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알 수 없는 게 사람의 일이고, 사람의 인연입니다. 그런 걸 두고 어려운 말로 '삶의 비의(秘義)'라고 하나요? 어려워서 잘 모르겠지요? 나는 잘 아는 단어이고 더구나 평상시에 흔히 쓰는 말이기도 합니다. 잘난 체좀 한 번 해보려고 일부러 쓴 말인데 쓰고 있으면서도 깜냥이 되지 않은 탓인지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네요. 암튼 고기도 먹어본 놈이 먹는다고 농담도 해본 사람이 잘 하는 것 같습니다.

 

내가 이런 말을 서두에 꺼낸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엊그제 한 친구로부터 전화를 받았습니다. 몇 년 동안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이름은 기억할 수 있지만 만나지 못한 세월로 인해 조금은 서먹해진 친구였습니다. 친구가 했던 말인 즉, 내가 운영하는 블로그를 우연히 방문해 블로그에 있는 글을 읽다 보니 블로그 쥔장이 '나'라는 걸 딱 알겠더라고, 그래서 나와 친한 친구 몇 명에게 나의 전화번호를 물었고, 그렇게 알게 된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는 게 친구가 내게 들려준 말의 요지였습니다. 물론 언제 밥 한 번 먹자는 흔한 인사말로 짧은 통화가 끝나기는 했지만 말입니다.

 

아! 중요한 걸 빠트릴 뻔했네요. 최근에 올린 블로그 포스팅에 차츰 정부 비판적인, 말하자면 정치적인 글이 많아지고 있는데 그 이유가 뭐냐고, 그렇다면 나의 소신이나 철학적 기반이 진보쪽 성향에 가까운 것이냐고 친구는 물었습니다. '헐... 나와 같은 소시민이 무슨 이즘이나 철학씩이나.' 나는 사실 그런 게 없습니다. 굳이 그런 걸 가질 필요도 없고 말이지요. 나는 기본적으로 정치인을 믿지 않지만 그들 중에서도 생명을 소홀히 여기는 사람의 말은 더더욱 믿지 않으며, 정치인이 아니더라도 생명을 경시하는 사람의 말은 콩으로 메주를 쑨다해도 '절대', '결단코' 믿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나에게도 철학이 있다면 '생명주의'쯤 될런지도 모르겠습니다.

 

지난 정권에서도 그렇게 국민들의 반대가 심했던 4대강 건설을 밀어부침으로써 얼마나 많은 생명이 사라졌으며 지금도 여전히 죽어가고 있는지 생각해 보세요. 더구나 현 정권은 또 어떠한가요. 세월호에 탔던 생때같은 아이들이 죽어갈 때 현 정권의 태도는 어떠했으며, 살수차의 물대포에 맞아 돌아가신 고 백남기 어르신에 대해서도 그들은 어떤 태도를 취했나요. 세상에 하찮은 생명은 없는 것입니다. 한 생명의 죽음은 당사자 입장에서 온 우주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와는 가깝지 않다는 이유로, 내 이익이나 권력의 유지와는 전혀 관련 없다는 이유로 한 생명의 죽음을 경시하거나 무시한다면 그 사람은 인간이라고 말할 수 없겠지요. 생각만 해도 갑자기 열이 뻗치네요. 그러니 내가 그들을 미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진보, 보수를 떠나서 말이지요. 대통령 선거가 언제 있을지 모르지만 나는 아마도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 그런 사람에게 투표할 것입니다. 그 사람이 진보든 보수든 상관없습니다. "친구야, 나는 철학이란 게 없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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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쓰는가 - 조지 오웰 에세이
조지 오웰 지음, 이한중 옮김 / 한겨레출판 / 2010년 9월
평점 :
절판


예로부터 '소한 추위는 꿔다가도 한다'거나 '대한이 소한 집에 놀러 갔다가 얼어 죽었다'는 속담이 있을 정도로 소한에는 어김없이 추위가 닥친다고 전해져 온다. 그러나 이번 겨울은 어찌된 노릇인지 소한 추위는 고사하고 한낮 기온이 영상 10도를 상회하는 봄날씨만 연일 계속되고 있다. 난방비 걱정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으니 지갑이 얇은 서민들에게 이보다 더 반가운 일이 없을 테지만 겨울 축제를 준비하는 사람들이나 겨울 한 철 장사인 스키장의 고민은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오늘도 한낮 기온이 영상 10도까지 오르고 화창한 날씨에 햇빛마저 따사로워서인지 주말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얼굴엔 생기가 돌았다.

