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아라, 내일은 없는 것처럼 소희와 JB, 사람을 만나다 남미편 1
오소희 지음 / 북하우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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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는 실제하는 현실과 그 순간에 펼쳐지는 자신의 생각이 별개의 세상처럼 분리되어 있다고 느껴본 적이 있나요? 마치 다중 우주론에서나 나오는 차원이 서로 다른 우주처럼 일상을 기계적으로 살아가는 몸과 그것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생각이 공존하고 있다는 느낌. 그렇게 오랜 세월을 살다 보니 이제는 살아가는 것에 대한 감동마저 사라진. 하루가 그저 무심하게 흐르고 나는 그 시스템 안에서 반복되는 일상을 살아가고 있을 뿐, 그것에 대한 일체의 감정이나 느낌마저 사치인 양 치부되는 그런 삶. 그래서 더는 자신의 의견이 존재하지 않고, 그렇게 순응하며 사는 게 기본적이면서도 보편적인 우리네 삶이라고 적당히 위로하는 그런 삶.

 

문득문득 나의 일상과 생각이 철저히 분리된 채 살아가고 있다고 느끼곤 합니다. 아주 오래전부터 말이죠. 인지하지 못하는 삶에서 감동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타인의 삶을 그저 무심히 바라보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곤 하지요. 이것이 어쩌면 애당초 내가 꿈꾸던 삶이 아니었기에 나는 상상 속의 삶과 현실의 삶을 철저히 분리한 채 살아왔는지도 모르지만 그런 시간이 오래 지속되다 보면 어느 순간 호불호나 선과 악 등 판단의 경계마저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는 듯 느껴집니다.

 

그러나 일상을 사는 나와 생각하는 존재로서의 나가 일치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여행을 할 때입니다. 비록 몸은 힘들지만 마음 한켠에서는 기쁨과 감동이 샘솟듯 솟아납니다. 아마도 그것은 육체가 체감하는 현실과 마음 속 생각이 일치하는 데서 오는 벅찬 감동이 아닐까 싶습니다. 순간순간을 인식하며 산다는 건 기쁨이자 축복이 아닐 수 없기 때문입니다. 멀뚱히 떨어져서 바라보는 것과는 많이 다르지요. 남들이 보기에는 하찮아 보이는 일상일지라도 그것을 체험하는 당사자에게는 감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타인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이 하는 일을 순간순간 인식하며 살아갈 수만 있다면 그게 바로 진정한 삶이자 우리가 꿈꿀 수 있는 최고의 삶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가 흔히 읽는 여행기 또한 다르지 않으리라 봅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작가는 여행에서의 체험과 그 순간의 생각들을 놓치지 않아야 하겠지요. 그렇게 기록한 순간순간의 감동을 독자에게 고스란히 전달하는 책을 일컬어 우리는 잘 쓰인 여행기라고 하겠지요. 대단한 풍광을 사진에 담거나 어떤 특별한 사건을 기록한다고 해서 책을 읽는 독자가 감동하는 건 물론 아닐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소희 작가는 자신의 여행 경험을 무척이나 잘 전달하는, 말하자면 여행기에 특화된 작가가 아닐까 싶습니다. 내가 오소희 작가를 처음 알게 된 건 그녀가 세 살배기 아들 중빈과 함께 터키를 여행한 후 썼던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겠지>였습니다. 나는 그 책을 읽고 퍽이나 놀랐던 것 같습니다. 세 살배기 아이를 안고 그 먼 나라까지 간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던 것이지요. 대단하다는 느낌보다는 별 이상한 여자 다 보겠네, 하는 심정이었습니다.

