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천재를 죽였는가 - 고 최인호 작가 다섯 번째 유고집
최인호 지음 / 여백(여백미디어) / 2017년 6월
평점 :
절판


도시에서 맞는 아침은 대개 혼미하거나 텁텁하다. 그것은 날씨와는 무관한 현상이다. 청명한 가을 아침에도, 구름 한 점 없는 어느 봄날에도 텁텁한 느낌은 가시지 않으니까. 다만 바람이 없는 여름철에 그 농도가 진해질 뿐 일 년 열두 달 중 어느 한 달이라도 맑고 개운한 느낌을 받지는 못한다. 그래서인지 도시인들은 이따금 과거로의 퇴행을 거듭하곤 한다. 늦여름이나 초가을의 어느 이른 아침, 햇살을 받아 영롱하게 빛나는 거미줄의 이슬방울들. 아이들은 그 투명한 아침의 공기를 뚫고 잠자리 잡을 생각에 들뜬다. 가는 나뭇가지를 타원형으로 구부려 테를 만든 뒤 긴 자루에 묶고 나서 여기저기에 쳐져 있는 거미줄을 테에 붙여서 잠자리를 잡을 수 있는 잠자리채를 만드는 게 기본이다. 거미줄에 붙어 퍼덕이는 잠자리를 손으로 떼어내며 무심코 바라보았던 하늘. 더없이 투명했던 어느 아침. 그런 식의 퇴행은 마치 이제는 가질 수 없는 어떤 대상에 대한 동경이나 아련한 향수처럼 읽힌다.

 

어릴 적 어느 한 시절로의 퇴행은 비단 한토막의 추억에서 그치지 않고, 그 시절에 유행했던 노래나 영화, 소설이나 시 등 다양한 것들로 전이된다. 모호하거나 에둘러 표현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속내를 감추는 요즘의 작가들과는 달리 거칠지만 순박했던 당시의 어느 인기 작가의 소설이나 산문이 또한 그리워지는 것이다. 2,30년도 더 지난 어느 작가의 글을 읽고 있노라면 이맘때의 나리꽃이 피듯 그 시절의 추억이 몽글몽글 피어나곤 한다.

 

최인호의 산문집 <누가 천재를 죽였는가>를 읽게 된 것도 그런 이유였다. 작가의 유고집 <눈물>을 읽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작가가 떠난 지도 벌써 만 4년이 다 되어가고 있다. 이 책에 실린 글들은 대개 절판되어 다시 접할 수 없는 30~40년 전에 쓴 작가의 초기 글들을 비롯해 습작노트와 신문, 잡지, 문예지 등에 기고한 원고들이다. <눈물>이 작가의 말년을 기록한 책이라면 이 책은 그보다 훨씬 어린, 젊은 시절의 작가를 떠올리게 한다. 작가를 꿈꾸었던 어린 시절부터, 생의 마지막까지 작품을 구상했던 모습까지 대부분의 시간들이 이 책에 녹아있지만 낡았다거나 진부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까닭은 작가의 쉼 없는 열정 때문이 아니었을까.

 

"우리가 신이 부활하였으므로 신을 믿는 것과 같이, 새벽이 있으므로 밤을 인내하는 것과 같이, 오늘 우리 세대에 젊음이 있으므로 우리의 슬픔을 오늘날의 인내로 극복하는 것과 같이 우리의 이 모든 슬픔을 용서해 주시옵소서." (p.36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중에서)

 

시대를 풍미했던 그도 한 사람의 연약한 인간이었던지라 도덕적으로 완벽하지 못하였고, 젊은 시절의 치기와 열정으로 인해 때로는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렸고, 인기와 더불어 세인들의 시샘이 그의 허물에 더하여졌으니 그의 작품과는 별도로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도 많았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스물일곱 살의 젊은이였던 그도, 투병 중에 있었던 말년의 그도 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뛰어난 상상력으로, 천재적인 예술성으로 우리 시대를 논하였고 자신의 작품으로써 미진한 시대를 위로했다.