 

조지 오웰의 에세이집 <나는 왜 쓰는가>를 읽었다. 이 책에는 표제작인 '나는 왜 쓰는가'를 비롯하여 작가가 쓴 에세이 29편이 실려 있다. 생각해 보면 글쓰기를 업으로 하는 사람들을 제외한다 하더라도 이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글을 쓰면서 살고 있다. 누군가는 기록의 목적으로, 다른 누군가는 치유의 목적으로, 또는 알림의 목적으로... 글을 쓰는 목적이 어떠하든 간에 우리는 이따금 시간을 때우기 위한 방편으로 글을 쓰기도 하고 그렇게 썼던 글이 운 좋게도 한 권의 책으로 세상에 나오기도 한다.

 

이 책에 실린 각각의 글은 한마디로 군더더기 없는 매끈한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너무도 당연한 말이지만 좋은 글을 쓰기 위해서는 철학적 사고가 뒷받침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이 책을 읽으면서 새삼 느꼈다. 작가가 되기까지의 과정과 삶에서 맞닥뜨리는 다양한 주제, 현실 정치에 대한 비판과 간디 등에 대한 인물평을 통하여 책을 읽는 독자는 작가로서의 조지 오웰에 대한 평가를 다시 하게 된다.

 

"우리는 너무 문명화되어 명백한 사실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진실은 아주 단순한 것이기 때문이다. 살아남으려면 종종 싸워야만 하고, 싸우자면 자신을 더럽혀야 한다." (p.137 '스페인 내전을 돌이켜본다' 중에서)

 

작가든 연극인이든 간에 문화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예나 지금이나 살아남기 위해 종종 싸워야만 했나 보다. 지금도 그렇지 않은가. 정권에 비판적인 문화계 종사자들 만여 명을 리스트로 작성하여 정부의 지원을 완전히 끊어버리지 않았나. 실로 어이가 없는 일이지만 보도되는 뉴스를 보면 점점 사실로 굳어지고 있는 듯하다. 조지 오웰이 살았던 시대에도 차별과 불공정은 여전히 존재했었나 보다. '애국주의는 보수주의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말은 우리나라 보수주의자들이 명심해야 하는 말이다.

 

"그날 밤 꿈을 통해 내가 알게 된 것은, 중산층에게 주입되어온 애국주의가 마침내 효과를 본다는 것이었으며, 영국이 심각한 궁지에 빠지면 나로서는 애국주의에 반기를 드는 게 불가능하다는 점이었다. 단, 여기서 오해는 없도록 하자. 애국주의는 보수주의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 애국주의는 변하고 있되 신비롭게도 똑같이 느껴지는 무엇에 대한 헌신이다. 이를테면 백군 출신으로 볼셰비키가 된 사람의 러시아에 대한 헌신 같은 것이다. 체임벌린의 영국에 충성하는 동시에 내일의 영국에 충성한다는 건, 그것이 일상적인 현상임을 모른다면 불가능해 보일지 모른다." (p.85 '좌든 우든 나의 조국' 중에서)

 

오랜 세월 작가이자 저널리스트로서 생계를 꾸려간 조지 오웰이 서평자의 입장을 글로 쓴 부분은 인상 깊었다. 생계를 위해 서평을 써온 것은 아니지만 나도 이따금 책을 읽고 블로그에 서평을 남기는지라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밀려드는 책을 다 읽지도 못하고 마감 기한에 맞춰 의례적인 서평을 쓸 수밖에 없었던 현실을 고백하면서 과도하게 많은 서평을 쓰는 것이 '사기'라고 외치는 작가의 단호한 말에 가슴이 뜨끔했다.

