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문동씨입니다.

<다치바나 다카시의 서재> 리뷰대회 수상자를 발표합니다. ^^

 

#이벤트 다시 보기: http://cafe.naver.com/mhdn/122130

1등
다비랑 님 _ 위안이자 희망 그리고 잃어버린 것을 되찾아준 다치바나 다카시의 서재
http://blog.yes24.com/document/9300455

2등

cyrus 님 _ 책으로 살찌운 영혼
http://blog.aladin.co.kr/haesung/9146201


빌더무트 님 _ 현대의 백과전서파 다치바나 다카시의 종이책의 미래에 대한 이유 있는 낙관
http://blog.yes24.com/document/9300447

3등

티거루 님 _ 다치바나 다카시의 서재를 걷다
http://blog.aladin.co.kr/788375142


랜디와일드 님 _ 살아간다는 것 그리고 성장한다는 것
http://book.interpark.com/blog/rhoads82/4818194


꼼쥐 님 _ 비밀의 문
http://blog.aladin.co.kr/760404134/9147964

꿈의도서관 님 _'다치바나 다카시의 서재'
http://blog.yes24.com/document/9256510


정말 많은 분들께서 참여를 해주셨는데요. ^^

수상하신 분들 모두 다시 한번 축하드립니다.

더불어, 참여해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수상하신 분들께는 서점에 등록 된 회원정보를 통해 개별 연락 드릴 예정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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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Y 기쁨의 발견 - 달라이 라마와 투투 대주교의 마지막 깨달음
달라이 라마 외 지음, 이민영 외 옮김 / 예담 / 2017년 2월
평점 :
절판


데이비드 호킨스 박사는 자신의 책 <의식 혁명>에서 인간의 의식수준을 에너지 수준에 따라 분류해 놓았다. 우리에게 잠재돼 있는 내면의 힘을 수치화 하여 '0'에서부터 '1000'에 이르는 각각의 구간을 나누고 구간별로 인간의 의식 수준을 정리한 것이다. 그의 분류에 따르면 수치심(에너지 수준20), 죄의식(에너지 수준 30), 무기력(에너지 수준 50), 슬픔(에너지 수준 75), 두려움(에너지 수준 100), 욕망(에너지 수준 125), 분노(에너지 수준 150), 자존심(에너지 수준 175), 용기(에너지 수준 200), 중용(에너지 수준 250), 자발성(에너지 수준 310), 포용(에너지 수준 350), 이성(에너지 수준 400), 사랑(에너지 수준 500), 기쁨(에너지 수준 540), 평화(에너지 수준 600), 깨달음(에너지 수준 700~1000)이고 200 이하의 에너지 수준에서는 '살아남기'의 삶의 태도를 유지하게 되고, 500이라는 수치에 이르면 다른 사람의 행복도 고려하게 되고, 600대에 이르면 인간의 선과 깨달음에 대한 추구가 삶의 기본적인 목표가 된다고 했다. 그리고 700~1000의 수준에서는 인류의 구원을 위한 삶을 살게 된다고 말한다.

 

달라이 라마와 투투 대주교가 나눈 일주일간의 대화를 기록한 <기쁨의 발견>을 읽다가 문득 데이비드 호킨스의 <의식 혁명>이 떠올랐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었는지도 모른다. 21세기를 대표하는 두 성인이 인도 다람살라에서 만났던 것은 달라이 라마의 80번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함이었지만 슬픔과 고통 속에서 우리가 어떻게 기쁨을 찾고 영속적인 기쁨을 누릴 수 있는가에 대한 각자의 깨달음을 많은 사람들과 나누기 위함 또한 그들 만남의 목적이었다. 말하자면 이 책은 절망과 좌절에 빠진 인류가 다시 높은 수준의 에너지 수준을 회복하고, 서로를 걱정하고 사랑하면서 행복한 삶을 살아가기 위한 방법을 적시한 기쁨의 비법서인 셈이다.

