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나긴 이별 레이먼드 챈들러 선집 6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박현주 옮김 / 북하우스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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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우리는 뭐가 그리 바쁜지 소중하게 간직되어야 할 기억들조차 되는 대로 마구 구겨넣게 된다. 두 번 다시 떠올리지 않을 것처럼 말이다. 바쁠 때는 그렇다 할지라도 오늘처럼 여유가 있는 어느 날 그런 기억들을 하나하나 끄집어내어 반듯하게 펴고 온전히 기억할 수만 있다면야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마저도 단지 호사로만 여겨질 뿐 그때그때 떠오르는 어떤 것들은 그저 가벼운 미소를 띠며 바라보게 된다. 소리도 없이 비가 내렸고, 비가 그쳤던 간간이 바람이 불었고, 약간의 우울을 선사하듯 하늘은 종일 흐려 있었다. 오늘과 같은 날씨는 계절이 깊어가는 가벼운 떨림일 수도 있고, 과거로의 퇴행과 앞으로의 전진 사이에서 벌어지는 작은 실랑이일 수도 있었다. 가을비는 왠지 모르게 쓸쓸한 느낌이 든다. 그래서인지 한동안 잊고 지내던 기억들을 한꺼번에 끄집어내어 사람 마음을 흔들어 놓기도 한다. 그러나 하나 분명한 것은 사람들 모두가 나날이 정이 깊어가는 걸 보면 가을도 따라서 깊어간다는 사실이었다. 누가 뭐래도 가을은 정이 깊어지는 계절이니까.

 

나는 오늘 레이먼드 챈들러의 소설 <기나긴 이별>을 읽었다. 가을비가 내리는 안온한 풍경 속에서 1953년 당시의 미국 시대상을 상상한다는 건 어려운 일이었지만 소설에서 챈들러가 묘사하는 동네 곳곳의 분위기는 그의 매력적인 문체와 적절한 사색이 결부되어 시종 읽는 이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래서인지 챈들러의 소설은 추리소설이라는 느낌보다는 오히려 주인공 필립 말로의 인생사를 조망한 감동적인 소설로 읽혔다.

 

"아무 느낌도 없다는 말은 정확히 맞았다. 나는 별들 사이의 공간처럼 텅 비었고 공허했다. 집에 도착하자 나는 독한 술을 섞어서는 거실의 열린 창가에 서서 한 모금씩 마시며 로렐캐년 대로 위에서 차들이 흘러가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대로가 끝나 있는 곳에서 이어지는 언덕 너머에 걸려 있는 성난 대도시의 불빛을 바라보았다." (p.452)

 

내가 좋아하는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어느 인터뷰에서 레이먼드 챈들러의 소설 <기나긴 이별>을 열두 번이나 읽었다고 고백했다. 그도 그럴 것이 챈들러는 빠른 전개와 독특한 소재를 바탕으로 단순히 이야기 중심의 추리소설을 쓰는 일본의 추리소설업계와 모든 방면에서 뛰어난 한 사람의 영웅을 소설에 등장시킴으로써 독자들로 하여금 시종일관 주인공의 천재적인 추리 능력에 감탄하게 만드는 유럽의 추리소설업계와는 전혀 다른, 자신만의 독특한 소설을 선보였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는 문학적 매력과 추리소설의 긴박함을 한 권의 소설에서 동시에 맛볼 수 있도록 하는 새로운 작품을 선보였던 셈이다.

 

"알코올은 사랑과 같은 거야. 첫 키스는 마법 같고 두번째는 친밀감을 주지만 세번째는 지겨워지거든. 그 다음에는 그저 여자의 옷을 벗기는 거지." "사랑이 그렇게 형편없는 건가?" 나는 물었다. '격조 높은 흥분을 자아내긴 하지만 불순한 감정이지. 미학적 관점에서는 그렇다는 거야. 나는 섹스를 비웃는 것은 아니네. 필수적이기도 하고, 추하게 볼 필요도 없는 것이지. 그렇지만 항상 잘 관리해야 할 필요가 있어. 섹스를 매혹적인 대상으로 유지하기란 십억 달러짜리 산업에서 일 센트까지 맞아떨어지도록 하는 것과 마찬가지지." (p.41)

 

<기나긴 이별>의 구성은 사실 단순하다 못해 다소 지루한 느낌마저 들게 하지만 필립 말로를 비롯한 각각의 등장인물들이 아무렇지도 않은 듯 툭툭 내뱉는 대사 한 마디 한 마디는 어느 인문학 서적의 경구 못지 않게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지게 만들고 그런 대사가 끝도 없이 이어지는 까닭에 독자는 손에서 책을 내려놓지 못한다. 그러므로 독자는 결국 600페이지가 넘는 그의 소설을 지루한 줄 모르고 읽어내는 것이다.