 

"아무리 지겨워한다 해도 서평자는 책에 대한 관심이 각별한 사람이며, 매년 수천 권씩 쏟아지는 책 중에 쉰 권이나 백 권쯤에 대해서는 기꺼이 서평을 쓰고 싶어 한다. 업계 최고 수준인 사람이라면 열 권에서 스무 권 정도를 택할 것이며, 두세 권만 꼽을 수도 있다. 그 나머지 일은 아무리 양심적으로 칭찬을 하든 욕을 하든, 본질적으로 사기다. 그는 자신의 불멸의 영혼을 하수구로, 그것도 한 번에 반 파인트씩 흘려보내는 셈이다." (p.286 '어느 서평자의 고백' 중에서)

 

저녁이 되었는데도 기온은 크게 떨어지지 않고 포근하다. 사는 게 이렇게 포근한 겨울날씨처럼 늘 안심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작가가 되기 위해 밑바닥 인생을 경험하고 노숙생활도 마다하지 않았던 조지 오웰의 작가정신은 물질적 풍요 속에서 현대를 사는 많은 사람들의 안일하고 나약한 심성에 경종을 울리는 바가 크지만 삶을 꾸려가기 위해 그렇게까지 해야 했던가, 하는 자괴감이 들기도 한다. 잘 쓴 글은 세월이 지나도 독자들로 하여금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가 보다. 조지 오웰이 밝힌 글을 쓰는 이유는 덧붙이는 글로 남겨 둔다.

 

P.S

1.순전한 이기심. 똑똑해 보이고 싶은, 사람들의 이야깃거리가 되고 싶은, 어린 시절 자신을 푸대접한 어른들에게 앙갚음을 하고 싶은 등등의 욕구를 말한다.

2.미학적 열정. 외부 세계의 아름다움에 대한, 또는 낱말과 그것의 적절한 배열이 갖는 묘미에 대한 인식을 말한다.

3.역사적 충동.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고, 진실을 알아내고, 그것을 후세를 위해 보존해두려는 욕구를 말한다.

4.정치적 목적. 여기서 '정치적'이라는 말은 가장 광범위한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 동기는 세상을 특정 방향으로 밀고가려는, 어떤 사회를 지향하며 분투해야 하는지에 대한 남들의 생각을 바꾸려는 욕구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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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지겠지' 생각하며 한 해 두 해 시간만 흘려보낸다고 해서 저절로 나아지는 경우는 많지 않다. 개인의 건강이나 살림살이 또한 아무런 노력도 없었는데 나빠진 건강이 좋아질 리도 없을 뿐더러 빠듯했던 살림살이가 어느 날 갑자기 제비가 가져다 준 흥부네집처럼 하루 아침에 좋아질 리 만무하다는 건 세 살배기 어린애도 알 수 있는 일이다. 로또복권에 당첨되지 않는 한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오지도 않을 행운을 기대하면서 무작정 기다리는 일에 너무도 익숙해진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새해가 시작된 지 벌써 1주일여가 흐르고 있다. 그래도 아직은 새해 분위기가 크게 흐려지지 않은 덕분에 만나는 사람마다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인사를 빼놓지 않는다. 나도 역시 그런 인사를 주고 받으며 최면에 걸린 사람처럼 은근한 기대를 품게 되는 것이다. 감나무에서 감이 떨어지듯 보이지 않던 행운이 어느 날 갑자기 내 눈앞에 턱 하니 펼쳐지기라도 할 것처럼 은근한 기대감에 가슴까지 설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기대는 한해의 시작인 1월 한 달에 그치는 경우가 다반사, 2월만 되더라도 예년과 다름없는 텁텁한 일상이 반복되곤 한다.

 

