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극적으로 그의 말은 옳았다. '사람에 무관심하면 할수록 사람에 대해 더 잘 알 수 있는 법'이라고 그는 주장했었다. 오래 기억할 만큼 가치가 있는 말은 아니라는 듯 그는 다른 사람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허공을 향해 가볍게 던졌다. 그의 말은 커피숍의 희끄무레한 조명 속에서 잠시 멈추는 듯하다가 이내 흩어졌다. "그러므로 나는 정이 많은 사람이 내리는 사람에 대한 평가는 기본적으로 신뢰하지 않아. 편파적이기 때문이지. 성인(聖人)이 아닌 이상 모든 인류를 사랑한다는 건 있을 수 없잖아? 다시 말해 인간이 인간을 평가할 수 없다는 건 자명하지만 시시때때로 듣는 게 사람에 대한 평가이고 보면 신뢰할 만한 나름의 평가 기준 한두 개쯤은 갖고 있어야 하지 않겠어? 그래서 나는 정이 많은 사람의 평가는 믿지 않는다는 거야.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평가는 상대적으로 과하고 그렇지 않은 사람에 대해서는 야박하기 이를 데 없기 때문이지. 공정함이란 있을 수 없어. 사람에 대한 기본적인 애정조차 없는 듯한, 찬바람이 불 정도로 냉정한 사람의 평가는 그나마 믿을 만하다는 게 내 지론이야."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한 탓인지 잠시 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선약이 있었던 나는 이후의 토론을 듣지 못한 채 자리를 떠났다.

 

한 달에 한 번 있는 저녁 모임에 나를 비롯한 다섯 명의 멤버 전원은 기꺼운 마음으로 참석한다. 따로 정한 규칙은 없지만 정치적 주제는 가급적 삼가자는 게 모임 전원이 찬성하는 암묵적인 규칙이었다. 저녁을 함께 먹고 자리를 옮겨 술을 한 잔 하거나 차를 마시기도 하지만 그마저도 귀찮으면 같은 자리에서 오래 앉아 있다가 가볍게 헤어지곤 했다. 나이와 상관없이 바쁜 순서로 먼저 자리를 뜨고 마지막 한 명이 남겨질 때까지 여러 이야기가 오가는 모임 같지 않은 모임. 나는 그 모임에서 가장 나이가 어리다. 그렇다고 발언권이 없는 것은 아니다. 자신의 생각이나 주장을 허심탄회하게 말할 수 있고 다른 의견이나 반대되는 생각이 있으면 기탄없이 말할 수 있다.

 