 

"한 주 동안 두 영적 스승은 슬픔 없이는 기쁨이 없으며, 고통과 고난이 있기에 기쁨을 느끼고 이에 감사하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었다. 실제로 자신과 타인의 고통을 향해 다가갈수록 우리는 기쁨을 향해 더욱 나아가게 된다. 우리는 삶이 들려주는 음악을 듣기 위해 볼륨을 높이면서 그 둘 모두를 받아들이거나, 귀를 틀어막고 삶 자체에 등을 돌려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진정한 기쁨은 지속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며, 그저 스쳐 지나가는 감정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또 보여주었다. 그들이 긴 삶을 통해서 일구어낸 것은 기쁨의 그와 같은 지속적인 속성이었다." (p.354)

 

역설적이게도 경제가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과학이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인류가 갖고 있는 선한 본성이 그에 따라 점진적으로 더욱 풍성하게 발현되는 게 아니라 좌절과 공포, 타인에 대한 질투와 분노, 외로움 등 온갖 부정적인 감정만 강화된다. 그에 따라 우리가 경험하는 세상은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지는 살인과 끊이지 않는 테러 등으로 아비규환의 생지옥을 연출하고 있는 듯 보인다. 이런 환경에서 우리는 어떻게 기쁨을 발견하고 유지할 수 있을까?

 

"이런 말을 하게 되어 유감이지만, 더 많은 기쁨을 발견하더라도 우리는 어려움과 슬픔을 피해갈 수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더 많이 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더 많이 웃게 되기도 하겠지요. 그저 조금 더 살아 있게 되는 것이랄까요. 하지만 더 많은 기쁨을 발견한다면, 우리는 고통을 마주할 때 원통함보다는 조금 더 고상한 자세를 취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려움 앞에서 경직되지 않고, 슬픔 앞에서 부서지지 않겠지요." (p.25)

 

두 성인의 대화는 단순히 머리에서 나오는 '앎'의 수준이 아니었다. 심리학이나 뇌과학, 또는 명상이나 종교 서적을 뒤적여보면 우리는 이보다 더 근사하고 멋진 말을 수도 없이 많이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체화된 '앎'에서 비롯되는 깊은 울림은 단순한 지식의 전달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어떠한 외부 환경에서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 굳건한 의지, 타인을 향한 지속적인 연민, 우리 모두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는 깊은 유대감, 그들 또한 이 시대를 살고 있는 70억 명과 같은 인간일 뿐이라는 두 성인의 겸손에서 나는 깊은 감동을 받았다.

 

"자기중심적인 태도는 불안감과 두려움을 낳습니다. 불신이죠. 두려움이 많으면 좌절하게 됩니다. 그리고 좌절은 분노를 불러오죠. 그것이 연쇄적인 반응을 만들어내는 마음의 체계이고, 감정의 심리학입니다. 자기중심적인 태도를 갖는다면, 다른 이들과 멀어지고, 불신이 생기며, 그렇게 되면 불안하고, 두렵고, 걱정되고, 좌절하고, 분노하며, 폭력을 저지르게 됩니다." (p.98)

 

죽음은 언제나 우리 곁에 있지만 영원히 오지 않을 것처럼 까맣게 잊고 지내듯이 시련은 언제나 우리 삶으로부터 떠나지 않지만 영원히 오지 않을 것처럼 잊고 지낼 수 있느냐 하는 문제 역시 우리의 선택에 달려 있다. 시련의 존재를 잊는 순간 우리는 기쁨의 오로라를 발견할 수 있다. 그러자면 슬픔의 나락으로 빠지지 않는 정신의 면역력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타인의 슬픔을 묵상하면 나 자신의 슬픔이 작아지는 것처럼 타인의 기쁨도 내 기쁨인양 즐거워할 수만 있다면 웃고 기뻐하지 않을 시간이 있을 수 있을까. 주중에 하루를 쉬었더니 일주일이 다른 주보다 빠르게 지나간 느낌이다. 3월의 첫 주말, 일상에서의 기쁨이 온 나라에 가득했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대한민국 국민 누구에게서나 체화된 기쁨을 하시라도 발견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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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두 번의 반짝 추위가 더 남아 있을지도 모르지만 봄은 우리 주변을 서성이며 한껏 기대감을 높이고 있습니다. 모든 게 새로워지는 3월의 첫날이자 삼일절 휴일이었던 어제 아침, 나는 여느 날과 다름없이 산에 올랐고 이울어가는 겨울 풍경을 아쉽게 바라보았습니다. 짙은 어둠 속에서 시작된 산행은 푸른 빛이 감도는 새벽 어스름녘에서야 끝이 났습니다. 정상 부근의 소나무숲을 뒤로 하고 나는 하산을 서두릅니다.

