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의 아이콘이 되어버린 작가 이문열을 생각할 때면 짠한 생각이 먼저 든다. 보수에도 물론 여러 갈래가 있어서 그는 그 중 가장 야만적인 보수에 속한다고 해야 하겠지만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건전한 보수를 지향하는 일반적인 보수주의자를 싸잡아 비판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지양해야 함은 물론이다. 우리에게는 분명 '아무런 억압 없이 자신의 의견이나 사상, 주장 따위를 외부에 나타낼 수 있는 자유', 즉 '표현의 자유'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무런 근거도 없는 논리의 비약이나 의도적인 폄훼조차 표현의 자유에 속한다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예술에 있어서는 그런 경우조차 종종 표현의 자유로 용인되기는 하지만 말이다.

 

2003년에는 한나라당의 공천 심사위원으로도 활동했던 그는 2016년 12월 2일자 조선일보에 '보수여 죽어라, 죽기전에... 새롭게 태어나 힘들여 자라길'이라는 제목의 칼럼에서 촛불집회를 북한의 '아리랑 축전'에 비유함으로써 구설수에 올랐다. 그의 표현은 이러했다. "그 촛불 시위의 정연한 질서와 일사분란한 통제 상태에서 '아리랑 축전'에서와 같은 거대한 집단 체조의 분위기까지 느껴지더라는 사람도 있었다. 특히 지난 주말 시위 마지막 순간의, 기계로 조작해도 어려울 만큼 정연한 촛불 끄기 장면과 그것을 시간 맞춰 잡은 화면에서는 으스스한 느낌마저 들었다고 했다."

 

일본 경도제대를 졸업하고 남로당 간부로 역임했던 이문열 작가의 아버지 이원철을 감안할 때 그가 대한민국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대한민국의 권력 앞에 비굴할 정도의 절대 충성을 보여야 했을런지도 모른다. 6·25가 발발했던 당시 서울대 농대 관리자였던 이원철은 9·28 서울수복 당시 만삭의 아내와 어린 4남매, 그리고 늙은 어머니를 남한에 남겨둔 채 월북하여 북한의 농업연구소에서 육종학자로 살았다고 전해진다. 어쩌면 이문열 작가에게 북한은 자신의 아버지를 품어준, 고향의 향수를 자극하는 그런 곳인지도 모른다. 그런 자신의 모습을 가리기 위해서는 더욱 광적으로 북한을 비난하고, 남한 정권에 열광적인 지지를 보내야 했을 것이다. 같은 인간으로서 어찌 가엾지 않겠는가.

 

"죽기 좋은 계절이다. 참으로 많은 죽음이 요구되고 하루라도 빨리 그 실현이 앞당겨지기를 요란하게 기다리는 시절이다."로 시작되는 그의 칼럼은 사실 별 의미도 없다. 부친의 월북으로 인해 박정희 정권에서 받았을 연좌제의 피해를 막아내기 위해 또는 어떤 수세미로도 지워지지 않는 빨갱이 낙인을 지우기 위해 그동안 그는 발악을 하며 살았는지도 모른다. 그동안의 광신적인 충성서약이 그를 반공의 망령에 덧씌워진 채 살아가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그는 이제 영혼이 없이 껍데기만 남은 인간이 되었다. 우리가 그에게 더 무엇을 바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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雨香 2016-12-03 1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아픔을 해학으로 받아낸 이문구와는 참 대비되는 인간입니다. ㅠㅠ

꼼쥐 2016-12-05 15:32   좋아요 1 | URL
이문열이 한국을 대표하는 소설가라는 말은 이제 거둬야 할 것 같습니다. 창피한 일이죠.
 