어제는 배우 김주혁이 세상을 떠났다. 젊다면 젊은 나이인 그의 죽음은 갑작스럽거나 생경한 느낌이었다. 그래서인지 '인생이 별게 아니구나' 하는 헛헛한 느낌도 들었다. '오인회'의 다음달 주제는 '죽음'이 될지도 모르겠다. 뒤돌아보면 삶은 그야말로 한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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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을 먹다 - 제13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김진규 지음 / 문학동네 / 200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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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절망을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는다. 그러므로 희망에 대한 응답보다는 현실의 삶에서 무자비한 절망이 더 많이 존재한다는 건 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죽음이라는 거대한 절망에 앞서 우리는 현실의 이러저러한 작은 절망을 통해 절망과 익숙해져야 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죽음과 마주하는 순간 고맙다거나 감사하다고 외칠 만큼 두 손을 들어 환영할 수는 없을지라도 극복할 수 없는 거대한 절망 앞에서 스스로 담담해질 수 있다는 건 우리가 이미 현실의 삶에서 수많은 절망을 겪었거나 죽음에 버금가는 크나큰 절망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신은 인간으로 하여금 절망에 익숙해지는 법을 가르쳐야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김진규의 소설 <달을 먹다>는 내게 삶의 희망을 말하지 않고 인생의 절망을 보여준 책이다. 영정조 시대를 배경으로 여러 인물들의 기구한 삶을 그렸던 이 소설은 아홉 명의 화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각각 한 번에서 열 번씩 들려준다. 양반 가문 두 집과 약국·역관 등 중인계급 두 집간에 3대에 걸친 얽히고설킨 이야기를 뼈대로 하고 있지만 이면에는 신분과 관습을 벗어난 인간의 사랑과 저항할 수 없는 규범 앞에 허물어지는 인간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장안의 유명한 난봉꾼 류호의 아내는 남편의 호색 때문에 평생 속앓이를 한 때문인지 자신의 딸 묘연만큼은 흠이 없는 집안에 시집을 보내기로 결심한다. 우여곡절 끝에 묘연의 지아비로 낙점된 사람이 좌의정 집안의 아들 김태겸이었다. 지나치게 올곧은 성격의 시아버지와 변덕이 심한 시어머니, 벗들 앞에서만 유쾌한 남편의 틈바구니에서 묘연은 못 본 체 입을 닫기로 결심한다. 그러던 어느 날, 홀아비 최약국에게로 시집갔던 이복동생 하연이 잔뜩 부른 배를 부여잡고 묘연의 시댁으로 찾아와 난이라는 계집아이를 낳는다. 하연은 사실 묘연의 친정 아비와 노비 사이에서 태어난 서얼 출신의 딸이었다. 묘연에게는 이복동생이지만 신분이 달랐던 것이다. 난이는 가난했던 본가에서 나와 다섯 살 무렵부터 묘연의 시댁에서 자라게 된다.

 

묘연의 아들 희우는 어린 난이를 처음 볼 때부터 관심을 두게 되지만 난이는 희우를 볼 때마다 줄곧 울어댔다. 그러던 어느 날 꽃을 꺾으려던 난이가 연못에 빠지고 허우적대던 난이를 희우가 구한다. 그날 이후로 난이는 희우 앞에서 울지 않았고 '오라버니'라 부르며 따르게 된다. 둘의 사랑은 깊어가지만 엄연한 오누이 사이인 그들은 내색하지 않은 채 시간만 흐른다. 감선사에서 은거하던 희우가 건강만 악화되어 돌아온 직후에 한성판부사 집안으로부터 혼담이 들어오고 희우는 묘연의 뜻을 거절하지 못한다. 묘연도 두 사람의 사랑을 모르는 바 아니었다.

 

"진찬연에서의 가락이 뒤늦게 속을 휘고 돌았다. 삼킨 눈물이 오장육부도 모자라 뼈마디까지 헤가르고 있었다. 통증이 일었다. 간신히 살아남아 매달려 있던 한 방울이 결국 얼굴을 둘로 조각냈다. 신음이 뱉어졌다. 하연의 퍼런 얼굴과 희우와 난이, 두 아이들의 뒷모습이 눈앞에서 뿌옇게 번졌다." (p.70)

 