 

"내 젊은 시절을 이제 거의 지내고, 밤마다 나는 검은 재처럼 스러지는 나의 빛나는 청춘을 본다. 나의 젊은 시절은 묵은 책갈피에 끼워진 건조한 낙엽 몇 장처럼 이미 죽어 있었지.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것은 이제 전갈보다 깊은 표정을 하고 술을 마시고, 세금 인상에 눈 부릅뜨는 일상사에 젖어 합창보다 시끄러운 여론에 깜짝깜짝 놀라고 몇 개의 거짓말, 몇 개의 허위 속에 침몰한다는 얘기겠지." (p.126 '꽃을 노래함' 중에서)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누가 천재를 죽였는가'는 천재 화가 이인성의 어처구니없는 죽음을 소설체 형식을 빌려 재현한 글이다. 통행금지가 있던 해방 직후 해방의 기쁨으로 술에 취한 천재 화가는 같은 동포였던 치안대원의 총 한 방으로 어이없이 죽었던 것이다. 이인성의 죽음을 안타까워했던 작가는 그의 죽음에 대한 책임이 동시대인 모두에게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천재는 신에게서 태어나는 것이며, 천재를 가늠하는 척도가 인품이라고도 한다.

 

"그렇다. 수학을 잘 한다고 천재 수학자는 아니다. 문재文才가 뛰어나다고 천재 작가는 아니다. 천재를 가늠하는 척도는 인품이다. 그렇다고 인품을 지닌 것만으로 우리는 천재라고 하지 않는다. 인품이 풍기는 재능을 가졌을 때, 우리는 그를 진정한 천재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나는 천재가 아니다." (p.233 '천재란 누구인가' 중에서)

 

자신의 소설을 영화화 한 '별들의 고향'과 '바보들의 행진'이 폭발적인 흥행기록을 올리면서 졸지에 스타작가가 되었던 그는 <걷지말고 뛰어라>를 통하여 영화감독으로 데뷔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는 영화보다는 작가로서의 삶이 더 어울리던 사람이었다. 여배우와의 염문설 등 수많은 스캔들에 시달리면서도 연애소설을 쓰고 싶어했던 그는 천생 작가였다.

 

"아아, 그런 의미에서 나는 연애소설을 쓰고 싶다. 모든 여성들의 가슴에 화전민이 되어 불을 지르고 그 타버린 폐허에서 씨를 뿌려 나날의 양식을 거둬들이는 그런 연애소설을 쓰고 싶다. 내가 쓰는 소설은 '연애를 연애하는' 그런 연애소설이 될 것이다." (p.312 '나는 연애소설을 쓰고 싶다'중에서)

 

텁텁한 공기와 끄느름한 하늘, 그리고 숨 막히는 더위. 청량한 아침 공기가 몹시도 그리웠던 오늘, 닿을 수 없는 어떤 것에 대한 동경과 향수의 마음으로 나는 <누가 천재를 죽였는가>를 읽었다. 중국의 인권 운동가이자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류샤오보의 사망 소식을 들었고, 그가 했던 말을 조용히 음미했다. "증오는 지혜와 양심이 아니다. 적대적인 감정은 국가의 영혼을 오염시키고, 야만적인 삶을 악화시키고, 사회의 관용과 인간성을 파괴한다. 또, 국가가 자유와 민주를 향해 나아가는 것을 방해한다." 투명한 아침햇살을 그리워 하듯 그 시절의 글이 기리워질 때가 있다. 동경은 사라져가는 모든 것에 대한 반작용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침 하늘은 여전히 어두웠다. 비에 젖은 눅진한 등산로 위로 죽은 나무가 군데군데 쓰러져 있다. 생명을 유지하는 것들에게 물은 그야말로 생명수이지만 생명을 다하고 나면 물은 얼마나 짐스러운가. 발걸음이 무거웠다. 깊게 잠들지 못했던 나는 간헐적으로 쏟아지던 빗소리에 하릴없이 깨어 그때마다 번번이 멀뚱한 시간을 보냈었다.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얕은 잠에서 깨어난 나는 몇 번을 더 뒤척이다가 집을 나섰다.

