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몃 밀어두었던 감정이 제 존재를 알리기라도 하려는 듯 한바탕 분탕질을 칠 때가 있다. 사람의 감정이라는 게 지갑 속 카드처럼 필요할 때마다 꺼내거나 도로 넣을 수 있는 게 아니어서 할 일이 태산인 마당에 제 감정 하나 추스르지 못하는 꼴이란... 때로는 한심한 생각마저 든다. 저 나무처럼 의연할 수는 없을까 하고 눈길을 돌리고 만다. 그게 속 편하다. 그렇게 매번 우리는 자신의 마음과 한바탕 씨름을 하는 듯하지만 실상은 늘 일방적으로 지고 마는 것이다.

 

설 명절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언제부턴가 기대나 설렘보다는 부담만 잔뜩 짊어진 듯한 느낌이 들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숫제 할 수만 있다면 명절을 건너뛰고 다음날부터 살 수는 없을까 하는 마음이 드는 것이다. 아무리 격의 없는 사이라고는 해도 아이들이 자라고, 혼인하여 남의 식구가 들어오고, 모이는 식구가 그렇게 해마다 늘다 보면 관계에서 오는 스트레스 또한 무시할 수 없는 것이 되고 만다. 나이가 들수록 체력은 해마다 떨어져만 가는데 몸을 축내는 일은 늘어만 가니...

 

매섭던 한파가 무르춤하여 그나마 조금 살만해졌다. 점심 식사 후에 잠깐 머리도 식힐 겸 웹서핑을 하는데 실시간 검색어에 '최순실 청소아줌마'가 올라왔기에 뭔가 하고 열어봤었다. 특검에 강제로 소환되었던 최순실이 고함을 지르며 난동을 부리자 특검 사무실이 위치한 빌딩의 청소아줌마인 임씨가 최씨의 뒤통수를 향해 "염병하네!"라는 사이다 발언을 3번이나 날렸었나 보았다.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분노를 느껴 자신도 모르게 외친 말이라고 했다. 왜 아니 그렇겠는가. 설 분위기마저 뒤숭숭한 요즘 나라 꼬라지가 말이 아니니 그렇게라도 화를 풀 수밖에. 나라를 이 꼴로 만든 사람들이 오히려 큰소리를 치고 있으니 세상 참... 방귀 뀐 놈이 성낸다더니 옛말 그른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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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25 19: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1-26 17: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헤아려 본 슬픔 믿음의 글들 208
클라이브 스테이플즈 루이스 지음, 강유나 옮김 / 홍성사 / 200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보는 세상은 실상 보고 듣고 매만져진 것들을 그때 그때마다 변형하고 축소하고 왜곡시켜 나의 기분에 맞게 이미지화 한 연속적인 그림을 나의 기억 속에 저장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므로 내가 인식하는 세상은 그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고 어느 누구로부터의 이해를 바랄 수 없으며 어떤 장황한 설명으로도 객관화 시킬 수 없다. 그러므로 내게 간직된 세상은 오직 나만의 세상, 나만의 실존일 뿐이다. '천상천하 유아독존'을 인용할 필요도 없이.

 

이러한 까닭에 세상은 보는 사람에 의해 한없이 밝고 찬란하게 채색될 수도 있지만 관찰자의 변덕스러운 기분에 따라 그 찬란하던 세상이 눈 깜짝할 사이에 무채색의 암울한 세상으로 변할 수도 있음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세상은 보여지는 대상이 아니라 인식되는 대상일 수밖에 없다. 실재하는 모든 것은 나의 인식에 따라 언제든지 지워질 수 있고 부재하는 어떤 것도 존재하는 어떤 것으로 대체될 수 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실로 커서 삶에서 겪는 조그마한 충격에도 나의 관점은 수시로 뒤바뀔 수 있다는 것을 감안할 때 내가 사는 세상은 유동하는 그 무엇이며 그로 인해 나는 궁극적으로 불안정한 세상에 내던져질 수밖에 없음을 암시한다고 하겠다.

