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다 보면 별것도 아닌 문장에 격하게 공감하는 경우가 더러 있다. 평소에 들어보지 못한 말도 아니고 주변에서 이따금 듣게 되거나 어느 시시한 잡지에서도 흔하게 읽을 수 있는 그런 문장도 책을 읽어나가다가 갑자기 멈춰서서는 '그래, 맞아. 정말 그렇지.' 공감하게 되는 것이다. 마치 첫돌도 지나지 않은 어린애가 처음 보는 눈에 황홀한 듯 빨려드는 것처럼 말이다.

 

씨네 21 이다혜 기자의 여행 에세이 <여기가 아니면 어디라도>를 읽다가 문득 시선이 멈추었던 문장은 이랬다.

"가지고 있는지도 잘 몰랐는데 나중에 다 없어지고 나서야 깨닫는 자산이 있다. 육체적 젊음이나 시간 같은 게 그렇다."

 

어느 정도 나이가 들면 누구나 저절로 알게 되는 사실이지만 그 나이가 되기 전에는 머리가 좋은 사람이 아무리 반복해서 듣는다 해도 가슴에서 절절히 느껴지지 않는 말이기도 하다. 20대의 젊음이 유지되는 시기에는 꼼꼼히 계획하지 않아도 기대했던 것 이상의 많은 일들을 할 수 있지만 나이가 들면 아무리 촘촘한 계획을 짜더라도 그 중 절반 이상을 하기 힘들어진다. 몸과 마음이 따라주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이에 따라 시간의 가치도 달라지게 된다. 시간 내에 여러 가지 일을 할 수 있느냐 없느냐를 따지기 전에 나이가 들면 하나의 일을 하면서도 생각이 어찌나 많아지는지 일의 재미를 느끼기 어렵다. 젊은 시절에는 하나의 일을 할 때면 오롯이 그 일에 집중할 뿐 다른 생각은 없었는데 말이다. 이따금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재미는 일부러 멀리 하고 고민만 가까이 하려드는 게 아닌가 하는 느낌. 작정한 것도 아닌데 습관적으로 그렇게 된다. 검찰이 신청한 국정원 댓글부대의 영장 모두를 기각했던 오모 판사도 그랬던 게 아닌가 싶다. 나중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가늠도 못한 상태에서 자신이 하는 일 자체에 염증을 느낀 나머지 모두 다 기각시켜버린 게 아닌가 하고 말이다. 나는 그를 전혀 알지 못하지만 국민들의 비난을 워낙 많이 받는 것 같아 안쓰러운 마음이 들기도 한다. 그를 대신해 변명하자면 멍 때리다가 그만... 그랬던 게 아닌가 해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시간이 나면 이따금 영화를 보기는 하지만 영화에 대한 리뷰를 쓰는 건 처음이지 싶습니다. 어떤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건 아닙니다. 나에게는 다만, 영화관이라는 공간이 남들과는 조금쯤 다른 어떤 특별한 의미의 공간으로 존재해 왔던 건 확실한 듯합니다. 내가 영화관에 갈 때는 주로 남들 몰래 혼자서 가기 때문입니다. 영화관에 가는 걸 일부러 숨기거나 비밀에 부치려고 했던 건 아닙니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을 뿐이지요. 영화를 본다는 게 무슨 불법행위도 아니고 특별히 감춰야만 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언제부턴가 나는 '영화는 혼자 보러 갈 것' 이렇게 규정처럼 만들고서는 지금껏 꾸준히 지켜왔던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영화관은 마치 현실과는 동떨어진 비밀스러운 공간, 현실로부터 안심하고 달아날 수 있는 나만의 공간으로 자리잡은 느낌입니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동굴'과도 같은 것일 테죠. 말하자면 내가 영화를 관람하는 한 시간 이상은 그 누구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오롯이 나만의 시간인 셈입니다. 현실의 문제를 조용히 생각한다거나 현실에서 받은 스트레스를 풀고 현실의 긴장감을 좀 누그러뜨릴 필요가 있을 때 영화관만 한 공간이 없다는 게 나의 생각입니다. 이런 까닭에 관람할 영화는 비교적 까다롭게 고르는 편입니다. 가급적이면 현실과 거리가 먼 영화를 고르기도 합니다. 현실과 너무 가까운 영화는 내가 영화관에 가는 목적을 상쇄시키기 때문이지요. 어떤 경우에는 따분하기 그지없는 로맨틱 영화를 보기도 합니다. 물론 그런 영화를 보았을 때는 스토리는 전혀 생각나지도 않고 기껏해야 출연한 배우의 얼굴만 겨우 기억할 뿐입니다. 창피한 얘기이지만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꾸벅꾸벅 졸았던 적도 있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군요.

