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속해보겠습니다
황정은 지음 / 창비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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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정은의 소설을 읽고 있노라면 우리가 사용하는 시간을 아무래도 천천히 흘려보내야 할 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예전보다 숨도 더 천천히 쉬고, 뭐 하나라도 더 찬찬히 보고, 더 오래 생각하고, 시간을 잊고 이따금 남들 다 잠든 시간까지 오래도록 깨어 있어야 할 것만 같습니다. 그렇게 시간을 마구 흘려보내다 보면 흐르는 시간쯤이야 '아무래도 좋을 어떤 것'으로 변해버릴 듯합니다. 언젠가는 말입니다.

 

황정은의 소설에 대해 내가 이렇게 생각하는 까닭은 소설의 문체가 다분히 시적이라거나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기 때문은 아닙니다. 작가의 시선이 독특하기 때문입니다. 작가만의 독특한 관점이 존재한다는 것이죠. 누구나 쉽게 지나칠 수 있는 사소한 것일지라도 작가의 시선이 닿기만 하면 우리가 알던 것과는 확연히 달라집니다. 작가가 보는 순간 피사체의 본성이 달라진다는 얘기는 아닙니다. 누구나 볼 수는 있지만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것들, 아무나 생각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작가는 단순한 시선만으로 끄집어내는 듯하기에 하는 말입니다. 그런 차이는 아마도 현상에 대한 깊이 있는 관찰과 오랜 숙고에서 오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계속해보겠습니다> 또한 다르지 않습니다. 작가가 의도했든 그렇지 않든 이 책을 읽는 독자는 작가가 발견한 여러 모습의 사랑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리고 우리네 삶의 전부라고도 말할 수 있는 사랑을 우리는 어떻게 시작하고, 열매 맺고, 어떤 식으로 작별해야 하는지 생각하게 됩니다. 소설에 등장하는 주요 인물은 소라, 나나, 나기, 애자, 순자 등으로 단출합니다. 소라와 나나는 자매입니다. 애자는 그들의 엄마이고요. 나기와 순자는 모자지간입니다.

 

소라와 나나의 엄마인 애자는 사랑이 전부인 여자였습니다. 이름처럼 말이지요. 그러나 소라와 나나가 각각 열 살, 아홉 살일 때 전부라고 믿었던 남편이 사고로 죽고 말았습니다. 공장의 톱니바퀴에 끼어 형체도 없이 사라진 것입니다. 사랑을 잃은 애자는 서방 잡아 먹은 년이라는 시댁의 냉대 속에 보상금 한 푼 없이 내쳐집니다. 마땅히 갈 곳이 없었던 애자는 소라와 나나를 데리고 나기와 순자가 사는 집으로 이사합니다. 단순히 월세가 싸다는 이유로 말입니다. 거실을 공유하는 이상한 구조의 셋방에서 두 집의 동거가 시작됩니다. 그러나 사랑을 잃은 애자는 삶의 끈마저 놓아버린 채 고통만 키워갑니다. '사랑뿐이던 애자는 사랑을 잃자 껍질만 남은 묘한 것'으로 변해갔던 것입니다.

 

"애자는 그날 이후로 그다지 죽으려는 기색은 없습니다. 이미 죽었으므로 더는 죽으려 하지 않고 다만 살아가는 데 필요한 온갖 활동을 시시때때로 정지하며 스스로를 망가뜨리고 소라를 망가뜨리고 나나를 망가뜨리고. 나나는 그런 것을 더는 두고 보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꿈 같은 데 나타나서 애자를 데려오라고 해봤자 안되는 거야, 할머니." (p.99)

 

나기의 엄마 순자는 시장에서 과일을 팔아 생활합니다. 나기의 아버지는 겨울철에 사과궤짝을 들다가 뇌출혈로 죽었습니다. 나이보다 늙어보이는 순자는 마음만은 넉넉한 사람입니다. 아이들을 돌보지 않는 애자를 대신해 나기의 도시락과 함께 소라와 나나의 도시락도 챙겨줍니다. 그렇게 성장한 소라와 나나는 이제 애자가 남편이 된 금주씨와 연애를 하던 나이가 되었습니다. 소라는 애자와 같은 전심전력의 사랑을 경계합니다. 반면에 나나는 사랑을 처음부터 경계하지는 않습니다.

