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심 있는 한 분야를 열정적으로 파고들다가도 어느 한순간에 갑자기 시들해지는 경우가 있다. '슬럼프'라기보다는 끈기가 없는 것이다. 어려서는 그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언제부터 나는 시들시들 생기를 잃고 말라가기 시작했던 것일까? 연초에 나는 그것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본 적이 있다. 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에 진출한 이후부터 그렇게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한 사람의 독립된 개체로서 살아간다는 건 좋든 싫든 현실과의 거리를 서서히 좁혀가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니까. 예컨대 현실과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다는 건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본다는 게 아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현실과 한없이 가까워짐으로써 돈에 대한 욕심도 무한정 늘어나게 되고 돈과 연관지을 수는 없지만 삶을 구성하는 무수히 많은 것들에 대한 흥미를 차츰 잃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확정된 건 아니지만 귀촌을 계획하고 있다. 말은 거창하지만 지금 살고 있는 곳보다 조금 작은 동네로 떠나는, 단순한 이사와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동안 유지했던 삶의 형태는 귀촌과 함께 완전히 달라질 것이다. 아내 앞으로 약국을 개업하고 그 일을 보조하면서 앞으로의 삶을 살아간다는 건 아내나 나나 일종의 모험이 아닐 수 없다. 약국을 운영해본 적 없는 아내와 약은 그저 살 줄만 알았지 단 한 번도 팔아본 적 없는 나.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도시를 떠나 살아본 적 없는 아내. 이런저런 걱정에 이따금 밤잠을 설치게 된다.

 

그래서인지 얼마전부터 나는 블로그에도 그저 시큰둥했던 게 사실이다. 마음이 잡히지 않았던 까닭이다. 삶은 언제나 한 계단을 딛고 또 다른 계단을 향해 나아가는 것임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이래저래 심란한 마음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삶을 이끄는 세월이야 어찌됐든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해야 하지 않겠나.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걸어가야겠다."고 노래했던 윤동주 시인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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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좋아하세요... - 미술관장 이명옥이 매주 배달하는 한 편의 시와 그림
이명옥 지음 / 이봄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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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는 '읽는다'거나 '이해한다'고 말할 수 없다. 그렇게 말하는 순간 '시'는 저 멀리로 사라져버린다. '시'는 단순히 우리의 눈을 통하여 적당히 '스며들' 뿐이고 서서히 '중독되는' 것이기에 읽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시어를 보는 순간 우리는 뇌를 통하여 이해하는 게 아니라 가슴을 통하여 젖어들거나 숨을 쉬듯 세포 깊숙이 스며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는 설명할 수 없다.

 

단순히 단어와 단어의 결합인 듯 보이는 것은 '시'가 아니다. 시의 첫 행을 읽는 순간,멀고도 먼 과거의 어느 한 시절로 회귀하거나 고향 마을 어드메쯤을 배회하거나 동화 속 꿈길을 걷게 되는 게 뭐라 설명할 수 없는 '시'의 마법이다. 그러므로 '시'는 졸졸졸 시냇물 소리가 되었다가 눈 내리는 고요가 되었다가 산골 소녀의 맑은 노래가 되기도 한다. 이와 같은 '시'를 어떻게 '이것이다' 하고 한마디로 정의할 수 있을까.

 

미술관장 이명옥의 <시를 좋아하세요...>를 읽다가 그 옛날 내가 좋아하던 시집을 밤새 뒤적였었다. 윤동주, 정지용, 한용운,서정주, 김수영, 김남조, 기형도, 이성복, 프랑시스 잠, 로버트 프로스트... 세월이 한참 흘러 주름이 깊게 진 옛동무를 만난 듯 책에서는 구수한 곰팡내가 풍겨왔다. 나는 얼마나 오랜 시간'시'를 잊은 채, '시'와 동떨어진 삶을 살았던 것인가. '시'를 잊은 채 얼마나 많은 아픔을 위로받지 못하였던가.

 

"시 배달을 하는 동안 '시는 펜디멘토와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긴 세월 동안 나 자신도 몰랐던 나의 진짜 얼굴, 차마 말하지 못하고 묻어버린 감정들, 깊숙이 숨겨버린 그리운 기억들을 새롭게 끄집어내어, 그것을 다시 보고 느끼게 해주었다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p.6)

 

