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고차 월든 - 잉여 청춘의 학자금 상환 분투기
켄 일구나스 지음, 구계원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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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새로 취임한 한국장학재단 이사장의 분별 없는 발언이 구설수에 올랐다는 기사를 뉴스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그의 말인 즉 "국가 장학금 규모를 줄이고 무이자 대출을 늘릴 계획"이라고 밝히면서 "빚(채무)이 있어야 학생들이 파이팅을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어떤 뜻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의 발언은 과거의 어느 시점(예컨대 1980년대와 같은), 아무리 큰 대가를 지불하더라도 일단 대학 졸업장만 손에 쥐면 적당한 일자리는 얼마든지 구할 수 있었던 그런 시절에는 능히 할 수 있는 말이었는지도 모르지만 요즘처럼 이십대 태반이 백수(줄여서 '이태백'이라고 하던가요?)인 시대에 그의 말은 전혀 설득력이 없어보였던 것입니다. 말하자면 그는 현실감각이 없는 구세대의 한 사람이었을 뿐 한국장학재단을 맡아 운영할 만큼 요즘 젊은이들의 생활을 잘 이해하는 사람은 아니었던 게지요.

 

우연이겠습니다만 며칠 전에 나는 이런 문제를 안고 있었던 한 젊은이의 분투기를 책으로 읽었습니다. 켄 일구나스가 쓴 <봉고차 월든(Walden on wheels)>이라는 책이었죠. 제목이 좀 촌스럽죠? 그래서 나는 책을 읽기도 전에 '재미없겠는걸' 하는 선입견이 들었지 뭡니까. 그런데 웬걸요. 책은 의외로 쭉쭉 읽혔습니다. 책을 손에서 놓을 수가 없었지요. '잉여 청춘의 학자금 상환 분투기'라는 부제가 달린 이 책은 '우리나라의 젊은이들도 한번쯤 읽어보면 좋겠는걸' 하는 생각이 들었을 정도로 재미와 교훈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다 잡을 수 있는 좋은 책이었습니다.

 

미국 뉴욕 주 서부의 작은 마을의 중산층 가정에서 성장했던 저자는고등학교 졸업 후 앨프리드 대학교에 진학했으나 터무니 없이 비싼 등록금 탓에 뉴욕주립대 버펄로 캠퍼스로 옮겨갑니다. 앨프리드 대학교의 학점을 인정받지 못해서 뉴욕주립대를 4년을 다녀야만 했고, 재학 시절 그는 슈퍼마켓의 카트 정리 아르바이트,신문배달, 패스트푸드점 조리사, 정원사, 공공 스케이트장 경비 등 여러 아르바이트를 전전했고, 몇 차례의 인턴도 경험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힘들게 대학을 마쳤건만 대학을 졸업한 후에 그가 손에 쥐었던 것은 취업에는 아무짝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 역사학과 영문학 학사 학위증과 3만 2000달러라는 거액의 학자금 대출뿐이었다고 회상합니다.

 

"닥친 상황이 너무나 한심했기 때문에 일해야 한다는 사실이 그 어느 때보다 경멸스러웠다. 5년이나 대학을 다니고, 두 차례나 무급 인턴으로 일하고, 3만 2000달러나 되는 빚을 지고도 나는 십대 때와 변함없이 취업시장에서 환영받을 요소는 전혀 갖추지 못한 채, 딱히 기술이 필요 없고 책임도 별로 지지 않는 저임금 노동만 벌써 몇 년째 하고 있었다." (p.83)

 

취업시장에서 수십 번 고배를 마신 그는 학자금 대출을 갚기 위해 집을 떠나 알래스카로 향합니다. 그가 머물렀던 곳은 언 발을 녹이는 장소라는 뜻의 콜드풋((Coldfoot)이었습니다. 경비행기 투어의 북극 지역종착점이기도 한 그곳에서 그는 숙식을 제공받는 조건으로 시급 9달러의 모텔 청소부, 여행가이드 등의 저임금 노동을 하며 1년을 보냅니다. 때로는 주방 보조를 하기도 했고, 철거 작업에 참여하기도 하면서 닥치는 대로 일을 한 덕분에 그는 1만 8000달러의 빚을 청산합니다. 휴대폰도 통화가 되지 않는 알래스카의 오지에서 안 먹고, 안 입고, 안 쓴 결과였습니다. 다달이 갚아야 하는 학자금 대출의 몇 개월분을 미리 선납했던 그는 비행기값도 아까워 히치하이킹으로 부모님이 사는 뉴욕에 되돌아옵니다. 그리고 그는 잠시의 여유로운 시간 동안 18세기 뱃사람처럼 캐나다의 온타리오를 뗏목 항해로 가로지르는 두 달간의 모험에 참여하기도 합니다.

