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편 몇 쪽이 전부였지만 사람들은 다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절편 한 쪽씩을 입에 물고 더없이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집에 혼자 있을 때라면 밍밍한 절편에는 손도 대지 않을 게 뻔한데 뭐가 그리 좋은지 얼굴 한가득 웃음을 머금은 채 오물거리는 본새가 꼭 세살배기 어린애 같았다. 그러면서도 시선은 남은 절편 접시에 고정한 채 거둘 줄을 몰랐다. 어찌나 맛있게 먹던지 나도 한 쪽 거들었다. 그 바람에 접시의 떡은 금세 동이 나고 사람들은 다들 못내 아쉬운 표정으로 돌아섰다. '시장이 반찬'이라는 말이 실감났다. 금요일 오전의 짧은 휴식은 사람들에게 묘한 활력을 안겨 준다. 곧 주말 연휴가 기다리고 있다는 기개감 때문인지 사람들은 소소한 일상에도 행복한 표정을 짓는다.

 

나는 떡의 출처도 모른 채 기름이 반지르르 한 떡 한 쪽을 입에 물고 자리로 돌아왔다. 점심 식사 전의 간식은 그닥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도 오늘은 왠지 나도 모르게 손이 가고 말았다. 삶에 필요한 가벼운 규칙들은 이렇게 쉽게 무너지기도 한다. 그럴라치면 나는 누가 뭐라고 하는 것도 아닌데 '그럴 수도 있지, 뭐. 사는 게 뭐 별건가?'하는 생각으로 짐짓 합리화를 하는 것이다.

 

요 며칠 추웠던 날씨는 낮이 되면서 많이 누그러진 듯했다. 국민들의 거듭되는 퇴진 요구에도 대통령은 요지부동 움직일 줄을 모른다. 어쩌면 법이라는 게 안중에도 없었는지 모른다. 내가 규칙을 어기고도 '내가 뭘 잘못했는데?' 묻는 것처럼 대통령도 그런 생각인가 보다. 어렸을 때부터 늘 특별한 존재로서 대접을 받았던 그녀의 이력을 생각하면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오스만 제국의 마지막 후계자였던 오르한과 비교하면 그녀는 너무도 뻔뻔한 것이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물러난 술탄의 왕자였던 오르한은 15세 때에 국외로 추방되어 단 한 번도 조국 땅을 밟지 못한 채 68년을 국외에서 떠돌았다. 추방된 왕족 중 남자는 50년 여자는 여자는 28년 동안 다시 고국에 돌아올 수 없다는 조항 때문이었다. 생계를 위해 여러 직업을 전전하며 이집트와 프랑스를 떠돌았던 그는 안 해본 일이 없었다고 한다. 83세의 나이로 68년만에 고국에 돌아와 자신이 살았던 돌마바흐체 궁전에서 5일 동안 머물렀던 그는 국민들의 탄원으로 마지막 여생을 터키에서 보낼 수도 있었지만 다시 이집트로 돌아갔다. 터키에 세금을 한 푼도 낸 적이 없는 자신은 터키에 살 자격이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일 년 후 그는 이집트 아파트에서 시체로 발견되었다. 후세를 남겨 자신처럼 숨어 살게 하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그는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다고 한다. 평생을 공주로 대우만 받으면서 살았던 우리나라의 대통령과는 극과극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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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얘기가 웃긴다고? 조심해! 나 까칠한 들고양이 에드가야! - 400일 동안 끄적인 일기
프레데릭 푸이에.수지 주파 지음, 리타 베르만 그림, 민수아 옮김 / 여운(주)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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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에서도 반려동물을 집 안에서 키우는 풍경이 낯설지 않게 되었다. 내가 어렸을 때만 하더라도 개를 집 안에서 키운다는 건 생각도 할 수 없었고, 간혹 개를 품에 안고 지나가는 여자만 보여도 동네의 어른들은 뭔가 못 볼 것을 보았다는 듯 끌끌 혀를 차곤 하셨다. 개는 당연히 마당의 한쪽 귀퉁이에 박아 놓은 말뚝에 묶인 채 다 찌그러진 양은 밥그릇이나 깨진 바가지에 담긴 잔반을 먹고 자라는 존재여야 했다. 이따금 낯선 사람이라도 볼라치면 목청을 높여 컹컹 짖고 주인이 외출에서 돌아올 때면 가볍게 꼬리를 흔드는 것으로 친밀감을 표시하는 등 피아의 구별이 확실한 개는 주인의 사랑을 받기도 했다. 그렇다고 지금처럼 개를 집 안에 들이지는 않았고 그저 끼니를 거르지 않게 제때에 밥을 챙겨주거나 머리를 쓰다듬는 정도가 다였다.