 

 

 

우리의 삶도 어쩌면 이와 같을 것입니다. 아무것도 분간할 수 없는 어둠 속에서 시작된 삶은 형체만 겨우 분간할 수 있는 어스름녘에 서둘러 끝이 나는 것일 테지요. 때로는 앞을 분간할 수 없는 캄캄한 어둠 속에서 끝나는 삶을 목격하기도 하겠지만 대개의 삶은 어둠이 막 걷히는 이른 새벽이나 햇살이 찬란하게 퍼지는 아침에 끝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것은 삶이 지속되는 시간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잠깐 동안의 삶에서도 큰 깨달음을 얻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그분들은 어쩌면 모든 게 선명해진 세상을 만족스럽게 바라보며 조용히 눈 감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지난 겨울, 우리의 시간은 한치 앞도 분간할 수 없는 암흑이었습니다. 지금 이 시간에도 어둠이 완전히 걷힌 것은 아니겠지요. 그러나 봄과 함께 칠흑 같은 어둠 또한 서서히 물러나겠지요. 골이 깊으면 산도 높은 것처럼 어둠이 깊으면 별은 더 빛난다는 것을 믿고 싶습니다. 그리고 우리 앞에 찬란한 아침이 펼쳐지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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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터에서
김훈 지음 / 해냄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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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의 소설은 언제나 첫문장을 기억하게 된다. 첫문장의 무게가 남다르기 때문이다. '버려진 섬마다 꽃이 피었다.'로 시작하는 <칼의 노래>가 그렇고, '서울을 버려야 서울로 돌아올 수 있다는 말은 그럴듯하게 들렸다.'로 시작되는 <남한산성>이 그렇고,'초겨울에 남풍이 불어서 흑산행 돛배는출항하지 못했다.'로 시작된 <흑산>이나 '악기가 홀로 아름다울 수 없고, 악기는 그 시대의 고난과 더불어 비로소 아름다울 수 있을 뿐이다.'의 <현의 노래>가 그랬다. 작가에게는 이런 언급이 흘러간 세월처럼 무용하고 헛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독자의 가슴을 무겁게 짓누르는 첫문장의 느낌은 '그래. 이래야 김훈이지.'하는 생각이 들게 하고, 그것은 곧 책의 마지막장까지 숨가쁘게 달려갈 독서의 여정을 위해 첫숨을 고르는 역할을 한다.

 

"마동수(馬東守)는1979년 12월 20일 서울 서대문구 산외동 산18번지에서 죽었다." (p.7)

 

소설은 그렇게 신문 기사의 한 문장처럼 건조한 느낌으로 시작한다. 1979년이라는 과거에 환하게 불이 밝혀지고, 그해의 한 귀퉁이를 살았던 '마동수'라는 인물을 독자는 기억하게 된다. 지금은 사라진 누군가의 삶을 기억한다는 건 그가 살다 간 시간을 두서없이 뒤적이는 일이다. 그렇게 다시 살아난 시간은 어떤 대상이나 물질로 형상화되고 조금 더 선명해진 색채로 우리의 의식에 조롱조롱 맺힌다.

 

"아버지는 삶에 부딪혀서 비틀거리는 것인지 삶을 피하려고 저러는 것인지 마장세는 알 수 없었지만, 부딪히거나 피하거나 다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아버지는 늘 피를 흘리는 듯했지만, 그 피 흘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삶의 안쪽으로 진입하지 못하고 생활의 외곽을 겉돌고 있었다." (p.140)

 

일제 강점기에 중국을 떠돌던 마동수는 해방이 되자 서울 외곽의 고향집 근처로 돌아온다. 부모의 생사나 행방을 찾을 길 없었던 터라 그는 외톨이가 되었다. 얼마 후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단신으로 그는 부산으로 피난을 갔고 그곳에서 그는 피 묻은 군복을 잿물로 빠는 빨래꾼이 된다. 빨래터에서 그는 흥남부두에서 남편과 아이를 잃고 탈출한 이도순을 만나 부부가 된다. 장남 마장세가 태어나고, 지우려고 했던 차남 마차세가 태어난다. 전쟁이 끝나고 서울로 올라온 마동수의 가족. 그러나 변변한 직업도 없이 떠돌던 마동수는 두어 달에 한 번씩 집에 들르곤 했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건 순전히 이도순의 몫이었다. 입대하여 월남전에 파병된 마장세는 그곳에서 제대하여 미크로네시아로 떠나고, 전방 GOP에 배치된 마차세는 상병 휴가를 나왔다가 아버지 마동수의 임종을 맞는다.

