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첫번째 여자친구는
마커스 주삭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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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순간이 주는 미묘한 떨림을 뒤로 한 채 막바지의 더위가 사그라들고 있습니다. 너무나 길었던 더위였고, 그만큼 가혹했던 여름이었습니다. 계절의 이쪽 편에서 저쪽 편으로의 도약을 준비하는 이맘때쯤이면 마치 사춘기 소년의 탄력있는 다리가 물이 불은 시내를 훌쩍 뛰어 넘는 것처럼 계절은 그렇게 거침이 없이 변하겠지요. 확실했던 어떤 것들이 영화의 자막처럼 빠르게 흘러가는군요. 그리고 나는 먼 과거를 떠올립니다. 인생의 불확실한 어떤 것을 향해 자존심과 무모함, 때로는 오기 하나로 자신의 몸을 불사를 준비가 되어 있던 그 시절을.

 

마커스 주삭의 소설 <내 첫번째 여자친구는(Getting The Girl)>은 제롬 데이비드 샐린저가 쓴 <호밀밭의 파수꾼>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캐머런 울프의 성격이 홀든 콜필드처럼 반항적인 것은 아니지만 사춘기를 겪는 십대 소년이라는 점, 이따금 자신의 삶을 염두에 두고 깊은 사색에 빠져든다는 점에서 두 인물은 서로 닮아 있는 듯 보입니다. 주지하는 사실이지만 호주 출신의 소설가 마커스 주삭은 그의 소설 <책도둑>과 <메신저> 등으로 국내의 독자들에게도 꽤나 많은 사랑을 받았었지요. 성장소설로 분류되는 이 소설은 주인공 캐머런 울프의 성장기를 다루고는 있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사색과 글쓰기를 좋아하는 한 소년의 눈을 통해 바라본 삶의 스케치 정도가 아닐까 싶습니다. 하여 나는 스토리 전개에 집중하기보다는 소설 곳곳에 산재한 마커스 주삭의 아름다운 비유와 문장 표현에 감탄하며 읽었던 것입니다.

 

"앞문이 뒤에서 쾅 소리를 내며 닫혔고, 방충망이 덜거덕거렸다. 마치 모든 문이 그 집에서 살았던 낡은 삶으로부터 나를 쫓아내는 것 같았다." (p.117)

 

"어떤 면에서 보자면, 나는 쓰레기를 뒤지듯, 괜찮다고 위로받는 순간을 찾아 헤매야 했다." (p.10)

 

"곧 저녁이 하늘로 파고들고, 도시는 몸을 웅크렸다." (p.20)

 

"그 순간 밤이 터져 열리며 하늘이 내 주위에 널빤지처럼 떨어져내렸다." (p.124)

 

소설의 줄거리는 대략 이러합니다. 배관공인 아버지와 전업주부인 엄마로부터 삼남일녀 중 막내로 태어난 캐머런은 두 형에 비해 초라한 자신의 모습에 늘 주눅이 들어 지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맘만 먹으면 어떤 일이든 성취해내고야 마는 큰형 스티브는 독립하여 여자친구와 함께 살고 있고, 작은형 루벤은 잘생긴 외모와 말솜씨 덕분에 딱히 노력을 하지 않아도 여자들이 달라붙고, 그런 까닭에 수시로 여자친구를 갈아치우곤 하는데 여자친구를 간절히 원하는 자신은 이제껏 여자 손 한 번 잡아보지 못한 처지이기 때문입니다. 캐머런이 하는 일이라고는 고작 작은형 루벤의 여자친구를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거나, 도시의 골목을 정처없이 걷거나, 맘에 두었던 여자애네 집 앞에서 무작정 서 있는 게 전부였습니다. 소설의 표현을 빌리자면 '조금 외로운 새끼'였던 거지요.