 

"이 항해를 통해 우리에게는 필요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밖으로 내보내져야 할 필요가 있다. 서로에게 의지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해볼 필요가 있다. 다른 이들을 위해 희생해야 하고, 정원을 가꾸고, 지붕을 고치고, 이웃과 교류해야 할 필요가 있다." (p.187)

 

항해를 마친 후 그는 멕시코만 보호봉사단에 가입하여 미네소타로 향합니다. 그의 목표는 단 하나, 빚을 청산하는 일이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소비생활을 줄이기 위해 1인용 텐트를 치고 생활하는 등 절제된 생활을 이어갔습니다. 그리고 그의 마음을 한 순간에 사로잡았던 여인 새미를 만났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새미는 우울증에 시달리며 몇 번의 자살시도를 했던 경험이 있었지만 회복을 위해 애쓰는 그녀를 위해 저자는 알래스카에서의 일자리를 구해주고 그녀와 함께 알래스카로 향하는 히치하이크를 감행합니다.

 

"나는 내 손으로 빚을 갚으며, 혼자 힘으로 여행하고, 일을 해도 가난하기는 하지만 자유롭고 독립적으로 살고 있었다. 이 사실을 깨닫기까지 왜 그리 오래 걸렸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더이상 누군가에게 무시당하고 괄시받을 사람이 아니었다." (p.188)

 

빚을 모두 청산한 뒤 그가 했던 결심은 다시는 빚지지 않겠다는 것과 인문학을 공부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목표를 위해 새미와 헤어진 그는 듀크대 대학원에 진학합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월든 연못가의 오두막에서 은둔했던 것처럼 대학원 생활 2년 반 동안 그는 낡은 봉고차에서 생활했습니다. 봉고차를 구입하고 대학교 구내에 차를 주차할 수 있는 주차증을 구입하고, 밖에서 내부를 볼 수 없도록 블라인드와 천으로 가리고, 식재료와 물건을 정리할 수 있도록 선반을 만들고, 의자를 이용하여 침대를 만든 후 그는 그곳에서 숙식을 해결했던 것입니다. 체육관에서 샤워를 하고 화장실에서 면도를, 도서관에서 휴대폰과 노트북의 충전을, 학교 근처의 빨래방에서 세탁을 하면서 그는 최소한의 소비를 이어갔습니다. 차에 쥐가 들어오는 바람에 심하게 아팠던 적은 있지만 금욕적인 생활 덕분에 몸은 더 건강해졌다고 그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자신이 사는 풍경의 본질과 성향이 비슷해진다. 농장이 근면성을 길러주듯이 사막은 검소함을, 산은 강인함을 길러주며, 바위투성이의 해안 지대는 낭만적인 설렘을 불러일으킨다. 마찬가지로 교외 지역은 따분함, 구태의연함, 순응하는 분위기를 조성한다. 나는 주변을 둘러싼 환경의 특징을 그대로 답습했다." (p.229)

 

학기중에는 봉고차에서 생활하며 아르바이트를 하고 방학 동안에는 알래스카의 국립공원에서 일하면서 그는 빚을 지지 않고 무사히 대학원을 졸업할 수 있었습니다. 부모님을 모신 졸업식장에서 그는 졸업생 대표 연설을 하였습니다. 저자도 이 책에서 언급하고 있습니다만 사회에 공헌하기 위해 공부를 하는 젊은이들이 그 비용을 자신의 빚으로 떠안아 결국에는 그 빚으로 인해 자신의 삶을 저당잡힌다는 건 뭔가 문제가 있는 듯합니다. 대학을 진학하고자 하는 학생들에게 빚의 무서움을 고지하거나 장학금 지급을 늘리거나 뭔가 대책이 필요한 시점에 장학재단 이사장이라는 사람이 그렇게 가볍게 말을 했다는 건 현재 대학생들이 안고 있는 문제의 심각성을 전혀 모르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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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인기 있는 서양화가를 뽑으라면 단연 빈센트 반 고흐(1853-1890)가 1순위로 뽑히지 않을까 싶다. 나 또한 서양미술사에 대한 지식이 일천하여 들어본 서양 화가의 이름이 몇 명 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과 그가 남긴 편지의 글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반 고흐, 영혼의 편지』(예담)를 읽어본 사람이라면 설령 이전에 그의 그림을 단 한 점도 본 적 없다고 하더라도 순수한 그의 영혼에 먼저 반하고 말 것이다.