 

"하워드, 인생의 비극은 아름다운 것들이 젊어서 죽는다는 데 있지 않아요. 다만 아름다운 것들이 늙고 추잡해지는 데 있는 것이죠." (p.545 자살을 한 아일린 웨이드가 유서에 남긴 말)

 

"법은 정의가 아니오. 아주 불완전한 메커니즘이지. 정확히 맞는 단추를 누르거나 운이 좋다면 대답으로 정의가 나타날 수도 있소. 하지만 모든 법이 의도하고 있는 것이라고는 목적에 이르는 절차일 뿐이지." (p.96 변호사 엔디코트의 말)

 

필립 말로는 40대의 늙고 가난한 사설탐정이다. 고급 레스토랑 앞에서 우연히 만난 테리 레녹스에게 약간의 도움을 줌으로써 그들은 친한 사이가 되고, 가끔 만나 술잔을 기울이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바람기 많은 대부호의 딸 실비아 레녹스가 잔인하게 살해되고, 그녀의 남편이었던 테리는 살인 용의자로 지목된다. 멕시코로의 탈출을 계획했던 테리는 말로에게 도움을 청한다. 테리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던 말로는 그가 절대로 살인을 저지르지 않았다고 확신한다. 테리를 멕시코에 남겨두고 돌아온 말로는 범인의 도주를 도왔다는 죄목으로 경찰에 끌려가 심한 고초를 겪는다. 사건이 크게 알려지는 걸 원치 않았던 할란 포터(실비아의 아버지이자 테리의 장인)에 의해 말로는 무사히 석방되었고 멕시코로 탈출했던 테리는 자신이 실비아를 죽였다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한다.

 

"그 사람은 자기 자신을 오래 냉정히 들여다보고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낼 수 있는 사람이에요. 그건 흔한 재능은 아니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들이 가진 적이 없는 위엄을 지키기 위해 일생 동안 가진 에너지의 반을 소진하면서 살아갑니다." (p.314 말로가 아일린 웨이드에게 한 말)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테리는 자살하기 직전에 말로에게 편지를 썼고 봉투 속에 5000달러짜리 지폐 한 장을 동봉했다. 그가 대가로 원했던 것은 다만 자신이 말로와 함께 자주 들렀던 술집에서 김릿 한 잔을 마셔주는 것뿐이었다. 죽은 자신을 대신해서 말이다. 사건은 그렇게 일단락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소설가 로저 웨이드를 지켜달라는 출판업자 하워드의 사건 의뢰를 거절하지 못함으로써 말로는 다시 테리가 살았던 그 마을에 발을 들여 놓게 되었고 테리를 둘러싼 복잡한 일들을 하나하나 밝혀냄으로써 독자는 다시 긴 이야기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돈이란 몸집이 불어나면 자기 나름대로의 생명력을 지니고, 자기 나름대로의 양심까지 얻게 되지. 돈의 힘이라는 것은 매우 통제하기가 어려워. 인간은 언제나 돈에 좌지우지되는 동물이오. 인구가 성장하고, 전쟁에는 어마어마한 비용이 들고, 세금징수율이 높아지면 끊임없이 압박이 들어오고. 이런 일들 때문에 인간은 점점 더 돈에 좌지우지되는 거요. 평균적인 인간이라면 지치고, 두려워하게 되고, 지치고 두려움에 빠진 인간은 이상을 지탱할 여유를 잃게 되지. 가족을 먹여 살려야 하니까. 우리 시대에는 공적, 사적인 도덕률이 충격적인 속도로 바닥에 떨어지고 있소. 자기 인생의 품질이 결핍되어버린 사람들에게 좋은 품질을 기대할 수는 없는 거요. 대량생산에서는 품질을 따질 수가 없지." (p.388 할란 포터가 말로에게 한 말)

 

