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 드러커의 최고의 질문 - 세계 최고 리더들의 인생을 바꾼
피터 드러커 외 지음, 유정식 옮김 / 다산북스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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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현상에 휘둘리는 인간이 자신의 존재 이유를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피상적인 외부 현상은 한시도 고정되는 법이 없고, 그에 따라 움직이다 보면 자신의 판단을 믿을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즉 유동적인 외부 현상에 비추어 나의 본질을 파악한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한 방법인지도 모른다. 끝없이 변화하는 외부 현상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는 진실이나 핵심을 파악하기 위한 우리의 부단한 노력은 근원적인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는 과정과 비슷하다. 그것은 한 인간의 존재 이유나 여러 구성원을 거느린 어떤 조직의 존재 이유를 찾는 과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러자면 본질을 파악하기 위한 핵심적인 질문이 선행돼야 한다. 질문이 잘못되면 도출되는 결과 역시 잘못될 수밖에 없고 그에 투입된 노력 역시 허사가 되고 만다.

 

현대 경영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피터 드러커(Peter Drucker)는 무엇보다도 '질문의 중요성'을 간파했던 사람이다. 미래를 정확하게 예측한다는 건 불가능하지만 세월에 따라 변하지 않는 어떤 것을 파악하고 기본에 충실하다 보면 우리가 바라는 미래의 결과를 도출할 수도 있다. 이를테면 그것은 유동적인 미래에 우리를 맞추는 게 아니라 우리가 바라는 미래의 모습이나 결과를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 갈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미래를 예측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미래를 창조하는 것이다."라고 했던 그의 말은 일견 타당한 것이다.

 

"피터 드러커는 40여 년 전에 이미 "기업의 목적은 고객을 창조하는 것이다. 고객이 유일한 수익원이다"라고 역설한 바 있다. GE의 CEO였던 잭 웰치Jack Welch 역시 직원들에게 "아무도 여러분의 직장을 보장할 수 없습니다. 고객만이 여러분의 직장을 보장해줍니다"라고 말했다." (p.88)

 

우리는 종종 그들의 말이 옳다는 걸 수긍하면서도 미래의 어느 순간에도 역시 그들의 말이 옳을 것이라는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는다. 수시로 변하는 외부 현상에 자신도 모르게 휘둘리기 때문이다. <피터 드러커의 최고의 질문>은 피터 드러커가 했던 '5가지 질문'을 실천하고, 그것을 통하여 고난을 극복하고 목표를 달성한 세계 리더 20인의 통찰을 담고 있다. 짐 콜린스, 마셜 & 켈리 골드스미스, 마이클 래드파르바르, 필립 코틀러, 라그후 크리슈나무르티, 루크 오윙스, 제임스 쿠제스, 애덤 브라운, 캐롤린 고슨 등 자신의 분야에서 세계적으로 일가를 이룬 유명 인사들이 '피터 드러커의 질문'을 어떻게 수용하고 해석하여 실천하게 되었는지 이 책에서 사례를 들어 말하고 있다.

 

피터 드러커가 던진 5가지 질문은 다음과 같다. '[미션] 왜, 그리고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고객] 반드시 만족시켜야 할 대상은 누구인가?', [고객가치] 그들은 무엇을 가치 있게 생각하는가?', '[결과] 어

떤 결과가 필요하며,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계획]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피터 드러커에 따르면, 조직의 미션은 비전, 목표, 세부목표, 실행방법, 예산, 평가와 마찬가지로 계획의 핵심 구성요소다. 그는 미션이 올바르게 설정된다면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질문에 답할 수 있다고 말했다. "우리의 목적은 무엇인가? 왜 우리는 이 일을 하는가? 마지막에 우리는 어떤 존재로 기억되고 싶은가?" 드러커는 조직의 관점에서 이 세 가지 질문을 언급했지만, 내 경험으로 볼 때 '청년 창업가'들에게도 이 세 가지 질문은 똑같이 적용할 수 있다." (p.194)

 

피터 드러커가 했던 5가지 질문은 조직의 존재 이유나 지향하는 목표 등을 제시함으로써 조직 구성원을 하나로 결속시키고 어떠한 외부 환경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신념을 제공한다고 하겠지만 조직이 아닌 모든 개개인에게도 자신의 존재 이유나 삶의 목표를 설정하는 데 도움을 준다. 물론 그 질문들이 개인에게 향했을 때 각각의 질문은 철학적이면서도 쉽게 대답할 수 없는 근원적인 질문이 되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면 삶의 단계별로 우리는 자신이 만족시켜야 하는 대상이 다르고 미션 또한 달라질 수밖에 없음을 알 수 있다. 우리는 매 순간 도전에 직면하고 선택을 강요받는다. 우리가 속한 조직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비단 최고경영자만의 몫은 아니다. 조직의 전 구성원이 주어진 미션을 공유하고, 만족시켜야 할 대상을 분명히 인식하는 가운데 최선을 다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면 그 조직의 성공 가능성은 자연스레 높아질 것이다. 어떤 위기에 직면한다 할지라도 말이다.