자거라, 네 슬픔아 - 양장본
신경숙 지음, 구본창 사진 / 현대문학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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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거나 시인이었던 사람의 글을 좋아한다. 나의 이러한 오래된 습성은 문장의 리듬감을 중시하는 '겉멋'에서 발원하는지도 모른다. 정작 나는 노래를 잘 부르지도, 그렇다고 리듬감이 뛰어난 사람도 아니면서 혀끝에 착착 달라붙는 찰진 글을 쓰는 작가의 글만 편애하는 건 어찌 보면 '겉멋'일 수 있다. 나는 이런 책을 읽고 있노라, 뻐기는 것일 수도 있고 말이다. 그러나 반드시 그렇다고만 주장할 수 없는 또 다른 이유는 리듬감이 뛰어난 글일수록 오래 두고 읽어도 지루한 감이 없기 때문이다. 의미야 어찌되었든, 사상의 깊이가 어떻든지 간에 책을 읽으면서 나는 봄날의 새싹처럼 야릇한 흥분을느끼는 것이다.

 

이병률 시인의 산문집은 이제 워낙 많은 사람들로부터 인기를 끌어서 그가 시인이 아닌 에세이스트로 착각할 정도이지만 최영미 시인이나 한강 시인(나는 여전히 한강 작가를 소설가가 아닌 시인으로 기억한다.), 또는 황인숙 시인이나 안도현 시인 또는 류시화 시인 등 시인의 산문집은 독자의 마음을 흔드는 묘한 구석이 있다. 운문을 고집하던 시인이 산문을 쓰면서 겪는 낯선 시선, 시인의 몸에 배인 운문적 글쓰기의 오래된 습관이 책의 곳곳에서 고스란히 드러나는 책 한 권을 손에 들고 읽을라치면 물아일체의 경지가 이런 것이로구나, 생각하게 된다. 나는 여전히 시인의 산문집을 사랑하고 있음이다.

 

시가 사랑받지 못하는 요즘 세대에는 시인의 산문집이 워낙 많아져서 예전처럼 귀한 대접을 받지는 못하는 게 사실이지만 시인의 산문집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의외로 많아서 이따금 나는 모르는 사람으로부터 오래 사귄 동지인 양 살가운 인사를 받기도 한다. 단지 시인의 산문집을 사랑한다는 이유 하나로 말이다. 그렇다고 내가 시인의 산문집만을 항상 고집하는 건 아니다. 때로는 소설가의 산문집도 좋아하는데 그럴 경우 국내외의 몇몇 작가로 한정되곤 한다. 신경숙 작가는 그 중 한 사람이다.

 

표절 시비에 휘말린 게 작년 여름이었으니 작가는 벌써 1년 전에 잊혀진 사람이어야 했다. 그러나 나는 작가의 부재가 가족의 빈자리인 양 느껴질 때가 더러 있어서 그럴 때마다 나는 몇 권 되지도 않는 그녀의 산문집을 별 의미도 없이 뒤적여보곤 한다. 신경숙의 <자거라, 네 슬픔아>는 신경숙의 글과 구본창의 사진이 어우러진 영상 에세이집이라고 할 수 있다. 대개 이런 종류의 책은 사진과 글이 영 따로 노는 경우가 많아서 사진집이거나 에세이집이었더라면 더 좋았을 걸, 하고 아쉬워 하는 경우가 다반사인데 구본창의 사진이 신경숙의 글을 방해하지 않을 뿐더러 신경숙의 글이 구본창의 사진으로 인해 더욱 빛이 나는 느낌이다.

 

"문득문득 눈앞이 시어지며 저리 아름드리로 저리 넓은 품을 지닌 소설을 쓰고 싶은 욕망이 불끈 솟아오르는 것이다. 봄날의 찬란한 귀룽나무를 보고 있을 적엔 내가 영원히 싸워야 할 것 같은 허무가 아득히 지워지며 갸륵하게도 뭔가를 생산해내고 싶어서 귀밑이 후끈 달아오르기도 한다." (p.133 '귀룽나무 아래서' 중에서)

 

신경숙의 글은 저마다의 가슴 밑바닥에 숨겨두었던 지난 슬픔을 조용히 다시 불러내어 가만가만 어루만지기도 하고 잊혀졌던 옛슬픔을 한껏 휘저어 놓기도 한다. 그녀의 글이 늘 그렇듯 이 책에서도 작가의 한쪽 발은 과거에 담근 채였다. 작가와 내가 나고 자란 시간과 공간이 다를지언정 과거로 향하는 애잔한 정서만큼은 하나로 이어지는 까닭에 나는 언제나 작가의 글에 중독되는 것이다.

