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한 첫 문장 - 오랫동안 잊히지 않는 세계문학의 명장면
윤성근 지음 / MY(흐름출판) / 2015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원했던 대상이 어느 순간 '짠!' 하고 나타날 거라는 막연한 기대감으로 무작정 걷게 될 때가 있다. 예컨대 최근에 헤어진 연인이라든가 허기를 달래줄 맛집이라든가 하는 것들이 지금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의 어디쯤에선가 마술처럼 짜잔 등장할 거라는 헛된 기대감 말이다. 그런 기대감을 더욱 강하게 만드는 것은 말할 것도 없이 '처음'이나 '첫'이라는 단어가 앞에 붙었을 때이다. 첫사랑, 첫 데이트 장소, 첫키스 등등. 우리를 마술의 세계로 이끄는 이러한 것들이 현재라는 시공간에서는 영원히 사라져 과거의 영역으로 흘러 들어갔을 때 우리가 느끼는 상실감이 크면 클수록 그때의 기분을 되살릴 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감은 더욱 증폭되고, 머릿속 상상의 영역을 밝히는 촛불이 하나둘 불이 켜지고, 우리는 그 불빛을 쫓아 막연히 걷게 되는 것이다.

 

독서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은 듯하다. 한 권의 책을 마저 다 읽어내는 데 필요한 마음의 준비는 먼 길을 떠나는 나그네의 마음과 흡사하다는 것이다. 여정이 사뭇 즐거울 것이라는 기대감, 목적지에 다다랐을 때 안온한 잠자리가 마련되었을 거라는 기대감은 나그네로 하여금 쉽게 첫발을 내딛도록 한다. 그러나 힘든 여정이 될 거라는 예상은 나그네의 발길을 주저앉히기도 한다. 소설의 첫 페이지를 마주하는 독자 역시 막연한 기대감으로 들뜨기도 하고, 두려운 나머지 다음 페이지를 열어볼 엄두를 내지 못하기도 한다.

 

"그러면 좋은 첫 문장은 무언가? 내 기준에서 좋은 첫 문장은, 우선 미스터리한 느낌이 있어야 한다. 공포영화에나 나올 법한 그런 서늘한 분위기가 아니라, '도대체 이렇게 첫 시작을 떼면 다음은 어떻게 이어갈지 궁금해지는 걸?' 하는 생각이 절로 들게 만드는 묘한 느낌이면 좋다. 더불어 소설을 다 읽고 난 다음에도 첫 문장이 의미하는 것이 알쏭달쏭하게 만들어야 한다." (p.39)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 주인이자 에세이스트인 윤성근은 자신의 책 <내가 사랑한 첫 문장>에 위와 같이 썼다. 까다롭기 짝이 없는 주문이다. 소설을 읽는 독자로서의 저자의 마음을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다. 그러나 이렇게 까다로워서야 어디 소설 한 편을 쓰겠다고 감히 앞으로 나서는 사람이 있을까 싶은 것이다. 다독가로도 유명한 저자에게 있어 소설의 첫 문장이 주는 감동과 짜릿한 희열이 어떤 것인지 나와 같은 일반독자는 감히 짐작도 하기 어렵지만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어렴풋한 느낌은 내게도 있고, 소설을 사랑하는 다른 많은 독자들에게도 있을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날 저녁 어느 카페의 테라스에서 나는 한낱 환한 실루엣에 지나지 않았다.'로 시작되는 파트릭 모디아노의 소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를 기억하고 있다. 멋진 문장이었고, 인상적인 출발이었다. 독자는 왠지 모를 쓸쓸함과 허전함을 안고 먼 길을 떠날 준비를 한다. 왠지 그래야 할 것만 같다. 소설 속으로 뚫고 들어가 주인공 '기 롤랑'의 어깨를 토닥여줘야 할 듯한 분위기. 소설은 그렇게 독자를 안내한다.