 

C. S. 루이스의 <헤아려 본 슬픔>은 앞에서 언급한 이러한 논리를 명확하게 보여주는 책이다. <나니아 연대기>를 쓴 작가로도 잘 알려진 그는 평생 독신으로 살다가 그의 나이 59세에 비로소 여류 시인 조이(Joy)를 만나 결혼한다. 이혼 후 아들 둘을 키우고 있었던 조이는 결혼 전에 이미 골수암 투병중에 있었는데 이 모든 악조건을 무시한 채 둘은 결혼하였고 한 때 조이의 증세가 회복되는 듯 보이기도 했지만 그들의 결혼은 불과 4년이라는 짧은 시간만에 막을 내린다. 조이가 사망한 후 한 달이 채 안 되었을 무렵부터 써내려가기 시작한 글은 나중에 익명으로 출간되었다.

 

'A Grief Observed'라는 원제에서 보듯 작가는 제3자적 관점에서 자신의 슬픔을 관찰하고 있다. 그것은 곧 내재된 슬픔으로 인해 그 이전과는 모든 것이 달라진 자신의 세상을 묘사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작가는 서른한 살까지 확신에 찬 불가지론자이자 회의론자였지만 회심하여 그리스도를 전하는 일에 일생을 바쳤다고 한다. 하지만 아내를 잃은 극심한 슬픔으로 인해 그는 이 책에서 하나님에 대한 회의의 일면을 보이기도 한다. 그의 인간적인 면모는 상실의 고통을 겪어본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리고 슬픔은 여전히 두려움처럼 느껴진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어중간한 미결 상태 같기도 하다. 혹은 기다림 같기도 하여 무슨 일인가 일어나기를 막연히 기다리고 있는 것 같다. 슬픔은 삶이 영원히 암시적이라는 느낌을 갖게 한다. 무언가 시작한다는 것을 가치 없어 보이게 한다. 나는 차분히 인정할 수가 없다. 하품을 하고 몸을 뻗대며 담배를 너무 많이 피운다. 지금까지 나는 너무 시간이 없었다. 이제는 시간밖에 없다. 그 텅 빈 연속만이 있는 것이다." (p.55~p.56)

 

작가는 비탄에서 점차 벗어나는 자신을 느낀다. 그러나 때로는 비탄이 의무인 양 느껴지기도 하고 자신이 하는 애도가 죽은 자를 죽음 저편에 영원히 머물러 있도록 하며 절대로 살아 있는 사람들의 세상으로 넘어오지 못하도록 하는 한 방편이 아닌가 생각하기도 한다. 작가는 그러한 모든 과정을 겪으면서 슬픔에서 조금씩 벗어난다.

 

"우리는 다가오는 매시간 매순간을 만난다. 그 좋았다 나빴다 하는 모든 양태를 만나는 것이다. 최고로 좋은 순간에도 나쁜 순간들이 많고, 최악의 시절에도 좋은 순간들이 많다. 우리는 결코 소위 '사물 자체 the thing itself'의 총합적인 영향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그릇되게도 그렇게 부른다. '사물 자체'란 단지 이러한 좋았다 나빴다 하는 순간들의 총체일 뿐이다. 그 나머지는 그저 이름이거나 개념일 뿐이다." (p.29)

 

'슬픔의 지도를 그릴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작가는 결국 '슬픔은 '상태'가 아니라 '과정'이었'음을 깨닫는다. 상실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과정은 감정이 있는 우리 모두에게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종교인이든 그렇지 않든 간에 자신을 고통 속에 빠트린 신에 대한 원망이 찾아오고 더불어 망자에 대한 그리움, 공허한 의식...