 

"거리에는 나뿐이었다. 여전히 평화로움을 느끼고 있었지만, 짧은 행복은 떠나가고 슬픔이 아주 천천히, 꼼꼼하게 나를 찢어 열었다. 도시의 불빛들이 허공을 뚫고 다가와 나를 향해 팔을 뻗었지만, 나는 절대 그 빛이 나에게 닿지 못하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p.23)

 

사춘기의 성장통을 겪고 있는 캐머런은 주말이면 루벤과 함께 아버지 일을 돕거나 외로울 때면 이따금 자신의 생각을 글로 적어 감춰두곤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작은형 루벤(또는 루브)의 새로운 여자친구 옥타비아가 그의 눈에 들어옵니다. 부둣가에서 하모니카 공연을 하는 옥타비아는 이전에 형과 사귀다 헤어졌던 다른 여자애들과는 뭔가 다르다고 느꼈습니다.

 

"사실 나는 우리 모두가 변태라고 생각한다. 남자들은 모두. 여자들도 모두. 나처럼 뚱한 조그만 새끼들은 모두. 아버지가 변태라고, 어머니가 변태라고 생각하니 재미있다. 하지만 그들도 어딘가로, 그들의 영혼의 갈라진 틈으로 가끔 미끄러진 적이, 아니, 심지어 뛰어든 적이 있을 게 분명하다. 나로 말하자면, 나는 때때로 아예 그런 틈 안에서 사는 기분이다. 어쩌면 우리 모두 그런지도 모른다. 내 인생에 아름다움이 있다면, 거기서 기어나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p.68~p.69)

 

늘 그래 왔던 것처럼 루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옥타비아와 헤어지고 새로운 여자친구를 사귀게 됩니다. 그러나 행실이 안 좋아 보이는 줄리아가 캐머런은 영 맘에 들지 않았습니다. 캐머런은 다시 스테퍼니의 집 앞에서 무작정 기다리는 일을 시작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스테퍼니의 집 앞에 있는 캐머런을 찾아 온 옥타비아가 그에게 묻습니다. 자신의 집 앞에서 기다려 주지 않겠느냐고 말이지요. 한때 형의 여자친구였던 옥타비아에게 캐머런은 자신이 써서 꽁꽁 숨겨두었던 글을 읽어줍니다. 어쩌면 그것이 옥타비아를 향한 캐머런의 마음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집에서 이런 캐머런의 마음을 이해해주는 건 누나 세라뿐입니다. 캐머런이 글을 쓰고 있다는 걸 진작에 말고 있었던 세라는 가족을 그린 자신의 스케치북을 캐머런에게 보여줍니다. 그 속에는 캐머런을 그린 그림도 있었습니다. 옥타비아를 마음에 두고는 있지만 루벤 때문에 갈등하고 있는 캐머런을 세라는 적극적으로 응원해 줍니다.

 

"그럼 루브건 다른 누구건 너한테 이렇게 해라, 아니면 이런 사람이 돼라 말하게 놔두지 마.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건 신경쓰지 마. 어떻게 하면 그 사람들의 비참한 삶을 편하게 해줄까 신경쓰지 말란 말이야. 그냥 네가 원하는 걸 해, 캠. 알았어?" (p.193)

 

한편 루벤은 새로 사귄 여자친구 줄리아의 전남친으로부터 시도 때도 없이 걸려오는 전화협박에 시달립니다. 결국 줄리아는 옛 남자친구에게 되돌아갔지만 루벤에 대한 남자친구의 협박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 와중에 옥타비아와 캐머런의 관계를 알게 된 루벤은 불같이 화를 냅니다. 결국 옥타비아도 캐머런과 헤어집니다. 그러던 어느 날 루벤은 줄리아의 남자친구에게 결투를 신청하고 철도 조차장의 공터에서 싸움이 벌어집니다. 도와줄 친구도 없이 밤에 혼자 나갔던 루벤이 몹시 걱정되었던 캐머런은 가족들 몰래 집을 빠져나갑니다. 그리고 쓰러져 있는 루벤을 안고 그 먼 거리를 걸어 집으로 돌아옵니다.