 

대한민국에 새로운 정부가 출범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협치 허니문 정국은 자취를 감춰버렸다. 국무총리 후보자 임명동의안이 진통 끝에 간신히 통과되긴 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촛불정국으로 탄생한 이번 정부에 대한 국민들의 기대와 신망은 어느 때보다 두텁다. 그렇다 할지라도 정치권은 자신들의 이해득실에 따라 아전인수격의 주장과 진흙탕 싸움을 한동안 계속 이어가겠지만 국민들의 관심과 열망이 식지 않는 한 그들도 결국 국민 전체의 의견을 따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국회든, 정부든, 기업이든 피터 드러커가 했던 존재 이유를 묻는 질문을 계속한다면 지금과 같은 자신들의 행태에 대해 국민들 앞에 사죄할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지금껏 정치권이 반성하지 않았던 이유는 그들의 존재 이유가 대한민국 국민 위에서 군림하는 데 있었기 때문이다. '비정상의 정상화'는 국민들의 상식과 눈높이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가 정치에 대해 한시도 눈을 뗄 수 없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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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뭄은 오래 계속되었다. 농사를 짓거나 내수면 어업에 종사하지 않는 나 같은 도시내기들에겐 눈에 띄는 불편이 지금 당장 몸에 달라붙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해가 떨어지는 즉시 선선해지는 날씨나, 반나절도 지나기 전에 바싹 마르는 빨래나, 그늘에 몸을 피하는 것만으로도 쉽게 더위를 떨쳐버릴 수 있는 것 등 가뭄으로 누릴 수 있는 혜택 아닌 혜택이 반가울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알게 모르게 불안한 것이다. 농작물 가격의 상승 등 직접 체감할 수 있는 불안 때문이 아니다. 폭풍전야의 숨 죽인 정적처럼 너무나도 길게 이어지는 건조한 날씨가 가까운 장래에 가져올 파장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어제는 뉴스 말미에서 정말 기분 좋은 장면을 보았다. 주진형 전 한화투자증권 사장의 거침없는 발언으로 20년 묵은 체증이 뻥 뚫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대한민국의 지식인 중에 저런 분도 있구나, 싶을 정도로 한마디 한마디의 말이 감탄과 탄복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주식시장에 대해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그의 발언이 얼마나 정직했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삼성그룹 합병에 대한 박근혜 전 대통령의 발언에 대해 "정신 나간 주장"이라고 강하게 비판했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나라 증권회사의 보고서나 코멘트라는 게 얼마나 무책임하고 부실한 것인지에 대한 그의 정확한 진단과 눈치 보지 않는 소신 발언 때문이었다.

 

어처구니 없는 기사도 있었다. 옛 새누리당 의원들이 5대 개혁과제 미이행시 1년치 세비를 반납하겠다는 대국민 약속에 대해 아무도 책임지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2017년 5월 31일까지 약속을 이행하지 않을 경우 1년치 세비를 기부형태로 국가에 반납하겠다고 서약하고 당시의 계약서에 56명의 의원들이 서명했고, 이 중 31명이 20대 총선에서 당선되었다는데... 어처구니 없는 뉴스는 또 있다. 성주 골프장에 반입된 2기의 사드 발사대 말고 문재인 정부도 알지 못햇던 4기의 사드 발사대가 있다고 하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이념이나 정체성을 떠나 국가의 안보와 이익에 직결된 문제인데 그들은 도대체 어느 나라 국민이기에 새로운 대통령에게 보고조차 하지 않았던 것일까. 우리는 지금 내부의 적과 싸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가뭄이 문제라지만 우리는 아주 오래전부터 걸러지지 않는 인재 가뭄에 오랫동안 시달려 왔던 것이다. 자연적인 가뭄은 장마가 오면 해결된다지만 암덩어리처럼 부푼 인재 가뭄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그 해갈을 기다리고 있다. 적폐는 쉽게 해결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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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던 씨크 명랑 - 근대 광고로 읽는 조선인의 꿈과 욕망
김명환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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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읽었던 어느 기사는 바둑기사 이창호, 작곡가 주영훈, SBS 윤현진 아나운서 이 세 사람의 공통점을 묻는 것으로 글이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신문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는 퀴즈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어엿한 기사였는데 시작만 그랬다는 것이죠. 혹시 정답을 아시는지. 그렇습니다. 저는 몰랐던 사실이지만 이들은 모두 남양유업과 MBC 방송국이 주관했던 '전국 우량아 선발대회에 참가했던 경력이 있다더군요. 40대 이후의 세대라면 TV에서 방영되던 그 때의 장면이 어렴풋한 기억으로 남아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토실토실 살이 찐 아기들이 홀딱 벗은 몸을 엄마의 손에 의지한 채 카메라 앞에 서서 플래시가 터질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기도 하고, 아주 서럽게 울기도 하고 그랬던 것 같습니다.

