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근처의 가까운 곳에 산이 있다는 건 크나큰 자산이다. 물론 그 산을 어떻게 이용하느냐에 따라 체감하는 효용도 크게 달라지겠지만 말이다. 그저 바라보기만 하는 사람도 있을 테고, 우리집 근처에 그런 산이 있었어? 하면서 마치 처음 들어보는 소리라는 듯 화들짝 놀라는 사람도 있을 테고, 이따금 가기 싫다는 아이들을 대동하고 산을 찾은 바람에 산을 오르는 내내 뚱한 아이들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수다를 늘어놓는 사람도 있을 테고, 등산로 한켠에 놓인 벤치에 앉아 오가는 사람들을 온종일 지켜보는 사람도 있을 테고, 나처럼 아침 동이 트기도 전에 집을 나서서 이제 막 잠에서 깨어나는 숲을 온몸으로 만끽하는 사람도 있을 터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생각은 산이 우리에게 주는 혜택을 매우 제한적으로 해석하게 한다. 주기적으로 산을 찾음으로써 우리가 누릴 수 있는 육체적 건강 또한 우리가 산으로부터 받는 혜택 중 하나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것 외에도 우리는 많은 것을 산에 의지하고 있다. 이를테면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고민이나 말 못할 비밀, 심지어 자신의 생각으로조차 꺼내서 확인하는 게 꺼려지는 여러 일들도 우리는 숲의 나무들에게, 반짝이는 눈을 데굴거리는 청설모에게, 먹이를 찾아 쉼 없이 비행하는 새들에게 흉금을 터놓고 다 이야기할 수 있다. 우리가 하는 고민은 대개 문제의 해결책을 본인이 알고 있다. 그러나 그 해결책과 마주하기 어려울 뿐이다. 산은 우리에게 새로운 해결책을 제시해주지는 않지만 우리가 알고 있는 해결책을 향해 피하지 않고 시선을 마주할 수 있는 용기를 제공한다.

 

입추를 하루 앞둔 오늘, 한반도로 향하던 태풍 노루는 마침내 일본으로 방향을 틀었고 뜨거운 햇빛이 내리쬐는 휴일 오후, 허공에 생채기라도 내려는 듯 말매미 울음소리가 요란하다. 하루를 살아낸다는 게 마치 전쟁처럼 힘겹고 아득한 일일 수 있겠지만 입추가 지나고 아침 저녁으로 거짓말처럼 소슬바람이 불어오면 산에는 탐스럽게 여문 밤송이가 지난 여름을 그리워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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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단장 죽이기 2 - 전이하는 메타포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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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가지 전제로 이 글을 시작해보자. 사람은 누구나 어린 시절의 결핍이나 상실감을 기준으로 삼아 사랑하는 대상을 고르고 그 대상에게 자신의 결핍을 꾸준히 요구하게 된다는 전제.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의 최신작 <기사단장 죽이기>에서 이 전제를 바탕으로 자신의 소설을 완성했다. 예컨대 부모의 적극적인 보살핌을 받지 못한 사람은 성장하여 어른이 된 후에도 자신을 헌신적으로 보살펴주는 사람을 배우자로 선택할 뿐만 아니라 결혼 후에도 그와 같은 요구가 꾸준히 이어진다는 식이다. 그런 전제가 일부는 맞고 일부는 틀리다고 할지라도 작가의 믿음은 비교적 확고한 듯 보였다.

 

"참고로,네가 여자에게 일관되게 요구하는 그게 뭔데?"