 

사춘기의 그 시절에 우리는 자신이 누군가에게 괜찮은 사람으로 남기를 간절히 바라곤 합니다. 그 대상이 남자건 여자건 그건 중요하지 않습니다. 순수하게 아름다웠던 그 시절의 추억이 어느 누구의 가슴엔들 남아 있지 않겠습니까. 아침 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고 찬 기운이 옷깃 속으로 파고드는 이맘때쯤이면 문득 그 시절이 그리워지곤 합니다. 꿈처럼 아련하기만 한 그 시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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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산한 하루였다. 말하자면 그렇다. 비가 오락가락했던 하늘은 온 종일 흐려 있었고, 바람의 방향이 바뀔 때마다 키가 큰 가로수들이 심하게 흔들렸다. 얼마 전의 폭염 속에서 나는 왜 이런 풍경을, 생각만으로도 시원했을 이토록 가까운 미래를 도무지 떠올리지 못했던 것일까. 어두워진 허공에 가을을 닮은 두어 줄기의 애상이, 새로운 계절에 너무나도 쉽게 동화되는 옛추억의 회상이 낙엽처럼 흩날렸다.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후보자의 청문회가 오늘 있었고, 늘 그렇듯 고성과 막말 속에 잘 짜여진 코미디 각본처럼 마무리하는 의원 나리들의 뒷모습 속엔 한여름의 남은 열기가 펄럭였다. 그리고 지난해에 있었던 한국과 일본의 '12·28 위안부 합의’에 따른 조치로 일본 정부가 오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지원을 위한 화해·치유재단에 10억엔(108억여원)을 출연할 예정이라고 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한·일 양국은 '외교적 현안'으로서의 위안부 문제는 '최종적, 불가역적 해결' 수순을 밟게 되는 셈이었다. 그러나 합의 반대를 외치는 위안부 관련 시민단체와 위안부 할머니들의 제1246차 수요집회는 빗속에서도 열렸었나 보다.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했던가. 며칠 전 우리 곁을 떠난 코미디계의 대부 고 구봉서의 유언은 초가을의 연민처럼 가슴에 남는다. '형편이 어려운 후배들이 많으니 절대 조의금을 받지 말고 그저 와서 맛있게 먹고 즐기고 갔으면 좋겠다.'는 그 말이.

 

손바닥을 뒤집듯 너무나도 쉽게 8월이 가고 있다. 영영 오지 않을 듯하던 가을이, 그토록 멀게만 느껴지던 9월이 우리 곁으로 성큼 다가온 것이다. 눈물 한두 방울과 서민들의 한숨이 흐린 하늘에, 저녁 어스름에 지문처럼 남는다. 가을의 애상처럼 8월 한 달이 그렇게 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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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인간
성석제 지음 / 창비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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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의 능선을 따라 안개가 걷히는 걸 보니 비는 이제 다 내렸나 봅니다. 다만 앞산에 걸린 먹구름은 약간의 미련이 남았는지 선뜻 걸음을 떼지 못한 채 슬몃 눈치를 살피면서 어슬렁어슬렁 속도를 늦추고 있지만 말입니다. 저 산 너머 구름이 향하는 곳 어디쯤에는 밀려온 구름에 더하여 또 다시 새로운 구름이 만들어지고 어두워진 구름을 뚫고 이따금 비도 내릴 테지만 자연의 품에 안겨 하루를 사는 모습은 어디에서나 비슷할 거라는 생각을 하면 갑자기 푸근해지는 느낌이 들곤 합니다. 어쩌면 그것은 자연 속에서 우리들 모두 하나가 된 듯한 느낌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행복해하는 투명인간 가족이 다리 너머에 있다. 이 세상 어딘가에는 투명인간들만 모여 사는 평화로운 마을이 있을지도 모른다. 아픔도 슬픔도 없이 모두가 평등한." (p.367)

 

