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견을 갖는다는 건 좋든 싫든 자신의 의견과 대치되는 어떤 대상과 싸울 준비가 되었다는 걸 의미하는지도 모른다. 세상은 생각보다 넓고, 내 의견과 다른 사람은 언제든 쉽게 만날 수 있을 테니까. 어렸을 때는 나도 다른 사람과 구별되는 나만의 확실한 의견을 갖는다는 게 그렇게 멋있어 보일 수가 없었다. 마치 세상 사람이 다 틀리고 내 생각만 옳은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더러 했었고 말이다. 그러나 자신의 의견을 갖는다는 건 생각만큼 행복한 일도 아니요, 힘있는 누군가에 의해 쉽게 굴복되기도 하고, 의견이 다르다는 시답잖은 이유로 가까운 사람들과 결별하기도 하고, 별것도 아닌 자신의 의견을 지키기 위해 과도한 에너지를 쓰는가 하면, 그렇게 힘든 하루를 보낸 날 저녁이면 꼭 괜한 짓을 했다는 후회가 목까지 차오른다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배울 수 있었다.

 

내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작품에 빠져들었던 것도 아마 그런 사실을 어렴풋이 깨닫기 시작한 시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대부분 외아들이고, 주변에 가깝게 지내는 사람도 많지 않고, 조용한 성격에 음악을 좋아하고, 무리에 잘 섞이지도 못하지만 그렇게 하려는 적극적인 의지도 없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런 성격의 사람을 좋아하는 것일까? 아마 아닐 것이다. 다만 동경할 뿐이다. 동경이란 내가 할 수 없는 어떤 일에 대한 진한 향수일 테니까. 그런 캐릭터를 좋아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주인공이 세상과 다투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 그(또는 그녀)는 자신만의 의견을 갖지 않는 약한 존재처럼 읽힌다. 소설에 빠져든 독자는 주인공에 대한 동정심으로 어찌할 줄 모른다. 어쩌면 그것은 인간에 대한 애정이자 연민의 마음일지도 모른다.

 

아침에 맑았던 하늘은 부쩍 어두워졌다. 20대 국회의 첫번째 국정감사가 한창인 요즘, 국감의 스타로 김제동이 등장한 걸 보면 국회의원들도 어지간히 할 일이 없는 모양이다. 아니면 사는 게 재미없거나. 또는 현 정부가 감추어야 할 게 너무 많거나. 태풍 차바가 휩쓸고 간 남해안에는 오늘 또 큰 비가 내린다는데 할 일 없는 사람들은 뭐 재미있는 일 좀 없을까 연일 그 궁리뿐이다. 그들에게 삶은 그저 하나의 놀이이거나 다시 없는 유희로 비칠 것이다. 발을 동동 구르며 수해 복구에 매달리는 사람들은 오늘 또 얼마나 하늘을 원망할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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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사신 - 20세기의 악몽과 온몸으로 싸운 화가들
서경식 지음, 김석희 옮김 / 창비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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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일이었던가요? 위안부 피해자에게 사죄 편지를 보낼 의향이 있느냐는 일본 중의원 예산위원회에서 나온 질문에 아베 총리가 "털끝만큼도 생각하고 있지 않다."고 일축했던 게 말입니다. 과거 전범국의 수장인 그가 피해국에 대해 취하는 그 오만방자하고 무례한 태도에서 우리는 분노를 넘어 어떤 치욕적인 기분이 들었던 것입니다.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그런 심정이었겠지요. 그러나 그게 다였습니다. 우리나라 외교부는 정례 브리핑에서 "구체적인 표현에 대해 언급을 자제하고자 한다."고 하면서 서둘러 봉합하려는 듯한 자세를 취했고, 국가를 대표하는 외교부의 저자세에 우리는 다시 한 번 참담한 모욕을 경험해야만 했습니다. 어쩌면 그것은 아베에게서 받은 치욕보다 더한 수모로 우리에게 다가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식민지 시대의 역사는 이미 1945년에 종식된, 오직 우리의 과거 역사에서만 등장하는 그런 게 아니었다는 걸 새삼 느끼게 되는 요즘입니다. 그것은 21세기의 대한민국에 여전히 살아 있는 역사이며, 현재 진행형의 치욕이라는 걸 우리는 현실에서 목도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재일교포 2세로 평생을 떠돌며 디아스포라의 삶을 살고 있는 서경식 작가를 생각할 때 우리가 느끼는 수치와 모멸감은 오히려 감정의 사치쯤으로 비치는 건 아닐지...