여장부 홍씨의 막내아들 여문은 북촌의 약국 '최국'을 지나다 담장 안에서 들려오는 울음소리에 이끌려 대문을 열고 들어선다. 그곳에는 최약국의 본처 후인이 바람이 나 달아난 후 홀로 남겨진 향이가 있었다. 자신에게 조금의 관심도 없었던 새엄마 하연과 점점 망가져 가는 아버지 최약국을 보면서 향이는 외롭게 자랐고, 태어날 때 다리가 눌리는 바람에 한쪽 다리를 절었던 향이는 집밖을 나다니지도 않았다.여문은 향이에게 무작정 끌렸다. 자신의 마음을 어찌하지 못했던 여문은 어머니 홍씨에게 향이와 결혼하겠노라 말하지만 단박에 거절당한다. 다른 여자와 혼인을 한 여문은 향이 앞에 나타나지 못하고 최국 주위만 맴돈다. 어머니 홍씨가 죽자 여문은 최약국을 살해하여 연못에 빠트린다.병수발을 들던 향이의 수고를 덜어주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최약국이 죽자 향이마저 자살하고 만다. 여문은 일부러 다리를 절면서 향이의 방에 눌러 앉는다. 숫제 그곳에서 살기 시작한 것이다. 그의 형제들이 때리고 말려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수선한 계절을 정리하듯이 예년에 비해 일찍 찾아온 가을이 빠르게 깊어가고 있었다. 가지를 막 떠나온 나뭇잎들이 무거운 공기 속을 팔랑거리며 날다가 떨어졌고, 그럴수록 나무들의 골격은 점점 적나라해졌다. 치밀해진 시간이 나무를 파고들어 자상刺傷을 남겼다. 촘촘하고 선명한 그 흉터는 머지않아 나무의 연륜이 될 것이었다." (p.232)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은 묘연, 태겸, 여문과 향이, 희우와 난이, 후인과 후평, 묘연의 오빠 현각 스님 등으로 많지 않다. 그러나 그들의 운명은 복잡하게 얽힌다.각 인물의 시선으로 다채롭게 서술되는 이 소설은 에피소드와 같은 이야기들이 하나로 모여 긴 이야기를 이룬다. '당대의 온갖 사물, 짐승, 꽃과 약제,기후, 풍습 등을 묘사하는 데 탁월하다. 박물지를 보는 것 같을 때도 있고 타계한 최명희 작가를 연상시킬 때도 있다.'고 했던 박완서 작가의 심사평처럼 소설의 묘사는 탁월했다. 구성상의 몇몇 허점이 보이기는 했지만 말이다.

 

오후가 되자 바람이 강해졌다. 미세먼지의 농도도 덩달아 높아졌는지 목이 칼칼하다. 바람이 흩어질 때마다 가벼운 낙엽이 비처럼 쏟아졌다. 스산한 분위기였다. 계절이 겨울을 향해 가듯 모든 이의 삶은 절망을 향해 나아간다. 절망에 익숙해진다는 건 죽음에 대한 공포를 조금씩 상쇄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바람이 불고 공기도 탁한 휴일 오후, 소설 한 권을 읽은 소감이 엄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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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데, 영화 한 편 씹어먹어 봤니? - 학력도 스펙도 나이도 필요없는 신왕국의 코어소리영어
신왕국 지음 / 다산4.0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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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스티븐스(Michael Stevens)를 아시는지. 서굿(Thurgood)을 제작한 영화감독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Vsauce라는 인기 YouTube 채널을 만든 사람이라고 하면 혹시 아실지도 모르겠군요. 2010년 여름에 만들어진 Vsauce 채널은 원래 비디오 게임 관련 채널로 출발하였으나 세상의 다양한 질문에 대한 답변 형식의 영상을 제작하여 인터넷에 올리면서 선풍적인 인기를 끄는 바람에 지금은 Vsauce, Vsauce2, Vsauce3의 3개 채널을 운영하는 유명 YouTube 채널이 되었죠. 세상(기술, 예술, 과학 등등)에 대한 질문들을 답해주는 Vsauce, 세상의 과학적 발견을 다루는 Vsauce2, 픽션의 세상을 다루는 Vsauce3는 각각 마이클 스티븐스(Michael Stevens), 케빈 리버(Kevin Lieber), 제이크 로퍼(Jake Roper)가 담당하고 있지요. 3개 채널의 구독자가 1500만 명을 상회한다고 하니 정말 놀랍죠? 재작년에는 세계 72억 명을 한 곳에 쌓아올린 CG를 제작하여 온라인 상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습니다.