"말로는 설명하기 힘들어. 내가 인생의 도중에 어쩌다 잃어버렸고, 그뒤로 오랫동안 계속 찾아온 무언가겠지. 사람은 누구나 그런 식으로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는 거 아닐까?" (2권 p.197~p.198)

 

소설의 주인공인 '나'에게는 열세 살의 어린 나이에 죽은 여동생 '고미'가 있다. 선천적으로 심장에 문제가 있었던 '고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나'에게 충격적인 일이었고, 성인이 된 후에도 '나'는 '고미'의 흔적을 찾아 헤맨다. 대학을 졸업하고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초상화를 그리던 '나'는 한 여자를 사귀게 되고 그 여자의 친구였던 '유즈'를 만나게 된다.'유즈'의 얼굴에서 '나'는 '고미'의 옛모습을 본다. '나'와 '유즈'는 사랑에 빠지게 되고, 건축설계사무소에 다니는 '유즈'와 초상화가인 '나'는 처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한다. 그렇게 6년을 살았다. 그리고 '유즈'는 갑작스럽게 결별을 통보한다. 다른 남자가 생겼다는 것이다. 순수 생계 목적이었던 초상화 그리기도 그만둔 '나'는 빨간색 고물 푸조를 타고 여행을 시작한다.

 

3월에 시작된 여행은 5월까지 이어진다. 타고다녔던 빨간색 푸조 205 해치백은 여행 도중에 수명을 다했고, '나'는 중고 코롤라 왜건을 구입한다. 도중에 누군가에게 쫓기는 듯한 여자를 만나 하룻밤의 정사를 나누기도 하고, '하얀 스바루 포레스터의 남자'가 자신의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보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한다. 본격적인 이야기는 '나'가 대학동기이자 화백 아마다 도모히코의 아들인 아마다 마사히코의 권유로 산속 집에 정착하면서부터 시작된다. 그 집은 아마다 도모히코의 작업실이자 거처였다. 치매를 앓고 있는 도모히코는 요양원에 입원중이다.

 

마사히코는 '나'에게 일주일에 두 번 오다와라 역 근처의 문화센터에서 그림을 가르치는 일을 주선해주었고, 상업적인 초상화가 아닌 '나'의 그림을 그리라고 충고한다. 그러나 '나'는 집을 떠나기 전에 거래를 했던 한 에이전트로부터 거절할 수 없는 금액의 초상화 의뢰를 받게 된다. 초상화를 의뢰한 사람은 멘시키 와타루이며 그의 집은 '나'가 정착한 도모히코의 집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산꼭대기의 대저택이었다. 은색 재규어를 타고다니는 그는 부유한 독신남으로 지극히 현실적이며 냉철한 인간이다. '나'와는 대척점에 있는 듯한 멘시키이지만 '나'는 그에게서 동류의식을 느낀다.

 

"-우리는 어찌 보면 닮은 꼴인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손에 쥐고 있는 것, 혹은 장차 손에 넣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잃어버린 것, 지금은 손에 없는 것을 동력 삼아 나아가고 있다. 그렇다고 내가 그의 행위를 납득할 수 있었다는 말은 아니다. 그것은 명백히 이해력의 범위를 넘어선 일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그 동기를 이해할 수는 있었다." (1권 p.484)

 

멘시키의 초상화를 그리면서 '나'는 몇몇 기이한 사건을 경험하게 된다. 침실 천장에서 발견한 아마다 도모히코의 그림 <기사단장 죽이기>를 필두로 한밤중에 희미하게 들리는 방울 소리, 그 방울 소리의 발원지를 찾는 과정에서 발견한 숲 속의 기묘한 지하 석실, 그리고 도모히코의 그림에 있는 기사단장을 닮은 이데아의 현현(顯現).

 

"내가 생각을 가지고 살아 움직이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 구덩이 또한 사고는며 살아 움직이고 있다. 호흡을 하고 신축伸縮도 한다. 나는 그렇게 느꼈다. 그리고 내 사고와 구덩이의 사고가 그 어둠 속에서 뿌리를 얽고 수액을 주고받는 것 같았다. 녹아든 물감처럼 자아와 타자가 혼탁해지며 경계선이 점점 불명확해졌다." (2권 p.75)

 