성석제의 소설 <투명인간>을 읽었습니다. 읽었다기 보다는 읽어냈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모름지기 소설이란 끊김 없이 쭉쭉 읽히는 맛에 읽는 것인데 이번에는 그러지 못했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나는 마치 우리네 근현대사를 소설로 읽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어쩔 수 없이 드는 지루함을 제어하기 어려웠던 게 사실입니다. 그동안에 나는 <소울 푸드>나 <칼과 황홀>등 그가 쓴 산문집을 주로 읽었던 탓에 그의 소설만큼은 사전지식이 전무했었습니다. 산문집에서 간간이 보여지던 익살스러운 문체가 소설에서도 여전히 드러나지 않을까 생각했던 게 내가 알던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작품을 잘못 선택했던 것인지 이 소설은 나의 예상과는 다르게 진지해도 너무나 진지한 소설이었고 진땀을 빼며 읽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소설은 5월의 마포대교에 등장한 투명인간으로 시작하여 이 책의 주인공인 김만수의 과거로 급하게 되돌려진다. 배 속에서 나올 때부터 '머리통만 절구통겉이 크고 팔다리는 쇠꼬챙이겉이 빌빌 돌아가는 탓에 지대로 커서 인간이 될랑가 걱정'이라는 말을 들어야 했던 만수. 위로도 형과 누나들이 있고 밑으로 남동생과 여동생이 있었던 만수네 가족은 할아버지, 할머니를 포함하여 부모님과 만수를 비롯한 자식들이 3남 3녀로 오지 산골 개운리에서 농사를 지으며 산다. 낙동강 유역에서도 큰 큰 부잣집 삼대독자였던 할아버지가 독립군으로 낙인 찍혀 전 재산을 잃고 마을 사람들의 눈을 피해 야반도주를 하다시피 하여 찾아든 곳이 개운리였다.

 

기골이 장사 같고 공부 대신 노는 걸 좋아했던 만수의 아버지는 일찍부터 농사일에 매달려 화전을 일구고 가축을 길렀다. 한국전쟁 중에 만수의 형 백수가 태어났고 워낙 깊은 산중이라 전쟁이 났다는 것조차 알지 못한 채 지냈다. 세 살때부터 글을 배워 대여섯 살 무렵부터는 이런저런 일을 따지고 들었던 백수와는 달리 3남 3녀 중 네째로 태어난 만수는 모든 게 늦되기만 했다.

 

중학교를 다닐 때부터 도시에 나가 살았던 백수가 서울에 있는 명문대학에 진학을 하면서 도시화와 산업화가 진행되던 그 시기에 만수네 집도 시대의 조류에 급격하게 휘말린다. 등록금을 마련할 길이 없었던 백수는 피를 팔고 막노동 아르바이트로 근근히 버티다가 결국에는 군에 입대하여 월남전에 파병된다. 가족을 위해 동생 금희에게 미싱을 사서 보내기도 했던 백수가 고엽제 후유증으로 죽자 만수의 할아버지는 개운리를 떠나라고 말한다. 변변한 직장도 없는 아버지를 대신하여 누이들이 집안을 보살펴야 했고 아버지는 술로 나날을 보냈다. 변두리 단칸방 신세를 면키 어려웠던 그들에게 시련이 찾아온다. 똑똑하던 명희 누나가 연탄가스 중독으로 하루 아침에 백치가 되고 만수는 실질적인 가장 역할을 떠맡아 집안을 보살핀다.

 

고도성장을 했던 한국 사회의 모습과는 반대로 만수네 가족은 하나둘 무너져만 간다. 맏이 백수가 죽고, 명희 누나가 백치가 되고, 만수를 형으로 대우하기는커녕 늘 무시하기만 했던 석수가 위장취업을 한 후 행방불명이 되고, 야학을 하던 막내동생 옥희마저 변변치 않은 건달과 결혼을 한다. 무너지고 부서지는 가족을 돌보고 보살피는 일은 어느것 하나 잘난 데 없었던 만수의 몫으로 남는다. 학수가 남긴 아이도, 옥희 내외도 만수의 희생이 아니었더라면 결코 살아남기 힘들었을 것이다.

 

만수가 결혼을 하고 한숨 돌릴 무렵 그가 다니던 회사가 경영난으로 부도가 나고 직원들도 모두 흩어지지만 만수는 갈 곳 없는 사람들을 돌보며 공장을 지켰다. 그러나 그에게 남겨진 건 공장 불법점거에 따른 손해배상 청구서뿐이었다. 가족과 이웃을 위해 평생을 희생하며 모든 것을 나눠주었던 만수는 이제 더이상 그들에게 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된다. 그렇다고 그들 곁을 떠날 수도 없었던 만수는 누구에게도 눈에 띄지 않는 투명인간이 되고 만다.