 

반면에 마을에서 고양이를 키우는 집은 많지 않았다. 그 당시에는 집집마다 쥐도 워낙 많았고 쥐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 집도 많았으니 고양이를 키우는 집이 많았을 법도 한데 그렇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사람을 천성적으로 따르는 개와 달리 야생의 본능이 살아 있는 고양이는 사람 근처에 잘 오려 하지 않았고, 어둠 속에서 마주치는 고양이 눈빛 또한 보는 이를 섬뜩하게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긴긴 겨울밤에 듣는 고양이 울음 소리는 어느 집 갓난쟁이의 울음인 양 애처롭게 들렸다. 그래서인지 어렸을 때 나의 할머니도 고양이는 항상 재수없는 동물로 말씀하시곤 하셨다.

 

나는 지금도 고양이에 대한 친밀감과 두려움이라는 양가감정을 갖고 있다. 사람의 시선을 신경쓰지 않는 듯한 우아한 걸음걸이와 도도한 자태, 사람들과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자신만의 영역을 지키는 고집스러움은 곁에 와서 엉기고 치대는 반려견보다 훨씬 사랑스럽겠다는 생각도 들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어렸을 때 이웃 어른들로부터 들었던 미신에 가까운 이야기로 인하여 고양이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안고 있는 것이다.

 

날씨도 날씨려니와 되어 돌아가는 나라꼴이 엉망이어서 나는 요즘 기분도 꿀꿀하고 진득하니 책을 읽기도 어려웠다. 뭔가 기분전환이 필요하다고 느껴 고른 책이 『내 얘기가 웃긴다고? 조심해! 나 까칠한 들고양이 에드가야!』이다. 들고양이 에드가의 눈으로 바라본 인간사회의 세태와 모순을 통렬하게 풍자한 책이다. 사실 이런 종류의 책은 무수히 많지만 독자들의 시선을 끄는 책은 그리 많지 않다. 작가의 풍부한 상식과 넘치는 재치가 책의 성패를 좌우하게 마련인데 이게 또 너무 지나치면 과장인 듯 비친다. 넘치지도 모자르지도 않게 적절한 선에서 써내려간다는 게 쉽지 않아서 동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우화가 베스트 셀러 목록에 오르는 경우는 잘 없다.

 

"고양이들이 대개 그러하듯, 나도 보수적인 편이야. 난 최신기기의 뒤꽁무니나 따라다니는 너희 인간들과는 달라. 낡은 공과 비닐봉지야말로 내가 무지 좋아하는 장난감이지. 그런 내가 '멍청이'들의 태블릿 PC에 서서히 중독되고 있단다. 발로 한 번 톡 치면 웹 서핑을 할 수 있고, 한 번 더 톡 치면 요리 레시피 앱을 실행할 수도 있어. 그리고 또 다시 발로 톡 치면 새를 던져 돼지를 죽이던 걸. 그러고 보면, 인간들은 가끔 괴상한 걸 고안해 내는 것 같아." (p.135)

 

이 책의 주인공인 6개월 된 아기 고양이 에드가는 어느 날 마크와 세브린느의 집에 입양된다. 에드가는 그집 사람들을 '멍청이'라고 부른다. 에드가가 살게 된 집에는 마크와 세브린느 부부, 다섯 살배기 로돌프, 열네 살짜리 레아, 잡종견 파타푸프가 살고 있다. '400일 동안 끄적인 일기'라는 부제가 달린 이 책은 이름도 없었던 들고양이 에드가가 에드가로 살게 된 400일 동안의 생활을 일기로 기록한 책이다.