 

"나에게 예술은 그 숨막히는 지하실에 뚫린 작은 창문 같은 것이었다. 이제 와서는 그렇게 생각한다. 작은 창문은 벽 높은 곳에 잇어서 바깥 경치는 보이지 않지만, 하늘의 색깔 변화나 공기가 흐르는 기미는 느낄 수 있었다. 손은 닿지 않고, 창문으로 도망칠 수도 없지만, 그 작은 창문 덕에 살아 있을 수 있었다" (p.9~p.10)

 

서경식이라는 이라는 이름 석 자는 <나의 서양미술 순례>를 통하여 이미 국내의 독자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지만 나는 그의 이름을 떠올릴 때마다 <경계에서 춤추다>가 먼저 생각나곤 합니다. 타와다 요오꼬와 서경식 사이에 오고 간 편지를 엮은 <경계에서 춤추다>에서 그는 '재일조선인 2세라고 하는 것은 태어나면서 고향을 잃어버린 존재'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돌아가고 싶었던 모국으로서의 대한민국이 그의 두 분 형(서승, 서준식)을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구속하여 각각 19년과 17년의 옥살이를 살게 하지만 않았어도 그는 지금쯤 대한민국의 평범한 일원으로 살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이 계기가 되어 <나의 서양미술 순례>와 오늘 내가 읽었던 <청춘의 사신>이 책으로 나올 수 있었다는 걸 생각하면 운명이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입니다.

 

"형님들이 모국인 한국에서 유학생활을 하다가 구속된 것은 1971년. 박정희 군사정권 때였다. 당시 대학 3학년이었던 나는 대학을 졸업하면 형님들처럼 일본 사회를 떠나 한국으로 건너가서 뭔가 진실한 삶을 살아보겠다는 꿈을 키우고 있었다. 그런데 이 사건 때문에 그 철없고 막연한 인생설계가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그렇다고 해서 두 형님이 옥중에서 죽을 지경에 이르러 있고 자주 고문에 시달리고 있는데, 마치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회사에 취직하거나 대학원에 진학하거나 구체적인 '생활' 같은 것을 시작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p.9)

 

<청춘의 사신>은 '20세기 전반의 회화예술에 관한 에세이 서른한 꼭지를 한권에 모은' 책입니다. 작가는 이 책에서 세계 대전과 대량 학살로 기억되는 20세기 전반이 그 시대를 살았던 화가들에게 어떤 식으로 투영되었는지 살펴보고 있습니다. 에드바르드 뭉크를 비롯하여 에곤 실레, 오토 딕스, 아메데오 모딜리아니, 파블로 피카소 등 20세기 전반의 화가들이 겪었을 고통과 시대의 불안이 어떻게 예술로 표출되는지, 인간에게 과연 예술은 무엇인지 작가는 묻고 있습니다.

 

"에곤 실레가 그린 것은 청춘의 욕망과 좌절을 애처롭게 비추어 낸 20세기의 '죽음과 소녀'다. 여기서는 사신이 아니라 오히려 소녀가 상대를 놓지 않으려고 찰싹 매달려 있는 듯이 보인다. 사신은 실레 자신의 자화상이고, 소녀는 모델이자 연인이었던 발리 노이찔(Wally Neuzil)이다." (p.76)

 