 

<내가 사랑한 첫 문장>에서 저자가 소개하는 책은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을 비롯하여 스물세 권이나 된다. 물론 적다면 적은 숫자이지만 자신의 기억 속에서 소설의 첫 문장을 도대체 몇 권이나 발견할 수 있는지 생각해보면 결코 적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일일이 나열하자면 다음과 같다. 프란츠 카프카의 '변신', 이상의 '날개', 나쓰메 소세키의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 사데크 헤다야트의 '눈먼 부엉이', 파트릭 모디아노의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비둘기', 폴 오스터의 '뉴욕 3부작',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 허먼 멜빌의 '모비 딕', 찰스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 오스카 와일드의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조르주 페렉의 '인생 사용법', 제인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의 '분신',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장 지오노의 '나무를 심은 사람', 장 폴 사르트르의 '구토',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박상륭의 '죽음의 한 연구', 페터 한트케의 '어느 작가의 오후',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말테의 수기', 모니카 마론의 '슬픈 짐승'이 그것이다. 어떤가. 이것들 중 읽어본 것도 있을 테고 어떤 것은 어디선가 한번쯤 들어보기만 한 책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누군가에 의해 첫 문장이 아름다운 소설로 뽑혀진 소설이라고 하니 왠지 구미가 당기지 않는가.

 

'그래, 이곳으로 사람들은 살기 위해 온다. 하지만 내 생각에는 이곳에 와서 죽어가는 것 같다.'로 시작되는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소설 <말테의 수기>를 작가는 이렇게 말한다.

 

"릴케는 고독한 예언자 말테의 입을 빌려 대도시의 비극을 알리는 소리 없는 외침을 이렇게 시작한다. "사람들은……이곳에 와서 죽어가는 것 같다."(9쪽) 그리고 자신의 예감을 확신하는 일화를 이어가는데, 이 암울한 시대를 각종 냄새와 갖가지 소음들로 채워놓다가 문득 정적이 흐르는 순간을 포착한다." (p.345)

 

독서의 계절 가을이다. 어느 먼 나라로 여행을 떠나듯 들뜬 마음으로 읽을 수 있는 소설 한 권이 옆에 있다는 건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그리고 그 소설의 첫 문장을 기억한다는 건 또 얼마나 짜릿한 일인가. 어느 시인의 시구처럼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이 아닐 수 없다. 나는 먼 길을 떠나는 나그네의 마음으로 이 가을에 소설을 읽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백석 지음, 백시나 엮음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05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다산 정약용의 연작시 '불역쾌재행(不亦快哉行)' 20수 중에는 다음과 같은 시가 있다. 유난히 더웠던 지난 여름을 생각하면 유배지에서 몸도 마음도 힘들었을 정약용의 마음을 시에서 느낄 수 있을 것만 같다.

 

支離長夏因朱炎(지리장하인주염) 汁汁焦衫背汗沾(즙즙초삼배한점)

灑落風來山雨急(쇄락풍래산우급) 一時巖壑掛氷簾(일시암학괘빙렴)
不亦快哉(불역쾌재)

 

지리한 긴 여름날 폭염에 시달려서

등줄기 땀에 젖어 베적삼이 척척한데

상쾌한 바람 건듯 불어 산비가 쏟더니만

한꺼번에 벼랑 위에 얼음발이 걸렸구나.

또한 통쾌하지 아니한가. ('마음을 비우는 지혜' 중에서, 정민)

 

시라는 게 묘한 구석이 있어서 반복해서 읽다 보면 한 폭의 그림이 떠오르기도 하고 아름다운 곡조의 노래가 되기도 한다. 행복한 순간으로 '뿅' 하고 순간이동을 한다고나 할까. 시에는 그런 힘이 있다. 예컨대 김춘수의 시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을 읽어보아도 그렇지 않은가. 샤갈의 유명한 그림 '나와 마을'을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할지라도 왠지 친근한 느낌이 들고 꿈 속에서 보았던 어느 마을이 떠오르는 것이다. '쥐똥만한 겨울열매들은 다시 올리브빛으로 물이 들고 밤에 아낙들은 그해의 가장 아름다운 불을 아궁이에 지피는 풍경' 말이다.

