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난히 더웠던 어젯밤, 아파트 입구에 들어서자 에어컨 실외기에서 뿜어져 나오는 후끈한 열기가 몸 전체를 휘감는 듯했다. 거짓말 좀 보태자면 그 시각에 아파트의 전 가구가 에어컨을 틀어 놓은 것만 같았다. 자연의 열기와는 또 다르게 에어컨 실외기의 열기는 사람을 은근히 기분 나쁘게 하는 구석이 있다. 숨이 턱 막힐 정도로 답답한 느낌이 들기도 하고, 피부의 땀구멍을 모두 막아버리는 듯한 느낌도 드는 것이다. 숨이 멎을 것 같은 후텁지근한 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어둠이 내려앉은 아파트 놀이터에선 올망졸망한 아이들이 뛰놀고 있었다.

 

나는 사실 에어컨 바람을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까닭에 차를 운전할 때도, 집에서 책을 읽을 때도 되도록이면 에어컨을 틀지 않는다. 적이나 더우면 선풍기를 틀겠지만 그럭저럭 견딜 만하면 이따금 부채를 부칠 뿐이다. 사정을 잘 모르는 사람들은 나를 마치 돈밖에 모르는 자린고비인 양 생각하여 '지독하다'고 말할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돈을 아끼기 위한 목적만은 아니다. 물론 그렇게 하는 바람에 한 달 사용하는 전기료는 다른 집보다 턱없이 적게 나오기는 하지만 말이다.

 

더위를 피하기 위해 에어컨을 튼다는 게 나는 마치 무형의 폭력을 행사하는 것처럼 느껴져 여간 불편하지 않다. 예컨대 나의 행위로 인하여 다른 사람이 고통을 받는다면 내가 직접적으로 그 사람에게 물리적인 폭력을 가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그건 엄연히 폭력이 아니겠는가. 다닥다닥 붙어 있는 아파트에서 어느 한 집이 경제적인 이유든, 아니면 다른 피치 못할 이유로든 에어컨을 틀지 못한다고 가정해 보자. 그 집은 아마도 문이란 문은 모두 열어 놓은 채 선풍기 바람에 의지하여 더위를 피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밖에서 들어오는 에어컨 실외기의 열기로 인해 어느 순간 자신의 집을 뛰쳐나오지 않고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될지도 모른다. 차량의 에어컨도 크게 다르지 않다. 에어컨을 작동한 차의 옆에만 다가가도 후끈한 열기가 느껴진다. 기름값이 아까워서 에어컨을 틀지 않은 채 운전하거나 도보로 이동하는 사람들에게 에어컨을 튼 차량의 열기는 폭력에 가깝다.

 

내 돈을 내 맘대로 쓰겠다는데 네가 뭔 상관이냐고 항변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과다한 화석연료의 사용은 제 자식을 앞에 두고 이렇게 얘기하는 것과 진배없다. "아들, 내가 죽고 난 뒤에 너희들이 어떻게 살든 나는 신경 안 쓸거야. 나는 내가 사는 동안 만큼이라도 편하게 살고싶어. 너가 나 때문에 죽을지도 모르니까 화석연료 사용 좀 자제하라고 아무리 부탁해도 나는 듣지 않을 거야. 너의 죽음에는 눈곱만큼도 관심없어." 나는 이런 비정한 부모로 살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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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2017-07-22 2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뭐 에어컨 좀 켜고 살자는데 그렇게 거창한 이론까지 갖다부치며 상대방을 설파할것 까지야 있겠습니까? 그냥 세상 흐름대로 사는거지요. 이렇게 더운 날씨에 있는 에어컨 까지 못켜고 살게 하는게 같이 사는 사람 입장에서는 야멸차게 보일수도 있습니다. 더위를 견디는 힘이 같은 정도면 모르겠지만요. 그리고 미래를 너무 그렇게 절망적으로 볼 필요는 없을것 같아요. 꼭 화석연료에 의지하지 않더라도 미래의 인류는 또 다른 에너지를 개발해서 지금보다 더 많은 에너지를 사용하며 살아 가지 않겠어요?

꼼쥐 2017-07-26 15:58   좋아요 1 | URL
경제 규모로 볼 때 세계 12위 정도의 국가라면 인류에 대해, 지구 전체에 대해 어느 정도의 책임감은 느끼면서 살아야겠지요. 트럼프처럼 막무가내의 또라이라면 모르지만 말이죠. 에어컨 사용을 절대적으로 금하자는 게 아니라 사용에 있어 절제와 배려가 필요하다는 얘기였습니다.
 