 

"난 아버지를 묻을 때 슬펐지만 좋았어.한 세상이 이제 겨우 갔구나 싶었지. 이런 사람이 다시는 태어나지 않기를 빌면서 흙을 쾅쾅 밟았어. 형은 그 힘들게 지나간 자취가 너무 힘들어서 견딜 수 없는 거지. 형은 아버지를 피해 다니려다가 또 다른 수렁에 빠져가고 있는 게 아닐까?" (p.184)

 

퇴역한 미국인 문관과 함께 미크로네시아에 정착한 마장세는 그곳에서 고철업과 호텔업을 벌인다. 아버지의 임종에도 그는 한국에 오지 않았다. 제대를 한 후 마차세는 사귀던 여자 박상희와 결혼한다. 그는 다니던 대학을 자퇴하고 주간지 인턴 기자로 취직하엿지만 3개월 만에 해고된다. 미대를 졸업한 박상희는 미술학원의 강사 일을 하여 생계를 유지한다. 요양원에 입원한 이도순의 병원비며 월세와 생활비를 감당하기에는 빠듯한 여건이었다. 마차세는 물류회사에 취직하여 오토바이 배달 일을 시작한다.

 

"박상희는 이 가엾은 남편과 살아갈 날들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살아온 날들의 시간과 거기에 쌓인 하중을 모두 짊어지고 한 번도 살아본 적이 없는 시간의 벌판을 건너가야 할 것이었다. 벌판은 저쪽 가장자리가 보이지 않았다." (p.185)

 

마장세는 베트남에서 전사한 전우 김정팔의 형을 통하여 오장춘을 소개받는다. 마차세의 친구이기도 한 오장춘은 제대 후 고물상을 시작했다. 폐타이어와 고철을 취급했던 그의 사업은 승승장구하여 고철과 폐타이어를 수입하는 무역회사로 발전한다. 마장세를 통하여 마차세의 소식을 듣게 된 오장춘은 마차세를 자신의 회사에 들어오도록 한다. 오장춘의 거래업체가 된 마장세는 미크로네시아 곳곳에 방치된 폐자동차와 고철을 치워주는 대가로 그 나라에서 돈을 받고 그것을 다시 오장춘의 회사에 판매한다. 그리고 모래에 묻혀 인양이 쉽지 않은 폐자동차는 바다에 빠트려버리는 등 불법행위를 저지른다.

 

"아버지가 죽어서 세상은 홀가분했다. 아버지의 몸은 검불 같은 것이었지만, 그 무게가 마차세의 시간을 짓누르는 중력은 컸다. 아버지가 살아 있다 하더라도 생활의 지표가 될 리도 없었고 생계에 보탬이 될 수도 없었기 때문에 아버지가 죽어서 남은 사람의 삶이 더 막막해졌다고 말할 수는 없었고, 아버지가 죽음으로써 아버지를 한평생 끌고 온 시간과 아버지가 한평생 지고 온 짐이 소멸함으로써 아버지 없는 세상은 더 새롭고 가벼워질 것도 같았지만 아버지의 시간과 아버지의 짐이 과연 소멸할 수 있을 것인지는 확실치 않았다. 아버지가 검불같이 하찮고 의미 없는 존재라고 한다면, 그랬기 때문에 아버지가 죽어서 없어지고 난 후의 세상은 더욱 막막했다." (p.198)

 

마동수가 죽고 8년을 더 살았던 이도순은 요양원에서 죽었다. 그때도 역시 마장세는 오지 않았다. 월남전에서 작전을 나갔던 분대원이 고립되어 적들의 공격을 받고 일부는 죽고 김정팔이 부상을 당하자 그는 살아 남은 두 명의 부하와 함께 탈출하기 위해 김정팔을 사살했다. 그리고 그와 나머지 두 명은 탈출하여 살아 남는다. 그 공로로 전사한 김정팔과 마장세는 훈장을 받았다. 마장세가 숨겼던 비밀은 오랫동안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는 자신이 숨긴 비밀이 밝혀질까봐 두려웠었다.