사실 내가 레이먼드 챈들러의 <기나긴 이별>을 읽었던 건 이번이 두 번째였다. 처음에는 대강의 줄거리만 겨우 알아챌 정도의 거칠고 투박한 독서였다. 그것을 독서라고 말하기도 부끄러운 일이었지만 말이다. 이번에 나는 등장인물의 대사에 집중하며 읽었다. 인용문에 등장인물을 하나하나 기록한 까닭도 그래서이다. 하루키는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대사보다는 묘사 부문에 끼워넣는 경향이 있는 반면 챈들러는 소설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의 입을 통하여, 말하자면 각 인물의 대사에 작가 자신의 주장을 슬몃 찔러넣곤 한다. 두 작가는 그렇게 서로 다르지만 두 사람 모두에게는 자신만의 확고한 철학이 있었다. 어쩌면 좋은 소설가가 된다는 건 자신만의 세계를 견고하게 세우는 것에서 비롯되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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엿가락처럼 길게 늘여진 금요일 오후의 나른한 시간이 흐르고 있습니다. 아침과는 다르게 낮에는 제법 더위를 느낄 정도로 기온이 올라 주말을 기다려온 사람들의 밭은 조바심을 가볍게 흐트러놓고 있습니다. 시간과 시간 사이의 여린 틈새를 비집고 옅은 졸음이 쏟아집니다.

 

어제 스웨덴 한림원이 발표한 노벨 문학상 수상자 소식을 듣고 화들짝 놀라신 분들이 많았을 줄 압니다. 저도 또한 놀라기는 매한가지였습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이었으니까요. 그의 노래를 좋아하는 건 예외로 치더라도 말입니다. 사라 다니우스 한림원 사무총장은 "딜런은 위대한 미국 가요의 전통 속에 새로운 시적인 표현들을 창조해냈다."고 수상자 선정 이유를 발혔다지요. 딜런의 노래를 두고 "귀를 위한 시"라고 극찬하기도 했다더군요.

 

<밥 딜런 평전>을 썼던 마이크 마퀴스는 책의 서문에 이렇게 썼습니다. "1960년대 이후 이어지는 딜런의 작품은 1960년대의 작품만큼 시대와 밀착되어 있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어쩌면 딜런의 노래는 그 시대의 투명한 반영물이라기보다 차라리 그 시대에 반응하고 영향받은 한 개인에 의해 만들어진 구성물이 아닐까? 딜런은 수동적인 피뢰침도, 장대한 역사적 흐름을 이끄는 위대한 지휘자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그러한 흐름을 가로질러 앞서가는 항해자에 더 가까웠다."

 

저는 노벨 문학상 수상자로 모라카미 하루키가 뽑힐 줄 알았습니다. 하루키의 팬이기도 한 저로서는 당연한 바람이기도 하지만 사심 가득한 욕심이기도 했습니다. 깊은 의미를 담은 고은 시인의 시구가 제대로 번역될 수만 있다면 전 세계인의 마음에 곱게 자리할 수 있겠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한 것만은 아닌 듯합니다. 지금도 밥 딜런의 노래 <바람만이 아는 대답(Blowin' in the Wind)>을 듣고 가슴이 두근대는 젊은이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저는 그랬던 것 같습니다.

 

How many roads must a man walk down

Before they call him a man?

How many seas must a white dove sail

Before she sleeps in the sand?

 

사람은 얼마나 많은 길을 걸어봐야

진정한 삶을 깨닫게 될까

백비둘기는 얼마나 많은 바다 위를 날아야

백사장에 편히 쉴 수 있을까

 

How many times must the cannon balls fly

Before they're forever banned?

The answer, my friend, is blowin' in the wind,

he answer is blowin' in the wind.

 

전쟁의 포화가 얼마나 많이 휩쓸고 나서야

영원한 평화가 찾아오게 될까

친구여, 그건 바람만이 알고 있어

바람만이 그 답을 알고 있다네

 

--------------<바람만이 아는 대답>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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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CE-9 2016-10-15 0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도록 밥 딜런을 좋아했고, 요즘도 생각날 때마다 음반을 종종 돌려보곤 하지만, 그런 저에게도 밥딜런의 수상은 정말 충격적이었습니다. 반면, 밥 딜런은 공연 도중 그 소식을 들었다고 하는데, 별 반응 없이 태연하게 공연만 했다고 하네요^^ 저는 시리아의 시인 아도니스가 수상하지 않을까 했었은데, 같은 시인이 수상했다는 점만 조그만 위안으로 만족하렵니다^^
왠지 비틀즈의 맴버 전원이 살아 있었다면 그들이 받을 수도 있겠다 생각도 들더군요. 이러다 조니 미첼이나 레너드 코헨이 받는 날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아, 시대적 영향력이 밥 딜런만큼은 안 되어서 안되려나요?^^