작가는 어느 책에선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국가가 폭력을 소유하고 국민을 죽음으로 내몰아간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인간 자체도 자신의 부조리한 삶의 의미를 '신'이나 '국가'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고 하는 약점이 있다"고 말이지요. 이러한 약점을 극복하지 않으면 국가에 의한 '죽음'의 수탈을 끝낸다는 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고 그는 말했습니다. 남과 북이 강대강으로 부딪치는 작금의 현실은 국가에 의한 '죽음'의 수탈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에곤 실레가 그렸던 '죽음과 소녀'의 소녀처럼 '죽음'을 상징하는 사신을 마치 연인인 양 꼭 껴안은 채 지금 이 순간을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베의 오만방자한 태도를 용인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단순히 민족의 수치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식민지 역사를 되풀이하는 단초가 될지 누가 알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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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정부가 대한민국 국민을 위해 이룩한 업적은 무수히 많지만(못 믿겠다는 듯 코웃음을 치시는 분이 더러 있군요. 어떻게 알았냐구요? 척 보면 다 앱니다. 아무튼 처음부터 그렇게 냉소적인 태도로 대할 것까지는 없습니다. 저는 오직 사실만을 말할 테니까요.) 그 중 제가 생각하기에 가장 큰 성과라고 한다면 대한민국 국민 전체를 정치인화 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먼저 현 정부의 굵직굵직한 업적을 나열하자면 이렇습니다. 국가 재난 상황에서도 정부가 뒤로 물러나 아무일도 하지 않음으로써 국민들 스스로 각자도생을 꾀하게 하고 그것을 통하여 타인에게 의지하지 않는 강인한 정신력과 독립심을 고취시켰다는 점, 매년 청년 실업률을 높임으로써 청년 백수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마음 편히 놀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고 직업이 없는 청년을 다소 비하하는 듯한 뉘앙스의 '청년 백수'라는 단어를 대신하여 취준생이나 공시생 등을 사용함으로써 언어 순화에 기여하였던 점, 자신의 출신 성분(금수저, 흙수저 등)에 따라 계급을 확고히 함으로써 온 국민이 자아 정체성을 확립하도록 한 점, 어느 분야의 종사자라고 할지라도 이념에 따라 적과 동지를 구분할 수 있는 정치적 소양을 기르게 한 점 등 현 정부가 국민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노력한 업적은 이루 나열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업적 가운데 정부는 그동안 이념적으로 중립을 지켰던 분야, 이를테면 의학이나 과학 등에서도 이념화를 꾸준히 추진하여 현재는 전 국민의 정치인화를 완성단계까지 끌어 올렸으며 이러한 결과는 전 세계의 민주 국가에서 유례를 찾을 수 없는 대단한 성과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오죽하면 간단한 사망진단서 작성에 있어서도 철저하게 자신의 이념을 드러냄으로써 대부분의 의사가 '외인사'라고 우겨도 홀로 꿋꿋이 '병사'라고 기재하는 의사가 나타났겠습니까. 대단하지요? 그뿐 아닙니다. 역사 교과서를 국정화 함으로써 이제는 초등학생들조차 자신의 정치적 이념을 형성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예컨대 '5.16'을 군사정변으로 보는 학생이 있는가 하면 군사혁명으로 이해하는 학생도 있다는 것입니다. 불과 10여년 전만 하더라도 이런 성과는 꿈도 꿀 수 없었던 일이었기에 현 정부의 업적이 두드러지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동안 등한시되던 스포츠분야에서도 이념화는 꾸준히 진행되어 낡고 중립적인 '국민체조'가 이념화 된'늘품체조'로 산뜻하게 변하였다는 걸 빼먹을 뻔했군요.

 

태풍 차바가 대한민국을 강타했던 오늘, 정부는 역시 국민들의 독립심 고취를 위해 별 다른 일은 하지 않고 '피해를 입지 않도록 만전을 기하라'는 당부만 반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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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거서 2016-10-05 1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현 정부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업적을 남기는 능력을 발휘하는군요. 대단한 공무원들이 아닐 수 없습니다.

꼼쥐 2016-10-07 11:53   좋아요 0 | URL
말하자면 그렇지요. ㅎ
답설무흔의 경지라고나 할까, 암튼 그렇습니다.

2016-10-05 21: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0-07 11: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베어지지 않는 나무
김만옥 지음 / 나남출판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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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운명은 누군가에게 단단히 발목을 잡힌 게로구나, 생각할 때가 왕왕 있다. 말하자면 무척이나 심심한 조물주가 나도 까맣게 모르던 어떤 미래를 어느 날 갑자기 내 앞에 툭 하고 내던져 놓고는 깔깔거리며 좋아라 하는 듯한 일들이 현실에서 벌어질 때면 나는 그만 망연한 생각에 넋을 놓게 된다. 그럴라치면 일의 앞뒤를 따져 볼 요량은커녕 자포자기의 심정이 먼저 들고 마는 것이다. 얼마 전에도 나는 이른 나이에 알츠하이머 판정을 받은 친구의 소식을 전화로 전해듣고는 어찌나 정신이 없고 황망하던지 '어째서?' 하는 물음보다는 '그렇구나!'하면서 주저앉아버렸다. 나이가 들수록 그런 일은 더욱 빈번하게 벌어지고 그때마다 내 운명이 누군가에게 단단히 발목 잡혔다는 생각은 더욱 굳어져만 간다.