 

1971년에 시작돼 1983년 13회를 끝으로 막을 내렸던 우량아 선발대회는 숱한 사연을 남긴 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여담이지만 이창호는 1977년 대회에 참가하여 전국 2위를 차지했다는군요. 당시 19개월 되었던 이창호의 몸무게는 4.8kg이었다네요. 우량아로 선발되면 선물도 받고, 광고모델로 활동도 했으니 가난했던 그 시절의 부모님으로서는 자격만 된다면 참가를 한번쯤 고려해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첫 대회 참가 신정자만 1830명에 달했다고 하니 이벤트가 많지 않았던 당시에 20개월 미만의 아기를 둔 부모들이 우량아 선발대회에 쏟았던 관심이 지대했던 게 아닐까요.

 

그렇다면 우리나라에 분유가 처음 들어온 건 언제였을까요. 일제강점기의 광고를 분석한 <모던 씨크 명랑>의 기록으로 보면 1924년쯤이었나 봅니다. 김명환의 <모던 씨크 명랑>은 중견 언론인인 저자가 1920년부터 1940년까지 20여 년간 발행된 신문 6천여 부의 광고면들을 뒤져 신문광고에 담긴 근대 조선인의 삶과 사회상을 흥미롭게 짚어낸 책으로서 1924년 5월 조선일보에 실린 분유 광고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근대 광고로 읽는 조선인의 꿈과 욕망'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에는 분유 광고 이외에도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놀라운 기록들이 여럿 실려 있습니다.

 

"오스트레일리아 원산의 분유 '라구도겐Lactogen'(락토겐)은 한술 더 떠 '분말 순유純乳라는 캐치프레이즈 아래, 분유의 용도를 여섯 가지나 나열했다. 즉 젖먹이나 허약아, 임산부의 영양 보충용, 이유기 아기용으로 쓸 뿐 아니라, 멀쩡한 성인 남녀들에게도 분유를 물에 타서 '보건용 음료'로 마시자고 제안했다. 영양 보충용 식품으로 광고한 것이다." (p.64)

 

저자는 20년 치 신문광고 전체를 샅샅이 훑어 190여 점의 중요 광고의 원본 이미지를 수록하고 이에 대한 해설을 덧붙였습니다. 1부 놀라지 마시라, 모던한 이 맛!, 2부 환락의 경성 근대의 에로티시즘, 3부 명랑하다! 오리지나루 팻숀과 발명품, 4부 고통의 세상 만병통치약의 꿈, 5부 흰옷 입은 민족의 슬프고 기발한 시, 모던 광고 파노라마의 총 5부로 구성된 이 책은 우리의 실생활에 필요한 상품을 광고하는 것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신문물에 대한 그 시절 사람들의 경이와 흥분이 고스란히 담았다고 하겠습니다. 비록 지금의 광고 문구에 비하면 어처구니 없을 정도로 유치하고 직설적인 표현이 곳곳에 드러나지만 말입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당시에도 광고를 통하여 구매를 유도한 후 물건은 보내지 않고 돈만 챙기는 사기가 횡행했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의 나체 사진집 광고들이란 대부분 속임수였다. 업자들이 보내온 것은 광고와 전혀 달랐다. '아주 빨가버슨 사진'도 아니고 '남녀가 바라고 바라던 사진'도 아니었다. 엉뚱하게도 소포 안에는 기생이나 여배우가 수영복을 입고 해변에서 헤엄치는 장면 같은 사진이 들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심지어 여자가 아닌 장정들이 벌거벗고 땀흘리며 일하는 사진을 보내오는 일까지 있었다." (P.72)

 

'살찌라! 건강의 추秋에 살 안 찐 분은 에비오스 정을!'이나 '위생상으로나 미용상으로나 남자들은 3일에 한 번, 여자들은 10일에 한 번은 (머리 감기가) 꼭 필요'와 같은 광고 문구에는 실소가 터져나오기도 하지만 위안소에 들어가는 사병에게 성병 예방을 위해 제공했다는 '돌격1번突擊一番'과 같은 콘돔 광고는 가슴이 아팠습니다. 돌이켜 보면 그 당시의 삶은 절대적으로 남성 위주의 사회가 아니었나 싶기도 하고 말이죠.