 

 

습습한 바람이 우듬지를 훑고 지나갈 때마다 나뭇잎의 빗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어제 점심을 함께 했던 한 친구의 말이 아침 산행길 내내 멍한 내 의식을 붙잡았다. 신혼 시절에는 술에 떡이 되어 밤 늦게 들어가서 술기운에 횡설수설 늘어놓던 변명도 철석같이 믿어주던 아내가 이제는 말똥한 정신으로 이 궁리 저 궁리 고심하여 그럴 듯한 변명을 꺼내놓아도 콧방귀조차 뀌지 않는다는 넋두리였다. 말하자면 예전에 했던 자신의 변명은 아내의 가슴에 점성 좋은 엿처럼 찰싹찰싹 잘도 달라붙었는데 이제는 점액질의 미역처럼 줄줄 흘러내리기만 할 뿐 도무지 늘어붙는 느낌이 없다는 것이었다.

 

 

옆에서 묵묵히 듣고 있던 다른 친구 왈, "1번, 사랑이 식어서. 2번, 변명의 트렌드가 변해서. 3번, 나이가 들고 창의성이 떨어져서. 4번, 지금껏 같은 변명만 무한반복해서. 이 중에서 몇 번인 것 같아?" 하고 물었다. 하소연하던 친구는 답이 없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세 살 버릇 여름까지 간다
이기호 지음 / 마음산책 / 2017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기호의 가족소설 <세 살 버릇 여름까지 간다>는 작가가 어깨의 힘을 반쯤 뺀 상태로 쓴 듯한 느낌을 받는다. 자신의 글을 통하여 남들에게 잘 보이고 싶다거나 우쭐해하고 싶은 욕심을 절반쯤 내려놓았다는 얘기다. 글을 쓰는 작가가 글에 대한 욕심을 내려놓는다는 건 사실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서인지 여타 작가들의 초창기 작품을 읽어보면 '잘 써야 되겠다' 하는 마음으로 어깨에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간 채 글을 쓴 탓인지 책을 읽는 독자가 오히려 더 부담스러워져 어깨가 뭉치는 느낌이 든다. 가독력도 떨어지고 말이다.

 

그렇다고 글을 잘 쓰기 위한 노력을 게을리했다는 얘기는 결코 아니다. 그건 또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작가가 욕심을 내려놓은 채 글을 쓰면 작가 스스로도 글을 쓰거나 퇴고를 거듭하는 과정을 지겹게 생각하지 않을뿐더러 때로는 즐기게도 된다. 노동이 아니라 유희가 된다고나 할까. 아무튼 글을 쓰는 일을 오롯이 즐길 수 있는 것이다. 작가가 그렇게 즐거운 마음으로 쓴 글은 그것을 읽는 독자도 배시시 웃음을 머금을 수 있게 된다.

 

"아내는 계속 깔깔 웃어댔다. 아내의 그 웃음은 뭐랄까, 정말이지 나를 자꾸 내부 지향으로 만들어가는, 편안하고 적나라한 웃음이었다. 그냥 한번 웃고 마는 것. 아내의 장기주택저축을 지켜주는 것, 계속 방귀대장 뿡뿡이의 연인이 되어주는 것. 그것과 머리칼을 바꾼다면 그 또한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잠깐 들게 만드는 웃음.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나도 클클 함께 웃어버리고 말았다. 어쨌든 나와 함께 웃고 있는 이 사람은 특이한 거 좋아하는 여자가 된 게 맞으니까. 그거면 다 된 거니까."    (p.26~p.27)