 

그래서인지 나는 요즘 단편소설이 좋아졌다. 장편소설과 달리 단편소설의 짧은 이야기들 중에는 평범하지 않은, 발목이 잡힌 운명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특별한 사건들이 자주 등장하기 때문이다. 물론 다 그런 건 아니지만 말이다. 나는 한때 재미있는 소설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붙들고 있고 싶어서 대하소설만 읽었던 적이 있었다. 장편소설이라고는 해도 단행본은 역시 막 재미있어지려는 찰나에 서둘러 끝이 나는 감이 없지 않아서 책을 덮고 나면 어찌나 아쉬움이 크던지 나는 처음부터 낱권이 아닌 여러 권으로 구성된 장편소설이나 대하소설만 골라 읽었던 것이다. 그러니 그 무렵의 나에게 단편소설은 눈에 들어올 리 만무했었다. 그러던 것이 최근 들어서는 장편소설이 오히려 지루한 감이 없지 않아서 여러 권의 장편소설이나 대하소설에는 숫제 손이 가지 않는 것이다.

 

엊그제 읽었던 김만옥의 소설집 <베어지지 않는 나무> 역시 단편소설집이다. 김만옥이라는 작가를 진작 알고 읽어 왔더라면 지금쯤 조금 더 진중하고 알찬 리뷰를 쓸 수 있었겠지만 나는 사실 이 책을 통하여 김만옥이라는 작가를 처음 알게 되었다. 1977년 마흔의 나이에 늦깎이 등단을 한 것이나 서울대에서 국문학을 전공한 것이나 한국전쟁과 4·19혁명을 원체험으로 간직하며 작품활동을 한 것 역시 고 박완서 작가와 겹치지만 그녀의 글은 자신의 체험에서 비롯된 날 선 문체로 인해 독자의 마음을 깊게 도려내는 듯한 강렬한 인상을 준다.

 

"부모와 같이 살 때는 부모와의 충돌로 어느 정도 완화된 후에 내게 가해지던 폭력이 전혀 마모되지 않은 채 생으로 행사되었기 때문에 훨씬 그 강도가 높아졌고 빈도 또한 잦아졌다. 공포로부터의 자유가 지옥 같은 공포로의 진입이 된 내막은 그랬다." (p.25 '회칼' 중에서)

 

1990년대 초부터 2000년대 초까지 발표된 작품들을 모아 엮은 이 책에는 '회칼'을 비롯하여 '거적때기', '한 그루 나무', 이상한 작별과 해후', 따뜻한 포옹, '저 희미한 석양빛', '아버지의 작고 검은 손금고', '돌멩이 두 개' 등 여덟 편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다. 그녀의 글에는 우리 사회의 암묵적인 묵인 속에서 일상인 양 빈번하던 가정 폭력의 실상이 낱낱이 그려지고 있다. 여자라는 이유로, 아내라는 이유로, 또는 딸이라는 이유로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적으로 가해지던 폭력의 그늘. 대학 1학년 때 아버지의 무자비한 폭력으로 인해 여자의 몸으로 팬티 한 장만 입고 동네 한 바퀴를 돌아야만 했던 아픈 기억과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던 그 기억을 먼 이국땅에서 우연히 떠올리게 된다는 줄거리의 '나무 한 그루'는 가부장적 권위를 등에 업고 무차별적으로 가해지던 가정 폭력의 전형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때 왜 끝까지 거절하지 않고 아버지의 요구를 들어드렸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어요. 죽기 살기로 대항하면 어머니를 빼낼 수 없었겠어요? 발가벗는 것보다는 그쪽이 더 쉬웠을 텐데 말이에요." (p.87 '한 그루 나무' 중에서)

 