 

오늘 아침 집에서 백석의 시집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를 들고 나왔다. 한 손에 시집을 그러쥔다는 건 가을을 온전히 사랑한다는 뜻이다. 남들은 어떤지 몰라도 내게는 그렇다. 말하자면 나는 사계절 중 가을에 주로 시를 읽는다는 얘기가 된다. 아침에 집을 나서려는데 옷깃을 파고 드는 소슬한 바람에 불현듯 백석의 시가 생각났던 것이다.

 

 

南新義州 柳洞 朴時逢方(남신의주 유동 박시봉방)

.................(생략)

 

나는 내 슬픔이며 어리석음이며를 소처럼 연하여 쌔김질하는 것이었다

내 가슴이 꽉 메어 올 적이며,

내 눈에 뜨거운 것이 핑 괴일적이며,

또 내 스스로 화끈 낯이 붉도록 부끄러울 적이며,

나는 내 슬픔과 어리석음에 눌리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잠시 뒤에 나는 고개를 들어,

허연 문창을 바라보든가 또 눈을 떠서 높은 천정을 쳐다 보는 것인데,

이 때 나는 내 뜻이며 힘으로, 나를 이끌어 가는 것이 힘든 일인 것을 생각하고,

이것들보다 더 크고, 높은 것이 있어서, 나를 마음대로 굴려 가는 것을 생각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여 여러날이 지나는 동안에,

내 어지러운 마음에는 슬픔이며, 한탄이며, 가라앉을 것은 차츰 앙금이 되어 가라앉고,

외로운 생각만이 드는 때쯤 해서는,

더러 나줏손에 쌀랑쌀랑 싸락눈이 와서 문창을 치기도 하는 때도 있는데,

....................(생략)

 

평론가 김현은 백석의 시를 기려 '한국 시가 낳은 가장 아름다운 시'라고 평하였다. 그도 그럴 것이 백석의 시는 그가 쓴 다른 어떤 시들을 읽어보아도 시에서 그려지는 다양한 풍경과 이미지들이 저절로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가 쓴 언어는 마치 붓의 터치인 양, 짤그랑거리는 소리의 재현인 양 읽혀진다. 그런 까닭에 나 같이 시에는 문외한인 사람도 시 한 수에 울고 웃을 수 있었던 것이다. 샤갈이 그린 행복한 풍경 속에 온전히 머물렀던 것처럼.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 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를 사랑은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아 소주를 마신다

소주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와 나타샤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 당나귀를 타고

시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은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 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백석의 이 시를 읽으면 나도 따라 거나하게 취하여 아름다운 나타샤를 그리워하고, 그리움에 술기운이 깊어지고, 어느 순간 눈길을 뚫고 달려 온 이국의 소녀가 내 귀에 대고 고조곤히 이야기할 것만 같다. '에잇,더러운 세상' 나타샤와 나는 흰 당나귀 등에 올라 앉아 세상을 향해 욕이라도 한 바가지 퍼붓고는 순백의 눈이 쌓인 마을을 향해 출발하는 것이다. 우리가 도착한 눈이 내린 마을에는 어쩌면 행복을 그리는 화가 샤갈도, 샤갈을 노래한 시인 김춘수도 먼저 와서 우리를 반갑게 맞을런지도 모르겠다. 내가 한 편의 시를 읽는 동안에는, 백석의 시집을 손에서 놓지 않는 한 이 가을에도 소복소복 흰 눈이 내리고 방울소리 울리며 꿈길을 향해 걸어가는 당나귀 발자욱 소리가 자박자박 들릴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잠시 제쳐두었던 지진에 대한 공포를 다시 일깨운 건 어젯밤 8시 33분의 여진이었다. 따로 의미를 둘 필요는 없겠지만 8시 33분이라는 시각은 최근에 발생한 지진활동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듯 보였다. 저녁 밥상을 물린 후 느긋하게 쉬면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을 그 시간에 지진은 마치 장난기라도 발동한 듯 '흠, 다들 아무것도 모른 채 널부러져 있군. 심심한데 어디 한 번 사람들이나 놀래켜줘 볼까.' 하고 잊을 만하면 한번씩 지축을 흔들어놓는 것이다. 그때마다 무방비로 있던 사람들은 화들짝 놀라 집을 뛰쳐나갔고 아파트 계단을 내려가다 말고 '이거 해도 너무 하는 것 아냐?'하는 표정으로 화풀이 대상을 찾곤 하였다. 그렇다고 이미 벌어진 지진이 미안하다고 사과의 말이라도 한마디 던질 리 만무하지만 말이다.

