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일어나보니 추적추적 가을비가 내리고 있었다. '가을비 한 번에 내복 한 벌'이라는 속담도 있다지만 기온은 크게 떨어지지 않은 듯했다. 나는 우산에 듣는 빗소리를 박자로 세며 산을 올랐다. 이따금 바람이 불었고 그 바람을 따라 등산로의 낙엽이 제 몸을 뒤채며 저 멀리 달아났다. 가을은 기억의 출구를 무채색의 우울로 채색하는 계절이다. 낮게 드리운 하늘과 갈잎의 흩어짐이 허무와 한숨으로 치환되는...

 

점심을 먹고 가볍게 산책을 했다. 공원의 은행나무 아래서 떨어진 은행을 주워 담는 노인. 은행이 담긴 바구니에선 고약한 냄새가 났다. 노인은 공원 한켠의 수돗가에서 은행을 씻었다. 장갑을 낀 노인의 팔뚝은 가냘펐다. 허리가 굽은 노인이 폐지 리어카를 힘겹게 끌고 지나가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나는 '사는 게 뭔지...' 생각했었다. 노인은 은행의 과육이 모두 벗겨질 때까지 여러번 치대고 헹구었다. 시간이 더디게 흘렀다.

 

 "내가 그리워했던 것들, 그러니까 분명 있을 거라고 짐작하고 있었던 것들은 사실 모두가 사물의 뒤에 숨겨져 있었던 것일세. 그렇지만 조금만 노력을 하면 그게 무엇인지 이해하게 되고 알게 되어, 마침내 그것들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을 것 같았지. 그런데 나는 밝은 세상으로 끝내 끌어내지 못하는 이 그리운 존재 때문에 마음은 우울하고 허전한 마음으로 떠나게 되네그려."

 

생텍쥐페리의 소설 <남방우편기>에 나오는 문장이다. 생텍쥐페리의 저작은 대개 가을과 어울리는 것들이 많다. 사랑과, 관계와, 삶과, 시간에 대해 말하기 때문이다. 그의 책을 읽는 독자는 자신도 모르게 추억에 빠져들곤 한다. 추억이 아름다운 건 결코 되돌아갈 수 없는 절망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의 기억이란 과거를 향해 우리가 쏘아보낸 시간의 화살이 절망의 벽에 튕겨져 되돌아 온 시간의 파편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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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천재가 된 홍 팀장 - 품격을 키우는 리더의 사람 공부
조윤제 지음 / 다산라이프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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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를 시작하는 자세도, 그 느낌도 사람마다 다 다르지 않을까요? 남들이 보기에는 하찮은 일상이지만 누군가에게는 더없이 소중할 수도 있고, 또 어느 누군가에게는 견딜 수 없는 고통일 수도 있겠지요. 하루에 주어지는 시간은 누구에게나 동일하겠지만 말입니다. 그러나 각자가 체감하는 시간의 경과는 저마다 다르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습니다. 일상이 소중한 사람에게는 시간이 너무나도 빨리 흘러갈 테고 일상이 지겨운 사람에게는 시간의 흐름이 그만큼 더디고 지루한 것일 테지요.

 

새벽 5시 30분에 집에서 나와 근처의 산을 오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나는 그날 그날의 변화를 온몸으로 느끼곤 합니다. 계절의 변화는 마치 한 편의 영화처럼 흘러갑니다. 나는 어둠이 채 걷히지 않은 산길을 걸으며 영속하는 자연의 순환 속에 있는 인간 존재에 대해 이따금 생각하곤 합니다. 기껏해야 백 년도 못 사는 인간의 삶은 그야말로 찰나에 불과한 게 아닌가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런 생각에 이를 때면 나는 무척이나 겸손해집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늘 지금이 전부이고, 우리가 만나는 귀인은 늘 눈앞에 있는 사람이지. 현재에 최선을 다하는 것이 미래를 변화시키는 기본이라고 생각해." (p.224)

 