 

"나는 기적을 믿지 않았다. 나는 힘들었고 불행했고 절망적이었고 좋아진 적이 없었다. 남의 눈에 보이지 않는 인간이 되는 것, 외면의 모습으로 어떤 평가나 동정을 받을 필요가 없는 존재가 되는 기적이 내게 일어났다는 걸 처음에는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 순간은 행복했다. 감미로웠다. 내가 나에 대해 가장 자신있어할 때의 느낌이었다. 누군가 나를 사랑하고 인정해주고 존중해줄 때의 느낌이었다." (p.346)

 

소설의 여러 인물들이 화자로 등장하여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탓에 소설을 읽는 독자들은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나 또한 다르지 않았다. 한참을 읽고 있다가도 '이게 지금 누가 하는 말이야?' 되묻게 되고 이야기의 처음 부분을 찾아 '나'의 정체를 파악해야만 했다. 이처럼 화자가 자주 바뀔 때에는 소제목으로 장을 나눠주었으면 좋았을 텐데 작가는 그마저도 외면했다. 일부러라고는 말할 수 없겠지만 불친절한 소설임은 분명했다. 그렇지만 작가는 베이붐 세대의 한 가족을 조명함으로써 산업화의 이면에 비친 우리 시대의 서글픈 모습을 집요하게 추적하고 있었다. 그것은 차라리 소설이라기 보다는 살아 있는 역사서에 가가웠다.

 

날이 개고 있습니다. 시대의 흐름에서 살짝 비껴 선 채 살고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누구나 다른 사람의 주목도 받지 못한 채, 어떤 보살핌이나 애정도 받지 못한 채, 있는 듯 존재하지 않는 투명인간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작가는 투명인간으로 살아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모여 사는 평화로운 마을을 꿈꾸었지만 지금 저 구름이 넘어가는 먼 산의 뒤쪽에도 그런 곳은 아마도 찾기 어려울 테지요. 소설은 그렇게 아무런 위안을 주지 못한 채 끝을 맺고 있습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나의 일상은 마치 투명인간의 그것처럼 조용히 흘러갔습니다. 오늘도, 그리고 내일도 마찬가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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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는 너를 읽는다

 

우리 은밀히 모이자고 그런 다음

광화문 한복판에서 삐라를 뿌리는 거야

어때 기막히지?

 

아뇨 코 막혀요

독서 권장 리플릿을 손으로 나눠주면 되지

왜 굳이 하늘에서 삐라로 뿌리자는 거예요?

정권 타도라고 대문짝만하게 쓰면 모를까

겁도 많으시면서

 

일단 저 박근혜가 꼴도 보기 싫어 그러지

왜?

김시인은 꼴이 보기 좋아 그런가?

 

긴한 말로 보자던 인쇄소 사장은

치통을 앓는 사람처럼 눈도 부어 있었다

은행에서 거절당한 대출 건은

나한테 말해봤자 입만 아프다더니

개씹새끼라며 연신 은행장을 욕해댔다

 

까짓것 오늘 타온 약에서 약한 걸로 다섯 알 드릴게요

병원은 초밥집 3층 <약손명가> 맞은편이에요

나는 처방 받은 약봉지 안에서

졸민정 0.25mg만을 골라 그에게 건넸다

 

유연하고도 날렵한 알약이군

요게 바로 김시인의 비타민이란 얘기지

짙은 바닷빛 알약 다섯 개를

인쇄소 사장은 양복 주머니에 넣었다

 

혹시 냉동고에 꽁꽁 얼린 난자완스 있으세요?

있으면 그것부터 버려버리세요

약기운에 자다 깨서 그거 데우다

솥뚜껑까지 태워먹은 게 나거든요

온 집안이 연기로 뒤덮였죠

 

소방차는 출동했죠

나는 팬티에 노브라 차림이었죠

맨손으로 시커먼 솥을 집었다가 놓쳤는데

오른 발등뼈가 깨가 됐지 뭐에요

 

고기를 먹겠다는 심사였는데

숯을 깨물어먹게 생겼으니

이쯤에서 궁금해지더라고요

맨 처음 숯불에 고기를 올린 사람은 누구였을까

그 사연을 알고나 구운 것일까

살이 됐다 숯이 되는 그거요

말끝에 불을 놓으니

똥줄이 타는 그거요

 

어쨌든 고기가 숯이 되는 건 껌 씹는 일 같지만

숯이 고기가 되는 건 씹던 껌 다리는 일 같아요

 

어떤 뒤집개가 날 엎어봤는지 몰라도

아직 고기 뒤집을 때는 아니었나봐요

불판 위에서 손등 때리거나 맞을 때

그 순간에 왜 맞고 왜 때리나

우리 서로 모르면서도 실은 척 보면 또 알잖아요

덜 익었으니 좀 두고 보자는 식은 그러니까

 

요, 집중!