 

무방비의 사람들을 놀래키는 건 비단 지진뿐만은 아니었다. 때로는 북한이, 때로는 일본이, 때로는 미국이 '서프라이즈~~!!'하면서 느끼한 표정으로 국민들의 심기를 긁어놓기는 하지만 그건 그야말로 가끔일 뿐이고, 우리나라 정치권은 시도 때도 없이 '서프라이즈'를 연출하는 통에 당하는 국민들은 이제 식상하다 못해 지겨운 느낌마저 드는 것이다. 어제 반기문 띄우기에 나선 정부 여당의 뜬금없는 행동만 하더라도 정치인들의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는 '서프라이즈'의 차원에서 벌어진 일이 아닐까 싶다.

 

'정치는 생물이'라는 말이 있다. 그 말이 맞다면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지난 10여 년을 지하세계에서 살았던 사람이나 다름없다. 말하자면 정부 여당은 저승에 있던 사람을 불러내어 이승의 사람을 다스리는 게 어떻겠느냐 묻고 있는 셈이다. 이 나라에 아무리 인재가 없기로서니 명계에 있던 사람을 국가 지도자로 삼자는 발상은 우리나라 국민들의 수준을 무시해도 너무 무시한 게 아닌가 싶다. 물론 '서프라이즈' 차원에서 웃자고 한 말이라는 건 알지만 정치를 하는 사람들이 그렇게나 센스가 없어서야 어디...

 

이제 대한민국 정치인들의 '서프라이즈 퍼포먼스'는 제발 그만 보았으면 좋겠다. 가뜩이나 지진으로 인한 '서프라이즈'에 지쳐가고 있는데 정치인들의 식상한 '서프라이즈'를 보면서 웃어줄 여력은 없기 때문이다. 한·일간의 위안부 협상이 타결되었다는 소식과 함께 '불가역적'이라는 생뚱맞은 단어를 들고 나왔던 외교부의 애교도 이제는 지겨운 것이다. 이 좋은 계절에 재미도 없고 감동도 없는 정치인들의 '서프라이즈'는 이제 그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불면의 등불이 너를 인도한다 - 장석주의 서재
장석주 지음 / 현암사 / 2015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명절 후유증은 비단 육체에 한정되는 것은 아니어서 어수선했던 긴 연휴를 보내고 나면 육체의 휴식과 더불어 정신의 안정을 갈구하게 된다. 예고도 없이 불쑥 끼어들었던 어떤 상념들이 머릿속의 여러 공간을 가득 채운 까닭에 나는 도무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이다. 따라서 명절이 지나고 나면 세 살배기 꼬마들이 저질러 놓은 난장판의 집안을 정리하듯, 나는 내 머릿속의 상념과 어질러진 마음을 차분히 정리하여 필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들을 분류하고 잊어야 할 것과 오래도록 잊지 않아야 할 것들을 따로 간추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진다. 말하자면 그것은 머릿속 대청소인 셈인데, 방청소에 빗자루와 걸레가 필요한 것처럼 머릿속 청소에도 도구가 필요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이치가 아닐까 싶다. 흩어진 생각을 갈무리하고 일상으로의 복귀를 돕는 데에는 인문학 서적만 한 게 없다는 한결같은 생각을 나는 지금껏 신줏단지처럼 믿어왔다.