조윤제의 <논어 천재가 된 홍 팀장>을 꽤나 흥미있게 읽었습니다. 20대의 젊은 시절이라면 결코 읽지 않았을 듯한 책입니다. 젊은 시절의 나는 현란한 수사와 정곡을 찌르는 말에 늘 현혹되곤 했습니다.『논어』와 같이 물에 물 탄 듯 술에 술 탄 듯 밋밋한 문장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습니다. 『논어』는 그야말로 인간의 삶 속에서 건져낸 지혜의 정수이자 삶의 정화라는 걸 미처 몰랐기 때문입니다. 장미의 화려함에만 눈길이 갈 뿐 국화의 소박함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던 것이지요. 그러나 진정한 아름다움과 변하지 않는 진리는 평범함 속에 내재되어 있다는 것을 차츰 깨닫게 되는 요즘, 논어의 문장 하나하나는 음미할수록 향기가 더해집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논어는 '좀 더 나은 인간이 되는 길'을 가르쳐주는 책이야." (p.48)

 

'품격을 키우는 리더의 사람 공부'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은 조직의 초보 리더가 된 사람들을 위해서 쓰였다고 합니다. 저자는 초보 리더에게 필요한 것으로 '사람과 상황에 대한 통찰력과 그것을 얻기 위한 인문학적 상상력'을 꼽고 있습니다.『논어』는 이것을 충족시키기 위한 최적의 책이라는 것이지요.

 

"협조하되 창의적인 개성을 존중하고(화이부동, 和而不同), 공부하는 조직을 만들고(유교무류, 有敎無類), 내면의 실력뿐 아니라 멋진 표현력도 갖추고(문질빈빈, 文質彬彬),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는 중용의 정신으로(과유불급, 過猶不及), 스스로를 성찰하고 상대를 배려하며(극기복례, 克己復禮), 말보다 실천을 앞세워 신뢰를 얻고(눌언민행, 訥言敏行), 곁가지가 아닌 일의 핵심을 아는 능력(본립도생, 本立道生), 바로 조직이 원하는 진정한 리더의 모습이다." (p.9)

 

1부 '변화', 2부 '사람', 3부 '말', 4부 '마음'으로 구성된 이 책은 유통기획팀의 홍 팀장이 좌천이나 다름없는 악성채권관리팀으로 발령이 나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홍 팀장의 아내는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으로 간 상태였습니다. 진퇴양난의 위기에 처한 홍 팀장을 구한 사람은 공 부장이었습니다. 공 부장은 홍 팀장에게『논어』를 권합니다. 자신을 악성채권관리팀으로 보낸 이 부장에 대한 원망과 현실에 대한 좌절감으로 일이 손에 잡히지 않던 홍 팀장도『논어』를 읽고 자신의 생각을 공 부장과 나누면서 서서히 변해갑니다.

 

"큰 위기의 순간에 읽는 책은 운명적 만남과 같다고 생각해. 이미 읽었던 책이라도 아주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거든. 책의 글자가 살아서 튀어나온다고나 할까, 실제로 나는 그런 일을 몇 번이나 경험했어. 심지어 꿈에서 공자와 대화를 나누기도 했으니까 말이야." (p.113)

 

이상한 일이지요. 나이가 들수록 평범한 말에 숨은 깊은 의미를 깨달을 때가 새로운 지식을 얻을 때보다 더 기분이 좋아지니 말입니다. 그것은 대개 이름만 들으면 누구나 알 수 잇는 유명인이 했던 말은 아닙니다. 예컨대 속담이나 격언, 어렸을 적 고향 어르신으로부터 들었던 투박한 말 등 생활 속에서 늘 들어왔던 평범하기 그지없는 말들입니다. 나는 『논어』를 원전으로 읽었던 적은 없습니다. 몇 번 시도를 해본 적은 있습니다. 그러나 쉽게 포기하고 말았지요.