 

고흐의 그림 또한 인기 있는 작품이 한둘이 아니어서 일일이 나열할 수는 없지만 나는 유독 그가 그린 '자화상'에 눈길이 가곤 한다. 나와 같은 일반인이 알고 있는 고흐의 자화상은 사실 몇 점 되지도 않지만 반 고흐는 자신의 초상화를 적어도 36장을 그렸다고 한다. 그 자화상 중 18점은 암스테르담에 있는 반 고흐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고, 나머지는 다른 곳에 흩어져 있다고 하는데, 고흐가 이렇게 많은 자화상을 그린 이유는 주로 모델료가 없어서라고 하지만 그보다는 직접적인 또 다른 이유가 분명히 있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자기 내면에 살아있는 또 다른 자신을 찾고 싶은 욕망, 그것은 어쩌면 모든 예술가의 가장 기본적인 소재이자 예술가로서의 삶을 살게 하고 자신의 창작열을 일깨우는 예술의 원천이 아닐 수 없다.

 

화가만 그런 것이 아니고 글을 쓰는 시인도 크게 다르지 않다. '애비는 종이었다'고 씀으로써 스스로를 종의 자식으로 단정하는 서정주의 자화상, '추억처럼 사나이가 있습니다'로 끝을 맺는 윤동주의 자화상, '5척 1촌 5푼 키에 2촌이 부족한 불만이 있다'고 운을 떼는 노천명의 자화상, '한번도 웃어본 일이 없다'고 말하는 한하운의 자화상, '이 찬란한 후회가 나일 줄이야'라고 외치는 고은의 자화상, 고흐를 흉내내어 '낯선 거울 앞에서 나도/ 귀를 잘라버리고 싶다'고 생각하는 정희성의 자화상, '나 요즘 창녀에 실패하고 있는 것 같다'며 자신의 근황을 알리는 문정희의 자화상 등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예술가는 매번 자신의 언어로 '나'를 설명한다. 그러나 그것은 언제나 실패한 언어일 뿐, 마침내 성공한 언어일 수는 없다. 삶도 그렇거니와 예술은 결국 명계에 있는 높은 바위산 꼭대기로 큰 바위를 굴러 올리는 '시지프스의 비극'인 셈이다. '내가 지금 소모해버리고 있는 이 순간은 내가 영원히 반복해야 하는 시간이다.'라고 말했던 니체의 명언처럼 우리의 권태로운 삶은 예술과 맞닿아 있다.

 

어디 예술가뿐이랴. 어쩔 수 없이 자신을 설명해야 하는 순간들을 우리는 끝도 없이 마주한다. 간단한 자기소개부터 구질구질하고 추레한 듯한 내 일상의 낱낱을 설명해야 하는 순간에 이르기까지, 말하다 보면 '나' 스스로도 '자신'을 이해할 수 없는 궁극에 이르게 된다. 내가 '나'를 설명할 수 없는 최후의 모순. 어쩌면 인간은 자신의 정체를 설명하기보다는 외부에서 주어지는 자신의 역할에 따라 이유도 없이 도매금으로 매겨지는 자신의 모습을 진실인 양 믿으며 사는 게 편할지도 모른다. 신분으로서의 정체성은 비록 허울뿐인 실체에 가깝지만 뭐, 그런들 어떤가. '애비는 종이었다'고 외칠지도 모르는 이 시대의 '흙수저'들이 a4 용지 한 장에 가지런하게 적어 내려가는 슬픈 현장은 이 시대의 또 다른 자화상이다. 섭씨 36.5도는 오늘의 기온인 동시에 이 시대의 체온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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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6-08-05 22: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감예요 . 저도 초판본을 가지고있는데 아직도 가끔 들여다봐요. 테오에게 늘 소식을 전하던 고흐의 마음이 읽혀서요!^^

꼼쥐 2016-08-11 15:03   좋아요 1 | URL
고흐는 정말 어떤 문학가보다 더 뛰어난 글솜씨와 어느 철학자보다 더 뛰어난 사고력을 갖고 있는 듯하지요? 저는 그 책을 읽을 때마다 감탄하곤 합니다.테오에 대한 고흐의 마음이나 테오가 형 고흐를 생각하는 마음이나 그렇게 따뜻할 수가 없지요.