 

어제부터 읽기 시작한 장석주의 <불면의 등불이 너를 인도한다>는 자신의 내면을 찬찬히 살피고 다시 일상으로 복귀하기 위해 내가 이번 명절에 선택한 책이었다. 시인이자 비평가인 동시에 다독가로도 널리 알려진 장석주 작가의 글은 공들여 빗어 넘긴 여인네 머릿결처럼 단아하고 정갈하였다. 사계절 동안 책을 읽고 자신이 읽었던 책과 함께 빚어낸 사색의 향기는 독자들로 하여금 깊이 빠져들게 한다. 혹여 다치거나 상처받았을지도 모르는 나의 마음을 조용히 위무하는 듯도 하였다.

 

"대개의 삶이란 결핍이고 누추함 자체인데, 그 결핍을 채우고 누추함을 벗으려는 욕망 때문에 책을 읽는다. 이때 욕망은 나로서 동일성을 유지하고 존속하려는 본성과 더 나은 '나'로 충만해지려는 열망의 합이다. 앎, 지적인 발견, 창조적 생각들의 발현을 위해 책을 읽을 때, 책은 숨은 욕망들을 비춰주고 성찰적 사유로 이끈다. 어떤 책들은 살아 있는 기쁨과 행복을 고스란히 되돌려준다. 책을 읽는 일은 지복이다." (p.451)

 

'글쎄, 그럴까?' 하는 의문은 책의 어느 문장에나 꼬리표처럼 따라 붙었다. 사유라기보다 건강검진에서 간과하고 빼놓은 영혼의 검진을 다시 하는 듯 나는 스스로에게 하나하나 묻고 대답한다. 작가가 읽었던 책은 문학, 철학, 미술, 영화, 건축, 여행, 종교, 경제, 야구, 축구 등 분야가 너무나 다양하여 내 어설픈 지식의 발걸음으로는 감히 따라갈 엄두를 내기 어렵지만 나는 한 발 한 발 조심스레 걸음을 떼고 그때마다 "휴우!" 하고 조용히 가슴을 쓸어내린다. 억척스러운 현실은 인간을 얼마나 메마르고 혼탁하게 하는지...

 

"깨어 있는 것은 불면을 앓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들을 감싼 밤이다. 그 밤에 불면을 앓는 사람들은 벌거숭이가 되어 표류한다. 움직이지도 않은 채 어디론가 흘러가는데, 흘러가면서 존재의 에너지를 방전시킨다. 마침내 불면은 우리의 의식을 거의 찢어놓는다. 불면이 남기는 것은 육체라는 고독의 응고, 그 속에 깃든 정신의 피폐함이다." (p.153)

 

작가는 책에서 130여 권의 책을 읽고 300권에 이르는 책을 언급한다. 작가에게 책은 그야말로 사유의 통로인 동시에 삶의 귀착점인 셈이다. 그러나 나에게 있어 책은 어수선한 생각들을 거듬거듬 주워 모으는 도구이자 흐느적거리는 몸과 마음을 바로 세우는 지주대로서의 역할만 겨우 할 뿐 우리가 사는 세상 너머의 세상, 말하자면 고차원의 다른 세상으로 통하는 출입증으로서의 역할은 하지 못한다. 내가 작가를 부러워하는 까닭도 그래서이다.