 

"현실과 이상의 차이를 메우는 것이 바로 변화이고, 메울 수 있게 해주는 것이 공부거든. 『논어』에서 가르쳐주는 것 또한 그거야. 평범한 사람도 노력하면 이상적인 인간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의 철학이 바로『논어』야." (P.135)

 

KBS와 MBC의 파업이 이어지고 있는 요즘, 국정원과 전 정권의 언론장악 문건이 속속 발견되고 그것으로 인해 피해를 입었던 여러 문화 예술인, 언론인 등의 증언도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들은 정말 인간으로서 차마 할 수 없는 극한을 넘어선 행위들을 서슴지 않고 저질러왔던 것입니다. 그것이 마치 정의인 양 행동하기도 했지요. 그런 자들의 편에 서서 자신의 이익을 취한 자들도 많았습니다. 몇 달째 월급도 없이 파업을 강행하던 동료들을 배신하고 자신의 사사로운 이익을 위해 기꺼이 악의 편에 섰던 배현진 아나운서나 김성주 아나운서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논어』 '헌문' 편에 나오는 말이지요. '완성된 인간은 어떤 사람'인지 묻는 자로에게 공자가 대답합니다. "見利思義 見危授命" '이익이 될 일을 보면 의로운지를 생각하고, 나라가 위태로운 것을 보면 목숨을 바치라는 뜻이지요. 나도 또한 미숙한 인간에 불과하지만 적어도 사사로운 이익에 눈과 귀를 막는 비열한 인간은 아닌 듯합니다. 금수만도 못한 인간에게 공자의 말은 '쇠귀에 경 읽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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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는 머리가 좋다."