 

 

최근에 나는 짬이 날 때마다 아들과 함께 Vsauce 영상을 감상하곤 합니다. 다양한 주제의 영상들이 어찌나 재미있던지 반복해서 보아도 질리지 않더군요. 아이들로 하여금 과학에 대한 흥미를 불러일으키게 하는 영상들도 다수 있으니 아이들과 함께 한번쯤 같이 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싶습니다. 예컨대 '무한을 넘어 세는 법(How to Count Past Infinity)'과 같은 영상은 조금 어렵기는 해도 수힉에 대한 새로운 지평을 열어주기도 하죠. 아주 재미있는 방식으로 말입니다.

 

서론이 너무 길었군요. Vsauce에 대한 소개의 글을 쓰려던 게 아닌데 말입니다. 신왕국 저자의 <근데, 영화 한 편 씹어먹어 봤니?>에 대한 리뷰를 쓰기에 앞서 문득 생각이 났을 뿐입니다. 지나가는 말로 짧게 쓰려던 게 조금 길어지고 말았지만.

 

부모님을 따라 이사를 자주 다녔던 저자는 친구를 사귀기도 어려웠고, 전학생을 무시하는 듯한 동급생들의 텃세에 대한 반감으로 복싱을 배웠다고 합니다. 그러나 학교 짱과의 싸움에 휘말린 저자는 결국 고교 자퇴생이 되고 말았고, 그에게 남겨진 것은 프로 복서 자격증뿐이었다고 합니다. 힘들게 생활하시는 부모님을 보면서 공부를 결심했던 저자가 처음 꺼내든 게 영어였다고 합니다. 학교에서 영어를 가장 못하는 아이로 정평이 나 있던 저자는 자신을 무시했던 영어 선생님에 대한 오기로 영어를 선택했다고 합니다.

 

좋다는 영어 학습법을 이것저것 안 해본 게 없었지만 그닥 소득이 없었던 저자를 180도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 놓은 건 다름 아닌 애니메이션 <라푼젤>이었다고 합니다. <라푼젤>의 대사를 들릴 때까지 반복해서 듣고 따라하기를 6개월, 신기하게도 영어가 한국어처럼 들리기 시작했고, 1년 만에 원어민도 인정할 만큼 자유롭게 영어를 말할 수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처음에 저는 하루에 열 시간씩 영화 씹어먹기를 했습니다. 이렇게 매일 하니까 영화 한 편을 다 씹어먹는 데 영화 대사량에 따라 한두 달 정도가 걸리더군요. 하지만 이 훈련이 계속될수록 영화 한 편 씹어먹기를 완성하는 시간도 차츰 줄어들었습니다. 애니메이션 <라푼젤>을 처음 보았을 때는 두 달이 걸렸다가 다음 애니메이션들을 볼 때는 한 달이 좀 안 될 정도로 시간이 줄어들었습니다." (p.131)

 

미국으로 유학을 떠난 저자는 명문 UC버클리에도 합격했다고 합니다. 재학 시절, 듣기와 말하기가 되지 않아 힘들어하는 한국인 유학생들을 도와주다가 주변의 권유로 동영상을 찍어 유튜브에 올렸고, 그것을 계기로 온라인 카페도 개설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제가 영어로부터 받은 가장 큰 선물은 세계적 명문대 학생이 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가 뛰어난 사람들을 만나게 된 것, 바로 이것이 영어가 제게 선사한 가장 큰 선물입니다. 저는 여러분도 그 선물을 받게 되시길 바랍니다. 제가 그랬듯이 영화 씹어먹기를 통해서라면, 여러분도 영어가 주는 선물을 받으실 수 있습니다." (p.232)

 