 

그러나 터키를 비롯하여 아랍, 라오스, 아프리카, 남미 등 제3세계를 주로 여행하는 작가의 인생관과 교육관은 배울점이 많아 보였고, 그녀의 작품을 사랑하는 한 사람의 팬이 되었던 건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순서였던 것 같습니다. 이번에 나는 작가와 그녀의 아들 JB가 남미를 여행하고 쓴 <안아라 내일은 없는 것처럼>을 읽었습니다. 남미 여행기의 1부에 해단하는 이 책에는 페루, 볼리비아, 브라질, 콜롬비아를 여행하며 그곳에서 마주친 사람들과 그 속에서 느꼈던 작가의 감상이 담겨 있습니다.

 

"세상에는 꿈을 소중히 하는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이 있을 뿐이다. 꿈을 키워주는 곳과 싹을 죽이는 곳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각각의 장소에서, 끝까지 꿈을 놓지 않는 사람과 놓아버리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간절함을 꽉 붙잡고 있는 사람과 시간 속에 녹여버리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p.400)

 

터키를 여행할 때 세 살이었던 JB(중빈)는 이제 열 살이 되었고, 방문하는 나라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엄마와 함께 대화를 나누고, 여행지에서 만난 사람들과 스스럼없이 대하고 불편함을 꿋꿋이 참아낼 줄 아는 든든한 여행 동반자로 성장했습니다. 여행 도중에 아이의 학교가 개학을 했는데 그때도 작가는 '여행을 계속하겠다'며 선생님께 양해를 구하기도 했습니다. 아들과 언제든 속 깊은 대화를 할 수 있게 된 게 여행이 주는 선물이라고 말하는 그녀는 와카치나에서 만난 젊은 식당 매니저 훌리오의 말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마존의 원시부족 마치겡가족의 일원인 훌리오는 계부의 폭력을 피해 17살부터 세상을 떠돌며 삶에 필요한 모든 것(언어, 음악, 미술 등)을 익혔던 사람입니다. 작가가 그에게 묻기를 '만약 당신의 아들이 당신처럼 어린 나이에 여행을 하겠다고 한다면 어떤 말을 들려주겠는가' 물었을 때 그가 들려준 대답입니다.

 

"아들아, 인생을 살아가려면 균형이 중요하단다. 너무 선하면 안 돼. 때에 따라 'No'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하니까. 너무 악해서도 안 돼. 때에 따라 베풀 줄 알아야 하니까. 사막의 사구를 보렴. 빛과 그림자가 만나 정확한 경계를 이루지. 여행이란 꼭 그 경계를 따라 걷는 일과 같아. 새로운 경험들에 도전하면서, 밝음과 어둠, 그중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균형 있게 걷는 법을 배우는 거지. 새로운 도전은 언제나 새로운 지평을 열어준단다. 네가 그 존재조차 알지 못했던 지평을 말이야. 그러니 어서 떠나거라. 벌떡 일어나 걸어.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필요하다면 주먹질도 해. 다가올 일들에 너를 던져. 언젠가, 후우, 큰 숨을 내쉬며 마음의 평화를 느낄 때까지."   (p.232~p.233)

 

여행지에서 JB는 길거리에서 바이올린 연주를 하여 모은 돈으로 가난한 사람을 돕기도 하고, 엄마보다도 먼저 현지의 친구를 사귀기도 하고,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위험으로부터 엄마를 지키기도 합니다. 여행은 아이에게 커다란 학교였던 셈입니다. 그러나 정규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 것에 대한 일말의 불안감이 왜 없었겠습니까. 그럼에도 그녀는 "고르게 놀리고 심리적으로 안정된 토양을 만들어 주면 아이는 제 스스로 삶을 관리해 나간다"는 확고한 신념을 버리지 않고 있었던 듯합니다.

