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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브 - 신은 혼자서 상처받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윌리엄 폴 영 지음, 한은경 옮김 / 세계사 / 2017년 3월
평점 :
품절
나도 모르게 스르륵 잠이 들 듯한 순한 햇살이다. 계절을 건너온 노곤한 햇살이 기신기신 창을 넘는 나른한 오후, 윌리엄 폴 영의 신작 소설『이브』 를 마저 읽었다. 소설의 주제가 다분히 종교적인 색채를 띤 영적인 치유와 깨달음에 있다는 걸 제외하면 윌리엄 폴 영의 여성적인 문체와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전개 방식으로 별 거부감 없이 읽을 수 있는 소설이다. 게다가 종교적인 성향의 소설이라고는 하지만 누구나 한번쯤 들어봤음직한 성경의 창세기편을 소재로 한 것이니만큼 대중성에 장애가 되지는 않을 듯 보인다.
소설은 미지의 섬인 피난처에서 시작된다. 위치도, 연도도 알 수 없는 섬의 해변에서 열두 명의 시체가 담긴 컨테이너가 발견된다. 컨테이너는 그 섬에서 유일한 '수집하는 자' 존에게 인계된다. 존은 그 섬에서 백 년째 살고 있다. 컨테이너에서는 중년 남자 한 명과 열한 명의 소녀들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컨테이너에서 서류철을 살펴보던 존은 한 명의 소녀가 더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냉각기 옆의 작은 공간 안에서 완전히 부서진 소녀 한 명을 추가로 발견한다. 그가 발견한 소녀는 살아있었다. 치유하는 자들이 구한 소녀의 이름은 릴리였다. 릴리는 환상 속에서 '마더 이브'를 만나 태초의 현장을 목격하는 증인이 된다.
"내 딸아, 이리 와. 와서 창조의 증인이, 너의 부서진 몸과 깨진 영혼을 치유할 완벽한 증인이 되어줘." (p.26)
소설은 세 개의 공간에서 펼쳐진다. 릴리가 자신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는 지구,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피난처, 우주의 탄생과 아담과 이브가 등장하는 에덴 동산이 그것이다. 마약중독자인 릴리의 엄마는 릴리가 6살이 막 지났을 무렵, 약값 대신 그녀를 팔았고 그때 이후로 사람들은 그녀가 이용 가치가 없어질 때까지 계속해서 팔아넘겼고, 그녀는 결국 영원히 아기를 가질 수 없는 만신창이의 몸으로 사고까지 당하여 혼수상태에 빠진다. 섬의 수호자였던 '존'은 이브가 예고한 '태초의 증인'이 그 소녀라는 것을 직감하고 지극정성으로 보살핀다. 릴리가 구사일생으로 살아나자 릴리의 생존에서 의미를 찾기 위한 사람들이 하나둘 모여들었고 그들 중에는 아주 먼 곳에서 온 학자들인 제럴드, 아니타, 사이먼도 있었다.
"그녀는 창조의 절정에서 증인이 되려고 여기 소환되었다. 이브는 인간 안에서 탄생될 것이기에 아직 존재하지 않으며, 그녀는 그들의 탄생의 증인이 되기 위해 이 자리에 있는 것이다." (p.266)
자신을 무가치한 존재로만 여겼던 릴리는 아내를 잃고 '그림자 병'에 걸린 사이먼의 꾐에 빠져 모든 희망을 잃고 정신적 위기 상황으로 내몰린다. 사이먼이 선물한 '진실의 거울'을 통해 자신의 내면 모습을 비춰본 릴리는 사악한 괴물과 같은 자신의 모습에 충격을 받고 자신의 존재 가치를 완전히 잃고 만다. 릴리가 뱀의 공격을 받은 후 존은 사람들을 데리고 바다밑 피난처인 '볼트'로 이동한다. 그곳에는 학자들이 연구할 수 있는 서재와 증인으로서 릴리가 본 것을 기록하는 기록실과 식당과 휴식 공간 등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었다. 그곳에서 사이먼은 다시 한 번 릴리를 유혹한다. 아담에게 배신을 당한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추방된 아담에게 다시 돌아가지 못하도록 막을 수만 있다면 이브는 영원히 에덴에 남을 것이고 인류의 역사는 바뀔 것이라고 하면서 태초의 증인인 릴리가 그 현장에서 그런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녀에게는 수치심과 자기혐오야말로 가장 오래된 친구였다. 그런 감정들은 은혜나 축복과는 반대에 있는 것으로 그녀가 무가치하다고 입증하는 것들이었다.'실망'이라는 단어조차 그녀를 바닥으로 떨어뜨릴 수 있었다. 존은 그녀에게 그런 감정들에 저항하라고, 자신에 대한 애정과 배려가 더 큰 진실이라는 걸 부탁하고 있었다." (p.272~p.273)
여러번 위험에 빠진 릴리의 곁에는 언제나 사이먼이 있었다는 걸 눈여겨 보고 있었던 존은 위기의 상황에서 릴리를 구하고 릴리로부터 사이먼을 분리시키는 데 성공한다. 릴리는 환상 속에서 마더 이브와 재회하고 그곳에서 마리아를 만난다. 그동안 진실을 외면한 채 자신의 존재 가치를 부정하기만 했던 릴리는 그곳에서 비로소 진실을 마주하게 되고 아담이 '영원한 이'로부터 돌아섬으로써 앓게 되었던 '그림자 병'의 의미를 깨닫게 된다. 이제 릴리는 존의 헌신적인 노력과 진실한 사랑을 신뢰할 수 있었다.
"신뢰란 일생에 단 한 번 내리는 선택이 아니고, 매순간 강물이 흐르듯 선택하는 거야. 우리를 둘러싼 선물에 감사하고, 또 그 선물을 보내고, 혹여 한 번 잃더라도 어느 것도 잊히지 않았다는 걸 신뢰하는 거야."(p.409~p.410)
"진정한 사랑은 펼쳐진 두 손을 필요로 하지. 거절할 힘이 없다면 사랑은 절대로 실재가 되지 못하고 환상에 불과하단다."(p.373)
그러나 그들 앞에는 피할 수 없는 이별의 순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존과도, 부부인 아니타와 제럴드와도... 소설은 이제 마지막 반전을 향해 달려가고 독자들은 아담을 유혹한 이브에 대한 인식도,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인식도 서서히 변하고 있음을 느낀다. 늘 하느님을 향해 있던 아담이 태초에 그로부터 '돌아섬'으로써 생긴 하느님과의 단절, 하느님의 존재를 인식할 수 없는 안개의 장막을 작가는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슬픔은 참 기이한 거야.기쁨과 똑같이 갑작스레 찾아오거든. 옆으로 툭 하고 말이야. 그건 그냥 우리 삶의 리듬이고 충분히 인간적인 일이야."(p.328)
헌재의 탄핵 심판 선고를 하루 앞둔 오늘, 봄빛 완연한 날씨에 나는 온종일 춘곤증에 시달렸고, 윌리엄 폴 영의 소설 <이브>를 읽고 소설 속 주인공 릴리를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