 

그랬던 내가 최승호 PD가 만든 영화 <공범자들>을 보았다는 건 일대 사건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것도 혼자가 아닌 여럿이 우르르 몰려가서 영화를 보았으니 말입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졸거나 딴생각을 할 수도 없었습니다. 이를테면 영화를 본다는 것이 내게는 연장된 현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셈입니다.

 

다들 짐작하시겠지만 이 영화는 이명박, 박근혜 정권을 지나오면서 공영방송인 KBS와 MBC가 어떻게 정권의 나팔수로 전락하게 되었는지 그 실체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영화를 보았던 사람들은 아마도 정기국회를 전면 보이콧하고 있는 자유당 국회의원들을 보면서 그들이 왜 그와 같이 아무런 명분도 없는 일에 당의 사활을 걸게 되었는지 짐작하고도 남을 듯합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조폭들의 '으~~리'를 답습하고 있는 셈이지요. 자신들이 그만큼 써먹었던 사람을 헌신짝 버리 듯 내팽개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겠죠.

 

영화는 쫓고 쫓기는 장면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김장겸, 김재철, 고대영 그리고 이명박 등의 출연자들은 최승호 PD의 인터뷰를 쌩까거나 못 본 척 달아나거나 일방적으로 무시해버립니다. 공영방송을 망친 주범들에 의해 300여 명의 언론인들이 징계나 해고를 당하는 동안 우리나라 언론은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고 공영방송은 그저 있으나 마나 한 존재쯤으로 흐릿해졌던 것입니다. 시사 프로그램이나 기획 탐사 프로그램의 일인자였던 MBC가 어떻게 그리 처참하게 가라앉게 되었는지 국민들은 그 이유를 알 수 없었습니다. 공영방송을 손아귀에 넣으려 햇던 주모자들의 힘이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공영방송 직원들의 목소리는 점점 작아질 수밖에 없었던 현실을 국민들은 알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다만 직원들의 잘못만 크게 부각되었던 것이지요.

 

영화의 장면 장면들은 모두가 다 현실의 일부를 보여주고 있는데 영화를 보는 내내 나는 '어떻게 저런 일이 현실에서 가능했던 걸까?' 무척이나 의심스러웠습니다. 우리는 정말 남의 일처럼 관심이 없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용마 해직 기자가 자신의 몸에 암덩어리를 키우고 있는 동안, 김민식 PD가 일인시위를 하는 동안 우리는 정말 그들과는 다른 공간에서 공범자들의 편에 서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지난 10년은 역대 어느 정권보다 유행어가 많았던 시간이었습니다. 정부의 통치가 아니라 어느 개그 프로그램보다 더 개그 같았던 시간이었기 때문이지요. "여러분, 이거 다 거짓말인 거 아시죠?"라든가 "정말 간절히 원하면 우주가 나서 도와준다"는 말은 지금도 회자되는 유행어입니다. 조폭과 진배없는 자유당 국회의원들은 MBC 사장 김장겸을 구원하기 위해 오늘도 그들이 있어야 할 국회는 비워둔 채 청와대로 고용노동부로 하릴없이 떠돌고 있습니다. 그 와중에 KBS와 MBC의 노조원들은 오늘도 파업을 이어가고 있고 말이죠. 이것이 현실입니다.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힘 빼기의 기술 - 카피라이터 김하나의 유연한 일상
김하나 지음 / 시공사 / 2017년 7월
평점 :
절판


과거 교장 선생님 훈시가 30분씩 이어지던 시대에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일이지만 요즘 세상에 그렇게 했다가는 비난이나 야유를 면키 어려울 것이다. 물론 그 정도로 눈치 없는 사람도 없겠지만 말이다. '나잇살이나 먹었으면 ...'으로 시작하는 낯뜨거운 비난의 말을 듣지 않는 첫째 비결은 뭐니 뭐니 해도 자신의 몸에서 힘을 빼는 게 우선되어야 할 듯싶다. 위엄을 갖추기 위해 목소리에 힘을 주거나 얕잡아 보이지 않으려고 어깨에 힘을 주다간 '꼰대'나 '조폭'으로 오해받기 십상이다.