멘시키는 완성된 자신의 초상화를 기쁘게 받는다. 그리고 '나'에게 또 하나의 부탁을 한다. 아키가와 마리에의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것. 새벽마다 들리는 방울 소리의 출처를 알기 위해서 멘시키에게 도움을 청했던 '나'는 그로부터 베일에 가려져 있던 아마다 도모히코의 유학 생활과 가족 내력을 듣게 된다. 그 정보를 통하여 '나'는 도모히코가 '기사단장 죽이기'를 그리게 된 경위와 그림의 존재를 꽁꽁 감추어 둘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생각하게 된다. 멘시키는 숲 속의 구덩이를 발견하는 과정에서의 제비용을 부담하기도 했다. 그러는 동안 멘시키는 자신의 비밀 한두 가지를 털어놓기도 했는데, 과거에 사귀었던 여자가 아키가와 마리에의 엄마이며 생물학적으로 자신이 마리에의 아빠일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문화센터 그림교실의 학생이기도 한 마리에의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멘시키의 부탁을 '나'는 결국 수락하고 만다.

 

"그때 문득 이런 생각을 했어요. 이 세상에서 뭔가를 달성한다 한들, 아무리 사업에 성공하고 자산을 일군다 한들, 저는 결국 한 세트의 유전자를 누군가에게서 물려받아 그것을 다음 누군가에게 전달하기 위한 편의적이고 과도기적인 존재에 불과하다고. 그런 실용적 기능을 제외하고 남는 것은 그저 흙덩어리 같은 것뿐이라고 말이죠." (2권 p.144)

 

아키가와 마리에의 초상화를 맡게 되면서부터 마리에와 그녀의 고모 아키가와 쇼코가 일주일에 한 번 '나'의 집을 방문한다. 마리에는 모델을 서기위해서, 쇼코는 자신의 파란색 도요타 프리우스로 마리에를 태워 오고 태워 가기 위해서. 벌 알레르기가 있었던 마리에의 엄마는 마리에가 어렸을 때 벌에 쏘여 죽었다. 마리에가 방문하는 일요일 오전의 시간에 맞춰 멘시키가 방문한다. 그와 아키가와 쇼코는 급속히 가까워진다. '나'는 마리에의 초상화를 그리며 숲속의 지하 석실과 여행 중에 만났던 '스바루 포레스터의 남자'를 그려보기도 한다. 기사단장의 모습으로 이따금 나타나던 이데아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진다. 지하 석실에서 발견한 방울과 함께.

 

"우리 인생에는 잘 설명할 수 없는 일이 많고, 또 설명해서는 안 되는 일도 많습니다. 특히 설명함으로써 그 안의 가장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는 경우에는요." (p.450)

 

그리고 '나'는 작업실 스툴에 앉아 자신이 그렸던 <기사단장 죽이기>를 뚫어지게 보고 있는 도모히코의 생령을 목격하게 된다. 육체도 정신도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아마다 도모히코가 자신이 살던 집을 직접 찾아왔을 리는 만무한 일이었다. '나'는 아마다 마사히코가 그의 아버지를 방문하러 갈 때 같이 가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기사단장 죽이기>에 대한 비밀을 제멋대로 꺼내놓은 듯한 죄책감을 도모히코가 죽기 전에 솔직하게 말해야 했기 때문이다. 마사히코와 요양원에 함께 가기로 약속하고 며칠 후 마리에가 실종된다. 문화센터의 그림교실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걱정이 된 멘시키는 '나'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는다. 기사단장의 모습으로 나타난 이데아에게 마리에의 행방을 물었지만 그는 대답 대신 힌트 하나만 던져준다.