 

"이 세상에서 사랑은 언제나 감정을 동반한다. 그건 사랑 자체가 감정이거나 감정을 동반할 필요가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의 동물적인 영혼이, 우리의 신경계가, 우리의 상상이, 그런 방식으로 반응할 수밖에 없기에 그랬던 걸까? 만약 그렇다면 나는 얼마나 많은 선입견들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려야 하는가!" (p.104)

 

작가에 의해 그려진 '슬픔의 지도'는 시시각각 변하는 슬픔의 행로를 보여준다. 때로는 깊은 계곡을 지나기도 하고, 때로는 가시덤불을 지나기도 하며, 막막한 어둠 속을 걷기도 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우리는 한 번 걸었던 그 길을 세세히 기억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하나의 슬픔이 지나가고 또 다른 슬픔이 온다고 해서 똑같은 경로를 다시 겪는 것도 아니다. '슬픔의 지도'는 기억할 수 없는 '망각의 지도'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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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츠 2017-03-05 0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서평 잘 읽었습니다 :)

꼼쥐 2017-03-06 12:32   좋아요 0 | URL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
 

진화를 멈춘 머릿속 기억들을 소재로 무엇인가 색다른 글을 써보려고 시도할 때가 있다. 그렇다고 내가 작가라거나 그쪽 계통의 직업을 갖고 있다는 것은 아니다. 작가 코스프레가 취미인 것도 물론 아니고. 아무튼 나는 모처럼 맞는 여유로운 시간을 아무런 성과도 없이 붓방아만 찧다가 마는 게 고작이니 번번이 나는 귀한 시간만 허비하는 꼴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의미도 없는 그런 짓을 아주 오래된 취미라도 되는 양 반복하는 것이다. 남들이 들으면 젊은 사람이 참 안됐다, 하면서 혀를 끌끌 찰 일이지만 나는 성과도 없고,그렇다고 경제적 이익도 없는 그 짓에 익숙하다 못해 편안한 느낌마저 드는 것이다. 삶은 비경제적 일상으로 떠받쳐진다는 허튼 신념을 자랑이라도 하는 양.

 

오늘도 나는 혼자만의 여유로운 시간을 무참히 흘려보내고 나른한 오후에나 있을 듯한 몽롱한 의식 속에서 이와 같은 낙서 수준의 글을 끄적이고 있다. 오전에 윌리엄 스타이런의 <보이는 어둠>을 읽고 왠지 모르게 우울해졌고, 그래서인지 점심을 먹은 직후부터 밀려오는 졸음을 이기지 못해 잠시 동안 꾸벅거리며 졸았었다. 힘들기로만 따진다면 밋밋하고 맨송맨송한 나날을 견디는 것보다 벅차도록 기쁘고 다시 없을 듯한 행복에 겨운 날들을 보내는 것이 더 버겁고 힘에 부치는 일일 텐데 다들 행복에 목말라 하는 걸 보면 고생을 사서 하고 싶은 게 인간의 본능이 아닐까 싶기도 하고.

 

산다는 건 결국 자신이 가진 에너지를 기억과 정보로 끝없이 치환하는 작업이다. 언젠가 몸 속 에너지가 다 소진되고 나면 잠에 빠져들 듯 영원한 안식에 들겠지만 나의 에너지와 내가 얻을 수 있는 기억이 등가성이 아니라는 사실에 때로는 실망하고 '이렇게 살아서 뭐하나?' 절망하기도 하겠지만 그래도 삶은 살아볼 가치가 있음을 스스로 고백하는 날이 오고야 만다. 모르긴몰라도 그럴 것이다.

 

"로맹 가리는 카뮈가 깊은 절망 상태에서 종종 자살을 언급하곤 했다고 귀띔해주었다. 때로는 농담조로 말했지만 로맹 가리를 상심하게 할 만큼 그 농담 속에 뼈가 들어있었다. 그러므로 저변에 깔린 멜랑콜리한 어조에도 불구하고 『시지프의 신화』에 죽음을 지배하는 생의 승리라는 엄숙한 메세지(희망이 부재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해야만 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렇게 하고 있다 - 가까스로)가 담겨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보이는 어둠"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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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 (레드 에디션, 양장) - 아직 너무 늦지 않았을 우리에게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
백영옥 지음 / arte(아르테)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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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어렸을 때 들었던 어른들의 많은 잔소리 중 몇몇은 어느 정도 나이가 들고 세상 풍파를 겪은 후에나 비로소 조금씩 이해가 되곤 한다. 그러니까 그 말들이 완전히 다 이해가 되기 전까지의 긴 시간 동안 잔소리를 했던 당사자는 줄곧 내가 하고 싶은 일을 방해하는 훼방꾼 내지는 사리분별을 못하는 잔소리꾼이라는 누명을 쓸 수밖에 없다는 얘기가 된다. 잔소리를 했던 당사자에게는 대단히 미안한 일이지만 어쩔 수 없다. 물론 면전에서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만 말이다. 요즘 유행하는 말로 '의문의 일 패'를 당한 셈이다.