 

"나의 시선은 우연인 것 같으나 그 응시 속에는 어린 시절의 어떤 기억들이 찰랑거리고 있었을 것이다. 빨래를 하러 가는 어머니 뒤에는 꼭 내가 있었다. 어머니는 위에 앉고 나는 아래에 앉아 빨래를 빨았다. 어머니가 큰 옷을 빠는 동안 나는 손수건이나 걸레 따위를 주물럭거렸다." (p.209 '그들은 어디로 갔을까' 중에서)

 

'갑자기 비가 내리면 할 말을 잊은 것처럼 할 일이 없어지는 사람들이 있다.'에서 보듯 작가는 한 문장에서 하나의 영상을 그려내곤 한다. 하염없이 비가 내리는 풍경을 하릴없이 바라보고 있는 한 여인이 떠오르기도 하고, 왠지 모를 울음이 왈칵 쏟아질 것 같기도 하다. 작가의 글은 어렸을 적 자신의 어머니, 똘망똘망한 눈으로 한없는 애정을 담아 바라보던 그 어머니의 눈매를 떠올리게 하는 것이다. 마치 모든 기억은 다 슬프고 아름다운 것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오래전 사람들에게 풍경은 쉬엄쉬엄 걷다가 고개를 들어보았을 때 문득 눈앞에 펼쳐지는 장엄한 아름다움이었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그런 풍경은 사라졌다. 풍경은 타고 가는 차의 앞 유리창이나 옆 유리창의 크기로 축소되었으며 그마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우리에게서 멀어져간다." (p.234 '백미러 속 풍경'중에서)

 

새벽의 어둠 속을 걷다 보면 내가 그 길로 내처 걸으면 내 어릴 적 동무들과, 마을 사람들과, 보고 싶었던 모든 사람들을 하나하나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은 착각에 빠질 때가 있다. 그러다 문득 정신을 차리고 산의 정상에서 발길을 돌릴라치면 내딛는 발에 힘이 빠져 휘청이곤 한다. 살아온 시절이 마치 꿈만 같아서 무너질 듯 허망해지는 것이다. 지난 과거는 지금의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이지만 잊혀짐의 대상, 체념과 허망함의 대상이 아니라 용서와 공존의 대상, 이따금 꺼내어 매만져야 할 서글픈 아름다움이라는 걸 작가는 말하고 싶었나 보다. 오늘은 슬픔이 추억처럼 아름다운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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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그친 새벽 기온은 생각보다 푸근했다. 달도 별도 없는 어두운 하늘과 인적이 끊긴 숲은 적막하다 못해 괴괴한 느낌마저 들었다. 빗물에 젖은 낙엽의 구수하고 달착지근한 냄새와 간간이 퍼지는 솔향기. 적당히 젖어 한결 부드러워진 흙과 점액질의 습기를 머금은 공기로 인해 숲의 나무들은 안심하고 숙면을 취하는 듯했다. 내 발자국 소리에 놀란 꿩이 이따금 푸드득 날아올랐다.

 

산길을 걷는 내내 나는 '용기'에 대해 생각했다. 비겁으로 일관했던 대통령의 3차 담화문 발표를 들었던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들은 아마도 나처럼 한번쯤 '용기란 무엇인가?'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가진 게 많은 사람, 잃고 싶지 않은 게 많은 사람은 결코 용기있는 사람이 되지 못한다. 지금 시점에서 대통령은 잃고 싶지 않은 게 너무도 많았나 보다. 가난한 사람은 용기있게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더이상 잃을 게 없기 때문이다. 비록 가진 게 많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유혹이나 욕망을 초월한 사람, 물욕이나 권력에 대한 욕구를 초월한,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용기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용기란 두려움에 대한 저항이고, 두려움의 정복'이라고 했던 마크 트웨인의 명언이나 '용기는 가장 훌륭한 것들 가운데 하나이며 지혜를 수반하는 인내라야 한다'고 했던 소크라테스의 명언은 지금 시점에서 한번쯤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