 

"제3세계를 주로 여행하는 사람으로서, 가난한 나라 가운데 행복지수가 높은 나라가 많은 이유는 소통과 배려 때문일 것이라고 확신한다. 결국, 돈으로 살 수 있는 행복, 혹은 돈으로 이용가능한 시스템이 가져다주는 행복은 생각보다 적은 것이다. 기본적인 의식주가 해결된 뒤에 돈은 대단한 행복을 가져다주지 못한다. 그보다 '감각적 만족'을 가져다준다. 행복과 감각적 만족은 엄연히 다른 것이다. 행복은 원초적인 것이고 감각은 말초적인 것이다. 모든 말초적인 감각은 한시적이다."    (p.252)

 

그동안 집필한 책의 인세 절반을 제3세계 청소년 도서관을 세우는 데 기부하고 독자들과 책 보내기 프로젝트를 꾸준히 진행해 오고 있는 작가는 이번에도 이 책의 인세 절반을 남미 볼리비아에 기부한다고 합니다. 작가가 생각하는 여행은 '내가 있던 자리를 떠나 내가 있던 자리를 보는 일'이라고 말했습니다. 물론 여행을 지속해오면서 그때 그때마다 생각은 늘 바뀌었겠지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작가는 오롯이 자신의 삶과 생각을 일치시키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2017년 정유년 새해에는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살아내기'보다는 '살아가는' 나날이 될 수 있기를 나는 이 책을 읽는 내내 기원했습니다. 적어도 작가처럼 여행의 장도에 오르지 않더라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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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감정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이제는 어지간히 없어졌겠지, 생각할라치면 도돌이표처럼 원래의 자리에 그 감정 그대로 떡하니 버티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 때마다 하릴없는 한숨만 깊어지곤 한다.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문신처럼 슬픔은 그렇게 숨죽인 채 조용히 가슴 한켠을 붙박이로 차지하고 있다가 일상에서 맞닥뜨리는 우연과 같은 작은 일에도 슬픈 감점을 봇물처럼 터뜨리곤 한다. 그렇다고 가슴 속의 눅눅헤진 슬픔을 깨끗이 털어내고 마른 걸레로 보송보송하게 훔쳐낼 수도 없으니 슬픔에 대처하는 우리의 자세는 그저 스스로 잠잠해지기를 기다려며 참고 인내하는 수밖에 달리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세월이 약이라는 말처럼 무대책의 무기력하기만 한 말이 세상에 또 있을까.

 

슬픔의 유효기간은 저마다 다르다. 그러나 슬프지 않다는 것은 내 안의 슬픈 감정이 지금 현재 요동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할 뿐 슬픔을 영원히 잠재울 수는 없는 법. 슬프지 않은 사람이 슬퍼하는 사람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는 것이 아니라 슬픔이 유예된 자가 슬픔이 발현된 자를 향해 내보이는 동지애이거나 말할 수 없이 착잡한 연민의 감정이 아닐런지. 너나 할 것 없이 살아간다는 건 결국 슬픔 보균자로서의 가엾은 처지를 견디는 것. 그렇게 내가 당신을 이해하는 것.

 

슬픔에게 무릎을 꿇다....... 재 무

어항 속 물을
물로 씻어 내듯이
슬픔을 슬픔으로
문질러 닦는다.

슬픔은 생활의 아버지
무릎을 꿇고
두 손 모아 고개 조아려
지혜를 경청한다.

 

'슬픔을 슬픔으로 문질러 닦는다'는 시인의 시구처럼 우리는 나의 슬픔으로 너의 슬픔을 위로하고 그렇게 그득해진 우리의 슬픔 속에서 마음의 평안을 느낀다. 2016년을 하루 남겨 놓은 오늘, 지금 슬퍼하는 누군가에게 아직 슬픔이 찾아오지 않은 한 사람의 자격으로 그 사람을 위로하고 싶다. 슬픔이 또 다른 슬픔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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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토끼처럼 귀를 기울이고 당신을 들었다 - 황경신의 한뼘노트
황경신 글, 이인 그림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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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의 저자인 로버트 풀검도 말하고 있지만 어린 시절에 꼭 배우고 넘어가야 할 것들은 무수히 많다. 그중에는 더러 극히 주관적인 것들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들도 있다. 그러나 우리들 누구나 '그때 배웠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고 후회하는 것 한두 가지씩은 갖고 있게 마련이다. 나 또한 다르지 않아서 그 시절에 배우지 못해 후회하는 것들이 몇 가지 있다. 그중에는 가정 형편상 어쩔 수 없이 배우지 못했던 것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것들도 있다.