 

아무튼 이 책은 가족을 소재로 쓴 가족 소설이다. 작가 자신의 직접적인 체험을 슬쩍 덧칠하여 썼으니 소설이 맞긴 하지만 '가족 에세이'라고 해도 과하지는 않을 듯하다. 2011년부터 한 월간지에 '유쾌한 기호씨네'라는 제목으로 연재했던 글을 책으로 엮은 것이라 했다. 원래는 삼십 년을 연재 시한으로 삼고 시작한 글이 채 사 년을 채우지 못했던 까닭은 세월호 사건 때문이었다고 했다. 둘째 아이의 생일이 4월 16일이란다. 나는 책을 다 읽은 후에도 왠지 모를 아쉬움이 남았다. 이 책에 실린 44꼭지의 글을 읽는 다른 독자들도 어쩌면 나와 같은 마음이 들지도 모르겠다.

 

"벚꽃이 지고 초록이 무성해지면, 다시 아이들은 그만큼 자라나 있겠지. 아이들의 땀 내음과 하얗게 자라나는 손톱과 낮잠 후의 칭얼거림과 작은 신발들. 그 시간들은 어떻게 기억될까? 기억하면 그 일상들을 온전히 간직할 수 있는 것일까?"    (p.246~p.247)

 

아내와 애 셋 딸린 가장은 어깨가 무거울 것이다. 그럼에도 작가는 유머를 잃지 않는다. 누군가의 남편으로서, 또는 세 명의 아이들의 아빠로서, 때로는 다른 누군가의 아들이자 사위로서 실수도 많고 바라는 바도 많겠지만 그는 자신의 현재 모습에 만족한 듯 보인다. 학원에 다니지 않는 아이들은 낮에는 합기도 체육관에서 밤에는 동네 카페 2층의 '사자소학' 교실에서 문무(?)를 갈고 닦으며 무럭무럭 자란다. 작가의 시선은 언제나 그 언저리에서 맴돈다.

 

2016년의 꼭 이맘때쯤이었다. 나는 이기호 작가의 소설 <사관 잘해요>를 읽고 리뷰를 썼었다. 그리고 딱 1년 후에 나는 다시 그의 소설을 읽고 리뷰를 쓴다. '나에게는 가족이라는 이름 자체가 꼭 소설의 다른 말인 것만 같다.'고 작가는 말한다. 어디 가족뿐이랴. 내가 사랑하는 모든 대상이 한 편의 소설이자 삶의 감동인 것을. 세월이 흘러 나나 당신의 사랑하는 대상이 또 다른 모습으로 변해갈 때 우리의 소설은 어떤 추억으로 쓰일 것인가. 미처 기록하지 못한 소설은 우리의 기억 속에서 여전히 갈무리되고 있을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얼핏 들었을 때는 잘 이해가 되지 않던 말도 혼자서 곰곰 되씹어 보면 '아, 그렇구나!' 하고 확연히 깨닫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이것은 아마도 한박자 느린 나의 둔한 운동신경과도 연관이 있지 싶은데 어제도 그런 일이 있었다. 오래전부터 서로 알고 지내는 사이이긴 하지만 나와는 상당한 나이 차가 있는 인생 선배 세 분과 저녁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였다. 그 자리에서의 대화를 그대로 옮겨 보면 다음과 같았다.

 

나 : 한참이나 어린 사람이 이런 말을 하는 건 외람되지만 나이가 들수록 사는 게 점점 조심스러워집니다.

 

A : 자네도 충분히 그럴 만한 나이가 되었지. 다만 자신의 인생을 연습만 하다가 보내지는 말게. 무슨 얘긴고 하니 지난 일을 하나하나 곱씹고 후회하는 것으로도 모자라 다음에 이런 상황이 오면 이러이러하게 해야지 계획하느라 남은 시간을 허비하지는 말라는 얘기네. 아무리 나이가 많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오늘은 누구에게나 처음이 아닌가. 인생은 매일매일이 새로운 도전의 장이지 어제의 경험으로 오늘을 다시 재현하는 연습의 장이 아니라는 말일세.