 

그런 측면에서 '존경'과 '운동'에는 서로 통하는 점이 있는 게 아니가 싶다. 다른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기 위해서는 애먼 곳에 힘을 주지 말아야 하는 것처럼 운동을 잘하기 위해서도 역시 쓸데없는 곳에 힘을 주어서는 안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말처럼 나이가 들수록, 아는 게 많아질수록, 자리가 높아질수록 자신의 몸에서 힘을 빼는 방법을 잘 익혀야만 한다. 결국 좋은 삶이란 완벽한 '힘 빼기 기술'에서 오는 게 아닌가 싶다.

 

"연애도 잘하려고 용을 쓰면 될 일도 안 되는 것이다. 사랑과 매력이란, 전쟁과 권력과는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는 힘이다. 주삿바늘 앞에 초연한 엉덩이처럼, 벌레 못 만지는 장수풍뎅이연구회처럼, 힘을 좀 뺀 것들이 세상의 긴장을 좀 더 유연하게 만든다. 엉덩이 비유는 또 그다지 어울리지 않는 것 같다. 이 글도 힘을 좀 빼고 써보았다." (p.46)

 

카피라이터 김하나가 쓴 <힘 빼기의 기술>은 세상을 그렇게 힘들게 살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자신의 부족한 점을 억지로 메우기 위해 괜히 근엄한 척 목에 힘을 주거나, 자신의 무지를 들키지 않기 위하여 어려운 한자어나 영어를 힘들여 찾아보거나, 자신의 매력을 발산하거나 현재의 관계를 잃지 않기 위하여 무리한 다이어트나 헛된 체력단련에 나서지 않아도 된다고 말한다. 돌이켜보면 '뭘 하려고?'의 의미를 가진 경상도 사투리 '만다꼬?'가 어렸을 적 작가 집안의 가훈으로 더 어울렸던 게 아닐까 하는 회고로 책은 시작된다. 아버지의 지시로 '화목'을 가훈으로 써가기는 했지만 말이다. 작가는 이에 덧붙여 우리가 살아가면서 선택의 기로에 서거나 힘에 부칠 때면 '만다꼬?'라고 스스로에게 물어볼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없는 힘을 쥐어짤 게 아니라 '내가 여기에 힘을 쓸 필요가 있을까?' 스스로에게 다시 한 번 물어보라는 것이다.

 

"배움을 청하지도 않았는데도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뭔가를 가르치려 들 때, 꼰대가 탄생한다. 배움을 청하지 않았는데도 자기가 남자라는 이유로 여자에게 뭔가를 가르쳐주려 할 때, 맨스플레인(mansplain)이 시작된다. 세상에는 하늘 같은 선배만큼이나 하늘 같은 후배도 많은 법이다. 진실로 배우려는 사람은 후배뿐 아니라 말 못하는 아기나 반려동물의 행동에서도 깨달음을 얻는다. 배움은 온갖 방향으로 흐른다. 언제 어디서나 귀 기울이고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p.105)

 

총 2부로 구성된 이 책에는 작가의 가족과 친구 등 개인사를 담은 'Part 1 가까이에서'에 23꼭지의 글이, 남미를 돌아보며 느끼고 경험한 것을 기록한 'Part 2 먼곳에서'에 28꼭지의 글이 실렸다. 짤막짤막한 글들이지만 읽다보면 어느 순간 배시시 웃음이 흐르기도 하고 무겁고 답답했던 마음이 한결 편해지기도 한다. '그래, 맞아. 뭘 위해서 그렇게 안달복달 속을 끓여야 해?' 생각되어지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한 번뿐인 삶인데 실수는 언제나 있게 마련이고 더러 저지른 실수를 애써 부인하고 포장한다고 할지라도 그게 내 삶에서 영원히 지워질 리도 없고 있는 사실이 없는 것으로 바뀔 리도 없지 않은가.