 

미국의 시인 랄프 왈도 에머슨이 말하기를 '인류의 경탄과 존경심을 자아내게 하는 자질 세 가지는 첫째는 사심없는 마음이고, 둘째는 실용 능력이며, 셋째는 용기'라고 했다. 진실을 말할 때에도 용기가 필요하며, 자신의 과오를 솔직하게 고백할 때에도 용기가 필요하다. 미래의 결과에 집착하여 이것은 되고, 저것은 되지 않는다'는 식의 구별은 사람을 한없이 비겁하게 만든다. 조금도 손해보지 않겠다는 심사가 아닌가. 결국 우리의 삶에서 가장 필요한 것은 용기가 아닐 수 없다. 용기는 삶의 근본이며, 모든 덕목의 토양이기 때문이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라고 했던 성경 말씀도 결국 용기의 저변에 깔린 가난한 마음, 시인 에머슨이 말한 사심없는 마음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을지라도 진실을 위해 한발짝 앞으로 나아가겠다는 마음은 사람들로 하여금 뭉클한 감동을 느끼게 한다. 우리가 감동하는 것은 용기있는 자의 어눌하고 솔직한 한마디 말이지 비겁한 자의 번지르르한 거짓말이 아니다. '거짓' 때문에 분노했던 국민들에게 또다시 '거짓'의 말로 변명하는 대통령과 여당은 그 얼마나 비겁한 것인가.

 

오후가 되자 바람이 거세다. 마른 낙엽은 서걱거리며 보도 위를 뒹굴고 한 줌 초겨울 햇살이 비스듬히 비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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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02 03: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2-02 16: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그 노래는 어디서 왔을까
공선옥 지음 / 창비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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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 독자들보다 프로 작가들에게 더 사랑받는 작가가 있게 마련입니다. 공선옥 작가도 그런 작가 중 한 사람이 아닐까 싶습니다. 그렇다고 작가들 사이에서만 인기가 있고 일반 독자들로부터의 인기가 아주 없다는 애기는 아닙니다. 일반 독자들로부터 듣는 찬사보다 동료 작가들의 칭찬이 더 깊고 강하다는 것이지요. 이런 데에는 아마도 그녀의 작품 속에 깃든 날것의 느낌, 어느 것에 물들거나 규격화되지 않은 자유로운 느낌이 작품을 읽는 독자들 가슴에 차곡차곡 쌓이기 때문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소설가 공선옥의 오랜 독자 중 한 사람인 나는 한국 소설의 정형화된 틀로부터 툭 불거져 나간 듯한 그녀의 작품들을 늘 기꺼운 마음으로 읽어 왔던 게 사실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는 광주 민주화운동에 맞닿아 있는 작가의 오랜 분노가 답답한 응어리로 남아 있었던 것 또한 사실이었습니다. 작가로 등단하기 이전까지의 힘들었던 삶에서 발원하는 절망 또한 작품 속에서 그 분노에 더해졌던 까닭에 독자가 느끼는 한과 분노는 한층 배가되는 느낌도 있었습니다.

 

어제는 대통령의 3차 대국민 담화가 있었습니다. 탄핵 소추안 표결을 염두에 둔 여러 포석이었겠지요. 이미 예견된 일이었지만 내용인 즉 자신은 잘못이 없지만 국정의 공백과 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 '여야 정치권이 논의하여 정권 이양 방안을 만들어주면 그 일정과 법 절차에 따라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달리 말하면 자신은 잘못이 없지만 '퇴진을 바라는 국민들 의사가 완고하니 국민들을 대신하는 국회에서 알아서 해라' 하는 의미이겠지요. 그러나 그것은 누가 보더라도 가능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어찌 보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지 않겠다는 속내를 사과의 형식으로 에둘러 말한 것일 뿐 아무런 의미도 없는 담화였습니다. '뮤전무죄 무전유죄'의 속설에 더하여 '유권무죄 무권유죄'의 현실은 과거 5ㆍ18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듯합니다.

