해 복구를 위한 성금은 냈다. 남아도는 게 시간이니 자원봉사를 하러 가면 좋겠지만 그런 마음은 들지 않았다." (p.26)

 

그렇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교코는 마흔여덟 살의 자발적 실업자이다. 한때는 유명 광고회사에서 바쁘게 살았지만 엄마의 잔소리와 거짓이 가득한 직장에 염증을 느껴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낡은 목조 건물의 다 쓰러져가는 연꽃 빌라로 이사했다. 그녀는 지금 직장을 다닐 때 모아두었던 저금으로 살고 있다. 말하자면 그녀의 저금은 그녀를 지탱하는 생명줄이나 다름없었다. 한 달에 10만 엔으로 꾸려가는 빡빡한 살림이지만 그녀는 집안일을 하지 않는 여유로운 시간에 산책을 하거나 책을 읽거나 자수를 놓으며 시간을 보낸다.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는 것 외에 급하게 처리해야 할 일도, 꼭 해야만 하는 일도 없다.

 

"교코가 회사를 다닐 때는 집에 돌아와 자기 방으로 들어가면 곧장 텔레비전을 켜거나 음악을 틀었다. 그것이 습관이 됐다. 항상 자극적인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왠지 허전했다. 그러다가 친구와 태국 여행을 갔을 때, 밤에 바닷가 호텔에서 파도 소리를 들으며 믿기지 않을 만큼 많은 별들이 반짝이는 것을 보고 있자니, 그것만으로도 몇 시간이고 있을 수 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됐다. 그것은 평소 자신이었다면 전혀 느낄 수 없는 감각이었기 때문에 너무나 신기하기도 했고, 감동하기도 했다. 하지만 여행에서 돌아와 다시 업무가 시작되니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텔레비전과 음악 없이는 지낼 수 없는 날들로 되돌아갔다." (p.169~p.170)

 

교코가 세들어 있는 연꽃 빌라에는 연령대가 다른 네 명의 여자가 살고 있다. 교코보다 나이가 많은 구마가이 씨와 여행으로 자주 집을 비우는 고나쓰 씨가 있고, 유일한 남자였던 사이토 군이 나간 방에 키가 껑충하게 크고 젊은 지유키 씨가 새로이 세를 들어 왔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아파트는 세를 주고 자신은 낡은 빌라에 세를 얻은 당찬 아가씨는 호기심도 많고 밝은 성격이어서 교코와도 곧잘 어울리곤 했다.

 

"자기가 살고 있는 장소가 언제 어느 때 없어져 버릴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것이 자신의 소유가 아니어서 마음이 편했다. 교코는 인생에 대해 홀가분해지고자 회사를 그만둘 결심도 재취직을 하지 않을 결심도 했던 거라서, 이것저것 걱정이 된다면 고정 수입을 얻을 수 있도록 일을 하면 된다. 마음이 흔들리는 자신이 한심해진 교코는 2층 창문으로 보이는 옆집 정원수를 바라보며, 이런저런 고민에 빠지는 것은 관두고 싶어졌다." (p.194)

 

<카모메 식당>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무레 요코는 소설을 마치 에세이처럼 쓰고 있다.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장소에서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은 것으로도 모자라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일상을 담담하게 쓰고 있을 뿐이다. 자신의 삶이지만 자신의 의지대로 살 수 없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대신하여 무레 요코는 자신의 소설 속에 교코를 등장시켜 놓은 듯하다. 자발적 실업자인 교코를 보면서 독자들은 '아, 이렇게도 살 수 있구나'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소설을 다 읽었던 오늘 새벽, 소설의 결말이 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은 오늘의 일상을 그리는 것으로 끝을 맺는 것에 안심하여 나는 까무룩 잠이 들었고 평일과 다름없이 아침 운동을 나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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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씨도 더운데 이 글을 읽는 많은 분(혹시 그렇게 되지나 않을까 싶어서)들을 더 덥게 만드는 건 아닌지 심히 저어하는 마음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아무튼 칼을 뽑았으니 썩은 무라도 잘라야겠기에...