꼼쥐 2016-10-16 15:40   좋아요 0 | URL
문제는 노벨 문학상에 이런 식으로 음악인이 참여해도 되는가? 하는 문제에는 생각을 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아요. 저도 밥 딜런이나 비틀즈, 조니 미첼, 레너드 코헨의 노래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이번 수상으로 인하여 문학인들이 많이 위축됐을 거라는 생각은 들더라구요. 서점에서도 어떤 책이 잘 팔릴까 잔뜩 기대하고 있다가 헛물만 켠 셈이 되었구요.
 

우리나라와 이란과의 러시아 월드컵 축구 예선 경기를 무리해서 본 탓인지 여전히 피로가 풀리지 않습니다. '1:0'이라는 스코어가 말해주는 것처럼 어떤 면에서는 우리나라 대표팀의 무기력한 경기력을 여실히 보여준 경기였기에 경기가 끝난 후에도 아쉬움과 실망감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고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자야지' 생각하면 할수록 눈만 말똥말똥하고 의식은 더욱 더 또렷해지는 바람에 누웠다 일어났다를 여러번 반복한 후에 어찌어찌 잠이 들었는데 새벽 5시 30분에 맞춰놓은 알람이 여지없이 잠을 깨웠으니 제대로 잠들었던 시간은 3시간도 채 되지 않았을 듯합니다.

 

아침 운동을 나갈까 말까 5분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 동안 수십 번도 더 갈등했나 봅니다. 어쩌면 수백 번이었는지도 모르죠. 운동복을 입고 현관을 나서기까지 어찌나 힘이 들던지요. 불과 한 달 전만 하더라도 그 시각이면 어둠이 어지간히 흩어지곤 했는데 지금은 등산로 초입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캄캄한 어둠에 휩싸이곤 합니다. 저는 오히려 어둠에 싸인 숲의 적막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으스스한 바람이라도 불어올라치면 섬뜩한 느낌이 없지는 않습니다.

 

오늘 아침에는 다행히 바람도 없고 무척이나 조용했습니다. 능선을 다 올랐을 때 나의 발자국 소리에 놀란 고라니의 갑작스러운 질주 때문에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긴 했지만 말입니다. 여기에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저는 산짐승의 잠을 방해할까 싶어 평소에도 손전등이나 랜턴을 가져가지 않는 까닭에 어둠이 더해지는 겨울철에는 제 발자국 소리를 미처 듣지 못한 산짐승들, 예컨대 고라니나 청설모 또는 길냥이들이 갑작스러운 저의 출현에 화들짝 놀라는 경우가 가끔 있습니다.

 

혹서와 가뭄 때문에 많지도 않은 도토리를 욕심 많은 사람들이 샅샅이 뒤져 주워가는 바람에 이맘때의 가을산은 몸살을 앓곤 합니다.

 

저는 요즘 '존 르 카레'(저는 처음 접하는 작가입니다만)가 쓴 <민감한 진실>과 조 팰카,플로라 리히트만이 쓴 <우리는 왜 짜증나는가>를 읽고 있습니다. 읽고 있는 책의 제목을 제가 먼저 이렇게 고백하는 이유는 제 자랑을 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다른 분들은 어떤 책을 읽고 있는지 궁금하기 때문입니다. 책을 즐겨 읽는 사람들은 이따금 관음증 환자처럼 다른 사람이 읽고 있는 책이 궁금해지곤 합니다. 저만 그런가요? 아무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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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ualia 2016-10-12 1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놔 정말, 한국 사람들 산에 도토리 좀 걍 놔뒀으면 좋겠어요. 왤케 이기적이고 천해 보이는지 모르겠어요. 산이고 들이고 바닷가고 쥐떼처럼 빠대고 다니면서 각종 희귀동식물을 닥치는 대로 채취하고 남획하고, 정말 한국 사람들, 그놈의 보양식 타령, 정력에 좋다 타령, 진짜 못 봐주겠습니다. 뭐뭐가 몸에 좋다, 정력에 좋다, 소문이 나면 희귀종이고 자연보호종이고 뭐고 간에 아주 씨를 말려버릴 정도입니다. 요즘 종편뿐만 아니라 방송3사에서 경쟁적으로 먹방 (유사) 프로를 방영하는 것 같은데요. 그런 방송에서 깊은 산골/계곡 같은 데를 직접 전문 채취꾼/심마니 등등을 데려가서 희귀 약초/산열매/버섯/토종 물고기 등등을 채취하고 잡아서 시식하는 프로그램을 방영하던데요. 정말 미친 짓이고, 천하디 천한 짓이고, 야만적인 짓입니다. 공영방송 KBS의 《6시 내고향》이란 프로에서도 그런 보양식 방송을 자주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 방송을 전국민을 상대로 하면 도대체 어떻게 되겠나요. 전국의 산야는 몸살을 앓을 것입니다. 수많은 희귀동식물들이 한국인들 쥐떼 근성, 보양식 타령, 정력 타령 때문에 멸종돼 갈 것입니다. 한국 사람들 정말 못 말립니다. 구제불능이라고 봐요.