무의미의 축제
밀란 쿤데라 지음, 방미경 옮김 / 민음사 / 2014년 7월
평점 :
절판


올해 들어 말매미 울음소리를 처음 들었던 건 보름 전쯤으로 기억한다. 도시에 살면서 자연의 미세한 변화를 알아채는 건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관심이 덜하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인공적인 것, 인공이 가미된 것에 더 눈길이 간다. 이를테면 새로운 기종의 휴대폰이 출시되었다거나 아파트 주변에 못 보던 상점이 들어섰다거나 하는 경우 나와는 그닥 상관도 없는 일임에도 쉽게 감지하곤 한다. 일부러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말이다.

 

인공이 가미된 것은 언제나 사람들의 욕심을 부추긴다. 언젠가 지인과의 술자리에서 '종교적'이라는 말은 '이기적'이라는 말과 동의어인가? 라는 주제를 놓고 격렬한 토론을 벌인 적이 있다. 대다수의 불행에서 자신만 예외로 해달라거나, 쉽게 타락하는 인간의 영혼이지만 자신이 믿는 전지전능한 신의 권능으로 자신을 지켜달라거나, 죽음 이후의 세상에서도 편안하게 해달라거나 하는 일체의 행위가 인간의 이기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고 뭐냐는 나의 주장에 대해 지인은 만인을 위한 또는 자연계 전체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도 있다는 것과 그와 같은 순수 목적을 위해 종교는 태어난 것이라는 요지의 주장을 역설했다. 내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그 말이 과연 맞다면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교는 '무위자연'을 주장하는 도교로 통일되어야 한다고 말하자 지인은 가볍게 웃었었다.

 

내가 세상을 조금 삐딱하게 보거나 부정적으로 판단한다는 걸 잘 알고 있다. 하찮은 일이지만 열심히 해보자는 생각이 간혹 들 때도 있지만 이딴 걸 뭐하러 하느냐? 는 생각이 들 때가 더 많으니 말이다. 사람의 성향은 다 제각각인지라 어찌할 수 없는 측면이 있게 마련이다. 낙관적인 성향의 어느 작가를 추종하기보다는 우울하고 때로는 퇴폐적인 심지어 독선적이기까지 한, 그리고 "소설가는 자신의 서정세계의 폐허 위에서 태어난다."는 이해하기에 다소 난해한 말도 서슴지 않고 했던 밀란 쿤데라에게 인간적인 매력을 느끼는 것도 따지고보면 다 그런 성향에서 비롯되는 게 아닌가.

 

밀란 쿤데라의 소설 <무의미의 축제>를 읽은 지 벌써 일주일쯤 지났건만 리뷰를 써야겠다는 생각도, 특별한 의욕도 일지 않아서 무작정 시간만 보냈다. 뭉개고 갈까 하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무의미한 세상에 무의미한 일 한두 개쯤 더 생긴다고 세상이 달라질 것 같지도 않았고, 무더위를 빙자한 나태함 또한 나의 정신건강에 좋지 않을까 하는 달콤한 유혹에 적당히 이끌렸던 것도 사실이다.

 

"천천히 집으로 돌아오면서 알랭이 아가씨들을 자세히 보니 아주 짧은 티셔츠 차림에 바지는 모두 아슬아슬하게 골반에 걸쳐져서 배꼽이 훤히 드러나 있었다. 아가씨들이 남자를 유혹하는 힘이 이제는 허벅지도 엉덩이도 가슴도 아닌, 몸 한가운데의 둥글고 작은 구멍에 총집중돼 있단 말인가. 내가 같은 말을 되풀이한다고? 이 소설 첫머리에 쓴 것과 똑같은 단어들로 이번 장을 시작하고 있다고? 나도 안다." (p.47)

 

개인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새로운 에로티시즘의 시대를 여는 배꼽, 아무런 이유도 없고 이득도 가져다주지 않는 거짓말에 빠져드는 일과 스스로 기뻐하는 마음, 농담을 거짓말로밖에 받아들일 수 없는 오늘, 인간적 고통만을 주는 칼라닌의 방광 등 소설 속에 등장하는 여러 이야기들은 인간 존재의 삶이 아무런 의미도 없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다. 현대인의 삶은 그저 '무의미의 축제'라고, 그럼에도 우리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묵묵히 앞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다르델로, 오래전부터 말해 주고 싶은 게 하나 있어요. 하찮고 의미 없다는 것의 가치에 대해서죠. 그 당시에 나는 무엇보다 당신과 여자들의 관계를 생각했어요. 당신에게 카클리크 이야기를 해 주고 싶었죠. 아주 친한 친구인데, 당신은 몰라요. 그래요. 넘어갑시다. 이제 나한테 하찮고 의미 없다는 것은 그때와는 완전히 다르게, 더 강력하고 더 의미심장하게 보여요. 하찮고 의미 없다는 것은 말입니다, 존재의 본질이에요. 언제 어디에서나 우리와 함께 있어요. 심지어 아무도 그걸 보려 하지 않는 곳에도, 그러니까 공포 속에도, 참혹한 전투 속에도, 최악의 불행 속에도 말이에요. 그렇게 극적인 상황에서 그걸 인정하려면, 그리고 그걸 무의미라는 이름 그대로 부르려면 대체로 용기가 필요하죠. 하지만 단지 그것을 인정하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고, 사랑해야 해요,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해요. 여기, 이 공원에, 우리 앞에, 무의미는 절대적으로 명백하게, 절대적으로 무구하게, 절대적으로 아름답게 존재하고 있어요. 그래요. 아름답게요." (p.147)