 

B : A의 말이 맞네. 다만 자신의 가슴에 오해의 싹은 틔우지 말게. 오해는 단순히 오해로 끝나는 게 아니네. 여름철 잡초처럼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나는 법이지. 한 번 생긴 오해를 그대로 방치하면 무성해진 오해로 인해 세상을 보는 시야가 좁아지고 결국에는 비뚤어진 방식으로 세상을 대하게 된다네. 그것만 조심하면 되네. A가 말한 것처럼 자신의 인생을 늘 본게임처럼 생각하고 이미 지나간 일을 후회하는 데 많은 시간을 쓰지는 말게. 그것처럼 허망한 일도 없을 걸세.

 

어제는 그저 별 뜻도 없이 나누던 대화였는데 오늘 다시 생각해 보니 이보다 더 귀한 조언이 다시 없을 듯싶다. 한마디 고맙다는 인사도 하지 못한 채 헤어졌는데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에어비앤비 스토리 - 어떻게 가난한 세 청년은 세계 최고의 기업들을 무너뜨렸나?
레이 갤러거 지음, 유정식 옮김 / 다산북스 / 2017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지금 막 사회에 첫 발을 내디뎠거나 사회 생활 경험이 10년 이내로 그리 길지 않은 2,30대의 젊은이들을 보면 베이비붐 세대의 전통적인 가치관과는 확연히 다르구나 하고 느끼게 된다. 일제 식민지와 한국전쟁을 경험한 이전 세대의 궁핍한 삶을 보고 자란 베이비붐 세대만 하더라도 맹목적인 근검 절약이 몸에 배어 있는 것은 물론 어느 정도 돈이 모이면 구매 1순위는 단연 집이 되곤 했다. 그러다 보니 해외여행은 언감생심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고 국내여행이라고 해봐야 여름 휴가철의 바캉스나 명절에 찾는 귀성여행이 다였지 싶다. 그들 대부분이 큰 돈을 벌겠다는 욕심은 딱히 없었지만 제자식만큼은 어떻게든 고생을 면하게 하고 싶은 게 공통된 욕심이라면 욕심이었다. 그러자니 자신들의 삶은 그저 허깨비에 지나지 않았고 자식들에게는 지나칠 정도로 헌신적이었다.

 

그러나 베이비붐 세대를 잇는 요즘 젊은이들의 가치관이나 철학은 상전벽해라고 해도 될 만큼 너무나 크게 달라져 있다. 삶의 우선순위가 가족이나 자식이 아닌, 자신에게 집중되는 것 또한 달라진 가치관의 반영이며 근검절약을 통한 미래의 행복을 추구하지 않고 지금 이 순간, 바로 앞의 현재를 즐기는 것 또한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변화의 정점에 선 것이 여행이 아닐까 싶다. 명절 연휴마다 북새통을 이루는 공항, 발 디딜 곳을 찾기 힘든 여름의 해수욕장 등은 단순히 자신의 삶을 대하는 가치관의 변화일 뿐 그것이 좋다 나쁘다 평가할 일은 아니라고 본다.

 

미국의 종합 경제지 <포춘>의 부편집장이기도 한 레이 갤러거의 최신작 <에어비앤비 스토리>는 우리나라 현실을 감안하며 읽는다면 꽤나 흥미로운 책이다. 세 명의 가난한 청년이 집세를 마련하기 위해 '에어비앤비'를 창업한 뒤 험난한 과정을 거쳐 세계 최고의 기업으로 성장하기까지의 전 과정을 세밀하게 그린 이 책은 마치 한 편의 기업 드라마처럼 읽힌다. 흥미로운 점은 공동 창업자인 브라이언 체스키와 조 게비아가 디자인 스쿨 출신의 디자이너라는 점이다. 물론 그들 곁에는 블레차르지크와 같은 유능한 엔지니어가 있었지만 말이다.