 

"사랑에 관해서라면 그 정도의 감정이 적당하다고 나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윽고 괜찮아지는 정도. 헤어지더라도 배신을 당하더라도 어느 한쪽이 불시에 사라지더라도 이윽고 괜찮아, 라고 할 수 있는 정도. 그 정도가 좋습니다." (p.104)

 

삶을 이어가기보다는 고통만 키워가는 애자를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던지 나나는 애자를 요양원에 보내자고 제안합니다. 애자는 그렇게 요양원으로 보내집니다. 어느 날 소라는 단지 추측으로만 알던 나나의 임신을 확인하기 위해 어렵게 말을 꺼냅니다. 직장 동료 모세의 아기를 임신한 나나는 순순히 고백합니다. 소라는 싫다는 기색도 없이 나나를 돌봅니다. 나나가 모세의 부모님을 뵈러 갑니다. 화장실에서 요강을 발견하고 놀랍니다. 모세의 아버지가 사용하는 요강인데 전적으로 어머니에게 맡겨진다는 모세의 말을 듣고 나나는 놀랍니다.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모든 것이 떠맡겨지고 그런 일들이 당연한 의무처럼 받들어지는 현실에 나나는 질색합니다. 나나는 결국 모세와 헤어집니다.

 

애자가 시댁으로부터 내쳐진 후 소라와 나나 역시 친가와 연을 끊고 살아갑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백모로부터 연락이 옵니다. 할머니의 생신을 맞아 친척들끼리 밥을 먹기로 했다며 소라와 나나도 참여하라는 연락이었습니다. 백부네 가족과 할머니, 그리고 소라와 나나가 시외에서 오리고기를 먹고 돌아온 후 소라와 나나는 서로 다툽니다. 결혼도 하지 않고 임신한 나나가 보기 싫었을 텐데 그런 내색 하나 없이 잘해주는 소라를 두고 나나가 '징그럽다'고 한 게 싸움의 발단이었습니다. 서로 데면데면 지내면서 소라는 생각합니다.

 

"나는 내 고통에 관해서만 맹렬하게 생각하고 있었을 뿐, 저기 분명한 고통에 관한 것은 생각해보려고 하지도 않았다는 것을. 그거야말로 나나가 가장 혐오하는 애자와 가장 가까운 마음이라는 것을. 그 옛날, 나기 오라버니가 나나의 뺨을 때려 가르쳐준 것을 완전하게, 잊고 있었다는 것을." (p.142)

 

'삯'이라는 이름의 조그만 맥줏집을 하는 나기는 학창시절 동성의 같은 반 친구를 좋아했습니다. 부모 둘 다 교육자인 집안에서 태어난 '너'는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는 이유로 '너'의 아버지에게 수시로 맞아 멍이 들었고 '너'를 사랑하는 나기는 그런 '너'를 늘 쫓아다녔습니다. '너'가 어울렸던 불량한 아이들에게 맞으면서도 나기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돈을 벌기 위해 일본으로 떠났던 나기는 '너'에게 끊임없이 엽서를 보냅니다. 그러나 답장은 없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엽서의 주소로 '너'가 찾아옵니다. 나기의 집에서 잠시 머무는 동안에 누군가에게 흠씬 맞고 들어온 '너'를 나기가 돌봅니다. 나기는 '너'에게 입맞춤을 합니다. 그리고 나기는 '너'로부터 맞아 이가 부러집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습니다. 애자의 요양원에 갔을 때 나기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오랜 세월 동안 점차로 그리고 조용히 그녀는 자신의 고통을 완성하고 완전해졌다. 껍데기처럼 그녀는 그것을 뒤집어썼다. 그녀에 관해 언제고 다시 이야기할 기회가 있을까.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그녀에게도 그녀의 딸들에게도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어느날 문득 나타난 것처럼 조만간 벽 건너편에서 문득 사라질 것이고 그 넓고 기묘한 공간에 언제나처럼 나는 혼자 남겨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p.188)

 

소설은 화자를 달리하여 각자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소라 -> 나나 -> 나기 -> 나나로 이어지는 이야기에서 나나와 애자의 마지막 대화는 애절합니다.