작가의 기억은 때로 6.25 전쟁과 4·19 혁명에서 머물다가 일제시대의 아득한 기억 속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어쩌면 소설보다도 더 소설같았을 그녀의 경험들이 시간의 체에 걸러지고 마침내 남았던 커다란 기억의 알갱이들이 이 책에 씌었는지도 모른다. 누구나 머릿속에 남는 아픈 기억이 있게 마련이고 가슴으로만 썼던 혈서 한 장을 어느 순간 아무렇지도 않게 내보일 때가 있을 테니까. 가슴에 품었던 그 혈서가 이 책을 읽는 누군가의 눈물 한 방울에 섞여 붉은 생명력으로 되살아나기를 작가는 간절한 마음으로 바랐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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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실의 시간들 - 제19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최지월 지음 / 한겨레출판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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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말한다는 건 나와 관련된 대체불가의 누군가를 지금 내가 속한 이 사회로 영원히 호출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이리라. 그러므로 그 빈자리는 나의 시선에 의해 항상 비어 있거나, 비어 있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사회로부터 획득하게 된다. 적어도 내가 이 사회에 살아 있는 한은 말이다. 소설 속 '석희'도 그러했다. 어머니의 갑작스러운 죽음과 자신을 비롯하여 산 사람들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을 작가 최지월은 아주 세밀하게, 때로는 무덤덤하게 그려내고 있다. 그러므로 소설 <상실의 시간들>은 작가의 경험인 동시에 그 속에 내재된 보편성의 반영인 것이다.

 

"모든 존재엔 역사가 있다.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장소에서 이윽고 생겨나서 변화하고 소멸에 이르는 역사. 소멸한 듯 아무것도 없어 보이는 것으로부터 새로 시작되는 역사. 그러니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엄마가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과 시작되는 것에 관해." (p.82)

 

소설은 어머니의 49재에서 시작하여 100일 탈상에까지 이어지는데 그것이 끝은 아니다. '끝'에 이어서 '278일'이라는 소제목의 장이 나오고 신부전이 악화된 아버지가 병원 응급실로 실려가는 장면이 그려진다. 그리고 '304일'의 장은 이 소설의 마지막이자 진정한 '끝'일 수 있는데 작가는 소설의 말미에 이르러서는 오히려 '끝'이 아니라 '계속'으로 적고 있다. '생(生)'과 '멸(滅)'의 보편적인 순환은 계속될 수밖에 없고 인류적 관점에서 '끝'이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어머니의 죽음과 함께 남겨진 모든 부담, 말하자면 어머니의 죽음 이후 사회적 관계의 정리며, 평생을 군인으로 살면서 집안일이라곤 아무것도 모르는 아버지를 챙기는 일이며, 어머니를 기억하는 주변 이웃이며 친지를 응대하는 일 모두가, 결혼하여 호주에 정착한 언니 소희와 제약회사에 다니는 동생 은희를 대신하여, 오롯이 둘째인 석희에게 떨어진 몫이었다. 하여, 소설 속의 '나(석희)'는 어머니의 죽음과 함께 시작된 '상실의 시간들'을 아주 느린 발걸음으로 한 발 한 발 천천히 내딛게 된다. 그것은 마치 준비된 흙 반죽에서 공기를 제거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해 꾹꾹 내딛는 도공의 발걸음과 흡사하다. 게다가 당뇨로 인한 신부전을 앓고 있는 아버지를 돌보는 틈틈이 무시로 떠오르는 어머니에 대한 기억은 상실의 고통을 이겨내는 과정에서 덤처럼 주어진 벗어버릴 수 없는 짐이었다.

 

"정말 산 사람이 살아야 한다면, 죽음을 부정하고 삶을 욕망하는 걸론 부족하다. 죽음을 수용하고, 애도하고, 상실과 변화를 받아들여야 살아갈 수 있다. 사람은 자연의 섭리 속에 태어나고, 사회의 질서 속에서 인간다운 인간으로 성장한다. 자연의 섭리에 따라 몸이 마치면, 사회의 질서에 따라 그 정신을 쉬게 해야 한다. 나는 미래로 가기 위해서, 살아가기 위해서, 죽은 엄마를 죽여야 했다. 비이성적이고 불합리한 기분이라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돌이킬 수 없는 죄에 가담했다는 끔찍한 기분이 사라지질 않는다." (p.72)

 

20대에 엄마를 만나 부부의 연을 맺고 43년을 살았던 아버지, 33년을 몸담은 직장에서 은퇴한 아버지는 이제 더이상 군인도 아니고, 가장의 역할도 끝이 났고, 아내마저 잃어 남편도 아니게 되었다. 소설 속의 '나'는 '엄마의 죽음은 아버지에게 닥쳐온 자신의 소멸, 죽음의 서장'이라고 인식한다. 애써 담담한 척 괜찮다고 말하는 아버지를 돌보기 위해 '나'는 서울에서 아버지가 사는 원주를 수시로 오가게 된다. 그것은 어머니의 부재로 인해 한층 느슨해진 관계의 틈을 메워야만 하는 산 자의 의무인지도 몰랐다.