 

언뜻 떠오르는 것은 동식물의 이름이다. 강원도 산골에서 나고 자랐던지라 숲의 나무나 풀 등 식물의 이름과 개구리나 두꺼비, 맹꽁이, 다람쥐 등 흔히 볼 수 있는 동물의 이름은 모르는 게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중학교 2학년에 막상 도시로 전학을 하고 보니 내가 알던 동식물은 보이지 않고 어디를 가나 죄다 모르는 것 투성이였다. 내가 살았던 곳의 식생과 달라도 너무 달랐던 것이다. 책을 보면서 이름들을 익혀보려고도 했지만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산으로 들로 뛰어다니면서 나물도 뜯고, 더덕도 캐고 버섯도 따면서 자연스레 익혔던 것과 공부 삼아 일부러 익히는 것은 차이가 있었다. 드는 수고도 수고지만 아무리 외워도 그때뿐이고 조금 지나고 나면 번번이 잊어버리곤 했다.

 

또 있다. 예술적 감수성이다. 음악이나 미술 분야도 그렇겠지만 문학에 있어서도 한창 감수성이 뛰어난 시절에 글쓰기 연습이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으면 나이가 든 후에는 아무리 노력을 해도 가능하지 않은 것들이 있게 마련이라는 생각이다. 시기를 놓친 후에 이루어지는 독서나 습작만으로는 한계가 있다는 얘기다. 감각적 글쓰기로 유명한 황경신 작가의 책을 읽을 때마다 나는 그녀의 어린 시절이 늘 궁금했었다. 내가 추측하건대 그녀는 분명 어린 시절부터 예술적 감수성을 충분히 살릴 수 있는 환경에서 성장했을 터였다. 그럴 것이라고 막연히 추측만 했었는데 최근에 읽었던 어느 인터뷰에서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제가 어릴 때 학교 들어가기 직전 직후에 읽었던 안데르센이나 집에서 아빠가 항상 틀어놓았던 클래식 음악이 기억에 남아요. 그때는 그걸 좋아한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는데, 오히려 대학생이 되고 나서 어린 시절에 누렸던 게 좋아지기 시작했어요." 내 추측이 어느 정도 들어 맞았던 것이다.

 

황경신의 에세이 <나는 토끼처럼 귀를 기울이고 당신을 들었다>를 읽었다. 재작년에 읽었던 <생각이 나서> 이후 그녀의 책은 참으로 오랜만에 읽는다. 그녀는 어쩌면 에세이에 최적화된 작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문득 해본다. 그녀의 문장에는 연습만으로는 닿을 수 없는 독특한 개성이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이런 문장이다.

 

"아침에 너는, 어리둥절한 채로 일어나, 부스스한 영혼의 쓴맛을 훑는다. 밤새 무뎌진 과도로 사과를 깎고, 창을 열어 거울을 받아들인다. 아침에 너는, 생의 가장자리에 묻은 얼룩을 닦아내고, 오래도록 소식이 없는 사람을 잠깐 떠올리다가, 이내 고개를 흔들어 상념을 쫓아낸다." (p.29)

 

화가 이인의 작품을 보고 떠오르는 그때그때의 영감을 글로 옮겨 한 권의 책으로 엮기까지 때로는 단번에, 때로는 뜸을 들이듯 아주 천천히, 혹은 죽음과 같은 침묵으로 이 글들이 씌어졌을 것이다. 시를 읽고 그것을 노래로 바꾸는 작업처럼 그림을 보고 그것을 글로 재창조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일이다. 그림에 조예가 깊은 사람일지라도 그것은 마찬가지일 터, 작가의 멈춤과 이어짐이 어떤 깨달음처럼 이어진다.