 

"나는 양식을 구하듯 책을 구해다 읽고 문장 몇 줄씩을 끼적이며. 음악, 바다, 지평성, 아삭하는 소리로 씹히는 사과들, 이빨 아래 물컹하게 으깨지는 붉은 토마토들, 풍부한 즙이 턱 밑으로 흘러내리는 오렌지들, 고요히 대지를 두드리는 봄비, 해마다 돌아오는 여름의 눈부심, 신록이 주는 기쁨과 위안, 내 안의 단단한 얼음마저 녹이는 사랑하는 이들의 미소들 속에서 살아가는 데 불가결한 수액과 꿀을 구하며 '고독의 상상계' 속에 한참 더 머물 참이다." (p.348~p.349)

 

우리가 한가위 보름달을 보며 소원을 비는 까닭은 모름지기 자신이 가는 길을 잃지 않기 위해서일 터, 살면서 가장 소원해야 할 일은 언제든 자신이 가는 길을 훤히 내다보는 일일 것이다. 명절에 듣는 가슴 아픈 소식들, 이를테면 '안골 살던 김아무개가 죽었다더라.', '샘말 살던 오아무개가 아프다더라'하는 말에도 마음이 심란하고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 걸 보면 나는 여전히 미망과 고뇌 속에서 헤매고 있음이다. 마음 속에서 불면의 등불 하나 밝히지 못한 까닭이다. 소원을 빌기 전에 마음 속 사유의 밭을 먼저 일굴 일이거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무중력 증후군 - 제13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윤고은 지음 / 한겨레출판 / 2008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어떤 질문의 답이 사실인지 아닌지가 중요한 게 아니예요. 뉴스가 되느냐 덜 되느냐. 그뿐이죠."    (p.131)

 

비교적 최근에 있었던 일이긴 하지만 기억할런지 모르겠다. 유부남인 어느 유명 감독과 여배우와의 스캔들 말이다. 그게 어떤 계기로 프라임 뉴스에 올랐고 세간에 화제가 되었는지 나는 도대체 아직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지만, 뉴스를 본 사람들은 마치 대한민국에서 벌어질 수 있는 중대한 사건이라도 되는 양 만나는 사람들마다 입에 침을 튀겨 가며 소식을 전하곤 했었다. 따지고 보면 그 일은 뉴스의 중심에 섰던 당사자들에겐 지극히 개인적인 사생활일 뿐이고, 유부남과 처녀의 사랑 이야기는 우리 주변에서도 흔하게 벌어지는 일인데 말이다. 다만 그들이 일반인과 조금 다른 게 있다면 사건이 있기 전부터 그들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졌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물론 도덕적으로나 법적으로 그들의 행위가 옳았다는 건 아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며칠씩이나 TV 뉴스에 오르내릴 만큼 중대한 범죄였던가? 하는 데에는 머리를 갸웃거리게 되지만 말이다. 그런 걸 보면 뉴스거리가 차고 넘쳐나는 요즘과 같은 시대에 우리의 관심을 끌고 사람들의 기억 속에 오래도록 남는 사건은 모름지기 따로 있는 듯하다. 어쩌면 그것은 사건의 중대성보다는 관심의 지속성이나 SNS를 통한 파급력에 달려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윤고은의 <무중력 증후군>은 위와 같은 세태를 신랄하게 풍자한 소설이다. 작가는 어느 인터뷰에서 자신도 우리들처럼 뉴스에 몰입하고, 이슈에 열광한다면서 "냄비근성은 비단 한국인만의 얘기도 아니고 그냥 본능적인 우리 모습인 것 같다"고 말하였다. 다만 그녀는 "뉴스를 소비하거나 이슈에 휩쓸리면서도 개개인이 그것을 의식했으면 한다"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물론 사건은 늘 일어나지만, 이 주기라는 것은 사회를 뒤흔들 만한 '이슈'가 됨을 말한다. 이슈가 되려면 적어도 일주일 이상은 신문에 실려야 한다. 일주일 내내 신문 1면을 차지할 수 있다면 명예의 전당에 들어야 한다. 50일 이상 그것이 지속된다면 타임캡슐에 넣을 만한데, 아직까지 그런 사건은 없었다."    (p.201~p.202)

 