 

오늘 이 책을 읽는 내내 중학교 2학년인 아들은 옆에서 얼마 전에 사준 "The Currents of Space By Isaac Asimov"를 읽고 있었습니다. 저도 아들의 나이 때에는 SF소설을 어지간히 좋아하지 않았나 싶습니다만 나이가 들수록 과거의 역사에 더 애착이 가는 듯합니다. 내가 겪었던 시절에 더하여 그 이전 세대의 삶에 대한 궁금증이 그리움처럼 밀려오기 때문입니다. 살아온 날들이 많지 않은 어린 시절에는 과거보다는 오히려 미래에 대한 궁금증이 더 크겠지요. 김명환의 <모던 씨크 명랑>은 내 할아버지 세대의 향수를 자극하는 그런 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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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맑고 청명한 하늘을 보았던 게 언제였는지요. 아침에 집을 나오는데 멀리까지 탁 트인 시야와 맑은 공기, 적당히 부는 바람 등 근래에 보지 못했던 풍경에 나는 어리둥절 조금 놀랐었나 봅니다. 그것은 아마도 간절히 원하지만 두 번 다시 볼 수 없는 상상 속의 하늘, 귀한 줄도 모른 채 맘껏 누렸던 내 기억 속의 하늘이 현실에서 재현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한 계절을 건너 뛰어 초가을의 어느 아침을 맞고 있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혀 괜스레 설레기도 했습니다.

 

청녹색

 

           천상병

 

하늘도 푸르고

바다도 푸르고

산의 나무들은 녹색이고

하느님은 청녹색을 좋아하시는가 보다.

 

청녹색은

사람의 눈에 참으로

유익한 빛깔이다.

우리는 아껴야 하리.

 

이 세상은 유익한 빛깔로

채워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니

안타깝다.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노래했던 천상병 시인의 시 <청녹색>이 오늘 아침 문득 떠올랐습니다. 푸른 하늘을 떠다니는 흰구름이 마치 시인의 천진스러운 얼굴처럼 보였습니다. '이런 날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나도 모르게 들었던 것이지요. 미세먼지 걱정이라곤 해본 적 없었던 과거에는 하루하루가 천국이었습니다. 아름다운 풍경 앞에 서면 누구나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는 까닭은 아마도 다시는 만날 수 없다는 아쉬움과 과거로 변한 그리움이 모두 눈물로 변한 까닭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외선 걱정은 뒤로 한 채 자꾸자꾸 밖으로만 나가고 싶었던 그런 하루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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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만에 신혼여행
장강명 지음 / 한겨레출판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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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의견이 달라 전적으로 동의하기는 어렵지만 주변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써내려간 그런 내용의 글을 읽을라치면 시원시원하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단 한 번뿐인 삶,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없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장강명 작가와 같은 희귀종, 또는 별종을 만나면 왠지 존경스러운 마음보다는 '설마 이거 레알?' 하는 의심부터 드는 것이다.

 

'댓글 부대', '한국이 싫어서' 등으로 이미 베스트 셀러 작가의 명단에 이름을 올린 장강명의 에세이 <5년만에 신혼여행>은 개인보다 가정을 앞세우는 대한민국 사회에서 케케묵은 관습을 과감히 박차고 나가 자신의 소신대로 살고 있는 작가의 리얼 스토리를 다룬 책이다. 연세대학교 도시공학과를 졸업한 작가는 대학 졸업 후 대기업 계열의 건설회사에 취직했다가 1년 뒤 기자로 전향했다. 10년 남짓 기자생활을 한 그는 그마저도 그만두고 전업 작가의 길을 선택했다. 이 책은 저자와 그의 아내가 결혼한 지 5년만에 떠난 보라카이 신혼여행기다. 3박 5일간의 여행 이야기이지만 톡톡 튀는 내용들이 눈에 띈다.

 

책은 2001년 초 같은 과 선후배로 만나 2년 남짓 연인으로 지낸 HJ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된다. 2004년 HJ가 시민권 취득을 목표로 호주로 유학을 떠나는 바람에 갑자기 헤어져 연락처도 모른 채 지내다가 '구관이 명관'이라는 생각(을 했는지는 모르지만)으로 "평생을 기다릴 수도 있어"라는 작가의 고백 덕분에 다시 장거리 연애에 돌입, 2008년에 귀국한 HJ와 1년 남짓 동거를 했고, 2009년 여름에 결혼식은 생략한 채 혼인신고를 했다. HJ와의 결혼을 반대하는 부모님 때문에 부모님과 연락을 끊었고 결혼식은 포기했다. 대신 두 사람의 이름과 함께 결혼을 하니 축하해달라는 신문광고를 작게 냈다.