 

"젠장! 감옥이나 다름없는 이런 집에서 대체 어떻게 지내야 하지? 분명히 말하지만, 난 특급 우편물이 아니라, 길들여지지 않은 수고양이야. 문신도 새겼지. 좋아, 하여간 이런 수용소 같은 곳은 진작 벗어났어야 하는데. 그 어떤 길고양이 형제들보다 더 싫거든. 케이지는 비좁고, 불편한데다, 역겨운 냄새마저 뒤섞여 마치 빈민굴 같고, 먹이는 열차에서 파는 음식처럼 맛없어." (p.6)

에드가는 아이작 뉴턴의 만류인력 법칙을 척척 증명할 만큼 똑똑한 고양이이지만 때로는 아주 사소하고 하찮은 일에 겁을 집어먹기도 하고, 이웃집 암고양이에게 홀딱 반하기도 한다. 고양이의 삶이라는 게 늘 먹고 자고, 또 먹고 자는 게 일이지만 호기심이 발동하면 무섭게 집중하기도 한다.

 

"우리 편집장이 귀띔하던 걸. 『그레이의 50가지 그림자』가 일으킨 바람을 한번 타 보자고. 그러니 내 일기에도 에로티시즘을 살짝 가미해 보라고. 그 말을 듣기가 무섭게 어제 저녁, 굉장히 멋진 암고양이를 만났지 뭐야. 그토록 섹시하고 요염한 암컷은 처음이었어." (p.108)

 

내가 매일 아침 오르는 산에도 들고양이가 산다. 밝은 갈색의 그 고양이는 잊을만 하면 나타나서 슬쩍 얼굴만 뵈주고는 빠르게 사라진다. 그런데 오늘처럼 기온이 꽁꽁 얼어붙는 날에는 등산로 초입의 침목 계단에 엎드려 잠을 자다가 내가 나타나면 빠르게 다른 곳으로 이동하곤 한다. 그럴 때면 나는 괜시리 미안해진다. 나 때문에 잠을 깬 것 같아서 말이다. 작년 여름의 어느 날, 그 고양이는 자신의 새끼인 듯 보이는 어린 고양이들을 데리고 숲의 이곳저곳을 옮겨다니고 있었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 또 혼자가 되었다. 그 고양이를 볼 때마다 나는 묻고 싶은 게 있다. '사는 게 힘들지 않느냐?'고. 사람이든 짐승이든 삶이 항상 축복일 수는 없는 일, 오늘 하루도 지워지듯 스러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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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에 금을 그을 수 있다면 어제와 오늘 사이에 금을 하나 긋고 이쪽은 겨울, 저쪽은 가을 선명하게 갈라놓을 수 있을 것만 같다. 오늘은 일년 24절기 중 스무 번째 절기인 소설(小雪). 아침엔 눈이라도 한바탕 쏟아질 듯 하늘이 어둡기만 하더니 지금은 멀끔히 개인 하늘에 손돌바람이 드세다. 어제와는 확연히 달라진 풍경에 사람들은 잠시 어리둥절한 모습이다. 새벽부터 들려온 옆나라의 지진 소식에 잠시 잊혀졌던 공포가 스멀스멀 되살아나고 갑갑한 정치 현실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

 

떨어진 낙엽들은 심심했던지 하릴없이 우르르 저리 몰려갔다 이리 몰려오며 긴 하루를 보내고 사람들의 바쁜 발걸음이 그 위를 무심한 듯 지나쳐간다. 국민 5%의 지지를 등에 업고 '배 째라'는 식의 조폭 우두머리 양아치짓을 하는 대통령을 보며 사람들은 다들 혀를 찼다. "사람의 탈을 쓰고 어찌 저런 짓을 할 수 있누. 그렇게 안 봤는데 영 몹쓸 사람이구먼." 국가의 안위나 국민들의 생각은 안중에도 없는 듯 나 몰라라 하는 대통령의 태도에 국민들은 다들 학을 떼는 듯했다.