 

책 이야기를 한번 해보려고 합니다. 제가 블로그를 시작한 지도 꽤나 오래되었고 나름 일상과 독서 리뷰를 위주로 글을 써왔으면서도 책을 주제로 포스팅을 올렸던 적은 아마 드물지(제 기억이 맞다면 단 한 번도 없지 싶은데) 않나 싶어요. 쓰고 싶어도 쓸 수 없었을 거예요. 특별히 한 분야에 필이 꽂히는 성격도 아니고, 주제를 정하여 한 분야의 책을 진득하게 공부하는 스똬일도 아닌지라 저의 독서는 일정한 체계도 없고 리뷰라고 올리는 글도 중구난방의 잡문이 전부였던지라 그동안 제가 읽어 왔던 책이 이러이러합네 자랑할 만한 지식이 숫제 없었던 겁니다. 부끄럽지만 사실입니다. 그러다 보니 남들처럼 책에 관한 포스팅을 번듯하게 올려보고 싶은 생각은 있었지만 번번이 생각으로만 그치고 말았지요.

 

각설하고, 최근에 저는 최수영의 소설 <하여가>를 읽다가 문득 우리나라의 참신한 작가(소설가)들은 왜 반짝 유명세를 타다가 금세 흐지부지 묻혀버리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지 않았겠어요. 제가 한국 소설을 많이 읽는 편은 아니지만 한국 소설가들이 그렇게 되는 이유가 도대체 뭘까? 하는 생각은 전부터 들었던 궁금증이기도 했습니다. 제 짧은 소견으로 추측컨대 우리나라의 열악한 독서환경도 그 중 하나이겠으나 보다 근본적인 문제가 있을 듯싶어서 이 글을 써보려고 하는 것입니다.

 

제가 한국 소설가 중 신인 시절의 작품이 '참신하다'고 느꼈던 작가를 꼽으라면 박민규, 천명관, 김연수 등이 있었고 최근에 알게 된 최수영 작가도 문체의 참신성에서는 그들에 못지 않다고 느꼈습니다. 물론 문체와 소재만 놓고 본다면 박민규 작가가 단연 으뜸이지만 말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참신성을 무기로 한국 문단에서 성공할 수 있을 것이가? 하는 문제와 그 인기를 계속해서 유지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일개 독자의 입장에서 부정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제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이렇습니다. 박민규의 소설집 <카스테라>를 읽어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처음에는 "와, 이런 소설도 있구나!' 감탄하며 읽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비슷한 문체의 소설집 <더블>을 이어서 읽는다면 새롭다는 느낌은 단숨에 사라져 버립니다. 이런 현상은 다른 작가라고 예외가 아닙니다. 독자가 느끼는 '참신성' 또는 '새로움'에 대한 욕구는 단 한 번의 실행으로 충족된다는 것입니다. 간사하다고 해도 어쩔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 작가가가 매번 다른 문체의 작품을 발표한다는 건 현실적으로도 어려울뿐더러 그닥 좋은 방법도 아닙니다. 작가의 개성은 하나로 족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하라는 말인가? 이것도 안 된다 저것도 안 된다 하니 말이지요. 이러한 고민 때문인지 대부분의 작가들은 두 번째 작품부터 데뷔작과는 판이하게 다른, 기존 작가들이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일반적인 문체로 되돌아갑니다. 자신의 개성을 버렸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이면에는 작가가 데뷔작에서 보여주었던 참신성이나 독창성을 계속해서 이어갈 자신이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기도 하고, 작가의 한계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타개책은 과연 무엇일까요? 저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무척이나 좋아합니다만 그의 데뷔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서 보여주었던 참신성을, 조금씩 달라지기는 했지만 작가는 그의 최신작에서도 여전히 보여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작품에서는 언제나 하루키만의 개성이 돋보이지요. 그렇다면 하루키 자신이 독자들로부터 식상하다는 말을 듣지 않고 자신의 개성을 꾸준히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요? 그의 작품 <노르웨이의 숲>이 그 계기가 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우리나라에서 <상실의 시대>로 출간된 이 소설은 작가의 개성을 어느 정도 숨긴 채, 기존 작가의 보편적인 문체와 스토리 전개 방식으로 쓰여진 책입니다. 작가는 그닥 마음에 들지 않았을 듯하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이게 대박을 쳤던 건 사실이지요. 그 이후 작가는 자신의 개성을 회복할 수 있는 금전적, 시간적 여유가 생겼던 듯합니다. 박민규 작가도 예외는 아니지요.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가 어느 정도 인기를 끌지 못했더라면 그도 어쩔 수 없이 시류에 편승하여 그저 그런 작가가 되고 말았겠지요. 자신의 개성을 유지 발전시킬 수 있는 방법은 바로 보편적 문체의 리얼리즘 소설을 쓸 수 있는 작가의 역량에 달려있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하루키나 박민규 작가처럼 말이지요.

 

흠, 쓰고 보니 별것도 아닌 얘기를 장황하게도 늘어 놓았네요. 날씨도 더운데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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