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속담에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써라" 하는 말이 있습니다. 궂은 일, 험한 일 가리지 않고 벌어서 쓸 때는 귀한 곳, 정말 필요한 곳에 쓰라는 의미이겠지요. 말하자면 돈은 버는 것보다 쓰는 것이 더 어려우니 돈을 쓸 때는 삼가고 조심하라는 뜻으로 쓰이지 않았을까 싶기도 합니다. 그러나 최근의 뉴스를 보면 개는커녕 하이에나처럼 게걸스럽게 버는 인간 같지 않은 인간들도 많고, 정승처럼 벌어서 개 같이 쓰는 인간들도 허다한 듯합니다.

 

언론의 보도를 보면 미스터피자의 회장인 정 모씨도 그렇고 BBQ나 파자에땅 등 프랜차이즈 업체의 갑질이 도를 넘은 것 같더군요.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대리점에 대한 남양유업의 밀어내기식 횡포나 주요 신문사의 지국에 대한 비슷한 행태 또한 여전하니 말입니다. 자본주의 국가에서 정당하게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 것이야 누가 뭐라 하겠습니까만 제 몫에 더하여 타인의 몫까지 탐내는 하이에나와 같은 사람들이 우리 사회 곳곳에 독버섯처럼 번져가고 있으니 큰일이 아닐런지요. 게다가 부모 잘 둔 덕에 땀 한 번 흘리지 않고 정승처럼 번 돈으로 말년에는 자신의 딸보다도 어린 여자들을 성매수 했던 모 기업 회장이나 정승처럼 번 돈을 영어의 몸이 된 자신을 구명하느라 변호사들에게 펑펑 쓰고 있는 그의 아들은 또 어떻습니까. 정승처럼 벌어 개처럼 쓰고 있는 꼴이 참으로 우습기만 합니다.

 

주말부부로 살고 있는 나는 평일에 머무는 지방의 아파트에서 같은 단지내의 여러 학생들과 꽤나 가깝게 지내고 있습니다. 많지는 않지만 내가 갖고 있는 책을 빌려주기도 하고 그냥 줄 때도 더러 있기 때문이지요. 이따금 학습에 도움을 줄 때도 있긴 합니다만 그런 표면적인 이유보다도 아이들의 이야기를 적극적으로 들어주었던 게 그들과 가까워진 주된 이유가 아닐까 싶습니다. 땅은 좁고 경쟁은 치열한 대한민국에서 산다는 게 누구에게나 쉬운 일은 아니겠으나 아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괜스레 짠한 마음이 들곤 합니다. 아이들도 그러더군요. 경쟁을 하더라도 공정한 룰에 의해서 하고, 힘들게 밥벌이를 하더라도 인간다움을 유지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이지요. 밥벌이, 하니까 성선경 시인의 시가 떠오릅니다. 오늘은 더위가 시작된다는 소서이자 금요일. 시름을 잊고 편안한 주말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 모두가.

 

 

밥 罰

         성선경

 

밥벌이는 밥의 罰이다.

내 저 향기로운 냄새를 탐닉한 죄

내 저 풍요로운 포만감을 누린 죄

 

내 새끼에게 한 젓가락이라도 더 먹이겠다고

내 밥상에 한 접시의 찬이라도 더 올려놓겠다고

눈알을 부릅뜨고 새벽같이 일어나

사랑과 평화보다도 꿈과 이상보다도

몸뚱아리를 위해 더 종종거린 죄

 

몸뚱아리를 위해 더 싹싹 꼬리 친 죄

내 밥에 대한 저 엄중한 추궁

밥벌이는 내 밥의 罰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바다가 보이는 이발소 - 제155회 나오키상 수상작
오기와라 히로시 지음, 김난주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7년 5월
평점 :
품절


어쩌다 보니 소설을 자주 읽게 되었다. 예전에는 철학이나 에세이 등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책만 주구장창 읽었었는데 요즘에는 나도 모르게 소설 쪽으로만 손이 가는 걸 보면 사람이 변한 것인지 아니면 주변 상황이 변한 것인지 그 원인을 알기 어렵다. 그렇다고 역사 소설이나 추리 소설, 혹은 SF 소설 등과 같은 특정 장르의 소설만 탐닉하는 건 또 아니다. 그렇다고 몇몇 작가를 정해 놓고 그들의 작품만 읽는 것도 아니다. 그저 닥치는 대로 읽는다. 소설 마니아라고 하기에는 소설을 보는 안목도, 소양도 깊지 못한 탓일 게다.