 

연말이 다가오면서 수시로 이어지는 모임과 어수선한 일정에 하루하루의 피로가 점점 쌓여만 가고 괜한 짜증으로 옆사람을 힘들게 한 건 아닌지 돌아보게 된다. 적어도 대통령처럼 살지는 말아야지 하는 생각에서 말이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던 윤동주 시인의 시가 그리워지는 요즘이다. 공선옥 작가의 '그 노래는 어디서 왔을까'를 읽고 있는데 마음이 심란해서인지 영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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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22 18:1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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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23 18: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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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끝 여자친구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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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질없는 짓인 줄 뻔히 알면서도 군말 없이 해야 할 때가 종종 있다. 그렇지 않은가? 그럴 때마다 나는 그것이 마치 삶이라는 긴 통로에 일정한 간격으로 의미도 없이 서 있는 가로등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밋밋한 길에 약간의 운치를 더하기 위한 가로등 말이다. 적어도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그런 일들은 대개 일정한 시차를 두고 무한 반복하는 성질이 있다는 점도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한 이유가 되긴 하지만 그것에 앞서 어차피 삶이라는 통로는 '나'라는 단 한 사람을 위한 길인데 굳이 운치를 더할 이유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나' 외에는 봐줄 사람도 없는데...

 

이상하게도 김연수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매번 비슷한 생각을 하게 된다. 김연수의 소설에서 느낄 수 있는 부질없는 열망의 반복 때문인지도 모른다. 기억의 저쪽 끝까지 마침내 닿고야 말겠다는 부질없는 욕망. 작가 김연수는 결국 그것을 위해 소설을 쓰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시간을 되돌리면 기억의 심연에 이를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헛된 꿈이라는 걸 나는 잘 알고 있다. 내가 알고 있는 것처럼 작가도, 또는 대부분의 사람들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기억은 만들어지는 그 순간부터 이미 조금씩 변형되고 서서히 잊혀져가기 때문이다.

 

김연수의 열망은 때론 양자역학의 이론과도 닮아 있다. 모든 물질은 결국 완전히 접촉할 수 없다는 원리 말이다. 세상의 모든 물질은 원자로 이루어져 있고 원자는 중심의 원자핵과 그 주변을 도는 전자로 이루어져 있으며 원자핵과 전자 사이에는 일정한 공간, 즉 허공이 존재하므로 원자와 원자의 결합은 결국 허공과 허공의 만남인 셈이라는 다소 역설적이면서도 난해한 원리. 그러므로 물질과 물질의 접촉은 결국 영원히 좁혀지지 않는 허공과 허공의 간극을 유지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시공간도 이와 같은 게 아닐까? 우리의 기억마저도 말이다. 기억 저편의 시간으로 최대한 가까워질 수는 있지만 영원히 도달할 수 없는 빈 공간은 언제나 남게 마련이니까.

 

김연수의 소설집 <세계의 끝 여자친구>는 소설에서 작가가 이루고자 했던 꿈의 단면을 읽을 수 있다. 그것은 현재 시점에서 추구하는 기억의 재현일 수도 있고, 과거 속에서 펼쳐지는 기억의 재구성일 수도 있다. 어떤 식으로 말한다 해도 과거의 기억을 향해 내달리는 작가의 열망을 숨길 수는 없을 듯하지만 말이다. 작가가 기억에 집착하는 이유는 단순히 그것을 기억하기 위한 목적만은 아닐 것이다. 현실이라는 시공간이 주는 많은 제약들, 이를테면 도덕과 이성에 의해 쪼그라들었던 욕망의 불꽃들이 과거라는 상상의 틀 안에서는 얼마든지 부풀려지고 끝 간 데 없이 분출되기 때문에 현실에서 감추어졌던 우리 내면의 많은 욕망들을 낱낱이 들추어 보기 위해서는 과거라는 틀이 반드시 필요했을 테니까.

 

"두 눈을 감고 가만히 들어본다. 신호등의 불빛이 바뀔 때마다 자동차들이 일제히 도로를 질주하는 소리가 흘러든다. 조금 열어둔 창문 틈으로. 그 소리가 파도 소리를 닮아, 내 귀가 자꾸만 여위어간다. 두 눈을 감고 가만히 들어보면, 수천만 번의 겨울을 보내고 다시 또 한 번의 겨울을 맞이하는 해변에 혼자 서 있는 듯한 느낌이 들므로. 그게 그 해변의 제일 마지막 겨울이라서 파도 소리를 듣는 일이 그토록 외로운 것이라고. 그렇게 두 눈을 감고 나는 가만히 들어본다." (p.141 '모두에게 복된 새해- 레이먼드 카버에게' 중에서)

 

책에 수록된 작품은 표제작인 '세계의 끝 여자친구'를 포함하여 총 9편이다. 여성작가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을 찾은, 과거에 열일곱 살 연하의 한국인 남자친구를 두었던 미국 작가의 이야기를 다룬 '케이케이의 이름을 불러봤어'라는 단편은 이 책에 수록된 첫 작품이다. 출판사에서 작품의 순서를 정하였는지도 모르지만 작가는 왜 이 작품을 책의 처음에 배치했을까? 책을 읽는 내내 나는 그 이유가 궁금했었다.