우리가 연초에 기대하는 행운은 어쩌면 예년과 달라지지 않은 평범한 일상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올해는 그런 기대도 한낱 사치에 그치지 않을까 다들 걱정하는 분위기이다. 경제 상황이 심상치 않기 때문이다. 탄핵 피소추인이 된 대통령 한 사람만을 탓할 일도 아니다. 따지고 보면 그녀는 아바타 대통령, 핫바지 대통령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려 4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아무런 실권이나 생각도 없이 하루 하루 로봇처럼 움직였던 대통령의 실체를 국민 모두가 까맣게 몰랐다는 건 그런 사실을 숨기기 위해 애썼던 수많은 부역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을 터, 우리는 그들을 전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대통령 본인보다 더 나쁜 사람은 그들일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새해의 수명은 과연 언제까지라고 해야 적정할까. 보름? 한 달? 또는 한 분기? 어쩌면 올해는 새해 분위기가 지속되는 기간도 역대 최단 기간이 되지 않을까 싶다. 세계 각국의 보호무역주의 확대와 미국의 금리 인상, 극우 세력의 득세 등 우리 앞에 놓인 난제는 지도자를 잃은 대한민국호에 충격을 더할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소비자들의 꽁꽁 닫힌 지갑과 연일 최고치를 경신하는 가계부채, 그리고 벼랑으로 내몰리는 자영업자들... AI 여파로 인한 달걀 가격의 고공행진... 들썩이는 물가. 그러나 책임지겠다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우리는 무한반복되는 그들의 '몰랐다'는 말만 지겹도록 듣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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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
천명관 지음 / 예담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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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고 문득 떠오르는 생각을 밋밋한 블로그에 몇 자 끄적이는 게 고작이지만 때로는 작가 코스프레라도 하려는 듯 갖은 인상을 쓰면서 몇 시간씩 궁상을 떨며 앉아 있는 경우가 있다. 그렇다고 내 굳은 머리에서 기발한 주제가 생각나거나 참신한 문장이 저절로 써지는 건 물론 아니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런 표정으로 무작정 시간을 보내다 보면 어느 순간 참을 수 없는 졸음에 굴복하거나 낮 동안 차곡차곡 쌓였던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와 턱을 강타하는 바람에 작가 코스프레는 아무런 소득도 없이 허무하게 끝나곤 한다. 나는 짐짓 아쉬운 표정으로 잠자리에 들게 되는 것이다. 그런 날이면 주인이 떠난 빈 블로그엔 희미한 달빛만 밤새 일렁거린다.

 

내가 블로그에 쓴 잡다한 글 중에 간혹 읽을 만한 게 있다면 그건 아마도 달빛이 내게 슬몃 찔러준 그런 이야기가 아닐까 싶다. 천명관의 새 소설 <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를 읽으면서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모르긴몰라도 작가는 이번 작품을 아주 쉽게 쓰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 장편소설이라고는 하지만 내가 아주 쉽게 읽어냈던 것처럼 작가 또한 가볍게 써내려 간 게 아닐까, 싶었던 것이다. 소설은 우리가 어디선가 한번쯤 들었음직한 조직폭력배 이야기로 짜여져 있다. 울트라, 깡구, 공업용, 뜨끈이, 루돌프 등 삼류 양아치 냄새가 물씬 나는 등장인물들의 현실감 있는 대사와 적절히 섞인 욕설이 어느 영화의 대본처럼 읽는 이에게 친숙한 느낌이 들게 한다.

 

"이번 소설에 실린 이야기는 모두 다른 사람들로부터 주워들은 이야기입니다. 물론 소설에 맞게 윤색을 하긴 했지만 주로 뒷골목에 떠도는 이야기들을 주워 모았습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작가가 하는 모든 이야기는 기본적으로 어디선가 다 주워들은 이야기이겠지요." (p.286 '작가의 말' 중에서)

 

이야기는 인천 연안파의 두목인 '양 사장'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폭력적인 아버지 밑에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낸 양 사장은 어창에 갇혀 죽을 고비를 넘긴 후 역설적이게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고 그로 인해 전설적인 폭력배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도 이제는 나이가 들었고, 싸움을 통한 새로운 영역의 확장은 옛말이 되었다. 그의 무용담은 아직도 전설처럼 떠돌고 있지만 말이다. 소설을 읽는 나는 양 사장 스스로가 이미 자기 시대가 저물고 있음을 감지하고 있지만 그를 바람막이 삼아 돈벌이를 하고 있는 많은 그의 수하들에 의해 떠밀리듯 억지로 자리를 지키고 있지나 않나 하는 인상을 받았다. 소설의 마지막에 집 나간 고양이를 찾기 위해 잠옷 바람으로 자신이 사는 아파트 단지를 헤매는 양사장의 모습이 그려지는 걸 보면 조직폭력배나 평범한 남자들이나 남자들의 삶이라는 게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소설에는 여러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그중 가장 기억에 남는 인물은 울트라가 아닐까 싶다. 정식 조직원이 되기 위해 연안파에 일이 있을 때마다 동원되는 동네 건달 울트라는 소설에서 오직 앞만 보고 달리는 단순 무식형의 순수 청년으로 그려진다. 경마의 승부조작을 하기 위해 밤에 조직원들과 몰래 숨어 들어 망치로 경주마의 다리를 때리던 중 울트라는 잘생긴 말 한 마리에 매료되어 그 말을 훔쳐 트럭에 싣고 도망친다. 그 말은 부산의 은퇴한 조폭 손 사장이 주인이었고 수십억 원을 호가하는 종마였다. 손 사장은 자신의 말을 찾기 위해 수하 조직원을 대동한 채 인천으로 향하고 말을 돌려주라는 조직원들의 권유를 무시한 채 울트라는 말과 함께 섬으로 향한다.