오늘은 이 말을 전제로 이야기를 풀어가보려 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도 안철수 전 의원은 머리가 좋은 듯합니다. 그건 일정 부분 사실일 테고 말이죠. 우리나라 국민 대부분이 인정하는 '엄친아'일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대한민국에서 머리가 좋다는 건 전적으로 칭찬의 말은 아닌 듯합니다. 그보다는 오히려 권모술수에 능하다는 것, 다른 사람에 비해 경쟁의식이 강하다는 것,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려든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안 전 의원이 정치에 입문한 지도 벌써 만 5년이 지났다는 걸 어느 뉴스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만 문재인 대통령과의 후보 단일화를 이루었을 때의 모습은 그가 정말로 머리가 좋다는 걸 보여주었던 단적인 모습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도저히 납득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죠. 학벌이나, 지식, 경제력 등 모든 면에서 문재인 대통령께 뒤질 것이 없다고 생각했던 바 오히려 더 뛰어난 능력을 지닌 자신이 그보다 못한(또는 못하다고 믿었던) 사람에게 대통령 후보직을 넘겨주어야 했던 현실이 도저히 믿기지 않는 듯한 표정이기도 했지요. 그의 입장에서는 자신이 아닌 문재인을 대통령 후보로 밀었던 국민들이 바보로 여겨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민주당과 새정치연합의 합당으로 탄생한 새정치민주연합의 공동대표로 활동할 당시만 하더라도 그는 차기 대통령 후보가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을 듯합니다. 그러나 상황은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지요. 결국 그는 자신을 지지하는(혹은 문재인을 싫어하는) 몇몇 사람들과 함께 민주당을 탈당했지요. 그는 문재인 대통령과의 경쟁에서 자신의 지적 능력으로 가볍게 이길 수 있으리라 자신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머리 좋은 사람들의 착각은 늘 그런 식이니까 말이죠. 머리만 좋고 경쟁의식만 강한 사람들의 특징은 자신의 삶이 자신이 의도한 대로 흘러간다고 믿는 데 있습니다. 자신의 생각을 곧 다가올 미래의 현실로 확신하는 것이지요. 지금도 그는 자신의 그러한 믿음을 버리지 않았기에 정치를 포기할 수 없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개인의 지적능력은 집단지성을 결코 이길 수 없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집단지성이 지지하고 응원하는 건 개인의 지적능력이 아니라 도덕심과 정의이지요. 아무리 완벽한 계획일지라도 허점은 존재하게 마련이고 집단지성의 시각에서는 그러한 허점이 너무도 쉽게 발견되곤 하지요. 한 사람이 아닌 다수의 관찰이기 때문입니다. 문재인 대통령에 대한 허위 사실 공표와 같은 음모도 결국 머리만 좋은 누군가가의 계략에서 비롯된 것일 테제요. 대선 기간만 하더라도 완벽한 계획이라며 자축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 계획은 결국 실패로 귀결되었고 법적 처벌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자유당 정진석 의원이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린 글로 인해 온 나라가 들끓고 있더군요. 제가 생각할 때 정진석 의원도 머리가 좋은 분인 듯합니다. 그의 말인 즉 "권양숙 씨와 아들이 박연차 씨로부터 수백만 달러의 금품 뇌물을 받은 혐의로 검찰 조사를 받은 뒤 부부싸움 끝에 권씨는 가출하고, 그날 밤 혼자 남은 노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이라고 주장했다지요? 그러나 대한민국의 국민 대부분은 노 전 대통령의 죽음이 이명박 전 대통령의 정치보복에 의한 살인이라고 믿고 있다는 사실을 머리만 좋은 정진석 의원이 미처 몰랐다는 것입니다. 머리만 좋은 사람들의 전형적인 특징이지요. 집단지성을 취합하고 통괄하는 리더의 자격이 과연 어떤 것인지 정진석 의원이나 안철수 전 의원도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요. 언젠가는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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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미래 - 편견과 한계가 사라지는 새로운 세상을 준비하라
신미남 지음 / 다산북스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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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 열린 자유한국당의 한 토크 콘서트장에서 했던 홍준표 대표의 말이 구설수에 오른 적이 있습니다. 자유한국당 혁신위원회가 '여성 정책 혁신을 위한 토크 콘서트-한국 정치, 마초에서 여성으로'라는 토크 콘서트를 공개 행사로 진행했는데 이 자리에서 홍준표 대표가 "트랜스젠더는 들어봤는데 젠더폭력은 무슨 뜻이냐?"고 해 빈축을 샀던 것이지요. 대한민국 여성 인권의 현 수준을 단적으로 보여준 사례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신미남 퓨어셀파워 대표가 쓴 <여자의 미래>를 읽으면서 홍준표 대표의 말이 떠올랐던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들의 생각에 여성은 그저 남편을 내조하고 아이들 교육과 집안 살림을 총괄하는 '집사람' 내지는 '안사람'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들도 공개적인 석상에서는 아내에게 쥐어 산다는 둥 꼼짝도 못한다는 둥 엄살을 떨기는 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의식적 차원에서 꺼낸 말일 뿐 실천적 차원과는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학창시절 '양성평등'이 논술이나 토론의 단골 주제로 올라왔던 것처럼 말이지요.

 

6대 종가의 맏며느리이자 두 아이의 엄마로 최고의 자리에까지 오른 저자의 분투가 새삼 대단해 보이는 까닭은 그녀가 지나왔던 그 시절의 사정을 저도 또한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의 의식과 허울뿐인 법조문에서 대한민국 여성의 인권은 크게 나아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실생활에서는 과거 20여년 전, 저자가 첫 직장에 출근하던 1995년 그 때와 비교해 확실히 좋아졌다고 체감하는 사람들은 드물지 않을까 싶습니다. 저자는 이러한 현실, 신입 사원 채용면접에서 희망에 찬 목소리로 자신의 비전을 이야기하던 여성 지원자들이 시간이 흐를수록, 직급이 높아질수록 회사에서 점점 사라지고 있는 현실을 안타까워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대는 바뀌고 있고 제4차 산업혁명의 시대인 21세기에는 여성의 역할이 증가할 수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여성은 그 자체로 21세기에 알맞은 경쟁력을 타고났다. 조직과 업무 환경, 기업 문화도 여성 친화적으로 변하고 있다. 시대가 일하는 여성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다만 아직 많은 여성이 가정과 일 사이에서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 일을 그만두는 선택을 하고 있다. 그 때문에 중요한 시기에 커리어 도약을 이루지 못하고, 결과적으로 시대를 이끌어나갈 여성 리더들이 많이 배출되지 못한 것 같아 아쉽다. 하지만 당장은 어렵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견뎌낸다면 여성이 가진 탁월한 능력에 힘입어 시대가 요구하는 전문성을 금방 갖추게 될 것이다. 그것이 이 시대가 요구하는, 그리고 이 시대에 필요한 여성의 진정한 강점이다." (p.100)