 

"당신이 언제까지나 나에게 낯설었으면 좋겠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의 서투름은 나의 진심을 증명하는 것임을 믿어주었으면 좋겠다고, 하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모든 익숙함에 대해 경계하는 것이 나의 삶임을, 무엇인가에 익숙해지는 순간, 꽃처럼 시들어버릴지도 모를 것이 또한 진실임을, 한없이 차오르는 것과 한없이 비어가는 것의 동일한 무게를, 희미하고도 선명한 시간의 직선과 곡선들을,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은 모순투성이의, 그 친밀하고도 낯선 엉망진창의 뒤엉킴을, 이미 알고 있는 사람이 당신이라면 좋겠다고.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사람이 당신이라면 좋겠다고" (p.157)

 

볼에 닿는 바람이 차다. 아침에 나는 간간이 눈이 내리는 새벽 산길을 걸었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간밤에 내린 비 때문에 땅은 부드러웠고, 촉촉히 젖은 낙엽과 물기를 머금은 나무 둥치를 보며 곧 펼쳐질 하루에 대해 저으기 안심했었다. 그러나 오후가 되자 하늘은 더없이 화창하게 맑았고, 싸늘해진 바람이 코끝을 할퀸다. 쉽지 않은 하루인 것이다.

 

"매일 아침 해가 떠오르듯 기다림이 떠오르고 세계는 부드럽게 몸을 뒤척인다. 지구의 리듬에 순응하며 사람들은 짓는다. 마주 보는 이야기를, 공존하는 이야기를, 그리하여 자신의 이야기를. 그 모든 것들은 기다림의 시간 안에서만 가능하다." (p.272)

 

나는 항상 과거를 향해 기다림의 손길을 뻗는다. 다시는 오지 않을 시간, 불가능의 영역에 나는 매번 집착한다. 습관처럼 굳어진 생의 절망을 등에 지고 나는 또 한 해의 마지막에 서 있다. 며칠 후면 나는 또 보신각 타종 소리를 듣고 인파 속에서 누군가에게 신년 인사를 전하고 이 글을 쓰고 있는 과거를 향해 그리움의 손길을 내밀 것이다. 나의 기다림은 언제나 과거를 향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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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나절, 눈이 내렸다. 누군가에게 제 존재를 확인시키려는 듯, 익숙한 계절 풍경을 연출하려는 듯, 가는 눈발이 어두운 하늘 위로 표표히 날렸다. 이런 날이면 사는 것조차 멀게만 느껴진다. 구름 위를 떠도는 듯 멍해지게 마련, 하늘도 땅도 한빛으로 어두워지는 사뭇 엄숙한 날씨를 한 사람이, 그 뒤를 따라 또 한 사람이 건너갔다. 바람이 불고 눈도 날리는 그런 날씨를.

 

그러고 보니 2016년 한 해도 며칠 남지 않았다. 우리나라 국민 중 2016년을 힘겹게 건너오지 않은 사람이 몇이나 되랴마는 고통은 언제나 깨달음을 수반하는 법. 저만치에 사람이 있다는 걸, 당신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언저리에서, 당신의 눈길을 기다리는 사람이 저만치에 서 있었다는 사실을 2016년 대한민국을 살았던 사람들은 누구나 깨닫지 않았을까. 내가 뽑은 정치인, 내가 좋아하는 이념, 내가 신뢰하는 가치관이 나 한 사람의 삶에서 그치는 게 아니라 그대의 삶, 그대의 행복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을 2016년 한 해의 소중한 깨달음으로 간직하지 않았을까.

 

눈이 그친 하늘엔 때묻지 않은 어둠이 짙어지고 있다. 다시 눈이 내리려는가 보다. 장 지글러가 쓴 <인간의 길을 가다>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우리 모두는 정도의 차이야 있겠지만 솔직하지 못하다. 즉 우리는 거짓말을 하고 환상과 착각에 빠진다. 우리는 열심히 속박의 사슬을 만들어낸다. 마치 타자와 뜻밖에 만날 수 잇는 자유 속에 끔찍한 위험이 숨겨져 있기라도 한 것처럼, 주술의식을 하듯 그저 우리에게 주어진 사회적 역할들을 다하고 그 역할들을 만들어내고 재생산한다. 그런데 이 역할들은 우리를 숨 막히게 하고, 서서히 우리의 숨통을 죈다. 우리의 머릿속 깊이 박혀 있는 이 속박의 사슬들이 우리가 마음대로 생각하고, 보고, 걷고, 꿈꾸고, 느끼지 못하게 방해한다."