[그장소] 2016-08-11 21:57   좋아요 0 | URL
맞아요. 영혼이 예민한 건지 감도가 높은 주파수처럼 ..그런부분이 있어요!^^
 
명화가 내게 묻다 - 당신의 삶에 명화가 건네는 23가지 물음표
최혜진 지음 / 북라이프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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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을 만큼 바쁘다는 푸념이 누군가에게 때로는 '나도 저렇게 푸념 좀 해봤으면...' 한없이 부러운 말이 될 수도 있고, 그런 사람들을 앞에 두고 말을 하던 당신은 내심으로는 은근히 뻐기거나 으쓱해지는 감정이 들지는 않았나요? 또는 '나도 너처럼 한가해봤으면 좋겠다'고 했던 당신의 말 속에 나는 적어도 너보다는 쓸모가 많은 사람이라는 우월감을 슬몃 찔러 넣었던 적은 없었는지요. 우리는 유능함의 기준이 바쁨을 의미하는 건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는데도 말입니다. 대놓고 자랑질을 하기가 뭐해서 겸손한 척 자랑을 했던 거라면 그건 정말로 유치하기 짝이 없는 짓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게 드러내지 않고 자신을 자랑할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이라는 걸 모르지는 않지만 말입니다.

 

최혜진의 <명화가 내게 묻다>를 읽는데 그런 비슷한 내용이 있어서 공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인간은 누구나 그런 의뭉스러운 데가 있는 모양입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안 그런 척 위장을 하고 유치찬란한 자신의 허세를 감추기 위해 쉬운 상대를 골라 비난하기도 합니다.

 

"부끄럽지만 고백한다. 그 시절 나는 일을 많이 해내는 데 자부심을 느꼈다. 다른 직원보다 업무량이 많은 것, 업무 시간이 긴 것, 남들이라면 손을 내저으며 이 시간 내에 도저히 할 수 없다고 난색을 표할 일을 맡아서 초인적으로 처리해낼 때 자부심을 느꼈다. 회사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능력 있는 인재라는 소리를 듣는 것이 좋았다. 시간을 쥐어짜듯 살면서도 커리어우먼의 삶은 다 그렇겠거니 했다." (p.151)

 

에드바르 뭉크의 그림 앞에서 작가는 현대인의 불안과 우울을 발견하기도 하고 그들과 다를 바 없는 자신의 모습을 반성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사진이 아닌 그림에 탐닉하는 이유는 바로 그런 점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화가는 피사체의 겉모습이 아닌 그 사람의 인생이나 감정을 화폭에 담으려 노력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므로 그림을 감상하는 우리는 규정되지 않은 많은 이야기들을 그림에서 찾아내고 제 나름의 방법으로 해석하는 것이지요. 그렇게 한다고 한들 누가 뭐라고 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렘브란트의 역할극 자화상을 보고 있으면 자아라는 것도 조금씩 발견하고 개척해나가는 신대륙 같단 생각이 든다. 그리고 자기 발견의 가장 좋은 방법은 낯설고 새로운 상황과 처지에 스스로를 던져놓고 그 반응을 살펴보는 것이란 생각도. 빈곤에 처했을 때의 나, 승승장구하며 성취감을 누릴 때의 나, 을의 자리에 있을 때의 나, 갑의 자리에 있을 때의 나 ……. 그 많은 내가 어떻게 같고 어떻게 다른지 예민하게 포착하는 것이 결국 자아 성찰 아닐까." (p.70)

 

잡지사 제이콘텐트리 m&b에서 10년간 피처에디터로 일했다는 작가는 그림을 잘 그린다는 소리는 태어나서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고 쓰고 있습니다. 그림을 좋아하여 기자 생활 10년 차가 되던 해에 유럽으로 날아갔고 어느덧 미술관 여행 10년 차가 되었다는 그녀는 미술관에서 그녀가 얻고 싶은 것이 '교양'이 아니라 '관계'이고, 하고 싶은 것은 '감상'이 아니라 '대화'라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 책에는 난해한 미술사나 현학적인 미술용어가 거의 등장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녀가 그림에서 발견한 '나'라든가, '일'이라든가, '관계'라든가, '마음'이라든가 하는 것들이 빼곡히 적혀 있습니다.