 

"의미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어. 덧없어. 아무래도 좋을 일과 아무래도 좋을 것. 목숨은 하찮게 중단되게 마련이고 죽고 나면 사람의 일생이란 그뿐, 이라고 그녀는 말하고 나나는 대체로 동의합니다. 인간이란 덧없고 하찮습니다. 하지만 그 때문에 사랑스럽다고 나나는 생각합니다. 그 하찮음으로 어떻게든 살아가고 있으니까. 즐거워하거나 슬퍼하거나 하며, 버텨가고 있으니까." (p.227)

 

우리는 아무튼 '계속하겠습니다'라고 약속하지도, '계속해야만합니다'의 의무도 아닌, 말하자면 주체와 객체 사이의 어중간한 지점에서 살아가는 '덧없고 하찮은' 존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는 모든 것들이 불완전하고 어떤 면에서는 의미도 없는 헛된 것일지라도 우리는 아무튼 계속해봅니다. 더 확인해볼 것도 없이 우리는 모두 필멸의 시간을 향해 나아가지만 그 허망한 결과를 끝내 확인할 수밖에 없는 게 우리네 인생인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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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락가락하는 빗줄기에 더위는 제법 멀어진 느낌입니다. 불과 며칠 전의 일인데 죽을 것 같던 더위가 마치 까마득한 과거의 기억인 양 아득하기만 하니 사람만큼 간사한 종(種)도 다시 또 없을 듯싶습니다. 흩어지는 빗방울들 사이로 끝내 하나의 생각으로 이어지지 않는 올망졸망한 상념들이 나타났다 스러지곤 합니다. 커피잔을 들고 베란다로 나가보았습니다. 가을은 아직 멀었는가, 하릴없는 질문 한 방울이 잔 속으로 떨어집니다. 오지도 않은 가을에 나는 벌써 다가올 겨울 추위를 걱정하고 있습니다. 그러고 보면 나는 잠시도 현재에 머물지 못하는 듯합니다. 떠나지 않는 걱정은 언제나 묵직한 지병처럼 어깨를 짓누릅니다.

 

오늘은 광복절. 과거의 어느 한때는 매년 삼일절과 광복절에 맞춰 태극기를 단 폭주족들이 도심의 밤거리를 장악하곤 했었습니다. 뉴스에서는 광복절 기념식이나 대통령의 기념연설보다 더 크게 보도되곤 했었지요. 그리하여 삼일절이나 광복절이면 으레 폭주족을 차단하기 위한 교통 경찰의 대비책이 화제가 되기도 했었습니다. 이제는 떼를 지어 도심의 밤거리를 활보하던 폭주족의 무리도 역사의 한 페이지 속으로 사라졌나 봅니다.

 

한반도의 안보가 위중한 요즘, 북한과의 연락 채널을 모두 끊었던 전 정권의 어이없는 행태가 작금의 사태를 불러온 게 아닌가, 그래서 우리는 지금 두 손 두 발이 묶인 채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에 이른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곤 합니다. 정치는 일개 감정풀이가 아님을 새삼 실감하는 요즘입니다. 저급한 기분풀이여서도 안 되겠지만 말입니다. 현 정부와 대통령이 냉철한 이성으로 현 시국을 잘 풀어가리라 간절히 기대하게 됩니다.

 

여름 휴가와 휴일 등으로 여유로운 시간이 비교적 많았었는데 의외로 책을 읽은 시간은 형편없이 줄었습니다. 게으름만 늘어나는 요즘입니다. 더위를 핑계삼아서 말이지요. 이번 주 내내 비가 내리려나 봅니다. 어쩌면 나는 '일일부독서'의 핑계를 더위에서 비로 전가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다시 장마가 지려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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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 최고의 책
앤 후드 지음, 권가비 옮김 / 책세상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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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자신도 미처 알지 못하는 사이에 수많은 사건들이 마치 모래알처럼 자기 옆을 스쳐지나간다는 사실을, 그리하여 그 많은 사건들이 결국에는 나의 기억 속에서는 단 한 번도 깨어나지 못한 채 영원한 침묵으로 잠든다는 걸 종종 잊고 지낸다. 나를 스쳐간 많은 일들, 그러나 나의 기억 속에는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그런 일들을 나는 어떻게 추억해야 할까. 아쉬움이란 결국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나를 스쳐갔지만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어떤 것들이 시간 속에서 영원히 자취를 감추는 동안 나는 온전한 작별 인사도 하지 못했는데 말이다. 나는 이따금 소설을 읽는 목적이 바로 거기에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했다. 내가 소설을 읽음으로써 의식에서 사라진 많은 것들을 다시 되살릴 수는 없지만 적어도 나는 내가 살았던 그 시간 동안 부지불식간에 사라져간 많은 일들이 있었다는 사실만큼은 다시금 되새기게 되니까. 마음에 되새기는 횟수만큼 나는 조금씩 겸손해질 수 있으니까.