꼼쥐 2016-10-14 17:47   좋아요 0 | URL
저도 공감합니다.
저는 매일 아침 산엘 오르고 내려올 때는 등산로에 버려진 쓰레기를 주워서 내려오곤 합니다만 주말을 지나 월요일의 등산로는 그야말로 난장판이나 다름이 없지요. 가뜩이나 요즘에는 도토리를 줍는 사람들이 어찌나 빠대고 다니는지 온 산에 등산로가 생긴 듯합니다. 저는 TV를 보지 않아 잘 모르겠지만 우리나라 사람들 정말 반성해야 합니다.
 
애프터 다크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64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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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징과 은유만으로 한 권의 소설을 완성한다는 건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다고 포스트 모던 계열의 초현실주의 작품처럼 독자들에게 불쾌한 감정을 유발할 정도로 불친절하거나 난해하지 않게 책을 쓴다는 것은 더더구나 어려운 일이지만. 소설가로서의 내공은 바로 그런 게 아닐까 싶다. 어느 누구도 다루지 않았던 소재를 가지고 현실감 있게 이야기를 풀어낼 수 있는 능력 말이다. 아무리 '소설은 현실의 모방'이라고는 하지만 세상의 모든 작가들이 현실의 한쪽 모서리를 그대로 옮겨 온, 서로를 구분할 수 없는 다 그렇고 그런 작품만 쓴다면 독자들은 언젠가 소설에서 영원히 멀어지고 말 테니까.

 

무라카미 하루키가 자신의 등단 25주년을 맞는 해에 발표한 11번째 장편소설 <애프터 다크>는 그의 작품 성향과는 상당히 차별화되는 작품이다. 그러나 그가 쓴 대부분의 장편소설이 그러하듯이 자신이 쓴 단편소설의 소재나 문장의 일정부분을 차용하는 그의 습관은 이 책에서도 예외가 아니어서 하루키의 소설을 애독하는 독자라면 그가 쓴 단편소설 <TV 피플>을 단박에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다른 작품과의 유사성이나 연계 가능성을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소설의 첫머리에 <TV 피플>에 썼던 문장을 차용한 것은 맞지만 소설의 소재나 구성은 전혀 다른, 이전의 다른 작품에서는 보지 못했던 독특한 분위기의 소설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야기는 심야의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혼자 책을 읽고 있는 '아사이 마리'에게 젊은 남자가 다가와 말을 거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PM 11:56'이라는 챕터의 소제목도 이채롭다. 작가는 그런 식으로 특정하지 않은 도시의 하룻밤을 시간별로 세분하여 그 속에서 펼쳐지는 다양한 도시인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11시 56분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결국 다음날 아침 6시 52분에서야 끝이 난다. 도시인의 특성을 대변하듯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여럿이지만 딱히 이렇다 할 깊은 관계로 이어지지는 못한다. 작가는 마치 감정이 없는 카메라의 렌즈처럼 그들의 모습을 그저 관찰만 할 뿐이다.

 

대학생인 아사이 마리에게는 이름에서 한 글자만 다른 언니가 한 명 있다. 그녀의 언니 아사이 에리는 두 달째 잠에 빠져 있다. 어려서부터 얼굴이 예뻤던 언니는 잡지 모델을 하며 바쁜 나날을 보냈고, 상대적으로 소외감을 느꼈던 마리는 다니던 학교마저 그만두고 중국인 학교로 전학한다. 그곳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친 마리는 대학에 진학하여 중국어 통역이나 번역을 목표로 미래를 설계한다. 항상 보살핌을 받으며 자랐지만 바쁜 일상 때문에 자신의 삶이라곤 살아보지 못했던 에리와 누군가의 보호와 떠받듦은 없었지만 자신이 주체적으로 삶을 이끌어왔던 마리의 모습이 소설 내내 교차된다.