서울 안국동에 위치한 사비나 미술관의 관장이기도 한 저자는 이 책에서 '그림 큐레이션'에서 더 나아가, '시 큐레이션'을 융합했다. 저자는 지인 중 한 사람에게 매주 한 편의 시를 배달하고 감상평을 주고받으면서 '상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어떨 때 기뻐하고 괴로워하는지, 삶의 고민이 무엇인지, 위로받기를 얼마나 간절히 원하는지 알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이 책은 저자가 사랑하는 시와 그에 대한 감상평과 그에 알맞은 그림의 콜라보인 셈이다. 1장 '시가 처음일지도 모를 당신에게', 2장 '사랑, 시' 3장 '오직 나에게만' 4장 '삶에게, 죽음으로부터' 5장 '시를 더 좋아하게 된 당신에게' 마지막 장 '아주 특별한 두 사람에게'로 구성된 이 책은 저자에게도, 책을 읽는 독자에게도 각별한 의미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제겐 좋은 책과 평범한 책을 가르는 기준이밑줄긋기를 했느냐 아니냐로 결정되거든요. 저는 책을 읽다가 저와 생각이 같거나 공감하는 구절이 나오면 곧바로 밑줄긋기를 합니다. 제가 글로 표현하고 싶었지만 능력이 부족해 포기한 문장을 책 속에서 발견했을 때도 역시 밑줄을 긋습니다. 밑줄긋기하고 싶은 책을 발견할 때의 제 기쁨에는 부러움과 질투심이 섞여 있어요. 타인의 마음을 읽어내고, 그것을 글에 완벽하게 담아내는 재능을 가진 이에 대한 찬사와 제 부족함에 대한 반성과 성찰이지요." (P.272)

 

이 책에 실린 28편의 시만 보더라도 시에 대한 저자의 내공을 가늠할 수 있다. 사실 시의 소개와 더불어 자신의 감상을 덧붙인 책은 많지만 독자들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만한 책은 그리 많지 않다. 자신만의 독특한 감상이나 충분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지 않는 획일적인 감상은 자칫 식상한 글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이 책을 주목했던 것도 바로 그런 까닭이다. 저자는 비록 글에 대한 자신의 부족함을 탓하고는 있지만 미술을 전공한 분이 시에 대한 이해력이 이 정도일 줄은 상상도 못했다. 시는 이해되는 것이 아니라 체감되는 것이기에 아무리 서툰 글솜씨라고 해도 그 깊이가 느껴지게 마련이다. 누군가에게 중독된 시 한 편은 다른 누군가에게 고스란히 전이되어 그렇게 스며드는 법이다. 그러므로 시는 아름다운 중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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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도 풀리고 베란다로 쏟아지는 햇살이 어찌나 좋던지요. 휴일을 맞아 한껏 게으름을 피웠던 나는 그만 늦잠을 자고 말았습니다. 어찌된 일인지 아무도 깨우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죠. 그 바람에 아침운동도 걸렀고 깔깔한 입안을 찬물로 겨우 헹군 후 이른 점심을 겨우 먹었습니다. 거실을 반쯤 점령한 햇볕. 소파에 앉아 꼬박꼬박 졸던 나는 급기야 거실 한켠에 자리를 펴고 누워 필요도 없는 낮잠을 늘어지게 잤던 것입니다. 눈을 뜨자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겨울 햇살.

 

나는 겨울 햇살의 유혹에 이끌려 밖으로 나섰습니다. 자신의 두 발로 원하는 곳이면 어디든 갈 수 있다는 게 얼마나 큰 행복인지요. 가장 원시적인 이동수단인 걷기를 나는 무척이나 사랑합니다. 먼 훗날 언젠가 나 또한 제 발로 걸을 수 없는 날이 반드시 오겠지만 그때까지만이라도 나는 원없이 맘껏 걷고 싶은 것이죠. 찬 기운이 어지간히 사라진 적당한 바람과 따스한 오후 햇살을 받으며 마을 뒷산의 산길을 한 시간 남짓 걸었나 봅니다. 가벼운 산행에서 돌아온 나는 컴퓨터 앞에 앉아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산길을 걷는 내내 내 머릿속을 어지럽혔던 말은 '후안무치(厚顔無恥)'였습니다. 왜인지 알 수 없습니다. '두터울 후(厚)'에 '얼굴 안(顔)' 그리고 '없을 무(無)'에 '부끄러울 치(恥)로 이루어진 사자성어. 사전에는 '낯가죽이 두꺼워 뻔뻔하고 부끄러움을 모름'이라고 씌어 있습니다. 물론 다들 잘 알고 있겠지만 말이죠.

 

오늘 나는 '후안무치'에 더하여 '후흑학(厚黑學)'에 대하며 말하고자 합니다. 아시는 분도 물론 있겠지요. 청조 말 이종오(李宗吾)에 의해 지어진 이 책을 나는 몇 년 전 신동준에 의해 번역 출간된 책으로 처음 접하였습니다. '승자의 역사를 만드는 뻔뻔함과 음흉함의 미학'이라는 부제가 붙은 신동준의 '후흑학'은 꽤나 두껍고 어려운 책이었습니다. 이종오가 말하는 '후흑'은 두꺼운 얼굴(면후·面厚)과 시커먼 속마음(심흑·心黑)의 합성어로 대의를 위해 필요하다면 적절히 계략과 술수를 부릴 줄 알아야 한다는 게 요지입니다. 오늘날 '후흑'은 대체로 뻔뻔함 또는 음흉함으로 해석되고는 있지만 말입니다.