 

"시간에서의 이탈, 사차원이라는 개념이 지금 자기가 느끼는 것, 겪고 있는 것을 정확히 설명해주는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자 어느덧 어릴 적 침실로 돌아와 있었다. 릴리의 침대가 자기 침대 맞은편에 일년 동안 주인 없이 놓여 있었다. 시트와 얇은 여름용 싸개가 꾸깃꾸깃 뒤집혀 있었다. 마치 어린 그녀가 막 거기서 나왔거나 금방 다시 들어갈 것 같았다. 에이바가 무릎에 <클레어에서 여기까지>를 평쳐놓고 읽으며 그 책이 오로지 자기만을 위해 쓰인 책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정말 그랬던 걸까? 지금도 궁금했다." (p432~p.433)

 

미국의 여류 작가 앤 후드는 그녀의 소설 <내 인생 최고의 책>에서 우리가 흘려보내는 시간의 잔물결을 좀 더 세밀한 시선으로 바라보아야 한다고 말한다. 자신의 의식 속에 가둬두지 못한 많은 일들이 바람처럼 사라져갔음을 상기시키면서 말이다. 책에 등장하는 에이바도 그런 실수와 아픔을 간직한 여인이다. 어린 시절 동생의 죽음으로 평생 죄책감에 시달렸던 그녀는 설상가상 이혼의 고통까지 겪게 됨으로써 마음을 편히 내려놓고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을 모두 잃고 만다. 그때 그녀의 친구 케이트가 구세주처럼 다가온다.

 

미국의 가장 작은 주 로드아일랜드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이 소설은 프로비던스 지역에 위치한 아테나이움 도서관의 아래층 방에서 매달 두 번째 월요일 이루어지는 북클럽 모임에 에이바가 가입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북클럽은 해마다 주제를 달리하여 진행하는데 에이바가 가입했을 때의 주제는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책'이었다. 북클럽의 회원들은 8월과 12월을 제외한 열 달 동안 각자가 선정한 10권의 책을 읽고 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게 된다. 에이바의 오랜 친구이자 사서로서 북클럽 모임을 주재하는 케이트는 회원들이 정한 책의 목록을 기초로 하여 각각의 달에 읽을 책을 선정한다. 12월에 새로 가입한 에이바가 고른 책은 로절린드 아든의 <클레어에서 여기까지>였다. 이 책은 물론 작가가 꾸며낸 가상의 책이지만 말이다. 다른 회원들은 <오만과 편견>, <위대한 개츠비>, <안나 카레니나>, <백 년 동안의 고독>, <제5도살장> 등 다양했다.

 

25년간에 걸친 결혼 생활이 파탄에 이른 후 가입한 북클럽이었기에 에이바는 처음 얼마간은 북클럽에 잘 적응하지 못한다. <오만과 편견>, <위대한 개츠비>의 경우에는 숫제 읽지도 않고 영화를 보는 것으로 대체하려다가 회원들에게 들켜 창피를 당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에이바는 북클럽 멤버들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에 저자가 간담회를 해주기로 했다며 거짓말을 하고 저자와 출판사를 찾기 위한 여정에 돌입한다. 이러는 과정에서 에이바는 북클럽 멤버들의 사정을 하나씩 알아가게 되고, 남편과 아이들에 매여 자신의 정체성을 잃고 살았던 지난 날들을 되돌아보게 된다. 삼십 대 초반의 젊은 남성인 루크와 잠시 연인 관계를 맺기도 하고, 여섯 아이를 키워낸 루스의 부지런함을 부러워하기도 하고, 에이바와 같은 날 들어온 신입 멤버이자 사별한 아내를 그리워하는 존의 마음을 토닥이기도 한다. 책을 매개로 멤버들과의 교류가 잦아짐으로써 에이바는 점차 자신의 삶을 찾아간다.