 

나는 비록 그림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는 일자 무식꾼이기는 하지만 그림을 감상하거나 그림을 그리며 소일하는 것마저 싫어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즐기는 편이지요. 흐트러짐 없는 선을 긋기 위해 온 신경을 집중하는 시간이 더없이 좋습니다. 그리고 많은 이야기가 담긴 한 장의 그림에 오롯이 빠져들 수 있는 시간을 즐깁니다. 친구들에게도 '그림은 언어가 없는 한 편의 '시'이거나 삶의 '은유''라고 종종 말하곤 합니다. 그림 속에서 우리는 피사체 너머의 어떤 세계를 발견하기 때문이지요. 작가가 좋아한다는 덴마크 화가 빌헬름 하메르쇠만 해도 그렇습니다. 그림 속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일상의 별것 아닌 일을 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림을 보는 우리는 그 이상의 것을 그림에서 발견하곤 하지요. 최혜진 작가처럼 말입니다.

"일상 공간을 고요하게 가로지르는 햇빛, 그로부터 퍼지는 신비로운 기운, 정적에 잠긴 인물, 이런 몽환적인 표현 덕분에 분명 닳고 닳은 일상임에도 뭔가 낯설고 특별한 느낌이 느껴진다. 눈에 보이는 일 이면에 숭고한 의미가 있을 것만 같은 인상을 받는다." (p.343~p.344)

 

그림을 감상한다는 것은 시를 읽을 때와 마찬가지로 일상의 발견이자, 자신의 삶에 새로운 의미를 더하는 일일 것입니다. 예술을 이해한다는 건 그런 것이겠지요. 반복되는 일상을 전혀 지루하지 않게, 어쩔 수 없는 권태를 새로움으로 치장하여 매일매일을 처음인 양 살도록 돕는 일 말입니다. 그런 것들이 내 눈에는 참으로 숭고하게만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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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근처의 공원에는 다른 나무들과 더불어 감나무가 두어 그루 서 있다. 당연한 일이지만 그곳의 감나무에는 제법 탐스런 감이 해마다 열리는데 여름내 농약을 친 탓에, 또는 시의 재산이라는 이유로 공원을 찾는 사람들이 그 감을 따서 먹을 수는 없는 노릇이고 그저 바라보고 즐길 뿐이다. 말하자면 관상용의 감나무인데 올해도 어김없이 제법 실한 감들이 조롱조롱 열렸다. 아직은 잎과 과일의 색깔이 초록으로 한 색이어서 구별이 쉽지 않지만 말이다.

 

다른 나무들도 많은데 내가 굳이 감나무에 애착을 갖는 이유는 요즘처럼 타는 듯한 더위에도 푸르고 반짝이는 생명력을 잘 유지하는 때문이기도 하지만 아침 저녁으로 제법 소슬한 추위가 느껴지는 늦가을까지 갈색의 잎과 주홍빛으로 농익은 과일을 그대로 매달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러한 까닭에 나는 매년 감나무를 보면서 계절의 변화를 감지하고 있다. 말하자면 감나무는 나와 같은 도시내기들에게 계절의 변화를 알려주는 '계절 알리미'로서의 역할을 하는 셈이다. 도시에서 산다는 건 계절의 변화에 점차 무감각해지는 삶을 선택한다는 것일지도 모른다.

 

요즘처럼 연일 폭염에, 열대야에 시달리다 보면 어서 빨리 이 시간이 지나갔으면 하고 간절히 바라게 된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 보면 1년 전체에서 요즘과 같은 혹서기는 아주 짧은 시간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지구온난화로 전지구의 기온이 매년 꾸준히 높아지고 있는 추세이기 때문에 올해 1년 전체를 통틀어서 보면 가장 기온이 높은 해가 된다고는 하지만 말이다. 그러나 하얗고 노랗던 감꽃이 어느새 아기 주먹만 한 크기의 열매로 자라난 것처럼 시간은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는 순간에도 쉼 없이 흐르고 매섭던 더위도 시나브로 사그러들 것이다.