 

"세상이 미친 거여. 미치지 않은 세상은 언제였을까. 나한테도 미치지 않은 세상이 있었을까. 딸한테 몹쓸 짓을 한 아버지는 미쳤지. 아버지가 미쳤다는 것을 모른 척한 엄마도 미쳤지. 식구들 다 미쳤지. 동네 사람들 다 미쳤지. 나도 미쳤지. 내 속에 이 큰 슬픔을 누구한테 말할까. 미친 세상에서 미치지 않는 사람들은 다 미친 거여. 미친 세상에서 미친 사람만이 미치지 않은 거여." (p.198)

 

<그 노래는 어디서 왔을까>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많지만 이야기는 주로 정애와 묘자에게 집중되고 있습니다. 소설은 새마을 운동이 한창이던 1970년대 중반 남도의 시골 마을 '새정지'와 80년을 전후한 광주를 배경으로 진행됩니다. 새정지에서 나고 자란 두 소녀 정애와 묘자는 가난한 시골 마을에서도 가장 힘없고 가난한 축에 속했습니다. 경제적으로 무능한 아버지와 정신이 온전치 못한 어머니 사이에서 맏딸로 태어난 정애는 어느 날 그녀의 아버지가 투전판에서 돈을 모두 잃고 도망가는 바람에 세 명의 동생과 임신한 어머니를 도맡게 됩니다. 묘자 또한 정애와 별반 다르지 않아서 그녀의 어머니가 자신과 할머니를 두고 개가를 하는 바람에 몸이 불편한 할머니를 모시는 가장의 입장이 되었습니다.

 

바람막이가 없는 두 소녀에게 가해지는 마을 남자들의 더럽고 추악한 폭력은 끊이질 않았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정애네 집 담장을 무너뜨리고 돼지와 오리를 훔쳐갑니다. 한편 새마을 연쇄점에서 하드를 얻어 먹은 바로 밑 동생 순애는 주인에게 몸을 뺏긴 후 시름시름 앓다가 죽고, 우물가에서 빨래를 하던 정애도 '부로꾸 찍는 남자'에게 끌려가 몹쓸 짓을 당하고 맙니다. 정애의 엄마가 쌍둥이를 낳다가 목숨을 잃었고 아버지마저 동네 사람에게 살해되자 정애는 살아 남은 동생 두 명을 데리고 광주로 나가 콩나물 장사를 시작합니다.

 

"옛날이야기 싫어하는 세상에서 옛날이야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사는 곳은 어디나 푸근하다. 새것을 말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무섭다. 모든 새것들은 다 무서운 것이다. 돈도 없고 힘도 없는 사람들에게는." (p.137)

 

정애가 새정지를 떠나고 5년의 세월이 흐른 1981년, 재가한 엄마와 함께 살기 위해 광주로 나온 묘자는 그곳에서 우연히 정애를 만나게 됩니다. 정애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소설에서는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지는 않지만 지난봄에 이 도시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갔다는 소문과 함께 군인들이 정애에게 몹쓸 짓을 하지 않았을까 추정할 뿐입니다.

 

엄마의 식당일을 돕던 묘자는 박용재와 사랑에 빠져 살림을 차리게 됩니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 발발 전에 카센타에서 일을 했던 박용재는 시민군으로 몰려 군인들에게 끌려가 모진 고초를 겪고 나온 후 충격으로 정신이 온전치 않았습니다. 직장마저 얻지 못한 박용재를 대신하여 묘자는 정애를 돌봐주던 식당 '영암집'에서 일을 하게 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용재가 칼을 들고 자신을 죽이려 들자 그를 목졸라 죽이고 살인죄로 구속됩니다.

 

"영암집 숙자가 죽은 사람은 있어도 죽인 사람은 없는 야속한 세상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산 사람들은 사는 것에 바빠서 그렇게 많은 사람이 죽었어도 그 사람들이 언제 죽었냐 하고서 잊어버리고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인 사람이 분명히 있을 텐데도 그 사람이 누구를 죽였든지 말든지 내 알 바가 아니라고 시치미 뚝 떼는 세상이라고." (p.165)

 

정애는 동생들만 광주에 남겨둔 채 다시 새정지로 돌아갑니다. 육체와 정신이 온전치 못한 정애는 폐가로 변한 고향집에서 간신히 연명합니다. 그것도 한동안.