 

마리에게 말을 걸었던 사내는 다카하시이다. 에리의 남자친구의 부탁으로 데이트 장소에 함께 나갔던 다카하시는 그곳에서 보았던 마리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마리는 그때 고등학생이었다. 재즈 동아리에서 트럼본을 불고 있는 다카하시는 심야 연습을 위해 연습실로 가던 중이었다. 다카하시가 사라진 레스토랑에 러브호텔 알파빌의 매니저인 가오루가 등장한다. 불법체류자인 중국인 창부에게 폭력 사건이 있었던 것. 가오루는 마리에게 통역을 부탁한다. 한때 알파빌에서 알바를 했던 다카하시의 소개로 마리를 찾았던 가오루는 중국인 여성을 무사히 돌려 보낸 후 마리를 근처의 락카페에서 잠시 머물도록 한다. 밴드 연습을 끝낸 다카하시가 다시 마리를 찾아온다.

 

다카하시는 사실 최근에 에리와 만난 적이 있음을 고백한다. 그때 에리는 매우 위태해 보였고, 동생과의 사이가 멀어진 것을 슬퍼했다고 말한다. 어쩌면 에리는 많은 사람들과의 형식적이고도 의례적인 관계맺기에 지쳤는지도 모른다. 관계맺기에 지쳐버린 에리와 관계맺기에 목마른 마리는 소설 속의 자매인 동시에 도시인의 두 단면인 듯 보인다. 마리는 알파빌의 빈 객실로 자리를 옮긴다. 그곳에서 자신의 신분을 숨긴 채 청소를 하며 살아가고 있는 고오로기를 만난다.

 

"마리. 우리가 서 있는 지면은 말이지, 단단해 보이지만 조금만 무슨 일이 있으면 밑이 쑥 꺼지고 그래. 한번 꺼지면 그걸로 끝장이야. 두 번 다시 원상태로 돌아오지 못해. 저 아래 어둑어둑한 세계에서 혼자 살아가는 수밖에 없어." (p.189)

 

어떤 이유에서인지 도망자 신세가 된 고오로기의 고백은 한동안 이어진다. 마리는 고오로기와의 대화에서 자신을 조금씩 이해하게 된다.

 

"시간을 들여서 자기 세계 같은 걸 조금씩 만들어왔다는 자각은 있어요. 혼자서 거기 들어가 있으면 어느 정도 마음이 놓여요. 하지만 그런 세계를 구태여 만들어야 한다는 것 자체가, 제가 상처받기 쉬운 약한 인간이란 뜻 아닌가요? 게다가 그 세계란 것도 다른 사람들이 보면 정말 아무것도 아닌, 보잘것없는 세계라고요. 종이 상자로 지은 집처럼 조금만 센 바람이 불면 어디론가 날려갈 것 같은……" (p.199)

 

마리는 비로소 잠으로 빠져든 언니를 자신조차 피해왔다는 걸 깨닫는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도 전 지진으로 엘리베이터가 멈춰 캄캄한 어둠 속에 어쩔 수 없이 갇히게 되었을 때 언니 에리가 두려워하는 자신을 꼭 안아주며 안심시켜 주었던 기억을 떠올린다. 그후 에리는 늘 바빴고, 떠받듦을 받는 언니가 늘 부러웠던 마리는 일부러 그녀를 피해왔었고, 사람들과의 관계로부터 도망쳐 온 언니를 이제는 자신마저 피하고 있음을 자각한다.

 

"그래서 생각하는 건데, 인간은 기억을 연료로 해서 사는 게 아닐까? 그게 현실적으로 중요한 기억인지 아닌지 생명을 유지하는 데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 같아. 그냥 연료야. 신문광고지가 됐든, 철학책이 됐든, 야한 화보사진이 됐든, 만 엔짜리 지폐 다발이 됐든, 불을 지필 때는 그냥 종이쪼가리잖아? 불은 '오오, 이건 칸트잖아'라든지 '이건 요미우리 신문 석간이군'이라든지 '가슴 끝내주네'라든지 생각하면서 타는 게 아니야. 불 입장에선 전부 한낱 종이쪼가리에 불과해. 그거랑 같은 거야. 소중한 기억도, 별로 소중하지 않은 기억도,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기억도, 전부 공평하게 그냥 연료." (p.202)

 

소설은 영화의 한 장면처럼 '우리'라고 명명된 카메라의 시선에 따라 도시의 이곳 저곳을 조감한다. 에리의 밤과 마리의 밤이 교대로 비춰지는 동안 작가는 어떠한 식으로든 설명을 더하거나 개입하지 않는다. 냉정한 말이지만 타인의 삶은 그저 관찰할 뿐 개입할 수 없음을 작가는 그런 식으로 밝혀두려 했는지도 모른다.