 

이렇게 마구잡이로 소설을 읽다 보니 나처럼 둔한 사람의 눈에도 일본 소설과 우리나라 소설의 분명한 차이점이 더러 눈에 들어오기도 한다. 문학을 전공한 사람이 아닌 순수 아마추어의 눈에 비친, 말하자면 일반 독자로서의 시각에서 말이다. 일본 소설의 가장 큰 특징은 스토리 전개에서 작가의 개입이 전혀 없거나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반면에 우리나라 소설은 작가의 잦은 개입으로 인해 스토리가 중간에서 뚝뚝 끊기는 경우가 많다. 주인공의 심리묘사 형식으로 서술되는 부분이 과도하게 길거나 주제와 연관된 철학적 배경을 한참 설명하거나 삶에 대한 작가의 견해를 주인공을 통해 전달한다. 일본 소설은 이런 식으로 작가가 개입하는 것을 극도로 자제하는 편이다. 오직 스토리에만 집중할 뿐이다. 독서를 방해하지 않는 수준에서 작가의 개입이 최소한으로 이루어진다.

 

일본 소설의 이런 모습에 대해 비판적인 일부 독자는 가볍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당연한 말이지만 소설은 스토리가 주이다. 어떤 스토리를 읽고 독자가 어떠한 철학적 관점에 서는가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독자의 몫이지 작가가 관여할 부분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찌 보면 일본 소설가의 대부분이 지독히 냉정한 것인지도 모른다. 일본 작가라고 해서 왜 하고픈 말이 없겠는가마는 철저히 함구한다는 점에서 냉정하다는 뜻이다. 우리나라 소설가는 한 번 필을 받았다 하면 자신의 철학이나 주인공의 주제의식에 대해 구구절절 써내려가기 일쑤이다. 그러다 보니 작가의 견해를 독자에게도 강요하는 듯한 인상을 받기도 한다. 우리나라 소설가가 일본 작가에 비해 더 열정적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것은 비단 소설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에세이에서도 대체로 그렇다. 작가가 말하고 싶은 이야기를 툭 던져놓고는 자신의 글을 읽는 독자가 어떻게 생각할지는 알 바 아니라는 듯한 자세를 보인다. 소설 곳곳에 작가의 철학이 드러나는 게 나쁘다는 건 아니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 <정체성>은 오히려 스토리는 부가 되고 작가의 철학이 주가 되는 듯한 인상을 받는다. 그렇지만 소설이 재미없다거나 끊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지는 않는다. 그렇게 되는 까닭은 작가의 견해가 모든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 관점에서 진행되기 때문이다. 그만큼 깊이가 있다는 얘기다.

 

아, 이런! 요네자와 호노부의 소설집 <바다가 보이는 이발소>에 대한 리뷰를 쓴다는 게 그만 엉뚱한 방향으로 흘렀다. 제 155회 나오키상 수상작이기도 한 이 책은 6편의 단편이 실린 소설집이다. 표제작인 '바다가 보이는 이발소'를 비롯하여 '성인식, '언젠가 왔던 길', '멀리서 온 편지', '하늘은 오늘도 스카이', '때가 없는 시계'가 그것이다.

 

"엄마가 내 팔을 잡는다. 이런 모습은 본 적이 없었다. 요시다라는 요양사에게 늘 이런 식으로 얘기하는 것이리라. 홀로 남아 나이를 먹고, 병에 걸려서야 겨우 어리광을 부릴 수 있는 상대를 찾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전의 고슴도치처럼 줄곧 주위를 경계했던 인생에는 끝내 그런 상대가 없었다." (p.94 '언젠가 왔던 길' 중에서)

 