 

"마장세는 감방 복도 모퉁이를 돌아서 다가왔다. 수염이 자랐고 몸이 말라서 옷이 헐렁했다. 걸음걸이가 끌리는 듯했고 나이보다 한참 늙어 보였다. 마차세는 멀리서 아버지가 다가오는 듯한 환영을 느꼈다. 어느 변방을 겉돌고 헤매는지, 두어 달 만에 한 번씩, 겨울이면 새벽에 기침을 쿨럭이며 집으로 돌아오던 아버지의 걸음걸이가 마장세의 걸음에 옮겨와 있었다. 형은 아버지를 피해 다니다가 아버지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인가." (p.342)

 

가족이라기보다는 남이나 마찬가지였던 아버지와의 인연을 끊고 전쟁터에서 있었던 자신의 잘못을 숨기기 위해 나라를 등졌던 마장세는 결국 모든 걸 잃은 채 안 좋은 모습으로 귀국한다. '나중에 나는 죽어도 아버지처럼 살지 않겠다'고 다짐한 아들은 어느 순간 자신도 모르게 아버지의 습관을 따라하거나 아버지가 밟았던 삶의 길을 따라 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그것은 피할 수 없는 운명의 굴레인 양 질기다.

 

몇 년 전 작가는 이병률 시인과 함께 미크로네시아의 추크섬을 여행한 후 여행 에세이를 썼었다. <안녕 다정한 사람>이라는 제목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그 섬에는 원주민 여자와 결혼하여 그곳에 정착한 김도헌 씨가 살고 있다. 그가 쓴 <세상 끝에 살고 싶은 섬 하나>에 김훈 작가의 추천사가 실렸다. 그래서인지 이 소설의 곳곳에서 어디선가 본 듯한 기시감이 들었다.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지나오는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배경으로 쓴 소설이 많은 까닭도 이유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작가의 탁월한 문장 표현력이 없었더라면 작품에 대한 평은 훨씬 박했을지도 모른다. 스토리나 작품성보다는 작가의 능력이 빛났던 소설이었다. 나는 그렇게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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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핏 잠이 들었었나 봅니다. 이름도 모르는 간이역에서 기차를 갈아 타듯 나는 그렇게 현실로부터 잠시 멀어져 꿈길 속을 헤매었던 것입니다. 봄이 멀지 않은 2월의 마지막 주말. 넉넉한 시간이 한마디 푸념도 없이 흐르는 햇살 좋은 오후였습니다. 겨울 코트를 벗에 한 손에 거머쥔 사람들이 보도 위를 걷고 있습니다. 그들에게 봄은 가까운 미래가 아닌, 지금 여기의 현실인 것만 같습니다.

 

어제부터 나는 김훈의 소설 <공터에서>와 달라이 라마·투투 대주교의 대화를 기록한 <기쁨의 발견>을 읽고 있습니다. 두 권 모두 내가 읽고 싶었던 책이지만 진도는 잘 나가지 않습니다. 계절의 변화와 함께 수선스러워지는 마음을 어찌할 수 없는 까닭이겠지요. 관여하지 않아도 될 온갖 일에 두루 마음이 쓰이는 걸 보면 봄의 예감은 변화무쌍한 날씨보다 사람들의 번잡한 마음에서 먼저 시작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사람들은 오늘도 광화문으로 집결한 듯합니다. 탄핵을 반대하는 사람들 역시 서울역으로 모인 듯하고 말이지요. 혼돈과 암흑의 시대는 비단 우리나라만의 비극은 아닌 듯합니다. 취임 한 달이 지난 도널드 덕, 아니 도널드 트럼프의 지율이 39%로 역대 최저인 가운데 그를 반대하는 많은 미국 시민들로 인해 미국 또한 혼돈과 암흑의 시대로 접어든 듯합니다. 그와 같은 현상은 유럽이라고 해서 크게 나을 것도 없어 보입니다. 어쩌면 우리는 지금, 달이 태양을 가리는 일식의 시간을 견디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나마 위안이 되는 건 변하지 않고 찾아오는 계절의 순환입니다. 그마저도 없었더라면 우리는 무엇에 기대어 답답한 하루하루를 견딜 수 있을까요. 봄이 오고 만개한 벚꽃의 거리를 걸으며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의 미소를 가슴에 품고 다시 또 희망을 말할 수 있을 테지요. 비록 우리의 소망은 늘 확신할 수 없는 꿈길 속의 어떤 것일지라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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