 

에이바가 어렸을 때 그녀의 엄마 샬럿은 서점을 운영하면서 두 아이를 돌보느라 늘 바빴고, 보험회사 직원이었던 아버지는 무신경한 사람이었다. 엄마 샬럿과 비어트리스 이모는 서점을 같이 운영하며 샬럿이 바쁠 때는 비어트리스가 아이들을 돌보곤 했다. 재주가 많고 활동적이었던 릴리는 그날 높은 나무에 올라갔었고, 에이바는 그 밑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엄마 샬럿이 서점으로 출근하고 아이들을 돌보기 위해 왔던 비어트리스 이모가 설거지를 하는 동안 릴리가 나무에서 떨어졌다. 구급차가 릴리의 시신을 수습했고, 사건을 담당했던 형사 행크 빙엄이 왔고, 릴리의 사고 소식을 들은 샬럿과 아버지 테드가 왔다. 릴리가 나무 위에 올라가 있었을 때 그 누구도 릴리를 돌보지 않았다는 죄책감은 가족 모두에게 큰 상처로 남았다. 비어트리스 이모가 종적을 감추었고 엄마 샬럿의 차가 제임스타운 다리 위에서 추락했다. 유서도 없었고 시신도 발견되지 않았지만 에이바는 엄마가 자살했다고 믿었다. 사실 샬럿과 행크 빙엄은 부적절한 관계에 있었고, 릴리가 나무에서 떨어지던 날도 그들은 함께 있었다.

 

릴리와 엄마를 잃고 슬픔에 빠져 있을 때 누군가로부터 받았던 책이 <클레어에서 여기까지>였다. 에이바는 그 책을 통해 다시 살아갈 용기를 얻었다. 남편 짐을 만났고, 아들 윌과 딸 매기를 낳았다. 누구보다도 성실한 아들 윌과는 다르게 딸 매기는 약물과 남자 문제로 부모의 속을 썩이던 아이였다. 짐과 헤어졌을 때 윌은 아프리카 우간다에서 산악 고릴라 연구를 하고 있었고, 매기는 미술사를 공부하겠다며 피렌체로 유학을 떠나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매기는 학교를 그만두고 독일인 남학생을 따라 파리로 향한다. 파리에서 매기는 마약과 섹스에 취해 걷잡을 수 없이 추락한다. 가족들과의 연락도 끊은 채 죽음 직전까지 이르게 되었던 매기는 결국 경찰에 의해 구조된다. 매기의 상태가 걱정되었던 에이바는 짐에게 연락하였고 파리에 갔던 짐으로부터 무사하다는 소식을 전해듣는다. 그리고 작가 로절린드 아든을 찾는 과정에서 에이바는 자신의 과거와 연결된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제5도살장>을 인생의 책으로 선정했던 존은 이렇게 말한다.

 

"책이라는 게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생각했던 적이 한 번도 없었어요. 그런데 솔직히, 오늘 밤 독서 모임 때문에 이 책을 다시 읽는데 시간 여행이니 뭐니를 생각하니까 기분이 한결 나아지더라고요. 저도 이제 뭔가를 좀 이해했나보죠?" (p.436)

 

인생의 어떤 순간에 벌어진 일이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기억 속에 착 달라붙어 삶의 발걸음을 더디게 하는 경우도 있고, 기억에도 없던 어떤 일이 한참이나 지난 어느 순간에 내 삶 속으로 파고들기도 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의 삶을 스스로 계획하여 자신의 의지에 따라 살아가고 있는 듯하지만 사실 우리는 시간의 경과에 따른 달라진 환경에 그때그때 적응만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삶에서 오는 충격으로 인해 우리가 잠시 방향을 잃고 주어진 환경에 적응하지 못할 때 책은 종종 마음의 안식처가 되기도 한다. 마음을 닫고, 두 눈마저 질끈 감았던 어느 날, 마음을 다잡고 읽었던 책은 내가 다시 사람들을 향해 마음을 열게 하고, 감았던 눈을 뜨게 한다. 그 순간에도 여러 일들이 내 곁을 스쳐지나갔음을 상기시키면서 말이다. 불어오는 바람 속에서 가을의 기미가 느껴지는 것처럼 지난 여름을 스쳐간 많은 일들이 잘게 부서지는 오후, '내 인생 최고의 책'을 생각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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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담장을 따라가다 보면 직선으로 꺾이는 모퉁이에 등나무 정자가 있고 그곳으로부터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 자귀나무가 한 그루가 서 있다. 나는 그곳을 지나칠 때마다 정자와 자귀나무의 조합이 어쩐지 낯설고 영 어색하게만 느껴지곤 한다. 정자 옆에 자귀나무를 심자고 했던 건 도대체 누구의 발상이었을까. 20년도 더 된 오래된 아파트인 이곳으로 내가 이사와 살게 된 건 기껏해야 5년 남짓이니 새내기와 다름없는 내가 그 이전 상황을 알 길은 없지만 그곳에 자귀나무가 심어진 전후 사정이 왠지 궁금해지는 것이다. 아파트가 처음 지어질 때 조경을 담당했던 업자의 손에 우연히 어린 자귀나무 한 그루가 들어왔던 것인지, 건설회사의 담당 소장이 유난히 자귀나무를 좋아하여 그곳에 자귀나무를 심도록 강권했던 것인지, 아니면 내가 이사오기 몇 해 전에 아파트 관리소장의 직권으로 자귀나무가 심어진 것인지...