 

한비자의 제왕학에 이어 중국의 현대판 제왕학으로 추앙받고 있는 '후흑학'은 중국판 마키아벨리즘으로도 불립니다. 권모술수를 중시한다는 측면에서 일맥상통하는 바가 아주 없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후흑학'을 단순히 음흉, 뻔뻔함을 위주로 하는 처세술쯤으로 이해한다면 잘못된 생각입니다. 후흑의 궁극적인 목적은 뛰어난 후흑으로 나라를 위기에서 구하는 후흑구국(厚黑救國)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의 통치학은 어떤 게 있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현 정부의 통치학은 알 듯합니다. 성형강국 대한민국의 대통령답게 대통령은 취임 초기부터 성형을 통하여 면후(面厚:얼굴을 두껍게 함)에 힘써왔고 작금에 이르러서는 심흑(心黑:시커먼 속마음)의 경지에 도달했으니 학문이 아니라 몸을 통하여 후흑학을 완성했다 하겠습니다. 그것이 필러든, 보톡스든, 혹은 실 리프팅 시술이든 얼굴에 이물질을 투입함으로써 얼굴이 조금씩 두꺼워지는 건 확실하겠지요. 물론 얼굴을 두껍게 만든다고 할지라도 뻔뻔함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는 능력은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대통령은 후흑학을 통달하여 이제는 후안무치의 경지에 이른 듯합니다. 한국판 후흑학의 완성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물론 이종오의 후흑학이 후흑구국(厚黑救國)에 그 목적이 있었던 반면 대통령은 후흑구순실(厚黑救順實)에 목적을 두었다는 점에서 큰 차이를 보이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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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식이 뭐라고 - 거침없는 작가의 천방지축 아들 관찰기
사노 요코 지음, 이지수 옮김 / 마음산책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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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가 부모답게 변해간다는 건 우리는 아이로 인해 끝없이 배우고 있다는 걸 의미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아이가 태어나기도 전에 이미 아이를 위한 모든 걸 준비하고 갖춘, 그와 같은 완벽한 부모는 존재하지 않겠지요. 혹시 있을라나요? 나도 여느 부모와 크게 다르지 않아서 아이를 키움에 있어 어리숙하고 미성숙한 나머지 어찌할 바를 모르며 허둥댔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러나 세월은 무참히도 흘러 아이는 벌써 중학교 2학년이 되었고 부모의 간섭을 귀찮아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사노 요코의 <자식이 뭐라고>는 지난 시절의 나와 마냥 의존적이었던 아들을 떠올리게 하는 책입니다. 포동한 볼이 발그레해서 잠이 든 그 시절의 아들을 곁에서 지켜 보며 혹시나 깰까 손등으로 조심조심 아들의 볼을 매만지던 나는 불규칙한 수면 시간으로 몸은 비록 힘들었지만 얼마나 행복에 겨워 했던 것일까요. 아이가 커서 제발 잠이라도 제 시간에 잘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며 하루가 마치 일 년인 양 길게만 느껴졌던 그 때가 이만큼 지나고 보니 어찌나 짧고 안타까운 시간이었는지요.

 

"책 읽어줘."

"벌써 두 권 읽어줬잖니."

"제발, 한 권만 더."

"안 돼, 이제 목소리가 안 나오는걸."

"나오고 있는데."

"책 읽기용 목소리는 이제 안 나와."

"보통 목소리는 나와?"

"응, 보통 목소리는 다른 데 담아뒀거든."

"그럼 옛날이야기용 목소리는?"

"옛날이야기용 목소리는 아까 써버렸어."

"그럼 보통 이야기라면?"

"으음, 그럼 진짜진짜 보통 이야기야. 눈 깜짝할 사이에 끝나는 짧은 이야기란다." (p.29)

 

아이를 키워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그 장면이 훤하게 그려지지요? 사노 요코도 다르지 않았나 봅니다. 작가는 아들 히로세 겐의 유치원 시절부터 고등학생 시절까지의 기억할 만한 모습들을 사진이 아닌 글로 써서 남겨두었습니다. 아들 몰래 틈틈이 기록한 이 육아서는 숨기는 것 없이 솔직 발랄한 사노 요코의 인생 철학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그녀만의 아들 관찰기입니다. 아직 미혼이거나 자식을 키워보지 않은 사람은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책을 읽다 보면 엄마로서의 사노 요코의 마음이 가슴 뭉클하게 전해옵니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의 겐은 여학생 한 명을 함께 좋아한다는 이유로 서로 질투하기는커녕 다른 남자 아이 두 명과 절친동맹을 맺기도 하고 여학생이 다른 곳으로 전학을 가자 겐과 친구는 방학을 이용하여 여학생의 집에 놀러가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시시하다며 여학생을 다들 포기해버립니다. 중학생이 된 겐은 여전히 절친동맹의 남학생 둘과 어울립니다. 그리고 그 중 한 아이의 아버지가 사고로 죽습니다. 그 아이는 상주가 되어 앉아 았습니다.