 

참고로 다르델로는 화려한 언변과 세련된 기교를 갖춘 인물이다. 반면 카를리크는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인물인데 파티에 참석한 아름다운 여자는 다르델로가 아니라 카를리크를 선택한다.'탁월함은 상대방도 뛰어나야 할 것 같은 마음을 불러일으키지만, 보잘것없다는 건 주변을 편안하고 자유롭게' 해주기 때문이다. 무더위에 지친 오늘, 무뎌진 날씨 탓에 자신조차 보잘것없고 초라하게 느꼈다면 한번쯤 생각해보길 바란다. 보잘것없는 당신으로 인해 주변이 얼마나 편안하고 자유롭게 변했는지, 세상은 또 얼마나 달라졌는지. 이제야 비로소 그렇게 보인다면 삶은 곧 축제가 아닌가. 불금, 무의미의 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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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더운 날씨다. 차문을 열고 닫을 때마다 후끈한 열기가 사방에서 뻗어나와 순간적으로 나를 옴짝달싹 못하게 결박하는 느낌이다. 이런 날에도 하루를 살기 위해 폐지를 줍는 노인분이 보인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세상이다. 황정은의 소설 <계속해보겠습니다>에는 '살아가려면 세계를 아무래도 좋을 일과 아무래도 좋을 것으로 가득 채우는 것이 좋다'는 문장이 나온다. '필멸일 뿐인 세계에서 의미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 애쓸 일도 없고 발버둥을 쳐봤자 고통을 늘릴 뿐'이라는 문장도. 황정은 작가도 어쩌면 <제5도살장>을 쓴 커트 보네거트의 영향을 받지 않았을까?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에 의한 독일 드레스덴 지역의 폭격을 직접 경험했던 커트 보네거트는 자신의 소설에서 자조적인 독백을 꺼내놓는다. '그렇게 가는 거지!' 라고. 죽는다는 건 '샴페인에 김이 빠지고 맛이 가는 것처럼' 그렇게 가는 거라고.

 

조금 다른 이야기이지만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높은 지지율은 야당, 특히 자유당의 뻘짓에 의한 반사이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자주 하게 된다. 당대표라는 자는 대통령의 오찬 회동을 거부한 채 수해지역에 자원봉사를 하러 가겠다고 나서서는 1시간 남짓 머물다가 훌쩍 떠나기나 하고, 원내대표라는 자는 대안도 없이 사사건건 트집이나 잡고 몽니를 부리고.

 

돼지발정제로 유명한 자유당의 대표는 19일 오전 11시 30분부터 오후 6시까지 자원봉사활동을 펼칠 예정이라고 밝혀놓고는 약속 시간보다 훨씬 늦은 오후 12시 20분쯤 현장에 나타나서 복구작업을 돕는 척 폼을 잡다가 점심을 먹은 후 수해복구 지원금을 전달하고는 그냥 떠나기가 제 스스로도 미안했던지 다시 20여분쯤 복구 작업을 거드는 척 시간을 보내다가 훌쩍 내뺐다. 생색도 그런 생색이 없다. 그럴 거면 정치쇼를 위한 사진을 찍으러 오겠다고 할 것이지 무슨 말 같지도 않은 자원봉사랍시고...