 

보석박람회에 전시된 고가의 다이아를 훔친 세 명의 대리기사 이야기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였다. 한탕을 노리고 도박에 빠진 그들은 거액의 빚을 지고 빠져나올 수 없는 늪에 빠진 인물들이다. 그러나 다이아를 훔치는 바람에 조직폭력배의 회오리에 휩쓸리게 되고 결국 대리기사의 자리로 무사히 돌아오지만 그들은 다시 도박의 늪에 자발적으로 뛰어들게 된다. 양 사장의 오른팔이었던 형근도 재미있는 인물이다. 루돌프와 같은 감방에서 생활했던 형근은 곱상하게 생긴 루돌프에게 집적대는 많은 재소자들로부터 루돌프를 지켜주었고 그때의 인연으로 루돌프는 출소 후 형근을 찾아온다. 건달과 동성애자는 결코 합쳐질 수 없는 조합이라고 믿었던 형근은 결국 루돌프에게 고백을 하기에 이른다.

 

최근에는 조직폭력배의 생존 수단도 많이 바뀌었다. 불법 성매매나 불법 도박장 개설, 고리대금을 통한 금품 갈취 또는 지역 소상공인에 대한 협박 등 온갖 불법적인 악행을 서슴지 않던 과거의 방식에서 벗어나 요즘에는 우리나라의 공권력이 미치지 않는 해외로 눈을 돌리거나 인테리어와 같은 합법적인 업종에 뛰어들고 있다. 물론 정치권에 줄을 대려는 폭력배들도 여전히 많지만 말이다. 시대의 변화에 따라 조직폭력배도 이렇게 변하고 있는데 자신의 권력을 이용하여 잇속을 챙기려 드는 권력자들의 행태는 팔구십 년대의 모습에서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듯하다. 뉴스에서 보는 작금의 현실은 그야말로 삼류 양아치들의 모습 그대로이다. 불법을 저지른 조직의 오야붕을 감싸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조직적으로 동원되는 걸 보면 말이다. 천명관의 소설 <이것이 남자의 세상이다>에 대한 서평을 쓰다가 괜히 삼천포로 빠진 느낌이다. 소설의 가독성은 좋았지만 결말 부분을 서둘러 정리한 듯한 느낌이나 작위적인 결론으로 몰고간 듯한 인상은 내가 생각하는 옥의 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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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가 밝은지 벌써 3일째, 나는 언제나 '벌써'라는 과거형의 낱말을 손에서 놓지 못한 채 씨름하고 있다. 그렇게 시간이 저만치 흘렀을 때, 이를테면 2017년이라는 익숙하지 않은 숫자에 미처 길들여지기도 전에 시나브로 시간은 빠르게 흘러 여름이나 가을의 어느 하루를 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때면 절망적인 심정으로 '벌써 한 해가 다 갔네' 한숨을 내쉬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벌써'라는 낱말은 조급함을 담은 과거형의 단어였다가 어느 순간 깊은 한숨을 담은 미래형의 낱말이 되기도 한다.

 

내일은 없다 / 윤동주

 

내일 내일 하기에
물었더니
밤을 자고 동틀 때
내일이라고

새날을 찾던 나는
잠을 자고 돌보니
그 때는 내일이 아니라
오늘이더라

무리여!(친구여!)
내일은 없나니

 

문득 '이 땅에 사는 모든 이들이 다들 장하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는 게 결코 녹록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을 향해 이제 막 첫걸음을 떼는 아가를 향해, 지켜보는 우리가 진심으로 박수를 치며 축하해주었던 것처럼 미래를 향해 간단없는 발걸음을 내딛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도 진심을 담은 격려와 칭찬을 나눠주어야 하지 않을까. 인간은 어떻게 살아왔는가에 의해 평가되지 않아야 하며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마땅히 대견하다 칭찬받아야 할 존재인 것이다. 2017년 새해에 나는 이 세상을 사는 모든 사람들이 대견하고 장해보인다. 우리는 이미 사랑하는 누군가로부터 '장하다'는 말을 수백 번 들었어야 했던 그런 존재인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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