소설의 주인공은 스물다섯 살의 청년 '노시보'이다. 전문대학을 졸업한 후 여러 회사를 전전하다가 지금은 부동산회사에서 전화로 땅을 파는 일을 하고 있다. 일면식도 없는 전화 상대와 이야기를 이어가기 위해 그는 이슈가 될 만한 뉴스를 끝없이 검색하고 소비한다. 그러던 어느 날 '제2의 달'이 출현했다는 뉴스를 접하게 된다. 육안으로 확인할 수도 없을 정도로 작은 두 번째 달에 사람들은 모두 흥분하였고, 모든 이슈는 달에 집중되었다. 뿐만 아니라 '제2의 달'이 출현함으로써 나타나는 사회적 변화나 여러 사건 또한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면서 확대 재생산되었다. 게다가 자신이 중력을 거부하는 '무중력자'임을 밝히는 사람들이 하나둘 늘어난 것도 '제2의 달'의 출현과 무관치 않았다.

 

그러나 이런 것도 잠시 세 번째, 네 번째 달이 일정한 주기로 생겨나면서 그동안 급속도로 퍼지던 '무중력 열풍'은 빠른 속도로 식어만 갔다. 이와 같은 달의 '번식'은 세상 사람들의 삶을 크게 변화시켰던 게 사실이어서 고시공부를 하던 '시보'의 형이 요리사를 꿈꾸게 되고, 전업주부였던 '시보'의 엄마는 달을 구경하러 간다며 가출을 하였고, 집안일에는 일체 관심조차 두지 않았던 아버지도 점차 가출하기 전의 엄마의 모습으로 변해갔다. 뿐만 아니었다. 돈 버는 일에는 도통 관심이 없고 오직 소설가를 꿈꾸며 게으른 생활을 이어오던 '시보'의 친구 '구보'도 어느 날 대학 선배와 함께 창업을 하기에 이른다.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달과 우주 관련 사업에 집중했고, 가출을 했다 돌아온 '시보'의 엄마 또한 우주 분위기로 인테리어를 한 미용실을 차리기에 이르렀다. '시보'네 회사도 달나라 납골당을 분양하면서 이슈에 편승했다. 그러나 보름을 주기로 달이 늘어나자 달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익숙함에서 오는 권태로 빠르게 변해갔다.

 

"난무하는 달의 이미지 속에서 나는 종종 달이 하나뿐이던 시절을 그리워했다. 달이 하나뿐이던 시절에는 모든 지구인들이 하나의 달을 바라봤을 텐데. 지금은 북반구와 남반구의 달이 다르며, 동쪽과 서쪽의 달이 다르고, 위층과 아래층의 달이 다르다."    (p.229)

 

작가가 소설에서 말하고 싶었던 것처럼 현대인이 겪는 여러 증후군들은 어쩌면 우리가 만들어 낸 상상력의 결과인지도 모른다. 종편에 출연하는 쇼 닥터를 숙주 삼아 있지도 않은 여러 질병들을 우리는 오직 상상 속에서 그것들을 만들어 내고, 사실 관계를 규명할 것도 없이 여러 뉴스에서 퍼날라지는 동안 별 필요도 없는 약들을 처방받아 이유도 모른 채 복용하는지도 모른다. 현실 속에 가상을 구현하는 증강현실의 '포켓몬 고'처럼 우리는 어쩌면 있지도 않은 가상을 현실에서 쫓고 있지나 않은가 하는 의심이 든다. 소설 속의 분화된 달이 우주 쓰레기로 밝혀지는 것처럼 우리가 앓는 여러 증후군들도 언젠가 일상의 흔한 일들로 말해질 날이 결국 오고야 말 것이다. 이슈는 출처의 사실 규명이 중요한 게 아니라 이슈화 시키는 사람들에 따라 그 중요도가 달라지는 것이다. 국정원의 직원이 사실도 아닌 기사를 끝없이 리트윗 한 것도 다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다음 대선에서 대선 후보자로 나선 누군가가 또 하나의 달을 만들어냈다고 하더라도 조금 허황된 말이지만 일단 믿고 보자는 식의 무뇌아는 되지 말기를...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