 

"에어비앤비의 형성과 성장 과정은 마치 한 시대를 대표하는 기업가를 소재로 쓴 대하소설과도 같다. 세 창업자들이 회사를 일으키기 위해 맞서야 했던 도전들, 그들이 구축한 제품과 문화, 그리고 세계 최고의 숙박 기업으로 신속하게 변모해간 일련의 과정들은 에어비앤비의 놀라운 민첩성과 적응력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p.117)

 

에어비앤비의 성공 이면에는 시대적 여건이 잘 맞았다는 것도 있다. 한마디로 운이 좋았다고도 할 수 있지만 그들이 자신들의 노력을 통하여 그들 앞에 펼쳐진 행운을 부여잡지 못했더라면 행운은 그저 그들 곁을 바람처럼 스쳐갔을지도 모른다. 전 세계를 강타한 세계적 불황으로 여행객들은 이전보다 더 저렴한 비용의 숙소를 원하게 되었고, 도전과 모험을 중시하는 밀레니얼 세대의 등장은 에어비앤비의 가치를 드높이는 데 행운처럼 작용했던 시대적 상황이었다. 에어비앤비는 불황기에 소득이 늘지 않아 고민하는 호스트들에게 소득 증가의 기회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저렴한 비용으로 여행을 계속하고 싶어하는 게스트들에게는 저렴한 비용에 더하여 새로운 문화를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에어비앤비는 호스트와 게스트 쌍방을 연결하는 플랫폼 역할을 하고 수수료를 받는 구조이지만 '어디에서나 우리 집처럼 느낄 수 잇는 변화의 여정'을 완성함으로써 숨겨져 있던 수요를 창출한 셈이다.

 

"전통적인 사업은 창업자들에게 다른 강점을 요구합니다. 또 네트워크 회사나 게임 회사라면 담대한 마음가짐이 그리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마켓플레이스 창업자가 가져야 할 강점들 중 최우선은 독창적으로 사고하고, 기꺼이 논쟁에 발을 담그려는 당돌함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에어비앤비의 창업 스토리에 모두 녹아 있습니다." (p.99 투자자 리드 호프만(Reid hoffman)의 말)

                     (캘리포니아 앱토스에 있는 인기 숙소 - 머쉬룸 돔)

 

에어비앤비를 이용하는 게스트들의 인기 숙소인 위의 사진이나 애틀란타의 트리 하우스를 보면 쌍방향 소통을 통한 새로운 수요의 창출을 여실히 실감하게 된다. 여행객의 피로를 풀어주는 단순한 숙박개념에서 벗어나 이제껏 경험해보지 못한 신기한 숙소를 체험해 볼 수 있도록 사람들을 이끌기 때문이다. 이것은 4차 산업혁명 시대의 대표적인 비즈니스 모델인 '공유경제' 카테고리에서 에어비앤비가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비결이기도 하다.

 

"정말 평범하고 가난한 세 명의 학생들이었습니다. 다만 우리에게는 미래를 내다볼 줄 아는 직감과 그것을 만들어낼 만한 무모한 용기가 있었습니다." (p.259 브라이언 체스키의 말)

 

장맛비가 내리고 있다. 이렇게 비가 내리는 날이면 습관처럼 부침개 생각이 난다. 우리와 문화가 다른 나라의 사람들은 또 다르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세계는 언젠가 국경을 넘어 하나의 문화로 통합되는 날이 결국 오지 않을까 싶다. 지금은 비록 보호무역으로의 회귀와 같은 일시적인 퇴행을 보이기는 하지만 세계사의 흐름을 인위적으로 막기는 어려울 것이다. 에어비앤비의 사례는 그 과정에서 보여지는 하나의 사례일 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