저자의 영어 학습법은 여러 번 듣고 여러 번 따라하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아기가 자신의 모국어를 배우듯이 말입니다. 지금 중학교 2학년인 제 아들이 그랬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아들은 리틀팍스(www.littlefox.co.kr)에 있는 애니메이션 영화를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보고 또 보았고 눈이 나빠질까 걱정이 되었던 아내는 컴퓨터 모니터 속으로 빠져들 듯한 아들을 뜯어 말리기에 바빴습니다. 면 년 후 나는 아들의 영어 실력이 상당한 수준에 올라섰다는 걸 우연히 알게 되었습니다. 영어로 듣고 말하는 것은 물론 자신의 생각을 영어로 쓰는 것에도 막힘이 없었습니다. 이따금 일부 단어의 철자가 틀리기도 했지만 말입니다. 아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작가(Rick Riordan, Stuart Gibbs, Isaac Asimov)의 책을 원서로 읽곤 합니다. 학창 시절, 무식하게 외우고 단어와 문법에만 치중했던 나의 영어 학습법에 비하면 아들은 정말 너무도 재미있게 영어를 배운 듯합니다. 저자가 그랬던 것처럼 영어로부터 아들이 받은 가장 큰 선물은 지식의 지평을 넓혀준 게 아닌가 싶습니다. 우리는 가끔 컴퓨터 모니터 앞에 나란히 앉아 유튜브 Vsauce 채널의 동영상을 틀어놓고 깔깔대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합니다. 영어가 우리 부자에게 제공한 또 하나의 선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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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가 들수록 날씨와 계절의 변화가 그저 눈과 피부로만 감지되는 피상적인 현상이 아니라 몸뚱어리 전체로 체감하는 실제적인 것으로 변해가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를테면 내가 자연에 스며들거나 자연화되는 느낌인 것이죠. 믈론 사람도 태어날 때부터 자연의 일부라는 걸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젊은 시절에는 대개 그런 사실을 잊고 살지요. 그러다가 한여름의 더위나 한겨울의 추위를 견디는 게 점점 힘에 부침을 느끼는 나이가 되면 계절에 앞서 몸이 먼저 변하게도 되지요. 예컨대 봄과 가을의 건조한 날씨가 시작되기도 전에 몸의 각질이 일거나 겨울 추위에 잠시만 노출되어도 빨갛게 변하는 피부를 보고 있노라면 어릴 적 비가 오기도 전에 무릎 관절을 두드리며 "무릎이 쑤시고 아픈 걸 보니 비가 오려나?" 하시던 할머니 생각이 나곤 합니다. 서서히 단풍이 들듯 내 몸과 마음도 서서히 자연에 동화되다 보면 마침내 생명이 다하는 날 나는 자연과 완전한 동화를 이루겠지요. 그게 자연의 순리가 아닐까 싶습니다.

 

한동안 시와 거리를 둔 채 거들떠도 보지 않았던 나는 요 며칠 전부터 내내 시만 읽고 있습니다. 미세먼지로 하늘이 온통 뿌옇게 변하자 마음마저 무겁게 가라앉았던 것이죠. 기분전환을 하는 데 시만큼 좋은 게 다시 없는 듯합니다. 윤동주 시인의 시 '별 헤는 밤'을 읽고 있노라면 내내 신경이 쓰이는 미세먼지도, 정치권의 진흙탕 싸움도 다 잊은 채 가을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을 듯합니다.

 

별 헤는 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헬 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 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佩), 경(鏡), 옥(玉)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아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랑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니다.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스라이 멀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서

이 많은 별빛이 내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버리었습니다.

 

딴은 밤을 새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외다.

 

떨어진 낙엽의 서걱거림이 이별의 말처럼 안타깝게 들립니다. 일요일 낮부터 찬 바람이 강해져서 다음주 월요일 아침부터는 기온이 뚝 떨어진다지요? 가을도 깊어가고 있습니다. 기분 탓인지 10월도 다 가기 전에 성큼 겨울이 올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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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한 호칭 (마리몬드 리커버 한정판) 문학동네 시인선 18
이은규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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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가을이면 무작정 '시'를 읽어야 한다. 마음에 빨강, 노랑, 갈색으로 단풍이 들 때까지 우리 언어의 묵은 때를 '시'라는 목욕 타올로 한 꺼풀 각질을 벗겨내듯 씻어내면 개벽을 하듯 새로운 세상이 짠 하고 우리 앞에 펼쳐지지 않을까? '시'는 타락한 언어, 생명이 다한 일상 언어의 가장 민감한 겨드랑이를 한참이나 간지른다. 나는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은 채 새로운 언어로 웃는다. '시'가 안내하는 축제의 현장에서 사람들은 가벼운 미소와 침묵으로 소통한다. 외침이 오히려 고요가 되는 세계. 오직 '시'를 읽음으로써 다다를 수 있는 그곳을 향해 가을엔 무작정 '시'를 읽어야 한다.