 

"이 세상에서 잡고 싶은 것은 아름다운 것이고 잡고 싶은 데도 잡히지 않는 것은 슬픈 것이다." (p.34)

 

세월을 훌쩍 건너뛰어 감옥에서 풀려난 묘자는 숙자가 하던 '영암집'을 자신이 맡아서 하게 됩니다. 백발이 된 묘자는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서 정애인 듯한 여인과 조우합니다. 묘자의 귀에 그 여자의 노랫소리가 들리는 듯합니다. 묘자는 사라진 여인과 아련한 노랫소리에 빗속에서 넋을 놓습니다.

 

"나는 어디서 왔을까, 하고 묻던 여자는 어디로 갔을까. 내 노래는 어디서 왔을까, 하고 묻던 여자의 노래는 어디로 갔을까. 여자가 남긴 노랫소리만이 빗물에 젖고 있었다. 노래에 빗물이 스며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빗물은 노래와 한몸이 되어 어디론가로 흘러갔다. 빗물을 타고 노래가 어디로 흘러가는 것인지 알 수 없어 묘자는 한참 동안 빗속에 있었다.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저 노래는 어디서 왔을까,를 생각하면서." (p.260)

 

아침부터 흐렸던 하늘에선 기어코 비가 내립니다. 궂은 날씨를 핑계삼았던 나는 공선옥 작가의 소설 <그 노래는 어디서 왔을까>를 끝내 다 읽고 말았습니다. 차마 중간에 내려놓을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삶이 말할 수 없이 힘들 때에는 누구나 노랫가락 한 소절 흘러나오게 마련입니다. 들어주는 사람 아무도 없을지라도 허공에 대고 꾸역꾸역 부르게 되지요. 아마도 우리의 핏속에는 원시시대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노래 DNA가 흐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인지 공선옥의 소설 <그 노래는 어디에서 왔을까>에는 차마 말로 할 수 없는 참혹한 장면에서는 여지없이 노래가 등장하곤 합니다. 작자미상의 오래된 노래인 양 출처도 알 수 없는 노래들이지요. 그 노래로 인해 소설은 아주 오래전의 구전가요인 양 환상과 추억으로 읽힙니다. 작가는 아픈 현대사의 슬픔을 노래로 씻어내려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요즘 주말마다 광화문 광장에 울려퍼지는 노래도 이와 같을 것입니다. 국민들의 분노와 응어리가 노랫가락에 한처럼 서려 있음을 정치인들은 똑똑히 보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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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의 최전선 - ‘왜’라고 묻고 ‘느낌’이 쓰게 하라
은유 지음 / 메멘토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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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를 처음 시작했을 때 몇 년 안에 책을 내겠다거나 하는 식의 어떤 거창한 목표를 세웠던 건 아니다. 그러나 마음 속에 품었던 단 하나의 생각은 내가 보았던 그대로, 내가 들었던 그대로, 내가 생각했던 그대로를 내 두 손을 통하여 글로 쓰고 싶다는 거였다. 처음에 나는 그게 그토록 힘든 일인 줄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때 나는 어쩌면 전문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도 감히 품지 못하는 대단한 목표를 세웠는지도 모르지만,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고 나는 그때 그런 사소한 것도 알지 못하는 두려움 없는 하룻강아지에 불과했었다.

 

글쓰기의 어려움은 오히려 글을 쓰는 횟수가 늘어나면서, 글을 써온 기간이 길어지면서 비례하여 증가했다. 하다 못해 자동차를 수리하는 정비 기술도 하면 할수록 몸에 익고 나날이 향상되는 법인데 기껏해야 자신의 생각을 있는 그대로 글로 쓴다는 게 이렇게나 어려울 줄이야 상상이나 했을까. 내가 쓴 글을 읽어볼라치면 처음 생각과는 딴판인, 전혀 다른 사람의 글이 되곤 했다. 그제서야 나는 "사랑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내려오는 데 칠십 년이 걸렸다."는 김수환 추기경님의 말씀이 조금쯤 이해가 되었다.