6편의 단편 모두가 일본 소설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어린 딸을 교통사고로 잃고 상실감에 젖어 살던 부부가 죽은 딸을 대신하여 성인식에 참석하면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다룬 '성인식'과 자존심 강한 엄마 때문에 늘 힘들어 하던 딸이 취업과 동시에 독립하여 무려 16년을 등지고 살다가 이제는 치매에 걸려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해진 엄마를 어렵게 만난다는 내용의 '언젠가 왔던 길', 일밖에 모르는 남편과 시어머니에게 반발해 아이를 데리고 친정에 갔던 주인공이 매일 밤 이상한 문자를 받게 되면서 자신도 미처 알지 못했던 조부모의 삶과 남편을 이해하게 된다는 이야기를 다룬 '멀리서 온 편지', 아버지가 급사하는 바람에 얼떨결에 이발소를 물려받은 주인공이 위기를 극복하고 승승장구 하다가 욕심에 눈이 멀어 급기야 살인까지 저지르게 되었고 출소 후 바닷가 한적한 곳에 작은 이발소를 차려 남은 삶을 살아가는 이야기를 그린 '바다가 보이는 이발소'.

 

"이발사는 늘 커다란 거울 앞에서 일하는 직업이죠. 손님에게 언제나 모습을 보여야 하는 장사입니다. 그게 힘들었어요. 그래서 이발하는 동안 바다를 보고 있으면 제 얼굴에는 신경을 쓰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내 얼굴은 아무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언젠가 당신 살인자지, 하고 손가락질할까 봐 두려워서." (p.139 '바다가 보이는 이발소'중에서)

 

집을 나와 바다를 찾아 떠나는 소녀가 비닐봉투를 쓴 소년을 만나 동행하는 과정을 아이의 시각에서 그린 독특한 문체의 이야기인 '하늘은 오늘도 스카이', 아버지의 유품으로 손목시계를 물려받은 주인공이 한 시계방에 시계 수리를 맡긴 채 시계방의 주인과 나누는 대화에서 자신의 아버지를 회상하는 내용의 '때가 없는 시계'.

 

"어른이 되면 자기 부모라도 객관적으로 보게 되는 법이다. 절대 특별한 존재는 아니었다. 어느 면에서나 그냥 평범한 보통 사람이었다고 생각한다. 특히 기억 속의 아버지 나이를 넘긴 지금은." (p.246 '때가 없는 시계' 중에서)

 

작가는 6편의 단편 모두에서 가족간의 관계를 말하고 있다. 가장 가깝다고 생각하는 가족도 결국 이런저런 이유로 이별을 경험하게 되고, 이별 후에 떠오르는 자신의 기억을 통해 비로소 한 사람의 객체로서 가족을 이해하게 된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그것은 어찌 보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는 일정한 거리가 유지될 때에만 유지되는 불완전한 구조임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일정한 거리가 주어지지 않는 가족이라는 관계는 우리가 기대하는 것과는 상당히 다르다는 사실을 작가는 지적하고 있다. 서로의 거리가 너무 가깝거나 너무 멀어서 약간의 상처로도 아주 쉽게 무너질질 수 있는 게 가족이라는 관계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가족이라는 살얼음판을 가장 단단하다고 믿으면서 산다. 그게 삶이다.

 

(오탈자)"스즈네를 위해서기보다 자신들을 위해서였다." -->"스즈네를 위해서라기보다 자신들을 위해서였다." (p.4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장맛비가 내리는 일요일 한낮. 높아진 습도와 후끈한 열기로 바깥 공기는 후텁지근하다. 눅눅한 게으름이 휴일 도심을 뒤덮은 듯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마냥 무겁게만 보인다. 그렇게나 바라던 장마가 아니었던가. 그러나 장맛비에 대한 반가움도 잠시, 금세 높아진 습도 탓인지 변덕이 심한 도시인들의 환대는 오래 가지 못한다.

 

지독한 가뭄이었다. 비 한 방울이 아쉬웠던 메마른 대지와 지독한 갈증을 묵묵히 견뎌야만 했던 숲의 나무들을 보며 나는 그동안 많은 생각을 했다. 불황기에는 기반이 튼튼하지 못한 젊은이들이나 흥청망청 손이 큰 사람들이 타격을 받는 것처럼 가뭄에는 활엽수의 어린 나무들이 가장 먼저 말라 죽는 걸 보았다. 가뭄이 지속되는 동안 숲은 그먀말로 치열한 생존경쟁의 장이었다. 뿌리가 얕은 어린 나무들이 시름시름 말라 죽는 모습을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가을도 아닌 한여름에 서글픈 낙엽이 지고 있었다.