 

"겐의 엄마는 가끔 장례식에 가면 상주 자리에 앉아 있는 중년의 장남을 볼 때가 있는데, 열세 살짜리 우와야만큼 당당한 장남은 본 기억이 없었다. 겐과 욧짱은 나란히 조심스레 우와야 앞으로 걸어가서 필사적으로 분향했다." (p.79)

 

절친동맹의 세 아이, 겐과 욧짱 그리고 우와야는 다니는 학교도 서로 다르고, 성격이나 취향도 달랐지만 방학이면 어김없이 어울려 놀고 여자 친구가 있는 겐을 부러워하기도 하고 몰래 술도 마시면서 청소년에서 성인으로 성장해 갑니다. 완전한 성인이 된 아들을 보며 엄마 사노 요코는 이제 어렸을 적의 아들을 떠올립니다.

 

"뭐든 마음껏 해보렴. 어린 시절을 충분히 아이답게 보낸다면 그걸로 좋다. 슬픈 일도 기쁜일도 남을 원망하는 일도 짓궂은 일도 실컷 해보기를. 그리고 어른이 되었을 때 사랑하는 이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궁금해하며 타인의 마음에 다가갈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p.115)

 

겐은 엄마의 글에 '과장과 허풍이 섞여 있다'고 평합니다. 자신에 대한 글이 사노 요코의 여러 책에 등장하는 것에 대한 불만이었겠지요. 그러나 사노 요코가 암으로 세상을 떠난 후 아들에 의해 출간된 이 책은 자신의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지는 걸 그토록 싫어했던 아들 겐의 후회가 묻어나는 듯합니다. 어쩌면 이 책은 생전의 사노 요코를 추억하며 아들이 잘되기만을 간절히 바라는 세상의 모든 엄마들에게 보내는 히로세 겐의 감사 편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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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소쿠리를 휘돌아 나가는 바람의 기다림처럼 밖은 온통 바람의 서성임뿐입니다. 콘크리트 일색의 회색 도시에 무람없는 바람만 겅중겅중 뛰놀던 그런 하루였던 것입니다. 입춘도 지난 이맘때면 찬 바람이 물색없이 기승을 부리고 봄을 기다리는 우리는 목을 더 길게 늘인 채 날씨만 탓하곤 하지요. 오늘 불었던 바람은 어쩌면 봄의 전령인 양 우리에게 살갑게 다가오려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가 새삼 오늘처럼 가볍고 신선했으니 말이지요.

 

심술궂은 날씨만큼이나 대한민국의 국정시계 역시 안갯속입니다. 의심할 것도 없이 탄핵은 당연히 인용될 것이라던 처음의 전망에서 이제는 뒤로 한 발 물러서서 '어쩌면 기각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증폭되고 있는 추세입니다. 그런 때문인지 국정농단의 주체세력과 탄핵을 반대하는 사람들의 목소리에 점점 더 힘이 실리는 듯합니다. 헌재의 탄핵 심판과 특검의 수사를 어떻게든 지연시키려는 청와대의 행보도 노골화되었고, 자신감에 찬 그들은 오히려 뻔뻔해지려는 모습마저 보이고 있습니다. 너희들이 해볼 테면 해보라는 식이지요. 대한민국의 미래는 안중에도 없고 오직 자신들의 안위에만 관심을 두고 있는 행태입니다.

 

조류독감이 조금 잠잠해졌나 싶자 구제역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려나 봅니다. 이래저래 물가 불안 요인만 늘어나는가 봅니다. 그런데도 권한대행은 대권놀음이나 즐기고 있으니 나라 꼬라지가 참으로 우습게 되어갑니다. 엊그제였나요? 최순실 씨 재판에 증인으로 출석했던 조성민 전 더블루K 대표가 최씨를 강도높게 비판했던 게 말이지요. 그는 재판정에서 최씨를 향해 "인간의 탈을 쓰고 있다고 모두 사람이 아니라고 본다. 사람이 사람다우려면 잘못을 저질렀을 때 잘못을 시인하고 합당한 벌을 받아야 한다." 고 말했다지요. 그 말은 어쩌면 최씨가 아닌 청와대를 향해 던지는 말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바람도 불고 날이 찹니다. 이렇게 궂은 날씨에 마음마저 스산해지는 걸 보니 으슬으슬 몸살이 오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오라는 봄은 아주 먼 곳에서 아직 느린 발걸음도 떼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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