 

밖에는 오늘도 여전히 무덥다. 도시의 더위는 끈적끈적할 뿐 아니라 사람의 기분을 종일 우울하게 만드는 특징이 있다. 마치 더위 속에 우울한 기분을 슬쩍 찔러넣은 것처럼 말이다. 에어컨 바람을 쏘여도 기분은 나아지지 않는다. 다만 이 더위를 쫓기 위해 매미 혼자서 열심히 울어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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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카페의 노래
카슨 매컬러스 지음, 장영희 옮김 / 열림원 / 201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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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는 계절이 따로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카슨 매컬러스의 소설 <슬픈 카페의 노래>로 말하자면 여름보다는 겨울에 더 어울리는 소설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네 영혼이 푸른 빛깔로 맑게 되살아나는 계절이기 때문입니다. 열다섯 살에 열병을 앓은 이후 수차례 뇌졸중으로 쓰러져 서른 살 무렵에는 걷기조차 힘들었다는 작가는 그런 불편한 몸으로도 결코 글쓰기를 멈추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그녀의 작품에 등장하는 각각의 인물들은 모두 자신만의 빛깔로 밝게 빛이 납니다. 평생을 고통 속에서 시달리면서도 '창작이란 신을 찾는 길'이고 '쓸 수 없다면 살고 싶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는 작가의 창작열을 생각하면 나는 이따금 숙연해집니다.

 

조금 다른 이야기입니다만 자본주의가 불러온 폐해는 우리의 몸을 살찌우는 대신 영혼을 황폐하게 만든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러나 카슨 매컬러스는 정반대의 길을 걸었던 작가가 아닐까 싶습니다. 갈수록 몸은 약해졌지만 그녀의 영혼은 더욱더 밝아졌으니까요. 자본주의 체제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대체로 겉으로 드러난 것만 중시하는 까닭에 사랑도 주로 선남선녀의 결합이나 조건 대 조건의 만남만 생각하게 됩니다. 자본주의에 오염된 사랑을 진실한 사랑인 양 믿는 것이지요. 소설 속에서도 예외는 아닙니다. 주인공은 대부분 예쁘고 멋지게 묘사되는 게 일반적입니다. 그 외의 사람들은 주목할 필요도 없거나 그들이 하는 사랑은 사랑도 아닌 것으로 간주됩니다.

 

그러나 익히 알려진 것처럼 매컬러스가 창조한 세계에는 착각에 빠진 상처 입은 사람들이 수없이 등장합니다. 어쩌면 그녀의 개인적인 생활과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을지도 모를 고독, 고립, 소외의 감정이 그녀의 작품 속에서도 끊임없이 흐르고 있는 까닭이겠지요. <슬픈 카페의 노래>에 등장하는 세 사람도 그러합니다. 매컬러스는 인간은 사랑의 감정을 줄 수는 있지만 사랑의 감정을 다른 사람과 나누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믿었습니다. 인간은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사랑하는 존재는 될 수 있어도 사랑받는 존재는 될 수 없다는 것이었지요. 다시 말하면 인간은 타인의 사랑을 완벽하게 느끼고 이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녀의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의 신체적 기형도 사랑을 느끼고 자신의 사랑을 남에게 줄 수는 있어도 되돌려 받지 못함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작품의 줄거리는 대체로 이렇습니다. 미국의 작은 시골 마을에 사는 미스 아밀리아는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사료 가게를 운영하면서 돈 버는 일에는 탁월한 수완을 발휘하였습니다. 마을 사람들에게 술을 만들어 팔거나 아픈 사람들을 치료해주는 등 손재주가 뛰어난 반면 마을 사람들에게는 인색하기 짝이 없고 말조차 어눌하여 사교성은 없었습니다. 작가의 묘사에 따르면 아밀리아는 키가 6척 장신이고, 몸무게는 70킬로에 육박하며, 창백한 얼굴에 회색빛 사팔눈이 너무 심하게 가운데로 쏠려 있고, 골격이나 근육도 마치 남자 같고, 짧은 머리는 뒤로 빗어 넘겼고, 얼굴에는 어딘지 모르게 긴장과 핀곤함이 감도는, 한마디로 말하면 여자로서의 매력은 눈곱만치도 없는 그런 여자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밀리아를 좋다고 쫓아다니는 사람이 있었으니 마을에서 괴팍하기로 소문이 난 마빈 메이시였습니다. 얼굴이 번듯하고 방직공장에서 수리공으로 일했던 그는 아밀리아를 사랑하게 되면서부터 성격도 온순하게 바뀌는 등 모든 게 달라졌습니다. 그들은 결국 결혼합니다. 그러나 마빈 메이시는 어떤 이유에서였는지 아밀리아로부터 밀주일만에 쫓겨났고 복수를 다짐하며 마을을 떠납니다. 전 재산을 그녀에게 주었는데도 말이지요. 그렇게 다시 혼자가 된 아밀리아를 찾아온 이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꼽추 '라이먼'이었습니다. 거지나 다름없는 차림새로 자신이 아밀리아의 사촌 오빠라고 주장하는 '라이먼'을 그녀는 극진하게 대합니다.