 

저자가 여성이 일을 그만두는 요인 세 가지로 꼽은 것은 '육아', '유리천장', '심리적 장벽'이었습니다. 그에 더하여 대한민국에만 존재하는 세상, '시월드'와 아이들의 치열한 입시전쟁 또한 대한민국에서 '워킹맘'으로 살기 어렵게 만든 요인이 아닐까 싶습니다. 저자는 첫 직장에 입사했던 1995년 겨울에 큰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합니다. 생사를 넘나드는 고비에서 그녀는 간신히 살아남았고 절망보다는 오히려 삶에 대한 강한 궁금증과 마주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생각이 바뀌고 나니 교통사고 이후의 삶은 기대하지 않았던 선물처럼 덤으로 주어진 것 같았다. 나는 삶과 죽음이 찰나적 순간으로 나뉘면서도 마치 하나의 선처럼 자연스럽게 이어진다는 사실을 마음 깊이 이해했다. 그리고 그 선택은 내 몫이 아니며, 죽음이 찾아오는 시간은 언제가 될지 알 수 없다는 사실도 깨달았다. 이 소중한 삶 앞에서 내가 물어야 할 것은 '삶을 헛되이 보내지 않으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는 질문이었다." (p.108)

 

이 책에서 저자는 30여 년간 일하는 엄마로 살면서 저자가 겪었던 경험과 실수,여성들이 꾸준히 경력을 이어나갈 수 있는 실질적인 해결책 등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총 6장으로 구성된 이 책은 제1장 '현실', 제2장 '미래', 제3장 '기회', 제4장 '전문가', 제5장 '리더', 제6장 '삶'이라는 구분으로 여성이 사생활과 일에서 균형을 유지하며 리더이자 전문가가 되는 실질적인 조언을 담았다고 하겠습니다.

 

저자의 이력은 화려합니다. 공학박사, 경영 컨설턴트, 벤처기업 창업가, 대기업 사장이라는 길을 걸어온 그녀였기에 뭐 하나 내세울 게 없는 대한민국의 평범한 워킹맘들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는 책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녀 역시 일과 가정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했던 평범한 직장인이었습니다. 다만 '절대 일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결심이 그녀를 결국 포기하지 않게 하였고, 지금의 위치에까지 올려놓은 게 아닌가 싶습니다.

 

약사 면허가 있는 제 아내도 아이가 태어나자 하던 일을 그만두었습니다. 그것은 어찌 보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는지도 모릅니다. 한두 명의 아이를 낳는 요즘 세태에서 오롯이 아이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은 인생 전체에서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일 뿐이고 그 시간은 다시 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삶을 바라보는 시각과 가치관은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겠지요. 일을 통한 자아실현이 우선인 사람도 있고, 아이가 자라는 모습을 보며 세상을 다 가진 듯 행복해 하는 사람도 있을 테니까 말입니다.