요요, 집중! 집중!

 

 

: 김민정의 시집<아름답고 쓸모없기를>에 나오는 재미있는 시다. 우리는 누구도 그녀의 한마디 말에 집중하지 않을 수 없다. 한 귀퉁이에 찌그러져 조용히 술을 마시다가도 갑자기 할 말이라도 생각났다는 듯 "요, 집중!" 하고 외친다면 다들 조용해지겠지. 이상하게도 더위가 가시자 시가 고파졌다. 삼삼한 일이 생기려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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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오스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이영미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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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에 비가 잠깐 내렸다. 농부가 씨앗을 뿌리는 수준의 짧고 가벼운 비였다. 어찌나 짧게 내렸던지 업무에 집중했던 사람이라면 '비가 내렸었어?' 하고 의외라는 듯 되물을 수도 있는 그런 비였다. 비는 그렇게 잠깐 내리는 듯하더니 금세 그쳤을 뿐만 아니라 계절마저 성큼 옮겨 놓은 듯했다. 마술을 부리듯 도깨비 방망이로 뚝딱 가을을 만들어 낸 것처럼 말이다. 바깥 날씨가 시원하다고 느꼈던 게 얼마만인지... 실내의 에어컨 바람 밑에서는 오슬오슬 추위가 느껴지기도 했다. '집에서 나올 때 카디건이라도 하나 가져올걸 그랬나?' 하는 후회마저 기분 좋게 느껴졌다.

 

여름 휴가가 끝나면 나는 대개 하릴없이 여행서적을 뒤적이며 아쉬운 마음을 달랴곤 한다. 어떤 거창한 휴가 계획을 세웠던 것도 아니면서 '왜 이렇게 하지 못했을까?' 하는 생각에 당장이라도 다시 휴가를 떠나고 싶어지는 것이다. 여름 휴가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사람은 나뿐만이 아닌 듯하다. 이맘때쯤 서점에 나가 보면 여행 서적 코너는 사람들로 늘 북적이곤 하는 걸 보면 말이다. 물론 그들 중에는 아직 휴가를 떠나지 않은 사람들도 적잖이 섞여 있겠지만. 휴가철 여행서적 수요를 노리고 각 출판사마다 이 시기에 집중적으로 여행서적을 출간하는 것도 아닐 텐데 해마다 여름이면 마치 성지순례를 하듯 사람들이 여행서적 코너를 들르곤 한다. 그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가슴 한 켠에서는 문득 '이참에 열 일 제쳐두고 여행이나 가버릴까?' 하는 유혹이 불현듯 솟아오르게 마련이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나도 그동안 어지간히 많은 여행서적을 읽어왔다. 시중에 나온 여행서적 중 안 읽은 책을 고르는 게 더 빠를지도 모른다. 그 중 열에 아홉은 읽었다는 기억마저 희미하고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 책은 손으로 꼽을 정도이니 내게 여행서적은 아마도 시간 때우기 용이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렇게 읽은 책 중에서 여행서적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책은 단연 무라카미 하루키가 쓴 <먼 북소리>이다. 그 외에도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이나 유성용의 <생활여행자>, 또는 후지와라 신야가 쓴 <인도방랑>이나 박준의 <On the Road:카오산 로드에서 만난 사람들> 등 몇 권의 책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 <라오스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가 나왔다기에 서둘러 구입을 하고는 이제껏 책꽂이에 방치했다가 어제 겨우 읽었다. 그렇게 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하루키의 광팬임을 자처하는 나는 일단 그의 책을 손에 잡으면 아무리 급한 일이 있어도 책을 읽다 말고 중간에 내팽개치는 경우는 좀처럼 없었는데 이 책은 달랐다. 지루한 감이 없지 않았다. 하루키 스타일을 아는 사람이라면 내 심정을 이해하고도 남을 것이다. 여느 여행작가가 자신이 방문한 여행지를 소개하는 구태의연한 방식으로 글이 이어질 때는 '이거 하루키 책 맞아?' 하면서 다시 한번 저자를 확인하곤 했었다.