 

오래전에 돌아가신 나의 할머니 또한 손자들에 대한 애정이 각별했던 만큼 잔소리도 많으신 분이었다. 우리 형제들은 할머니의 꼬장꼬장한 성격 탓에 곁에 가는 것조차 꺼려했지만 손자들에 대한 사랑이 어찌나 깊으셨던지 이따금 맛있는 거라도 생길라치면 당신은 입에도 대지 않은 채 손자들 먹일 생각에만 몰두하셨다. 그래서인지 우리 형제에게 떨어지는 벼락같은 호통이나 잔소리는 해가 뜨고 지는 것처럼 일상적인 일이었다. 예컨대 "문지방을 밟지 마라. 복 나간다."거나 "밤에 피리를 불면 뱀이 나온다."는 흔한 잔소리에서부터 "생고구마는 먹지 마라."와 같은 가끔씩 듣는 말까지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통제하는 할머니의 잔소리는 끝이 없이 계속되었다.

 

백영옥의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을 읽다가 문득 할머니 생각이 났었다. 아이들의 걸음에는 높다 싶게 느껴졌을 문지방을 혹여라도 손자들 중 누군가가 밟았다가 미끄러져 넘어지기라도 하면 크게 다칠 판이니 할머니는 늘 노심초사 가슴 졸이며 살필 수밖에 없으셨을 텐데 그때는 왜 그런 걸 몰랐을까. 그런 마음은 보이지 않고 잔소리만 쟁쟁 귀를 어지럽혔을까. 지금은 다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이다. <빨강머리 앤>을 좋아한다는 작가 백영옥도 애니매이션 영화 '빨강머리 앤' 50부작을 보면서 어렸을 때는 미처 알지 못했던 새로운 깨달음이 찾아왔을 것이다. 이 책의 출발은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는지도 모른다.

 

"누군가 상대편의 입장이 되어보는 일. 그것을 우리는 '역지사지'라고 부른다. 어쩌면 그것을 공감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다. <빨강머리 앤>을 처음 보았을 때, 나는 마릴라를 결코 좋아할 수 없었다. 냉정하고, 차갑고, 엄혹한 그녀의 고집이 싫어서 그랬다. 하지만 '빨강머리 앤'을 긴 세월에 걸쳐 보다 보니 이제 마릴라의 마음이 눈에 들어온다. 만약 내 아이가 그랬다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p.131)

 

나는 사실 TV에서 방영하는 애니매이션 '빨강머리 앤'을 띄엄띄엄 본 적은 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다 보지는 못했고, 루시 모드 몽고메리의 원작을 읽어본 적도 없다. 그런 까닭에 내가 알고 있는 '빨강머리 앤'은 누군가로부터 들었거나 어느 책에서 대강의 줄거리를 읽었거나 하는 수준의 불완전한 것이다. 그러나 백영옥의 이 책 <빨강머리 앤이 하는 말>을 읽고 난 지금, 작가처럼 애니매이션 50부작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고 싶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어느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아주 꼼꼼히.