 

"나는 자식의 미래를 위해 일을 그만두는 여성들을 비난하고 싶지 않다. 자녀와 함께하길 선택하는 일 또한 위대한 결정이고, 그 길 또한 내 어머니의 인생처럼 위대하고 고귀하다. 다만 어떤 결정이든 선택은 엄마인 내 몫이고, 그것은 희생이 아니라 내가 선택한 내 인생일 뿐이라는 사실을 기억했으면 한다." (p.254)

 

곧 있으면 추석연휴를 맞이하게 됩니다. 명절 스트레스를 받을까봐 전전긍긍 미리부터 밤잠을 설치는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대한민국의 양성평등이 실현되기 위해서는 남녀의 균등한 가사 분담에 앞서 결혼한 자녀의 완벽한 독립이 우선되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온 귀성과 의무적인 귀성은 엄연히 다른 것이기에 말입니다. 그러므로 <여자의 미래>는 여자보다 남자가 읽어야 할 책이 아닐까 싶습니다. 남성과 여성이 서로 힘을 합쳐 더불어 살기 위해서는 여성의 삶에 대한 남자들의 바른 이해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이래저래 미안해지는 명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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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시간을 특별한 일도 없이 얼쩡거리다 보니 그만 때를 놓치고 말았다. 늦은 점심을 먹기 위해 가까운 곳의 기사식당을 찾았다. 점심시간도 훌쩍 지났는데 식당 안은 여전히 손님들로 북적였다. 왁자한 분위기의 식당 한켠에 앉아 꾸역꾸역 '혼밥'을 먹는 것만큼 처량한 일도 다시 없을 터였다. 대부분의 테이블은 손님들로 채워져 있었고 주방 가까운 곳의 원탁 테이블만 비어 있었다.

 

4인용 원탁을 혼자 차지한다는 게 어쩐지 죄를 짓는 느낌이었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게 혼자 앉아 서둘러 밥을 먹고 있는데 처음 보는 중년 여인 한 분이 맞은 편에 앉아도 되겠냐며 물어왔다. 앉지 말라고도, 앉으라고도 할 수 없어 잠시 우물우물 입만 놀리고 있었는데 그 분은 내 허락 따위는 들을 필요도 없다는 듯 편하게 자리를 잡고 앉았다. 혹시 빈 자리가 없는지 둘러보니 점심시간도 웬만큼 끝나가는지 빈 테이블이 하나둘 늘어나고 있었다. 그렇다고 먹던 밥을 들고 자리를 옮기기도 어색하여 그 자리에서 마저 먹기로 맘을 먹었다. 나는 졸지에 모르는 사람과 얼굴을 마주보며 어색한 점심을 먹는 처지가 되고 말았다.

 

감색 야구모자에 검은 색 선글라스를 쓰고 청바지에 가벼운 티셔츠 차림의 여인은 자리에 앉자마자 모자와 선글라스를 벗어 테이블에 올려 놓았다. 투박한 가죽 시곗줄이 눈에 들어왔다. 선입견일 테지만 평범한 직업의 여성은 아닌 듯 보였다. 나는 고개도 들지 못한 채 밥만 퍼 넣었다. 내가 밥을 다 먹어갈 즈음 앞에 앉은 여인이 다시 내게 물었다. "막걸리가 맛있는데 한 잔 하시죠?" 하기에 나는 술을 못 마신다며 손사래를 쳤다. 그 식당에서는 수정과와 막걸리를 후식 음료로 내놓고 있었는데 손님 일인당 한 잔씩은 공짜로 허용하고 있었다. 누가 지켜보며 일일이 감시하는 건 아니지만 말이다. 그러자 여인은 "그러면 선생님 대신 제가 한 잔 더 마셔도 되겠어요? 딱 한 잔씩만 공짜라는데." 하기에 나는 그러라고 했다. 여인이 막걸리를 가지러 간 사이에 나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식당을 나와 거리를 걷는데 푸석한 가을 햇살이 쏟아졌다. 나는 목필균 시인의 시 한토막 나직하게 읊어본다.

 

9월 -목필균

 

태풍이 쓸고 간 산야에

무너지게 신열이 오른다

 

모래알로 씹히는 바람을 맞으며

쓴 알약 같은 햇살을 삼킨다

 

그래, 이래야 계절이 바뀌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한 계절이 가는데

온몸 열꽃 피는 몸살기가 없을까

 

날마다

짧아지는 해 따라

바삭바삭 하루가 말라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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