 

이은규 시인의 시집 <다정한 호칭>은 가을을 위한 '시'로 가득하다. '그때의 바람은 어디에 있나/생의 무늬를 남기지 않은 채/이제는 없는, 당신이라는 바람의 행방을 묻는다.'('바람의 지문' 중에서)는 시인의 고백은 차라리 처연하다. 그리움은 바람을 닮은 투명한 울림이 되고, 울림은 순식간에 '나'와 '현실'을 지운다. 삶이 그저 허허로운 바람이 되고, 회오리의 거센 격랑도 그저 담담하다. '다가올 문장들이 기록된 문장들의 주석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시인은 말한다.

 

제 삶을 오롯이 사는 사람이 태어나서 한번쯤 시인이지 않았던 적이 있을까마는 시인이었던 과거가 아득한 과거의 일인 양 골방 깊숙이 숨겨두었던 그리움의 한 쪽, 어린 시절의 망막. 일상의 켜켜이 쌓인 먼지는 시인이었던 '나'를 잊게 한다. 시인은 '희망이 가장 나중에 죽는다는 말을 의심해보기로 한다'며 '나'의 의지를 묻는다. 사랑이 죽고, 희망이 죽고, '죽음보다 더 나은 것들을 발견할 수 있을까' 의심하게 되는 지금은 가을, 부인할 수 없는 계절.

 

역방향으로 흐르는 책

 

바람은 종종 없을 대답을 휘게 한다

모든 게 순리라는 순간의 뒷말을 믿어, 믿지 마

치장된 위로 앞에서 방향을 잃는 것들

 

방향에 대한 구름의 감각을 오래 부러워한 종족이 있다

 

역방향의 기차는

거꾸로 읽기 시작한 책 속의 문장처럼 낯설게 좋다

독법에 의해 내용이 달라지는

 

왜 당신의 책을 거꾸로 읽고 싶었을까

마지막 장에 찍힌 쉼표

마침표 대신 쉼표 쪽으로 휘어져 있음을 알겠다

끝 문장으로 첫 문장을 되묻는

 

이번 생도 도돌이표의 구름이 되어 오래 흐르겠다

 

기차는 두 방향으로 충실하고

순방향이 먼저 보고 놓아버린 구름들을

역방향의 얼굴이 거둔다

방향 없이 구름은 다만 흐를 뿐

속도에 찢긴 한 점, 꽃의 붉음이 허공에 덧발라진다

 

먼저 부를 수 없는 허공을 가진 꽃처럼

먼저 부를 수 없는 당신의 시는 거꾸로 읽기 알맞다

즐거운 난독에 시달리다 잠시 책을 덮는 오후

바람만이 무릎 위의 문장들을 읽다 간다

 

구름에게 묻는 정착지의 기후는 어떨까

목적지는 다만 정착의 한순간일 뿐

모든 게 순리라는 위로와 결별하기 좋은 오후

 

끝 문장의 쉼표는 첫 문장 마침표의 도돌이표

 

언제 벗겨질지 기약도 없는 미세먼지의 습격에 속수무책으로 널부러졌던 오늘. 희뿌연 먼지 사이로 붉고, 노랗고, 푸르른 계절이 멀찍이서 서성였다. 내가 부르는 '다정한 호칭'. "아, 가을!" 가을에는 무작정 '시'를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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