 

정말 그랬다. 타인을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움직이게 한다는 뜻의 '제 수족처럼 부린다'는 말은 우리가 평상시에 아주 쉽게 내뱉는 말이지만 자신의 두 손도 생각하는 대로 쓸 수 없는 게 인간인데 하물며 다른 사람을 수족처럼 부린다는 건 나로서는 꿈도 꿀 수 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달리 노력을 아주 하지 않았던 것도 아니다. 시중에 나와 있는 어지간한 글쓰기 관련 서적은 한 번씩은 다 읽어보았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나의 글쓰기 실력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고 '노력은 결코 배신하지 않는다'는 말도 다 허언처럼 들렸다.

 

그런 줄 번연히 알면서도 오늘 또 나는 글쓰기 관련 책을 읽었다. 은유의 <글쓰기 최전선>. 책의 제목은 다소 비장한 느낌이 들게 했다. 이게 아니면 나는 끝이다, 하는 결연함이 엿보이기도 하고. 그러나 책의 내용은 글쓰기에 관한 세세하고 정교한 기술을 가르치기보다는 글쓰기의 방향이나 목적, 사람과 삶의 이해 등 전체적인 맥락에서의 글쓰기에 대해 언급하고 있었다. 이를테면 '글쓰기 내공'을 강화하기 위한 기초 체력의 연마에 중점을 둔 책이라고 말할 수 있다.

 

"내가 쓴 글이 곧 나다. 부족해(보여)도 지금 자기 모습이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드러내고 인정한다는 점에서, 실패하면서 조금씩 나아진다는 점에서 나는 글쓰기가 좋다. 쓰면서 실망하고 그래도 다시 쓰는 그 부단한 과정은 사는 것과 꼭 닮았다. 김수영의 시『 애정지둔(愛情遲鈍)』에 나오는 대로 "생활무한(生活無限)"이고 글쓰기도 무한이다." (p.58)

 

"수유너머R"에서 글쓰기 수업을 진행했던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이 책은 글을 처음 쓰기 시작했을 때 누구나 맞닥뜨리게 되는 문제들을 허심탄회하게 드러내 놓고 함께 고민한다. 글을 씀으로써 얻게 되는 이득, 예컨대 자신의 삶을 옹호하게 된다거나 타인의 고통을 이해하게 된다거나 하는 것들로부터 시를 통한 사유의 폭을 넓히는 문제, 글의 모티브를 찾는 방법 등에서부터 르포와 인터뷰 기사 쓰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를 다루고 있지만 결국 '글은 삶의 거울이다'라는 명제에 이르게 되고 그것은 곧 '왜 쓰는가?'의 문제로 회귀한다.

 

"글쓰기를 한다는 일은 마음껏 슬퍼하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슬퍼한다는 것은 온전한 내가 되는 일 같다. 나의 슬픔과 기쁨을 후련하게 말하기. 기쁨을 내밀듯이 슬픔을 꺼내놓는, 존재의 편안한 열림을 글쓰기가 돕는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열어젖혀진 존재 위로 또 다른 말들과 생각들이 날아들 것이다." (p.269)

 

아쉽게도 나는 글쓰기에 바쳐온 나의 시간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단 한 발자국의 전진도 보지 못했다. 그렇다면 딱 하나 '재능 없음'의 결과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데 그건 또 인정하기 싫은 것이다. 첫눈이 내렸던 오늘, 어디에 기댈 데 없는 나의 글쓰기 솜씨는 나를 우울하게 한다. 복권에 당첨되면 없던 글쓰기 솜씨도 일거에 구제할 수 있는 그런 복권이 있다면 우연에 기대를 걸고 한 장 사고 싶은 마음이다. 혹시 그런 복권을 파는 곳이 있으면 제보 바란다. 진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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