 

"상대가 이러저러하리란 나의 기대로 열렬히 사랑에 빠졌다가 나중에 그가 그런 사람이 아님을 깨닫고 돌아섰다 치자. 그렇다고 그 사랑이, 사랑이 아닌 게 되는 건가? 그건 아닐 테다. 착각이였든 오해였든, 그 순간 설레어하고 짜릿했던 마음만은 진실이리라. 인생의 벅찼던 한 시절은, 사건의 결론과는 별개로 아름다운 것이다." (p.264)

 

어른들은 가끔 이런 말을 한다. '인생을 좀 더 진지하게 살 필요가 있다'고 말이다. 그러나 이렇게 살 건 저렇게 살 건 어차피 한 번뿐인 삶이다. 무책임하게 내팽개치는 듯한 삶이라면 곤란하겠지만 그렇지만 않다면 무슨 상관이랴 싶은 것이다. 북한의 6차 핵실험이 있었던 오늘, 사람들은 온통 뉴스 보도에 시선을 집중했지만 이미 벌어진 일, 생각해보면 달리 방법도 없지 않은가. 남은 휴일을 즐겁게 보내는 일 외에는 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감정과 이성이 몇 대 몇으로 섞이는 게 아니라 격한 감정이 이성을 하나 남김 없이 사그라들게 할 때가 있습니다. 특별한 일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닙니다. 아무일도 없는 평범한 일상에서 한순간 무너지듯 하나의 감정에 휩싸이는 것입니다. 어린애도 아니고 도대체 뭐하는 거야? 하실 분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어쩌겠습니까. 타고난 천성이 그런 걸요.

 

사람이 영원히 살 수만 있다면 아마도 아쉬움이라는 감정은 절대 느껴볼 수 없는 감정이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죽음에 감사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희망의 실체는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모습이지만 희망을 과거의 시간으로 되돌리면 아쉬움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 까닭에 희망의 또 다른 얼굴은 아쉬움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끝이 있다는 건 언제나 아쉬움을 동반합니다.

기대가 있으면 아쉬움이 남습니다.

열정은 아쉬움을 부릅니다.

또는 '~다움'이 당신 곁으로 아쉬움을 불렀을까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바깥은 여름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결 순해진 햇살과 물기가 쏙 빠진 보송보송한 바람이 마치 가을을 알리는 전조처럼 다가왔다. 예년에 비하면 무척이나 이른 변화였다. 인간을 제외한 다른 모든 자연이 디데이를 기다리며 함구하고 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우리 앞에 짜잔 하고 깜짝 이벤트라도 펼치보이려고 했던 것처럼 갑작스럽고 놀라운 변화였다. 사람들은 그런 변화가 싫지 않은 눈치였다. 길었던 여름으로부터 이제야 벗어나게 되었구나 싶었던 게다. 여름을 갈무리하는 사람들에게 지난 여름은 또 어떤 모습으로 기억될지... 누군가에게 여름은 단순한 고통의 시간이었을 테고, 또 다른 누군가에게 여름은 치열한 삶의 흔적이었을 터, '추억은 다르게 적힌다'고 했던 어느 가수의 노랫말처럼 여름은 그렇게 각자의 언어로 기록된다.

 

김애란의 소설집 <바깥은 여름>을 읽었다. 작가가 토해내는 하나하나의 낱말 알갱이들이 가슴 언저리에 탄환처럼 깊이 박힌다. 흩어지지 않는다. 어느 여름날에 내렸던 우박 알갱이들처럼 고통의 형태를 고스란히 간직한 채 바람처럼 저리 쓸려갔다가 다시 또 이리 쓸려오곤 한다. 삶을 어렵게 하는 건 지금 겪고 있는 현실의 가난이나 배고픔 때문이 아니다. 우리에게는 아직 오지 않은 공포가 있고 현실이 힘들수록 동반하여 그 공포는 부풀어오른다. 우리는 그게 두려울 뿐이고, 삶을 힘들게 하는 것 또한 그와 같은 공포 때문이다. 닥친 현실은 아무렇지도 않게 흘러갈 뿐이다.

 

"시간이 나를 가라앉히거나 쓸어 보내지 못할 유속으로, 딱 그만큼의 힘으로 지나가게 놔뒀다. 나는 관광 명소를 찾지 않고, 신문을 보지 않고, 사진을찍지 않았다. 친구를 사귀지 않고, 티브이를 켜지 않고, 운동을 하지 않았다. 한국에서 연락이 오면 문자나 메일로 답했다. 그리고 어느 때는 그마저 하지 않았다." (p.234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중에서)

 

<바깥은 여름>에는 일곱 편의 단편소설이 실려 있다. '입동', '노찬성과 에반', '건너편' '침묵의 미래', '풍경의 쓸모', '가리는 손',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가 그것이다. 소설은 대개 쓸쓸하거나 건조하다. 여름에서 한 뼘쯤 밀려난 듯한 지금의 날씨처럼 각각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뜨거운 삶의 현장에서 힘없이 밀려난 듯한 인상을 받는다. 자신들의 자발적인 선택에 기인하는 것도 아닌데 어쩌다 보니 그런 인생을 살게 된 것이다. '삶의 부조리'라고 간략하게 요약하기에는 울컥 치미는 뭔가를 자제하기 힘들다.