 

대표가 그러니까 같은 당 소속의 도의원 또한 뻘짓을 이어갔다. 최악의 물난리를 만난 충청북도의 도의원인 김학철이라는 자는 외유를 떠난 것으로도 모자라 '국민들이 레밍(lemming)같다'는 말을 내뱉었다고 하니 기가 찰 노릇이다. 자신들을 비난한다는 이유로 국민을 설치류에 비유하다니... 자유당 내에서 이런 식의 뻘짓이 계속된다면 정권획득은 아마도 요원한 일이 되고 말 것이다. 좌와 우, 진보와 보수가 비슷하게 세력 균형을 이루어야 나라가 발전하는 법인데 균형을 이루기는커녕 자유당의 지지율이 바닥을 뚫고 지하실로 처박히는 실정이니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안타깝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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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20 22: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7-21 18: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여자의 독서 - 완벽히 홀로 서는 시간
김진애 지음 / 다산북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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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 대한 담론은 언제 읽어도 재미있다. 내게 있어 그것은 일종의 치유가 불가능한 병이다. '다시는 이런 책을 읽지 말아야지.' 생각하면서도 그때뿐이다. 옷을 좋아하는 사람이 백화점의 의류 코너를 돌며 새로 산 옷을 두 손 가득 든 채 '다시는 오지 말아야지.' 결심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나 또한 책을 다 읽은 후에 새로 살 책의 목록을 빼곡히 기록한 후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구매 버튼을 누르기 때문이다.

 

책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분야나 마찬가지이겠지만 책을 읽고 느끼는 감상 역시 남성과 여성의 구분이 뚜렷하다. 여자들은 대개 삶의 본질이나 내용을 중시하는 반면 남자들은 주로 삶의 골격이나 기본틀, 말하자면 삶의 형태나 겉모습을 중시한다. 이러한 관점으로 인해 남성과 여성은 책의 선택에서부터 갈린다. 시나 소설 등 문학을 중시하는 여성과 경제나 경영, 정치나 철학 등 논리를 중시하는 남성은 같은 책을 읽고도 호불호가 갈림은 물론 책에 대한 감상 또한 판이하게 달라진다. 물론 남성이든 여성이든 예외는 있게 마련이지만 말이다. 남성을 일부러 디스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소위 '가오'에 목을 매는 남자들은 자신의 지나친 허세나 자만심으로 인해 삶의 알맹이야 어떻든 간에 남들이 보기에 겉만 번지르르하면 만사 오케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이러한 까닭에 남자들의 독서는 중요한 부분을 놓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세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도시건축가이자 전직 국회의원인 김진애의 저서 <여자의 독서>를 읽으면서 나는 저자의 공감 능력과 빼어난 글솜씨에 감탄했다. 저자가 이미 30여 권의 책을 낸 저술가라는 생각은 하지 못한 채 정치인이자 공학도라는 이미지만 나의 내면에서 너무 강하게 자리잡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실제로 접하는 그녀의 글솜씨가 웬만한 작가 뺨치는 수준이었고, 문학에 대한 이해도나 지식 역시 상당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책이 귀하던 시절이라 손에 걸리는 책이라면 다 읽었다. 어린이용 도서가 별로 없던 시절이니 주로 어른 책을 읽었다. 명저만 읽었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집에 굴러다니던 '야동' 소설까지도 다 읽었다. 물론 '몰래' 읽엇지만 말이다. 꽤 나이 차가 나는 오빠 언니가 들여오는 온갖 '고전 시리즈'는 늘 내 차지였다. 한국문학선집, 세계문학선집, 명작 전집은 물론이고 역사서, 철학서, 사회과학서들을, 말 그대로 '닥치고' 읽었다. 문자중독증 수준이라 할 정도로 빠졌던 것이다. 책은 나의 멘토이자 선생님이었고, 나의 동지이자 친구였다." (p.31)

 

저자 자신을 일깨운 여러 명의 여성 작가와, 그들이 쓴 책 속에서 자신이 발견한 것들에 대해 저자는 8가지 주제로 분류하여 쓰고 있다. 여성의 자존감을 일깨우는 책(1장), 원하는 캐릭터를 발견하고 스스로를 성장시키는 책(2장), 섹스와 에로스의 세계를 여는 책(3장), 여성들끼리 연대감을 나눌 수 있는 책(4장), 여성의 독특한 시각을 깨우치고 능력을 확장시켜주는 책(5장), 행동하는 용기를 예찬하는 책(6장), 여자를 지키는 수호신을 찾아서(7장), 여성성과 남성성을 넘나들며 보편적 자아를 찾게 하는 책(8장)이 그것이다.