 

"우리 주위에서 원인과 결과는 손을 잡고, 종합과 해체는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결국 모든 것은 손이 닿지 않는, 깊은 갈라진 틈새 같은 곳에서 벌어졌던 일이다. 한밤중부터 날이 밝을 때까지 그런 곳이 어딘가에 은밀히 암흑의 입구를 연다. 그곳은 우리의 원리가 아무런 효력을 갖지 못하는 장소다. 언제 어디서 심연이 사람을 집어삼킬지, 언제 어디서 토해낼지 아무도 예견하지 못한다." (p.210)

 

한때 <어둠의 저편>(임홍빈 옮김, 문학사상사)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던 이 소설은 출판사와 제목을 달리 하여 재출간된 것이지만 시니컬한 도시인의 모습을 마치 한편의 영화처럼 재현해 낸, 하루키만의 소설 형식 이른바 하루키류를 공고하게 하는 데 일조한 작품이 아닐까 싶다. 사족이지만 복잡한 가정환경에서 자란 다카하시의 좌우명은 재미있다. "천처히 걸어라. 물을 많이 마셔라." 하루키의 다른 작품 <1973년 핀볼>에도 등장하는 이 말은 모든 독자에게 전하는 그의 충고인지도 모른다. '다음 어둠이 찾아올 때까지 아직 시간이 있다.'는 소설의 마지막 문구가 눈에 아른거린다. 계절이 변하고 있다. 오늘 아침은 분명 어제와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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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이 나를 깨웠다
구영회 지음 / 프리이코노미라이프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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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내가 아침에 본 하늘은 쪽빛 궁룽이 금방이라도 와그르르 무너져 내릴 듯 맑고 투명한 것이었다. 허공을 가로지르는 바람과 갑자기 뚝 떨어진 기온은 선선하다 못해 소슬한 추위를 느낄 만큼 갑작스러운 것이었지만 달라지지 않은 하늘에 나는 저으기 안심했던 것이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그 길고 혹독했던 더위를 우리 곁에서 물러나게 만드는 데에도 지극히 짧은 시간이 필요했던 것처럼 가을 기분을 제대로 느끼기도 전에 벌써 이른 추위를 느끼게 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올 더위가 어찌나 질기고 무더웠던지 혹서의 고통은 9월을 지나 10월까지 이어지는 게 아닌가, 걱정했었는데 웬걸 달라져도 이렇게 달라질 수 있을까 싶게 변하지 않았던가. '급변'이라는 말은 이럴 때 쓰는 말인 듯 싶었다. 바야흐로 '독서의 계절'이 찾아왔구나, 싶었던 게 엊그제인데 나는 벌써 겨울을 염려하고 있으니 올해도 '독서의 계절'은 허울뿐인 말잔치에 그치고 말았다. 그러나 이맘때의 시간은 생각을 가다듬고 주변을 둘러보기에는 더없이 좋은 계절이 아닌가.

 

얼마전 어느 인터넷 기사에 구영회 저자의 인터뷰 기사가 실린 걸 우연히 보게 되었다. 전에 방송에서 보았던 그의 얼굴과는 판이하게 달라져 있었다. 그것은 세월의 흐름에서 오는 필연적인 어떤 것과는 사뭇 다른 것이었다. "명함이 필요 없을 때,비로소 자유롭다" 는 제목의 기사에 곁들인 그의 사진에서 그는 티끌만 한 욕심도 없이 모든 걸 내려 놓은 듯한 편안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33년의 방송생활에서는 결코 찾아볼 수 없었던 그런 얼굴이었다. 어제 도서관에 들렀을 때 나는 문득 그의 얼굴이 떠올랐고, 그의 저서 <지리산이 나를 깨웠다>를 빌려 읽게 되었다. MBC 방송국의 평기자로 시작하여 CEO까지 지낸, 자타가 공인하는 방송맨인 그가 지리산에 정착하여 써내려간 산중일기는 그의 책 <지리산이 나를 깨웠다>에 고스란히 실려 있었다.