 

큰 나무들이 우거진 숲일수록 어린 나무들은 더 빨리 말라 죽었다. 불황이 계속될 때 가난한 사람들이 쉽게 고사(枯死)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경기 불황이 어어지는 가운데 지난해 새로 창업한 사업자가 122만 명이 넘었던 반면 폐업한 사업자가 91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안타까운 일이다. 그럼에도 종교인들은 자신들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듯하다. 내년 1월부터 시행되는 종교인 과세에 대해 집단적인 반발 움직임을 보이니 말이다.

 

 

이를 보도하는 언론인들 또한 국민들을 우롱하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종교인 과세' 간담회 착수..종교계 반발>과 같은 제목을 붙임으로써 종교인 전체가 과세에 반대하는 듯한 뉘앙스로 읽히기 때문이다. 이미 세금을 내고 있는 신부님들이나 수녀님들로부터 이 제도가 잘못되었다거나, 종교인 과세가 부당하다는 말을 나는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다. 불교계에서도 기본적으로 찬성하는 입장이고 반대하는 건 오직 개신교 목사들뿐이다. 무당과 같은 사이비 종교인들은 혹 반대할런지도 모른다. 그들은 세금 몇 푼 내는 게 문제가 아니라 자신들의 소득이 밝혀지는 게 두려운 것이다. 과도한 축재를 하면서도 신도들로부터 존경과 권위를 인정받던 사람들이 자신들의 재산이 밝혀짐으로써 하루 아침에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다는 걸 그들이라고 왜 모르겠는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하루하루가 이별의 날
프레드릭 배크만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7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는 저마다 '남다르게 평범한 인생'을 살아가는 게 아닐까 싶어요. 지구가 생겨난 이후 완전히 똑같은 날씨는 단 하루도 없었다는 것처럼 깨알같이 많은 사람들이 살다가지만 서로가 서로를 완벽하게 닮은 삶을 살았던 사람은 결코 존재하지 않겠지요. 어제와 오늘의 날씨가 비슷해 보이고 나와 당신의 삶이 그닥 크게 다르지 않은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프레드릭 배크만의 소설 <하루하루가 이별의 날>은 비록 남들이 볼 때는 평범해 보일지라도 우리들 삶이 우리를 기억하는 특별한 사람들에게 만큼은 특별한 의미로 남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동화처럼 투명한 언어로 독자들에게 전달하고 있습니다. 나는 사실 칼릴 지브란의 <예언자>를 잘 각색된 소설로 다시 읽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잠시 혼란스러웠습니다.

 

책에는 할머니를 먼저 떠나 보낸 후 혼자가 된 할아버지와 사랑하는 손자 노아, 할아버지의 아들이자 노아의 아빠인 테드, 인생의 절반을 함께 했던 과거 기억 속의 할머니가 등장합니다. 작가의 의도도 그러햇겠지만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의 특성은 그닥 중요하지 않은 듯 보입니다. 점점 기억을 잃어가는 할아버지는 자신의 현재 상태와 언젠가 닥쳐올 이별의 순간을 위해 손자인 노아에게 삶에 필요한 여러 진실들을 조곤조곤 들려줍니다.

 

"이 책은 기억과 놓음에 대한 이야기다. 한 남자와 그의 손자, 한 아버지와 아들이 주고받는 연서이자 느린 작별 인사다. 솔직히 누군가에게 보일 목적으로 시작한 원고가 아니었다. 나는 글로 적어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기에 그냥 내 생각을 글로 정리하려고 했을 뿐이다." (p.7 작가의 말)

 

삶의 어느 한 순간이 끊임없이 재생되고 현실로 돌아오는 시간마저 점점 길어지고 있는 노인은 현실이 완전히 녹아내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영원히 찾을 수 없는 순간이 자신에게도 곧 닥쳐오리라는 걸 사랑하는 어린 손자에게 마치 한 편의 동화처럼 들려줍니다. 광장의 벤치에 앉은 할아버지와 노아는 할머니의 정원을 가득 채우던 히아신스의 달콤한 향기를 맡고 있습니다.

 

"할아버지는 노아 쪽으로 몸을 숙이고긴 잠 속으로 빠져들려는 사람처럼 숨을 뱉는다. 두 사람 중 한 사람은 점점 자라고 한 사람은 점점 작아져서 몇 년이 지나면 중간에서 만날 수 있을 것이다." (p.112)

 

수학을 좋아하는 두 사람은 그것 말고도 서로 통하는 게 많습니다. 글쓰기와 기타치기를 좋아했던 노아의 아빠 테드와는 달리 수학을 좋아하는 노아와 할아버지는 서로 한 몸인 양 느끼는 듯합니다. 그러므로 할아버지가 노아에게 하는 말은 어쩌면 자신이 노아만 했던 과거의 자신을 향해 던지는 혼잣말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할아버지와 노아는 이따금 할머니와의 추억을 공유하기도 합니다.