 

언니와 동생 사이에서 누구의 지원도 받지 못한 채 치이면서 성장했던 '나(석희)'의 억울함은 엄마의 죽음 이후에도 고스란히 따라붙었다. 슬픔마저 독점하려 했던 동생 은희와 아내로서 43년을 봉사했던 어머니의 죽음을 대수롭지 않은 일인 듯 치부하는 아버지의 태도, 화장을 하겠다는 가족의 의사를 무시한 채 죄인인 양 몰아붙이는 교회 사람들과 친척들. 한 사람의 부재로 인한 산 사람들간의 충돌이 '나(석희)'는 불편하다.

 

'나(석희)'는 엄마와 얽히고 설켰던 많은 일들이 스쳐지나간다. 공부를 잘 하고 재주가 많았던 학창시절 하며, 그럼에도 자신의 주관이 뚜렷하여 선생님을 비롯한 주변의 어른들과 자주 부딪혔던 일들이며. 집안 형편과 시대적 변화가 맞물려 원주에서 서울로 대학 진학을 했던 일들. 그런 와중에도 아버지의 존재는 없었거나 있었다 하더라도 방관자처럼 미미한 것이었다. 그랬던 아버지를 엄마가 죽고 난 후 '나(석희)는 100일 탈상까지만 아버지를 돌보겠노라 결심했던 것이다. 일주일에 한 번 도우미 아줌마를 부르고, 식기 세척기를 사 드리고, 반찬을 배달시키는 일은 순전히 혼자 남았을 때를 대비시키는 준비 작업이었다. 그럼에도 언니(소희)와 동생 은희는 적적해 할 아버지 생각에 '내'가 아버지 곁에 있어줬으면 하는 속내를 감추지 않는다.

 

"삶을 지속한다는 건 끊임없이 낯설어지고, 새로워지고, 고독해지는 일이다. 형제도 자라서 타인이 되고, 타인이 만나서 가족이 되고, 그 가족은 다시 서로를 헤아리지 못하는 타인으로 변해 헤어진다. 만난 사람은 헤어진다. 40년이나 알아온 엄마와 나도 이제 헤어졌다. 이별만이 인생이다." (p.269)

 

가까운 사람의 죽음은 산 사람들에겐 미처 적응하지 못한 새로운 삶의 시작인지도 모른다. 모든 게 어색하고 힘들다. 그러나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일 외에는 달리 선택의 여지도 없다. 그러므로 상실의 시간이란 내가 선택하지 않은 새로운 삶을 강제하는 일인 동시에 그 삶에 적응하는 기간인 셈이다. 대학에 입학할 때처럼 예행연습이나 오리엔테이션이라도 있으면 좀 좋으랴. 최지월 작가는 자신의 경험을 소설에 그대로 옮겨놓은 듯 그 낯설고도 힘든 시간을 매우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예순다섯 해를 살고 떠났던 자신의 어머니를 훌훌 털어내려는 듯, 어머니가 없는 새로운 삶에 이제는 적응해야겠다 결심이라도 하려는 듯 시시콜콜한 기억들을 소설의 곳곳에 투영한다. 작가는 어쩌면 무디어가는 자신의 기억을 잊지 않기 위해 이 한 편의 소설이 필요했는지도 모른다. 잊혀짐은 언제나 훈련이 필요한 까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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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프리쿠키 2016-10-02 15: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실에 따른 슬픔, 무거움, 죄책감,
그리움이 항상 일상에 배어있어요.
부모님의 마음은
부모가 되어 봐야 아는 것처럼
상실의 고통은
부모님을 보내고 나서야
비로소 느끼는 고통인 것 같아요.
막연한 상상하곤 천지차이인듯 합니다.
엘리자베스 퀴블러의 <인생수업>을 읽고
뜨거운 눈물을 흘려봐서 이 책을 읽을
용기가 나지 않네요ㅠ.ㅠ

꼼쥐 2016-10-04 17:27   좋아요 1 | URL
저도 엘리자베스 퀴블러의 <인생수업>을 제 손 가까운 곳에 두고 이따금 빼서 읽곤 합니다. 상실의 고통은 누구나 겪는 일이지만 그 과정을 잘 극복하는 것도 스스로의 몫인 듯싶습니다. 마주하고 싶지 않은 일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