 

"그래도 나는 멘시키처럼 되지 않는다. 그는 아키가와 마리에가 자기 아이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는 가능성의 밸런스 위에 자신의 인생을 구축하고 있다. 두 가지 가능성을 저울에 달고, 끝나지 않는 미묘한 진동 속에서 스스로의 존재 의미를 찾아내려 한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귀찮은(적어도 자연스럽다고는 하기 힘든) 작업에 도전할 필요가 없다. 나에게는 믿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비록 좁고 어두운 장소에 갇힌다 해도, 황량한 황야에 버려진다 해도, 어딘가에 나를 이끌어줄 무언가가 존재한다고 순순히 믿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내가 오다와라 근교의 산머리 집에 살면서 몇 가지 예사롭지 않은 체험을 통해 배운 점이었다." (2권 p.597)

 

도모히코의 병문안을 갔을 때 회사일로 걸려온 전화를 받기 위해 마사히코가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에 기사단장의 모습을 한 이데아가 나타난다. 그리고 자신이 차고 있던 칼을 빼들어 '나'에게 건네주며 자신을 찌르라고 말한다. 도모히코가 그렸던 그림 속의 장면을 그대로 연출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바닥에서 고개를 내밀고 결투 장면을 바라보고 있는 의문의 남자가 나왔던 통로를 통하여 메타포의 세계로 내려가라는 주문도 이어졌다.

 

"생각해보면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처음부터 그런 식으로만 그림을 그려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실에서 얻을 수 없는 것을 그림에 나타내는 것. 남들에게는 보이지않게, 나 자신의 비밀신호를 그 안쪽에 은밀히 그려넣는 것." (2권 p.220)

 

소설은 그런 식으로 끝을 향해 나아간다. 하루키의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이 소설에서 그동안 하루키가 썼던 많은 작품들이 오버랩될지도 모르겠다. 일종의 기시감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장면이 곳곳에 등장한다. 그러나 확실하게 달라진 점도 눈에 띈다.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추구하는 하루키 문학의 특성상 과거에는 그 무게중심이 비현실의 세계로 살짝 기운 듯한 면이 있었지만 이제는 확실히 5대 5, 또는 현실 쪽으로 조금 더 옮겨진 게 아닌가 하는 느낌을 받았다.

 

예컨대 이런 것이다. 소설에서 '나'와 멘시키는 과거에 집착한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나'는 죽은 여동생에 대한 기억을, 멘시키는 헤어진 과거의 연인을. 멘시키가 사랑했던 여인은 이미 죽고 없지만 그녀의 딸을 통하여 진실을 알고 싶어 한다. 어쩌면 멘시키는 누군가로부터의 신뢰를 받지 못하면서 성장하여 진실에 대한 강한 결핍을 형성하였을지도 모른다. 어린 시절에 동생을 잃음으로써 가족 간의 사랑마저 상실했던 '나'와 마찬가지로. 그러나 멘시키가 돈과 진실에 집착했던 반면 '나'는 동생에 대한 그리움에 집착한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그러므로 '나'는 동생 '고미'를닮은 '유즈'를 아내로 선택했고, 열세 살의 '마리에'와 잘 통한다.

 

과거는 나의 바람과 욕망이 더해진 일종의 판타지이다. 과거에 집착하는 사람은 현실의 삶에 방해를 받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지 못한다. 소설 속의 '나'가 반복되는 판타지를 경험하는 것도 그런 이유가 아닐까 싶다. '나'는 메타포의 세계를 혹독하게 체험함으로써 과거의 기억으로부터 벗어나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 힘을 얻는다. 반면에 아버지와의 추억이 별로 없는 마사히코는 지극히 현실적이며 미래지향적이다. 마리에 또한 다르지 않다. 그녀는 나이도 어리지만 일찍 엄마를 잃었고, 아버지는 얼굴도 보기 힘들다.

 

짧게 리뷰를 쓴다는 게 그만 주저리주저리 길어지고 말았다. 하루키의 소설 <기사단장 죽이기>에 대한 다른 분석을 더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처음부터 인물 위주로 살펴보려 햇던 까닭에 이쯤에서 그만두어야겠다. 과거에 경험했던 결핍이나 상실에 의해 사랑이 결정된다는 하루키의 믿음을 곰곰 되새기면서. 타인의 사랑이 궁금해지면 우리는 가끔 물을지도 모르겠다. "당신의 사랑은 무엇에 의해 결정되는가? 혹은 무엇에 의해 결정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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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송맨송한 기분이 영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날이 있다. 낮에 딱히 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린 것도 아니고, 며칠째 말 못할 고민으로 전전긍긍 시달려 온 것도 아닌데 오늘 밤은 왠지 똘망똘망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드는 것이다. 나쁜 예감은 틀리는 법이 없다지 않은가. 그런 예감이 드는 날에는 나는 사소한 것에 괜한 만용을 부리느니 맨송맨송한 기분을 잠재울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곤 한다. 새가슴이라고 놀려도 어쩔 수 없다.(정말 그렇게 놀린다면 물론 곤란하겠지만)