 

"할아버지는 우주의 나이가 130억 년이 넘는다고 노아에게 잊을 만하면 한 번씩 이야기한다. 할머니는 늘 중얼거렸다. "그런데도 당신은 그 우주를 쳐다보느라 바빠서 설거지를 할 시간도 없다 이거죠." 할머니는 노아에게 가끔 "바쁘게 사는 사람들은 항상 뭔가를 바쁘게 놓치면서 사는 거야."라고 속삭였지만 노아는 할머니가 돌아가실 때까지 그게 무슨 소리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p.67)

 

이별은 누구에게나 두렵고 가슴 아픈 일일 테지요. 더구나 사랑하는 사람을 영원히 다시 볼 수 없는 상실의 고통은 말해 뭐하겠습니까. '영원'이라는 말처럼 아득한 게 또 있을까요? 그러나 자연 속에서 평생을 사는 우리 역시 자연의 순리를 거역할 방법은 없습니다.

 

"아빠가 저녁에 할머니, 할아버지 집으로 데리러 오면 할머니는 작별 인사를 못 하게 했다. "하지 마라, 노아야. 내 앞에서 그 소리는 하지 마! 네가 떠나면 이 할미가 늙잖니. 내 얼굴에 새겨진 모든 주름이 너의 작별 인사야." 할머니는 이렇게 푸념을 늘어놓곤 했다." (p.75)

 

<오베라는 남자>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프레드릭 배크만은 이 책에서 웃음기를 싹 뺀 진지한 언어로 생로병사의 피할 수 없는 변화를 우리가 어떻게 하면 두려움 없이 대할 수 있을지 차분하게 풀어내고 있습니다. 아무리 연습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경험이지만 두껍지 않은 이 책을 반복하여 읽다 보면 어느 순간 두려운 마음을 속으로만 갈무리한 채 마지막 이별의 순간에도 우리는 당황하거나 호들갑스럽지 않은 모습으로 담담히 수용할 수 있을런지도 모르겠습니다. 노아에게도 마음의 굳은살이 꾸덕꾸덕 생겨나 이별의 순간에도 의연하게 대처하기를 바랐던 할아버지처럼 독자들도 그러하기를 작가는 원하고 있을 테지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느새 나는 고된 하루를 시작하기 위해 날선 아침을 맞는 이가 있다는 것도, 한여름의 진득한 어둠이 한가로이 내려앉는 밤, 내일을 위해 치열하게 잠들어야 하는 이가 있다는 것도 가슴으로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되었다. 이해의 폭이 넓어진다는 것은 더러 속절없이 울 일이 많아진다는 것일 수도 있다. 그것은 비단 타인을 향해 존재하는 것만은 아니다. 젊거나 어렸던 과거의 나를 이해하는 것이기도 하다.

 

지난주 토요일에는 고등학교 친구들과의 모임이 있었다. 우면산 서초약수터에서 만나 가볍게 등산을 한 후 점심이나 함께 하자는 취지였는데 나는 부득이한 사정으로 참석하지 못했다. 그날 밤, 모임에 참석했던 한 친구가 단톡방에 올린 짧은 글로 인해 나는 조금 먹먹했었다. 고등학교 시절 주말 휴일이면 함께 모여 농구를 하고, 한 친구의 집으로 우르르 몰려가 라면을 끓여 먹던 추억, 대학 시절 술에 취해 인사불성이 되었던 한 친구, 사법고시 2차 시험에서 번번이 떨어졌던 친구를 위로하기 위해 그때마다 모여 쓴 소주를 마셨던 친구들... 친구의 글은 '그립다'는 말로 끝을 맺었지만 시간의 빈 공간으로 끝없이 빨려드는 느낌이었던 나는 스마트폰 액정을 한동안 넋 놓고 바라보았다.

 

우리는 다들 '언젠가'라는 말을 구실로 소중한 '무엇인가'를 잃어가고 있는 게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