 

"슬픔을 슬픔 이외의 것으로 뒤섞지 말아야 한다. 슬픔을 분노로 바꿔 왜곡시키면 스스로 애도의 시간조차 가질 수 없게 된다. 외로움을 배고픔으로 착각해 폭식하거나, 우울을 우울의 증상인 단순한 수면장애로 오해해 방치하면, 우리는 점점 더 깊이 병든다. 슬픔은 제대로 다뤄졌을 때에만 시간과 함께 자연스레 사라진다." (p.199)

 

현 시점에서 베스트셀러에 올랐다는 건 작가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보편적인 내용을 글로 썼다는 것을 의미할런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 나이를 먹을 만큼 먹지 않은 사람이 읽어서는 도무지 의미를 파악할 수 없는 책은 베스트셀러 목록에 오르지도 못하는 것일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백영옥의 이 책만 하더라도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젊은 사람에게는 조금 어렵다 싶은 내용의 글이 자주 등장하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독자를 영화 등급처럼 '15세 이상 관람가'라는 식으로 연령을 제한할 수는 없겠지만 젊은 독자들에게는 이따금 의미를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유보된 앎'이 존재할지도 모르겠다. 작가가 '빨강머리 앤'을 보면서 그랬던 것처럼.

 

"문득 인생의 절정이 놓여 있는 순서를 바꾸고 싶단 생각을 한다. 계절의 순서, 나이를 먹는 순서, 요일의 순서처럼 우리가 당연하다고 믿는 것들을 말이다. 그것이 도무지 실현 불가능하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 자꾸만 이런 엉뚱한 상상들을 하게 된다. 빨강머리, 내 안의 오랜 소녀가 아직도 살아 있는 것처럼." (p.319)

 

지난밤에는 눈이 제법 내렸다. 세상이 온통 하얗게 변한 이른 새벽에 나는 언제나처럼 산을 올랐다. 그러나 어둠이 걷힌 아침나절, 출근 차량이 속도를 내는 아스팔트 대로에는 시커멓게 변한 눈석임물이 인도를 걷는 행인을 위협하고 있었다. 에일 듯 차가운 바람이 이따금 날리는 눈발과 함께 도시의 살풍경을 펼쳐내고 있었다. 외투 깃을 곧추 세우고 저절로 걸음이 빨라지는 이런 날 , 어렸을 적 보았던 '빨강머리 앤'의 추억은 주머니 손난로보다 더 따뜻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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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세먼지가 어찌나 심하던지 하루 종일 밖에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선명하게 보이던 인근 산들도 희뿌연 미세먼지에 싸여 도무지 형체가 보이지 않았다. 오늘 같이 미세먼지가 심한 날에는 <제5도살장>을 쓴 커트 보네거트의 말이 생각나곤 한다.

 

"우리는 '중독 사실을 부인하는 중증의 화석연료 중독자'가 되었고, '지구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부비트랩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연료를 끌어모으기 위해 미국 정부와 더러운 기업들은 전쟁을 불사하고 있다."

 

유머와 독설로도 유명했던 그는 이제 고인이 되었지만 그가 생전에 했던 말은 이따금 현대를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곱씹어 생각하도록 한다.

"우리 대통령이 기독교였던가? 아돌프 히틀러도 기독교였다."와 같은 말들.

 

오늘 실시간 검색어 상위를 차지했던 인물은 단연 조의연 판사가 아니었나 싶다. 그는 특검이 청구한 삼성전자 이재용 부회장에 대한 구속영장을 기각했다. 분노에 가까운 국민들의 법감정과는 달리 일부 언론에서는 조 판사에 대한 칭찬을 쏟아내기도 했다. 보기 드문 원칙주의자라고 말이다.

 

그가 원칙주의자라는 건 맞는 말이다. 지난해 9월,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의 영장을 기각했으며 가습기 살균제 사태의 중심에 있는 존 리 옥시 대표, 배출가스 조작에 연루된 폴크스바겐 박동훈 전 사장의 영장도 기각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는 기업의 대표나 임원급, 소위 돈 많고 잘 나가는 사람에 대한 구속영장은 모두 기각햇었다. 기각 사유도 대부분 대동소이했다. "현재까지 수사 진행 내용과 경과, 주요 범죄 혐의에 대한 법리상 다툼의 여지 등을 고려할 때 구속의 사유와 필요성, 정당성을 인정하기 어렵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기도 차지 않는다.

 

커트 보네거트의 말을 빌리자면 '그들은 중독 사실을 부인하는 중증의 권력 중독자'가 되었고, 대한민국은 그로 인해 언제 터질지 모르는 부비트랩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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