 

명절에는 작가 혼자 부모님 댁에 가고, 집 현관에는 '효도는 셀프'라는 글귀를 붙여 놓았다. 아이를 낳지 않고 둘이 행복하게 살겠다는 다짐을 지키기 위해 정관수술도 받았다. 작가는 자신이 그간 살아온 궤적과 세상을 대하는 가치관, 아내와의 사랑 이야기까지 솔직하고 거침없이 쏟아낸다. 신혼여행도 신혼여행이지만 이 책은 오히려 신혼여행기를 빙자한 장강명 작가의 인생 에세이로 읽힌다.

 

"우리는 아이를 갖지 않고 둘이서 잘 살기로 했다. 그런 결심을 하고 나는 신촌의 비뇨기과에 가서 정관수술을 받았다. 어영부영하다가 결심이 흔들릴 게 두려웠다. 비뇨기과 의사가 "자녀는 몇 분이십니까?"라고 물었을 때 "둘 있습니다"라고 거짓말했다."    (p.15)

 

아내가 인터넷 검색을 통해 준비한 보라카이 3박 5일의 신혼여행은 기대와 다르게 순탄치만은 않았다. 저가 항공사의 비행기에 문제가 생겨 공항에서 6시간이나 지체되었고, 리조트의 방은 1층에 전망도 안 좋은 데다 시끄럽기까지 했다. 피곤이 쌓인 부부는 결국 부부 싸움을 크게 벌이기도 한다.

 

"우리는 우연의 허락을 받고 사귀게 되었다. 그런 결론에 나는 낙담하지 않았다. 이 결론에 따르면 우리가 5년 만에 신혼여행을 떠나, 보라카이 해변에서 부부 싸움을 벌인 것도 운명이 아니다. 우연일 뿐이다. 그리고 우연이 허락하는 한도 안에서 우리는 뭐든 할 수 있다. 우연은 아무리 연이어 일어나봤자 우연의 연속일 따름이다. 거기에 의지가 섞여 들어가야 운명이 된다."    (p.142)

 

작가는 이 책에서 한국 사회의 여러 문제에 대해서 자신의 솔직한 생각을 가감없이 쓰고 있다. 그것은 가볍다기보다 '아,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구나'하는 느낌의, 관습이나 규범, 예절 등에 대한 작가의 관점이 다를 뿐이라는 시각으로 읽힌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30~40대의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고민해봤을 문제이고, 비록 작가의 생각과는 차이가 있다고 할지라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나는 허구에 대해 생각했다. 때로는 관습이라는 이름으로, 때로는 해방이라는 명목으로, 때로는 삶의 의미라는 구실을 내세워 다가오는 허구들. 나는 그 허구들에서 벗어날 수 없다. 인간은 쉴 새 없이 허구를 만들어내고 그 허구  속에서만 살 수 있는존재다. 심지어 나는 그 일로 돈을 벌려 하고 있다. 허구는 익사에 대한 공포와 수면 위로 탈출할 수 있다는 믿음이며, 바닷물이자 산소통 그 자체다. 어떤 허구에는 다른 허구로 맞서고, 어떤 허구에는 타협하며, 어떤 허구는 이용하고, 어떤 허구에는 의존할 수밖에 없다."    (p.237)

 

나도 이따금 아직 이루지 못한 여행에 대한 간절한 열망으로 들뜨거나 가까운 과거의 지난 여행에 대해 회상하곤 한다. 돌이켜 보면 내가 다녀온 여행지에서는 늘 예외나 우연이 길에 버려진 비닐봉지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떠다녔다. 여행에서 예외나 우연이 일상인 양 받아들여지는 것처럼 우리네 인생도 그렇다는 걸 쿨하게 인정하면 세상을 살아가는 게 한결 편해질지도 모른다. 작가의 생각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여행지에서 느껴보는 자유가 어느 것에도 구애받지 않는 자유로운 생각들을 불러냈을 것이다. 삶이 행복해지기 위해 자신의 소신과 그에 상응하는 행동들로만 삶을 구성할 수는 없다. 다만 우리는 이따금의 여행을 통해 소신이 개입할 수 있는 작은 부분을 나의 삶 속에 슬몃 밀어넣을 수는 있을 것이다. 그렇게 조금씩 자신의 소신을 넓혀가는 것, 그것이 진정한 행복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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