 

우리 사회에도 이처럼 영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어색한 조합들이 수도 없이 많다. 언론인과 기업인, 검사와 기업인 등 일반인이 생각하기에는 두 그룹이 서로 반목하며 소 닭 보듯 데면데면 지내는 게 당연하다 싶지만 우리나라에서 그들은 상식을 깨고 오랜 세월 비교적 친밀하게 지내왔던 것인지 엊그제 언론에 보도된 장충기 전 삼성 미래전략실 사장에게 보낸 문자 메시지 내용을 보면 이게 도대체 21세기 대한민국의 모습이 맞는지 의심부터 들었다.

 

보도에 따르면 아들의 입사 청탁을 부탁했던 CBS 전 간부, 삼성의 광고액을 늘려달라고 부탁했던 문화일보의 간부, 자신을 사외이사로 뽑아달라고 청탁했던 서울경제의 전 간부, 삼성의 면세점 사업을 도와줄 수 있는 구체적 방법을 알려달라는 매일경제의 한 기자, 이건희 회장의 성매수 사건을 두둔하는 듯한 연합뉴스 관계자, 삼성에 근무하는 사위의 인도 파견을 요청하는 임채진 전 검찰총장 등 문자 메시지 내용과 문자를 보낸 주체자들의 직업은 다양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같이 장 사장과의 친밀함을 내보이는 한편 '사장님의 하해와 같은 배려와 은혜를 간절히 앙망하오며'와 같은 듣기에도 민망한 저자세의 표현도 서슴지 않았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말이다.

 

새로운 정부가 세워진 지 불과 3개월 남짓, 짧다면 짧은 이 기간 동안 우리는 우리 사회 곳곳의 부적절한 관계를 정말 많이도 보아왔다. 이와 같은 일들이 언론에 보도되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그들은 누구누구와 친하다는 게 마치 자신의 위세를 드러내는 한 사례인 듯 어깨에 힘을 주며 말했을지도 모른다. '나 이런 사람이야'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러니 최고권력자인 대통령과 친밀했던 최순실과 알고 지낸다는 건 얼마나 큰 위세였겠는가.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 마치 권력과 위세의 상징인 양 치부되었던 구시대의 풍경이 조금씩 드러나고 있다. 어울리지 않는 조합을 그저 부러운 눈으로만 보아왔던 게 아닌지 나부터 반성해본다. 정자와 자귀나무처럼 부조화는 부조화로 바라보는 게 옳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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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패를 모르는 멋진 문장들 - 원고지를 앞에 둔 당신에게
금정연 지음 / 어크로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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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로부터 '대체로 그렇다.'는 말을 듣게 될 때 나는 조금 슬프다. 그렇지 않은 어떤 것, 세상의 평범에서 슬쩍 비껴선 어느 별종, 다름에 이르기 위한 저만의 과정에 있는 어느 주체, 그의 자존심, 그의 별남을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폄훼하거나 깎아내리는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평범을 거부하는 어느 소수자의 몸짓이 때로는 딱해 보이기도 하지만 다수의 편에 서서 그들 자체를 숫제 지워버리기라도 하려는 듯 '대체로 그렇다.'고 누군가 말해버린다면 그나마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고군분투하던 그들의 노력마저 허사로 만드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 말이다.