 

더위가 기승을 부렸던 어젯저녁도 나는 그런 께름칙한 기분에 휩싸여 궁리에 궁리를 거듭했다. 술 한잔 하자고 꼬이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사람이 서넛 있지만 술을 못하는 나는 그 방법을 써먹을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우리 저녁에 차나 한 잔 할까?" 넌지시 말을 건네면 나에게 다른 뜻이 있구나, 의심할 게 너무도 뻔했다. 그런데 웬걸, 내가 말도 꺼내기 전에 친구 한 명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그는 대뜸 저녁에 선약이 있느냐 묻더니만 미처 대답도 끝나기 전에 차나 한 잔 하자고 했다. 미리 생각을 해두었던지 약속장소까지 일사천리로 말해버렸다.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사흘에 피죽 한 그릇도 못 먹은 사람처럼 기운이 없어보였다.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 탓에 나는 흑기사 한 명을 대동해야겠구나, 생각했다. 내가 고민이 있을 때 이따금 전화를 거는 분에게 연락을 했더니 마침 시간이 된다고 했다. 나에게 전화를 했던 친구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 친구는 지난해에 아내와 이혼을 하고 그의 부모님댁에 들어가 고등학생인 딸과 함께 살고 있는 까닭에 말 못할 고민도, 털어놓고 싶은 문제도 많을 터였다.

 

친구의 하소연은 길게 이어졌다. 그의 말을 듣고 있던 나의 흑기사는 "자네만 인생 두 번 사는 게 아닌데 뭘 그렇게 징징거리나. 세상을 산다는 건 누구나 자네만큼 힘든 법일세. 다만 말을 하지 않을 뿐이지."라고 말했다. 그분을 잘 모르는 타인이 들었더라면 야멸찬 사람이구나 비난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와 친구는 그분의 성정을 잘 아는 터라 그분이 진심으로 친구의 사정을 아파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어쩌면 우리와 헤어져 댁으로 돌아가서도 밤새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때로는 겉으로 보이는 게 다는 아니다. 어깨가 축 늘어진 채 귀가했던 나는 더위도 잊고 잠에 빠져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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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치는 대로 끌리는 대로 오직 재미있게 이동진 독서법
이동진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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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만 읽고 나머지는 내일 읽어야지.' 했던 게 그만 다 읽고 말았다. 책이 얇은 탓도 있지만 나와 생각이 비슷한 글을 읽을 때에는 중간에 끊고 내려놓는 게 쉽지 않다. 어디서 멈추어야 할지 가늠도 되지 않고 말이다. 게다가 책을 좋아하는 사람의 책 이야기는 하루 하고도 반나절을 쉬지 않고 들을 수 있을 듯도 하고, 내가 미처 읽어보지 못한 책의 소개나 아스라한 과거에 읽었던 희미한 기억 속의 책을 다룬 글은 밤을 새워서라도 읽을 수 있을 듯하지 않은가.