 

"나 자신이 '허방 지르는 나'로부터 잘 벗어나, 진정 나는 누구이며 어떤 존재인지, 나의 삶의 본질은 무엇인지에 대해 내가 깊은 잠에서 활짝 깨어나야 한다는 성찰을 하게 된다. 이것은 앞으로 남은 삶을 무엇을 향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내 삶의 방향을 가리키는 것이기도 하다. '깨어나는 그리고 깨어난' 삶을 살아야 하겠다는 것이다. 깨어나지 못한다면 꿈속을 헤매게 될 것이다." (p.152)

 

1부 '나는 누구일까', 2부 '길 안개가 걷히다', 3부 '그물망을 타고 온 인연들'의 총 3부로 구성된 이 책 <지리산이 나를 깨웠다>는 저자가 지리산에 정착하여 제2의 삶을 살면서 깨달았던 삶의 경구와 소소한 일상과 그 속에서의 소중한 인연들을 기록하고 있다. 방송생활을 하면서도 지리산을 수없이 오갔다는 저자가 지리산에 정착한 것은 어쩌면 정해진 순서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30여 년을 방송계에 몸담았던 그가 산중에서의 불편한 삶을 자발적으로 선택하기까지는 책에 다 쓰지 못한 많은 사연들이 있었을 것이다.

 

"당신과 나의 삶은 어쩌면 동그란 원의 한 점에서, 온갖 매혹적인 것들을 찾아 가출했다가 매혹의 화장이 지워진 맨얼굴과 잿더미를 수없이 겪은 뒤에, 다시 그 출발점에 되돌아오는 귀가의 과정일 수 있다." (p.74)

 

여름내 온 산을 가득 메우던 매미 울음 소리가 귀뚜라미 소리로 바뀌었던 것도 한 달여. 내가 잠시 잊고 있는 순간에도, 다른 무엇엔가 한눈을 판 순간에도 뭇 생명들의 쉼 없는 대체는 끊김이 없이 이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올해로 은퇴 7년차가 되었다는 저자는 앞만 보고 달렸던 지난 삶을 되돌아보며 그의 불편했던 마음을 이 책에 쓰고 있다. 젊은 시절에 그가 앉았던 자리는 이제 다른 누군가로 대체되었을 것이다. 계절이 순환하듯 우리의 자리 또한 순환하는 것이다. 생각해 보면 허망할 수도 있는 이런 순리가 <지리산이 나를 깨웠다>의 앞부분인 '나는 누구일까'에 실려 있다. 그 부분을 읽고 있노라면 언젠가 내가 읽었던 마이클A. 싱어의 <상처받지 않는 영혼>을 떠올리게 된다. <상처받지 않는 영혼>의 실천편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저자의 생각은 여러 면에서 마이클A. 싱어의 사상에 영향받고 있었다.

 

"내가 강물을 물끄러미 바라보듯이, 내 안에서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자가 있다. 그 자는 내가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언제나 나를 관통하고 있다. 그 자는 내가 알아차리면 언제나 그 자리에 있다. 내 안의 알아차림 '너머'에 분명히 어떤 존재가 있는 듯하다. 그 자가 바로 나의 최종적인 정체성 아닐까. 낌새는 분명하지만 아직 드러나지 않는 이 자가 나에게 손짓한다. 이 존재의 이름을 순수 의식이라 부르든, 우주 생명이라 부르든, 영혼이라 부르든, 아니면 종교적으로 성령 또는 불성이라고 부르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p.29)

 

수구초심(首丘初心)이라고 했던가. 여우가 죽을 때 제가 살던 굴이 있는 언덕 쪽으로 머리를 둔다는 뜻의 한자성어 말이다. 지리산 인근 전남 구례 출신의 저자가 자신의 고향이나 다름없는 지리산에 정착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내 머릿속에 순간적으로 떠올랐던 단어는 바로 그것이었다. 저자의 생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저자의 성정을 잘 알지는 못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게 오히려 순리인 양 여겨지기 때문이다. 노년기는 제2의 유아기가 아닐 수 없다. 인생을 통틀어 오직 나에게만 집중할 수 있는 시기는 유아기와 노년기밖에 없기 때문이다. 사람에게나 뭇 짐승들에게나 노년이 되면 자신의 어린 시절이 떠오르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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