자신의 역할을 다하려 애썼던 수많은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그들의 존재조차 알지 못했던, 아니 안중에도 없었던 몇몇의 정치인들에 의해 자신들의 삶조차 부정되고 짓밟혀졌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들의 무시와 차별을 인식하면 할수록 "저만치에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을 광장에 모인 우리는 너무도 잘 알게 되었다. 2016년, 그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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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23 21: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6-12-24 11: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불문율 미야베 월드 (현대물)
미야베 미유키 지음, 추지나 옮김 / 북스피어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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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는 아니지만 작가의 이름을 혼동하여 생각도 없이 책을 읽게 되는 경우가 왕왕 있습니다. 한꺼번에 처리할 일이 많아서 생각이 복잡하거나 뭐에 씌이기라도 한 듯 '이 사람이 확실해!' 자신만만해 하는 경우에 흔히 벌어지는 일이지요. <고백>을 썼던 미나토 가나에와 <화차>와 <모방범>을 쓴 미야베 미유키를 혼동했던 건 지난주 목요일의 일이었습니다. 환하게 불이 밝혀진 동네서점을 보고 나도 모르게 문을 열고 들어갔던 게 잘못이라면 잘못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법이죠.

 

판매대에 놓인 신간도서를 쭈욱 훑어보다가 미야베 미유키의 <불문율>에서 눈길이 멈추었고, '아, <고백>을 썼던 작가의 신간이 나왔구나' 생각했던 것입니다. 책날개에 적힌 작가 소개만 읽었더라도 이런 불상사는 생기지 않았겠지만 그 순간에 나는 지나친 자신감으로 충만했었고 구매에 이르기까지 일사천리로 이어졌던 나의 판단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추리소설을 싫어하지는 않지만 그닥 즐기는 편도 아닌 까닭에 책은 곧바로 펼쳐지지 않은 채 며칠 동안 방치되었습니다. 숙소의 책상 위에 덩그마니 놓였던 책을 어젯밤에 겨우 발견하여 그길로 내처 읽게 되었습니다만 그때까지만 하더라도 내가 작가를 혼동했다는 사실은 까맣게 모른 채 '작가의 문체나 분위기가 많이 변했는 걸' 하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내가 작가를 혼동했다는 걸 알아챈 건 책을 다 읽은 후였고 이 책도 신간이 아닌 제목만 바꿔 재출간되었다는 사실도 그때 겨우 알았습니다.

 

이 책에는 표제작인 "불문율"을 포함하여 일곱 개의 단편이 실려 있습니다. 일본최고의 미스터리 작가라는 호칭에 걸맞게 "불문율"에 실린 단편 또한 사회의 모순과 병폐를 날카롭게 파헤치면서도 그 속에서 상처 받은 인간의 모습을 놓치지 않습니다. 어쩌면 작가는 상처 받은 인간의 모습을 작품 속에서 따뜻하고 섬세하게 그려냄으로써 그래도 우리 사회는 아직 살 만하다고 말하려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두번째 작품인 "결코 보이지 않는다"와 여섯번째 작품 "무쿠로바라"는 읽기에 따라서 섬뜩한 느낌이 들기도 합니다.