 

"해피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지나가고 난 뒤에도 저 불은 우리의 예상보다 좀더 오랫동안 타오를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 안에서. 내부에서. 그 깊은 곳에서. 어쩌면 우리가 늙어서 죽을 때까지도. 이 우주의 90퍼센트는 그렇게 우리가 볼 수 없는, 하지만 우리에게 오랫동안 영향을 미치는, 그런 불들로 채워져 있다는 사실을. 물론 살아 있는 동안, 우리는 그 불들을 보지 못하겠지만." (p.32 '케이케이의 이름을 불러봤어' 중에서)

 

어쩌면 우리네 삶도 결국 자신이 희망하는 어떤 것에는 이르지 못한다는 점에서 소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실체도 없는 어떤 것을 향해 끝없이 달리다가 어느 순간 세상의 모든 빛이 '퍽' 하고 사라지고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이유도 없이 내동댕이쳐지는 게 우리네 삶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사랑했던 건 '사랑'에 얼마나 가까웠으며, 행복했던 경험은 또 얼마나 '행복'과 닮았던 것일까? 우리는 결국 그 모든 경험에도 불구하고 사랑과 행복의 실체에 단 한발짝도 다가서지 못했던 건 아닐까? 문득 두려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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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통 끝날 것 같지 않던 일이 어느 날 갑자기, 그것도 무참할 정도로 허무하게 끝이 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대통령의 비리가 본격적으로 언론에 보도된 지 근 한 달이 지나고 있는 요즘, 사람들은 다들 이 혼란이 언제 끝날지 가늠을 할 수 없다고들 말합니다. 1년 이상 남은 내년 대선때까지 지금과 같은 상태가 쭉 이어질 것 같아서 하는 말이지요. 대통령이라는 대체불가의 자리가 비어 있다는 것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 전체가 방향성을 잃었다는 걸 의미하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면 누구나 걱정을 아니할 수 없는 상황이지만 그렇다고 물러나기 싫다는 대통령을 강제로 끌어내릴 수 있는 방법 또한 마땅히 떠오르는 게 없어서 이를 지켜보는 야당이나 국민들 역시 답답한 건 마찬가지입니다.

 

서울 강남에 위치한 모 프리미엄 병원에서 Sunsiri 아줌마뿐만 아니라 그녀의 일가족, 그리고 힘깨나 쓴다 하는 주요 인사들까지 모두 특혜성 처방을 받은 모양이더군요. 대통령 또한 예외는 아니었던가 봅니다. 대통령에 당선되기 전부터 회원권도 없이 드나들었던 것은 물론 당선된 이후에도 대리처방을 받거나 직접 방문하여 병원의 시설을 이용했다지요. 나이가 많았던 전직 비서실장도 그렇구요.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입니다.

 

신분 노출을 꺼렸던 대통령은 '길라임'이라는 가명을 사용했다지요? 나는 이 얘기를 듣고 순간적으로 영어 단어 '크라임'(crime : 범죄)이 혹시 '길라임'에서 온 게 아닌가 하는 엉뚱한 생각이 들었더랬습니다. 병원을 처음 방문했을 때는 '길라임'으로, 몇 번 반복되면서 이게 혹시 국민들에게 알려지면 큰일이 나지 않을까 싶어 '클라임'('클날 것임'의 줄임말)으로, 이것이 다시 'ㄹ'음이 탈락하는 음운탈락 현상에 의해 '크라임'으로 변한 게 아닌가 하고 말이지요. 세상 참 요지경입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혼돈의 상황이, 언제 끝날지 기약없는 이 상황이 어느 날 갑자기 마음을 바꿔먹은 대통령의 '오늘부로 대통령직을 내려놓겠습니다.' 하는 하야성명과 함께 허무하게 끝이 날지 누가 알겠습니까.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오늘부터 전국민이 함께 하는 100일간의 새벽기도회라도 가져야 할까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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