 

"선천적인 성향인지 후천적인 성향인지는 모르겠으나 나는 갈등과 딜레마를 안고 있는 사람, 그런 갈등과 딜레마에도 불구하고 그 어떤 일을 해낸 사람, 또한 해내려고 끊임없이 발버둥치는 사람이 좋다. 갈등이 없는 삶, 안온함만이 있는 삶, 모자람이 없는 삶, 개인의 만족만 추구하는 삶, 세속적 성공으로 만족하는 삶이란 얼마나 금방 허망해지는가?" (p.59)

 

이 책에 등장하는 여성 작가는 국적도, 그들이 추구했던 분야도, 살다 갔거나 사는 시기도 제각각이다. 그러나 그들 각자의 면면을 살펴보면 뭔가 통하는 게 있다. 박경리, 한나 아렌트, 버지니아 울프, 루이자 메이 올컷, 루시 모드 몽고메리, 제인 오스틴, 마거릿 미첼, 루이제 린저, 박완서, 정유정, 정희진, 이자크 디네센, 레이첼 카슨, 제인 구달,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 앤 패디먼, 수전 손택, 프리다 칼로... 저자가 말하는 책에 대한 담론은 결국 그녀 자신의 이야기로 귀결된다. 1남 6녀의 딸부잣집 셋째 딸로 자란 저자가 느꼈던 '여자다움'과 '여자의 역할'을 둘러싼 정체성에 대한 의문, 차이와 차별에 대한 혼란과 불만, 현재의 자신으로 성장시키는 과정에서 만난 다양한 여성 작가와 여러 책들.

 

"'여성성과 남성성은 절대적으로 한 인간 속에 있다'는 것이 나의 믿음이다. '한 인간 속에 있는 여성성과 남성성을 잘 발휘하며 사는 삶이 좋다'는 것이 나의 소신이다. 나만 이런 생각을 하는 게 아님을 발견할 때마다 너무도 반갑다. 예컨대, 작가 버지니아 울프는 나와 같은 생각을『자기만의 방』에서 훨씬 더 근사한 말로 표현했다. "양성적 마음이란 타인의 마음에 열려 있고 공명하며,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감정을 전달할 수 있고, 본래 창조적이고 빛을 발하며 분열되지 않은 것이란 뜻"이라니 얼마나 멋진 표현인가?" (p.364)

 

나도 역시 지금껏 꾸준히 책을 읽어왔고, 읽었던 책에 대한 감상을 이따금 글로 옮기고는 있지만 문장 하나하나에 대해, 작가의 생각 하나하나에 대해 공감하며 그 낱낱의 감정들을 솔직하게 표현했노라 자신있게 말할 수는 없다. 글을 쓰는 일엔 원체 재간이 없어서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공감의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돈이 없지, 가오가 없냐"고 했던 어느 영화 대사를 패러디하여 말한다면 나는 아마도 "우리는 가오만 있지, 실속이 있냐?"고 하지 않을까? 가오를 잡기 위해 책을 읽는 일체의 행위를 반성하게 되는 하루다. 무더위에 지친 여름, 그 어느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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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거스렁이로 불어오는 습습한 바람이 휴일 오후의 나른함을 무겁게 짓누르고 있습니다. 나는 아주 오래전부터 나의 내면에 내재되어 있던 모든 무기력이란 무기력은 죄다 꺼내 놓은 채 째깍이며 도는 시계바늘 소리만 무심히 듣고 있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그렇게 아무 하는 일 없이 무료하게 보냈던 것도 참으로 오랜만의 경험이었습니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속절없이 보내는 그런 시간들을 몹시도 두려워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별 쓸모는 없지만 하다못해 TV 채널이라도 돌려야 할 것 같고, 침대 협탁에 내려앉은 먼지라도 닦아내야 할 것만 같습니다. 그러는 사이에도 시간은 무심히 흐르고 뭔가에 쫓기는 듯 안절부절 불안한 마음이 들었던 것이지요. 문득 목이 말라 물이 마시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손가락 하나 까딱일 힘조차 없었던 나는 그 생각마저 억지로 막아서야 했습니다.

 

휴식을 간절히 원하면서도 하릴없이 보내는 그 시간들을 두려워하는 이와 같은 이중 심리에 나는 적잖이 당황했었나 봅니다. 할 일을 찾아 궁리에 궁리를 거듭하던 나는 지금 밀란 쿤데라의 소설 <무의미의 축제>를 읽고 있습니다. 오늘 하루 무의미한 시간들을 그냥 흘려보냈던 까닭인지 작가의 이야기가 한결 편하게 느껴집니다. 네 명의 주인공이 등장하는 얇디얇은 이 책에서 작가는 시답잖은 이야기들로 지면을 채웁니다. 우리의 삶이 그런 무의미한 일들로 채워지는 건 사실이지만 내가 그런 시간들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우리 모두는 무의미한 그런 삶을 애써 외면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비거스렁이로 불어오는 습습한 바람에 나는 또다시 무력해집니다. 침대를 스치는 무의미한 시간들이 나를 강하게 유혹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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