 

"결코 보이지 않는다"에는 인적이 끊긴 늦은 밤, 택시 정류장에서 택시를 기다리는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택시는 오지 않고 결혼한 지 한 달이 된 신혼의 에쓰로는 애가 탑니다. 부슬부슬 안개 같은 비가 내리는 봄밤은 여전히 추위를 느끼게 합니다. 에쓰로의 뒤에 서서 택시를 기다리던 나이 지긋한 노인에게 같은 방향이면 합승을 하자고 말을 겁니다. 노인은 묘한 분위기를 풍기며 같이 걷자고 말합니다.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으면서 노인은 자신의 젊은 시절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노인은 자신이 기르던 개와 아내가 된 여인의 인연에 대해 말합니다. 아내는 애완견 로쿠의 죽음을 미리 예견하였습니다. 결혼할 배우자와는 붉은 실로 맺어진 관계인 반면 검은 실로 맺어진 인연은 임종을 지키게 된다는군요. 말하자면 노인의 아내는 로쿠와 검은 실로 맺어진 인연이었던 셈입니다. 그리고 노인은 에쓰로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운명이란 녀석은 엄청나게 넓은 게임판이나 퍼즐 같은 건가 봅니다. 나나 당신이나 두 사람 사이에 공통점이나 인과관계를 찾을 수 없지만 운명의 눈으로 보면 나와 당신은 옆에 나란히 있기에 어울리는, 비슷한 모양인지도 모르겠네요. 그렇기에 만났을 때 서로 그립게 느꼈을까요. 정해진 상대를 겨우 만났다고 생각해서. 그래서 로쿠는 집사람을 따랐습니다. 그래서 죽은 아이는 지인을 따랐던 겁니다. 와, 찾았다, 반쪽을 찾았다,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둘이 만나서 완성된 운명의 그림을 발견했으니까." (p.67~p.68)

 

"혼선"에서는 무작위로 전화를 걸어서 만일 여자가 받으면 밤마다 집요하게 전화를 걸어 음담패설을 늘어놓는 변태 성욕자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지금이야 발신자의 번호를 쉽게 알 수 있고 차단도 가능하지만 1990년대만 하더라도 그건 가능하지가 않았었죠. 마지막 작품인 "안녕, 기리하라 씨"는 우리 사회에 대한 일침을 가하는 소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지은 지 십 년 된 목조 이층 건물에 사는 오스기 씨 가족은 모두 다섯 명입니다. 오스기 씨의 노모와 부부, 그리고 그들의 딸과 아들로 이루어진 그 집에는 각자의 방에서 독립된 생활을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오스기 씨 집에는 소리가 사라지는 이상한 일이 벌어집니다. 마치 가족 모두가 집단 중이염에라도 걸린 것처럼 말이지요. 그러나 집 밖으로 나오는 순간 소리는 다시 들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들 앞에 기리하라 씨가 등장합니다. 소리를 지운 건 그의 손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소리가 사라진 후 가족들은 비로소 할머니의 외로움을 인식하게 됩니다.

 

"나는 기리하라 씨가 할머니와 오목을 두던 모습을 떠올렸다. 가족이면서 격리되었다. 이 집에서 할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내 눈에 소리가 들리지 않는 텔레비전 앞에 앉은 할머니의 등이 떠올랐다. 서랍에서 귀걸이를 가져가는 모습이 떠올랐다. 할머니는 오늘 밤에 죽으려고 했다. 우리 가족의 추억이 담긴 물건을 가지고. 이전부터 그럴 작정으로 물건을 모아서는 감추었다." (p.282)

 

이렇게 나는 우연처럼 소설 한 권을 새롭게 읽었습니다. 최근에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이 어느 방송국의 드라마로 제작된 모양입니다. 그도 그럴 것이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은 독자들을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이는 흡입력이 대단하기 때문입니다. '어째 이상한데' 싶으면 여지없이 그 순간에 책을 내려놓고 거들떠도 보지 않는 나의 독서 습관을 감안할 때 이번 경우는 조금 예외적이었던 게 사실입니다. 아마도 그건 미야베 미유키의 놀라운 마법 때문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여행에서 때로는 길을 잃을 필요가 있는 것처럼 독서에도 때로는 작가를 혼동할 필요가 있는가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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