 

"생각건대, 풍족한 물을 일상적으로 접하는 행위란 인간에게 중요한 의미가 아닐까. 하긴 '인간에게'라는 표현은 조금 과장일지 모르지만, 적어도 나에게는 매우 중요하게 느껴진다. 가만히 물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무언가를 조금씩 잃어가는 느낌이 든다. 그것은 음악을 무척 좋아하는 사람이 어떤 사정으로 오랫동안 음악에서 멀어져 있을 때 느끼는 감정과 조금은 비슷할 것 같다. 어쩌면 내가 나고 자란 곳이 바닷가 근처라는 사실과도 어느 정도 관계가 있을지 모른다." (p.13)

 

책을 구입하고 대충 넘겨봤을 때는 그런 줄 알았다. 어떤 기획 형식으로 여행지 한 곳을 정하여 그곳을 방문하고 작가가 그곳에서 느꼈던 느낌과 함께 관광명소를 자세히 소개하는 그런 책인 줄로만 알았다. 그러나 그런 느낌이 들었던 건 극히 일부였고 대부분의 글에서는 사색가로서의 그의 면모가 짙게 배어났다. 게다가 <먼 북소리>에 등장했던 그리스의 두 섬(미코노스 섬과 스페체스 섬)을 다시 방문하여 잠시 동안 그가 살았던 집과 마을을 둘러보고 그 느낌을 적은 '그리운 두 섬에서'를 읽을 때에는 마치 내가 작가가 된 양 아련한 추억에 젖기도 했다.

 

"오랫동안 목조 어선을 만들어온 작은 조선소에서 탕탕 나무망치 소리가 들린다. 어딘가 정겨운 소리다. 규칙적으로 울리던 소리는 갑자기 뚝 끊겼다가, 잠시 후 다시 들려온다. 이런 풍경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 나무망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마음이 이십사 년 전으로 돌아간다. 당시 나는『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라는 소설을 마무리하고, 다음 작품『 노르웨이의 숲』집필에 들어갈 생각을 하고 있던 삼십대 중반의 작가였다." (p.109)

 

이 외에도 책에는 이십여 년간 작가가 방문했던 세계 여러 곳에 대해 쓰고 잡지에 실었던 글이 다수 등장한다. 이 책의 표제작이기도 한 라오스 루앙프라방, 와인의 성지 토스카나, 미식가들의 천국 포틀랜드, 시벨리우스의 나라 핀란드, 타임머신을 타고 날아갔으면 싶은 뉴욕의 재즈 클럽, 작가회의 차 들렀던 아이슬란드, 추억이 깃든 보스턴, 일본 근대문학의 흔적을 간직한 구마모토까지.

 

"라오스(같은 곳)에 대체 뭐가 있는데요?"라는 베트남 사람의 질문에 나는 아직 명확한 대답을 찾지 못했다. 내가 라오스에서 가져온 것이라고는, 소소한 기념품 말고는 몇몇 풍경에 대한 기억뿐이다. 그러나 그 풍경에는 냄새가 있고, 소리가 있고, 감촉이 있다. 그곳에는 특별한 빛이 있고, 특별한 바람이 분다. 무언가를 말하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귓가에 남아 있다. 그때의 떨리던 마음이 기억난다. 그것이 단순한 사진과 다른 점이다. 그곳에만 존재했던 그 풍경은 지금도 내 안에 입체적으로 남아 있고, 앞으로도 꽤 선명하게 남아 있을 것이다." (p.181~p.182)

 

하늘은 다시 어두워졌다. 의식하지 않으면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작고 순간적인 변화들이 그저 무의미한 것으로 잊혀진다. 나를 감싸고 흘러갔던 시간과 하늘과 구름과 말매미의 울음과 사람들의 웃음소리와 낮게 가라앉았던 침묵과 그러한 것들로 시시각각 다른 색깔로 변했던 나의 감정과... 이렇듯 하루는 많은 것들로 채워지고 또 채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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