 

생계형 서평가 금정연의 글은 왠지 짠하다. 2010년 초봄, 온라인 서점 MD로 일하며 쏟아지는 신간 속에서 책을 읽지도 못한 채 책과 싸우는 날들을 거듭하다 책을 읽고 글을 쓰려고 회사를 그만두었다는 저자. 8년차 프리랜서인 그의 세 번째 서평집 <실패를 모르는 멋진 문장들-원고지를 앞에 둔 당신에게>는 글쓰기 책은 아니다. 전문 서평가로서 첫발을 내디딘 순간부터 지금까지의 기록인 동시에 생계독서가인 그의 눈에 띄었던 34개의 멋진 문장을 그의 삶에 견준 책이다.

 

"나는 서평가, 다른 이들의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우스꽝스러운 직업을 가진 사람이다. 하지만 많은 경우 내 서평은 한 권의 책이 아닌 하나의 문장에서 시작되었다. 혹은 둘. 셋. 어쩌면 다섯. 롤랑 바르트의 말처럼 뭐라도 쓰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문장이거나, 리처드 웬트워스의 말처럼 마음에 들어서 내 것으로 만들고 싶은 문장이거나, 이 책은 그렇게 쓴 글들을 모은 것이다." (p.10)

 

저자가 건져올린 하나의 문장은 베르나르 키리니의 단편 '첫 문장 못 쓰는 남자'나 폴 오스터의 '달의 궁전',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 신화', 장 그르니에의 '섬', 마루야마 겐지의 '인생 따위 엿이나 먹어라', 한승태의 '인간의 조건', 찰스 부코스키의 '글쓰기에 대하여' 등 다양하다. 그러나 이 책을 읽는 독자는 저자가 발견한 멋진 문장에 감탄하기보다는 그 문장에 슬몃 끼어든 저자 자신의 이야기(때로는 푸념)에 더 눈길이 간다. 저자에 대해 그저 '찌질하기는...'이라고 생각하면서 때로는 혀를 끌끌 차기도 하고, 웬지 모를 우월감에 우쭐해지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서른 살이 될 때까지 잡문으로 생계를 유지했고 결국 그것 때문에 인생의 낙오자가 되었지만 거기에는 어떤 낭만적인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고 썼던 폴 오스터의 에세이를 생각할 때 저자 또한 그런 게 아닌가 싶어 저자의 사정을 무작정 딱하게만 여길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문득, 나는 이집트를 탈출하던 히브리 노예들을 생각했다. 그들 앞에 하얗게 쏟아지던 '만나'를 생각했다. 창밖에는 올겨울의 첫 함박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생각했다. 아직도 내겐 도망쳐야 할 거리가 남아 있는 모양이라고. 써야할 서평이, 글들이 좀 더 남은 모양이라고. 나는 비록 신자는 아니었지만 게을렀고, 내가 게으른 한 앞으로도 적지 않은 불편함을 참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게 바로 내가 하는 일이었다." (p.235)

 

글쓰기를 그만두는 작가를 이해할 수 없다며 그건 심장을 파내어 변기에 넣고 똥과 함께 내려버리는 것과 같다면서 자신은 마지막 숨이 넘어갈 때까지 글을 쓰겠다고 다짐했던 일흔 살의 노장 찰스 부코스키의 말을 새삼 인용할 필요도 없이 금정연 또한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라고 추측하게 된다. 사는 모습은 '대체로 그렇다.'의 편에 선 다수의 사람과 흔적이나 자취마저 쉽게 지워지는 소수의 몸짓으로 구성된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

 

"나는 기억한다, 초등학교 시절 이불 속에서 손전등을 켜놓고 읽던 책들을. 나는 기억한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밤새 글을 쓰고 맞던 아침을. 나는 기억한다, 내가 처음으로 받은 원고료를. 그때 나는 평생 이렇게 먹고 살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언제부터 그 생각을 후회하기 시작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기억한다, 이게 다 뭐 하는 짓인지 이해해보려 했던 것을." (p.220)

 

요 며칠, '살인적인 더위'라는 말이 한낱 문학적 수사에 그치는 말이 아님을 실감하였다. 설마 했던 일들이 어느 순간 거리를 좁혀 우리의 뒤통수를 후려치기 전까지 우리는 그 실체조차 파악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어제 차도 없이 외출을 했던 나는 '더위 때문에 정말 죽을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글을 쓴다는 것, 굶는 한이 있어도 글 쓰는 재미를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도 우리가 체감했던 더위와 크게 다르지 않다. 우리가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지 못하면 우리가 들었던 사실은 '설마'이거나 '대체로 그렇다'로 나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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