 

"사실 저는 닥치는 대로, 무턱대고, 끌리는 대로 책을 읽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책을 그렇게 읽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렇게 읽다 보면 어느새 좋은 책을 잘 선택하게 됩니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쉬운 일은 아니죠." (p.75)

 

팟캐스트 [이동진의 빨간책방]의 진행자이자 애서가로도 유명한 영화평론가 이동진의 신작 <이동진 독서법-닥치는 대로 끌리는 대로 오직 재미있게>를 후루룩 읽었다. 그야말로 국수 한 젓가락을 후루룩 삼키듯 그렇게 읽어버린 느낌이다. 1부 '생각-그럼에도 불구하고', 2부 '대화-읽었고, 읽고, 읽을 것이다', 3부 '목록-이동진 추천도서 500'으로 구성된 이 책에서 저자는 독서에 관련된 다양한 주제의 이야기를 자신의 경험에 견주어 편안하게 써내려가고 있다. 책을 선택하는 방법이며, 가장 좋아하는 독서 장소며, 여러 권의 책을 한 번에 읽는 법 등 우리가 궁금해할 만한 여러 이야기를 1부에 실었고, 2부에서는 '씨네21'의 이다혜 기자와의 대화를 실었다.

 

"욕조에서 책을 읽으면 저는, 비유하자면 자궁에 들어 앉아 있는 태아의 느낌이 들어요. 물을 적당한 온도로 맞춰놓고 그 안에 들어가서 책을 읽으면 굉장히 편해져요. 짧으면 두 시간, 길게 있으면 일고여덟 시간까지 욕조에서 책을 읽어요. 이렇게 책을 읽는 건, 저한테는 일종의 사치인 겁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긴 시간을 내기가 힘드니까요." (p.45)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저마다의 선호하는 장소가 있게 마련이다. 집중이 잘되는 곳, 이를테면 화장실일 수도 있고, 대형서점 내의 커피숍일 수도 있고, 사람들이 오가는 지하철역 벤치일 수도 있다. 나는 잠자기 전의 잠깐 동안이 꿀맛 같은 독서 시간이라고 생각하지만 독서하기에 좋은 시간을 특정하지는 않는 편이다. 물론 눈코 뜰 쌔 없이 바쁜 와중에 잠깐 짬을 내어 읽는 독서맛이 더없이 달콤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문제는 일단 책에 빠져들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는 것인데 선약이 있거나 다른 볼일이 있을 때는 조심해야만 한다. 책으로 인해 실없는 사람으로 찍힐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책의 유혹에 넘어가지 않는 것인데 이게 또 쉽지 않다. 그 유혹에 기꺼이 넘어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나름의 비법을 한두 가지 마련해 놓고는 있지만 이따금 그마저도 효력이 없어서 쓴웃음을 짓게 만드니 말이다.

 

저자가 권하는 독서에 관한 여러 팁 중에는 책에 밑줄을 긋거나 낙서를 하거나 하는 식으로 책을 '함부로 대하라'는 내용이 있다. 나는 사실 책을 신줏단지 모시는 듯한 경향이 있어서 책을 함부로 대하는 것에 일종의 공포심을 갖고 있는데 저자의 말을 들어보니 차츰 바꿔볼 필요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2부에서는 이다혜 기자의 질문을 통하여 독서에 관련된 저자의 어린 시절 경험이나 학창시절 독서클럽을 조직했던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전작주의에 대한 저자의 견해와 '빨간책방'에 소개될 책의 선정 기준 등 책에 관한 다양한 이야기가 오간다. 무엇보다도 책에 관해서라면 할 이야기가 많은 두 사람이다 보니 대화의 내용이나 폭이 넓고도 깊다.

 

"독서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쌓는 독서와 허무는 독서라고 할 수 있겠죠. 쌓는 독서라고 하면 내가 내 세계를 만들어가는, 내 관심사에 맞는 책들,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이 될 수 있게 해주는 책을 읽을 것 같고요. 허무는 독서는 내가 갖고 있던 고정관념을 깨거나 다른 생각을 받아들이게 하는 경우일 텐데요. 쌓는 독서를 게을리하면 '내 것'이 안 생기고, 허무는 독서를 안 하면 내 세계가 좁아지거든요." (p.151)

 