 

약한 몸이었지만 교활하고 말주변이 좋은 '라이먼'의 의견에 따라 사료 가게는 카페로 변합니다. 그날이 그날 같았던 마을 사람들에게 아밀리아의 카페는 그야말로 깊은 위로와 위안을 주는 장소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강도질을 하다 교도소에 갇혔던 마빈 메이시가 가석방이 되어 마을로 돌아옵니다. 마빈 메이시와 아밀리아의 관계를 알 리 없었던 라이먼은 마빈 메이시를 보는 순간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왜라고 물어서는 안 됩니다. 작가가 말하듯 '어떤 사랑이든지 그 가치나 질은 오로지 사랑하는 사람 자신만이 결정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라이먼은 갈 데 없는 마빈 메이시를 카페로 불러들입니다. 세 사람의 기묘한 동거가 시작된 셈이지요.

 

"다른 사람과 한 번이라도 같이 살아 보고 난 후에 다시 혼자가 된다는 것은 지독한 고문이다. 난롯불만 타고 있는 방에서 갑자기 시계의 똑딱거리는 소리가 멈출 때 느껴지는 정적과 텅 빈 집 안에 너울거리는 그림자 - 이런 혼자라는 공포와 마주하기보단 차라리 철천지 원수를 들이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p.112)

 

아밀리아가 라이먼을 끔찍이 사랑하기는 하지만 그토록 싫어했던 마빈 메이시를 집에 들인다는 것은 그닥 내키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라이먼을 붙잡아두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요. 그녀는 마빈 메이시를 제거할 수 있는 기회만 호시탐탐 노렸습니다. 최후의 수단으로 마빈 메이시와의 결투를 선택한 아밀리아는 자신의 몸을 단련하고 마빈 메이시 또한 그에 대비합니다. 어느 날 카페에서 두 사람의 결투가 시작되었고 승기를 잡았던 아밀리아는 결국 그녀가 사랑했던 라이먼에 의해 패하고 맙니다.

 

"삶은 우리에게 공짜로 주어졌고, 값을 치르지 않고 얻어진 것이다. 그러면 삶의 가격은 얼마일까? 주위를 둘러보면, 때때로 삶이란 전혀 가치 없거나 만약 있다고 해도 아주 미미한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죽을 힘을 다해 노력해도 내가 처한 상황이 나아지지 않으면, 영혼 깊숙한 곳에서부터 나 자신이 결국 가치 없는 인간이라는 자괴감이 밀려오지 않는가." (p.102)

 

마빈 메이시와 라이먼은 아밀리아의 전 재산을 파괴한 후 귀중품만 챙겨 달아납니다. 아밀리아는 다시 혼자가 되었고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작가는 말합니다. '사람들은 사랑받는 일을 힘들고 불편하게 느낀다. 나아가 사랑받기를 두려워하고 증오하게 되는데 그건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은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파헤쳐 알려고 하기 때문이다.'라고 말이지요.

 

언젠가 카슨 매컬러스는 이런 말도 했습니다. "고독은 거대한 현실, 사랑은 거대한 필수, 사랑이란 하나의 특수한 학문"이라고 말이지요. '고독이 거대한 현실'이라는 말을 요즘처럼 절실하게 느꼈던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눈만 뜨면 자살 소식을 듣는 대한민국의 현실에서 고독은 이미 오래된 지병처럼 자리하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사랑이라는 학문을 처음서부터 새로 배워야 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하여 언젠가 누구나의 가슴속에도 사랑이 싹트기 시작하면, 사랑은 거대한 필수가 아니라 사랑은 거대한 현실이 될 수 있겠지요. 그런 날이 꼭 왔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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