 

"오래전 당신과 팔짱을 끼고 걸을 때, 사람들이 자꾸 쳐다보자 당신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 병원 어르신들을 보면 가끔 그 말이 떠올랐다. 나는 늘 당신의 그런 영민함이랄까 재치에 반했지만 한편으론 당신이 무언가 가뿐하게 요약하고 판정할 때마다 묘한 반발심을 느꼈다. 어느 땐 그게 타인을 가장 쉬운 방식으로 이해하는, 한 개인의 역사와 무게, 맥락과 분투를 생략하는 너무 예쁜 합리성처럼 보여서. 이 답답하고 지루한 소도시에서 나부터가 그 합리성에 꽤 목말라 있으면서 그랬다." (p.200 '가리는 손' 중에서)

 

'입동'에는 어린 아들을 교통사고로 잃고 그 상실감에 어찌할 바 모르는 부부가 등장한다. 복분자의 붉은 물이 튄 벽에 새로 도배를 하는 부부. 찬바람이 부는 입동의 자정 무렵. 날씨에 더해 부부를 더 을씨년스럽게 만드는 것은 아들의 흔적이다. 가구를 치우자 그 밑에서 드러난 아들의 삐뚤빼뚤한 낙서. 부부는 마지막 남은 한 장의 벽지를 마저 붙이지 못한 채 오열한다. '이십 년간 셋방을 부유하던 부부가 힘들게 뿌리 내린 곳, 비로소 정착했다고 안심했던 곳이 허공이었다'고 부부는 한탄한다.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가슴이 저릴 정도로 무고한 얼굴로 잤다. 신기한 건 그렇게 짧은 잠을 청하고도 눈뜨면 그사이 살이 오르고 인상이 변해 있다는 거였다. 아이들은 정말 크는 게 아까울 정도로 빨리 자랐다. 그리고 그런 걸 마주한 때라야 비로소 나는 계절이 하는 일과 시간이 맡은 몫을 알 수 있었다. 3월이 하는 일과 7월이 해낸 일을 알 수 있었다. 5월 또는 9월도 마찬가지였다." (p.18 '입동' 중에서)

 

'풍경의 쓸모'는 또 어떤가. 가족이지만 끈끈함이 사라진 관계를 작가는 '프로'라는 말로 대체한다. 새장가를 든 아버지와 아들인 나. 아버지는 나에게 어떤 행사가 있을 때마다 선물을 보내왔고, 성인이 되어 더이상 축하할 일이 남지 않은 나에게 아버지는 돈을 요구한다. 엄마와 함께 사는 나는 나락으로 떨어진 아버지의 처지를 이해하면서도 스스로 관계를 끊었던 그의 삶을 이해하지 못한다. 허울뿐인 '프로'아버지의 쓸쓸한 말년을 지켜보는 나. 우리도 언젠가 '프로' 아버지, '프로' 엄마, '프로' 아들로 헤어지는 건 아닐까.

 

"그러니 언젠가부터 아버지의 안부가 뜸해졌다면 그건 아버지가 무심해진 탓이 아니라 당신 아들이 웬만한 사회적 의례를 다 마칠 만큼 나이든 까닭이었다. 당신 인생에도 내 삶에도 더이상 박수 치며 축하할 일이 생기지 않는 까닭이었다. 그래서 최근 아버지로부터 몇 년 만에 만나자는 연락이 왔을 때, 나는 그게 당연히 아내의 임신 소식 때문인 줄 알았다." (p.156 '풍경의 쓸모' 중에서)

 

김애란의 소설은 여백을 따라 흥건한 물이 고이는 듯한 느낌이 든다. 서로를 바라보면서 더이상 슬픔이 느껴지지 않는 관계는 이미 생명이 다한 관계라는 걸 작가는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눈물이든, 빗물이든 물이 존재하지 않는 곳에선 생명이 자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시급한 건 어쩌면 슬픔의 복원인지도 모른다. 너를 애틋하게 바라보는 것, 나를 슬픈 눈으로 바라보는 것, 그것이 우리를 엮는 관계의 시작일지도 모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