이제부터 책과 좀 친해졌으면 하고 바라는 사람이나 자신의 아이들이 책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성장해주기를 바라는 사람에게는 더없이 유익한 책이 될런지도 모른다. 그러나 책을 늘 곁에 두고 살았던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고 난 후의 느낌을 "이거 뭐야? 별것도 없잖아."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끼리의 충분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책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쉽게 쓰였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3부에 실린 추천도서 목록은 참고할 만하다. 지름신이 강림하는 걸 막을 수만 있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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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관병에 대한 관심이 이렇게 뜨거웠던 적이 또 있을까 싶다. 사실 군복무를 하지 않은 여성들에게 공관병이라는 직책은 생소하기만 할 텐데 말이다. 박찬주 제2작전사령관의 부인이 공관병에게 갑질을 했다는 기사가 보도되면서 실시간 검색어에 그의 이름이 오르내리는 걸 보면 언론의 힘이 무섭구나, 싶다.

 

내가 군생활을 했던 과거에는 공관병이나 당번병, 1호차 운전병 등을 주로 '따까리'라고 불렀다. 일종의 비서인 셈이다. 사정을 모르는 사병들은 그들을 부러워하기도 했다. 머리도 기르고 사복을 입고 생활했으니까 말이다. 다른 것보다도 훈련이나 야간 보초를 서지 않는다는 점이 가장 부러웠을 것이다. 그런데 그건 몰라서 하는 얘기다. '남의 떡이 커보이는' 격이랄까.

 

뉴스에서 본 사람들은 알겠지만 박 대장과 그의 부인이 했던 짓은 로마시대의 노예를 떠올리게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게 어제 오늘의 일로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과거에는 이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았으니까. 그렇다면 왜 이제서야 알려지게 된 것일까? 서열과 위계를 중시하는 이전 보수당(새누리당이나 자유당 등) 정권 시절에는 만약 일개 사병이 이런 사실을 언론에 알렸다고 하더라도 장성이 처벌받는 일은 결코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사병이 영창에 보내질 확률이 훨씬 높았으리라. 그런 위험성을 뻔히 알고 있는데 계란으로 바위를 치겠다고 만용을 부릴 사람은 없었을 줄로 안다.

 

뉴스 보도를 보면서 '아, 세상이 바뀌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던 일들이 하나둘 보도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여기서 끝난 게 아니다. 지금은 숨죽이고 있다가 때가 되면 언제든 다시 고개를 드는 게 기득권을 누려본 사람들의 행태이니까. 가장 무서운 적폐는 지금 알려진 현실이 아니라 아직 알려지지 않은 미래일지도 모른다. 정의를 세운다는 건 일회성의 이벤트가 되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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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긴하기 귀찮아 2017-08-02 2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나는 정말 이상하게 생각되는 것이 남자들이 어째서 그렇게 부당한 대우를 받고도 제대하고 나면 그것에 대해서 문제 제기를 하지 않는걸까 하는 부분입니다. 자기 다음에 올 병사들을 위해서 또는 자신의 모욕감에 대한 보상이라도, 현역일때는 하지 못했던 어떤 사안들을, 아무도 문제 삼지 않았을까 하는 점입니다. 민간에서는 별일 아닌것을 가지고도 보복을 하거나 사소한 일로도 찾아가서 소란을 피우는 사람이 없지 않은데 너무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면 제대후에라도 보복 차원의 어떤 사건들이 많이 벌어졌다면 좀 조심하지않았을까요? 비단 노예병사의 문제만이 아니고요.

2017-08-02 23: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꼼쥐 2017-08-03 18:46   좋아요 0 | URL
남자들은 대개 군에서 있엇던 일을 하루라도 빨리 잊고 싶은 게 공통심리인 것 같습니다. 멀쩡한 몸으로 제대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다행이다 생각하는 것이죠. 제대한 후에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이유도 그게 세상에 알려지고 부대내에서의 불법행위가 밝혀질 것이라고 믿는 병사가 아무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만큼 우리나라 군대는 사회와 철저히 격리되어왔다는 걸 의미하기도 하지요. 군대의 비리를 알고 잇는 군인권센터조차도 증거를 찾기 어려운 실정이니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